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이 읽힌다 - 나를 숨기고 상대를 읽어내는 심리기술
이태혁 지음 / 경향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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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선에 집착할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다. 얼굴은 좀 못 생겨도 마음이 고와야 해!" 

어린 시절부터 항상 선의 역할을 강요 당하며 살아온 점도 우리가 선에 집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간 심리에 있는 가장 크고 강한 잠재의식 가운데 하나가 '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승리'라는 공식을 만든 고정관념은 결국에는 '선이 이기면 좋겠다'고 바라는 인간 본성의 발현인 셈이다. 

...  

선과 악은 다양한 이해 관계에 따라 유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희대의 살인마도 그의 애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사랑스러운 남자였을 것이다. 상대를 이해관계 없이 정확하게 본다는 것은 그 대상이 사람이건 나라건 미지의 생물이건 상관없이 날카로운 이성과 객관적인 시각을 요구한다. 이때 이성과 객관을 지키는 방법은 고정관념을 최대한 줄이는 것임을 명심하자.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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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저편 (천줄읽기) - 지만지 고전선집 315 지만지 고전선집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강영계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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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그것을 내가 행했다”라고 나의 기억이 말한다. 나의 자부심이 그것을 내가 했을 리 없다고 말하면서 완고하게 버틴다. 결국에는 기억이 양보한다.

70. 만일 우리가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우리 자신의 전형적인 체험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74. 천재성을 가진 인간은, 만일 그가 천재성 이외에 적어도 그에 대한 감사함과 명확성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견디기 어렵다.

92.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 이미 한 번이라도 자기 자신을 희생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107. 일단 최선의 반대 이유에 대해서도 귀를 막을 결심을 한다면, 이것은 강한 성격의 표시다. 말하자면 때로는 어리석음에의 의지다.

130.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의 재능이 시들어갈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지 못할 때 드러나기 시작한다. 재능은 화장(化粧)이기도 하다. 화장은 또한 은폐다.

156. 광기는 개별적 인간에게는 드문 어떤 것이다.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 있어서는 일상적인 것이다.

169. 자신에 관해서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을 숨기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도 있다.

170. 비난보다는 칭찬에 한층 더 많은 주제넘음이 있다.

173. 사람들은 여전히 남들을 하찮게 평가하는 한에서는 미워하지 않지만 똑같이, 또는 보다 더 높게 평가할 때에는 미워한다.

175.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욕망을 사랑하고, 욕망한 대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176. 타인들의 허영심이 우리의 허영심에 반대될 때에만 타인들의 허영심은 우리의 기호(嗜好)에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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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접한 꽃들의 축제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소疏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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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는 즉, 마음의 내적 방해물들을 포착하고, 그것을 제거하는 힘이다. 방해물들이라니? 마음의 방해물들, 그 번뇌, 혹은 망상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고, 그 때문에 우리는 고통 받고 있다. 불교는 이들이 마음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는 점에서 순전히 객관적 분석을 표방하는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과는 다르다. 반야는 이 장애물들을 깨부수는 힘이다. 어떤 번뇌나 망상도 이 앞에서 깨어진다. 그리고 이 반야는 워낙 견고하여, 그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는다. : p23

혜능은 깨달은 자의 징표 가운데 하나가 “밖으로 사람들의 실수와 악행을 덜 기억하고 곱씹는 것外不堅靭之過惡”이라고 적어두었다. : p54

여시(如是)에 대한 옛사람들의 해석은 다기다양하다. 지금 야부 노인은 여(如)를 유무(有無)가 불이(不二)라는 뜻으로 새기고, 또 시(是)는 그 여(如)에 시비(是非)가 없다는 뜻으로 읽었다. : p65

『별기』에서, 구분과 차별이 인간의 관심과 욕망의 투사라는 말은 자주 했던 것 같다. : p70

이때, 단단히 주의해야 할 것은 가슴 속에 또아리 틀고 있는 자만심과 허세이다.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거나, “내가 너를 가르치고 도와준다”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 공덕을 까먹고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다. 어디 보살뿐이겠는가. 일반적으로, 사람 사이의 대화나 거래에서, 혹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일반적으로 나, 혹은 자아의 심리적 방해가 엷을수록 더 만족스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 p135

나는 나 밖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리고 그들에 의존해서야 비로소 존재한다. : p139

