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 부처님이 가르친 것
월폴라 라훌라 지음, 이승훈 옮김 / 경서원 / 199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만나게 된 시절 인연에 대하여 먼저 감사를 한다.


한 사오년 간 책을 멀리한 적이 있었다. 대형서점에 가면 꼭 무슨 쓰레기장에 들어선 기분이 들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이 마무리되는 첫 계기는 동양고전을 접하면서였다. 다산 선생의 글이었던가, 두보의 시였던가, 아무튼 나는 동양고전을 띄엄띄엄 읽기 시작하면서 내 안에 동양정신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서양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이 동양고전에 이르를 경우, 그 거치는 길목이 다들 다르겠지만, 나는 하이데거와 니체 덕분이었다. 그들이 나를 동양으로 인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을 공부하면서 나는 존재, 현존, 실체, 근거, 논리, 객관성, 가치, 도덕, 영원 등등, 그 허깨비같은 개념들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서양인문학은 내게 서구가 만들어놓은 철학적 개념들을 벗어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 이러한 부류의 경험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희랍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코스 카잔차키스 역시 베르그송과 니체를 통하여 서양인문학과 안녕을 고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베르그송 밑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가 어떻게 인생에서 “먼지 한 번 피워보려고” 가진 돈을 몽땅 광산개발에 쏟아부었겠는가. 그 소설에서 조르바의 거침없는 인생과 더불어 붓다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서양인문학이 내놓은 개념들에 대한 최대의 항거인 셈이다. 그 항거의 일환으로 카잔차키스는 일본과 중국을 여행하기도 하였으나, 그 여행기를 미루어 보건대 끝내 동양적인 지혜에는 도달하지 못한 듯 보인다.

동양고전이 손에 잡히기 시작한 이제,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할까? 정말 막연했다. 다행히 답사모임에 참가할 기회를 얻어 우리문화 유적지를 답사하기 시작하면서 그와 연관된 글들을 조금씩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 안에 감추어져 있던 역량의 폭발이었다. 두서 없이 이책 저책 읽으면서 불교쪽도 넘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간헐적이긴 하지만 끊임없는 그 넘보기의 연속 끝에 나는 이 책을 만났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이 번역서의 원작은 서양에서 불교소개의 기준적인 저서로 통용되는 «What the Buddha Taught»이다. 많은 불자들과 불교학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스리랑카의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 스님께서 빨리어 경전들을 토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서양인들에게 명석하게 풀이하여 소개한 책. 너나없이 이 책을 높이 평가하고 있으므로 이 책의 가치에 대해서는 달리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책을 고른다는 것은 음반을 고르는 것과도 같아, 누군가에게도 좋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아니 좋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나의 허름한 정신적 이력을 간단하게나마 밝혔던 것이다. 정신적 이력이 다르면 동일한 책에 대한 평가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약간의 내용 소개를 하고자 한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 . . »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사성제, 연기, 무아無我를 핵심적으로 다룬다. 팔정도는 사성제의 마지막 항목이므로 별도로 분리하지 않고 사성제에 포함하여 서술하고 있다. 사성제와 연기, 무아를 서술한 뒤에는 명상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관하여 약술한 다음, 본문의 설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전 대목들을 추려서 싣고 있다. 이 <경전 추림>(Selected Texts)은 라훌라 스님이 빨리어에서 영어로 직접 추려 옮긴 것이다. (역자는 이 책의 내용 중에서 라훌라의 무아론에 감명을 받아서였는지, 역서의 제목을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부처님이 가르친 것’ 등으로 하지 않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 . . »로 했나 보다. 라훌라의 무아론은 나에게도 역시 깊은 감명을 주었다.)

라훌라 스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면, 고, 업, 윤회, 열반, 법 등은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것들이지만 대표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러한 오해들을 하나하나 풀어주는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그동안 불교서적에서 무수히 접했던 용어들이 어느새 쉽게 이해된다. 더불어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인정되는 거의 모든 것, “상좌부와 대승불교 모두가 사상적 체계의 근본으로 받아들이는 주제”, 즉 사성제, 팔정도, 오온, 업, 연기, 무아, 염처 등등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온다.

