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대학 불교학과 - 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교 공부
정상교 지음 / 동아시아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소설보다 재미있는 불교공부”라는 역설적 부제가 붙은 정상교의 「토쿄대학 불교학과」(동아시아 2014)는, 1970년대에 태어난 세대가 어떻게 불교를 접하며 성장했으며, 어떻게 불교를 공부하게 되었는가 하는 개인적 여정을 토대로 불교사의 주요 장면과 사상을 서술한 책이다. 책 표지 소개문에 따르면, “인도 불교, 티베트 불교, 소승 남방불교, 중국의 선불교, 그리고 한국 불교까지” 포괄적으로 다루었다고 하지만, 초기불교는 상대적으로 거의 다루지 않았다고 해도 무방하며, 인도의 중관•유식 이후 전개된 불교를 주내용으로 하고 있다. (지나가는 김에 언급해 두자면, 저자는 "소승 남방불교"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표지 소개문은 출판사의 잘못으로 보인다.) 그리고 저자는 불교학을 공부하는 학인인 만큼 현대불교학의 태동과 동향, 현대불교사까지 포함한 다채로운 내용으로 정말 소설보다 재미있게 불교를 소개했다.


부처님 열반 후 경전 결집, 나가르주나, 구마라집(반야•중관), 선불교, 현장(유식), 카밀라실라(티베트), 한국불교, 서양불교학, 일본불교학, 그리고 정상교, 사촌형, 금강대학교, 도쿄대학 불교학과. 이것이 이 책의 서사구조이다. 한국에서 태어난 정상교라는 젊은이가 흔한 수준의 불교정보만 풍월처럼 접했다가 우연찮은 기회에 불교학에 빠지고, 이후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를 공부하면서 불교가 인도에서 태동하여 실크로드를 가로질러 여기 이 땅에 이르기까지의 장엄한 여정을 발견한 과정을, 마치 소설처럼 구성하여 개인사와 긴밀하게 연계시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여기 있는 이 한 사람, 바다보다 깊고 우주보다 넓은 이 한 사람에게서 새롭게 펼쳐지는 것…. 그래서 정상교의 불교 소개는 어렵고 건조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하며, 그 정보 구성도 치밀하여 허술하지가 않으며, 개인사가 함께 흘러가면서 감동적이다.


특히 류시화 번역의 「티벳 사자의 서」에 대한 평이라든가 강신주의 「중론」 인용에 대한 평, 즉 “1차 언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수준 낮은 서적들”(298)에 대한 평을 접하며, 오랜만에 속이 시원했다. 저자가 원만한 감성과 구도자적인 진지한 자세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 두 사람의 책에 대하여 유독 신랄한 평가를 내린 것은,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 경론을 면밀히 독해하는 문헌학자적 자세 때문일 것이다. 고전어의 세계에 들어서면 일상적인 해석체계를 파괴하는 여정을 밟게 마련이며, 그 여정에 들어선 자로서 고전어 텍스트에 대한 피상적인 소개글을 접하노라면, 히말라야와 같은 설산들이 속악한 풍경으로 채색되는 광경을 목도하는 듯한 아픔을 느끼게 된다. 이는 고래로부터 모든 선각들의 고민거리였으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겠지만, 가끔씩은 이런 신랄한 평을 내리는 안목들이 그립기는 한다.
 


저자의 이력이 이채롭다. 삼십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에는 거의 문외한이었다가, 대학 재학생 모두에게 4년 장학금에다 유학비용까지 대준다는 한 불교대학의 광고를 접하고 늦깎이로 다시 수능시험을 치루고 불교대학에 입학, 졸업후 도쿄대학 불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하여 현재 인도-티베트 불교를 공부중이다. 일본 불교학은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만큼, 그 공간에서 공부하는 방식이나 현대 불교문헌학에 대한 소개도 흥미롭다.


도쿄대학 불교학과 대학원생들의 학습풍경을 한 번 들여다보자. 갓 합격한 대학원 예비입학생도 선후배들 간에 함께하는 산스크리트어 경론 독해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예비입학생 정상교가 독해를 한다. 그러면 선배가 그 내용을 듣고, “연기”라는 낱말이 무엇인지 묻는다. “연기”라는 산스크리트어의 낱말분석과 초기경전 용례 등등을 꼬치꼬치 묻는다. 그러면 후배는 그 자리에서 답해야 한다. 자신은 왜 “연기”라고 번역했는지 분명하게 그 근거를 대야 한다. 모르면 그 자리에서 사전과 문법서라도 참고하여 답해야 한다. 그 답을 하기까지 선배들은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 이건 뭐 취조가 따로 없을 정도이지만, 공부는 이렇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 공부 분위기가 부럽다. 아, 내가 저런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마저 든다.


나 역시 삼십대에 이르기까지 불교에 완벽한 문외한이었다가 삼십대 중반에 비로소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으며, 저자 정상교와 거의 같은 세대다. 물론 나는 철저히 독학으로 불교를 공부하고 있으나 그가 책 끝에 소개해놓은 서적들도 대부분 읽었던 것들이며, 특히나 후기중관학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다르마키르티의 불교인식론 소개까지 있어서 반가웠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중관과 유식을 소화해내지 못한다면 초기불교의 십이연기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면에서 저자와 같은 중관과 유식 전공자들이 그 어떤 대하드라마보다도 훨씬 장쾌한 불교 서래사(西來史)을 가슴에 품으며 그 일급의 사상을 현대적 서술로 풀어낼 날을 기대해 본다. 그것은 내 꿈이기도 하지만, 보다시피 일상인인 나에게 그것은 그저 꿈에 불과할 뿐이므로.


