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치명적 농담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別記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그동안 오염된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 그런데 내 이제 그 실상을 투명하게 알겠다!"는 발견이 곧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깨달음으로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p103  

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불교는 나중에 "붓다가 왜 왔는지 모르겠다"거나 "붓다는 40년간 장광설長廣舌을 늘이고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불교는 아무것도 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사코 빼앗으려 합니다. 우리 내부에 있는 오래된 독소,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말입니다. 이들을 제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얻고 세상은 평온해질 것입니다. 『상유타 니카야』에서 붓다가 말했습니다. "열반은 탐욕과 증오, 기만의 끝이다." : p109 

여기서 '일어났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곤경과 고苦의 현실이 필연적 사태가 아니라, '우연적인 것'임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일어난 것'이라면, '그것은 소멸될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마찬가지로 그것이 '만들어진' 어떤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다시 부술 수 있습니다. 연기법에 대한 오래된 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게 된다. 이것이 생기기에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멈추면, 저것도 멈춘다." : p114 

재산, 명예, 권력뿐만 아니라, 인간은 타자인 인간을 소유하고 지배하려 합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인데, '그들'도 또한 너의 소유를 탐내고 너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모든 사람들이 '소유'와 '탐욕'의 관점에서, 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조정하려 합니다. 이를 통해 세계는 박제되고, 사람은 소외됩니다. 하이데거는 이것을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타락, 혹은 존재망각, 고향상실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 p128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생판 모르는 도시나 나라인데, 누군가가 거기 있거나 살았다는 기억으로 하여 아주 가깝게 다가오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역시 세계는 주관적으로 '의미화'되어서만 존재하는 무엇입니다. : p129 

세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 전에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근본 통찰처럼 세계는 의지의 산물입니다. 세계는 그 의지를 통해 구성된 표상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의 책 제목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이를 불교식으로 번역하면 곧 '법法이 아닌 상相으로서의 세계'정도가 되겠습니다.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따라, "우리가 아는 세계는 '의식'으로부터 파생되었거나, 그 활동의 결과"라는 것을 알리고자 합니다. : p130 

불교가 공空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객관적 세계는 '거기 그렇게如如' 역력하게 존재합니다. 불교는 다만 그것이 '자아의 투사로 물든 주관적 세계'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할 뿐입니다. : p152 

"친밀한 마음을 개발해라, 라훌라야, 그렇게 하면, 악의가 점차 줄어들 것이다. 동정심을 개발하라, 그리하면 번뇌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을 개발하라, 그리하면 혐오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평정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모순들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몸이 부패하고 있는 것을 더욱 뚜렷이 의식하는 마음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정념이 점차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떠서 흘러가는 성질을 뚜렷이 의식하는 마음을 개발해라, 그리하면 자아의 오만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 p176 

마음을 비울 때 심신은 가뜬하고, 지각은 더 민감해지며, 지식에 대한 흡수력도 훨씬 증강됩니다. 마음을 비우면, 밖에서 오는 사물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스트레스를 견디기가 훨씬 수월해지며, 지금 만나는 사람들을 훨씬 느긋하게 대할 수 있고, 그로부터 받은 심리적 상처에도 훨씬 관용적이게 되어 인간관계도 좋아집니다.  

그런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모이고 따릅니다. 누구나 심리적 여유가 있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승진을 하고 장사를 잘하기 위한 전략으로서라도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이는 역설이지만 진실입니다. 노자가 말했듯이, "진실은 늘 상식과 어긋나 보이는 법"이고, "진정 똑똑한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는 법"입니다. : p243 

다시 기억하실 것은, 유有와 무無가 정반대의 극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모두 아상의 결과라는 점에서는 서로 다를 바없습니다! 여기가 여러분들이 늘 만나는 불교 언설의 역설과 모순, 모호함과 아이러니의 진원지입니다. 불교는 경전의 언설장구마다, 유와 무가 결국은 같다는 것, 그 둘을 동시에 벗어나야만 우리가 진정 자유를 얻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고구정녕 가르칩니다. : p255 

주자학의 과제는 "자신의 숨겨진, 때 묻고 탁해진 본성의 회복"에 있습니다. 이곳을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자는 인간의 모든 훈력과 교육의 목표가 자기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고, 다음 다른 사람의 본성을 회복시켜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정치의 목표이고, 수많은 제도와 법률 또한 이 구원의 목적을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 p318 

방심放心이란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일종의 '비자각적 상태', 멍한 정신 나간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자학은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이 행동이나 선택 이전에 이미 원초적으로 내면의 자기망각에서 준비된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구방심求放心'은 이런 자기망각 혹은 비자각적 상태를 극복하려는 노력인데, 그와 같은 의식의 혼란을 깨고 생생한 자기의식으로 돌아오기는, 그러나 아주 쉽습니다. 필요한 것은, "아차! 내가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었지?"라는 자각이 전부지요. 그것은 순간적이고 즉각적으로 성취되는 공부입니다. 

이 훈련이 득력得力, 힘을 얻으면 운전 연습 때처럼 자각의 지속이 길어지고, 또 밝은 상태가 고양됩니다. 이로써 유전과 경험의 복합으로 하여 구조화되어 있던 자기망각과 그와 연관된 두터운 업장의 장애가 엷어지면서, 동시에 인간 내부에 본래 있던 덕성德性의 빛이 점점 더 크게 밝아진다고 가르칩니다. 이 양상養性, 즉 '덕성의 배양'은 동시에 복기초復其初, 즉 "자기 안에 있던 본래성을 회복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퇴계는 이 점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율공에게, 구방심이 공부의 시작이지만 동시에 그 끝이라고 가르쳤습니다. : p321 

돈頓이란, "깨달음은 이미 여기 와 있다!"는 것, 그러므로 찾거나 이루거나 하는 '시간'과 점차'로 더듬지 말라는 것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 p344 

초자연적 실재란 없고, 초월적 깨달음이란 것도 헛소리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실제를 아무런 두려움이나 공포 없이, 욕망의 흔적과 조바심 없이 관觀할 수 있을 때, 그곳이 곧 구원이고 법계입니다. 진리란 피곤하면 눕고 졸리면 자는 것일 뿐, 이 밖에 무슨 특별한 소식은 없습니다. 오늘 지은 업이 마음의 창고에 아무런 찌꺼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또 내일 다가올 이를 걱정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부처입니다. : p357 

눈에 보이는 사물을 빈 마음으로 보고, 마주 선 사람을 하나된 마음으로 껴안는 것, 그것뿐이라면 정말 쉽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 할 수 있고, 거기 아무런 준비가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그거나 그것만큼 또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어려움은 그 취지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기가', 그리고 그 바라밀을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일 뿐입니다. : p3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