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리라이팅 클래식 3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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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형이상학자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다른 어떤 세계, 바로 그들이 참된 세계라고 명명한 그 세계의 관점에서 평가절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신의 죽음'은 바로 이 세계를 평가절하하는 기준이 되고 있는 그 영원한 진리나 초월적인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더 나아가 그런 참된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언인 셈이다.-103쪽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망치질'로 표현했는데, 그의 망치에 쓰러지지 않는 형이상학적 건물이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허약함이 입증된 형이상학적 건물들이 왜 자꾸 세워지느냐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그런 형이상학적 토대가 있어야만 우리가 살 수 있다는 어떤 신앙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하나가 무너지면 얼른 다른 하나를 세우는 것이다. -105쪽

과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낡은 신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는지 모르지만, 결코 인간의 자립성마저 키워준 것은 아니었다. 니체는 우리가 스스로의 가치 판단을 포기하고 오로지 과학에 의존함으로써만 진리를 말하려 하는 점에 주목했다. 그가 보기엔 오늘날의 과학만큼 진리에 대한 믿음을 장악하고 있는 것도 없다. -106쪽

결국 신의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신앙의 죽음이고,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인 인간의 죽음일 수밖에 없다. 신앙이 살아 있고, 신앙으로 존재하는 자인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신의 죽음 소식은 이해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앙이 남아 있다면 신은 수백 가지 버전으로 출현할 수 있다 국가와 민족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화폐를 숭배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시장을 우상화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107쪽

따라서 신의 죽음은 인간적 형태의 온갖 우상 숭배의 종식을 의미한다. 차라투스트라가 신의 죽음을 전하는 곳에서 위버멘쉬를 가르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의 죽음이란 곧바로 인간의 죽음이며, 위버멘쉬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위버멘쉬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복음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항상 자기 바깥에 가치의 기준을 두고 그것에 복종해 온 인간이 드디어 노예적인 생활을 끝내고 자기 가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107쪽

그는 권력이나 재산의 양을 두고 강자, 귀족, 주인 등을 유형화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강함'은 가치의 창조와 관련이 있다. 강자는 가치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그것에 따라 사물과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강함은 가치를 창조하고 부여하는 힘을 스스로 가지고 있음으로 설명된다. 약자나 노예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그저 타인이 평가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118쪽

귀족의 판단 양식과 노예의 판단 양식 사이에서 눈여겨볼 점은 가치 판단이 어디서 시작되는가이다. 귀족들은 자기 자신이 기준을 갖는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긍지로부터 '좋은'의 규정을 끌어낸다. 반면 노예들은 다른 자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선'을 끌어낸다. 귀족들이 자신들로부터 시작한다면 노예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들로부터 '좋음'을 규정하다보니 귀족들의 '좋음'에 대한 규정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들은 스스로 '미덕'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의 주인이다. 반면에 노예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에 시작하다 보니 '선'에 대한 규정이 막연하고 모호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난받는 특성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할 뿐 스스로 무엇ㅇ르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120쪽

실제 역사를 보면 선악에 관한 수천 개의 도덕적 기준이 존재해 왔고, 오늘날에도 선악에 대한 판단 기준은 엄청나게 많이 존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끔찍한 전쟁들의 대부분이 선악에 대한 보편적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나온 것임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전쟁은 상대방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그에 맞서는 자신을 '선의 수호자'로 생각하는 잘못된 가치 판단 양식에서 나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 -122쪽

물론 그 누구도 가치 판단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인간은 진실로 사물들에 가치를 심으며,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이 '나쁜' 것인지를 판단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떤 것을 '선함'과 '악함'으로 판단할 때 그것은 무척 위험하다. 전체를 포괄하는 '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철저한 배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123쪽

무언가 서로에게 줄 것이 있어, 자신에게 넘쳐나는 것이 있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받고 싶은 것이 있어,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있어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결혼이다. 풍성한 토양에서 자라는 사랑의 식물은 서로를 선물하는 친구로 만들어주지만,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사랑의 식물은 상대방을 구속하는 가시 울타리로 자라난다. -130쪽

왜 연민이 문제일까? "연민은 그것을 받는 자를 부끄럽게 만드는 몹쓸 짓이다"('연민의 정이 깊은 자에 대하여'). 연민이나 동정은 그것을 받는 자를 비참하게 만든다. 물론 그런 몹쓸 짓을 하고도 창피한 줄 모르는 박애주의자들이 널려 있고, 그런 몹쓸 짓을 당하고도 여전히 손을 내미는 빈곤한 영혼들이 널려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고결한 자의 선물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다. "고결한 사람은 그 때문에 다른 삶들이 수치심을 갖지 않도록 배려한다."-135쪽

