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무리에서 많은 이들을 끌어내기 — 위하여 나는 왔노라. 군중과 무리는 내게 분노할 터: 차라투스트라는 목자를 강도라 부르고자 하노라.

Viele wegzulocken von der Heerde — dazu kam ich. Zürnen soll mir Volk und Heerde: Räuber will Zarathustra den Hirten heissen.

—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9절에서

“목자와 강도”, 이 두 낱말이 함께 등장하는 중요한 문헌이 있다. 신약성서 요한복음 10장이다. 개신교 성서의 개역개정판으로 읽어보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1-2) …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8) … 나는 선한 목자라(11) … 나는 선한 목자라(14) …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이것은 예수의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선한 목자”는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을 인도하여 “한 무리”로 만들어 “한 목자”에게 있게 하려고 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그와 반대로 그 무리, 그 떼거리에서 많은 이들을 끌어내려고 한다. 그러므로 군중과 무리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분노할 것임은 당연하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10장의 비유를 패러디하고 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약성서를 여러 번 패러디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문체 역시 루터번역 성서를 많이 모방하고 있다. “siehe”(보라), “wahrlich”(진실로), 소유격 명사의 전치, “also”의 용법 등등이 그렇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다. 그러나 국내의 그 수많은 번역자들은 이것을 모르는 듯하다. 이것은 매우 당혹스러운 일이다.

니체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청소년 시절에 이미 다비트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를 읽었을 정도였다. 그 책은 신약성서에서 신화적 요소를 벗겨내고 소위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저작이었다. 게다가 니체는 신학을 공부한 적이 있다. 그런데, 번역자들은 이 사실을 꼭 모르는 것만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다음처럼 번역할 수 있겠는가:

Bildung nennen sie’s, es zeichnet sie aus vor den Ziegenhirten.
저들은 교양이라 부른다. 그것이 저들을 염소의 목자 앞에서 돋보이게 한다.(<차라투스트라의 서설> 5절)

문수 그들은 교양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들을 목자보다 뛰어나게 한다.

승자 그것을 그들은 교양이라 부르고, 그것이 그들을 양치기보다 우월하게 해주는 것이다.

동호 그들은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교육이란 것이 있어 그들을 염소치기와 구분해준다는 것이다.

희창 이 교양이란 게 있어서 그들은 염소치기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nun rede ich ihnen gleich den Ziegenhirten.
지금 나는 염소의 목자들에게 설교하듯 저들에게 설교하고 있다.(<차라투스트라의 서설> 5절)

문수 나는 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그들을 목자처럼 대했구나.

승자 그래서 지금 나는 저들에게 목자들에게 얘기하듯 얘기를 하는 것이다.

동호 마치 염소치기에게 말하듯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희창 마치 염소치기에게 말하듯 그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위의 인용문들이 왜 오역인가를 알기 위하여, 다시 신약성서를 들여다보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요한 10,1-2)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태 25,31-33) …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태 25,41)

성서에는 “양의 목자”가 있을 뿐 “염소의 목자”는 없다. 성서에서 “염소”는 최후의 심판 때 영벌에 처해질 자들에 대한 비유이다. 그 동물은 매우 부정적이다. 예수는 “선한 목자”, “양의 목자”다. 그런데 니체는 이 “양의 목자”를 슬쩍 “염소의 목자”로 바꿔놓았다. 차라투스트라가 보기에, “양의 목자”는 실제로는 “염소의 목자”이다. “양떼”야말로 영벌에 처해질 “염소떼”이다. 니체는 성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여 정반대의 의미를 겨냥하거나 패러디하기를 좋아했다. “염소의 목자”는 일종의 토포스, 일종의 전고(典故)인 것이다. 이 토포스를 놓치면 “염소치기”, “양치기”, “목자”로 잘못 옮기게 된다.