불교는 불을 꺼나가는 과정이다. 열반nirvana이라는 말의 어원이 촛불을 끄듯이, “(탐욕과 증오, 기만의) 불길을 끈다”는 것임을 유의하자. “자신 속의 불건전한 정념과 무지를 제거하고 조복(調伏)시켜라.” 이 ‘마음의 훈련’은 중대한 결과를 몰고 온다. 자기 의식, 혹은 에고의 중심이 약화되고 흔들린다. 우리가 ‘나’라고 불리는 것들은 실체라기보다, 이들 감각과 정념, 관심과 인식, 기억과 편견을 토대로 ‘부풀려지고’, ‘증폭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는 그래서 자아의 관념이 실체 없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이 저간의 소식을 한마디로 공(空), 즉 ‘비어 있다’고 말한다. (공sunyata이란 말의 어원은 공갈빵처럼 ‘부풀려진’에서 왔다. 그 빵의 속은 ‘실제’ ‘비어 있다’.)

요약하면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자아의 투사project에 불과하고, 그 자아는 감각과 충동에 연동되어 있으며, 이들은 자기 밖의 영향력과 그 흔적들이라는 점에서 역시 ‘자아’는 없고, 자아가 없다면 ‘세계’ms 실재하기를 그친다. : p149

혜능은 멸도(滅度), 즉 위대한 평정과 자유란 “번뇌(煩惱)와 습기(習氣), 그리고 일체(一切)의 제(諸)업(業)장(障)이 멸진(滅盡)하여 다시 찌꺼기가 없는 경지”라고 썼다. : p160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은 하나이고, 그전에 생사니 열반이니가 아예 성립이 우스꽝스럽다. 그것을 평등(平等)이라고 했다. 평등은 불교의 전문 용어로 사물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 p164

"색성향미촉법의 토대가 없는 보시“도 같은 뜻을 표명하고 있다. 형체, 소리, 냄새, 맛, 촉각, 그리고 의식은 한 인격이 토대를 구성하는 자료들이다. 이들 여섯 대상이 자극을 주면, 신체는 이 자극을 향해 감정적 의지적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반복되고 패턴화되면서 견해(見解)라 부르는 편견(?)이 형성된다. 성격, 혹은 인격은 이 과정을 통한 강화의 결과이다. 다시, 성격은 외계에 대한 자극을 선택하고, 거기 반응하는 양상을 결정한다. 각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 속에 살고 있다. : p180

처음 1)우리의 욕망과 그 ‘대상’물이었던 변(匾)계(計)소(所)집(執)의 세계는, 2)사물이 서로 서로 관계하고 있는 의타(依他)기(起)의 세계로 이동한다. 이것은 ‘시선의 혁명적 전향’이다. 그것은 욕망과 그 충족의 전망에서 바라본 시선이 아니라, 유희와 소요의 시선이다. 그로써 돼지의 눈에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해관계를 떠나 사람과 ‘만나는’ 자기 혁명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놀라워라, 거기 남을 비난하기를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여기가 종교적 전회이자 치유의 시작이다. 그는 전혀 다르게 살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자기 마음의 우상을, 토대를, 즉 상(相)을 깨뜨림으로써 얻은 것들이다. : p182

문제는 21세기, 앞으로입니다. 권위와 저항의 대립 시대는 지났으니, 앞으로의 화두는 개인의 삶과 일상의 관계일 것입니다. 거대담론과 정치의 시대는 퇴조하고, 문화와 놀이가 봇물로 소통되고 소비되고 있습니다. 하여, 21세기는 유교와 불교의 시대입니다! 기독교 또한 이념과 당위의 도그마를 권위적으로 설파하는 역사신학보다, 개인의 영성과 각성에 주력하는 영성신학이 설득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 p196

시비(是非), 선악(善惡), 미추(美醜)에서, 생사(生死), 그리하여 최종적 범주인 유무(有無)를 넘어서는 곳에 객관적 사태로서 법(法)이 있다. 그 자리를 대승 중관(中觀)은 중도(中道)라고 부른다. 그래서 중도는 불가설,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사(四)구(句)백(百)비(非)라 어떤 ‘판단’도 중도 근처에 갈 수 없다. : p244

상(上)승(乘)법(法)이란 혜능의 돈교를 가리킨다. 여기 닦아야 할 것도 없고, 그만둘 것도 없다. 이루어야 할 해탈도 없으며, 가야 할 서방 극락도 없다. 야부의 노래를 빌리면, 원동태허 무흠무여(圓同太虛 無欠無餘)라, 세상은 ‘이미’ 완전하다. 그 안에서 나는 “하루 종일 바쁜데, 무슨 일이든 마음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 완벽한 삶의 조건은 무엇인가. 혜능은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무착(無着), 즉 내 마음이 타자에 의해 점령되지 않는 것이고, 둘은 무상(無相), 즉 세상이 나로 인해 구획되거나 시비되지 않는 것이다. : p258