스님은 프랑스에서 “노란색 가사를 걸치고, […] 서양의 대기를 호흡하며 어쩌면 낡고 잘못되었는지도 모를 우리[서구] 방식의 시각으로 자기 종교에 대한 보편적 성찰을 모색”하며 8년을 생활한 후, 이 책에다 “가장 오래된 경전에 보이는 불교 교리의 기초 원리가 모든 이에게 전해지도록, 명석하게 풀이”(Paul Demieville, College de France 교수)하였다. 그래서 서구적 개념체계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다름아닌 현대 교육을 이수한 우리들)에게는 신선함을 넘어 충격을 주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철학적 개념들을 머리속에서 줄기차게 털어냈던 나는, 내가 불교에 접근하면서 기대했던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라훌라 스님의 책에서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었다. 오, 이 놀라움이여!

국내에서 «What the Buddha Taught»의 번역본은 이 책 이승훈 역본(1995년 번역) 말고도 또 있다. 비교적 근래에 번역된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전재성 역본(2002년 번역)이다. 전재성 역본은 약간 심하게 말해서 “라훌라 스님의 책이 아니다”. 전재성 역본으로 읽다보면 나름대로 잘 읽히다가도 팔정도 대목에서 한없이 늘어질 것이다. 역자가 자신의 글을 수십 면 삽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본 제목조차도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이다. 물론 원저에 역자의 글을 삽입하면서 별도의 표기를 해 주었다면 참을 만하겠지만, 그런 표기도 해놓지 않았다. 팔정도 대목 뿐만 아니라 “일일이 거론하기가 무척 어려워 밝힐 수가 없”을 정도로 곳곳에서 역자가 라훌라 스님의 글을 보완했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저자의 글이고 어디까지가 역자의 글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더구나 전재성 역본의 역어들은 내가 서양인문학을 거치면서 머리속에서 털어내었던 개념들을 대다수 포함하고 있어서 꼭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 든다. «What the Buddha Taught»에 어엿하게 실려 있는 Selected Texts(pp.91~138)를 아예 빠뜨린 것도 의외다. (원저는 Selected Texts를 부록이 아니라 본문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이 역본은 라훌라 스님의 책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거지 성자» 등을 읽으면서 그분의 인생에 대하여 숙연한 마음을 갖고 있는 독자로서, 이런 비평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이승훈 역본의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 . . »는 탁월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빛나는 번역서를 만났다. 책의 주요 개념들을 우리말로 옮기려는 노력과 그 결과가 감동적이거니와, 한자, 빨리어 등을 일일이 병기해 두었다. 그리고 인용되는 각 경전들의 이름을 빨리어와 한문으로 표기해 두었으며, 색인까지 두었다. 역주 또한 대단한 정성이 들어가 있다. 가령, 월폴라 라훌라 스님이 objective라는 낱말을 쓸 때 이는 '如實하다'는 불교적 언어를 지칭한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서양언어의 관계대명사를 똑똑 끊어 간결 정확한 한글 문체로 번역한 점도 높이 살 만하다. ‘학문적’으로 옮겨야 할 scientific을 늘 ‘과학적’으로 옮긴다거나, ‘개신교적’으로 옮겨야 할 Evangelic을 ‘전도주의적’ 등으로 옮긴, 그야말로 사소한 실수들을 제외하고는 완결판이라고 보고 싶다. 물론, 전재성 역본이 나은 점도 있다. 전재성 역본은 라훌라 스님의 빨리어 텍스트 출처를 근간된 PTS 판본의 출처로 바꾸는 수고를 하였으며, 일일이 주석 형식으로 빨리어 원문을 싣고 있다. 이 하나의 장점을 제외하고는 이승훈 역본의 우위가 현저하다.

그런데도, 저작도 뛰어나고 번역도 뛰어난 이 책,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 . . »가 묻혀 있다. 인터넷서점에서는 책 표지 이미지도 없고, 역자 이름도 없고, 아무런 설명도 없고, 아무런 평도 없고, 거의 팔리지도 않은 채, 땅에 묻힌 보석처럼 묻혀 있다. 이렇게 조용히 묻혀 있는 책, 조용히 묻혀 사는 분들 때문에 커다란 위안을 받기도 하지만, 마음이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다. 경서원이라는 출판사와 역자에게 존경을 표한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6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누아 2005-10-23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를 읽고 [참선일기]를 읽기도 했는데 이번에도 좋은 책을 소개해 주시는군요. 달라이라마의 [삶의 네 가지 진리]라는 책과 맥락이 비슷해 보이는데...천천히 주문해서 읽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순수자아 2006-08-1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세한 평가가 책 선정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보명 2006-09-27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리뷰를 써주시니 책 선택에 큰 도움을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반조 2006-09-28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사말을 남겨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

마늘짱아지 2006-10-3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하늘눈 2009-04-09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침반과 같이 도움이 되는 서평이군요

쌍무지개 2010-08-10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을 발견하기 위해 님의 블로그/서재를 자주 찾을 것 같습니다.
앞의 분들 말씀 반복하고 싶군요. 감사합니다.

takio77 2024-03-06 0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불교가 방대하여 이런 평이 초심자인 저로서는 너무나 반갑습니다.
 