 

“염소의 목자” 토포스를 이해하면, 이제 <차라투스트라의 서설>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는 “Hirt”(목자)가 어느 맥락에서 쓰이고 있는가가 분명해질 것이다:

목자는 없고 한 떼의 무리만 있음이여! 저마다 동일한 것을 원하고, 저마다 동일하다.(5절)

한 무리의 목자와 개가 되지는 말라!(9절)

목자들에게 내 말하거니와, 그들은 자칭 선하고 의로운 자들이다.(9절)

나는 목자가 되어서는 아니되오, 산역꾼이 되어서는 아니되오.(9절)

산역꾼처럼 주검과 어울리는 자들, 한 무리로 모으는 자들, 저 자신마저 한 무리가 되고 마는 자들, 자칭 선하고 의로운 자들, 바로 그들이 “목자”, “자칭 선한 목자”, “염소의 목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런 목자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한 무리가 되지 않는 이들, 살아 있는 동반자들이 필요하다. 그 동반자들은 누구인가?

Sondern lebendige Gefährten brauche ich, die mir folgen, weil sie sich selber folgen wollen — und dorthin, wo ich will.
그게 아니다. 살아 있는 동반자들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여 나를 따르는 자들 — 그것도 내가 원하는 곳, 그곳으로.(<차라투스트라의 서설> 9절)

문수 (누락됨)

승자 자기 자신이 따라가고 싶은 까닭에 나를 따라가는, 그것도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나를 따라가는 살아 있는 길동무를.

동호 그들 스스로가 원하여 내 가는 곳으로 나를 따라가려는, 살아 있는 길동무가 있어야겠다.

희창 나를 따라올 살아 있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그들 스스로 내가 가려는 곳으로 따라오고자 하는 길동무가 필요하다.

살아 있는 동반자는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여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는 자들”이다. 분명히 구분해 두지만, 이들은 “자기 스스로 원하여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커다란 분수령이 이루어지는 구절인데, 역자들은 한결같이 잘못 번역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추종하는 “한 무리의 떼”, “신자들”이 필요하지 않다. 이런 신자들은 살아 있는 동반자들이 아니라 “주검들”, “죽은 동반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별”을 낳지 못하는 인간, 창조하지 못하는 인간, 목자는 없고 한 떼의 무리로만 존재하는 인간, 마지막 형태의 인간, 가장 경멸스러운 인간, “최후의 인간들”이다.

이와 반대로 살아 있는 동반자는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는 자들”이다.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기 때문에 차라투스트라를 따르는 자들”, 그리하여 “함께 창조할 자들”, “함께 수확하고 함께 축제를 벌일 자들”, “홀로의 은자들, 짝을 이룬 은자들”! 그들의 마음은 차라투스트라의 행복으로 무거워질 것이다.

홀로의 은자에게, 짝을 이룬 은자에게, 내 송을 불러주리; 그리고 전대미문의 것을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 나의 행복으로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겠노라.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9절)

차라투스트라의 살아 있는 동반자들 반대편에는 무리, 목자, 주검이 있다. 살아 있는 동반자들은 무리, 목자, 주검과 더불어서는 그 무엇도 창조할 수 없다. 그리하여, 무리를 이룰 수 없는 그들은 홀로의 은자들이거나 짝을 이룬 은자들이다. 그들은 함께 있더라도 저마다 은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차라투스트라의 행복으로 하여, 무거워질 것이다, 뭔가 덩어리가 되어갈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서설>에서 이미 “염소의 목자” vs 차라투스트라, 무리 vs 은자, 주검 vs 산 자, 신도 vs 벗, 등등의 대결이 시작되고 있다. 이것은 흥미진진하게 작위적으로 조장한 대결이 아니라, 어떤 정신성 간의 대결이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선과 악의 대결, 선과 “극악무도한 것”의 대결이라고 칭하겠지만 …

조심하시라! 그 뭔가 극악무도한 것이 예고된다: 패러디가 시작된다.

man sei auf seiner Hut! Irgend etwas ausbündig Schlimmes und Boshaftes kündigt sich an: incipit parodia. (즐거운 학문, 2판 머리말)

다행스럽게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 한글 번역본에는 패러디가 빠져 있으므로.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누아 2006-11-0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책을 면밀히 읽지 못해"그들은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교육이란 것이 있어 그들을 염소치기와 구분해준다는 것이다"와 "염소치기에게 말하듯 나는 그들에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가 있는 부분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본 듯한데, 어쨌든 9절에서는 찾을 수가 없네요. 아주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요. 님의 노고로 제가 무척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네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따르길 원하여 나를 따르는 자들"이란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님의 오역 지적을 보니 책 읽기가 좀 두렵습니다.^^

반조 2006-11-0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인용문의 출처를 일일이 안 밝혀놓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군요. 어서 출처를 밝혀놓겠습니다. 이누아 님께서 언급하신 내용은 5절 앞대목과 뒷대목에 각각 나옵니다.
 