연민이나 동정을 보이는 자는 친구를 만드는 게 아니라 거지를 만든다. "위대한 사람은 현결같이 연민 이상의 것이다. 위대한 사랑은 그 자신이 사랑할 자까지 창조하기 때문이다"('연민의 정이 깊은 자에 대하여'). 위대한 사랑은 그 자신이 사랑할 친구를 창조한다. 선물은 군주도, 노예도, 거지도 만들지 않으며 오직 친구를 만든다. 그것이 위대한 사랑을 '창조'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135쪽

"무력함을 선량함으로 바꾸고, 겁많은 비겁을 겸허로 바꾸며, 증오를 품은 채 상대방에게 복종하는 것을 순종으로 바꿉니다. 약자의 비공격성을...... 인내라는 발림말로 부록, 그것을 덕이라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함이 신에 의해 선택받은 표시라고 합니다. 거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사랑하는 개를 때린다고 하는. 그래서 이렇나 비참함도 하나의 준비나 시련, 훈련으로 생각하고...... 축복이라고 부르기조차 합니다."-144쪽

신은 선한 우리에게 왜 고통을 가하시는가? 그것으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는 죄로 인해 신의 곁에서 쫓겨났으며, 우리 죄를 구원하로 오신 자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았다. 누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의사들은 고통을 죄로 해석하게 함으로써 환자를 고통에 항거하지 않는 온순한 양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고통스럽다면 네 스스로를 물어뜯어라! 모든 고통은 네 잘못에서 나온 것이다. 자기 삶을 고문하는 도구로서의 양심의 가책!-146쪽

우리 안에는 어떤 자극에 대해 기쁨을, 다른 자극에 대해 슬픔을 느끼도록 하는, 그리고 어떤 행위를 바람직하다고 장려하고, 다른 행위를 사악하다고 금지하는 기준들이 있다. 특정한 정서들이 그 기준자리를 차지하고 지배력을 확보하면 우리에겐 하나의 정체성이 생겨난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그런 정서들이 다른 정서들에 의해 전복되면 기쁨과 슬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은 달라지게 되고, 결국 정체성 또한 완전히 달라진다. 교육을 비롯해서 정체성을 심고 관리하는 수많은 제도와 장치들 덕분(?)에 우리는 비교적 고정된 정체성을 갖는 듯하지만, 우리 신체 안에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려는 정서들 사이의 싸움이 그칠 날이 없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신체에 대해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라고 말했다. -167쪽

노동을 착취한 자들이 앞으로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를지는 알 수 없지만, 노동을 착취당한 자들은 지금까지 너무 큰 대가를 치러 왔다. 노동으로 인한 심신의 상실도 컸지만 더욱 큰 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할 능력을 상실한 점이다. 그들의 노동은 가치를 창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그 가치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핵심은 '생산한 가치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 가치'를 생산하지 못하고 '타자의 가치'를 생산했다는 점이다. -178쪽

노동을 거부하는 일은 게으름이나 나태로 해결되지 않는다. 노동은 자기 가치를 창조하는 자유로운 활동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니체는 새로운 가치 창조의 활동을 노동과 엄격히 구분했던 것이다.-179쪽

농부는 농부와 경쟁하고, 목수는 목수와 경쟁하며, 창던지기 선수는 창던지기 선수와 경쟁하고, 교육을 받는 청년들은 청년들끼리,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선생들끼리 경쟁한다. 그 경쟁은 각자를 발전시켜 줄 뿐 아니라 그리스 사회 자체를 강화시켜 준다. 물론 그들 역시 우리가 우려하는 대로 사회를 망가뜨리는 시기와 질투에 대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경쟁을 하지 않고 본인이 그대로 챔피언의 자리에 있으려는, 다시 말해서 경쟁의 충동이 아니라 '경쟁을 파괴하려는 충동'에서 나온다는 것도 알았다. -189쪽

여성의 자궁과 가임 능력은 매우 상징적인 것이다. 자궁은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아니라 막을 수 없는 공간이다. 그것은 새로운 정체성들의 보고이다. 자궁은 분명히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될 수 없지만, 그 이유는 그것이 어떤 정체성도 가지지 않는 결핍의 공간이어서가 아니라, 수백 개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잠재성의 공간이어서 그렇다. 가임 능력은 그러한 수백 개의 잠재적 정체성들을 현실화하는 힘을 나타낸다. 이러한 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새로운 정체성의 생산, 다시 말하자면 새로운 변신들은 일어나지 않는다. -202쪽