수상행식(受想行識)... 이 말을은 영어로는 각각 감정feeling, 지각perception, 의지volition, 의식consciousness을 가리킨다. 이들 ‘마음’의 여러 상태, 혹은 국면들은 ‘몸’을 나타내는 색(色, body)와 함께 오온(五蘊)의 멤버들이다. : p261

요컨대 불교가 늘 경계해 마지않는 생멸심이란, 자아에 토대(住)를 두고 추동된(生) 상념과 정념(念)의 출몰을 가리킨다! 그것은 이기적이면서 인위적이기에, 부자연스러우며, 결국 타자와 교감 없이 냉담하다... 그 이기적 자아의 닫힌 매트릭스 안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生滅) 마음이 왈, ‘생멸심(生滅心)’이다. 이 마음은 뚜렷하고 분명하기도 하지만, 주로는 머릿속을 분주히, 먼지처럼 일어났다 사라지는 상념으로 나타난다. : p264

공(空)이란, 혜능의 표현을 빌리면, ‘유(有)와 무(無) 사이에서의 오랜 방황’을 끝내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그렇다”와 “아니다”의 부저를 신경질적으로 눌러대는 분별(分別, vikalpa)의 뿌리 깊은 습성, 즉 이(二)변(邊)을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공(空)은 이처럼 자신을 비우고 오랜 습관을 넘어서는 작업이지만, 또 한편 불(不)공(空)이라, 가득 차 있기도 하다... “자심여래(自心如來)는 자오자각(自悟自覺)이라, 번뇌와 망념을 여읜 이 마음에서, 복락이 스스로를 무한히 펼쳐간다.” : p266

사람들은 대개 이들 꼭두각시들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자아(自我) 혹은 페르소나persona에 익숙하다 보면, 문득 “나는 어디 있지” 하고 돌아보는 때가 온다. 자기 아닌 것에 자신을 맡겨버린 이 일상화된 비극을 현대철학과 종교는 ‘소외alienation'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럼 주인공은 어디 있는가. 불교는 이 물음을 끌어안고 해결을 모색하는 개인화individuation의 순례요 등정이라고 할 수 있다. : p276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법은 없다. 그러나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보지 못하는 자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마음의 철학 meditations』, 강분석 역, 사람과 책, 2001, 39쪽) : p284

공자가 말했다. “말을 해야 할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잃을 것이고, 말하지 않아야 할 사람에게 그 말을 하면, 그 말을 잃을 것이다. 지자(知者)는 사람도 말도 잃지 않는다. : p303

너를 모욕하는 것은 너에게 욕을 퍼붓는 사람이나 때리는 사람이 아니라, 모욕하고 있다고 하는, 이 사람들에 관한 너의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누군가가 너를 화나게 할 때, 너의 머릿속의 ‘생각’이 화나게 하는 것임을 알라. (『엥케이리디온-도덕에 관한 작은 책』, 김재홍 옮김, 까치, 2003, 36쪽) : p313

“불국토는 청정하여 이미지도 형태도 없다.” 삶은 이미 주어졌다. 우리의 삶은 다만, 그 안에서 경영될 수밖에 없다. 푸념하지 말지니, 지혜는 그 ‘위대한 수용’에서 시작한다고 한 바 있다. 그때 문득 세상이 평등하고 화평해지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한다. : p385

혜능은 이 우주적 참여로서의 장엄을 세 가지로 특화했다.

1) 하나는 ‘세간불토의 장엄’이다. 세간불토는 ‘사찰이라는 신성한 공간을 뜻한다. 거기 공양한다는 것은 불교라는 종교에 의식적 의례적(儀禮的)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경전을 베끼고 외며, 절에 보시하고 스님들께 공양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2) 둘째는 ‘몸으로 하는 불국토 장엄’이다. 이 몸을 경건히 잘 건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의 자세를 가리킨다. 혜능은 이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절간을 번듯이 하는 불사’보다 위대하다고 가르친다.