아함경 알기 쉬운 불교 (현암사)
마스타니 후미오 지음, 이원섭 옮김 / 현암사 / 200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본학자들의 글은 되도록 피하고 싶은 마음이 내게 있었나 보다. 내가 이 책을 택한 것은 순전히 <아함경>을 읽고 싶은 마음의 연장선이었다. 아함경을 읽게 된 계기는 작녁 여름에 어느 절집에서 우연히 만난 스님께서 <아함경>과 <금강경>을 읽어보라고 권해서였다. 그저 혼자서 불교를 배우려고 이책 저책 뒤적이며 <벽암록>이니 <무문관>이니 하는 수준에 맞지도 않는 책들, 이제 보면 참으로 불요불급했던 책들을 읽고 있었던 나는, 그 스님의 권에 따라 <아함경>을 읽기 시작하였다. 내가 구입한 역본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한문에서 번역한 역본이었다. 그러나 그저 경전을 읽는다는 의미만 있을 뿐, 부처님이 가르치신 사성제가 무엇이고, 팔정도가 무엇이고, 연기가 무엇이고 열반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이지만, 나는 아직 불교를 배우는 초보자 중의 초보자다. 이렇게 진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교 배우기를 그칠 수 없는 것은, 구도자의 삶이 항상 내 마음 한 켠에 청정한 영상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일상에서 평범하게 살지라도 나는 그 영상만큼은 지울 수 없어 어떤 식으로든 그 영상과 더불어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끈질긴 호흡 끝에 <아함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마저도 별도의 진척이 보이지 않았으니 나로서는 나에 대하여 참 실망할 만도 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빨리어에서 번역한 역본이 있다길래 내쳐 그것을 구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맛지마니까야>(중부아함), <쌍윳타니까야>(상응부아함)는 무려 십수 권에 이르고 권당 가격도 만만치 않아 포기했다. 그러다가 택한 책이 바로 이 책, 마스타니 후미오의 <아함경>이다.

이 책은 <아함경>이라는 서명을 달고 있지만, <아함경> 번역서가 아니라 <아함경> 해설서이다. 아주 쉽고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이야기와도 같은 해설서. 그러나 절실한 마음을 일으키는 해설서. 이 책을 읽다보면 일본학자들의 저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 마스타니 후미오는 철두철미 빨리어 원전을 토대로 <아함경>을 해설한다. <아함경>을 해설하되 각종 학문적 논의를 일별하면서 차곡차곡 나아가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와타나베 쇼코의 <불타 석가모니>의 경우는 부처님의 일생을 이야기하면서 각종 학문적 논의들을 섭렵한 흔적을 역력히 드러내느라 책의 생동감이 떨어지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마스타니 후미오의 <아함경>은 저자 자신의 학문적 역량이 상당할 텐데도 그런 학문적 접근이 아니라 내면적 접근을 하면서 내용을 서술해 나간다. 그래서 그가 감동하는 대목에서 나도 감동하고, 그가 조심스러워 하는 대목에서 나도 조심스러워 한다. 경전과 저자와 독자가 호흡을 같이 한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그는 극동아시아의 대승불교가 가지고 있는 견해와 다른 견해를 서술할 때에는 각별히 조심스럽다. 이 조심스러움은 대승불교의 역사 역시 위대한 불교의 역사임을 주저없이 인정하기에 가능하다.