차라투스트라에게 여성성은 영원회귀와 같다. 그러나 '여성성'이라는 말조차 그리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차라투스트라의 여인은 생물학적 여성도 아니고, 특정한 어떤 정체성을 가진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성은 영원한 생성을 의미할 뿐이다. 남성에게도 여성에게도 '여성이 되는 것', '여성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가장 나쁜 것은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불임증'에 걸린 인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가치중립을 표방한 학자들이나 새로운 가치 창조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불임증에 걸린 내시들이라고 비난한 적이 있다. 만약 니체가 당대의 페미니스트들을 불임증의 여성이라고 비판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여성에 대한 비난과는 전혀 다른 의미일 것이다. -208쪽

'중력의 영'으로 불리는 난쟁이가 당신의 귓속에, 그리고 뇌 속에 무거운 납덩이를 떨어뜨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가 그 의미에 대해 말해주었다. 내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 하면 난쟁이는 그것이 예전에 이미 시도되었던 낡은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예전에 해봤는데 아무 소용없어!', '너 그러나 큰일 난다. 세상 물정을 통 모르는 녀석이군!' 뭐 그런 식이다. 지혜와 관심을 가장한 난쟁이의 말들은 자유롭게 비상하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납덩어리이다. '중력의 영'은 경험, 관습, 도덕, 법률, 법칙 등 다양한 것들 속에 기거하면서 내 자유로운 비상을 가로막았다. -234쪽

자기 삶을 사랑하는 자만이 자기 삶을 아름답게 창조할 수가 있다. 자기 삶을 부정하는 자는 탈주할 때 고통의 비명이나 분노의 울분을 토한다. 그러나 자기 삶을 사랑하기 때무에 탈주하는 자, 탈주하는 방식으로 자기 삶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재창조를 위해 기존의 삶을 허무는 자는 탈주하면서도 콧노래를 부를 수 있다. 즐거움으로 비상했을 때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때만이 너와 하늘은 함께 미소짓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52쪽

추악한 현실은 웃음거리가 되었을 때 되돌아오지 않고, 환하게 웃는 자만이 그 현실을 가볍게 넘어설 수 있다.-260쪽

니체는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이 영원회귀를 능동적으로 택하는 것이 좋은 것(도덕적 의미의 '선한 것'과는 다르다)임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원회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의지)은 우리 자신 안에, 그리고 세계 안에 예전부터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단지 잠재적 형태로만 그러했던 새로운 존재들을 현실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물들과 더불어 거대한 '우주 교향곡'을 공연하는 연주자이다.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있었지만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던 하나의 멜로디가 울려퍼질 수 있다면 그것은 멋진 일이 아닐까.-280쪽

어린아이들은 자기 욕망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여러분만이 자기 욕망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세계의 주인일 수 없는 이유를 아는가? 스스로 자기 욕망의 주인인 자만이 자기 세계를 갖는 것이다.-292쪽

어떤 행위가 긍정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다음의 긍정에 의해 긍정될 때이다. 파괴가 긍정의 질을 갖기 위해서는 다음 번 생성이 있어야 한다. 즉 다음 번 생성의 긍정을 통해 파괴는 부정이 아닌 긍정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번의 생성은 다음 번의 생성에 의해 다시 긍정의 질을 획득한다. 한 번의 생성으로 그친다면 다음 번부터 그것은 집착을 의미하게 된다. 한 번의 파괴는 다음의 긍정에 의해, 그리고 한 번의 긍정은 다음의 긍정에 의해 긍정되어야 한다. 변증법에서 말하는 '부정의 부정'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긍정의 긍정'이 이렇게 탄생한다. 긍정은 꼭 다음 번의 긍정을 불러 온다. -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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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후
조지 프리드먼 지음, 손민중 옮김, 이수혁 감수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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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에 대한 미국의 최우선적 관심은 평화가 아니다. 또한 미국은 전쟁에서 분명하게 승리하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베트남과 한국에서처럼 분쟁의 목적은 강력해지는 힘을 막거나 그 지역을 무력화하는 것이지 질서를 부여하기 위함이 아니다.-71쪽

