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건축의 철학적 모험 1 : 위상학 현대 건축의 철학적 모험 1
장용순 지음 / 미메시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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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연찮게 구하게 된 책이라 특별히 읽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아 계속 미루기만 했는데, 너무 미루기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건축에 대해서 그리고 공간에 대해서 다시금 관심을 기울이고 싶다는 생각에 읽기 싫은 기분이 들면서도 억지로 읽기를 시작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내용이고 흥미로운 논의들도 많아서 즐겁고 괴로운 기분으로(제목부터 무척 골치 아픈 내용일 것 같았고, 역시나 골치 아픈 내용이라 쉽게 읽혀지진 않았다) 읽어나갔다.

 

1권만 구했었고,

4권 모두 다 읽을 생각도 없었지만,

워낙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아서 이미 출판된 2권과 3권도 구입했을 정도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마도... 4권이 발표되면 그것도 곧장 구해서 읽을 것 같다.

언제 발표될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서 학문들 간의 혹은 다양한 분야들 간의 연관성을 갖도록 의도하는 혹은 어떤 연관과 관련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들이 관심을 끌고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런 주제의 연구에 대한 결과물들이 발표되고 있는데, ‘현대 건축의 철학적 모험또한 그와 같은 흐름에 어울리는 연구 주제를 잡고 있고, 현대 건축과 철학이 얼마나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못하면서도 양쪽이 유사함을 그리고 관계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저자는 상세히 다루려고 있다.

 

저자의 언급대로 일종의 학제 간(혹은 초학제간)의 연구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알랭 바디우의 지도 아래 작성한 박사 논문을 다듬어 책으로 출판했는데, 저자의 말과 자크 뤼캉의 서문을 통해서 현대 건축의 철학적 모험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고 주제와 목적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있어서 어떤 내용인지 읽게 된다면 무슨 의도를 갖고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고 저자의 연구에 대해서 관심을 혹은 무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높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읽게 되었고, 끝까지 읽게 될 것 같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들뢰즈의 철학적 이론과 입장을 토대로, 더 범위를 넓힌다면 현대 프랑스 철학의 이론적 배경을 토대로 현대 건축이 얼마나 철학적 주장들과 유사성-연관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고, 이런 논의를 통해서 철학과 건축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논의들이 어떻게 서로가 공명을 하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고 대답을 하고 있다.

 

일종의 현대 사유의 지형 혹은 에피스테메와 패러다임을 다루려고 하고 있는데, 이런 관점에 대해서는 이미 비슷한 방식의 시각들이나 논의들이 있었겠지만 저자와 같이 건축과 철학을 중심으로 한 상세한 논의가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기에 무척 흥미로운 시각이었고, 논의들이었다.

 

1권의 중심은 제목처럼 위상학을 중심으로 논의를 하고 있는데, 위상학이라고 어려운 용어로 제목을 정했지만 쉽게 말해서는 기존의 철학이나 건축이 하나의 주체-구조를 혹은 하나의 건축물만을 중심에 놓았다면 현대는 일종의 관계-과정 속에서의 주체-구조로서 그리고 건축물로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많아졌으며 이런 이해의 시도들이 어떤 논의들을 통해서 이뤄졌는지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근대에서 현대로의 시대적 변화와 함께 철학적 변화, 건축적 변화에 대해서 번갈아가며 설명하면서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지, 그 변화들이 어떤 유사성-관계성을 보이고 있는지를 논의하며 들뢰즈의 이론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들뢰즈의 이론을 토대로 저자는 자신의 논의를 진행시키기 때문에 들뢰즈의 이론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것이 매우 부족해서 어렵게 읽어나갈 것 같거나 아예 읽기를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다행히 저자는 알기 쉽게 하기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충실히 다양한 예들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노력 덕분인지 어려운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읽어나갈 수는 있도록 혹은 노력하도록 내용을 구성하고 있고 진행하고 있다.