마지막 장에서는 나가르주나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한다. 특히 저자는 나가르주나의 생애를 문학적으로 재구하여 소개해놓고 있는데, 그 솜씨가 만만찮다. 다르마키르티의 사상을 소개한 타니 타다시의 「무상의 철학」을 읽어보면 그 문학적 감수성이 과다하여 감성 취향의 소설처럼 읽기가 거북하다. 수행중에 조금이라도 체득한 바가 있다면 반드시 그런 수준의 감수성은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는데도 아직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교 경론의 독해에 취약한 인물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에 비하자면, 정상교의 감수성은 그런 수준을 넘어서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관세음보살”이라는 번역어 성립을 두고 “소리를 살펴보다”라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평했는데, 소위 “이치”라는 것도 하나의 감수성에 불과함을 유념해 주었으면 한다. 태고보우의 선시에도 “곡조를 본다”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역자들은 한결같이 “곡조를 듣는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과연 그게 옳은 번역일까? 선가에서 회자되는 육창일원(六窓一猿)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 안이비설신의라는 육근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소리를 본다”는 표현은 뭔가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불교 경론을 해독할 때에는 이와 같은 심층을 염두에 두고 표현 하나하나에 조심스럽고 겸허하게 접근해야 한다. 나는 대학원 시절에 서양고전문헌학을 공부하면서 소장학자들은 텍스트를 마음대로 다루는 경향이 심하고 노장학자들일수록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룬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에게 이해되지 않는다하더라도 최대한 텍스트를 수정하지 않고 그것이 이해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문헌학자에겐 바로 이와 같은 유장한 자세, 노년의 지혜가 필요하다. 하물며 불교 경전을 다루는 학자에게랴!
 


저자는 불교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우연한 정보에 기반한 듯이 소개하나, 사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성장기에 겪은 욕망과 죽음의 문제를 풀 길이 없었으며 그 의문이 바로 이 불교학으로 이끌었음을. 불교는 바로 이런 의문을 가진 자에게 접근을 허락한다. 단순한 지적 호기심이나 지적 허영으로 접근한다면 불교는 난해하기 짝이 없는 유산에 불과할 것이며, 저자처럼 씻을 수 없는 아픔과 쇳덩어리와 같은 의문을 품고 접근한다면 불교는 무량•무수•무변의 장엄한 세계를 펼쳐보일 것이다. 수행법에 고착되어 불교공부를 협애화하는 이 시대에, 초기불교와 구사, 중관, 유식, 화엄, 선, 영화, 애니메이션, 현대문헌학을 아우르면서 불교를 ‘재미있게’ 소개한 소장학자의 건강과 성실과 진취를 기원한다.


더불어, 불교공부에 관심이 있으나 어떻게 접근할 지 몰라 애를 먹는 젊은 세대에게 이 책이 널리 읽히기를 기대해본다. 현각스님의 「만행」처럼 흡입력 있게 읽히면서도 그보다 무게감 있게 불교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에 관심 있는 분들이 「도쿄대학 불교학과」에 소개된 불교사와 사상을 자기 나름으로 구성하려면 숱한 불교서적을 찾아헤매며 읽어야 하지만, 이 책은 그 과정을 쉽고 간단하게 요약해 주는 장점도 있다. 물론 그런만큼 불교사상의 심층을 다루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것은 이 책을 읽고난 이후 각자 밟아야 할 여정일 것이다.


바야흐로 새로운 세대가 새로운 방식의 불교공부를 원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윗 세대는 기존 양태의 불교신행을 가슴 깊이 수용하고 있다. 이 간극에서 불교를 어떻게 배우고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어느 한편을 집착하고 다른 편을 배척하는 방식은 성숙하지 못한 인생의 몫이다. 우리는 이 두 세대를 모두 배우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하며, 질문자의 공부역량과 근기에 따라 그에 맞게 예우하여 가르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초기불교의 연기와 사성제, 반야, 중관, 유식, 화엄, 선에서 수승한 가르침을 회통하여 간파할 줄 아는 안목을 길러내야 한다.

어떤 것을 연하여, 비구여, 희론(戱論)-상(想)-의미(意味)가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거기에 즐길 것이, 주장할 것이, 집착할 것이 있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집착의 잠재성향의 끝이며, 이것이 바로 증오의 잠재성향의 끝이며, 이것이 바로 의심의 잠재성향의 끝이며, 이것이 바로 아만의 잠재성향의 끝이며, 이것이 바로 무명의 잠재성향의 끝이며, 이것이 바로 손에 몽둥이를 쥐고 칼을 쥐고 다투고 겨루고 싸우고 비난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것의 끝이다. 여기에서 이들 나쁘고 해로운 상태들이 남김없이 그친다.


—「마두핀디카 숫타」에서

우리는 일견 상충되고 모순되는 듯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를 목도하면서, 옛 세대의 불교수용과 새 세대의 합리적 사고의 차이를 목도하면서,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희론-상-의미”에 집착하지 않은 채 그 차이를 부각시키거나 소멸시킬 줄 알아야 한다. 번뇌 속의 논리로 치밀하게 불교의 가르침을 구축하는 한, “손에 몽둥이를 쥐고 칼을 쥐고 다투고 겨루고 싸우고 비난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수행중 일어나는 체험에 취하여 그것을 붙잡고 그 시각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취하는 한, 역시 “손에 몽둥이를 쥐고 칼을 쥐고 다투고 겨루고 싸우고 비난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희론-상-의미의 집착을 뿌리로 이루어지는 공부, 즉 생각의 내용물의 노예가 되어 이루어지는 공부이므로. 그것들은 다름아닌 무명과 아만과 의심과 증오와 집착이라는 칼숲에서 벌어지는 불교공부이므로.