3) 배려로서의 장엄보다 더 근본적이고 위대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불사(佛事)’이다. ‘마음으로 하는 불국토 장엄’이란 내 마음을 언제나 밝고 환하게, 구름 끼지 않게 유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내 마음 하나가 깨끗해지면, 곧 온 세상이 밝아진다. 사람이 남에게 하는 생각과 태도, 말은 곧 스스로의 관심과 수준의 반영이다. 내가 도둑이면 모든 사람이 도둑처럼 보여 경계를 놓지 않게 되고, 자신이 부처이면, 모든 사람을 부처처럼 존중하게 된다. 무소득심(無所得心), 세상에 내가 얻을 것도, 가질 것도 뭐, 별 대수냐 싶은 마음, 그 여유로운 한 마음을 가지면, 세상이 그 가닥을 통해 숨통을 열고, 사태해결의 실마리가 열린다. : p385

그의 마음에는 17세에 들었던 어는 현자의 말이 새겨져 있었다. “매일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그는 어느새 바른 길에 들어서 있을 것이다.” 그는 나이 50이 되도록 매일 매일을 거울 앞에서 물었다고 한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그래도 지금 하려는 일을 하고 싶어할 것인가.” 아니요라는 대답이 자주 나온다면 그것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 p411

삶은 시한부입니다. 그러니 남의 인생을 사느라 자기 인생을 낭비하지 맙시다. 도그마에 붙잡히지 마십시오. 도그마란 다른 사람이 생각해놓은 것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이 내는 소음에 당신 내면의 목소리가 묻혀버리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당신의 마음과 직관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가도록 용기를 내십시오. 당신의 가슴은 당신이 진정 무엇이 되고 싶어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입니다. : p412

불교는 가정적 환경이나 사회적 여건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어떤 잘못된 습관 하나가 오랜 고통과 불행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하여 불교의 ‘지혜’가 실제 작용해서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어떤 잘못된 ‘습관’ 하나이다. 혜능 또한 반야바라밀의 타겟이 ‘우심생멸(愚心生滅)의 제거’라고 분명히 적었다.

‘우심생멸’은 ‘어리석은 마음에 오가는 생멸’이다. 아니 ‘어리석은 심생멸(心生滅)’로 읽을 수도 있다. 짐짓 『대승기신론』의 어법을 차용해서 이 구절을 읽어보기로 하자. : p432

불교는 우리 삶에 아무런 고통이 없다거나, 즐거움만이 가득 차 있다고 사기치지 않는다. 다만 고통을 구성하는 연쇄고리를 보다 분명히 알고, 그 뿌리가 인간의 원초적 무지와 맹목적 욕망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때, 그와 더불어 비로소 사물의 실상이 선명히 잡힐 때, 그 자각이, 그 반야바라밀이 우리의 고통을 덜어주고, 존재에 위안을 주며, 궁극적 평안의 언덕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가르친다. : p434

혜능이 말하는 ‘어리석은 마음의 생멸(生滅)’이란 요컨대 부자각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활동들을 가리킨다. 이들 ‘소외된 심생멸’은 작은 일에 쉽게 자극받고, 심리적 정서적 자아의식이 강하다. 자기만의 독단을 객관적이라 자부하며 과거의 기억에 현재를 묶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장밋빛 환상을 걸기 쉽다. : p435

사람에 따라 가치의 무게중심이 다르기에 관용이 필요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다 큰 규모에서 생각하고, 보다 원대한 이상을 갖고 있기에 그들을 존경하고 받들어야 한다. : p442

혜능은 그 요점을 잘 모를 사람들을 위해 친절한 설명을 잊지 않았다. 하나는 “5근(根) 중에 6바라밀을 닦으라”이고, 하나는 의근(意根) 중에 무상무위(無上無爲)를 닦으라“이다. 6바라밀은 감각을 길들이는 훈련이고, 무념무위의 수련은 상념-의지를 길들이는 훈련인데, 이 둘은 수레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처럼 협력 동시(同時)해야 한다. : p451

무상이란... 나의 욕망과 에고의 이해관계를 통해 사물을 가르고 편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무위란 나의 욕망과 이해 관계에 입각해 사태를 편의적으로 이기적으로 처리하지 않도록 하는 훈련을 의미한다. : p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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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 사람의 본성이 곧 부처라는 새로운 선언 청소년 철학창고 26
정은주 풀어 씀 / 풀빛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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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나의 음을 딴 말로서 '지혜'라고 번역된다. 반야는 일상적으로 말하는 생활 속의 지혜와는 좀 다른 '부처님의 완전한 지혜'를 의미한다. 물론 누구나 불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문득 지혜의 불꽃이 번뜩일 수 있지만 깨달음에 이른 부처님이 보여준 완전한 지혜와 통찰력을 말한다. : p15 

만물이 공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연기법(緣起法)을 가르치셨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연기의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연기(緣起)는 만물은 서로 의존하여 생긴다는 원리로 모든 것은 서로에게 원인(因)이 되고, 서로에게 인연(因緣)이 되어 발생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반대로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되기 때문에 저것도 소멸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며, 자신의 고정 불변한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空)하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이 상태를 공(空)이라고 표현한다. : p21 