내용은 1. 그 사람, 2. 그 사상, 3. 그 실천, 이 세 대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함경>을 해설한다는 명목하에, <아함경>의 텍스트에 근거하여, 그리고 <아함경>에 대한 자신의 웅숭 깊은 이해를 토대로, 저자는 부처님의 근본적인 가르침들을 이야기한다. 사성제, 팔정도, 연기, 열반, 선우, 삼보, 이타행 등등, 불교의 근본 주제들이 하나하나 이야기된다. 빨리어에 기반한 그의 설명은 이해하기 쉽고 십분 공감이 되고 부드럽다. 그 주제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서양철학자들의 견해가 가끔씩 등장하지만,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나같은 경우에는 삶의 가르침에 관한 한 서양철학자들의 견해를 평가절하하는 편에 속하기 때문에 저자가 그들의 견해를 삽입한 것이 이채롭긴 했지만, 다른 독자들로선 환영할 만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책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워낙 마음에 잘 스며든 탓일까. 마치 한 줄기 바람을 쐬고 난 기분이다. 아무튼 이 책의 내용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육박하거나 강렬한 호흡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늘 곁에 두어야 하는 책인 것만 같다. 같은 저자의 또 다른 저서, <불교개론>도 읽어보았다. <불교개론>과 <아함경>은 중복되는 내용이 상당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 역시 기쁘게 읽었다. <불교개론>은 <아함경>의 내용을 압축적으로 서술하는 대신, “불교의 역사”, “경전과 종파”를 덧붙혀서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 선불교까지 이어지는 불교의 역사와 경전 번역 등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다. 불교에 입문하기 원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두 책 중 어느 책을 선택해도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은 이원섭 선생의 탁월한 번역을 거쳐서 더욱 빛난다. 일본 저자들에 대한 이유 없는 선입견이 이 책을 늦게 만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djade 2005-11-27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이 책을 비롯해서 좋은 책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책을 소개시켜주시길, 그리고 좋은 글을 만나시길 기원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꾸벅)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책세상 니체전집 2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진우 옮김 / 책세상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현재 우리나라는 니체 번역의 역사에서 초기에 일본어 역본을 중역하던 시기, 청하출판사의 비전공자에 의한 번역(더러는 영어 역본의 중역) 시기를 지나, 이제 비로소 철학 전공자에 의한, 그것도 새로운 비평본인 KGA/KSA 전집판 번역의 시기를 맞았다. 책세상 출판사의 니체 전집 완역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니체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한글로 번역된 니체의 저서들을 읽는다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근본적으로 이 고통은, 니체가 고전문헌학 전공자였다는 사실, 니체가 독일어를 너무 아름답게 구사한다는 사실, 그리고 니체가 단지 철학뿐 아니라 문학, 음악, 예술에 대하여, 심지어는 인간의 심층에 대하여 경이로울 정도의 통찰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기원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책세상 출판사의 번역 시리즈는 그저 철학박사 학위를 딴 학자에 의해서 번역되고 있을 뿐이다. 비관적으로 말해, 책세상 번역 시리즈는,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땄다는 면허증 하나만으로는 니체 번역의 자격이 충분한 것이 결코 아님을, 본보기로 역설해 주고 있다. 이런 말 하기는 죄송스럽기도 하지만, 정말 오역이 즐비한 번역본도 있다는 것은 책세상 번역 시리즈의 번역자 선택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확신마저 갖게 된다. (물론 나는 책세상 번역 시리즈 전부를 다 본 것은 아니다. 그저 두어 권만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두어권 중에서 하필 심각한 오역본인 책을 접했고, 더 이상 책세상의 책을 구입하지 않았다. 물론 그 책을 제외한 대부분의 역서는 최소한 평균점은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얼마 전에 이진우 교수의 손길에 의하여 <비극의 탄생>이 번역, 출판되었다. 나는 이 책을 기다렸다. 나는 <비극의 탄생>에 관심이 많았고, 독일어로도 꼼꼼하게 정독하였으며, 관련 해석서들도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체의 다른 글들도 번역한 이진우 교수의 번역본이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내가 이 번역본에 대해 줄 수 있는 점수는, 평균점, 혹은 평균점보다 약간 아래이다.