 

저자는 논의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현대의 철학적 주요 논의들의 대부분을 (간단하게라도) 설명하려고 하고, 그런 논의들과 함께 현대 건축의 특징들 또한 최대한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주고 있어서 철학에 대해서 그리고 건축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기초적인 논의부터 깊이 있는 논의까지 이어지고 있는 저자의 내용 구성 때문에 많은 흥미로운 논의들을 접할 수 있을 것 같고, 그 논의들 모두를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되도록 많은 것들을 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4권으로 구성된 내용 중에서 1권만을 읽어냈을 뿐이라 쉽게 단정할 수 없겠지만 이정도로 들뢰즈의 논의들을 쉽게 접할 수 있고(들뢰즈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얼마나 난해한지는 그 악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현대 건축이 어떤 관심과 도전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되도록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있어서 여러모로 이와 관련된 논의들을 찾게 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철학과 건축이라는 흥미로운 결합을 시도하고 있고,

그 가능성에 대해서 무척 호기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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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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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자연스럽게 무정부주의라는 말이 떠올려지기 마련이고, 그런 식으로 아나키즘을 그리고 무정부주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마도 아나키즘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일 것 같다.

 

물론, 아나키즘 = 무정부주의라는 연결만이 있을 뿐 좀 더 상세하게 말할 수 없을 것이고, 그저 글자 그대로 무정부주의라고 이해하는 것이 고작인데, 이런 부족한 이해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일 것 같다.

 

하지만 아나키즘의 저자는 그런 식의 이해는 아나키즘을 무척 평면적으로 이해를 하게 되거나 왜곡된 이해를 하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런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진정한 아나키즘이 어떤 입장과 세계관을 갖고 있는지를 아나키즘을 통해서 읽는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가 논의하고 있는 내용이 참다운 아나키즘이라면... 그런 관점과 세계관이야 말로 진정한 아나키즘이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뜻에 설득당할 것 같고, 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저자는 우선 아나키즘을 일반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고, 지금-현재의 시대에 아나키즘을 어째서-어떻게 다시 검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짧게 논의를 하며 시작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저자는 사회에서의 다양한 권위와 지배-피지배 관계 속에서 아나키즘이 갖고 있는 (올바르지 않는) 권위에 대한 저항 그리고 지배에 대한 거부에 대해서, 아나키즘이 갖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존엄성을 중요시 하고 권위와 지배에 대한 저항 그리고 타인을 존중하는 시각이 무척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나키즘에 대한 적극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가 바라보는 아나키즘의 입장은 거대함 보다는 소박함을 추구하고 공동체를 강조하며 다양성과 관용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주장하는 관점인 것 같은데, 이런 세계관과 입장 속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실천과 태도가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주장을 하며 기존의 사회주의에 대한 일정 수준의 비판(혹은 개선점 지적)(사회주의와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는데, 이런 사회주의와의 차이나 (일정 수준의 건전한) 비판은 저자의 논의 중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진 않고 있고, 대부분은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 다양한 주제를 통해서 진정으로 아나키즘이 의도하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그리고 얼마나 아나키즘의 입장()이 왜곡되고 오해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아나키즘의 이론적 토대를 쌓았던 그리고 큰 업적이 있던 이들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다루고 있고, 유럽과 미국의 사상가만이 아닌 동양의 고전 사상가들 중 아나키즘의 세계관과 유사한 관점을 보이고 있는 사상가들의 논의들을 검토하며 결국 아나키즘이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맑스주의 적인)와 달리 본능적인 반란과 저항의 힘을 갖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시대 및 사회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입장과 유사한 관점을 갖고 있는 사상가들과 여러 직접적인 실천 및 행동들에서 아나키즘의 관점과 분석 그리고 입장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 같다.

 

물론, 이런 논의가 아나키즘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와 세계를 이해하는 입장들에 비해 좀 더 우수하다는 뜻으로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아나키즘이 어째서 일반 대중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설득력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로서 이해될 수 있기도 하겠다.

 

저자는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짧은 소개들을 이은 다음에 아나키즘이 갖고 있는 중요한 입장들(공동체 및 농촌 친화성, 자기 존엄성과 자립성에 대한 강조와 소박함의 추구, 무분별한 발전에 대한 비판, 민중에 대한 친화성, 연대의 중요성, 직접 행동에 대한 강조와 전위 조직에 대한 비판, 통제할 수 없는 권력에 대한 비판 등)을 두루 소개하고 있고, 그런 세계관과 입장, 관점 속에서 아나키즘은 행동하고 있고 앞으로 더욱 목소리를 높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저자는 특히 직접적인 행동과 연대의 중요성을 자주 강조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도 전위적인 누군가()에게 의지를 하는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들의 문제점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저자의 논의()에 대해서 흥미로운 관점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나키즘에서는 아나키즘이 사회주의와 어떤 차이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차이점들을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와 갈등을 만들려는 의도로서 읽혀지지는 않고 있으며, 어떤 유사성을 갖고 있는지를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조금은 다른 두 시각이 겹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를 중심으로 가능성을 찾아보고 있고, 그동안 막연히 꿈꾸던 혹은 생각해보던 가능성들을 실현시키려는 일련의 노력들(다양한 사회적 실천, 사회적 경제, 생산협동조합, 대안적 공동체 등)을 소개하며 짧은 논의를 마무리 짓고 있다.