천한 자란 누구인가?
불타는 탐욕으로 자신을 태우고
언제나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화를 내며
사람을 증오하고, 사악하며
겉으로만 꾸며서 사람을 속이고, 바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책략을 부리는 자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폭력에 호소하고, 알량한 육신의 영화를 위해 모든 것을 저버리는 자
그를 우리는 천한 자라고 하는 것이다.
태어남에 의해 천민인 것이 아니다.
태어남에 의해 브라만인 것이 아니다.
행위에 의해 천민이고 행위에 의해 브라만인 것이다.(316)

우리는 불교공부를 하면서도 천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스스로를 살필 일이다. 저자처럼 가슴에 얹힌 의문을 풀기 위해 불교사를 장엄하게 탐색하는 여정에는 천한 자들의 탐욕과 화, 증오가 자리잡을 틈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스스로의 의문을 풀기 위해 불교를 공부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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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새벽예불
송광사 노래 / 31 프로덕션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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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제까지 절집의 예불을 녹음한 음반을 거의 대부분 들어본 경험에 바탕해서 소감을 말하자면, 송광사의 새벽예불은 자연스러운 인간미가 돋보인다. 낮고 느리고 부드럽고 온후한 남도의 풍광을 닮았다. 그리고 송광사의 예불만큼 음반으로 많이 출시된 경우도 드물다. <空 — 소리로 찾아 떠나는 그 곳, 山寺>(저녁예불)를 비롯하여, <승보의 울림>(새벽예불), <松廣寺—첫번째 소리>(저녁예불) 등의 음반을 통하여 송광사의 예불을 접해볼 수 있다.

이제 이 목록에 지난달에 새로 나온 새벽예불 음반, <松廣寺>가 추가되었다. 해인사, 운문사, 송광사의 저녁예불을 각각 일부씩 녹음한 <空 — 소리로 찾아 떠나는 그 곳, 山寺>를 논외로 하자면, 이번에 나온 음반은 이제까지 나온 송광사 예불녹음과는 녹음의 수준에서 질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전의 음반들이 절반되어 더는 구할 수 없는 마당에 고품질로 녹음된 음반이 나옴으로써 송광사 새벽예불을 접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귀한 선물이 될 듯하다.


<승보의 울림>과 비교해 볼 때, <松廣寺>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천수경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송광사의 새벽예불에 직접 참례한 적이 없는지라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만일 천수경 독송이 단지 음반에서만 빠진 것이 아니라 실제 예불에서 제외된 것이라면, 매우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소한 차이점을 말하자면, <승보의 울림>에서는 범종의 타종횟수가 매우 짧은 분량만(4분의 1가량) 실려 있었다면, <松廣寺>에서는 비교적 긴 분량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모두 스물여덟 번의 타종 중에서 절반가량만 실려 있다는 것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음반의 물리적 한계상 80분 분량을 초과할 수 없는 까닭에 금강경 독송을 싣자면 부득이 도량석이나 사물에서 일부를 축약하여 실을 수밖에 없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전 음반에 실린 도량석이 매우 짧아 분량을 많이 줄여서 실었는가 보다 짐작했지만, 이번 음반에서도 도량석이 매우 짧은 것을 보니 송광사의 전통이 군더더기 없이 짧고 간소하게 도량석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닌게아니라 음반 내지의 설명을 보니, 송광사에서는 “도량석에서는 오로지 목탁소리”만 울린다고 한다. 그런데, 범종의 소리를 전부 싣더라도 80분을 초과하지 않는 것으로 계산이 되는데, 왜 줄여서 실었는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송광사의 타종횟수가 열 너댓번에 불과한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송광사의 예불녹음을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의 예불녹음 음반들이 한결같이 범종의 타종횟수를 줄여서 편집하여 싣는 이유는, 아마도 청중들이 범종이 느리고 긴 호흡으로 십여 분간 반복되는 것을 지루하게 여길 것이라는 편견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부디 그런 편견은 버렸으면 한다. 나같은 경우에도 범종이 장중한 호흡으로 울리는 십여 분간이 그토록 아름답고 고요할 수가 없다. 그 소리, 마냥 길게 길게 듣고 싶기만 하다. 산사의 모든 소리를 단 하나의 소리에 모았다가 두웅 하고 울리퍼지며 산하로 사무쳐 들어가는 아름다움을 본 적이 있는가? 생명들의 호흡을 여탈하며 자타가 성불하는 일시(一時)처럼 장엄한 그 순간이 무한히 반복되는 아름다움인 것이다. 그 아름다움을 그 모습 그대로 찾는 청중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승보의 울림>이 송광사에서 자체 녹음한 것인데도 일정한 녹음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은 다른 글에서 밝힌 바 있다. 그에 반해, <松廣寺>의 녹음은 전문업체에서 녹음한 것으로, 모든 트랙에서 깊은 공간감과 현장성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범종소리는 종루 주변에서 차수하고 가만히 서서 듣던 소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타종과 함께 퍼지는 두웅 소리의 여음과 범종이 흔들리면서 흔드는 우웅 우웅 하는 저음의 잔향이 그대로 귓전에 와닿는다. 소리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귓가를 어루만지는, 몸을 흔드는 물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제까지 들어본 범종의 녹음 중 가장 정밀하고 훌륭하다. 다만 절반 분량으로 줄여서 편집한 것만이 아쉬울 따름이다.

한국불교사를 살펴보면, 7세기 이전에 이미 불교음악이 있었고, 예불 의식도 7세기 무렵에는 치러졌다고 한다. 따라서 예불 음악의 역사는 1,300년이 넘는 셈이다. 현재 새벽예불 의식에 포함되어 있는 다게례는 신라 이후로, 축원과 조석예불은 고려 이후로 정착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의식이다. 그리고 종송에는 고려 이후로 만들어진 여러 게문들이 중첩되어 있다. 심지어 반야심경과 팔정례의 독송에는 한국 현대 불교의 영향이 미치고 있다. 송광사의 예불에는 이 긴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 음반 내지에서

천 삼백 년 이상의 세월을 뚫고 살아남은 예불 의식. 승가 공동체가 역사적 위기들 속에서 무산되었더라면 오늘날의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생생하게 구현되고 있는 현장을 더 이상 목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승가 공동체가 이천 오백 년의 세월 동안 끊어지지 않고 이렇게 생생히 살아 있고, 또 이렇게 예불 의식이 매일 새벽 온 우주에 울려퍼지는 것은, 그 긴 세월동안 출가자의 행렬이 면면이 이어져왔고, 전등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소유를 버리고 모든 소유관계를 끊고 오직 법을 구하겠다는 발심으로 산문 안으로 들어선 낱낱 수행자의 개인사가 지금까지 끝없이 이어져왔던 것이다.

