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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17)로 시작되는 «회상, 꿈 그리고 사상»(이부영 옮김; 집문당 1990)은, 당대의 혹독한 편견과 냉대를 무릅쓰고 극도로 고독한 자리에서 무의식의 세계를 대면하면서 인간의 내면, 자기 자신을 탐구했던 정신의학자 C.G. 융의 자전적 저술이다. 이 책은 융의 전집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부분은 융이 집필하고 나머지는 융이 말한 것을 조력자 아니엘라 야훼가 정리한 일종의 자서전이다. 여기에서 융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내적인 체험들을 중시하고서 그의 생애를 회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꿈과 환상과 명상, 그리고 체험이 주 내용을 구성한다. 나보다 앞선 세대의 번역이어서 그런지 번역어가 낯선 면이 있지만 요즘 소장학자들의 상투적인 번역어(독한사전 수준의 한글)에 많이 지쳐 있는 나는 오히려 무척 반가웠다. 다만 번역어에 대응하는 독일어를 일일이 확인하기가 어렵고(가령, 심혼, 영혼, 귀령, 영, 정신, 마음, 자아, 나 등등) 아주 가끔씩 비문과 엉뚱한 번역어가 튀어나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정말 잘 읽히는 문장이다. 나의 이 글은 이 책에 대한 소개서라기보다는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된 융의 감동적인 생애에 대한 약간의 안내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자기 자신을 탐구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알고 있지만, 그 탐구 결과를 융처럼 학문적인 세계로 옮겨놓은 이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즉, 자기 자신을 탐구하여 ‘앎’에 이르렀던 이들은 그것을 像이나 언어로 옮기기를 꺼렸으나, 융은 그 ‘앎’, 그 ‘경험’을 어떻게든 像으로 옮기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과연 그 앎, 그 경험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서양의 전통에서 그 앎을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언어는 ‘그노시스’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는 ‘그노시스’를 영지주의의 언어로 간주하여 배척하는 바람에 어두운 언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언어 대신에 ‘성스러움’이라는 대단히 지적이고 신학적인 용어가 사랑받았다. 그러나 ‘성스러움’은 더 이상 ‘계시’가 불가능한 시대에 계시가 가능했던 시대의 경험을 추억하는 세련된 언어가 아닐까? 그것은 하느님 경험이 불가능하다고 선언된 도그마 시대의 산물이 아닐까? 루돌프 오토가 «성스러움의 의미»(분도출판사 1987)라는 책을 통하여 ‘누멘’을 등장시킨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니까 그는 그 책에서 라틴어 ‘누멘numen’이란 용어를 ‘성스러움’으로 탈바꿈 되기 이전의 사태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 이후로 ‘누멘’, 혹은 ‘누멘적인 것’(번역서는 ‘누미노제적인 것’으로 옮기고 있다)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세계관에 포섭되기 이전의 ‘성스러운 경험’을 함의하게 되었다.

그 ‘누멘’, ‘누멘적인 것’이 인간에게 다가오면 그 인간은 필연적으로 위험하다. 그것은 선악이 없다, 아니 선악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그 ‘누멘’의 경험들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그러한 경험들은 도움을 주거나 파괴적인 영향을 인간에게 준다. 그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파악하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그는 그 체험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비교적 압도적인 힘으로 느낀다. 그 체험이 그의 의식의 인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올바른 인식을 할 때 그는 그 체험을 마나Mana, 데몬Dämon, 혹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과학적인 인식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제공하고 있다.(380)

융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마나니 데몬이니 신이니 하는 개념과 동의어로 간주하고 사용한다. 무의식의 탐구는 곧 자기 자신의 탐구인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게 되었을까? 융 스스로가 평생에 걸쳐 그 누멘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니체 역시 그러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세상이 어떤 반응을 내보일지에 대한 아무런 전략적 고려 없이 그 경험을 세상에 쏟아내고 말았다. 융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니체가 경험한 바와 같은 것을 이미 어린시절에 경험했던 터였다:

어느 한순간, 나는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엄청난 감동에 사로잡혔다. 동시에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의식을 느꼈다. 나의 등 뒤에는 마치 안개의 壁과도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안개벽 뒤에서 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순간, 나에게 가 생겨난 것이다. 에도 나는 존재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일어났을 따름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가 여기 있다. 여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에는 그것이 나와 함께 行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가 하고자 했다.(45-46)

