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디타와 리사벳 문지아이들 70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일론 비클란드 그림, 김라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삐삐롱스타킹으로 유명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작가의 <마디타와 리사벳>을 읽었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작가가 판타지의 대모라는 것을 몰랐는데

이 책을 접하는 순간 깜짝 놀랐다. 단편집 <난 뭐든지 할 수 있어>와 <지붕위의 카알손>을 읽으면서 작품 하나하나가 새로웠다. 어쩌면 그리도 아이들의 마음을 잘 그리는지 이 책들을 읽으면 일상의 우울함이라든지 마음에 쌓였던 미움이나 냉소의 찌꺼기들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 같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 형제에 관한 이야기라면 <마디타와 리사벳>은 자매에 관한 이야기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판타지인데 <마디타와 리사벳>은 일상의 사건을 중심으로 열가지 이야기로 꾸며지고 있다. 신문사의 편집장인 아빠와 엄마와 식모인 알바언니와 함께 사는 이들은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이다. 축제에 예쁜 옷을 입고 새로 산 샌들을 신어 제일로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 이웃인 닐손씨네 아줌마가 빚을 갚기 위해 나중에 죽으면 시체를 병원에서 실험용으로 쓰기로 하고 돈을 빌리는 모습을 통해 가난에 속수무책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모습, 머릿니가 있는 반 친구 미아와 친구가 되는 모습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행사를 한다며 특권층 사람들만 불러서 댄스파티를 개최하면서도 식모인 알바의 참석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모습에 부당함을 느끼는 아이들, 그토록 기다리던 크리스마스에 엄마가 출산을 해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엉망이 되지만 동생이 생겨서 알짜배기 선물을 받았다고 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예쁘고도 사랑스럽다.

 


19페이지. 닐손 아저씨의 말 “봄이 다가오니 내 안에서 생기가 느껴지는구나”

 


67페이지. 그런데 이제 아줌마는 무덤조차 못 갖게 될 것이다. 마다타는 절망스러웠다. 비프커틀릿과 자기가 먹은 다른 모든 음식을 무슨 돈으로 샀는지 알게 된 지금, 마음 같아서는 먹은 것을 도로 뱉어 내고 싶었다. 불쌍하고 가여운 닐손 아줌마. 아줌마한테 몸을 팔게 만든 것, 그게 바로 가난의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170페이지. 리사벳의 말 “ 그럼 핥아 먹는다는 말이 왜 있어? 핥아먹으면 안 된다면서?”

 


197페이지. 이들아, 우리가 그네를 태워줄게, 호호야야,

너희가 조용히 숨을 거둘 때까지, 호호야야,

너희 아가들도 같이 태워 줄게, 호호야야,

너희는 죽지만 우리는 죽지 않아, 야호, 야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맛객의 맛있는 인생>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맛객의 맛있는 인생 - 소소한 맛을 따라 세상을 유랑하는
김용철 글 사진 / 청림출판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우리 어머님은 만두와 부침개를 참 좋아하신다. 당뇨때문에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면 "아! 왜 그렇게 몰라. 이건 그냥 음식이 아냐. 추억을 먹는 거라구." 하신다. 어머님은 중국에서 태어나셨다. 그래선지 어린 시절 드셨던 중국 음식에 대한 열망이 있으신 것 같다. 그에 비해 생선회와 초밥을 즐기시는 아버님은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쳐다보지도 않으신다.

음식에 대한 선호도는 다분히 주관적이다. 자라난 환경과도 관련이 깊은 것 같다. 예전에 직장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때 충청도가 고향인 분은 구운 생선말고는 별로 즐기지도 않았고, 갈치로 국을 끓여 먹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그에 비해 전라도가 고향인 나와 다른 분은 갈치국에 호박 송송 썰어 넣은 국이 얼마나 맛있는지를 이야기 했던 것 같다. 칼국수는 또 어떤가. 내 고향에선 칼국수하면 팥죽이라고 불리우는 팥칼국수가 최고다. 조개를 넣은 칼국수는 별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자취를 하면서 식성도 많이 변해가는 것을 느낀다. 정성이 담긴 음식 보다는 그저 끼니를 떼우는 식으로...  그러다가 아이를 가지고 입덧을 하게 되면서 잊고 있었던 어린시절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이 어찌나 먹고 싶던지... 