아다시피, <비극의 탄생>은 두 가지 문체가 존재한다. 하나는 1872년 초판의 서문과 본문이고, 다른 하나는 1886년 재판에 추가된 <자기비판의 시도>이다. 니체가 후자의 글에서 직접 언급하고 있듯이, 초판의 문체는 "서투르며, 둔중하며, 힘겨우며, 비유가 난무하고 꼬여 있으며 감정적이다." 그 반면에, <자기비판의 시도>의 문체는 물처럼, 때로는 격류가 되어 흐른다. 그 흐름의 와중에 육중한 문제 제기가 야전의 포성처럼 터진다. 그래서 그 흐름은 박진감이 넘치고, 앞 단락에서 뒷 단락으로 넘쳐 흐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번역본에서는 판본간 문체상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는 한편으로, <자기비판의 시도>의 문체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독일어와 우리말의 차이를 감안하자면 이러한 문체의 생사는 그다지 타박할 거리가 아니다. 문제는 차라리 독일어의 절묘한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진우 번역만의 문제점이 아니다. 소위 철학 전공자들 거의 전부의 문제점이라고 치부해도 무방할 것이다. 철학 전공자들의 우리말 번역어 선택은 왜 그렇게 뻣뻣한가? 아마, 기본 소양의 결여 때문일 것이다. 이는 예술과 문학에 문외한인, 혹은 그쪽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된 철학 전공자들의 전형적인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래서 번역의 정확성을 고려하지 않고 순전히 문체상으로 평가하자면, 책세상의 이진우 역본이 청하출판사 김대경의 역본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싶다. 지나가는 김에 이야기하자면, 김대경 역본의 최대 약점은 독일어의 접속법을 거의 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독일문학 전공자가 독일어 접속법의 뉘앙스를 거의 살리지 않았다는 점은 사실 의아하기까지 하다. 접속법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 것은 이진우 역본도 마찬가지이다. 하기야 독일어 접속법을 제대로 살리는 번역본이 과연 우리나라에 얼마나 될른지 의심스럽기는 하다. 문체는 그렇다치고, 과연 이진우 역본은 김대경 역본의 번역 오류를 개선하기는 한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해, '아니다'이다. 오히려 오역에 있어서 난형난제라고 평하고 싶다.


<자기비판의 시도> 부분을 표본으로 삼아 번역의 문제점을 거론해 보겠다. "그는 전황이 근심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무관심하기도 했다"(9면). 원문에는 "전황"에 해당하는 낱말이 없다. 역자의 해석이 개입된 셈인데, 특이하게도 김대경 역본과도 동일하다. 이 좁은 공간에서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이 해석이 오류라고 생각한다. 일단 원문에도 없는 낱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덜 명백한) 오류는 "당시 나의 젊은이다운 용기와 악의가 방출된 그 책"(11면)에서도 드러난다. 독일어 Argwohn을 "악의"라고 번역한 것인데, 이런 역어 선택은 100% 오류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Argwohn"이 의처증과 같은 "의심", "의혹", "의구심"에 가까운 의미이기 때문에 오류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 낱말은 13면의 "사람들은 악의적으로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다시 등장한다. 아마도 역자는 독일어 "arg"가 "악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보니까,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대경 역본은 각각 "회의", "불신"으로 옮겨 오히려 잘 된 편이다.)

이런 오류들은 독일어 뉘앙스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일반적으로, 철학 전공자들이 독일문학 전공자들에 비해 어휘력이나 감각 면에서 뒤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니체의 다른 저서의 번역본들을 비교해 가면서 읽어본 지인들로부터 나는 책세상 번역본이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딱히 듣지 못했다. 아마도 이러한 독일어 감각과 번역문의 문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18면의 "아름다움과 감성에 대한 두려움"(이진우 역본)과 "아름다움과 관능에 대한 두려움"(김대경 역본)의 차이를 낳았다. 물론 나는 후자의 번역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철학 전공자는 철학사에서 유구하게 논의되어온 "Sinnlichkeit"를 언제나 늘 "감성"으로 번역해서 읽었기 때문에 이진우 역본은 그러한 뻣뻣한 선택이 이루어졌을 게다. 그렇다고 해서 김대경 역본이 더 잘 된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음악이라는 세례명을 받고"로 옮겨야 할 대목을 "음악에 몸을 바쳤고"(김대경 역), "음악의 세례를 받고"(이진우 역)로 각각 옮겼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김대경 역본은 의미가 빗나가면 확실하게 빗나가지만(빗나가는 것으로 모자라 정반대로 번역해 놓은 대목들도 있다), 이진우 역본은 애매모호하게 빗나간다고 할까. 애매모호하게 빗나가다 보니까 오역이 아닌 듯하지만, 사실은 훨씬 더한 오역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오역의 특성이 두 책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어느 역본이 더 낫다고는 말하기는 어려울 것같다. 다만, 김대경 역본이 이진우 역본보다 '신명나게' 읽힌다는 것만 언급해 두고 싶다.