 

짧은 분량(150페이지 가량)의 논의이기 때문에 아나키즘에 대한 많은 논의들을 상세하게 논의하기 보다는 간략하고 짧지만 핵심적인 입장들을 소개시켜주고 있다.

 

짧지만 핵심적인 논의들에서 큰 감흥을 받았기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고,

궁금증이 더 커져만 가게 되어서 아나키즘에 대한 논의들에 좀 더 흥미가 생기는데,

이런 흥미와 관심이 그저 재미 차원의 흥미와 관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아나키즘이 갖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입장인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갖게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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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 - 독일국민과 히틀러의 공모, 집단적 애국주의의 광기에 대한 르포르타주
라파엘 젤리히만 지음, 박정희.정지인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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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의지의 승리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38914543

참고 - 권위에 대한 복종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68104225

참고 - 나치 시대의 일상사 : http://blog.naver.com/ghost0221/60036347634

 

 

 

아돌프 히틀러.

 

어떤 의미에서든 히틀러를 언급하는 것은 여전히 그리고 무척 조심스럽게 다뤄지는 것 같고, 아마도 앞으로도 이런 머뭇거림과 조심스러움은 여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히틀러라는 인물을 통해서 알게 된 여러 참혹함과 경악은 쉽게 말하기 어려운 내용들이고,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고 이해를 해야 하는지를 수없이 고민하도록 만든다.

 

어쨌든 히틀러에 대해서 그리고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국민들)에 대해서 우리는 대부분 많이 알고 있는 듯이 생각하고 있고, 말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많은 것들을 알고 있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는데, 그저 2차 세계 대전에 관해 알고 있는 약간의 지식들(그것도 영화를 통해서 얻게 된)과 유대인과 대학살과 관련된 단편적이거나 부분적이기만 한 지식이 대부분일 것이고,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적인 방식으로서의 이해와 앎이 (아마도) 전부일 것이기 때문에 히틀러에 대해서 그리고 나치와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독일에 관해서는 (실제로는) 크게-많이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항상 그렇듯... 그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는 것이 없는 무지함으로 인해서 점점 더 오해만을 갖고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에 히틀러에 관해서 그리고 그 당시의 독일(국민들)에 관해서 조금은 알고자 책 한권 주워들어 읽게 되었는데, 많은 궁금증을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한 도움 또한 받기는 한 것 같다.

 

책의 부제에 르포르타주라는 단어가 있어서 꽤 심층적으로 자료를 검토하고 분석한 내용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르포르타주라는 말을 붙일 정도로 상세하게 분석했다고는 생각되진 않는, 하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내용들 또한 담고는 있는 그런 저작이라는 생각인데, 그렇기 때문에 약간은 허세를 담고 있는 제목도 조금은 용서를 해주게 된다.

 

저자는 히틀러에 대해서 단순히 미치광이나 광기에 빠진 인물이라는 방식으로 이해를 하려는 평면적인 시각(일종의 그저 또라이라는 생각)과 그런 히틀러에 열광하고 도취되었던 독일 국민들에 대해서도 단지 일시적으로 집단적인 최면에 빠져있었다는 방식으로 (일종의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방식의) 해석하는 논의들에 대해서 반대하면서 히틀러와 독일 국민들이 어떻게 그들만의 논리와 합리화 속에서 그런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행동들을 쉽사리 행동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려고 하고 있다.

 

그런 목표 속에서 저자는 독일 국민들이(히틀러 또한 마찬가지로) 허약한 민주주의-근대성에 대한 이해와 인식으로 인해서 그런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판단하는 것 같고, 어떻게 그들이 그런 식으로 되어버리게 되었는지를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서 논의하고 있다.