너는 한 순간이라도 너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과 하늘의 안락을 위하여 길을 나선 적이 있더냐? 그런 점에서, 산문 안에 들어서 체발염의를 하고 법을 구하는 수행자들, 승가 공동체에 예경을 올림이 마땅하다. 그 한 순간의 위대한 포기와 그 한 순간의 발심을 예경해서라도 나는 승가에 귀의한다. 비록 그 모습이 껍데기뿐일지언정 그 겉모습을 통해서라도 법이 지금 이 현장에 살아 있음을 경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온갖 난관을 뚫고 법륜이 지금 이 현장에서 구르고 있는 불퇴전의 역사에 찬탄을 보내며 예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至心歸命禮 西乾東震 及我海東 歷代傳燈 諸大祖師 天下宗師 一切微塵數 諸大善知識
서천으로부터 동쪽을 지나 해동에 이르도록 법을 전하신 역대 모든 조사와 천하종사, 미진수처럼 수많은 모든 선지식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옵니다.

至心歸命禮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僧伽耶衆
시방삼세 모든 곳에 항상 계시는 승가에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옵니다.

위와 같은 예불문 자체가 승가의 공동체가 살아 있지 않고서는 성립할 수 없다. 승가 공동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예불문이 글귀에 갇혀 있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올려지고 가슴에서 가슴으로 울리고 있는 것이며, 승가 공동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송광사 예불 의식과 같은 수천 년 역사의 고귀한 문화를 눈앞에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유구한 역사적 현장에 거하고 있기에, 어느 스님은 새벽예불을 마치고 법당을 나설 때 출가의 기쁨이 물밀듯이 밀려온다고 했다.




조석예불은 일년 열두 달, 단 하루도 빠지지 않는다. 법고를 울리는 스님이 예불을 시작하기 직전 법고 앞에 서 있다. 화엄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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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보의 울림>도 그렇고, 이번에 나온 <松廣寺>도 그렇고, 종성과 발원문은 노장스님들이 맡았다. 특히 이번 음반은 녹음 마이크의 위치를 대웅보전에 모셔진 삼세불의 귀 가까이에 두었다 한다. 그리하여 종성, 예불문, 발원문, 반야심경, 금강경으로 이어지는 예불 의식의 소리가 대웅보전의 마루에서부터 시작하여 천정과 벽체를 타고 울리는 공명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공간적으로 말하자면, 승가 공동체가 여명 속에서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경 올리는 소리를 부처님의 사자좌에서 그대로 들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종성과 발원문은 노장스님들이 맡았는데, 새벽종성은 강주스님이고 발원문은 유나스님이다. 수십 년의 수행을 거친 강원과 선원의 수장들이 부처님의 사자좌를 향하여, 시방삼세를 향하여, 뭇 생명들을 향하여, 수행자를 향하여,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향하여, 인천의 안락을 위해 발심했던 그 마음 오롯이 드러내 바치는 것이다. 그 음성에는 인간사 혼곤함과 거친 호흡이 묻어 있지 않으며, 치장이 없는 질박함으로 화살을 곧게 쏘아 여타의 장중함을 능가한다. 한 마디로, 젊은 패기로부터는 도무지 나올 수 없는, 노장의 연륜과 관록에서 비롯한 깊은 우물같은 심연을 맛볼 수 있다.

이제, 새벽예불 음반을 추천하라면, 주저없이 이 음반을 추천할 수 있겠다. 음반 케이스와 내지의 사진은 배병우가 찍은 것들이어서 디자인 면에서도 격조를 높였다. 음반 내지에는 새벽예불에 대한 에세이 식의 간략한 소개가 있으며, 예불 의식의 구체적인 텍스트를 싣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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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11-06-10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달인가 이 음반 발매 기사를 읽었는데 리뷰까지 이어지니 좋습니다. 몇 년전에 해인사 아침 예불을 본적이 있었는데...불교신자가 아닌 저도 왠지 입으로 '지심귀명례'하게 되더군요. 좋은 리뷰 감사 합니다.

비로그인 2012-01-1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글을 잘 쓰시네요
 
나 없는 지혜 나 없는 자비 - 한글 금강경
이포 옮김 / 호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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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보리여, 그대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의 깊은 뜻은 생각으로 생각할 수 없고, 이 가르침의 큰 열매 또한 헤아림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37) — 그 가르침 그대로, 금강경은 금강경을 읽는 이들의 생각과 헤아림을 금강처럼 자른다. 경전이란 독자의 생각과 헤아림을 바수어 흩고, 그의 안을 환히 비추고, 그의 밖을 환히 비추고, 그의 안팎을 환히 비추어, 그 가르침 하나하나가 안팎에 사무치는 힘이 있기 때문에 ‘경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경전을 읽는 자와 경전의 문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문자 너머의 금강 같은 지혜만 오롯이 천지간에 빛나기 때문에 ‘경전’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따라서 경전을 읽으려 들어갈 때에는 일개 독자로 들어갈지라도, 읽고 나올 때에는 반드시 수행자, 아니 깨달은 자, 부처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경전을 경전답게 하는 길이며, 그것이 금강경을 받아 지닐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이 된다. 일반적인 독서행위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경전은 ‘독서’나 ‘읽기’라는 말보다 ‘독송’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독송’이라는 말에는 몸으로 받들고 입술 위로 삼가 올리고 마음으로 순간순간을 수순하는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하는 이 몸이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하는 이 입이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하는 이 마음이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내 모습을 보는 이여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내 목소리 듣는 이여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58)