<맛있는 인생>이라는 책을 보면서 '그리움'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요즘에 쏟아지는 음식에 관한 책은 기름기 좔좔 흐르는 사진들로 도배가 되곤 하는데 그것과는 거리가 있다. 음식에 관한 정보는 과히 홍수의 시대이다. 텔레비젼을 켜면 매일매일 맛집에 관한 정보가 철철철 넘치고, 인터넷만 해도 굳이 맛집이 아니더라도 '나 이런 곳에서 밥먹었다"라는 사진이 자랑처럼 올라와 있다. 사실 먹지도 않고 사진부터 찍어대는 것도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 책은 음식점에 대한 홍보가 아니라 맛에 대해 그리고 그 맛에는 반드시 사람에 대한 이야기와 추억이 빠지질 않는 것 같다.  투박한 느낌의 크라프트지 표지를 보면서 내용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첫 부분에 소개된 '옛집'이라는 국수집에 관한 글을 읽고는 울음이 왈칵 나왔다. 저자님! 왜 이렇게 감성을 건드리시나. 금방이라도 달려가서 국수 한 그릇 시켜먹고 싶은 심정을 참지 못해 바로 국수를 삶았다. 국멸치와 다시마와 표고버섯으로 국물을 만들면서 '옛집'에 누구와 같이 갈 것인지 떠올려도 보았다. 아무래도 가장 친숙한 사람들과 찾고 싶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친정 엄마는 음식에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조미료를 범벅으로 사용하는 바깥의 음식을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한다. 그래선지 이렇게 소박한 음식에도 정성을 담은 모습을 보면 감동하고 만다.

군산의 별미는 아니지만 소개한 무국을 보면서 역시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유난히 약해서 병치레가 잦았던 내게 부모님은 밥을 먹이려고 참 노력을 많이도 하셨다. 없는 형편에 쇠고기를 사다가 무국을 끊여주시곤 했는데 사진을 보니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이 밀려왔다.  

 

  

                                                                        <고향 완도에서 전복 양식을 하고 계신 용궁공주의 부모님>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음식 중에서 내 눈빛을 반짝거리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내가 먹어본 것들, 즉 경험한 것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저자가 전라도 분이라서 그런지 내게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저자를 깨물어주고 싶게 만든 부분은 완도에 관한 부분이었다. 내 고향이 완도다. 부모님은 아직도 고향에서 전복양식을 하시고 계신다.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전복은 바다에서 가두리 양식을 하기 때문에 정말 자연산과 별 차이가 없다. 전복에 굴이 달라붙어 있고, 물고기들이 들어와 살기도 한다. 전복 하나를 키우기 위해선 최소 3년에서 5년의 시간이 걸린다. 원래 종자값이 비싸서 키워서도 오히려 손해를 본 해도 있었다. 태풍이라도 불라치면 새벽에 잠을 이룰 수도 없다. 한순간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정성들여 키운 전복을 자식들이 내려가면 양껏 먹으라고 내어주신다.  내용 중에 나온 톳을 고향에선 나물로 먹는다. 톳나물. 섬이 고향이 아닌 사람들은 톳 구경하기 쉽지 않으리라.   

책을 읽으면서 많은 이야기들이 내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게도 추억어린 음식이 있으며, 그 추억 속에는 소중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어디 사는지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사람은 먹어야 사니까 또 살아갈 날들 앞에 수많은 추억을 만들어 가겠지 하는 생각들...  

음식이 사람과의 만남이고, 정(情)이구나. 그리고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이 책을 나만 알고 있는 것은 너무나 아까워서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들소의 꿈 낮은산 너른들 1
김남중 지음, 오승민 그림 / 낮은산 / 200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품에서 황금뿔은 이라크의 후세인을, 소맥국은 미국을, 재건대는 한국의 이라크 또는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상징하고 있다.  또 들소는 아랍의 민초들을, 황금은 중동의 석유를 상징하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전쟁이라는 파괴와 살육은 그 누구보다도 힘없는 사람들, 그 사회의 민초들을 가장 힘들게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한편 문학에서의 상징기법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상징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보다 선명하고 간결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또는 그 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주제나 소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또는 풍자하기 위해서 사용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의 상징의 결과는 보다 더 소재나 주제들을 복잡하고 난해하게 해주는 것 같다.

아랍의 민초들을 동물인 들소로 상징하면서, 그 상대방인 미국과 파병국은 인간국으로 상징하는 것이 균형잡인 적절한 상징인지, 아니면 아랍의 문화와 국민들을 변방으로 여기는 작가의 1세계(서방 및 서방종속국으로서의 한국)중심주의적 사고방식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그 외에도 아메리카 인디언의 운명, 큰나라 사대주의, 한국에서의 중동파병, 인간의 자연환경에 대한 파괴 등의 여러 가지 장면들이 복잡하게 상징으로 끌여들여지고 있는데,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버겁고 복잡하게 느껴진다. 