 

저자는 히틀러가 어떻게 권력을 거머쥐게 되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고 있고, 또한 그 당시의 독일의 그리고 유럽의 정치 및 사회적인 분위기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언급하면서 어떻게 그런 상황들이 연이어 발생되어가고, 그 상황과 조건들 속에서 히틀러와 독일 국민들이 어떤 선택과 행동들을 하게 되었는지를 다루며 그들이(히틀러와 그의 참모들 그리고 독일 국민들) 어떤 심리상태와 정신구조와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는지(그리고 갖고 있었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저자가 히틀러라는 존재가 무척 독특하고 특이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그를 무척 해괴한 인간으로서만 다루는 것은 올바른 이해가 아니며 그의 사고구조 / 정신구조가 어쩌면 그 당시의 독일인들의 생각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르고 억압되고 있던 생각들을 노골적으로 내뱉는 일종의 확성기처럼 이해하고 있기도 한 것 같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연관성을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고 있진 않는 것 같고, 어느 정도의 차이에 대해서도(각각의 개별성에 대해서) 그리고 각각의 특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히틀러에 대해서도 좀 더 상세한 이해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으며, 그 당시의 독일 국민들의 모습 및 생각()에 대해서도 대략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히틀러의 광기와 독일 국민들이 갖고 있던 정신적 허약함이 서로간의 기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과정(역사적이고 개인적인 그리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을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기 때문에 1차 세계 대전의 패전과 함께 독일에서 그리고 히틀러에게서 무슨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자세하게 알 수 있었으며, 어떻게-어째서 그들이 영광과 비극으로 향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쉽고 그리고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아쉽게도 저자의 분석들은 특별히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고, 숨겨졌거나 새롭게 찾아낸 자료들을 통한 검토나 폭로도 없기 때문에 아쉽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동안의 히틀러와 독일 국민들에 대한 비난으로만 가득한 평가나 선과 악의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방식에서 벗어난 좀 더 분석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들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고, 평가를 하고 있다.

 

저자의 논의들이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되고 다뤄졌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겠지만, 일반적인 인문학 서적들에서는 지나치게 학문적인 분석들이 많았었고,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접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고, 그 당시를 살아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도 알고 있지 못했었는데, ‘집단애국의 탄생 히틀러를 통해서 아돌프 히틀러라는 한 개인이 어떤 삶의 궤적을 보였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가 어떤 시대를 살아갔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시대를 함께 살아간 많은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었고 어떤 사고방식 속에서 살아갔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이 어떻게 함께하게 되었고 그 함께함이 어떤 비극과 경악 그리고 충격을 만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많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저자의 논의가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기까지의 과정에 좀 더 집중을 하고 있고, 전쟁(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그 이후에 점차 파멸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논의를 하기 보다는 간략하게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아마도 저자는 히틀러와 독일 국민들이 어떻게 서로가 긴밀하게 결합이 되는지에 대해서 보다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고 그 긴밀한 유대가 결국 파멸로 향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파멸로 향하게 되어가면서도 그들이 여전히 긴밀함을 잃지 않고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고 있었고, 그런 긴밀함에 대한 내부적인 / 개별적인 저항들과 어쩔 수 없이 혹은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얘기를 꺼내게 되어버리는 유대인과 집시(항상 집단 학살에서 집시들에 대한 학살 문제는 쉽게 덮어지는 것 같다) 및 기타 대량 학살들에 대해서도 결론 부분에서 충분히 언급하고 있고, 부각시키고 있다.

 

좀 더 폭넓고 상세한 분석과 논의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가장 최근에 히틀러와 독일 국민들에 대해서 다뤄진 저작인 것 같은데, 그렇기 때문인지 그동안의 논의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게 되고 흥미로운 내용들도 꽤 많았던 것 같다.

 

아쉬움과 만족감이 번갈아가며 느껴지는 내용이었고,

그 아쉬움을 조금은 해소시키기 위해서 앞으로도 조금씩 다른 책들이 찾아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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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돈키호테 청목 스테디북스 1
세르반테스 지음, 민동선 옮김 / 청목(청목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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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에 대해서 모른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쉽게 돈키호테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말할 것이고,

누구나 돈키호테가 어떤 사람인지를 그리고 어떤 뜻으로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돈키호테 같다라는 말을 쓰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부분 혹은 거의 전부가 돈키호테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돈키호테를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이미 대충은 알고 있는데 시간을 내서 읽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그렇게 읽지도 않았으면서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이미 읽은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으로 살지는 말자는 생각에 조금씩 고전들을 찾아 읽고 있기는 한데, 이런 식의 의무감을 갖고 읽게 되는 경우는 항상 제대로 읽혀지지 않거나 건성으로 읽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번 돈키호테를 읽는 과정도 (아쉽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해서,

읽긴 했는데, 도무지 뭘 읽었는지 기억조차 나지를 않는다.