Lange schlief Zarathustra, und nicht nur die Morgenröthe gieng über sein Antlitz, sondern auch der Vormittag. Endlich aber that sein Auge sich auf: verwundert sah Zarathustra in den Wald und die Stille, verwundert sah er in sich hinein. Dann erhob er sich schnell, wie ein Seefahrer, der mit Einem Male Land sieht, und jauchzte: denn er sah eine neue Wahrheit.

오래도록 차라투스트라는 잠을 잤다. 여명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가고, 오전도 지나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의 눈이 열렸다: 경이롭게, 차라투스트라는 숲속을 보았고 정적(靜寂)을 보았다. 경이롭게, 자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번뜩 뭍을 본 뱃사람처럼, 탄성을 질렀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보았던 것이다.

— <차라투스트라의 서설> 9절에서

새로운 진리를 보았다? 아마 많은 이들은 이 표현이 낯설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흔한 언어 습관대로라면, 우리가 인식하는 것, 아는 것, 혹은 깨닫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니체는 굳이 “보다”(sehen)는 동사를 썼다. 이 하나만으로도 니체는 경이로운 존재다.

“진리를 본다”는 표현은 서양고대에서부터 있어온 비의적 계열, 혹은 신비주의적 계열에서 사용되어 온 것이다. 가령, 엘레우시스 비교에서 최고 지위에 오른 이는 “본 자”, “견자見者”라는 의미의 “epoptes”였다. 이것은 «비극의 탄생»에서도 언급된 바 있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아예 독일어 “Seher”로 번역되어 여러 번 등장하고 있다. 불교의 초기경전에서도 “보다”는 낱말은 깨달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선불교에서도 깨달은 자리를 두고 “견처見處”라는 낱말을 쓰기도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인간의 마음, 혹은 인간 정신의 어느 한 고원에 대한 증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현대인들은 신비주의에 대한 지독한 편견에 빠져 있다. 그것은 무슨 비정상적인 사람들의 행태처럼 간주된다. 서양 기독교가 이에 일조한 것은 분명하다. 기독교의 역사는 낮은 수준의 신비주의만 용인하고 높은 수준의 신비주의는 배격하는 경로를 밟아왔다. 높은 수준의 신비주의는 기독교 교의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 정적주의, 야콥 뵈메, 에크하르트 등이 그 사례이다.
 

오쇼 라즈니쉬의 표현을 빌면, 니체는 “붓다적인 요소와 조르바적인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불행은 그가 서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동양이라면 불교의 영향 아래 禪이나 명상을 통해 니체가 숨쉴 만한 공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니체 당시의 유럽에서는 불교라는 이름 아래 우파니샤드나 인도 잠언 등이 이제 갓 번역되기 시작한 참이었다.

니체를 “신비주의자”로 보는 것, 이것은 많은 니체 독자들을 당혹케 할 것이다. 아마 굉장한 이질감, 굉장한 반감을 가질 것이다. 그러면, 니체와 불교가 유사한 면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공격을 받을 지도 모른다. 니체가 불교를 공격한 대목은 여럿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니체의 글들을 읽으면서 불교적 명상, 혹은 禪의 세계에서나 나올 법한 통찰과 이미지를 보았다. 참 놀라웠다. 그러나 이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며칠 전 «오쇼의 짜라투스트라»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세상에 알려진 가장 위대한 철학자일 것이다. 니체는 타고난 신비주의자이며 또한 많은 철학자들이 전혀 알지 못했던 다른 차원에 있어서도 위대함을 발휘했다.

그의 철학은 단순히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가슴속 깊숙이 뿌리내린 심오한 철학이다. 그 뿌리의 일부는 존재의 심층부에까지 이른다.

