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이채훈 지음 / 호미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지난해 9월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 20여명이 비장한 표정으로 ‘인문학 위기’를 선언했다. “무차별 시장논리와 효율성에 대한 맹신으로 인문학의 존립근거가 위협받고 있다”고 선언한 것을 두고 우리는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교수의 위기”라는 촌평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이 선언은 학술진흥재단의 “기금”을 확보하기 위한 작품이라는 비판도 있다.

기실 “인문학의 위기”는 제도권 밖에서 인문학을 하는 이들에겐 실감이 되지 않는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다른 직업을 통하여 밥벌이를 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부류 중 한 사람이다. 그래서 인문학의 위기가 내게는 그토록 낯설고, 그 선언 자체가 반인문적으로 보인다. 인문학을 하는 선생들이 그토록 우중충한 표정을 띨 수 있다는 것 자체도 슬펐다. 좀더 맑을 수는 없을까? 좀더 고귀한 모습일 수는 없을까?

시대가 변하고 있다. 박사급 수준의 인문학도들이 제도권 밖으로 쏟아져나오고 있다. 각 개인의 살림을 살피자면 불행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현상은 오히려 한국사회를 윤택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때를 맞춰, 그간 제도와 권력의 길을 따라 소통되었던 것들이 웹이라는 마당을 통하여 자유롭게 소통되고 있다. 제도와 재야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있고, 프로와 아마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 전공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이채훈 피디의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출현했다. 방송국 피디가 음악가와 관련한 책을 냈다는 것을 두고 많은 이들이 그 수준을 의심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이 책이 얼마나 모차르트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의 글인가를 알게 된다면, 그 의구심을 가졌던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할 것이다. 더불어 이런 부류의 책은 음악가에게서도 나올 수 없고 음악학자에게서도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소위 ‘프로페셔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지에서 구한 음악 책을 보니 놀랍게도 빈 필하모닉의 가장 큰 특징은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나와 있었다. 세계 최고의 악단이’아마추어’ 같은 자세로 한다니 이상하게 들릴 법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벌기 위해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마추어와 같은 순수한 음악 사랑으로 연주한다는 뜻이었다. 페터 베히터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음악을 취미로 하시는군요.” 베히터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빈 필하모닉에 처음 가입한 40년 전부터 지금까지 저는 언제나 기꺼이 취미로 연주하고 있습니다.”(178)

취미? 아마추어? 아마추어는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댓가를 바라서도 아니요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오직 자신이 하고 싶기 때문에 한다. 사실 모든 예술은 그 마음이 바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출발점에 서면, 격식도 형식도 중요하지 않다. 오직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된다. 예술가가 아마추어의 그 마음을 잃으면 기계적인 연주가 되기 십상이며 예술의 본질을 잃고 격식에 갇히기 마련이다.

빈 필하모닉은 바로 그 마음을 항상 유지하려고 “마음에서 마음으로”라는 모토를 걸었던 것이고, 이채훈의 생각을 빌면, 그런 자세가 있었기에 국내에서 상암축구경기장에서 연주하는 파격을 선보였을 것이다. 모차르트 역시 듣길 원하는 자들이 있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피아노 연주를 해 주었다. 현대 예술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파격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예술가의 자세가 아닐까?

이채훈은 아마추어리즘이라는 예술의 본질 안에서 유랑하고 있다. 그는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이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과 동의어”(91)라고 여기는 한 명의 예술가-애호가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은 오직 사랑 자체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의 가슴에 불꽃을 일으킬 수 있다. 굳이 말하자면, 내가 모차르트를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다. 다른 적절한 표현은 생각나지 않는다. (15)

모차르트의 음악을 ‘해설’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 관심사도 아니다.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이 음악을 사랑한다는 것과 동의어라고 여기는 나는 그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함께 나누고, 전염시키고, 전염당하는 일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 나는 다만 음악을, 사랑을 나누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리고 나 또한 상대방의 음악 사랑을 나눠 갖고 싶은 것이다. (91)

이 기본자세가 이 책을 관통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사랑하는 곡들을 이야기할 때(해설이 아니다!) 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 가장 환한 빛이 나는 곳도 바로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대목일 것이다.

[K.522] 3악장 ‘메뉴엣’의 트리오 부분. 음악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세상이 밝아졌고, 몸무게가 없는 순결한 영혼들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93)

서른 해 전, 중학교 일학년 때, 클라라 하스킬이 연주하는 이 곡[K.466]을 처음 듣고 삶의 검은 심연을 바라보고 있는 모차르트의 이미지에 섬뜩했다. 그 심연의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속삭임, 그리고 피아노와의 대화는 신비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환상은 2악장 정다운 라르게토의 중간부에서 또다시 피어올랐고, 3악장 변주곡에서는 마녀의 늪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나락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98)

[피아노] 협주곡 25번의 3악장은 한층 더 오페라를 닮았다. 단순한 첫 주제는 때로는 익살스런 얼굴로, 때로는 응큼한 표정으로 변형되어 나오고, 관현악과 대결하고, 도망가고, 약올리고, 쫓아가면서 한껏 즐겁게 논다. 관현악의 패시지 중에는 심지어 오페라의 레시타티보를 연상시키는 대목까지 나온다. 모차르트 오페라와 협주곡의 유사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곡은 바로 이 C장조 협주곡(K.503)이다. (145)

음악은 언어나 드라마에 비하자면 가장 짧은 분량으로 가장 커다란 드라마를 구축할 수 있다. 예컨대, 모차르트 교향곡 C장조를 전부 들으려면 20분 남짓이면 족하다. 그 짧은 시간에 거대한 세계가 세워졌다 사라진다. 음악만큼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그토록 커다란 세계를 희롱할 수 있는 예술은 없다. 음악과 절친한 이채훈은 그 템포가 몸에 배어 있는 듯, 글의 속도가 빠르다. 근래에 나는 이렇게 빠른 속도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는 많은 학자들마냥 두뇌와 내장이 꼬여 있지 않다. 음악적 느낌에 충실하고, 그 느낌의 변화무쌍함에 슥슥 반응한다.


그는 많는 데이타와 논리를 구축하여 모차르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 음악을 들으며 경험했던 섬광같은 느낌을 따라 번개처럼 움직이다. 그 날렵한 움직임을 위해서 데이타도 최소화하고 구질구질한 해설도 최소화한다. 오직 있는 것은 그 섬광 같은 느낌, 그리고 그 느낌에 움직임을 부여하고 형상을 입히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언어이다. 그래서 이채훈의 글을 읽노라면 때로 서늘한 한기를 느낀다. 모든 것들이 전광석화처럼 베어져 사라지고 오직 검의 움직임만 있는 듯한 느낌.

