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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평점 :
무척 예민하고,
지나치게 고독한 사람에 관한 우화이자 블랙 코미디인 ‘그로칼랭’은 무표정하고 아무렇지 않다는 생각으로 암울하고 서글프게 살아가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슬픈 이야기이다.
아마도 슬픈 이야기라고 말하게 되는 이유는 그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고독함 속에 머물고 있는지, 누군가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뒤섞이지 못하고 홀로 지낸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느끼게 되는 딱함일 것 같다.
저자인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에 대해서는 별다르게 알지 못하고 그의 혹은 그들의 다른 유명 작품들에 대해서도 아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알 생각도 별로 없기 때문에) 그(들)의 소설들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는 나중에야 밝혀진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팬이나 연구자들에게 있어서는 당혹스럽거나 충격적인 사실일지는 몰라도 나와 같은 아무런 관심이 없는 독자로서는 그저 흥미로운 여담에 불과한 것 같다.
우연히 소개를 받아(아마도 소개해 준 사람은 기억조차 나지 않겠지만) 읽게 된 ‘그로칼랭’은 프랑스 파리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주인공 쿠쟁이 키우는 비단뱀의 이름이고, 비단뱀을 키우며 홀로 살아가는 쿠쟁은 도시인의 자화상이면서 예민함으로 똘똘 뭉쳐진 고독한 사람이다.
항상 불안감에 빠져 있고, 과대망상과 신경쇠약의 사이에서 머물러 있는 쿠쟁은 단지 예민하고 조금은 확대해석하는 성향의 인물일지는 몰라도(그리고 도통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엉망인 일상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그가 떠올리는 온갖 생각들은 그 당시의 도시인들이 갖고 있는 머리 속 생각들에 대한 하나의 단면일 것이고, 지금은 쿠쟁이 떠올리게 되는 생각과는 조금은 다른 것들을 떠올리며 살아가겠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조금은 다른) 생각들을 해가면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공 쿠쟁은 하나의 인물임과 동시에 근대 사회-도시에서 살아가는 도시인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기도 할 것이다.
쿠쟁은 지속적으로 낙태에 대해서 생각하고, 흑인 여성인 드레퓌스를 자신의 아내가 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나치-히틀러와 냉전, 정치-사회적인 문제들과 복지사회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며 이 작품이 하나의 우화처럼 다뤄지고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현실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는 의도적이지 않는 듯 하면서도 의도적이라는 것을 숨기려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 쿠쟁의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생각들 하나 하나가 웃게 만들기 보다는 씁쓸함을 그리고 비슷한 생각-감정을 가져보았다는 공감을 만들어낸다.
아무도 그의 곁에 없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고, 누구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언가에 열광하거나 몰두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어떠한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무감각하게 되어버린 근대 사회-도시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것도 뚜렷하게 만들기 보다는 모호하게 혹은 여러 해석이 가능하도록 만들어 어지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하도록 한다.
부정적이지 긍정적인지 판단이 모호한 결론은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뒤틀린 ‘생태학적’ 결말보다 만족스러운 기분은 들지만, 읽는 이에 따라서 다른 판단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은 하게 된다. 아마도 좀 더 작품으로서의 읽는 이로서의 결말과 작가가 의도하는 쓰는 자로서의 결말과의 차이일 것 같다.
‘그로칼랭’을 읽은 다음의 기분은 아마도 주인공 쿠쟁에 대해서 전혀 이해가 되지 않거나, 아니면 지나칠 정도로 이해되고 공감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그처럼 홀로 지낸다는 것을 경험해 보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전혀 경험-감정적으로도 동조되지 않는 사람의 차이일 것이다.
참고 : 주인공 쿠쟁에 대해서는 조금 더 다른 방식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안정된 직장에서 통계와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며, 인종에 대해서 어딘지 모르게 의심스러운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고, 1968년 혁명에 대해서 무척 곤란해 하고 있으며, 사회주의에 대한 병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근대인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는 중간계급-보수적 성향을 상징이기도 할 것이다. 분명,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흥미로운 작품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