그에 관해 아쉬움이 있다면, 그가 서양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에 그에게는 어떠한 신비주의자와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는 깊이 있게 사유했지만 명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의 사유는 때때로 명상가의 심오함을 가지기도 하고, 붓다의 경지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존재의 중심에 이르는 깨달음의 도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러한 무지는 그의 존재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별만큼 높은 경지를 꿈꾸었으나 그의 삶은 여전히 매우 일상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다. — 그의 삶에는 명상이 가져다 주는 번뜩거리는 뭔가가 없었으며 그의 사상은 피가 되어 뼈 속까지 스며들지 못했다.

— 손민규 옮김, «오쇼의 짜라투스트라»(나무의꿈)에서

* 위 번역문 중에서 “그의 삶에는 명상이 가져다 주는 번뜩거리는 뭔가가 없었으며 . . .”는 적절한 번역이 아닐 것이라는 짐작이 든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원문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내가 만나 본 니체 애독자들이 니체와 불교의 친연성에 대해 쾌히 수긍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나는 이제 내 느낌을 좀더 확연하게 드러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 오역 점검은 그런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니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존 번역자들이 니체의 통찰에 접근하지 못하고 속속들이 무너지는 대목들을 집어내겠다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부디, “신비주의”라는 말에 편견을 가지지 않았으면 한다. “신비주의”라는 말을, 다름아닌 현대의 서양식 교육에 의해 유린된 인간 정신의 위대성, 니체의 위대한 통찰들을 되살리기 위한 시도쯤으로 간주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기 때문이다.

 

서두에 인용한 니체의 글로 되돌아가자. 독일어 초학자들은 인용문의 독일어가 니체 당시의 표기법에 따른 것임을 유념하기 바란다.

Lange schlief Zarathustra, und nicht nur die Morgenröthe gieng über sein Antlitz, sondern auch der Vormittag. Endlich aber that sein Auge sich auf: verwundert sah Zarathustra in den Wald und die Stille, verwundert sah er in sich hinein. Dann erhob er sich schnell, wie ein Seefahrer, der mit Einem Male Land sieht, und jauchzte: denn er sah eine neue Wahrheit.

“진리를 보았다”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했다. 이것을 “진리를 알았다”, “진리를 깨달았다”로 옮기는 것은, 분명하게 말해두지만, 오역이다.

그리고 “sah … in den Wald und die Stille”는 “숲속과 고요 속을 보았다”, 혹은 “숲속과 고요를 보았다”로 옮겨야 한다. 흔한 생각으로는, “숲과, 그 숲의 고요를 보았다”로 읽기 십상이다. 그래서 많은 역자들이 “숲과 그 고요를 보았다”는 식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숲과 고요”와 “숲과 그 고요”는 다르다. 이것이 왜 다른지 모르는 이들에게 설명하기는 너무나 어렵다. 이해하기 어렵다면, 그냥 원문대로 “숲과 고요”라고 옮기면 된다. 왜 한결같이 약속이나 듯 원문과 다르게 옮기는가!

너무나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 차이를 모르는 이들에겐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은 이것만이 아니다.

Ein Licht gieng mir auf.
하나의 빛이 내게 트였다.

이것은 툭 트여 사방이 환한 상태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때는 정오다! 그저 숲속에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이 비치는 장면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을 “한 줄기 빛이 비쳤다”는 식으로 번역하면 안 된다. 이렇게 단순한 문장에 이렇게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인용문의 “that sein Auge sich auf”를 “그는 눈을 떴다”는 식으로 번역할 수는 없다. 이것은 당연히 “그의 눈이 열렸다”나 “그의 눈이 뜨였다”로 옮겨야 한다. 결국, 하나의 차이가 무수한 차이를 만든다.
 