설마 어떻게 정반대로 번역할 수 있겠느냐 하고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철학자는 몰라도 니체의 글을 번역할 때에는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니체의 문장이 워낙 문학적인데다가 낱말의 의미를 절묘하게 건드리면서 흐르기 때문에, 그리고 상궤의 사고를 전복시키는 궤적을 흘리고 있기 때문에, 약간이라도 어긋나면 그대로 정반대의 번역을 하게 된다. 더구나 니체는 희랍어나 라틴어의 문체를 좋아하여, 생략할 수 있는 단어는 최대한 생략하는 버릇이 있다. 그만큼 니체의 번역이 어렵다는 말이다. 그래서 니체를 번역한 역자들치고 칭찬 한 번 제대로 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니체의 책을 읽을 때만큼은 독한사전을 참고하지 않고 철저하게 독독사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 과정을 통해서, 기존에 기억되어 있던 독일어 감각을 지속적으로 재점검하는 한편으로 독한사전의 불비점을 보완해야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독의 소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니체의 문체로 인한 어려움은 그렇다치고, 또 니체가 다루는 분야가 워낙 방대하고 깊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역자들의 주위 학문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 명백하게 오류가 발생한 곳들도 있다. 바로크 음악의 작곡기법에 대해 기본지식을 갖추지 못한 두 역자는, "여태까지 인류가 경청하기에 이르렀던 도덕적인 주제[선율]이 한껏 빗나가 전개된 음형으로서 기독교를 다루고 있다" 쯤으로 옮겨야 할 대목을, "도덕적 주제의 뻔뻔스러운 제안으로서의 기독교, 이것에 인류는 지금까지 귀를 기울여왔던 것이다"(김대경 역, 29면)와, "기독교를 이제까지 인류가 귀 기울여온 도덕적 주제의 극단적 구체화로서 다루고 있다"(이진우 역, 17면) 로 각각 잘못 옮기고 있다. 니체가 굳이 "경청하다"는 낱말을 썼는데도 이 구절이 음악적 은유라는 점을 역자들이 간과한 까닭은, 그만큼 음악에 무지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니체는 음악에 얼마나 정통했던가! "그대의 대위법적 발성술과 귀의 현혹술을 총동원하여, 분노와 파괴욕의 기저음이 이 책 속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지 않은가?"(김대경 역, 32면)와, "그대의 대위법에 기초한 음성 예술과 귀를 현혹하는 기술 밑에서는 분노와 파괴 욕망의 기본 저음이 울리고 있지 않은가?"(이진우 역, 21면)의 번역 대목에 이르면 혀를 끌끌 차게 된다. 여러 말 하지 않겠다. 이 대목은 "귀를 홀리는 당신의 모든 대위성부 기법의 저음부에서 분노와 소멸욕망의 통주저음이 웅장하게 울리고 있지 않습니까?"로 옮겨야 한다.

<자기비판의 시도>에서만도 지금 언급한 것보다 심한 오역들이 더 있지만 이만 줄이겠다. 그런 것들을 시시콜콜 언급해 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다만 하나만 언급하자. "모든 비극적인 것에 감정을 고양시키는 독특하게 영감을 부여하는 것은"(이진우 역, 19면)은 오역을 넘어 비문(非文)이다. 이런 대목을 쏙 끄집어내어 지적하는 것이 대단히 괴롭고 미안하지만, 이런 대목 하나가 번역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를 제공한다. 서문을 넘어 본문으로 들어가자면 고전문헌학과 희랍문학, 음악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범했을 오류들이 미리 생각나 마음만 답답하다.