이러한 장점은, 반대로 말하자면, 정보와 해설의 빈약함을 낳는다. 그래서 이 책에서 모차르트에 관한 지식이나 새로운 사실을 얻으려면 이내 실망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채훈이 모차르트에 관한 정보력이나 공부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시사 다큐멘터리 피디답게 기본 ‘팩트’에 놀라울 정도로 충실하다. 그는 알고 있었으나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아쉬운 점은, 모차르트 음악사랑으로부터 뭔가를 끌어올려 자신만의 해석을 확 펼치지 못한 점이다. 가령, 그가 오페라 ‘돈조반니’를 그토록 사랑한다면 그 사랑으로부터 뭔가를 추출하여 자신만의 해석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러지 못했고, 그 대목은 거의 키에르케고르의 인용문으로 대체되어 있다. 어쩌면 그는 ‘해석’이라는 것의 허구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키에르케고르의 글도 해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음악적 느낌과도 같다. 저자는 음악적 느낌을 가장 중시하고 그저 그 느낌에 따라 글의 스텝을 밟기를 원했던 듯하다. 이 책이 약간 헐렁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이 책은 갈피갈피마다 책읽기를 중단하고 언급 중인 모차르트 음악을 들어보라고 유혹한다. 사실 어떤 해석서도 이런 유혹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책은 지난해 모차르트 250주년을 맞아 엠비시에서 제작하여 방송한 “모차르트” 2부작 다큐멘터리 관련내용이 주를 이룬다. 첫 장 <모차르트를 찾아서>는 다큐멘터리 1부와 관련한 내용으로 모차르트의 생애를 따라 서사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내 생각으로는, 그 다큐멘터리 1부보다 이 글 한 편이 더 훌륭하다. 이 장을 읽고 나면 모차르트의 일생이 음악과 함께 무대 위에 홀연히 펼쳐졌다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모차르트의 일생에 관한 오페라와도 같다. <모차르트에 관한 대화>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인터뷰했던 저명한 음악가들, 작가의 인터뷰 내용이다. 이채훈이 대담자이다. 저명한 음악가들의 대화를 읽어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엠마 커크비와의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아베 베룸 코르푸스’를 들을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어요. 제가 노래 부를 때 말고 그냥 들을 때 말입니다. 저는 이 곡을 정말 좋아합니다. 심금을 울리는 음악입니다. 심장에 곧장 가서 박혀서 심장이 울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듭니다. 천상의 고통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이 곡은 우리의 운명,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의 숙명을 실감하게 합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게 되죠. 우리는 세상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알고 나누며 살지만, 그런 것을 음악을 통해서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차르트는 이 점을 너무나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187)

나머지 대목들도 이런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이제, 언급된 음악을 들을 때마다 이 책을 들춰보아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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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의 번역에서 제일 중요한 원칙은, 최대한 원문을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당신들”은 “당신들”로, “염소의 목자”는 “염소의 목자”로, “불”은 “불”로, “숯”은 “숯”으로, “오전”은 “오전”으로, “정오”는 “정오”로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국내 번역본에서는 그 중요한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차라투스라의 말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되니까 어떻게든 이해가 되는 방향으로 번역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원문을 훼손한다. 원문을 훼손했던 역자들은 분명코 독자들의 독해에 도움을 주기 위한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역자들의 그 친절이 곧 원문의 심각한 훼손을 낳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듯하다.

그런 친절이 습관화되다 보면, 니체의 간결한 문장에 불필요한 말들을 덕지덕지 덧붙히게 된다. 이것은 정동호 역본이 가장 심한데, 이로 인해 «차라투스트라»의 음악성이 정동호 역본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왠지 모르게 내가 정동호 역본에 대해서 본능적인 반감을 가졌던 것도 바로 그 음악성의 전면적인 상실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런 문체상의 훼손은 다음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겠지만, 역자의 친절이 음악성의 상실에 그치지 않고, 심오한 원문의 내용을 매우 잡스런 것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겠다. 그 예를 들어보겠다:

und nicht nur die Morgenröthe gieng über sein Antlitz, sondern auch der Vormittag.
여명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가고, 오전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9절)(1)

문수 아침놀만이 아니라 오전의 햇살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승자 아침놀이 그의 얼굴 위로 스쳐지나갔다.

동호 아침놀뿐만 아니라 오전 한나절의 햇살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희창 아침놀뿐만 아니라 오전 한나절의 햇살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위 인용문의 원문은 아주 깔끔한 문장이다. “여명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가고, 오전도 지나갔다”라고 번역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번역하면 흔한 수준으로는 ‘이해’가 안된다. 그래서 역자들은 “오전” 대신에 “오전의 햇살”로 번역한다. “오전의 햇살”로도 뭔가 모자란 듯싶으니까 “오전 한나절의 햇살”로 번역하여 친절의 수준을 점점 더 높힌다. 그래서 위와 같은 원문의 훼손이 발생했다. 이런 정도는 원문의 훼손이 아니라고? 원문의 훼손이 아니라면, 니체는 그토록 평범한 서술만 일삼았단 말인가? 아니다. 니체는 누구에게나 이해되는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여명”은 지상 전체를 휩쓸면서 다가오는 것이다. 여명이 지나간다는 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얼굴 위로 광활한 것이 휩쓸고 지나간다는 인상을 준다. “오전” 역시 마찬가지다. “오전”도 지상 전체를 장악하고서 휩쓸며 지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다. 시간이 지상을 전면적으로 휩쓸어가면서, 차라투스트라의 얼굴 위로 지나가는 것—바로 이것이 “그의 얼굴 위로 오전이 지나간다”는 문장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너무 억지 해석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보르헤스의 말을 한번 인용해 보겠다:

시간은 나를 휩쓸어가는 강물이지만, 그러나 나는 강물이다; 시간은 나를 짓찢는 호랑이이지만, 그러나 나는 호랑이다; 시간은 나를 소멸시키는 불이지만, 그러나 나는 불이다. 불행히도, 세계는 현실적이다; 불행히도, 나는 보르헤스다.

Time is a river which sweeps me along, but I am the river; it is a tiger which destroys me, but I am the tiger; it is a fire which consumes me, but I am the fire. The world, unfortunately, is real; I, unfortunately, am Borges.

— Borges, “A New Refutation of Time,”[”Nueva refutación del tiempo”]

불행히도, 역자들은 현실적이다. 불행히도, 그는 니체다. 불행히도 다수의 독자들은 현실적이고, 불행히도 소수의 독자들만이 니체스럽다. 이들 양자 간에는, “그의 얼굴 위로 오전 한나절의 햇살이 지나가다”는 문장과 “그의 얼굴 위로 오전이 지나가다”는 문장만큼이나 서로 동떨어져 있다.

 

“그의 얼굴 위로 오전이 지나가다”는 구절은, 니체의 표현을 빌면, “나의 평범한 경험”, “경험의 진정성”(die Orginalität der Erfahrung)에서 직접 나오는 문장이다. 사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온통 이런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니체로서는 평범했던 경험”은 그러나 다른 사람들로서는 비범한 경험인 것이고, 이는 흔히 말하는 “시적 영감”이나 “천부적 재능”의 차원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역자들은 그런 “경험”이 없어서, 혹은 그런 경험에 대한 이해가 모자라서 그토록 오역을 저지르는 것이 아닐까?

denn er war ein gewohnter Nachtgänger und liebte es, allem Schlafenden in’s Gesicht zu sehn.
그는 야행에 익숙한 자였으며, 잠든 만물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좋아했던 것이다. (8절)

문수 그는 밤길에는 익숙한 사람이었고 잠자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 좋아했다.

승자 그는 밤길을 걷는 것이 익숙했고, 또 잠든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길 좋아했던 것이다.

동호 그는 밤길에 익숙해 있었고 잠든 사람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기를 좋아하던 터였다.

희창 그는 밤길에 익숙했고 잠든 사람들의 얼굴을 보기 좋아하던 터였다.

“allem Schlafenden in’s Gesicht”은 “잠든 만물의 얼굴”인가, 아니면 “잠든 모든 사람들의 얼굴”인가? 둘 다 가능한 번역이다. 그러나 보통은 “모든 것”을 가리킬 때는 “allem”을 주로 쓰는 편이고 “모든 사람”을 가리킬 때는 “allen”을 주로 쓰는 편이니, 아무래도 “만물”로 번역하는 편이 조금 자연스럽긴 하다. 또한, “allem Schlafenden”이 소유격이 아니라 여격으로 쓰임으로써 익숙한 어법을 벗어나 있는 만큼, 역자들은 좀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어떻게 번역하든 문법상 오역이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왜 역자들이 한결같이 “모든 사람들”로 번역했느냐 하는 것이다. “얼굴”이라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얼굴”은 익숙한 어법상 사람의 얼굴이니까. 은유에는 낯설고 현실에는 익숙한 역자들의 면모가 이런 데서 드러난다.