역자 이포는 금강경 번역문 뒤에 금강경 해설을 실은 것이 아니라,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독송을 마무리하는 찬을 올린다. 금강경 번역문 앞에서도 찬과 진언을 올린다: “입으로 지은 허물 맑아지이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10). 역자의 이름만 있고 아무런 소개문도 없는 까닭에 역자가 스님인지 재가불자인지 모르겠으나, “금강 같은 지혜를 이루는 길”(28)의 가르침, 금강경을 공경히 대하는 그 정결한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도 사라지고 금강경의 문자도 사라지고 오직 금강 같은 지혜만이 길이길이 빛나기를 기원하는 듯하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금강경 해설서와 번역서가 숱하게 있다. 어지간한 책들은 대부분 접해 보았지만, 이제까지 이포의 한글 금강경만큼 감동을 주는 책은 만난 바 없다. 번역 의도와 방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책 앞의 「일러두기」를 보면, 역자의 공경하는 마음과 비원을 역사적으로 승화시키는 역량 또한 놀랍다:

구마라집 삼장스님은 전란이 중국 천하를 휩쓸던 때에 장안에 들어와 곧바로 「금강경」을 번역했습니다. 스님이 「금강경」을 먼저 번역한 배경에는 이 경의 가르침을 통해 천하가 평화로워지고 온 백성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절박한 염원과 확고한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한글 금강경」도 스님의 염원과 믿음이 날로 절실해지는 우리 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생각하며 옮긴 것입니다.(2)

그리고, 책 뒷편에는 (한문본으로 따지면, 앞쪽이 되겠다) 유공권 글씨의 「金剛般若波羅密經」 서첩이 실려 있는데, 이포는 이 서첩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하여 최대한 공경히 예를 갖춘다.

공경히 들으니 오조홍인 스님께서는 “「금강경」을 보아라. 그러면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거사의 글씨가 한 자가 백금에 값하는 글씨라면 그 글씨로 「금강경」을 읽고, 쓰고, 받아 지니고, 소리쳐 노래하는 공덕의 값은 또 얼마이겠습니까? 굳세고 ‘나 없는’ 획 사이로 금강의 빛을 만나고, 맑고 서늘한 글자 너머로 반야의 달을 보리니, 아, 쓰고 외우는 그 공덕이여, 어찌 셈이나 비유로 다 일러 말할 수 있으리오.(60)

짧은 분량에 불과하지만, 공경히 역자의 글을 읽으니, 문득 등하스님의 법구경 번역이 생각난다. 참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많은 것을 품고 있으나 빙산의 일각만 드러내는 솜씨가 서로 닮았다. 그리고 그 드러난 일각은 금강과 연꽃을 동시에 든 자처럼, 서슬이 푸르되 자비롭다. 이 때문일까. 이포의 금강경 한글 번역문은 과연 빼어나다. “가르침에 대한 감흥을 살리고자 운율을 중시하며 옮겼습니다. 하여, 토씨를 없애거나 구절을 되풀이하거나 숨은 뜻을 드러내 덧붙이기도 했습니다.”(2) 구마라집 스님이 천재적인 안목으로 원문을 통찰하여 위없이 아름다운 운율의 한문으로 옮겼듯이, 이포의 한글 금강경 또한 능히 독송할 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 때, 성스러운 대중 가운데 있던 수보리 장로가 일어났네. 망고 숲에 달이 뜨듯 자리에서 일어났네. 오른쪽 어깨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 땅에 꿇고 장로는 두 손 모으고 부처님께 여쭈었네.

“둘도 없는 분이시여, 행복하신 분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자비로 감싸 주시고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지혜로 밀어 주십니다. 행복하신 분이시여,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은 낸 선남선녀는 어떻게 순간순간을 살아가야 합니까? 위 없이 바른 깨달음에 마음 낸 선남선녀는 어떻게 이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13)

금강경을 실제로 독송해 보면, 조계종 표준번역본은 도저히 독송이 불가능할 정도로 운율이 좋지 않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조계종 표준번역본은 산스크리트 원문과 구마라집 한문본의 번역을 적당히 뒤섞은 듯한 느낌이며, 유감스럽게도, 산스크리트 문헌을 연구한 학자들치고 서구언어의 개념과 문장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학자를 만난 바 없다. 요컨대, 영어나 산스크리트어나 빨리어에 능숙할지는 몰라도 우리말을 다루는 솜씨에서는 영한사전 수준을 벗어나는 역량을 만나지 못했다. 서구언어의 개념과 문장구조에 깊이 오염되어 우리말을 다루는 솜씨가 지리멸렬한 것이다. 조계종 표준번역본을 보면 그 오염원이 감지된다. 그래서 나는 그 번역본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물론, 구마라집의 천재적인 솜씨와는 별개로 구마라집 한문본에 나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과 같은 개념은 산스크리트 원문을 보지 않는 이상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천년 이상을 독송해온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 만큼 구마라집 한문본은 아름답다. 단순히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번역을 통한 재해석의 역량도 감탄할 만하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아 온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포의 한글 금강경은 일러두기에서 밝힌 바대로 운율을 중시하였으며, 몇 가지 개념은 창조적으로 재해석했다. 전통적으로 “희유하십니다, 세존께서는 . . .”으로 번역되는 문장을 이포는 “둘도 없는 분이시여, 행복하신 분이시여 . . .”로 옮겼다. 그리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스스로 있는 나’가 있다는 생각, ‘죽지 않는 나’가 있다는 생각, ‘바뀌지 않는 나’가 있다는 생각, ‘숨 쉬는 나’가 있다는 생각”(14)으로 옮겼다. 앞의 번역은, “불법을 처음 공부하는 분들이나 청소년 불자들이 가르침을 더 가까이 느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경전의 전문 용어를 되도록이면 삶 속에서 날마다 쓰는 생활 용어로 풀어 옮기고자 했습니다”(2)는 역자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뒤의 번역은, “경전의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인 ‘네 가지의 나라는 생각’(四相)에 대해서도 새로운 풀이를 시도”(2)한 결과이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덧붙혀 펴낼 「금강경 용어풀이」에서 밝힐 예정이라고 한다.