 

기억에 남는 내용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풍차를 어떻게 오해해서 달려드는지와 같은 일부 내용들만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 작품 전체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구성을 갖고 있고 어떤 의미로서 이해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판단이 되지를 않는다.

 

그저 부분적으로만

그리고 일부분으로서만

작품이 이해되고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저 대강이나마 기억에 남는 것은

어째서 돈키호테가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그가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기사가 갖춰야 할 행동방식을 얼마나 엉뚱하고 황당하게 실천하게 되는지를 그리고 그 행동이 점차 변화되는 세상(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에서 이해되지 못하고 세상과 어긋남을 보이는지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단순히 소동극으로서

기사 이야기에 대한 뒤틀림을

일종의 패러디-풍자로서

이해될 수 있기도 하겠지만 점차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려고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점차 이야기가 확장되고 풍부하게 되어가지만 그것을 전부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내 부족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는 뻔하고 뻔한 다짐을 다시금 하게 될 뿐이었다.

 

그나마 대충이라도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얼마나 엉뚱하고 기발한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으로 약간이나마 위안을 갖게 된다.

 

 

 

 

참고 : 어쩌면 번역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불성실하게 읽었던 것 같다. 변명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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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 20세기 미국 범죄소설사
레너드 카수토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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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와 감상성-감수성이라는 얼핏 듣게 된다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둘을 그 둘이 어떻게 하나인지를-하나였는지를 분석하고 있고 검토하고 있는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는 처음에는 하드보일드만의 감상성과 감수성에 대해서 논의를 하는 것 같다는 섣부른 예측을 했었지만 저자의 논의를 접하면서 하드보일드라는 건조함이 어째서 그 이전의 감상주의에서 시작되었는지를 그리고 어떻게 변형되고 다른 조합을 만들어냈는지를 알게 되어가면서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동의하게 되고 옹호하게 된다.

 

다만, 아쉽게도 미국의 범죄소설에 대해서만 논의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외의 국가에서의 범죄소설들과 그 특징에 대한 언급은 거의 혹은 전혀 없기 때문에 범죄소설 장르 자체에 대해서의 논의와 결론으로서 판단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는 것 같고, 저자의 논의와 분석 그리고 이론화가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그가 언급하고 있는 범죄소설들의 대부분을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작품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만 이해된다고 말을 해야만 올바를 것 같기도 하다.

 

달리 생각한다면 저자가 그동안 읽었던 수많은 범죄소설들 중 뛰어남과 탁월함을 보였던 소설들에 대한 소개처럼 읽혀지기도 하는, 그밖에도 어떤 식으로 읽어도 재미남과 흥미로움으로 가득한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는 하나의 장르에 대한 역사이자 그 장르가 어떤 토대 속에서 시작되었고 발전했는지를 다루는, 범죄 소설이 범죄를 파헤치는 내용을 담고 있듯이 범죄 소설들의 역사를 범죄를 파헤치듯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익숙하지 않은 논의로 인해서 그리고 쉽게 납득되지 않는 주장과 결론으로 인해서인지 서론을 통해서 자신이 무슨 주장을 그리고 논의를 할 것인지를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고, 어떤 근거로 자신이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에서의 논의는 서론에서 이미 거의 전부 다뤄지고 있고, 이후의 논의들은 그 논의들에 대한 세부적인 검토와 상세한 분석으로 이해될 수 있기도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이해하고 읽고 치우기에는 다뤄지는 내용들의 다양함과 풍부함으로 인해서 좀 더 읽기를 멈추지 말고 즐겼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도록 만든다.

 

그만큼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는 읽는 재미와 그 내용이 훌륭한 조합을 보이고 있다.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는 저자가 직접 말하고 있듯이 터프가이 탐정연쇄살인범의 원형을 추적하고 있고, 그 뿌리에는 (미국의) 중산층이 갖고 있는 가족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런 결론과 함께 19세기와는 다른 세계인 20세기 21세기의 사회를 살아가는 미국인들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 상태와 변화를 범죄소설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는 뜻으로서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강인함과 건조함, 냉소와 냉정함과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하드보일드와

풍부한 감정으로 이해되는 감상주의 소설들이 어떻게 밀접한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은 두 극단적인 차이가 정 반대의 유사성으로서 겹쳐지고 있음을 확인시키고 있으며, 저자는 이런 겹쳐짐을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국부론을 비교하며 자신의 논의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데, 이런 저자의 분석을 범죄소설과 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으로 확장하고 싶어지는 욕심을 갖게 하기도 하지만 저자는 그런 논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이고, 그저 범죄소설들에 대해서만 자신의 분석을 한정시키고 있어서 약간은 아쉬움을 갖게 되었다.