안개 속에서 빠져나와 自我를 확립한 순간부터 神의 통일성, 위대함, 그리고 超人性은 내 환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53)

하늘의 별세계와 끝없는 공간에서 오는 입김이 나에게 와닿는 것 같은, 혹은 어떤 영혼이 눈에 띄지 않게 방안으로 들어선 것 같은 느낌, 아득히 지나간 과거의 것, 그러나 언제나 존재하며 超時間的인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현존하는 듯한 영혼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82)

열두 살에 처음 겪었던 이런 부류의 경험들은 그 누구와도 이야기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주변세계는 모두 “신학적 종교”로 굳어져 있었고 그의 체험은 그런 종교에서 용인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아이였고, 그 영적 체험을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마저 일찍부터 알았다:

거기에 관해 누구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어디서도 접촉할 만한 구석을 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불신과 두려움을 가지고 나를 대하는 것처럼 느꼈으므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80)

그리하여 내가 아는 어느 신학자도 “어둠을 비치는 빛”을 자신의 눈으로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 그랬다면 그들은 결코 “신학적 종교”를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신학적 종교”를 가지고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신의 체험에 상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12)

나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점에 천진난만한 사람은 사람이 누구에게 그가 모르는 것을 말할 때 그것이 그 동료에게 얼마나 모욕이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124)

이러한 누멘의 체험, 그리고 그 체험에 따른 외로움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융이 대학시절 처음 니체를 읽었을 때 몹시 흥분했음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구보다도 니체의 위험을 잘 간파했다:

나는 끝없이 열광하였다 . . . 강렬한 체험이었다 . . . 니체는 자기의 제2호를 그의 생애의 후기, 그러니까 중년 이후에 가서야 발견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제2호를 이미 이른 청소년기부터 알고 있었다. 니체는 순진하고도 경솔하게 이 arrheton, 이름붙일 것이 아닌 것에 관해서 마치 모든 것이 잘 되어 있는 것처럼 말했다 . . . 그는 그의 제2호를 거침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계에 꺼내 보인 것이다. 그는 그의 忘我境을 함께 느끼고 “모든 가치의 전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어린애 같은 기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만 교양있는 속물을 찾았을 뿐이고 비극적 희극인 것은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 . . 모두 연관성을 잃은 지식에 마음이 팔린 이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부질없는 시도를 한 것이다. 게다가 그 — 줄타는 사람은 그 자신을 넘어서 버렸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처신을 알지 못했다.(123-124)

선불교에서도 자신이 경험했던 경계를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친다. 설사 목숨을 나눈 도반일지라도 그 경계를 드러내서는 안되며 오직 선지식에게만 드러내어 점검을 받아야 한다. 제자가 그러한 점검을 무시한 채 전면에 나선다면 매우 위험한 상태에 이르를 수도 있다. 이른바 ‘마구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깨달음의 종교에는 예외없이 이런 비의성이 있다. 이 비의성은 누멘의 강렬한 경험 이후 그 경험자 자신이 자칫 파괴환상으로 내달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 비의성이 지켜지지 않으면 이 누멘의 경험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을 혼란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험자나 경험을 전달받는 자나 누멘의 경험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성스럽고 위험한 것이다.


융은 니체의 경험이 자신의 경험과 동일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간파했으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두고 거리낌없이 “복음전달자”라고 칭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어린시절부터 인간세계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니체처럼 팽창(Inflation)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정신의로 활동하던 초기시절까지 자신의 경험을 누구에게도 전달하지 않았고 또 전해 줄 만한 사람을 만나지도 못한 채 조용히 연구만 했다.

그런 그는 당시 정신의학의 추상화된 진료방식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진정한 치료[는] . . . [환자의] 개인적인 역사를 탐색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139)임을 확신하였으며, 그리하여 환자의 개인사와 심리적 비밀들을 토대로 진료하면서 “피해망상과 환각이 하나의 의미의 핵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 . . 정신병에서 인간 존재의 바탕을 만나는 것이다.”(149) 이를테면, 정신병 환자는 인생사에서 비극적 사건을 겪은 적이 있으며, 그 사건에 따른 멸시감과 모멸감을 代償하기 위해 현세 외적인 환상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 환상은 단순히 개인적인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때로는 집단적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였다.