사실, 정황상 이 대목에서는 “잠든 만물의 얼굴”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이상하잖은가, 야행을 즐겼던 차라투스트라가 그 야행 중에 잠든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즐겨 보았다니! 그는 십년 동안 인적없는 곳에서 입산수행을 했고, 인용문이 등장하는 대목도 인적없는 깊은 숲속을 걷고 있는 장면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요소들을 모두 무시할 만큼 역자들은 니체의 은유가 생소했던 것이다, “니체로서는 평범했던 경험”이 그들로서는 너무 비범했으므로:

Ich liebe Den, dessen Seele übervoll ist, so dass er sich selber vergisst, und alle Dinge in ihm sind: so werden alle Dinge sein Untergang.
사랑하노라, 영혼이 차고넘치는 자를, 그리하여 제 자신을 망각하는 자, 제 안에 만물이 있는 자를: 그리하여 만물은 그의 하강이 되리라. (4절)

문수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을 만큼, 또 만물을 자기 안에 간직할 만큼 넘쳐흐르는 영혼을 가진 자를. 이렇게 해서 만물은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

승자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모든 것들이 자기 내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영혼이 넘쳐흐르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그의 몰락이 되는 것이다.

동호 나는 사랑하노라. 자신을 잊고 자신 속에 만물을 간직할 만큼 넘쳐 흐르는 영혼을 지닌 자를. 이렇게 하여 만물은 그의 멸망이 된다.

희창 나는 사랑한다. 자기 자신을 잊은 채 만물을 자신 안에 간직할 만큼 그 영혼이 넘쳐흐르는 자를. 그리하여 만물이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

이 인용문 이전의 문장들에서 역자들은 모두 “Untergang”을 “몰락”으로 옮기고 있다. 나는 이것을 “하강”이라 옮기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몰락”이라고 옮겼다해서 오역이라고 트집잡을 생각은 없다. 이런 이견 차이라면 언제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앞 문장들에서 모두 “몰락”으로 옮겼으면서도 위 인용문에서는 다르게 옮긴 경우이다. 물론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맞게 바꾸면서 번역해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위 인용문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동호가 “멸망”이라고 바꿔 번역한 것은 대단히 유감이다. 아마 “만물은 그의 몰락이 된다”는 말이 이해가 안되니까 그렇게 바꿨을 것이다.

문수희창도 “만물은 그의 몰락이 된다”는 말을 생경하게 여긴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굳이 “만물은 그의 몰락의 계기가 된다”고 한 마디 첨언해서 번역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니체 번역에서 “첨언”은 금물 중의 금물이다. 그런 점에서 승자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아마도 시인이어서 그나마 사고의 폭이 넓었기 때문이리라.

위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제 안에 만물이 있는 자는, 그 만물이 그의 하강이 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만물이 그의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그는 하강하게 된다. 그의 영혼은 흘러넘친다. 그는 제 자신을 망각한 자다. 그는 곧 만물이며, 그는 곧 하강하는 존재다. 만물의 상승과 그의 하강, 이것은 동일한 것이며 동일한 순간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묘사할까?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이야말로 이 사태를 제대로 일갈한 명구가 아닐까?

상승하는 길과 하강하는 길은 하나이며 동일하다. (헤라클레이토스, Diels-Kranz 22B60)

위와 평행구절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나란히 놓고 읽어보자:

사랑하노라, 영혼이 차고넘치는 자를, 그리하여 제 자신을 망각하는 자, 제 안에 만물이 있는 자를: 그리하여 만물은 그의 하강이 되리라.

소수의 독자들은 위 두 구절이 명백히 동일하다는 것을 즉각 간파할 것이다. 혹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소수의 독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닐까? 내가 너무 과도하게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원문은 이런 평행구절의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만, 국내의 번역본은 그런 가능성을 쓸어버렸다는 사실이 비통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니체를 이해하는 지름길이고,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오역을 줄이는 길인가? 한 마디로 말하건대,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자가 되는 것, “고귀한 영혼”이 되는 것이다:

— 무엇이 고귀한가? 오늘날 우리에게서 “고귀함”이라는 말이 아직 뭔가를 의미하긴 하는가? 이제 시작된 천민통치의 하늘, 그 무겁게 드리워진 하늘 아래, 모든 것이 그 하늘 때문에 불투명해지고 납빛이 되었는데, 고귀한 인간을 무엇을 가지고 간파할 것이며 무엇을 가지고 인식할 것인가? 고귀한 인간을 증명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다 — 행위는 언제나 다의적이고 언제나 해명이 불가능하다 — “작품”도 아니다. 오늘날,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발설하는 자들 중 예술가들과 학자들 가운데에서, 고귀함을 얻으려고 심한 욕심을 부리는 일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고귀함을 얻으려는 그 욕구야말로 고귀한 영혼 스스로의 욕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것은 곧 저들의 결핍에 대하여 제대로 말해 주는 위험스러운 표지이다. 여기에서 결정하는 것, 여기에서 순위를 확정하는 것은 작품이 아니라, 옛 종교적 문구를 새롭고도 좀더 심오한 이해로 재수용하여 말하자면, 신앙이다: 한 고귀한 영혼이 자기 자신, [구하려한들] 구해질 수도 없고 [찾으려한들] 찾아질 수도 없고 아마도 [놓아버린다한들] 상실될 수도 없을 그 무엇에 대하여 가지는 그 뭔가 근본적인 확실성. — 고귀한 영혼은 제 자신을 경외한다. (KSA 5, 232-233)
 

나는 내 자신을 탐구했다. (헤라클레이토스, Diels-Kranz 22B101)

수천 년의 거리를 두고 있는 두 철학자의 말을 흡사 평행구절처럼 나란히 놓은 것에 대하여 너무 자의적인 발상이라고 치부하지는 말기 바란다. 니체는 알고 있었다, 그가 경험한 것을 동일하게 경험했던 자가 과연 누구였던가를:

[…] 이것이 영감에 관한 나의 경험이다.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 경험이기도 하다”라고 내게 말해도 되는 자, 그 누군가를 찾으려면 수천 년을 거슬러가야 한다는 것을. (KSA 6, 340)

혹시 우리시대의 사람들은 위와 같은 니체의 말들을 과대망상쯤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름아닌 우리시대의 니체전공자들이 그렇게 간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니체전공자들이야말로 니체가 그토록 경원시했던 부류의 학자들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오역들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Wie müde bin ich meines Guten und meines Bösen!
나는 나의 선과 나의 악에 얼마나 지쳐 있는가! (3절)

문수 나는 나의 선, 나의 악에 지쳤다.

승자 나는 나의 선과 나의 악에 얼마나 지쳐 있는지!

동호 나는 나의 선과 악 사이에서 얼마나 지쳐 있는가!

희창 나는 나의 선과 악 사이에서 얼마나 시달렸던가!
 

An der Erde zu freveln ist jetzt das Furchtbarste und die Eingeweide des Unerforschlichen höher zu achten, als der Sinn der Erde!
대지를 모독함이란, 이제, 대단히 공포스러운 것을, 불가사의에 관한 내장점(內臟占)을, 대지의 의미보다 더 높이 존중하는 것이어라! (3절)

문수 지금은 대지에 대한 모독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탐구할 수 없는 것의 내장을 대지의 의미보다 더 존중하는 것도!

승자 대지를 모독하는 것이 지금은 가장 가공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것의 내장을 대지의 의미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이!

동호 이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고 저 알 길이 없는 것의 뱃속을 이 대지의 뜻보다 더 높게 평가하는 것, 이제는 그것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희창 이제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대지에 불경을 저지르고, 탐구할 수도 없는 것의 뱃속을 대지의 뜻보다 더 높이 존중하는 것이다!

“선악 너머”를 모르는 이들, “선과 악 사이에서”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이들, “공포스러운 것”에서 헤어나지 못한 이들, 그래서 빈번하게 니체의 원문도 훼손하고 그래서 빈번하게 문장구조도 무시하는 이들, 불행히도, 그들이 바로 «차라투스트라»의 번역자들이다.