삼독(三毒)은 깨달음을 이루는 데 독이 되는 세 가지 나쁜 마음으로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癡心)을 말한다. 탐심은 욕심을 말하며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 식욕, 성욕이 대표적인 오욕(五慾)이다. 진심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자주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마음이다. 치심은 청정한 자성(自性)을 보지 못하고 무명(無明,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 상태)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마음이다. : p24

무념, 무상, 무주를 수행의 근본으로 삼도록 당부했다. 어떠한 대상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며(무념), 어떤 모양(형상)을 정해 놓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며(무상), 한 순간도 어떤 경계에 붙잡혀 거기에 머무르지 않기(무주)를 강조했다. : p70 

삼매란 오직 하나에 마음이 집중하여 마음이 이리저리 헤매거나 동요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일행삼매란 순간순간 모든 움직임이 밝고 고요한 삼매의 경지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보통 일상적인 생활을 말할 때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걸어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고 하는 행동들 그리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상황들)이라고 한다. 일행삼매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가운데 어떤 순간에도 곧고 바른 하나의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일행삼매만 이야기하지만 다른 판본에는 일행 삼매와 더불어 일상삼매(一相三昧)도 같이 말하고 있다. 일상 삼매는 천지 우주의 모든 존재가 다 하나의 도리(이치)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천지 만물은 여럿이 아니라 하나의 모습(일상 一相)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보나 너를 보나, 산을 보나 물을 보나, 미움을 보나 사랑을 보나 모두가 다 있는 그대로 참된 부처의 성품(진여불성)임을 아는 것이다. 즉 일체의 존재가 다 하나의 불성이며 실상(實相)임을 알고 깨닫는 것을 일상 삼매라고 한다.  

일행삼매는 일상 삼매를 깨닫고 매 순간 끊임없이 곧고 바른 마음으로 공부해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선정(禪定)고 지혜(智慧)를 아울러서 닦는 것이다. : p74 

무념이란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떠한 경계(나를 넘어선 외부의 어떤 대상)에도 물들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어떤 법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무념이란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생각을 모두 없애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 의식이 끊어지고 법신이 육신을 떠나므로 죽음을 의미하며 결국 다른 세상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 무(無)란 무엇이 없다는 것이며, 염(念)이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은 대립된 두 극단의 어떠한 번뇌에서도 모두 벗어난다는 뜻(나와  남, 선과 악, 옳고 그름, 좋고 싫음과 같은 대립된 극단의 생각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진여) 본성을 통찰하는 것이다.  

생각을 일으키는 근본은 진여 본성이며, 생각은 진여 본성이 작용하여 일어난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깨끗한 본성(진여 본성)이 생각을 일으켜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알게 된다. 하지만 진여 본성은 어떠한 경계에 부딪혀도 거기에 물들지 않으며 항상 청정하고 자유롭다. : p80 

혜능은 매 순간 나에게 다가오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경계)에 대해 거기에 맞게 현명하게 대응하되 결코 물들지 말라고 가르친다(응물불염물 應物不染物). 무념, 무상, 무주란 어떤 경계가 다가왔을 때 귀 막고 눈 막고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생각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다. 물들지 않음이란 어떤 경계를 만나면 거기에 흔들리거나 끌려 다니지 않고 자기의 중심을 잡고 적절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 p82 

이 법문을 들으면서 어떤 것이 올바른 '좌선'이라고 생각하는가? '좌'란 그냥 앉아 있는 자세가 아니라 어떠한 걸림도 장애도 없이 밖으로 어떤 경계에 처해도 마음이 동요하거나 생각이 복잡하게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선'이란 안으로 자기 본성을 바로 봄으로써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선정(禪定)'이란 어떤 것인가? 밖으로 보이는 일체의 모양(相)을 떠나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음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음이 정(定)이다. 밖으로 보이는 모양에 사로잡히면 안으로 마음이 금방 흐트러지지만 설혹 밖으로 모양을 본다 해도 안으로 흔들리지 않고 어지럽지 않으면 스스로 청정하여 정(定)에 머물게 된다. 

밖으로 어떤 경계에 부딪혀 생각을 일으키면 곧 흐트러지기 쉬운데 어떠한 대상을 보더라도 어지럽지 않으면 그것이 정이다. 밖으로 보이는 모양을 떠나는 것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니, 밖으로 선(禪)하며 안으로 정(定)함을 '선정(禪定)'이라고 한다. <유마경>에는 선정이 "즉시 환하게 깨달아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 것"이라고 했으며 <보살계>에는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하다."라고 했다.  

