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 - 사람의 본성이 곧 부처라는 새로운 선언 청소년 철학창고 26
정은주 풀어 씀 / 풀빛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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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나의 음을 딴 말로서 '지혜'라고 번역된다. 반야는 일상적으로 말하는 생활 속의 지혜와는 좀 다른 '부처님의 완전한 지혜'를 의미한다. 물론 누구나 불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문득 지혜의 불꽃이 번뜩일 수 있지만 깨달음에 이른 부처님이 보여준 완전한 지혜와 통찰력을 말한다. : p15 

만물이 공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연기법(緣起法)을 가르치셨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연기의 진리를 깨달아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연기(緣起)는 만물은 서로 의존하여 생긴다는 원리로 모든 것은 서로에게 원인(因)이 되고, 서로에게 인연(因緣)이 되어 발생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반대로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되기 때문에 저것도 소멸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이며, 자신의 고정 불변한 실체가 없기 때문에 공(空)하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이 상태를 공(空)이라고 표현한다. : p21 

삼독(三毒)은 깨달음을 이루는 데 독이 되는 세 가지 나쁜 마음으로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癡心)을 말한다. 탐심은 욕심을 말하며 재물욕, 명예욕, 수면욕, 식욕, 성욕이 대표적인 오욕(五慾)이다. 진심은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자주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마음이다. 치심은 청정한 자성(自性)을 보지 못하고 무명(無明,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 상태)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마음이다. : p24

무념, 무상, 무주를 수행의 근본으로 삼도록 당부했다. 어떠한 대상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며(무념), 어떤 모양(형상)을 정해 놓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며(무상), 한 순간도 어떤 경계에 붙잡혀 거기에 머무르지 않기(무주)를 강조했다. : p70 

삼매란 오직 하나에 마음이 집중하여 마음이 이리저리 헤매거나 동요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일행삼매란 순간순간 모든 움직임이 밝고 고요한 삼매의 경지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불교에서는 보통 일상적인 생활을 말할 때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 걸어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고 하는 행동들 그리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상황들)이라고 한다. 일행삼매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가운데 어떤 순간에도 곧고 바른 하나의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일행삼매만 이야기하지만 다른 판본에는 일행 삼매와 더불어 일상삼매(一相三昧)도 같이 말하고 있다. 일상 삼매는 천지 우주의 모든 존재가 다 하나의 도리(이치)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천지 만물은 여럿이 아니라 하나의 모습(일상 一相)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보나 너를 보나, 산을 보나 물을 보나, 미움을 보나 사랑을 보나 모두가 다 있는 그대로 참된 부처의 성품(진여불성)임을 아는 것이다. 즉 일체의 존재가 다 하나의 불성이며 실상(實相)임을 알고 깨닫는 것을 일상 삼매라고 한다.  

일행삼매는 일상 삼매를 깨닫고 매 순간 끊임없이 곧고 바른 마음으로 공부해 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선정(禪定)고 지혜(智慧)를 아울러서 닦는 것이다. : p74 

무념이란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떠한 경계(나를 넘어선 외부의 어떤 대상)에도 물들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어떤 법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무념이란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생각을 모두 없애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 의식이 끊어지고 법신이 육신을 떠나므로 죽음을 의미하며 결국 다른 세상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 무(無)란 무엇이 없다는 것이며, 염(念)이란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은 대립된 두 극단의 어떠한 번뇌에서도 모두 벗어난다는 뜻(나와  남, 선과 악, 옳고 그름, 좋고 싫음과 같은 대립된 극단의 생각을 벗어난다는 뜻)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진여) 본성을 통찰하는 것이다.  

생각을 일으키는 근본은 진여 본성이며, 생각은 진여 본성이 작용하여 일어난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깨끗한 본성(진여 본성)이 생각을 일으켜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알게 된다. 하지만 진여 본성은 어떠한 경계에 부딪혀도 거기에 물들지 않으며 항상 청정하고 자유롭다. : p80 

혜능은 매 순간 나에게 다가오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경계)에 대해 거기에 맞게 현명하게 대응하되 결코 물들지 말라고 가르친다(응물불염물 應物不染物). 무념, 무상, 무주란 어떤 경계가 다가왔을 때 귀 막고 눈 막고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생각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다. 물들지 않음이란 어떤 경계를 만나면 거기에 흔들리거나 끌려 다니지 않고 자기의 중심을 잡고 적절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 p82 