"이런 번역비평을 할 요량이라면 차라리 그 시간에 네가 번역을 직접 해라"라는, 충분히 가능한 충고를 나는 달게 받아들이겠다. 위에서 언급한 번역의 과실보다는 이 소중한 책을 번역해 준 역자들의 공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비극의 탄생>의 번역은 이진우 역본까지 포함해서 대여섯 권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오역이 무시 못할 정도로 많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도 니체의 유고들을 번역하기도 했던 역자의 손에서 번역된 책이 이렇다는 것에 비애를 느낀다. 하지만 이 비애는 역자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근원적으로는, 나의 니체에 대한 존경과 사랑 때문에 이런 비애가 생긴다. 이 책에 별 둘 밖에 주지 못하는 것이 애석할 뿐이다. 이 책을 처음으로 번역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번역이 기존의 번역서들보다 눈에 띄게 뛰어나지도 않기 때문이다. 기존 번역서의 연장선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고나 할까. <비극의 탄생>이 제대로 번역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독자들이 이 번역본에 만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니체의 다른 저서와는 달리 <비극의 탄생>은 니체 생존 당시에 이미 재판(Leipzig 판본)까지 간행된 터이므로, 니체의 독일어 텍스트를 최근에 전면적으로 새로 비평한 de Gruyter 출판사의 KGA/KSA 비평본의 우위가 특별히 부각되지도 않는다. (이 비평본의 우위는 유고집이나 소위 <권력에의 의지>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책세상 번역 시리즈는 이 판본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이진우 역본에는 주석이 없다. 물론 청하출판사의 역본은 W.A. Kaufmann의 특출날 것 없는 영역본 주석을 그대로 베끼긴 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기회가 닿은 김에 이야기하자면, 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청하출판사의 번역 시리즈의 편집자 서문들은 이 Kaufmann 영역본의 서문을 번역한 듯하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청하출판사는 희한하게도 그 출처를 전혀 밝히지 않아 궁금해 하는 독자들이 꽤 있다. 문제는 그 서문들이 더러는 이상한 내용을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니체가 원래 자신의 저서에 주석을 달지 않았으므로, 독자의 본문 독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번역할 때에도 주석을 달지 않는 것이 좋다는 판단에는 동의할 수 없다. 본문 독해를 방해하지 않고서도 주석은 충분히 달 수 있기 때문이다. 책세상 번역본이 참고한 KGA/KSA 비평본도 별도의 권으로 분리하여 간단하게나마 주석을 달아놓지 않았던가! 더구나 잠언 형식의 글도 아니고 <비극의 탄생> 과 같은 저서에는 국내 독자들을 위하여 당연히 주석을 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번역서 하나 때문에 이진우 교수의 역량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 대학교수라는 제도적 지위에 머물면서 번역서를 낸다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기도 하거니와, 번역 자체에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면, 내가 지적한 오류들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은, 이 번역서의 수준이 높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역자가 이 책의 번역에 정성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니체를 번역해야 할까? 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니체에 대해 잘 모르거나 니체를 사랑하지 않는 학자는 되도록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용은 그렇다치고 문체가 조악하기 때문이다.(이것은 이진우 역본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독문학 전공자도 좋고 철학 전공자도 좋은데, 제발 니체의 영혼을 사랑하는 학자가 번역했으면 좋겠다. 니체는 "학문" 자체를 문제거리로 파악한 영혼이므로, 학문적 방법론에만 익숙할 뿐 문학적, 예술적 감성과 지식이 부족한 학자들은 부디 니체 번역을 피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 이 서평은 <비극의 탄생>만을 다루었습니다. 함께 실린 <반시대적 고찰>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차르트 평전
필립 솔레르스 지음, 김남주 옮김 / 효형출판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모차르트 관련 서적 번역을 꿈으로 품고 있는 나로서는 이 역서의 출현과 더불어 그 꿈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졌음을 고백하고 싶다. 특히 모차르트 음악 자체가 주도하는 가운데 흘러가는 솔레르스의 이 책은, 국내에 번역된 모차르트 관련 서적들과 비교해 볼 때, 독보적인 지위를 갖는다. 모차르트 음악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라면 사회정치사적인 배경, 사회적인 고찰 등 음악 이외의 시선 안에 모차르트 음악이 포착되는 책을 그다지 달가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시선 역시 도움이 되겠지만, 그 도움은 정보적인 차원일 뿐이다.

우리는 솔레르스의 통찰과 같은 통찰 혹은 상상 혹은 사랑을 원한다. 모차르트 음악을 들을 때의 그 유쾌함, 발랄함, 슬픔, 격정, 전율, 연금술적인 사랑을 글 속에서도 발견하길 원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간 안에 공히 내재한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순간 바람에 저리 훌쩍 비상하는 깃털”이 빚어내는 인간사의 숨막히는 격정, 무거운 것의 찬란한 가벼움, 가벼운 것의 끝없는 무게, 한 마디로 “인간성의 학교”가 있을진대, 그리고 모차르트가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그것을 드러냈을진대, 글을 통하여 그 단면이나마 드러내지 못하란 법은 없다.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만 따지자면, 솔레르스만이 그것을 유일하게 해낸 것은 아닐까?