선지식이여, 자성이 청정함을 바로 보라. 스스로 닦아 스스로 이루면 법신(진리의 몸)이며 법신 그대로 실천함이 곧 부처행이다. 스스로 실천하여 스스로 성취함이 부처의 도라 할 것이다. : p85 

혜능의 반야바라밀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무주심이며 미워하고 좋아하는 애증심과 집착심을 벗어난 자유의 경지를 말한다. : p91 

선지식들아, 과거, 현재, 미래의 생각이 매 순간 어리석지 않고 헤매지 않으며 지난날의 잘못을 단박에 그리고 영원히 끊어 버리면 그것이 진정한 참회다. 과거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이 모두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남을 속이려는 마음이 없도록 하라.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한꺼번에 소멸하고 영영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함이 진정한 자성의 참회다. 과거, 현재, 미래의 생각이 순간순간 질투에 물들지 않아서 지난날의 질투심을 모조리 없애 버리면 이것이 무상 참회다.  

참이란 잘못을 뉘우치고 절대로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요, 회란 과거의 잘못을 똑바로 아는 것이다. 나쁜 죄업을 버리지 않으면 아무리 부처님 앞에서 수백 번 다짐해도 소용이 없으니 모든 죄업을 끊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음이 진정한 참회다. : p97 

<육조단경>에서 혜능이 줄곧 주장하는 것은 도가 높은 스님이나 부처님께서 우리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에 의해 스스로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초월적인 신이 나약하고 불쌍한 인간을 구제해 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기 본성에 부여된 능력에 의해 마음속 중생을 구제하고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마음속 중생이란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든 중생의 마음이다. 비뚤어진 마음은 바로잡고, 어리석음은 지혜로, 악은 선으로, 번뇌는 보리로 바꾸어 스스로 부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 p100 

본성을 깨닫는 것이 공(功)이요,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고 바르게 행함이 덕(德)이다. 그러므로 참된 공덕은 한 생각 한 생각에 거리낌이 없고 언제나 참된 본성을 보며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밖으로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공경하며 안으로는 겸손하게 처신하며 참된 본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 진정한 공덕이다. : p122 

돈오법은 혜능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경전 공부를 통해 문자에 의지해 차근차근 수행해 간다는 종래의 수행 풍토를 비판하고 자기가 잇는 그 자리에서 본래의 성품을 직시함으로서 즉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직지 인심 견성성불)고 혜능은 가르쳤다. 견성성불이란 더럽혀진 본성을 오래도록 닦아서 새로이 깨끗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본래 깨끗한 본성을 바로 보고 그대로 쓰는 것을 말한다. 오랜 세월 무량 공덕을 닦아야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갖추어진 깨끗한 본성으로부터 바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 p144 

본성이란 오랫동안 관조하고 지켜보아야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모양(相)이나 공(空)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생각으로 헤아리는 분별심도 버리면 그 자리에서 바로 본성을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혜능에게 자성은 둘이 아닌 성품을 의미했다.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둘이 아니며, 성(聖, 성인(과 속(俗, 세속인)이 둘이 아니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번뇌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다. 이런 입장에서 혜능은 마음 관조하기, 고요함을 지키기, 오래 동안 눕지 않고 수행하기(장좌불와)와 같은 전통적인 좌선법을 선병이라 하여 엄격히 배격했다. 혜능은 오직 견성을 근본으로 삼아 움직이는 선, 생활하는 선, 매 순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선을 강조했다. 이 점이 혜능선의 생명력과 창조력이라 하겠다. : p145 

사람의 마음은 분별하고 헤아리는 생각(옳다와 그르다, 싫다와 좋다, 곱다와 밉다와 같이 순간순간 어떤 대상에 대해 분별하는 양극단적인 생각)이 없으면 본래 텅 비고 고요하여 삿된 견해를 벗어나 있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미혹하지 않으면 양극단적인 생각을 벗어나게 된다.  

만약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게 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空)에 사로잡히게 된다. 모양이 있는 것들 속에서 모양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을 아는 가운데서도 공에 얽매이지 않아야 바로 미혹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이 가르침을 알고 바로 깨달으면 한순간에 마음이 열려 부처가 된다.  

그러면 '마음이 열린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마음의 어떤 것을 여는 것인가? 바로 부처의 지견(知見, 환히 제대로 알아보는 능력)을 여는 것이다. 부처란 곧 깨달음이요, 깨달음은 네 부문으로 나눌 수 있다.  

