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Review /『검은 꽃』, 영하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 과거

 

 

속도감 있고 수식이 절제된 듯한(그러나 실은 많은 수식 어구를 붙이는) 건조한 문체, 그리고 냉랑한 시선. 내가 작가 김영하 대해 느끼는 것들이다. 1997 즈음 해서『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발칙한 제목의 소설로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한 작가이다. 약간은 불편한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사람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혼자 했었다. 어쨌든 이런 김영하 역사소설 썼다. Oops! 김영하 역사소설이라니-!

 

소설은 부모를 잃고 보부상의 손에 이끌려 자라다가 도망친 김이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이정은 돈을 벌기 위해 멕시코에 가려 한다. 그래서 제물포항에서 기다리고 있다. 제물포항에는 이정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 고아, 걸인, 박수무당, 카톨릭 신부, 농민, 황족, 양반, 내시 각양 각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정처럼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신세계를 찾아 멕시코로 떠나는 영국 기선을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일포드 호에 몸을 싣게 되고 사람들은 뒤섞이며 부딪치기 시작한다. 좁고 더러운 화물칸에서 사람과 오물이 뒤엉켜 항해를 한다. 몰락한 황족인 이종도 그의 가족들은 자신들은 양반이라며 특별한 대우를 원하지만 일포드에서 이미 계층과 신분 따위는 취급되지 않았다. 일포드 호에 몸을 실은 사람들은 그저 없고 없는 나라의 백성들일 이었다. 그러나 이종도 양반으로서의 체면과 품위를 잃지 않으려 무던히도 노력한다. 우스울 정도로. 이런 아둔한 태도는 두고두고 가족들에게 짐이 된다. 무능한 주제에 권위를 찾는 현대의 어리석은 정치인들 같다. 제대로 정책도 하나 논하지 못하면서 그들의 특권은 찾아 먹으려는. 국민들에게 짐짝 같은 존재가 되는 것도 비슷하다. 후후.

 

노루피 냄새를 풍기며 사내들의 정신을 어지럽히는(의도된 것은 아니다) 이종도의 연수는 이정과 눈이 맞고 끝내는 정을 통하기까지에 이른다. 황족과 고아의 결합. 왠지 현대의 드라마가 생각나지 않는가?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가진 머리가 여성들을 생산해내는 징그러운 테레비 드라마. 물론 여기서는 몰락한 여성 황족과 제법 처세에 능한(게이 요리사를 적당히 요리할 정도로) 고아 남성이고 서로의 결합으로 인한 어떠한 득도 없는 것이 부귀영화를 누리곤 하는 테레비의 주인공들과는 틀리지만 말이다. 어쨌든 작가는 이렇게 상황을 역전시킴으로써, 은밀한 일종의 쾌감을 느낀 것은 아닐까. 아님 말고-

 

박수무당과 파계신부는 도둑과 함께 팀을 이뤄 살아나가는데 무당과 신부라는 절묘한 조화부터가 심상치 않다. 그리고 도둑은 밤마다 귀신이 따라다니며, 가위에 눌린다. 박수는 굿을 하고 신부는 도둑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도둑은 배운 교리를 가지고 지배자의 개노릇을 하며 사람들을 등쳐먹고 산다. 박수와 신부를 엮은 의도는 무엇일까. 이들은 서로 다른 신을 모시지만 서로 비난하거나 헐뜯지 않는다. 그저 인정할 뿐이다.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아니 아주 오래 역사부터 살피자면 유럽은 종교들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이고 우리나라에도 여러 종교들이 들어오면서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혀 끊임없이 사소한 분쟁들에 시달리고 있다. 함께 손잡고 걸어가지는 못해도 싸우지는 말잔 말이다, 라는 의미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배운 교리를 가지고 사람들 등쳐먹고 사는 도둑은 종교를 이용한 범죄가 난무하는 현재의 다른 얼굴이 아닌가 싶다.

 

계속 뭔가를 이루려고 하지만 번번히 실패하는 조장윤을 비롯한 일행들은 탁상공론만 일삼는 현재의 비겁한 지식인에 비유된다. 조장윤은 마야에 작은 국가를 세울 계획도 하지만 수월치 않자 도망치고 만다. 현대는 조장윤처럼 도망치기를 일삼는 비겁한 지식인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요모양 요꼴인거다.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무언가 변화라도 일어날 터인데 모두들 알고는 있으면서 자기 추스리느라 여념이 없다.

 

소설『검은 꽃』에는 이들 외에도 영국 선원들, 농장주들, 멕시코 혁명자들을 비롯한 여러 군상들이 등장하고 한국인들의 에네켄 농장에서의 굴욕적인 삶과 부당한 대우, 멕시코 혁명과도 같은 역사적인 사건도 등장하지만 그런 것들에는 그닥 관심이 가질 않는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생활들은 과거 봉건체제에서 충분히 대물림 되어왔던 것들이고 멕시코 혁명은 모르기 때문에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다양한 한인들의 특징과 신분 속에서 나타나는 현대인과의 닮음꼴들을 중심으로 읽게 되었다. 역시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고 과거이든 현재이든 미래든 간에 같은 유형의 인간들이 각기 다르게 혹은 비슷하게 사는 모양이다. 소설은 역사소설을 가장한 인간스케치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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