그들은 지식의 정원에서 "한적하게 글 읽는 자들"(<읽기와 쓰기에 관하여>)일 뿐, 자기 자신을 탐구하지는 않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각주
  1. 이하 별도의 표기 없이 절만 표기해 놓은 대목은 <차라투스트라의 서설>에서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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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alk 2006-11-11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최근 열흘 동안 차라투스트라 구매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어느 책을 봐도 아무리 고민해도 이해가 안 가는 구절들이 꽤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런 구절들은 번역본들마다 아예 반대로 번역돼 있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번역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주요 번역본들이 상호 교차적으로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도대체 어느 차악을 선택해서 읽어야 한단 말인가 하고 있던 중에 님의 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헌데 바로 님이 언급한 구절들 중에 제가 의아해 했던 것들이 많이 있는 걸 보고 반가왔습니다. 제가 괜한 의심을 한 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헌데 홈페이지에 가보니 번역을 시작하셨군요. 구매는 접었습니다. 님의 번역본을 살 생각입니다. 여기에 손수 번역하신 문장들, 참 아름답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도 같이 간결하고 정확한 문장입니다. 님의 번역본을 만날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반조 2007-04-23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번역본을 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약이 없는 것이므로 기다리시지 말길 바랍니다. 번역본 중에서 최승자 번역(청하)을 '차악'으로 추천합니다. 책값도 싸잖아요^^ 번역본으로 깊은 고민은 하지 마시고 후루룩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jsscy 2012-07-13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 이해불가였던 '짜라투스트라'를 다시 구입하려다 참 난감했습니다.
잘 모르는 저에게. 반조님 풀이야말로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품격이 있는 글이더군요.
기다리지 말라 하심, 참으로 아쉽습니다만.
차악으로 추천해주신 최승자 번역본을 구입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장이 비범하시더군요.

카도 2022-05-18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문장을 끊어놓고 뜻을 따져보면 몰라도, 그 긴 분량의 책을 전부 님이 해놓으신 예제처럼 번역한다면 페이지를 반도 넘기기 어려울 듯합니다. 원문을 살리겠다고 ‘오전도 지나갔다‘ 해버리면 거기서 읽기는 중단됩니다, ‘오전도 지나간다니? 뭘 지나가? 아하..‘ 그런 일을 감수할만큼 꼭 살려야만 하는 문장일까요? 마지막 예의 경우는 님을 제외한 번역가 넷이 모두 오역을 저질렀다곤 생각하기 힘들기도 하네요. 게다가, ‘내장점‘이라...
 

나는 내가 화염이자 숯덩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화염이자 숯덩이여라!
Ich sehe nicht, dass ich Gluth und Kohle wäre. Aber der Gerechte ist Gluth und Kohle!

—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3

 

화염과 숯덩이는 각기 다른 이질적인 존재다. 그것들은 둘이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화염이자 숯덩이”이다. 그러니까 정의로운 자는, 이질적인 둘이 하나가 된 존재다. 화염이면서 동시에 숯덩이인 존재,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궁금증은 독자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것은 니체 자신에겐 명료한 사실이지만, 다른 이들에겐 너무나 불명료하다. 니체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어두운 자”라는 별칭을 받을 만하다. 헤라클레이토스처럼.

헤라클레이토스는, “번개는 만물을 타고간다”(Diels-Kranz B64)고 했다. 이 말은 히폴뤼토스가 전한 단편이다. 그러므로 맥락을 통하여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이 세 단어, “번개는 만물을 타고간다”만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찌보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흡사 이런 식의 헤라클레이토스 단편들로 채워져 있는 듯하다.

내가 이렇게 불명료한 구절을 서두에 꺼내는 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배운 방식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대목들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역자들이 그토록 오역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오역이 없다고 믿는 것이 아닐까? 국내에 번역본이 십여 종 출판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어느 번역본에도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잠시 이야기를 돌려보자. 이진경은 한겨레신문의 기고문에서 선불교의 대표적인 어록인 «벽암록»을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쪽이 하나도 없었지만, 무언가 피할 수 없는 강한 감응을 주는, 그래서 결코 손을 놓을 수 없는 책”이라고 고백했다. 단 한 쪽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세 권짜리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책을 다 읽을 수 있다. 불가사의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일이 가능하다.

내가 보기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이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벽암록»과도 같다. 그렇잖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서 즐겨 읽는다. 다만 차이라면, «벽암록»을 꿰뚫은 자들로는 유사 이래 수많은 선지식들이 존재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 단편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만 분분하다. 나는 이것이 수행자와 학자의 차이, 동양과 서양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니체의 독해를 위해서는 수행자적인 안목이 있어야 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면, 아마 니체 전공자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니체 독자들에게 반감을 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안목이 없이는 니체의 위대한 통찰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내가 니체를 종교적 세계로 끌어들이려는 것은 아니다. 그의 통찰이 일반적인 사고(그러니까 학문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고준한 경지에 있음을 천천히 입증해 보이고 싶다는 것뿐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니체가 확연히 이해되는가? 학자들의 논문을 읽으면 시원하게 뚫리는가? 아닐 것이다. 단언하건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제도교육의 틀 내에서 니체를 간파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니체를 간파하기 위해서는 뭔가 다른 차원, 뭔가 다른 방식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니체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험” 혹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니체 자신의 말을 우리는 너무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제 그런 일면을 확인해 보자:

Ich sehe nicht, dass ich Gluth und Kohle wäre. Aber der Gerechte ist Gluth und Kohle!
나는 내가 화염이자 숯덩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화염이자 숯덩이여라!

문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활활 타오르는 숯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활활 타오르는 숯이다!

승자 나는 내가 이글이글 타는 불이며 숯불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하지만 정의로운 인간이란 이글이글 타는 불이며 숯불인 것을!

동호 나는 작열하는 불꽃도 숯도 아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은 불꽃이요 숯이다!

희창 나는 내가 타오르는 불꽃도 숯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정의로운 자는 타오르는 불꽃이며 숯이다!

위의 번역문들은 “불꽃이며 숯덩이”라는 것, 둘이 하나라는 것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지 못하다. 일단, “활활 타오르는 숯”(문수), “이글이글 타는 불이며 숯불”(승자)은 몹쓸 번역이다. “불꽃과 숯”으로 명확하게 나뉘어 있는 것을 대강대강 주물러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자신들의 감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 불꽃도 숯도 아니다”(동호, 희창)는 문장 역시, “불꽃이자 숯인 것은 아니라는 것”, 즉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나는 […] 불꽃도 숯도 아니다”는 번역문이 어째서 잘못되었는가? 이 번역문은 “dass ich Gluth und Kohle wäre”(내가 불꽃이며 숯덩이라는 것)이 접속법2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 안의 내용은 불가능한 의미여야 한다. 그래서 “불꽃이면서 동시에 숯덩이”라는 의미로 번역해야 하며, 이 말을 부정하자면 “불꽃이면서 동시에 숯인 것은 아니다”가 되어야 한다. 결국, “나는 […] 불꽃도 숯도 아니다”는 번역문은 원전의 심오한 해석 가능성을 박탈하고 있다. 이점에서는 승자의 번역이 유일하게 원문의 의도를 잘 살렸지만, "숯"을 "숯불"이라고 하는 바람에 도로묵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이질적인 둘이 하나가 되는 것, 혹은 하나인 것이 둘이 되는 것에 대한 니체의 비유법은 숲속 성인과의 만남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와 성인이 서로 헤어질 즈음에 나눈 대화를 읽어보자(<차라투스트라의 서설> 2):

“그러면 성인께서는 숲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차라투스트라가 물었다.

노래하고 울고 웃고 흥얼거리며 신을 찬미하는 게야. 그 신은 나의 신. 헌데 자네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하려는고?

차라투스트라는 이 말을 듣고 나서 성인을 하직하며 말했다: “내가 당신들께 드릴 게 무엇이 있으리오! 그러하니 어서 나를 놔두시오, 내가 당신들에게서 그 무엇도 취하지 않도록!”