오페라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다. 오페라를 좋아하는 분들은 대부분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좋아하기 마련이며, 이 책은 “언어와 드라마가 있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축으로 모차르트의 위대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차르트 오페라의 그 기발한 착상들이 솔레르스 글의 기발한 문장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흡사 만화를 읽을 때처럼, 가볍고 흠없는 (그러나 참으로 오랜만인) 웃음을 연신 터뜨렸다: “서양 음악 200년을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일까? (…) 적어도 열 명 이상의 음악가가 거론된다. 그런데 프랑스 음악가로 이런 수준에 오른 이는 단 한 명도 없는가? 자, 흥분해봤자 소용없다. 그게 사실이므로.”(307면); “천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가까운 이들에게는 흔하다(그들이 어떻게 다른 식의 반응을 보일 수 있었겠는가?)”(354면)

이러한 유쾌함 사이사이로 뭔가 묵직한 것을 내놓기도 한다: “콜로레도도 아르코도 (또 다른 이들도) 모차르트의 행운과 승리 앞에서 수치로 가슴을 짓찧을 만큼 오래 살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그들은 어쨌든 X나 Y나 Z라는 인물로 변해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몰래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196면); “이 오페라[=돈 조반니]에서 케루비노는 성장해 이제 조반니라 불린다.”(250면)(유감스럽게도, 이 하나의 문장이 얼마나 무서운 통찰인지를 알려면 피가로의 결혼에서 등장하는 케루비노의 그 아프고 아름다운 아리아를 익히 알고 있어야 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아는 이라면, 이러한 “발랄함”, “발랄한 웃음 뒤에 찾아오는 서늘한 감동”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되풀이될 것이다. 특별히 솔레르스의 글은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에서 십분 독자를 웃고 울릴 것이다. 솔레르스와 모차르트가 죽이 척척 맞아들어가는 대목으로 꼽고 싶을 정도이다.



오페라를 제외한 모차르트의 음악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이 많지 않다. 어쩌면 그래야 하는 지도 모른다. 대신 모차르트의 편지와 동시대인의 증언들이 무수히 등장한다. 시시콜콜 전거를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이들로서는 매우 고맙고 유익한 정보이다. 이러한 정보들은 모차르트의 지상 여행(먹고 똥누고 뽀뽀하고 놀고 작곡하고 여행하고 돈빌리고 하는 일상생활)에 밀착시켜서만 공개되며, 이 정보에 심원한 차원을 입히기 위하여 솔레르스는 몇몇 문학가, 철학자들의 글을 인용한다. 랭보, 횔덜린, 괴테, 하이데거, 니체 등.

나 개인적으로는 가장 많이 인용되는 랭보의 시를 이해할 만한 내공이 아직 못되어서 무척 아쉽긴 했지만,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이들인) 횔덜린, 니체, 하이데거, 괴테의 글들을 촌철살인 인용할 때에는 정말이지 딱이지 싶었다. 모차르트 오페라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라도 아마도 솔레르스의 이러한 문학적 인용 솜씨에 연신 감탄할 것이다. 물론 이 감탄은 독자의 적지않은 내공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각각에 대해 무작정 칭찬만 했던 괴테를 꼬박꼬박 인용해 주어서 너무 고맙다. (돈 조반니와 관련하여 괴테가 실러에게 보낸 서신 내용도 언급했더라면 더 좋았으련만.) 과연 동시대인으로서 괴테만큼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일거에 파악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러니까 괴테 문학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이 책을, 아니 모차르트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번뜩이는 착상으로 여기저기(심리적으로 말해 무거움과 가벼움을) 넘나드는 이 글을 읽다보면, 꼭 모차르트의 오페라 부파를 듣는 기분이 든다. 그만큼 유쾌하면서도 서늘하다. 그런데, 그 기분이 뚝 단절되는 대목이 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관련 대목이다. 아아, 여기에 대해서는 영화글이 극적인 반전 부분을 밝히지 않는 것처럼 침묵하는 게 예의이리라. 정말 울고 싶었다는 말만 해 두자.

이런 책을 번역해 준 역자에게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글 자체가 꼭 일상 대화처럼 되어 있어 결코 쉬운 번역이 아니었을 것이고, 모차르트의 편지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분뇨담”을 번역할 때에는 ‘이런 것까지 번역해야 하나’ 하는 배반감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위대한 작가는 독자를 믿는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역자 역시 독자를 믿어주기를 기원한다.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이라면 이 책도 좋아할 것이므로.

“신의 영혼을, 그의 미묘하고 가변적이고 복잡하고 유쾌하고 지독하고 부드러운 영혼[을], 간단히 말해서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차르트를 좋아한다고, ‘신의 모차르트’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말라.”(솔레르스, 103면) 그래요, 그랬지요. 음악을 좋아한다는 분들을 만날 때면, 저도 언제나 “모차르트를 좋아하세요?” 하는 조용한 물음을 던졌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1 | 12 | 1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