C++같은 언어로 발전하게 된 실용주의의 개념은 극적인 단순화와 이성의 영역을 축약한다. 이제 이성은 실용적인 결과에 따라 측정될 수 있는 특정한 것만 다루고, 실용적인 결과가 결여된 모든 것은 이성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쉽게 말해 미국 문화는 진리나 아름다움을 잘 다루려 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일의 결과에 대해서만 가치를 두며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것은 미국 문화에 엄청난 동력을 부여하고 있다.-95쪽

발트 3국으로부터 루마니아 남부 국경에 이르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국경선이 불분명했던 탓에 갈등이 자주 일어났다. 이곳의 북쪽에는 피레네 산맥에서 페테르부르크에 이르는 길고 좁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매번 큰 전쟁이 벌어진 이곳은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하기 위해 선택했던 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곳은 자연적인 장벽이 거의 없기 때문에 러시아는 국경을 가능한 서쪽으로 멀리 밀어내 완충지대를 만들고자 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평원을 통해 독일의 중앙으로 밀고 들어갔다.-111쪽

일본의 영향력 강화의 중심에는 한국이 있다. 내가 볼 때 한국은 2030이 되기 훨씬 이전에 통일이 될 것 같다. 통일한국의 인구는 약 7,000만 명으로 일본에 비해 그리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국은 현재 세계 12위의 경제국이며 통일 이후 2030년이 되면 훨씬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 한국이 두려워하는 것은 일본이 중국과 러시아에서 그 세력을 넓히는 바람에 중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215쪽

2010년대의 중국 분열, 2020년대의 러시아 붕괴로 태평양에서 카르파티아 산맥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공백이 생긴다. 그 주변을 둘러싼 작은 나라를 야금야금, 혹은 통째로 삼킬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핀란드는 카렐리야를, 루마니아는 몰도바를 되찾고 인도는 티베트 독립을 돕는다. 타이완은 그 세력을 타이완 해협 전체에 걸쳐 확장하고 유럽과 미국은 중국에서 지역적 영향권을 형성한다. 침범할 수 있는 기회가 수두룩해지는 것이다.
특히 다음의 세 나라에게 획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힘과 필요성이 생긴다. 첫째 일본은 세력을 확장해 러시아 연해와 중국 지역을 손에 넣는다. 둘째 터키는 코카서스뿐 아니라 북서쪽과 남쪽지역 전체로 세력을 확장한다. 셋째 폴란드는 동쪽으로 밀고 가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로 깊숙이 들어간다.
미국은 1990년대에 세계를 보던 시각으로 10년 정도는 이 모든 변화를 우호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따라서 폴란드, 터키, 일본은 미국의 우방으로써 세력 확장과 더불어 미국에 힘을 실어준다. 만약 도덕적인 정당성이 필요하다면 이들은 이웃나라의 번영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227쪽

하지만 2030년 중반이면 미국은 지속적으로 세력을 넓힌 이들 나라에게 불편함을 느끼고, 2040년대가 되면 완전히 적대적인 입장이 된다. 미국을 위한 네 번째 지정학적 원리가 유라시아 전역을 통제하는 그 어떤 세력에도 맞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지역 패권국 세 나라 중 두 나라(일본과 터키)는 강력한 해양국으로 한 나라는 북서태평양에, 다른 한 나라는 동지중해에 자리 잡고 있다. 더구나 두 나라는 모두 우주에서 상당한 능력을 확보한다.-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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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 정원
다치바나 다카시.사토 마사루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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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7월 21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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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명사추천도서님의 "[진중권 추천도서] 세계는 상상에서 나온다. "

좋은 정보~ 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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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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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이건 대체 어떤 식으로 마무리될 것인가 라는 생각. 

하루끼는 역시 평범하지 않은 세계관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구나라는 생각. 

대체 하루끼는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소설을 쓸 것인가. 정말 하루끼가 쓰는 세계는 끝이 없구나라는 생각. 

어제까지 후다닥 다 읽고 느낀 점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루끼는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은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로, 

어. 이렇게 생각할 수가. 독특하군.  으로 시작하는 하루끼의 소설들.  

 

일상의 짜임새 속에서 구멍들을 발견해내, 결국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버린  

그리고 그 세계는 촘촘하고도 완고하여 주변 사람들도 수긍할 수 밖에 없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금도 하루끼의 소설은 새롭고도 재밌다. 

하루끼는 지금이나 그때나 하나도 변한것이 없지만.  

 

그나저나 3권까지 어떻게 기다리라고.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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