따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사상에 대한 역자의 번역문에는 산스크리트 원문을 참고한 노력이 엿보인다. 구마라집의 번역어로는 도무지 산스크리트 원문을 역추적할 수 없거니와 그 번역어가 새로 창조된 추상적 개념어인 까닭에, 후세인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 탁월한 감산 스님의 주석도 사상의 원뜻을 놓치고 있으며, 그 폭넓은 역량의 남회근 선생도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이다. (물론 문헌학적 해석에서 잘못을 범한들 그분들의 관련 해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문헌학적 입장에서는 비판받을지언정 반야의 입장에서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기 때문이다.) 이포의 한글 금강경은 현 시대에 접할 수 있는 문헌은 모두 참조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번역이 가능했을 것이다. 운율 감각도 뛰어난 만큼 이 번역본으로 독송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인다:

수보리여, 보살은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습에 걸림 없이, 소리에 걸림 없이, 냄새에 걸림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맛에 걸림 없이, 느낌에 걸림 없이, 생각의 대상에 걸림 없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되, 어떤 모습이나 어떤 생각에도 걸림이 없어야 합니다.(15)

역자는 스스로 본 금강경의 빛나는 지혜, 빛나는 자비를 이웃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아름답게 번역했을 것이다. 아름다운 것들의 변함없는 운명처럼, 소리소문 없이, 빗돌에 새겨진 글씨처럼 말없이, 보살처럼, 어떤 모습이나 어떤 생각에도 걸림이 없이, 이 책을 펴냈을 것이다.

역자는 한글 금강경의 부제로 “나 없는 지혜, 나 없는 자비”를 택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금강과 연꽃이다. 금강 같은 지혜가 있어야만이 연꽃 같은 자비가 있을 수 있으며, 연꽃 같은 자비가 있어야만이 금강 같은 지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자가 침묵 속에 보여준 그 지혜와 자비, 잊지 않으리라.




유공권의 금강경 서첩. 이포의 한글 금강경에 실린 글씨는 이와는 약간 다른 판본으로부터 손질된 것으로,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인쇄되어 있으며 크기가 좀더 작다. 그래서 그런지 책에 실린 글씨가 약간 (보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말라 보이며, 결과적으로 풍부한 느낌이 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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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실린 유공권의 금강경 서첩은 “군더더기가 없는 가운데 힘찬 기운이 생동하는, 고매하고 맑은 품격을 이룬 글체”(59)로서, 미불은 유공권의 글씨를 두고, “선생은 푸른 산 속에 노니는 스님과 같아 몸과 마음에 더 닦아야 할 것이 없다. 정신은 해맑고 기운은 굳세니 한 점 속된 잡티도 찾아볼 수 없다”고 평했으며, 소동파는 “’한자 한자가 백금百金에 값하는 글씨다’라는 세상 사람들의 찬탄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니다”(60)고 평했다고 한다.

경전에 한없는 공경을 바치는 역자가 서첩에 대한 안목까지 갖추고 있어 고맙기 짝이 없다. 덕분에 백금에 값하는 글씨를 뵈는 행운을 누렸다. 역자는 유공권의 서첩을 부록으로 실은 것이 아니라, 서첩에다 “외람되게도 제가 어둔 눈을 빌어 옮긴 한글 금강경을 덧붙여 엮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그의 모습을 보는 이여, 금강의 빛 되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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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2015-01-06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감사드립니다. 이 책을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하고 있습니다. 방법이 있을까요?
 
삐뽀삐뽀 119 소아과 (개정11판) - 2005년 대한의사협회 선정추천도서 삐뽀삐뽀 시리즈
하정훈 지음 / 그린비라이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의학을 만능으로 보는 관점! 예방접종을 거의 무조건 권하는 부분은 한번쯤 의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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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스님 초기경전 강의 - 한국 불자들의 공부 갈증을 채워주는 새로운 경전 읽기
미산 스님 지음 / 명진출판사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현대교육을 이수한 이들은 일반적으로 초기경전에 좀더 친근함을 느낄 것이다. 신화와 기복의 요소가 거의 보이지 않으며, 논리가 명쾌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법문이 감동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초기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처럼,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게, 내용과 형식을 갖추어 설한” 설법이 주를 이룬다. 그에 비해 대승불교의 경전은 신화적이고 신이한 요소가 많이 보이며, 좀더 문학적이며, 논리적인 이해로는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우며, “다소 불명확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부분”(41)이 있다.