만년의 융
융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에 어울리는 주거”를 위해 호숫가에 손수 집을 짓고 살았다

융은 그 스스로도 꿈과 환상을 자주 접한 보기드문 인간형,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거의 “영매”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가 자서전에서 이야기하는 꿈과 환상들은 우리에게는 상당히 기묘하고 이질적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 나타나는 그런 환상들을 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그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는 횔덜린이나 니체처럼 정신적 붕괴에 이를 뻔한 위험한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환상 속에서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 . . 그 폭우에 부서졌다. 니체와 횔데를린과 그밖의 많은 것이 부서졌다. 그러나 내 속에는 마력 같은 것이 있어 처음부터 나를 지탱해 주고 있어서 내가 환상에서 겪은 것의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202) 이것은 그 자신이 무의식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으려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환자를 이해하기 위한 거인적인 노력, “환자를 위해서 감행하는 것”(203)이었다. 이것이 그를 그 위험에서 버티게 해 주었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이 7장 <무의식과의 대면>에 실려 있다. 그의 무의식과의 대면은 1913년부터 1919년까지 6년 간에 걸친 고독하고 위험하고 처절한 과정이었다.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누구도 그에게 동조하지 않았으나, 그는 결국 위험한 문을 열었고, “철학적 연금술과 그노시스 파의 사상에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이르기까지 — 대부분 인기 없는, 애매모호한, 그리고 위험한 — 세계의 다른 극을 향한 하나의 탐험여행”(215)을 했다.

이때부터 나의 인생은 보편성에 속하게 되었다. 나에게 중요했고 내가 찾던 인식들은 당시의 학문에서는 아직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원초적 체험을 몸소 겪어야 했고 게다가 내가 체험한 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확립해야 했다. 그렇게 안 했더라면 그 체험은 생명력이 없는 주관적 전제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영혼에 봉사하는 것을 나의 역할로 삼았다. 나는 그것을 사랑했고 또한 미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커다란 보배였다. 내가 그 영혼의 말을 적은 것은 나의 존재를 비교적 전체성으로서 살고 견디어내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218)

그는 이 기간에 이후에 펼쳐낼 사상의 거의 대부분의 핵심을 건져올렸다. 그러므로, 그는 경험주의자이고, 그의 저작들은 한 영적인 인간이 누멘의 체험을 한 이후 그 체험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끈기 있게 탐구한 기록이기도 하다.

내가 나의 내적인 像을 추적하던 그 몇 해는 나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속에서 온갖 본질적인 것이 결정되었다. 모든 것이 그때 시작되었다. 뒤의 세부적인 것은 다만 보충하거나 보다 더 분명히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후기의 작업은 모두 그 당시 무의식에서 터져나와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더 철저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을 일생을 두고 하여야 할 작업의 原物質prima materia이었다.(228)


이처럼 누멘을 체험하고 또 탐구했던 그가 동양사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음은 두 말할 나위없다. 불교, 요가, 도가, 주역, 중국연금술, 선불교 등 그의 관심사는 폭넓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서양인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서양의 고중세 신화의 이미지들을 빌어 무의식의 내용을 읽어내고자 했다. 그래서 동양인인 우리는 그의 꿈과 환상과 이미지들에 대하여 이질적인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무의식의 어두운 면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과연 이런 것이 있겠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의문은 동양인인 우리가 선불교나 도가의 가르침을 통하여 언제나 자연과 더불어 상상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리라.

우리는 자연의 사물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면, 혹 서양인은 신화의 이미지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는 않을까? 혹시 명상이 두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융은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는 위험한 명상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런 낯선 요소에도 불구하고 융은 ‘아는 자’에 가까웠고, 그래서 평생 외로웠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직 내부적으로만 침잠하거나 외적으로 팽창하는 대신 그 앎을 세상의 언어로 내놓기 위해 평생을 겸허하게 고투한 학자였다.