 

저자는 우선 하드보일드 스타일에 대해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고, 사회적인 맥락과 풍경을 검토하며 어떤 사회적 구성 속에서 그런 스타일이 그리고 유형이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그 기원에 대해서 분석을 하고 있다. 일종의 사회적인 변화의 반영으로서 범죄소설을 이해하고 있고 그런 이해는 충분히 동의하게 된다.

 

사회에 대한 분석과 그 반영으로서 소설에 대한 분석 그리고 스타일-유형이 정립되는 과정을 복잡하고 복합적인 내용을 무척 상세하고 그리고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논의는 진행되고 있고, 우연한 기원과 헤밍웨이를 통한 완성은 하드보일드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완성되었으며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하드보일드-범죄소설들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통해서 자신이 논의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검토하고 설명하고 있으며, 변화되는 사회 구조에 각각의 작품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상세하게 다루려고 하고 있다.

 

저자는 하드보일드 작품들이 어떤 기원과 발전 그리고 방향성을 갖게 되었는지를 논의하면서 지속적으로 그 변화들과 모습들이 19세기 감상주의 소설들과 유사성을 갖고 있는지를 혹은 반대의 모습을 담으려고 하고 다루려고 하고 있는지를 반복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사회적인 변화와 그 변화를 반영하는 하드보일드의 변화에 대해서 검토하면서 이야기 구성이나 등장인물들의 성격에서의 변화들을 논의하고 있고, 이례적이고 독특한 요소들인 여성성과 여성들, 최근 좀 더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자경에 대해서, 흑인 작가와 작품들을 검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결론으로 논의가 이어지면서 저자는 최근 범죄소설의 큰 특징인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작품들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고,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사회적인 변화와 맞물려서 어떤 이유로 인해서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그리고 그 특징들이 무엇인지를 논의하고 있다.

 

연쇄살인범에 대한 검토를 하면서 그동안 다뤄졌던 논의들을 다시금 정리하고 있고, 소설의 연출-구성에 대한 정교하고 빼어난 분석과 함께 미국의 범죄소설들이 어떻게 사회적인 변화를 반영하고 있는지를 그리고 중산층-가족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고 그 이데올로기가 위기 속에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단순히 범죄소설에 대한 역사로서

지금까지 발표된 범죄소설들 중 어떤 작품들이 탁월한 작품들인지를

범죄소설을 통해서 미국 사회의 단면을

 

그밖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는 이해될 수 있고, 읽혀질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하고 다양함을 갖추고 있다.

 

그저 감탄하게만 만드는 분석이고 독창적인 시각이라 좀 더 풍요로운 시각으로 범죄소설을 그리고 범죄소설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학-소설들을 읽어낼 수 있도록-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 것 같다는 생각에 이런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에-출판되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전체적으로 뛰어난 분석으로 가득하지만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되기도 하는데, 저자는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지적을 하면서도 이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그리고 얼마나 미국 사회에서 이 이데올로기가 중요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분석과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혹은 가치 판단을 하고 있지도 않다.

 

미국의 범죄소설이 가족 이데올로기라는 것에 집중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결론은 결론이 아닌 하나의 문제의 시작으로서 이해되는 것이 더 올바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런 입장에 대해서 저자는 어떤 생각일지 궁금하게 된다.

 

또한, 미국 범죄소설이 19세기 감상주의 소설을 원형으로 하고 있다는 분석은 그 분석에 대해서 어떤 논의를 하기 이전에 과연 19세기 감상주의 소설은 원형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19세기 감상주의 소설은 어떤 원형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좀 더 집요한 분석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19세기 감상주의 소설은 어떤 시대적 배경과 관련 속에서 구성될 수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도 뒤따라야 할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게 분석한다면 지나치게 방대해질 것 같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방식의 이해는 다른 논의들을 접하면서 궁금증을 해소시켜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아쉬움을 얘기하자면 저자가 자신이 분석한 결과에 대해서 현존하는 범죄소설 작가들은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동의 혹은 거부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고 있다. 성실하게 생존하는 작가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좀 더 충실한 내용을 담아낼 수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좀 더 미국의 범죄소설들에 대한 상세한 논의들도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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