한국불교는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 이래로 대승불교의 전통에 서 있다. 우리나라의 대승불교는 무려 천 오백 여년의 세월을 건너 살아남은 유구한 전통이라고 할 수 있으니, 현재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는 승단이나 전래된 불교문화, 애송하는 주요경전은 예외없이 대승불교 문화권에 속한다. 그런데 최근에 이 유구한 대승불교 전통의 나라에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전래되기 시작했다. 아함경 경전 번역과 함께 위빠사나 수행법이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불교 관련 번역자나 학자들의 글을 읽어보면, 대부분 대승불교 내지 선불교 전통에 대한 반감 비슷한 감정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대승불교 내지 선불교 수행자들 역시 남방불교 전통에 대해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두 전통간에 주고받는 비판들은, 때로 상대방의 전통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동반하기도 한다. 가령, 초기불교 전공자들이 대승불교 전통에서 언급되는 “일심”이라든가 “참나”, “불성” 등을 두고 불교의 무아론과 배치되는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비판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너무 초보적인 수준에서 저지르는 오해가 아닌가 한다. 그토록 쉽게 언어에 끄달려 넘어가서야 어찌 수천 년의 불교전통을 논할 수 있겠는가. 또한, 초기불교 전통에 대한 대승불교(선불교) 수행자들의 비판 역시 초기불교의 수행 전통인 사마타 수행이나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게 혹시 상대방의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전통에 대한 이해는 학문적인 연구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각각의 수행전통에 입문하여 실제로 수행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수행의 경험으로부터 솟아나는 안목이 중요하다. 그 안목을 갖추고 있다면, 인연에 따라 때로는 위빠사나를 쓰기도 하고 때로는 간화선을 쓰기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지 않을까?
 

초기불교 관련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항상 아쉬웠던 것은 거의 대부분이 학자의 견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학자들은 대부분 부처님의 가르침을 역사적으로 논하고 가지런하게 정리하면서 정법을 수호한다고 자부하지만, 오히려 그와 반대로 스스로의 견해와 스스로의 관념에 끌려들어가 무수히 상대를 만들면서 스스로의 업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업식은 상대방도 구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구하지 못하며 정법을 수호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남회근은 “서생의 견해는 논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단언을 했을 것이다. 초기불교 관련 글들을 읽을 때마다 이와 같은 안타까움이 늘 있었다. 그런데,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명진출판 2010)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 안타까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으며, 학문의 태생적인 편협함에서 벗어난 수행자의 푸른 안목을 접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산스님이 상도선원의 일반 불자를 상대로 한 초기경전 강의를 녹취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빨리 읽히지만, 갈피갈피에 숨어 있는 서늘한 안목 때문에 파도처럼 다가오는 감동이 있다. 특히 선불교와 남방불교의 수행전통과 학문적인 수련을 거친 이력 때문에, 초기불교 경전과 대승불교 경전, 위빠사나와 간화선 수행를 회통시키면서 연기법, 일체법,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업과 윤회를 설명해내는 솜씨는 여타의 초기불교 관련 서적들과는 수준을 달리한다. 좀더 학적인 방식으로 치밀하게 좀더 많은 내용이 실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강의라는 성격상 그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그 어떤 학문적인 책에서도 접할 수 없는 깊은 안목과 신선한 충격을 선사한다.

근본경전이라는 용어도 저는 배제하고 있어요. [...] 불교에도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이 있답니다. 오직 초기불교만이 옳고, 대승경전이나 선불교의 가르침은 전부 가짜요, 이른바 ‘짝퉁’이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요. 그래서 행여 그런 근본주의와 연결될까봐 그 단어를 쓰는 것이 꺼려집니다.(47)

빨리어만이 진설眞說이고 다른 것은 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심지어 [한역]아함경도 원전이 아니라며 안 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극단적인 태도라고 봅니다. 아함경은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지만 서기 300~400년에 번역되어서 부처님 말씀의 초기 형태가 많이 보존되어 있습니다.(57)

초기경전에 정통한 학자가 이와 같은 평가를 내린 사례를 나로서는 처음 접했다. 미산스님은 개념과 관념에 끝없이 희롱당하는 학자들의 세계를 잘 알고 있으며 그 세계의 한계를 명료하게 파악하고 있기에, 어느 학자보다도 유연한 사고를 보여주며, 어느 학자도 미치지 못할 통찰들을 설핏설핏 내비친다. 그렇기 때문에 또, 어느 대승불교 수행자보다도 커다란 애정을 가지고 초기경전을 소개한다. 예컨대, 분석과 직관이라는 학문적인 은유를 써서 초기경전의 유익함을 설명하는 대목을 읽어보자:

사실 분석과 종합이 동시에 되어야 바른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분석에만 치중해도 문제가 있으며, 또 직관으로만 해놓고 이걸 풀어주지 않으면 대중은 알 수가 없습니다. 불교가 어렵다, 특히 대승불교는 너무 철학적이고 어렵다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직관만 강조하면서 여러 우주현상과 심리현상들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한 분석과 사유는 없고, 그런 분석적인 생각을 전부 번뇌나 망상으로 치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앞에 말한 프리즘을 통과한 사람에게 그건 망상이 아니고 중생을 위한 고구정녕한, 즉 입에서 쓴 내가 나도록 강조해서 말씀하실 만큼 절실한 친절함이고 자비심입니다.

선 수행의 차원에서는 이렇게 분석해서 풀어놓은 것을 ‘사구死句’라고 하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죽은 구절’, 즉 ‘평범하고 속되어 선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적은 구句’입니다. 사구냐 활구냐 하는 차원에서는 물론 활구로 확 찍어서 직관의 세계를 열어줄 방법을 써야겠지요. 하지만 직관의 세계가 열린 사람이 중생의 근기에 맞에 설법하기 위한 기제를 새롭게 만들 때는 분석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초기경전은 바로 그런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불교가 21세기를 이끌어가는 종교로 발돋움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직관적 기제와 분석적 기제가 아주 원할하게 자유자재로, 역동적으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요즘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직관적 기제를 쓰다가도 어떤 때는 완전히 반대되는 기제를 써서 바르지 못한 견해들을 송두리째 끊어주어야 합니다. 이런 방법을 자유자재로 쓰는 분이 바로 21세기형 선지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75-76)