이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존번역들이 위 인용문을 어떻게 번역했는가 비교해 보자(1):

문수 짜라투스트라는 오랫동안 잤다. 아침놀만이 아니라 오전의 햇살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눈을 떴다. 짜라투스트라는 의아한 눈으로 숲속과 그 고요를 바라보았고 의아한 눈으로 자기 내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갑자기 육지를 발견한 선원처럼 벌떡 일어나 환성을 질렀다. 그는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승자 오랫동안 짜라투스트라는 잤고, 아침놀이 그의 얼굴 위로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눈을 떴다. 놀라서 짜라투스트라는 숲속과 숲속의 정적을 바라보았고, 놀라서 그는 자기 자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서 그는, 문득 육지를 본 뱃사람처럼 급히 일어나며 환성을 올렸다. 새로운 진실을 봤기 때문이었다.

동호 차라투스트라는 오랫동안 잤다. 아침놀뿐만 아니라 오전 한나절의 햇살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침내 그는 눈을 떴다. 그리고 놀란 듯이 숲과 그 적막을 들여다보았다. 놀란 듯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갑자기 뭍을 발견한 뱃사람이라도 되는 양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환호했다.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희창 차라투스트라는 오랫동안 잤다. 아침놀뿐만 아니라 오전 한나절의 햇살도 그의 얼굴 위로 지나갔다. 마침내 그는 눈을 떴다. 차라투스트라는 놀란 눈길로 숲과 그 고요함을 바라보았고 놀란 눈길로 자기 내면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뭍을 발견한 선원처럼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이 있다. “sondern auch der Vormittag”(오전도 지나갔다)의 번역 문제이다. 승자는 부주의로 누락했고, 나머지는 한결같이 “오전의 햇살”, “오전 한나절의 햇살”이 지나갔다고 번역했다. 제발 그리 하지 마시라. 그냥 “오전”이 지나간 것이다. 왜 원문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군살을 덧붙이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로서는 너무 높은 문제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를 자신들의 정신적 수준에 맞게 기어코 끌어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높은 문제들은, 그 문제들을 해결할 만한 정신성의 높이와 힘을 가진 자로 점지되지 아니한 채 그 문제들에 감히 접근하는 자는 누구든, 무자비하게 되받아친다.

und die höchsten Probleme stossen ohne Gnade Jeden zurück, der ihnen zu nahen wagt, ohne durch Höhe und Macht seiner Geistigkeit zu ihrer Lösung verherbestimmt zu sein. (KSA 5, 148)

특히 니체의 다음 언급을 고려하자면, 역자들은 부디 니체의 한마디 한마디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사람들은 이미지가 무엇이고 비유가 무엇인지 더 이상 개념을 얻지 못하리라. 모든 것이, 가장 가깝고 가장 바르고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주어졌다. 실제로,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회상하건대, 사물들이 스스로 다가와 비유가 되어주기라도 한듯하다.

man hat keinen Begriff mehr, was Bild, was Gleichniss ist, Alles bietet sich als der nächste, der richtigste, der einfachste Ausdruck. Es scheint wirklich, um an ein Wort Zarathustras zu erinnern, als ob die Dinge selber herankämen und sich zum Gleichnisse anböten. (KSA 6, 340)

“사물들이 스스로 다가와 비유가 되어준다” — 이것이 “오전의 햇살”, “오전 한나절의 햇살” 따위로 옮겨서는 아니되는 이유이다. 역자들은 "얼굴 위로 오전이 지나간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서 "오전의 햇살"을 덧붙혔겠지만, 그것은 니체에 대한 모독이며, 앞으로 등장할 탁월한 독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부디, 탁월한 독자들의 눈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일은 하지 마시라!

 

이번 오역 점검에서 너무 사소한 문제를 건드렸다는 생각을 가질 분들도 있을 것이다. 흔한 기준으로는 오역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가장 사소해 보이지만 실은 가장 커다란 것이기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차이가 결국에는 허다한 오역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눈에 단번에 띄는 오역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한 것들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오쇼 라즈니쉬의 말을 여기에 옮긴다. 니체의 독자라면, 라즈니쉬의 니체해석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다음의 견해에 대해서만큼은 십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오쇼의 차라투스트라»는, 알라딘의 미리보기를 통하여 20여 페이지를 읽어볼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매우 함축적인 문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한 권의 책에 쓸 것을 그는 단 한 문장으로 썼으며 그렇기에 문장 하나하나가 더욱 의미 심장하다.