부처의 지견을 열어서, 부처의 지견을 나타내고, 부처의 지견을 깨달아 부처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이다." 

'열고, 나타내고, 깨닫고, 들어감'이 네 가지는 모두 하나로 귀결되는데, 바로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청정한 성품을 보아(경성) 부처가 되어(성불)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지견을 열고, 나타내면, 문득 깨달아, 들어가서, 깨달음의 지견이 자기의 본래 참성품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p150 

서로 원인이 되어 오고 가는 과정을 통해 '중도(中道)'의 의미가 드러난다. 중도란 대립하는 두 극단을 아우르면서도 두 극단을 벗어나 바르게 가는 길이다. : p160 

혜능이 삼십육대법으로 중생을 가르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한 것은 한 변(극단)은 대립되는 다른 변과의 관계 속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시키라는 말이다. 결국 그 상대성을 알면 그것을 넘어선 절대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모두 쌍으로(대법으로) 대답하고 마침내 두 법을 모두 없애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라고도 했다. 쌍으로 말하라는 것은 '있음'을 물으면 '없음'으로 대답해 있다와 없다는 언제든지 상대적인 것임을 가르쳐 주라는 것이다.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는 것은 상대성을 벗어나 절대성에 이른다는 말이다. 중생들은 대부분 무엇을 대하든 선 아니면 악, 너 아니면 나, 옳지 않으면 그르다는 식으로 양극단에 머물러 생각한다. 이런 대립적인 생각은 만물의 실상을 알기 어렵게 하고 무명(무지함)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혜능은 이런 미혹한 중생의 눈을 뜨게 하고 실상을 보도록 가르치기 위해 쌍으로 대비해서 말하라고 했다. 그리고 대법을 극복하는 길로 혜능은 중도(中道)를 제시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에 가서는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대 옳다고 한 선택이 얼마 후 잘못된 일로 드러날 수 있고, 괴로움이 어떤 계기로 인해 행복으로 바뀐다든지 하는 일들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 대립된 것이 서로 통하는 것임을 알면 양극단을 벗어나 중도를 깨닫게 된다. 혜능은 중도를 벗어난 설법은 바른 법이 아니라고 보았다. : p167 

무(無)란 해를 덮고 있는 구름을 없애는 것이고 염(念)이란 구름이 사라진 뒤 해가 환하게 빛나는 것이다. 해는 언제나 밝게 빛나고 있지만 구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덮일 따름이다. 구름이 망념이라면 해는 언제나 깨끗한 본성이다. 망념을 없애는 것이 무념이라면 늘 밝게 빛나는 해는 바른 염이다. 그러므로 무념은 무념+염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망념이 없는 무념으로 바르게 염(생각)하는 것이 혜능이 말한 무념의 뜻이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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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치명적 농담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別記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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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동안 오염된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 그런데 내 이제 그 실상을 투명하게 알겠다!"는 발견이 곧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깨달음으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p103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불교는 나중에 "붓다가 왜 왔는지 모르겠다"거나 "붓다는 40년간 장광설長廣舌을 늘이고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불교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사코 빼앗으려 합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오래된 독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말입니다. 이들을 제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고 세상은 평온해질 것입니다. 『상유타 니카야』에서 붓다가 말했습니다. "열반은 탐욕과 증오, 기만의 끝이다." : p109 

여기서 '일어났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곤경과 고苦의 현실이 필연적 사태가 아니라, '우연적인 것'임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일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소멸될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마찬가지로 그것이 '만들어진' 어떤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다시 부술 수 있습니다. 연기법에 대한 오래된 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게 된다. 이것이 생기기에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멈추면, 저것도 멈춘다." : p114 

재산, 명예, 권력뿐만 아니라, 인간은 타자인 인간을 소유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인데, '그들'도 또한 너의 소유를 탐내고 너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모든 사람들이 '소유'와 '탐욕'의 관점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조정하려 합니다. 이를 통해 세계는 박제되고, 사람은 소외됩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타락, 혹은 존재망각, 고향상실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 p128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생판 모르는 도시나 나라인데, 누군가가 거기 있거나 살았다는 기억으로 하여 아주 가깝게 다가오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역시 세계는 주관적으로 '의미화'되어서만 존재하는 무엇입니다. : p129 

세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 전에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근본 통찰처럼 세계는 의지의 산물입니다. 세계는 그 의지를 통해 구성된 표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책 제목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를 불교식으로 번역하면 곧 '법法이 아닌 상相으로서의 세계'정도가 되겠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따라, "우리가 아는 세계는 '의식'으로부터 파생되었거나, 그 활동의 결과"라는 것을 알리고자 합니다. : p130 