어릴 때 나는 외로웠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도 모르고, 전혀 알고자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고독이란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보다 남에게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전달할 수 없거나, 자기는 어떤 생각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간주될 때 생기는 것이다. 나의 고독은 나의 어린 시절의 꿈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과 작업을 할 시기에 최고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면 그는 외로워진다.(401)

융의 자전적 저술을 읽으면서 나는 니체와 횔덜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서양에서는 누멘을 체험했던 자가 정신적 붕괴로 이어지고 말았던가? 아니, 서양인들 대부분은 그들이 누멘을 체험했다는 사실조차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그저 그들이 ‘미쳤다’는 데에만 동의하는 듯하다. 참 무서운 일이다. 동양에서는 니체나 횔덜린의 예를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정도의 누멘의 체험은 동양의 전통종교에서 충분히 흡수하고도 남을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체와 횔덜린의 사례는 신학적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닐까? 신학적 종교가 거의 모든 정신세계를 장악한 시대에 누멘을 체험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넘어 절망과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그런 이들을 지도할 만한 자가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누멘의 부정적 영향 아래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누멘은 누멘을 경험한 자를 높히면서 동시에 낮추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긍정 아니면 절대부정을 향한다. 그러고 보니, 니체는 “높힘과 낮춤”(Erhöhung und Erniedrigung)이라는 용어를 자주 썼다. 아, 니체여, . . .

그런 면에서 극도의 고독과 커다란 위험을 견뎌낸 융은 독보적인 인물이다. 나는 틈틈이 그의 저술을 읽을 필요를 느낀다.

때때로 나는 마치 내가 자연의 풍경과 사물 속으로 퍼져들어가 모든 나무 속에 살며, 출렁이는 파도 속에, 구름 속에, 오고가는 동물들 속에, 그리고 그밖의 모든 사물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257)

반면에, 니체는 모든 사물들 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그와 정반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내 운명을 알고 있다. 언젠가는 내 이름에는 ‘무시무시한 그 무엇’에 대한 회상이 따라다니리라, — 지상에 존재한 바 없었던 하나의 위기에 대한 회상이, 더없이 심오한 양심충돌에 대한 회상이, 이제까지 사람들이 믿어왔고 권장 받았고 성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에 대항하게 만든 하나의 결단에 대한 회상이 . . . 나는 인간이 아니라 다이나마이트다.(KSA 6,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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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7-06-0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말이 너무 멋집니다.
융에 대한 제대로 된 번역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반조 2007-06-06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 님께서 답글을 남기시자마자 제가 니체의 말을 덧붙혔습니다. 그러므로, 달팽이 님께서 언급하신 '마지막 말'은 융의 말이겠군요^^

그리고 융의 기본저작물 아홉 권은 한국융연구원에서 이미 번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 학자들이 공동으로 작업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양질의 번역일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이 자서전 번역 수준도 괜찮은 듯합니다.

yoonta 2007-06-1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반조님^^ 고싱가 숲이라는 홈페이지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알라딘에 서재도 있으셨군요. 서재에 있는 니체관련 글들과 이 융관련 글을 읽어보니 님은 불교적 깨닭음 혹은 영지주의적 그노시스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시군요. 양자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의견에 저도 공감합니다. 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융은 어렸을때부터 "신비적 경험" 즉 누멘을 경험하고 체험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필연적으로 서양의 연금술과 신비주의같은 경향을 후기에는 띄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의식이전의 체험 혹은 경험을 일반사람들은 거의 경험하지 못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위글에서도 말씀하셨지만 융도 그것에 대해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 같고요. 프로이트나 라캉같은 정신분석학자는 융의 이런 실체적인 무의식이나 원형 이론을 거부하죠. 그 거부의 이유는 아마도 그 일반적이지않고 독특한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융과같은 실체적인 특성을 가진 희귀한 형태의 무의식이나 신비체험보다는 일반인들이 보편적으로 그리고 일상생활속에서 부딪히게 되는 무의식에 대해 더욱 관심이 있었던 것이고요. 양자사이에는 다 장단점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니체도 융과같은 신비체험을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제가 미처 몰랐던 부분이네요.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

반조 2007-06-11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반갑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저는 니체와 불교에 관심이 많습니다. 융과 영지주의는 최근에 접하게 되었어요. 아직 배울 것이 많은 무지렁이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저는 책읽기와 공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 프로이트나 라깡, 들뢰즈 등을 공부할 날이 올런지 모르겠네요.