위 인용문에서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 말을 살펴보자:

Was hätte ich euch zu geben! Aber lasst mich schnell davon, dass ich euch Nichts nehme!
내가 당신들께 드릴 게 무엇이 있으리오! 그러하니 어서 나를 놔두시오, 내가 당신들에게서 그 무엇도 취하지 않도록!

문수 나는 당신께 드릴 만한 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당신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하도록 빨리 보내 주십시오!

승자 내가 당신들에게 줄 무엇을 가졌으리오. 그러니 내가 당신들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아가지 않도록 나를 어서 보내주오!

동호 그대에게 줄 무엇이 내게 있겠는가. 나로 하여금 서둘러 나의 길을 가도록 하라. 내가 그대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하도록!

희창 드릴 것이 뭐 있겠소! 당신에게서 그 무엇을 빼앗는 일이나 없었으면 하오. 그러니 나를 빨리 보내주기나 하시오!

승자만 제외하고 모두 “당신들”을 “당신”이나 “그대”로 옮겼다. 2인칭 복수대명사를 2인칭 단수대명사로 뒤집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번역이 가능할까? 오역을 한 역자들은, 차라투스트라의 대화 상대자가 성인 한명 뿐이므로 “당신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맥락에 맞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바로 앞 문장에서 성인이 “노래하고 울고 웃고 흥얼거리며 신을 찬미하는 게야. 그 신은 나의 신. 헌데 자네는 우리에게 무엇을 선물하려는고?” 물었던 일을 잊었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성인”과 “성인의 신”을 두고 분명하게 “당신들”이라고 지칭했다. 이는 “신을 믿는 인간”은 하나인 자기 자신을 둘로 쪼개서 살아가는 인간임을 지적한 것이 아니겠는가?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분리된 실존의 인간으로부터, “당신들”로부터 그 무엇도 얻어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서둘러 헤어지지 않았겠는가! — 아무튼 이러한 해석의 가능성은 젖혀두더라도, 원문은 원문대로 옮겨야 한다. 역자들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해서 “당신들”을 “당신”이라고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자들은 버젓이 그렇게 옮기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원문에 대한 존경심이 없단 말인가.

 

원문에 대한 존경심이 없는 역자들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조금이라도 생소한 문장이 등장하면 갈팡질팡 헤매기 일쑤라는 것이다:

Ich will die Menschen den Sinn ihres Seins lehren: welcher ist der Übermensch, der Blitz aus der dunklen Wolke Mensch.
나는 인간들에게 그들 존재의 의미를 가르치고 싶다: 그 의미는 초인, 먹구름에서 떨어지는 번개 인간.

문수 인간이라는 검은 구름을 뚫고 번쩍이는 번개다.

승자 검은 먹구름인 인간으로부터 뚫고나오는 번개이다.

동호 사람이라는 먹구름을 뚫고 내리치는 번갯불이다.

희창 인간이라는 검은 구름을 뚫고 번쩍이는 번개가 아닌가.

“먹구름”과 “인간”을 병치시키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번개 인간”이라는 말에서 무슨 애니메이션 이미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welcher ist der Übermensch, der Blitz aus der dunklen Wolke Mensch“에서 “초인은 인간”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다른 대목에서 "그 번개, 이름하여 초인이라 하노라"라고 하였으므로, 역자들은 그 대목에 따라 "초인"과 "번개"를 병치시키기 위해서 "먹구름"과 "인간"을 병치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 독해의 어려움 중의 하나는 그런 식의 평행해석이 잘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번개 인간”이 너무 희화적이라고? 아니, 이보다 심오한 비유가 어디 있는가! “번개 인간”이 “화염이며 숯덩이인 존재”라는 생각을 해볼 수는 없겠는가? 재를 짊어지고 산으로 가서, 자신에게서 환한 불꽃을 발견하고, 불을 들고 계곡으로 내려온 차라투스트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고 보니, “인간이라는 먹구름” 따위로 옮기려면 “aus der dunklen Wolke Menschen“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먹구름”은 문법적으로도 허용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이 오역은 번개, 불, 화염, 불꽃, 숯, 재 등등 비유들의 연관성, 참으로 심오한 면면을 전부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책은 몰라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오역은 독자들에게 이토록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그때 자네는 자네의 재를 짊어지고 산중으로 갔어: 오늘은 자네의 불을 들고 계곡으로 가려는가?(<차라투스트라의 서설> 2)

형제들이여, 무슨 일이 있었던가? 나는 나를, 고통당하는 자를 극복했다, 내 자신의 재를 짊어지고 산으로 갔다, 더욱 환한 불꽃을 내게서 발견했다.(<배후세계 신봉자들에 관하여>)

나는 인간들에게 그들 존재의 의미를 가르치고 싶다: 그 의미는 초인, 먹구름에서 떨어지는 번개 인간.(<차라투스트라의 서설> 7)

나는 위의 문장들의 심오한 연관 가능성을 제기하는 한편으로, 앞서 인용했던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 “번개는 만물을 타고간다”도 함께 음미해 본다. 설명을 하기는 어렵지만(그리고 이것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니체도 누누히 강조했다시피!), 어쩐지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는 듯하다. 혹시, 니체와 헤라클레이토스는 뭔가 우리가 모르는 고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는 철학자들이 아닐까? 혹시, 그 연관성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는 우리는 대학의 인문교육에서 뭔가 열등한 것만 배웠던 것이 아닐까?

물론 위 문장들의 연관 가능성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 나의 본래 의도는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원문으로 읽을 때는 이런 해석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지만 번역본으로 읽을 때는 이런 해석 가능성이 완전히 닫혀 있다는 절망적인 현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논문 저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감출 수 있겠지만, 역자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결코 감추지 못한다. 번역에서는 그것이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게 역자들의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역자들이 원문을 심심찮게 훼손하면서 그리고 문법이나 구문론을 자주 무시하면서 자기이해로 칼질하는 것은, 그들의 부주의 탓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역부족 탓으로 돌리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부디 용서해 달라, 분명코 “역자들의 역부족” 탓이다. 니체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든 독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든, 그들은 모두 단계가 낮은 “현대인”들이다.

언젠가 하인리히 폰 슈타인 박사가 진심으로 나의 차라투스트라에서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겠노라고 불평했을 때, 나는 그더러 그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거기에서 여섯 문장을 이해했다는 것은 곧 체험했다는 것을 뜻하므로, “현대”인이 도달할 수 있는 명멸자의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에 오르시라. 어찌 내가, 이런 거리감을 갖고서, 내가 알고 있는 “현대인”들에게서 읽히기를 바라기라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개선가는 쇼펜하우어와는 정반대이니, 나는 말한다, “나는 읽히지 않는다, 나는 읽히지 않으리라.” (KSA 6, 298-299)

독일인이 독일어로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마당에, 오역이 즐비한 우리나라 번역본으로 이해가 된다는 것은 불가사의한 기적일 것이다. 국내 번역본은 모두 “현대인”에 의한 번역본이므로, 이 번역본들로 읽는 이상,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현재 그 누구에 의해서도 “읽히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읽히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역자들을 비평한다는 것이 몹시 괴롭다. 사실 이런 비평들은 내 성정에 어울리지 않는 것인데, 우리나라 니체번역 현실의 암울함에 편승해서 마음이 격해지기도 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널리 이해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더불어 역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각운을 맞추어 썼던 니체의 시 한편도 함께 전한다:

이 사람을 보라

그렇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알고 있어라!
만족이라고는 모른 채, 불꽃마냥
나 환히 빛나 나를 삼키노라.
내가 쥐는 것마다 모두 빛이 되고
내가 두는 것마다 모두 숯이 되니:
분명하여라, 나는 불꽃이어라. (KSA 3, 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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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6-11-08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즐겨 읽을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합니다. 저 역시 짜라투스트라를 읽으면서 환희심이 나기까지 한 적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그때 그 구절을 온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에게는 오쇼의 책이 도착했습니다. 이번 주엔 우선 해야 할 일이 좀 있어 책 표지도 열어 보지 못했어요. 그런데도 님의 페이퍼를 보고는 정동호 님이 옮긴 책을 꺼내 들고 앉았습니다.^^

반조 2006-11-08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오쇼의 책이 도착했습니다. 정성스런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앞으로 쉬엄쉬엄 읽어보아야겠습니다.
번역본에 오역이 많다고는 하나, 번역의 공이 크긴 크겠지요. 모든 대목을 다 오역할 수는 없으니까요^^ 언제나 두손 모아 감사드립니다.
 