불교가 공空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객관적 세계는 '거기 그렇게如如' 역력하게 존재합니다. 불교는 다만 그것이 '자아의 투사로 물든 주관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할 뿐입니다. : p152 

"친밀한 마음을 개발해라, 라훌라야, 그렇게 하면, 악의가 점차 줄어들 것이다. 동정심을 개발하라, 그리하면 번뇌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개발하라, 그리하면 혐오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평정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모순들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몸이 부패하고 있는 것을 더욱 뚜렷이 의식하는 마음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정념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떠서 흘러가는 성질을 뚜렷이 의식하는 마음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자아의 오만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 p176 

마음을 비울 때 심신은 가뜬하고, 지각은 더 민감해지며, 지식에 대한 흡수력도 훨씬 증강됩니다. 마음을 비우면, 밖에서 오는 사물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스트레스를 견디기가 훨씬 수월해지며, 지금 만나는 사람들을 훨씬 느긋하게 대할 수 있고, 그로부터 받은 심리적 상처에도 훨씬 관용적이게 되어 인간관계도 좋아집니다.  

그런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모이고 따릅니다. 누구나 심리적 여유가 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승진을 하고 장사를 잘하기 위한 전략으로서라도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이는 역설이지만 진실입니다. 노자가 말했듯이, "진실은 늘 상식과 어긋나 보이는 법"이고, "진정 똑똑한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는 법"입니다. : p243 

다시 기억하실 것은, 유有와 무無가 정반대의 극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모두 아상의 결과라는 점에서는 서로 다를 바없습니다! 여기가 여러분들이 늘 만나는 불교 언설의 역설과 모순, 모호함과 아이러니의 진원지입니다. 불교는 경전의 언설장구마다, 유와 무가 결국은 같다는 것, 그 둘을 동시에 벗어나야만 우리가 진정 자유를 얻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고구정녕 가르칩니다. : p255 

주자학의 과제는 "자신의 숨겨진, 때 묻고 탁해진 본성의 회복"에 있습니다. 이곳을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자는 인간의 모든 훈력과 교육의 목표가 자기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고, 다음 다른 사람의 본성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목표이고, 수많은 제도와 법률 또한 이 구원의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 p318 

방심放心이란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일종의 '비자각적 상태', 멍한 정신 나간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자학은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이 행동이나 선택 이전에 이미 원초적으로 내면의 자기망각에서 준비된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구방심求放心'은 이런 자기망각 혹은 비자각적 상태를 극복하려는 노력인데, 그와 같은 의식의 혼란을 깨고 생생한 자기의식으로 돌아오기는, 그러나 아주 쉽습니다. 필요한 것은, "아차! 내가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었지?"라는 자각이 전부지요. 그것은 순간적이고 즉각적으로 성취되는 공부입니다. 

이 훈련이 득력得力, 힘을 얻으면 운전 연습 때처럼 자각의 지속이 길어지고, 또 밝은 상태가 고양됩니다. 이로써 유전과 경험의 복합으로 하여 구조화되어 있던 자기망각과 그와 연관된 두터운 업장의 장애가 엷어지면서, 동시에 인간 내부에 본래 있던 덕성德性의 빛이 점점 더 크게 밝아진다고 가르칩니다. 이 양상養性, 즉 '덕성의 배양'은 동시에 복기초復其初, 즉 "자기 안에 있던 본래성을 회복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퇴계는 이 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율공에게, 구방심이 공부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그 끝이라고 가르쳤습니다. : p321 

돈頓이란, "깨달음은 이미 여기 와 있다!"는 것, 그러므로 찾거나 이루거나 하는 '시간'과 점차'로 더듬지 말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 p344 

초자연적 실재란 없고, 초월적 깨달음이란 것도 헛소리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실제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 없이, 욕망의 흔적과 조바심 없이 관觀할 수 있을 때, 그곳이 곧 구원이고 법계입니다. 진리란 피곤하면 눕고 졸리면 자는 것일 뿐, 이 밖에 무슨 특별한 소식은 없습니다. 오늘 지은 업이 마음의 창고에 아무런 찌꺼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또 내일 다가올 이를 걱정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부처입니다. : p357 

눈에 보이는 사물을 빈 마음으로 보고, 마주 선 사람을 하나된 마음으로 껴안는 것, 그것뿐이라면 정말 쉽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할 수 있고, 거기 아무런 준비가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그거나 그것만큼 또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려움은 그 취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기가', 그리고 그 바라밀을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일 뿐입니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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