만약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는다면 그대는 니체가 말하는 것을 놓치고 말 것이다. 니체의 이 책은 소설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우파니샤드의 경전들과 거의 비슷하다. 각각의 격언들이 엄청난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나는 그대의 오해를 막기 위하여 숨은 암시들을 낱낱이 파헤치고자 한다. 니체는 세상에서 가장 오해받기 쉬운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너무나 함축척인 문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암시들에 대하여 결코 구구한 설명을 달지 않았다.

그는 매우 상징적인 사람이다. 그가 그토록 상징적이 이유는, 설명할 만큼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새로운 통찰력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것을 나누어 주려고 했고 그러기에는 삶이 너무나 짧다고 생각했기에 논문을 쓸 수가 없었다.

그의 저작은 너무나 의미 심장하고 응축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설령 그들이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이해는 오해에 불과하다. 그들은 도저히 니체를 읽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그들은 모든 것이 설명되기를 원한다.

니체는 어린아이를 위하여 쓰지 않았다. 그는 성숙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썼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사람들의 평균적인 정신연령은 열네 살을 넘지 못한다. 이런 정신 연령으로는 니체를 놓치고 말 것이다. 니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니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니체의 추종자들 역시 니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정신연령은 똑같은 수준이다.

— 손민규 옮김, «오쇼의 짜라투스트라»(나무의꿈)에서


각주

  1. 서지사항은 다음과 같다. 이 서지 표기는 이후의 글에서도 유효하게 쓰일 것이다:

     

    문수 황문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문예출판사, 1975)
    승자 최승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청하, 1984)
    동호 정동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책세상, 2000)
    희창 장희창,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2004)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누아 2006-11-0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독어를 몰라 이런 글에 댓글을 달 형편도 못 됩니다만 진리는 몰랐던 어떤 것을 아는 게 아니라 길가의 간판이나 가로수처럼 늘 보이는 그곳에 있었는데 눈이 밝지 못하거나 주의를 다하지 못해 못 보거나 그냥 지나치는 무엇 같습니다. 그가 진리를 본 후 송장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길동무가 있어야 겠다고 생각하는군요. 님이 추천해 주신 정동호 님의 책은 즐거이 읽다 요즘 집에서 책 읽을 시간이 없어-이런 책은 들고 다니기에 조금 부담됩니다^^-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14살 짜리 아이처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말 투성이인데도 힘겹게 읽지는 않습니다. 때로 즐겁기까지 합니다. 이해를 못해 그런 걸까요?^^ 읽었던 구절인데도 이렇게 번역의 문제 때문에 다시 만나니 또 새롭습니다.

페이퍼 읽다 꺼내든 책, 문득 아무 데나 펼치니 눈이 깨끗해져야 한다는 구절이 보입니다.

"정신의 해방을 쟁취한 자는 이제 자기 자신을 정화해야 한다. 아직도 허다한 감옥과 곰팡이가 그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눈 또한 깨끗해져야 한다."-동호, p.70.

님의 홈피로 가지 않고도 여기 알라딘에서 님의 오역 점검을 볼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페이퍼는 서재에 가져가 두고 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반조 2006-11-01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이누아 님께서 차라투스트라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하셨을 때, 사실 저는 번역본을 비교해 본 적이 없어서 직접 추천하지는 못했지요. 다만, 여러 사이트의 추천평들을 전해드렸는데 정동호 역본을 택하셨군요.

이누아 님의 추천 부탁 후,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오역 점검도 결국 이누아 님 덕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일부분이나마 여러 번역본들을 비교해 보니 최승자 번역본이 개중 낫지 않나 하는 짐작이 듭니다. 차라투스트라 1부 전체를 세심하게 읽고 각 번역본들을 비교해 본 다음에, 전체적인 번역비평을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이누아 님과 같은 탁월한 독자분들을 위해서라도 진짜배기 차라투스트라 번역본이 나와야 할텐데, 그 날이 언제가 될른지...

2006-11-02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08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진짜배기' 번역본이 안 나온 것인가요? 덕분에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집어들게 될 거 같습니다.^^

반조 2006-11-08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 님, 반갑습니다.

소동파 2007-05-10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석현 번역본이 새로났습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