무리에서 많은 이들을 끌어내기 — 위하여 나는 왔노라. 군중과 무리는 내게 분노할 터: 차라투스트라는 목자를 강도라 부르고자 하노라.

Viele wegzulocken von der Heerde — dazu kam ich. Zürnen soll mir Volk und Heerde: Räuber will Zarathustra den Hirten heissen.

—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9절에서

“목자와 강도”, 이 두 낱말이 함께 등장하는 중요한 문헌이 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0장이다. 개신교 성서의 개역개정판으로 읽어보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1-2) …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8) … 나는 선한 목자라(11) … 나는 선한 목자라(14) …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이것은 예수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선한 목자”는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을 인도하여 “한 무리”로 만들어 “한 목자”에게 있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그와 반대로 그 무리, 그 떼거리에서 많은 이들을 끌어내려고 한다. 그러므로 군중과 무리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분노할 것임은 당연하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10장의 비유를 패러디하고 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약성서를 여러 번 패러디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문체 역시 루터번역 성서를 많이 모방하고 있다. “siehe”(보라), “wahrlich”(진실로), 소유격 명사의 전치, “also”의 용법 등등이 그렇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다. 그러나 국내의 그 수많은 번역자들은 이것을 모르는 듯하다. 이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니체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청소년 시절에 이미 다비트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를 읽었을 정도였다. 그 책은 신약성서에서 신화적 요소를 벗겨내고 소위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저작이었다. 게다가 니체는 신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그런데, 번역자들은 이 사실을 꼭 모르는 것만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다음처럼 번역할 수 있겠는가:

Bildung nennen sie’s, es zeichnet sie aus vor den Ziegenhirten.
저들은 교양이라 부른다. 그것이 저들을 염소의 목자 앞에서 돋보이게 한다.(<차라투스트라의 서설> 5절)

문수 그들은 교양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들을 목자보다 뛰어나게 한다.

승자 그것을 그들은 교양이라 부르고, 그것이 그들을 양치기보다 우월하게 해주는 것이다.

동호 그들은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교육이란 것이 있어 그들을 염소치기와 구분해준다는 것이다.

희창 이 교양이란 게 있어서 그들은 염소치기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nun rede ich ihnen gleich den Ziegenhirten.
지금 나는 염소의 목자들에게 설교하듯 저들에게 설교하고 있다.(<차라투스트라의 서설> 5절)

문수 나는 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그들을 목자처럼 대했구나.

승자 그래서 지금 나는 저들에게 목자들에게 얘기하듯 얘기를 하는 것이다.

동호 마치 염소치기에게 말하듯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희창 마치 염소치기에게 말하듯 그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위의 인용문들이 왜 오역인가를 알기 위하여, 다시 신약성서를 들여다보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요한 10,1-2)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태 25,31-33)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태 25,41)

성서에는 “양의 목자”가 있을 뿐 “염소의 목자”는 없다. 성서에서 “염소”는 최후의 심판 때 영벌에 처해질 자들에 대한 비유이다. 그 동물은 매우 부정적이다. 예수는 “선한 목자”, “양의 목자”다. 그런데 니체는 이 “양의 목자”를 슬쩍 “염소의 목자”로 바꿔놓았다.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양의 목자”는 실제로는 “염소의 목자”이다. “양떼”야말로 영벌에 처해질 “염소떼”이다. 니체는 성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정반대의 의미를 겨냥하거나 패러디하기를 좋아했다. “염소의 목자”는 일종의 토포스, 일종의 전고(典故)인 것이다. 이 토포스를 놓치면 “염소치기”, “양치기”, “목자”로 잘못 옮기게 된다.

 

“염소의 목자” 토포스를 이해하면, 이제 <차라투스트라의 서설>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는 “Hirt”(목자)가 어느 맥락에서 쓰이고 있는가가 분명해질 것이다:

목자는 없고 한 떼의 무리만 있음이여! 저마다 동일한 것을 원하고, 저마다 동일하다.(5절)

한 무리의 목자와 개가 되지는 말라!(9절)

목자들에게 내 말하거니와, 그들은 자칭 선하고 의로운 자들이다.(9절)

나는 목자가 되어서는 아니되오, 산역꾼이 되어서는 아니되오.(9절)

산역꾼처럼 주검과 어울리는 자들, 한 무리로 모으는 자들, 저 자신마저 한 무리가 되고 마는 자들, 자칭 선하고 의로운 자들, 바로 그들이 “목자”, “자칭 선한 목자”, “염소의 목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목자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한 무리가 되지 않는 이들, 살아 있는 동반자들이 필요하다. 그 동반자들은 누구인가?

Sondern lebendige Gefährten brauche ich, die mir folgen, weil sie sich selber folgen wollen — und dorthin, wo ich will.
그게 아니다. 살아 있는 동반자들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여 나를 따르는 자들 — 그것도 내가 원하는 곳, 그곳으로.(<차라투스트라의 서설> 9절)

문수 (누락됨)

승자 자기 자신이 따라가고 싶은 까닭에 나를 따라가는, 그것도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나를 따라가는 살아 있는 길동무를.

동호 그들 스스로가 원하여 내 가는 곳으로 나를 따라가려는, 살아 있는 길동무가 있어야겠다.

희창 나를 따라올 살아 있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그들 스스로 내가 가려는 곳으로 따라오고자 하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살아 있는 동반자는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여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는 자들”이다. 분명히 구분해 두지만, 이들은 “자기 스스로 원하여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커다란 분수령이 이루어지는 구절인데, 역자들은 한결같이 잘못 번역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추종하는 “한 무리의 떼”, “신자들”이 필요하지 않다. 이런 신자들은 살아 있는 동반자들이 아니라 “주검들”, “죽은 동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별”을 낳지 못하는 인간, 창조하지 못하는 인간, 목자는 없고 한 떼의 무리로만 존재하는 인간, 마지막 형태의 인간,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 “최후의 인간들”이다.

이와 반대로 살아 있는 동반자는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는 자들”, 그리하여 “함께 창조할 자들”, “함께 수확하고 함께 축제를 벌일 자들”, “홀로의 은자들, 짝을 이룬 은자들”! 그들의 마음은 차라투스트라의 행복으로 무거워질 것이다.

홀로의 은자에게, 짝을 이룬 은자에게, 내 송을 불러주리; 그리고 전대미문의 것을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 나의 행복으로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겠노라.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9절)

차라투스트라의 살아 있는 동반자들 반대편에는 무리, 목자, 주검이 있다. 살아 있는 동반자들은 무리, 목자, 주검과 더불어서는 그 무엇도 창조할 수 없다. 그리하여, 무리를 이룰 수 없는 그들은 홀로의 은자들이거나 짝을 이룬 은자들이다. 그들은 함께 있더라도 저마다 은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차라투스트라의 행복으로 하여, 무거워질 것이다, 뭔가 덩어리가 되어갈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서설>에서 이미 “염소의 목자” vs 차라투스트라, 무리 vs 은자, 주검 vs 산 자, 신도 vs 벗, 등등의 대결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흥미진진하게 작위적으로 조장한 대결이 아니라, 어떤 정신성 간의 대결이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선과 악의 대결, 선과 “극악무도한 것”의 대결이라고 칭하겠지만 …

조심하시라! 그 뭔가 극악무도한 것이 예고된다: 패러디가 시작된다.

man sei auf seiner Hut! Irgend etwas ausbündig Schlimmes und Boshaftes kündigt sich an: incipit parodia. (즐거운 학문, 2판 머리말)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 한글 번역본에는 패러디가 빠져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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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6-11-0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책을 면밀히 읽지 못해"그들은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교육이란 것이 있어 그들을 염소치기와 구분해준다는 것이다"와 "염소치기에게 말하듯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가 있는 부분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본 듯한데, 어쨌든 9절에서는 찾을 수가 없네요.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요. 님의 노고로 제가 무척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네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여 나를 따르는 자들"이란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님의 오역 지적을 보니 책 읽기가 좀 두렵습니다.^^

반조 2006-11-0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인용문의 출처를 일일이 안 밝혀놓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군요. 어서 출처를 밝혀놓겠습니다. 이누아 님께서 언급하신 내용은 5절 앞대목과 뒷대목에 각각 나옵니다.
 

