
운좋게 얻어낸 [브로크백 마운틴] 시사회권을 바꿔치기해서 [오만과 편견]을 봤습니다. 어째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은 원작보다 먼저 영화로 보게 되곤 했는데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해야겠군요....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무척 좋았습니다. 몇 년 전, 제인 오스틴의 또다른 원작을 영화화 한 기네스 펠트로의 [엠마]를 흐뭇하게 봤던 기분이 되살아났다고나 할까요. 과장되지 않은-비록 시대적 양식 자체가 나름의 과장성을 갖고 있지만-연출과 연기들. 그리고 소소한 웃음을 자아내게 만드는 매끈한 앙상블 등등. [엠마]를 보면서 느꼈던 완만하고도 나긋나긋한 즐거움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만과 편견]은 그저 원작을 고스란히 옮겨다가 박아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물론 여기서도 원작에서 보여지는 풍자와 말장난, 실내극적인 상황들이 제인 오스틴 원작의 전작들에서처럼 보여지고 있지만, 이번 [오만과 편견]은 내밀한 감정과 장황스러운 대화, 신경전을 향한 집중보다는 큼직한 감정의 변화에 따라서, 옛영국의 아름다운 풍광들과 더불어 불필요하거나 번잡해질 수 있는 곁가지들을 쳐낸 청춘남녀 이야기의 시원시원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오만과 편견]의 이야기를 내내 휘어잡는 주인공은 그간 일종의 우상적 체현이자 신데렐라적 욕망의 대상으로 상대적인 부각이 두드러졌던 다아시경이 아니라 제인 오스틴 자신도 그리 사랑해 마지 않았다던 수다스러운 집안의 활기 찬 둘째 딸 엘리자베스입니다. 원래 그녀의 성격이 당대의 관습과 법칙들에서 많이 벗어난 캐릭터이긴 하지만 키라 나이틀리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완전히 펄펄 날뛰게 만드는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덜 늙었을 때 찍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는 매력적인 엘리자베스를 잘 체화해내고 있는데, 비록 연기적인 면에서나 무게감에 있어서나 수상권에선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카데미 위원회에서 어째서 그녀를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려놨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엘리자베스역에 잘 어울리고 있습니다.
[오만과 편견]의 두툼함과 풍요로움은 근간의 영화들에서 결여되어 있는 것, 잘 짜여진 감정의 인과가 가진 절묘함과 타당성을 영화적으로 차근차근 설득력 있게 펼쳐보입니다. 이것은 가쉽과 이미지에 쓸려다니는 요즘 세상의 서사들을 별 볼 일 없게 만드는, 인간의 삶과 그에 대한 부드러운 성찰의 서사가 가진 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