니체 식으로 말하면, 인문학을 하시는 분들의 통찰력 있는 글과 논의에 참여하자면 "배우로서의 예술가", "배우로서의 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저는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면서 "배역"에 충실하지는 못할 것같아요. 어느 한 배역에 충실해야 전문가가 될 수 있는데 말이죠. 이 때문에 저는 여러 훌륭한 학자들로부터 동떨어질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저는 프로이트나 라깡에 대해서는 일면식도 없지만, yoonta 님의 "프로이트나 라캉같은 정신분석학자는 융의 이런 실체적인 무의식이나 원형 이론을 거부하죠. 그 거부의 이유는 아마도 그 일반적이지않고 독특한 특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는 견해에서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니체도 융과 같은 신비체험을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아마도 니체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용인되지 못하는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설령 그 해석을 용인한다해도 학문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치부하고 말겠지요. 니체의 1881년의 경험은 그저 영원회귀의 영감을 얻었던 것이라고 보는 듯해요. 저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읽고서 니체가 누멘을 체험했다고 보았는데, 이 입장에 동조하는 학자는 없는 듯합니다. 이 입장에 동조한 유일한 인물로는 이제까지 오쇼 라즈니쉬밖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차라투스트라 때문에 오쇼를 접한 아주 희귀한 경로를 거쳤습니다.) 그러다가, 융의 자서전을 읽고 융 역시 단번에 니체의 누멘 체험을 간파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요. 그래서 융의 자서전이 무척 반갑기도 했습니다.
 

먼저 한겨레신문 지면과 웹상에서 벌어졌던 «어우야담» 번역논쟁 기사를 연결한다:

이 논쟁의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개인적인 소감을 덧붙히고자 한다. 이 논쟁은 이상수 기자가 최근에 신익철 교수 외 3인이 번역한 유몽인의 «어우야담»(돌베개, 2006년 11월 출간) 서평기사에서 시작되었다. 이상수 기자는 서평에서 «어우야담»을 흥미롭게 소개한 뒤 번역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짤막한 평을 덧붙였다:

옮긴이들은 서로 다른 판본 27종을 견주어 <어우야담>의 원문에 표점과 교감 내용을 덧붙여 별책으로 묶었고, 본문 속에 나오는 동아시아 인물들에 대한 꼬마 사전도 덧붙였다. 독자들은 비로소 우리 고전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 번역을 만난 셈이다. 그러나 번역문 가운데 수장(水漿), 상식(上食), 임모(臨摹) 등 이미 죽은 옛말들을 풀이말도 없이 그대로 드러낸 건 아쉽다. 민간에 발을 깊게 담근 유몽인의 민중지향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또 중국을 ‘상국(上國)’이라 쓴다거나 ‘우리나라 말’을 ‘방언(方言)’이라고 옛말 그대로 옮긴 건, 연구자가 현대 한국인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 [서평] 야사와 괴담으로 읽는 조선시대 /이상수

이 평에 대하여 신익철 교수와 출판사측이 서평이 적절하지 않다는 전화·메일을 했고 신익철 교수는 독자의견란을 통하여 짤막한 반론을 개진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하여 이상수 기자는 지면 한계상 서평에서 건드리지 않고 넘어갔던 것을 지적했다. 그는 두 군데의 명백한 오역을 지적하면서 한국학계의 고전 주석의 수준이 아직은 미흡하다고 평가했다. (물론 주요 논쟁사항은 “상국”과 “방언”의 번역 관련 문제인데 이 문제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므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신익철 교수는, 아래의 인용문처럼, 오역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그 오역된 사항을 빌미로 이상수 기자가 과도한 판단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자들의 실수를 인정하면서도 “번역자들이 어떤 <장자> 주석서든 아무 것이나 하나만 뒤적여봤더라도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었음에도 그런 수고조차 게을리 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라거나, “아는 것은 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모르는 것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 대목 그대로 남겨두는 학자적 양심이 무엇보다 요구된다.”라는 이 기자의 지적에 대해서는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 [재반론] 이상수 기자의 지적에 대한 답변 /신익철

그러면서 신익철 교수는 이 번역본이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였으며 얼마나 수고를 기울였던 것인가를 주지시키면서 우리나라의 열악한 번역풍토마저 환기시켰다: “이와 함께 대부분의 번역이 자본주의 시장의 논리에 내맡겨져 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고전 번역을 체계적으로 점검하며 지원하는 시스템이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주요 고전에 대한 교감을 수반한 수준 높은 번역을 수행하기 힘들게 하며, 우리의 번역 수준을 떨어뜨리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신익철)