Lange schlief Zarathustra, und nicht nur die Morgenröthe gieng über sein Antlitz, sondern auch der Vormittag. Endlich aber that sein Auge sich auf: verwundert sah Zarathustra in den Wald und die Stille, verwundert sah er in sich hinein. Dann erhob er sich schnell, wie ein Seefahrer, der mit Einem Male Land sieht, und jauchzte: denn er sah eine neue Wahrheit.

오래도록 차라투스트라는 잠을 잤다. 여명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가고, 오전도 지나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눈이 열렸다: 경이롭게, 차라투스트라는 숲속을 보았고 정적(靜寂)을 보았다. 경이롭게, 자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번뜩 뭍을 본 뱃사람처럼, 탄성을 질렀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보았던 것이다.

—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9절에서

새로운 진리를 보았다? 아마 많은 이들은 이 표현이 낯설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흔한 언어 습관대로라면, 우리가 인식하는 것, 아는 것, 혹은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니체는 굳이 “보다”(sehen)는 동사를 썼다. 이 하나만으로도 니체는 경이로운 존재다.

“진리를 본다”는 표현은 서양고대에서부터 있어온 비의적 계열, 혹은 신비주의적 계열에서 사용되어 온 것이다. 가령, 엘레우시스 비교에서 최고 지위에 오른 이는 “본 자”, “견자見者”라는 의미의 “epoptes”였다. 이것은 «비극의 탄생»에서도 언급된 바 있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아예 독일어 “Seher”로 번역되어 여러 번 등장하고 있다. 불교의 초기경전에서도 “보다”는 낱말은 깨달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선불교에서도 깨달은 자리를 두고 “견처見處”라는 낱말을 쓰기도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인간의 마음, 혹은 인간 정신의 어느 한 고원에 대한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현대인들은 신비주의에 대한 지독한 편견에 빠져 있다. 그것은 무슨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행태처럼 간주된다. 서양 기독교가 이에 일조한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의 역사는 낮은 수준의 신비주의만 용인하고 높은 수준의 신비주의는 배격하는 경로를 밟아왔다. 높은 수준의 신비주의는 기독교 교의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 정적주의, 야콥 뵈메, 에크하르트 등이 그 사례이다.
 

오쇼 라즈니쉬의 표현을 빌면, 니체는 “붓다적인 요소와 조르바적인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그가 서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동양이라면 불교의 영향 아래 禪이나 명상을 통해 니체가 숨쉴 만한 공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니체 당시의 유럽에서는 불교라는 이름 아래 우파니샤드나 인도 잠언 등이 이제 갓 번역되기 시작한 참이었다.

니체를 “신비주의자”로 보는 것, 이것은 많은 니체 독자들을 당혹케 할 것이다. 아마 굉장한 이질감, 굉장한 반감을 가질 것이다. 그러면, 니체와 불교가 유사한 면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공격을 받을 지도 모른다. 니체가 불교를 공격한 대목은 여럿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니체의 글들을 읽으면서 불교적 명상, 혹은 禪의 세계에서나 나올 법한 통찰과 이미지를 보았다. 참 놀라웠다. 그러나 이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며칠 전 «오쇼의 짜라투스트라»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세상에 알려진 가장 위대한 철학자일 것이다. 니체는 타고난 신비주의자이며 또한 많은 철학자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다른 차원에 있어서도 위대함을 발휘했다.

그의 철학은 단순히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슴속 깊숙이 뿌리내린 심오한 철학이다. 그 뿌리의 일부는 존재의 심층부에까지 이른다.

그에 관해 아쉬움이 있다면, 그가 서양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그에게는 어떠한 신비주의자와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는 깊이 있게 사유했지만 명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사유는 때때로 명상가의 심오함을 가지기도 하고, 붓다의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존재의 중심에 이르는 깨달음의 도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러한 무지는 그의 존재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별만큼 높은 경지를 꿈꾸었으나 그의 삶은 여전히 매우 일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 그의 삶에는 명상이 가져다 주는 번뜩거리는 뭔가가 없었으며 그의 사상은 피가 되어 뼈 속까지 스며들지 못했다.

— 손민규 옮김, «오쇼의 짜라투스트라»(나무의꿈)에서

* 위 번역문 중에서 “그의 삶에는 명상이 가져다 주는 번뜩거리는 뭔가가 없었으며 . . .”는 적절한 번역이 아닐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원문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만나 본 니체 애독자들이 니체와 불교의 친연성에 대해 쾌히 수긍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나는 이제 내 느낌을 좀더 확연하게 드러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오역 점검은 그런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니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존 번역자들이 니체의 통찰에 접근하지 못하고 속속들이 무너지는 대목들을 집어내겠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부디, “신비주의”라는 말에 편견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신비주의”라는 말을, 다름아닌 현대의 서양식 교육에 의해 유린된 인간 정신의 위대성, 니체의 위대한 통찰들을 되살리기 위한 시도쯤으로 간주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기 때문이다.

 

서두에 인용한 니체의 글로 되돌아가자. 독일어 초학자들은 인용문의 독일어가 니체 당시의 표기법에 따른 것임을 유념하기 바란다.

Lange schlief Zarathustra, und nicht nur die Morgenröthe gieng über sein Antlitz, sondern auch der Vormittag. Endlich aber that sein Auge sich auf: verwundert sah Zarathustra in den Wald und die Stille, verwundert sah er in sich hinein. Dann erhob er sich schnell, wie ein Seefahrer, der mit Einem Male Land sieht, und jauchzte: denn er sah eine neue Wahrheit.

“진리를 보았다”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다. 이것을 “진리를 알았다”, “진리를 깨달았다”로 옮기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두지만, 오역이다.

그리고 “sah … in den Wald und die Stille”는 “숲속과 고요 속을 보았다”, 혹은 “숲속과 고요를 보았다”로 옮겨야 한다. 흔한 생각으로는, “숲과, 그 숲의 고요를 보았다”로 읽기 십상이다. 그래서 많은 역자들이 “숲과 그 고요를 보았다”는 식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숲과 고요”와 “숲과 그 고요”는 다르다. 이것이 왜 다른지 모르는 이들에게 설명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냥 원문대로 “숲과 고요”라고 옮기면 된다. 왜 한결같이 약속이나 듯 원문과 다르게 옮기는가!

너무나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 차이를 모르는 이들에겐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은 이것만이 아니다.

Ein Licht gieng mir auf.
하나의 빛이 내게 트였다.

이것은 툭 트여 사방이 환한 상태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때는 정오다! 그저 숲속에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이 비치는 장면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을 “한 줄기 빛이 비쳤다”는 식으로 번역하면 안 된다. 이렇게 단순한 문장에 이렇게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인용문의 “that sein Auge sich auf”를 “그는 눈을 떴다”는 식으로 번역할 수는 없다. 이것은 당연히 “그의 눈이 열렸다”나 “그의 눈이 뜨였다”로 옮겨야 한다. 결국, 하나의 차이가 무수한 차이를 만든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존번역들이 위 인용문을 어떻게 번역했는가 비교해 보자(1):

문수 짜라투스트라는 오랫동안 잤다. 아침놀만이 아니라 오전의 햇살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눈을 떴다. 짜라투스트라는 의아한 눈으로 숲속과 그 고요를 바라보았고 의아한 눈으로 자기 내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갑자기 육지를 발견한 선원처럼 벌떡 일어나 환성을 질렀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승자 오랫동안 짜라투스트라는 잤고, 아침놀이 그의 얼굴 위로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눈을 떴다. 놀라서 짜라투스트라는 숲속과 숲속의 정적을 바라보았고, 놀라서 그는 자기 자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서 그는, 문득 육지를 본 뱃사람처럼 급히 일어나며 환성을 올렸다. 새로운 진실을 봤기 때문이었다.