이 법문을 들으면서 어떤 것이 올바른 '좌선'이라고 생각하는가? '좌'란 그냥 앉아 있는 자세가 아니라 어떠한 걸림도 장애도 없이 밖으로 어떤 경계에 처해도 마음이 동요하거나 생각이 복잡하게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선'이란 안으로 자기 본성을 바로 봄으로써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선정(禪定)'이란 어떤 것인가? 밖으로 보이는 일체의 모양(相)을 떠나 거기에 사로잡히지 않음이 선(禪)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음이 정(定)이다. 밖으로 보이는 모양에 사로잡히면 안으로 마음이 금방 흐트러지지만 설혹 밖으로 모양을 본다 해도 안으로 흔들리지 않고 어지럽지 않으면 스스로 청정하여 정(定)에 머물게 된다. 

밖으로 어떤 경계에 부딪혀 생각을 일으키면 곧 흐트러지기 쉬운데 어떠한 대상을 보더라도 어지럽지 않으면 그것이 정이다. 밖으로 보이는 모양을 떠나는 것이 선이요,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이니, 밖으로 선(禪)하며 안으로 정(定)함을 '선정(禪定)'이라고 한다. <유마경>에는 선정이 "즉시 환하게 깨달아 본래 마음을 도로 찾는 것"이라고 했으며 <보살계>에는 "나의 본래 근원인 자성이 청정하다."라고 했다.  

선지식이여, 자성이 청정함을 바로 보라. 스스로 닦아 스스로 이루면 법신(진리의 몸)이며 법신 그대로 실천함이 곧 부처행이다. 스스로 실천하여 스스로 성취함이 부처의 도라 할 것이다. : p85 

혜능의 반야바라밀은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무주심이며 미워하고 좋아하는 애증심과 집착심을 벗어난 자유의 경지를 말한다. : p91 

선지식들아, 과거, 현재, 미래의 생각이 매 순간 어리석지 않고 헤매지 않으며 지난날의 잘못을 단박에 그리고 영원히 끊어 버리면 그것이 진정한 참회다. 과거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이 모두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남을 속이려는 마음이 없도록 하라.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한꺼번에 소멸하고 영영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함이 진정한 자성의 참회다. 과거, 현재, 미래의 생각이 순간순간 질투에 물들지 않아서 지난날의 질투심을 모조리 없애 버리면 이것이 무상 참회다.  

참이란 잘못을 뉘우치고 절대로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요, 회란 과거의 잘못을 똑바로 아는 것이다. 나쁜 죄업을 버리지 않으면 아무리 부처님 앞에서 수백 번 다짐해도 소용이 없으니 모든 죄업을 끊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음이 진정한 참회다. : p97 

<육조단경>에서 혜능이 줄곧 주장하는 것은 도가 높은 스님이나 부처님께서 우리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에 의해 스스로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초월적인 신이 나약하고 불쌍한 인간을 구제해 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기 본성에 부여된 능력에 의해 마음속 중생을 구제하고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마음속 중생이란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물든 중생의 마음이다. 비뚤어진 마음은 바로잡고, 어리석음은 지혜로, 악은 선으로, 번뇌는 보리로 바꾸어 스스로 부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 p100 

본성을 깨닫는 것이 공(功)이요,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고 바르게 행함이 덕(德)이다. 그러므로 참된 공덕은 한 생각 한 생각에 거리낌이 없고 언제나 참된 본성을 보며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밖으로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공경하며 안으로는 겸손하게 처신하며 참된 본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 진정한 공덕이다. : p122 

돈오법은 혜능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경전 공부를 통해 문자에 의지해 차근차근 수행해 간다는 종래의 수행 풍토를 비판하고 자기가 잇는 그 자리에서 본래의 성품을 직시함으로서 즉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직지 인심 견성성불)고 혜능은 가르쳤다. 견성성불이란 더럽혀진 본성을 오래도록 닦아서 새로이 깨끗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본래 깨끗한 본성을 바로 보고 그대로 쓰는 것을 말한다. 오랜 세월 무량 공덕을 닦아야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갖추어진 깨끗한 본성으로부터 바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 p144 