전쟁에 대한, 부질없는 탐욕에 대한 작가의 비판의식은 수긍이 되고 이해가 되지만,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깨진뿔의 선택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힘들다. 결국 전쟁의 참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어디 멀리 피난 가버리고 말겠다는 것인데, 그것의 정당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 대안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황금뿔이나 서리갈기에게 압제를 당하고, 소맥국 인간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있는 열등 소깨진뿔의 입장에서는 어느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인가? 깨진뿔은 자신과 같은 입장의 열등소들을 규합하여 들소 무리 안에서는 반차별 운동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서리갈기와 같은 반침략 독립지향적인 세력들까지 규합하여 어쩔 수 없이 소맥국에 대항하는 입장을 견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또한 역사적으로 끊임없던 외세의 침략에 대항해 왔던 평화를 사랑하고 자주독립을 지향했던 우리 민족의 얼과 정신이기도 하지 않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가슴에 해마가 산다 보름달문고 23
김려령 지음, 노석미 그림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품에서 나타나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매스컴에서 비춰지고 있는 입양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되며, 할머니의 모습은 입양에 대한 직설적인 일반인들의 반응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아버지의 모습은 자신의 문제로 인하여 친자식을 가질 수 없는 아버지로서의 어쩔 수 없는 태도라고 생각되지만, 만약 여자쪽의 문제로 인하여 입양을 하게 된 가정에서였다면 이와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상징하는 가슴수술자국을 해마로 표현한 것이라든지, 하늘이가 만들어나가는 하늘마을이라든지, ‘흐르지않는강’이나 ‘비오는하늘’ 등의 하늘이와 한강이의 인터넷 아이디 등은 작가의 상징 기법이 매우 세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전반부에서 날카롭게 제기되었던 하늘이를(입양아)를 애완아동으로 취급하는 모든 문제들은 결국 감수성이 예민하고 속이 좁았던 하늘이의 오해였고, 양부모들이 비록 감정표현에서 지엽적으로 서투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하늘이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다는 식으로 너무 쉽게 결말을 지어버린 것은 다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풀어놓아진 모든 문제들이 하나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늘이는 다시 양부모의 가족의 테두리 안으로 귀화하는 것으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이 보다 여운을 깊이 있게 남기며 결속되어지기 위해서는, 하늘이는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대들은 날밤에 결국 가슴에 있는 해마를 타고 ‘하늘마을’로 영영 떠나버리는 것으로 하고, 어머니는 꿈속에서 ‘하늘마을’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하늘이가 곱게 가꾼 꽃송이로부터 하늘이의 동생을 받아 안고 내려와 지금까지의 이중적인 모습을 반성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한 번 하늘이의 동생을 입양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구성을 마치는 것이 훨씬 더 좋았을 것으로 생각된다.(남편의 의견)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구절은, ‘아이는 배로 낳는 것도 아니고, 가슴으로 낳는 것도 아니고, 어여쁜 꽃에서 아기를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부모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하였으면 좋겠다’는 하늘이의 독백이었다.


가슴으로 낳느냐, 배로 낳느냐 하는 것은 사실 부모의 입장에서의 중대사일 뿐, 아이의 입장에서는 하등의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이에게는 자신이 꽃봉오리에서 나온 것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과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다.

그 모든 조건과 부모의 욕심과 허영을 지워버리고, 오직 한 아이가 자주적이며 창조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꾸며나갈 수 있도록 모든 정성을 다해서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것, 그래서 존엄 있는 한 사람의 사회적 존재로 키워내는 것이 부모의 도리이자 의무이고 행복과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운하의 소녀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
티에리 르냉 지음, 조현실 옮김 / 비룡소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쥐를 잡자>와 비교해 보았을 때, 운하의 소녀는 많은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성폭력의 희생자가 여학생이라는 점, 주인공의 어머니는 신경질적이고 딸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그런 와중에 담임선생님이라는 매개자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혹시 쥐를 잡자의 원조가 운하의 소녀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그러나 운하의 소녀에서는 쥐를 잡자에서는 보여주지 못하는 몇 가지 진보(?)적인 면들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우선 성폭력의 가해자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며, 그 가해자는 응분의 징벌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폭력의 희생자인 주인공 역시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육체적 쾌략에 젖어들어가고 있었음을 숨김없이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작품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네가 비록 그러했을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너의 그러한 점을 이용할 권리는 없었어’라며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운하의 소녀는, 남성의 모습이 베일에 가려진채 낙태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만으로 몰아가고 있는 쥐를 잡자 보다는, 교양서적으로서 청소년들에게 보다 더 선뜻 권장할만한 책이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운하의 소녀에서도 독자들이 계속해서 해답을 찾아나가야 할 문제들도 남아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미 육체적 쾌락이 무엇인지를 알아버리게 된 주인공에게 우리들(어른들)은 무엇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동안만 육체적 쾌락을 어떻게 해서든지 억누르고 있어야만 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대안이 있을 것인가?
  만약 작품 속의 성폭력이 어른인 미술선생이 아니라 동급생이거나 후배 남학생으로부터 빚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그 남학생에게는 어떤 처벌과 가르침을 주어야 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 일방적 성폭력이 아닌, 두 청소년들의 공모에 의한 일탈행위 였다면 그때 또한 우리들(어른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