동호 차라투스트라는 오랫동안 잤다. 아침놀뿐만 아니라 오전 한나절의 햇살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내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놀란 듯이 숲과 그 적막을 들여다보았다. 놀란 듯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갑자기 뭍을 발견한 뱃사람이라도 되는 양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환호했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희창 차라투스트라는 오랫동안 잤다. 아침놀뿐만 아니라 오전 한나절의 햇살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마침내 그는 눈을 떴다. 차라투스트라는 놀란 눈길로 숲과 그 고요함을 바라보았고 놀란 눈길로 자기 내면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뭍을 발견한 선원처럼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이 있다. “sondern auch der Vormittag”(오전도 지나갔다)의 번역 문제이다. 승자는 부주의로 누락했고, 나머지는 한결같이 “오전의 햇살”, “오전 한나절의 햇살”이 지나갔다고 번역했다. 제발 그리 하지 마시라. 그냥 “오전”이 지나간 것이다. 왜 원문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군살을 덧붙이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로서는 너무 높은 문제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를 자신들의 정신적 수준에 맞게 기어코 끌어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높은 문제들은, 그 문제들을 해결할 만한 정신성의 높이와 힘을 가진 자로 점지되지 아니한 채 그 문제들에 감히 접근하는 자는 누구든, 무자비하게 되받아친다.

und die höchsten Probleme stossen ohne Gnade Jeden zurück, der ihnen zu nahen wagt, ohne durch Höhe und Macht seiner Geistigkeit zu ihrer Lösung verherbestimmt zu sein. (KSA 5, 148)

특히 니체의 다음 언급을 고려하자면, 역자들은 부디 니체의 한마디 한마디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이고 비유가 무엇인지 더 이상 개념을 얻지 못하리라. 모든 것이,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르고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주어졌다. 실제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회상하건대, 사물들이 스스로 다가와 비유가 되어주기라도 한듯하다.

man hat keinen Begriff mehr, was Bild, was Gleichniss ist, Alles bietet sich als der nächste, der richtigste, der einfachste Ausdruck. Es scheint wirklich, um an ein Wort Zarathustras zu erinnern, als ob die Dinge selber herankämen und sich zum Gleichnisse anböten. (KSA 6, 340)

“사물들이 스스로 다가와 비유가 되어준다” — 이것이 “오전의 햇살”, “오전 한나절의 햇살” 따위로 옮겨서는 아니되는 이유이다. 역자들은 "얼굴 위로 오전이 지나간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서 "오전의 햇살"을 덧붙혔겠지만, 그것은 니체에 대한 모독이며, 앞으로 등장할 탁월한 독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부디, 탁월한 독자들의 눈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일은 하지 마시라!

 

이번 오역 점검에서 너무 사소한 문제를 건드렸다는 생각을 가질 분들도 있을 것이다. 흔한 기준으로는 오역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가장 사소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커다란 것이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차이가 결국에는 허다한 오역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눈에 단번에 띄는 오역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한 것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오쇼 라즈니쉬의 말을 여기에 옮긴다. 니체의 독자라면, 라즈니쉬의 니체해석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다음의 견해에 대해서만큼은 십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오쇼의 차라투스트라»는, 알라딘의 미리보기를 통하여 20여 페이지를 읽어볼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매우 함축적인 문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에 쓸 것을 그는 단 한 문장으로 썼으며 그렇기에 문장 하나하나가 더욱 의미 심장하다.

만약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그대는 니체가 말하는 것을 놓치고 말 것이다. 니체의 이 책은 소설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우파니샤드의 경전들과 거의 비슷하다. 각각의 격언들이 엄청난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나는 그대의 오해를 막기 위하여 숨은 암시들을 낱낱이 파헤치고자 한다. 니체는 세상에서 가장 오해받기 쉬운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너무나 함축척인 문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암시들에 대하여 결코 구구한 설명을 달지 않았다.

그는 매우 상징적인 사람이다. 그가 그토록 상징적이 이유는, 설명할 만큼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새로운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것을 나누어 주려고 했고 그러기에는 삶이 너무나 짧다고 생각했기에 논문을 쓸 수가 없었다.

그의 저작은 너무나 의미 심장하고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설령 그들이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이해는 오해에 불과하다. 그들은 도저히 니체를 읽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그들은 모든 것이 설명되기를 원한다.

니체는 어린아이를 위하여 쓰지 않았다. 그는 성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썼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사람들의 평균적인 정신연령은 열네 살을 넘지 못한다. 이런 정신 연령으로는 니체를 놓치고 말 것이다. 니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니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니체의 추종자들 역시 니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정신연령은 똑같은 수준이다.

— 손민규 옮김, «오쇼의 짜라투스트라»(나무의꿈)에서


각주

  1.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 서지 표기는 이후의 글에서도 유효하게 쓰일 것이다:

     

    문수 황문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문예출판사, 1975)
    승자 최승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청하, 1984)
    동호 정동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책세상, 2000)
    희창 장희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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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아 2006-11-0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독어를 몰라 이런 글에 댓글을 달 형편도 못 됩니다만 진리는 몰랐던 어떤 것을 아는 게 아니라 길가의 간판이나 가로수처럼 늘 보이는 그곳에 있었는데 눈이 밝지 못하거나 주의를 다하지 못해 못 보거나 그냥 지나치는 무엇 같습니다. 그가 진리를 본 후 송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길동무가 있어야 겠다고 생각하는군요. 님이 추천해 주신 정동호 님의 책은 즐거이 읽다 요즘 집에서 책 읽을 시간이 없어-이런 책은 들고 다니기에 조금 부담됩니다^^-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14살 짜리 아이처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말 투성이인데도 힘겹게 읽지는 않습니다. 때로 즐겁기까지 합니다. 이해를 못해 그런 걸까요?^^ 읽었던 구절인데도 이렇게 번역의 문제 때문에 다시 만나니 또 새롭습니다.

페이퍼 읽다 꺼내든 책, 문득 아무 데나 펼치니 눈이 깨끗해져야 한다는 구절이 보입니다.

"정신의 해방을 쟁취한 자는 이제 자기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아직도 허다한 감옥과 곰팡이가 그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눈 또한 깨끗해져야 한다."-동호, p.70.

님의 홈피로 가지 않고도 여기 알라딘에서 님의 오역 점검을 볼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페이퍼는 서재에 가져가 두고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반조 2006-11-0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이누아 님께서 차라투스트라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을 때, 사실 저는 번역본을 비교해 본 적이 없어서 직접 추천하지는 못했지요. 다만, 여러 사이트의 추천평들을 전해드렸는데 정동호 역본을 택하셨군요.

이누아 님의 추천 부탁 후,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오역 점검도 결국 이누아 님 덕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일부분이나마 여러 번역본들을 비교해 보니 최승자 번역본이 개중 낫지 않나 하는 짐작이 듭니다. 차라투스트라 1부 전체를 세심하게 읽고 각 번역본들을 비교해 본 다음에, 전체적인 번역비평을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이누아 님과 같은 탁월한 독자분들을 위해서라도 진짜배기 차라투스트라 번역본이 나와야 할텐데, 그 날이 언제가 될른지...

2006-11-02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08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진짜배기' 번역본이 안 나온 것인가요? 덕분에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집어들게 될 거 같습니다.^^

반조 2006-11-08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반갑습니다.

소동파 2007-05-10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석현 번역본이 새로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