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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먼옛날 우리집 근처에는 롯데에서 지은 설악 아파트가 있었고(지금은 롯데캐슬로 재건축됐다) 상가에는 롯데 자이언츠의 어린이야구 팬클럽 사무실 비슷한게 들어서 있었다. 우리집에 하나 있던 야구광은 보무도 당당하게 회원 신청을 했고, 당시부터 이미 소파 귀신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던 내 손에 어거지로 배트와 글러브를 안겼다. 동네 꼬마 야구단이라도 있으면 좋았을테지만 온통 콘크리트와 아파트로 뒤덮인 계획도시에서 바랄 건 아니었기에 꿩대신 닭으로 나를 괴롭힌(그땐 정말 괴로웠었다-_-;) 언니였지만, 11살 때 이미 던지기 40미터로 여자 전교 1위였던 언니와 고작 10미터를 비실비실 굴려대던 지극히 평범한 여자애인 나와의 궁합이 잘 맞을리가 없었고, 공이 오면 눈을 질끈 감아버리던 나에게 언니는 차마 포수 글러브는 씌울 엄두도 못 냈다.......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하다. 언니는 정말 외로웠을 거다.
그래도 곁다리로 주워듣던 박철순, 최동원, 이만수 등등의 이야기는 나도 기억이 생생하다. 남들은 다 귀여운 동물 마스코트인데 홀로 왠지 촌스러웠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로고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작가가 얼마전에도 바나나맨을 소재로한 <지구영웅전설>이라는 소설을 내어 상을 타고 신문에도 실렸을 땐 보지 않다가 이번에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책을 냈을 땐 부랴부랴 짬을 내어 서점으로 간 까닭은. 비록 자발적이진 않았어도 언니의 열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어린이 회원 유니폼을 받아들던 추억의 힘이었으리라.(...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 집에는 OB베어즈의 물건도 꽤 있었다. 언니는 대체 어느 구단 회원이었지?-_-;)
책은 재미있었다. 시종일관 깔깔 웃으며 볼 수 있을 정도로 작가는 문체가 뭔지 알고 있었다. 우리가 만화도 영화도 아닌 소설을 보게 만드는 힘인 문체의 맛깔 말이다. 그러면서도 이 '슈퍼'한 전설을 남기고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의 몰락과 비애에서 끊임없이 달리지 않으면 쓰러지는 외바퀴 자전거인 자본주의 경쟁의 비정함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연결해내는 관찰력 또한 뛰어났다. 5공 시절 '빵과 서커스'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가 도입되었다는 건 들었지만 그것이 바로 본격적인 경쟁과 약육강식의 정글자본주의시대가 한국에도 도래했음을 알리는 서막이었다는 관점은 나로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이었기에 흥미로웠다.
생각해보면 바로 그 때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나와 대히트를 쳤었다. 스포츠 만화계에서 풋풋하고 낭만적인 이상무 시대가 가고 비정하고 어두운 이현세 시대가 열린 것 또한 시대의 요청이자 변화였을 것이다. 이 글의 주인공도 그런 시대의 변화를 '삼미 슈퍼스타즈의 몰락'을 통해 깨닫고 패배하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페달을 밟으며 살아가지만, '죽어라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중산층으로 일컫는 시대'에서는 승자든 패자든 모두 피곤할 뿐이다. 그러고도 주인공은 결국 패퇴하게 된다. 과연 누구를 위한 경쟁이고 누구를 위한 '프로'인 것일까. '프로'의 시대는 과연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난 뒤에야 주인공은 '느리게 사는 삶의 즐거움'에 눈을 돌리게 된다.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고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는' 삼미의 정신, 아마추어의 삶에야말로 인간다운 평화가, 여유로움이 깃들 수 있다는 것을.
'프로' '1류', 이른바 'KS마크가 붙은 사회 엘리트'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얼핏 은희경의 <마이너리그>와도 통하는 데가 있어보인다. 그러나 단지 그런 '2,3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서 그친 <마이너리그>와 달리 이 책은 그 다음 단계, 더 나아간 모습, 어떤 깨달음의 평화까지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좀더 진일보한 면을 보인다. 내내 웃으며 읽었지만 책을 덮으면서는 묵묵히 눈을 들어 저녁 하늘을 쳐다보게 만드는 여운의 미덕이 살아있는 책. 앞으로도 작가의 활동에 주목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