명민한 독자라면 위 인용문을 토대로 미산스님 강의의 의도와 역량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초기불교의 국내소개와 함께 대두하고 있는 인터넷 상의 초기불교/대승불교 대립의 허망함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대립과 다툼을 접할 때마다, “나는 세간과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세간이 나와 더불어 다툴 뿐이다. 무슨 까닭인가? 법답게 말하는 자라면 세간과 더불어 다투지 않기 때문이다”(我不與世間諍 世間與我諍 所以者何? 比丘! 若如法語者 不與世間諍)는 잡아함경 제3권 <我經>의 구절이 떠오른다. 미산스님의 강의에서는 이 구절의 원전인 상윳타 니카야로부터 번역되어 인용되고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다툰다.
비구들이여,
법을 말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210)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는 이렇듯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아우르는 안목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초기경전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대승경전 내지 선불교에 대한 촌평들을 간헐적으로 접할 수 있다. 그 촌평들을 읽어보면, 세간과 더불어 다투지 아니하는, 법답게 말하는 자의 면모가 확인된다고 말해도 허언이 아닐 것이다:

삶의 이치와 우주 만유의 이법을 가르쳐주는 연기법은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설해집니다. 초기경전 말고도 연기법과 관련된 많은 가르침이 있는데, 특히 대승불교의 꽃이라 할 화엄경은 연기법을 우주적인 차원에서 확대해석한 것입니다. ‘총상’, ‘별상’, ‘사사무애’, ‘이사무애’ 등의 개념들을 도입하여 연기법을 총체적으로 설하고 있는 것이 바로 화엄경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연기緣起의 ABC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61)

앞에서 인드라망 얘기를 했는데, 초기경전을 거쳐 대승경전으로 넘어가면 연기법에 대한 설명이 우주적인 차원에서 이뤄집니다. 특히 화엄경이 그렇습니다. 연기법을 가장 깊고 광대하게 해석한 경이 화엄경인데, 나중에 함께 공부해봅시다(88)

선불교는 그냥 바로 그 직관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런데 직관으로 들어갔다 할지라도 남들을 교화하고 그 직관의 세계로 인도하려면 자세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초기경전은 그런 요소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68)

부처님은 사띠라는 말을 수행언어로 쓰십니다. 물론 이때 사띠에는 기억이라는 뜻도 분명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에서 사띠라는 말을 쓸 때는 과거의 것을 끄집어내어 외운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현재 깨어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한문의 ‘염念’자를 잘 보세요. ‘이제 금今’자에 ‘마음 심心’자,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깨어 있는 마음’입니다. 지금 어떤 명상의 대상, 수행 대상—화두면 화두, 호흡이면 호흡—에 밀착해서 그것을 놓치지 않는 마음이 ‘염’입니다. [...] 팔정도에서도 간화선에서도 사띠는 매우 중요합니다. [...] 간화선의 경우는 화두를 놓치지 않으면 이게 의정으로 변해 의정이 우리 몸의 60조 세포에 가득 차고, 완전히 의심덩어리가 된 몸과 마음 전체가 의단으로 변했을 때, 바로 그때 완전한 삼매가 형성되고, 여기서 굉장히 강한 사띠가 형성됩니다. 간화선의 중요 포인트도 여기에 있습니다.(263)

그렇다면 수행은 무엇인가요? 위빠사나 수행, 관법 수행은 순간순간 이 세 가지 느낌[좋은 느낌, 싫은 느낌, 무덤덤한 느낌]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이게 미얀마 쉐우민 센터에서 하는 심념처 수행입니다. 이건 선 중에도 ‘묵조선’하고도 매우 닮아 있어요. 쉐우민 센터의 수행 방법에 대해서는 언젠가 더 자세히 이야기해드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169)

대승불교 쪽의 여래장 사상은 자칫 잘못하면 실체론적으로 흘러버릴 요소가 있습니다. 불교는 무아를 이야기하는데, 여래장 사상은 ‘여래장’, ‘불성’이라는 영원불멸의 뭔가가 있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 설령 여래장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것이 연기적, 중도적인 관점에서 다시 걸러져야 합니다. 이런 프리즘을 통하지 않고 여래장을 이야기하게 되면 실체론으로 갈 가능성이 다분하지요. 그러나 연기의 프리즘을 통해 이야기하면 일반적인 실체론과는 다른 차원을 지니게 됩니다.(74)

수행 체험을 직접 해보면 불성, 참나, 이런 것이 어떤 자리인지를 스스로 체득하게 됩니다. 그렇게 체득한 상태에서는 어떤 용어를 쓰더라도 걸리지 않죠. 그 말을 쓰는 당사자는 체득해서 걸림이 없는데, 혹 다른 사람이 그걸 듣고 실체론적으로 뭐가 있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어요.(314)

위와 같은 인용문들은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개괄할 수 있는 대목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강의의 독보적인 특성과 미산스님의 혜안을 살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미얀마 쉐우민 센터의 심념처 수행과 간화선·묵조선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역량인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여래장 사상과 연기법, 화엄경과 연기법을 회통시켜 설명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리고 상좌부 불교의 재생연결식과 대승불교의 중음을, 다투지 않고 양자를 여유 있게 수용할 수 있는 역량 역시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릇 수천 년의 전통을 갖고 있다는 것은 현대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함부로 재단해도 될 만큼 허술하지는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전통에는 평생을 걸쳐 배운 방식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심오한 깊이가 있다. 한 인간으로 태어나 수천 년의 전통을 두려움 없이 막힘 없이 파헤칠수 있는 파겁(破怯)의 경지에 이르려면, 무릇 알음알이를 버리고 하심하는 가운데 수천 년의 전통 앞에 서야 하지 않을까? 아울러, 대승불교 전통에 있는 이들도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매우 적합한 설명 도구가 될 수 있는 초기경전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바야흐로 (초기불교/대승불교의) 불교학·불교학자라는 또 다른 세간과 다투지 아니하는 여법한 수행자가 필요한 새로운 시대이며, 현대인의 어법과 사고 구조를 파고드는 가르침도 필요한 시대이다.

«미산스님의 초기경전 강의»는 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책, 새로운 안목의 탄생을 알린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강의가 기대되고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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