본성이란 오랫동안 관조하고 지켜보아야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어떠한 모양(相)이나 공(空)에도 사로잡히지 않고 생각으로 헤아리는 분별심도 버리면 그 자리에서 바로 본성을 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혜능에게 자성은 둘이 아닌 성품을 의미했다.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둘이 아니며, 성(聖, 성인(과 속(俗, 세속인)이 둘이 아니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번뇌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다. 이런 입장에서 혜능은 마음 관조하기, 고요함을 지키기, 오래 동안 눕지 않고 수행하기(장좌불와)와 같은 전통적인 좌선법을 선병이라 하여 엄격히 배격했다. 혜능은 오직 견성을 근본으로 삼아 움직이는 선, 생활하는 선, 매 순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선을 강조했다. 이 점이 혜능선의 생명력과 창조력이라 하겠다. : p145 

사람의 마음은 분별하고 헤아리는 생각(옳다와 그르다, 싫다와 좋다, 곱다와 밉다와 같이 순간순간 어떤 대상에 대해 분별하는 양극단적인 생각)이 없으면 본래 텅 비고 고요하여 삿된 견해를 벗어나 있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미혹하지 않으면 양극단적인 생각을 벗어나게 된다.  

만약 밖으로 미혹하면 모양에 집착하게 되고 안으로 미혹하면 공(空)에 사로잡히게 된다. 모양이 있는 것들 속에서 모양에 사로잡히지 않고 공을 아는 가운데서도 공에 얽매이지 않아야 바로 미혹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이 가르침을 알고 바로 깨달으면 한순간에 마음이 열려 부처가 된다.  

그러면 '마음이 열린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마음의 어떤 것을 여는 것인가? 바로 부처의 지견(知見, 환히 제대로 알아보는 능력)을 여는 것이다. 부처란 곧 깨달음이요, 깨달음은 네 부문으로 나눌 수 있다.  

부처의 지견을 열어서, 부처의 지견을 나타내고, 부처의 지견을 깨달아 부처의 지견에 들어가는 것이다." 

'열고, 나타내고, 깨닫고, 들어감'이 네 가지는 모두 하나로 귀결되는데, 바로 깨달음의 지견으로 자기의 본래 청정한 성품을 보아(경성) 부처가 되어(성불) 세상에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깨달음의 지견을 열고, 나타내면, 문득 깨달아, 들어가서, 깨달음의 지견이 자기의 본래 참성품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 p150 

서로 원인이 되어 오고 가는 과정을 통해 '중도(中道)'의 의미가 드러난다. 중도란 대립하는 두 극단을 아우르면서도 두 극단을 벗어나 바르게 가는 길이다. : p160 

혜능이 삼십육대법으로 중생을 가르치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한 것은 한 변(극단)은 대립되는 다른 변과의 관계 속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시키라는 말이다. 결국 그 상대성을 알면 그것을 넘어선 절대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너희에게 법을 묻거든 모두 쌍으로(대법으로) 대답하고 마침내 두 법을 모두 없애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라고도 했다. 쌍으로 말하라는 것은 '있음'을 물으면 '없음'으로 대답해 있다와 없다는 언제든지 상대적인 것임을 가르쳐 주라는 것이다. 다시 갈 곳이 없게 하라는 것은 상대성을 벗어나 절대성에 이른다는 말이다. 중생들은 대부분 무엇을 대하든 선 아니면 악, 너 아니면 나, 옳지 않으면 그르다는 식으로 양극단에 머물러 생각한다. 이런 대립적인 생각은 만물의 실상을 알기 어렵게 하고 무명(무지함)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혜능은 이런 미혹한 중생의 눈을 뜨게 하고 실상을 보도록 가르치기 위해 쌍으로 대비해서 말하라고 했다. 그리고 대법을 극복하는 길로 혜능은 중도(中道)를 제시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아니며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에 가서는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대 옳다고 한 선택이 얼마 후 잘못된 일로 드러날 수 있고, 괴로움이 어떤 계기로 인해 행복으로 바뀐다든지 하는 일들을 우리는 종종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 대립된 것이 서로 통하는 것임을 알면 양극단을 벗어나 중도를 깨닫게 된다. 혜능은 중도를 벗어난 설법은 바른 법이 아니라고 보았다. : p167 

무(無)란 해를 덮고 있는 구름을 없애는 것이고 염(念)이란 구름이 사라진 뒤 해가 환하게 빛나는 것이다. 해는 언제나 밝게 빛나고 있지만 구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덮일 따름이다. 구름이 망념이라면 해는 언제나 깨끗한 본성이다. 망념을 없애는 것이 무념이라면 늘 밝게 빛나는 해는 바른 염이다. 그러므로 무념은 무념+염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망념이 없는 무념으로 바르게 염(생각)하는 것이 혜능이 말한 무념의 뜻이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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