이에 대하여 이상수 기자가 지난 2월 6일 마침내 심중에 품고 있던 칼을 뽑았다. “옛글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하는 대단히 깊고 풍요로운 제목의 반론이었다. 그는 “아는 것은 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모르는 것은 의미가 통하지 않는 대목 그대로 남겨두는 학자적 양심이 무엇보다 요구된다”는 자신의 발언에 책임을 지기 위하여 그 발언에 걸맞는 대목들을 지적한 뒤, 인문학자가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자세를 언급했다. “인문학은 굶어죽을 각오로 하는 학문이다”, “국가 쳐다보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道)가 존중받지 아니한다”는 소제목 아래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인상적인 대목 몇 군데를 읽어보자:

우선 나는 인문학을 하는 사람이 국가가 뭘 해주길 바라며 그쪽을 자꾸 쳐다보는 데 대해 좋게 여기지 않는다. 국가가 하는 일은 무엇을 하든 그건 결국 국가의 사업이다. 언제 어느 곳에 존재했던 국가가 진정한 인문 정신의 발양을 위해 투자했던가? 어떤 계몽군주의 위대한 발자취도 결국은 군주와 통치자들의 치적을 위한 사업일 뿐이다.

물론 나는 국가의 예산 가운데 좀더 많은 부분을 인문 분야로 돌리도록 하는 데에는 적극 찬성한다. 그거야 당연히 나쁠 게 없다. 그럼에도 인문학을 한다는 행위는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와 무관하다. 국가가 돈을 주든 말든, 누가 알아주든 말든, 높은 평가를 해주든 말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가장 기초적인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그게 좋아서 인문학을 하는 게 아닐까. 늙음이 오는 것도 모르는 채. 사실 난 국가가 제대로 된 인문학 연구를 악랄하게 방해하던 시절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국가가 쓸데없이 나서서 간섭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

나는 굶어죽을 각오로 하는 게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대학에서 오라고 해도 가지 않고 안경알을 가는 걸로 생업을 삼다 폐병 걸려 죽었고, 인문학의 정신과 같은 맥락의 치열한 삶을 살았던 모차르트도 고흐도 살아생전엔 아무런 영화도 누리지 못하고 가난뱅이로 비참하게 죽었다. 그러나 그런 죽음도 작은 일이다.

— 옛글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을 것인가 /이상수

이상수 기자에게 존경을 표한다. 한겨레신문에 이토록 동양적 깊이를 갖춘 기자가 있다니 놀랍다. 아마 신익철 교수가 반론을 시작하면서 이상수 기자의 학문적 깊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4인의 학자가 6년 간 공들여 번역해낸 노작을 일개 기자가 촌평했다는 사실이 불쾌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기자는 그저 흔한 일개 기자가 아니라 «어우야담»의 번역본을 누구보다도 면밀하고 예리하게 비평할 수 있는 역량의 기자였다. 신익철 교수는 이상수 기자에게 의외의 일격을 당하면서 다음의 말을 했다:

이 기자가 <장자> 인용문 중 오역임을 밝힌 것은 두 대목이다. 177화 ‘한유의 교묘한 글 솜씨’와 231화 ‘정호음과 어숙권의 박식함’ 중 <장자>를 인용한 대목의 해석이 그것인데, 여기에 오역이 있다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다. 나는 겸허하게 이 지적을 수용하며 이 기자의 박식함에 감탄하는 바이다.

— [재반론] 이상수 기자의 지적에 대한 답변 /신익철

그러나 나는 그것에 감탄하지 않는다. 그것은 학자의 기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갖고 있지 못한, 글의 폭과 깊이에 맞추어 자신의 모습을 은연히 조금씩 드러내는 이상수 기자의 인간적 깊이에 감탄하는 바이다. 그리고 인문학자의 근본자세에 대한 그의 일갈은 두고두고 음미할 만하다. 아울러 그는 이 논쟁 때문에 혹시 독자들이 번역본의 수준을 오해할까 염려하여 다음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이 글을 읽는 많은 이들이 신 교수 등 연구자들이 6년 광음(光陰) 피와 땀으로 옮긴 <어우야담>을 한 권 사서 서재에 모셔두길 권유한다. 한국 인문학의 진일보를 위한 발전 기금을 낸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책 디자인도 그지없이 세련됐고 장정도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논한 건 좀더 나은 번역을 위해 함께 고민해보고 싶은 내용을 얘기한 것이다. 독자 제현들의 혜량(惠諒)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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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폴리스 2021-03-09 0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서울군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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