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글쓰기 - 자발적 글쓰기를 시작하는 어른을 위한 따뜻한 문장들
이은경 지음 / 큐리어스(Qrious)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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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글쓰기

이은경

 

 각 장마다 글쓰기 과제가 있다. 던저주는 소재가 불씨가 되어 적당한 크기의 불이 되는 경우가 있다.

      

1. 과제다.

      

드라마 '봄날'을 보고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주인공은 고현정인데, 당시 모래시계를 끝으로 결혼을 하고 연예계를 잠정 은퇴한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이혼후 찍은 첫 작품으로 많은 화재를 불러모았었다. 게다가 서른아홉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시 20대의 조인성과 호흡을 맞춘다는 것에 질투심을 안고 봤었던 기억이 있다. 그 드라마를 십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보고 있다. 그만큼 나이를 먹은 내가 다시 그 드라마를 보니 드라마속 인물들은 DSM-5에 나오는 무수히 많은 장애들로 설명이 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명작이다.

 

고현정: 극중 이정은. 함구증

조인성: 극중 은섭. 불안정한 애착으로 양육되었고, 어릴 적 엄마가 손목을 그으면서 자살시도 한 것을 목격한 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피를 보면 구토증상이 올라옴.

지진희: 극중 은섭. 교통사고 이후 해리 증상

은섭의 엄마(은호의 새엄마). 경계선 성격장애, 의부증. 열등감

한고은: 어린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2층 높이에서 뛰어내리기도 함. 밝은 성격으로 보여지나 아픔이 있음. 은호의 소꿉친구이자 옛 연인.

작가가 DSM책을 보고 인물들을 구성한 것 같은 스펙터클한 드라마였다.

 

당시에 볼 때는 고현정이 화장을 하지 않고 나왔네. 그런데 어찌 저리 이쁠까. 조인성 너무 멋지다. 라며 봤는데, 10년이 지난 지금에는 작품이 잘 만들어진 것 같네. 고현정의 연기가 그때가 더 나은 것 같네를 넘어 병리적인 특성들을 바라보면서 보고 있었다. 나는 직업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일을 할 때만 내 직업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세상을 이 틀로 바라보는 버릇이 생겨버린 것 같다. 이게 좋은지 나쁜지 잘 모르겠는 감정을 안고 오늘 아직 다 보지 못한 드라마 봄날의 끝을 봐야겠다.

 

정은이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버려졌다. 버려진 정은이를 제주도 비양리의 보건소 의사가 데려다 손녀로 키웠다. 고집을 부리지 않는 아니였는데, 피아노에 대한 관심은 높았다. 하지만 정은이를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피아노를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음을 이렇게 애둘러 표현하고 있다. 정은은 자신을 버린 엄마를 성인이 되어 찾아갔다. 슈퍼를 운영하던 엄마는 정은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가게 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가라고 했다. 그 뒤 정은이는 입을 닫았다. 말을 하면 의미를 두고 마음을 두고 갖고 싶어진다고 했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 욕심도 마음을 두는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살아가던 정은앞에 은호가 나타났다.

 

은호는 의사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의사아버지가 외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룸살롱에서 일하던 여자가 은호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하고 은호의 엄마를 몰아내고 안주인 자리를 차지한다. 자신을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거나 은호의 엄마의 머리채를 잡아 내쫒는 등 기상천외한 일을 벌여 의사사모님이 되지만, 자신의 자리에 대한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남편이 냉대하는 것은 아닌지, 바람을 피는 것은 아닌지 순간순간 주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실로 확장해 나가면서 난동을 피웠다. 그런 가정에서도 은호는 밝게 잘 자랐다. 성인이 되면 엄마를 만나게 해준다는 아버지의 말을 믿었다. 그러나 33살이 되어도 아버지는 엄마를 만나게 해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은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맺어준 제주도 비양리 보건소의 의사 할아버지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정은을 만난다. 정은의 마음은 닫혀 있었다. 그런 정은에게 마음의 소리를 내 뱉으라고 소리쳐주고, 피아노를 선물하며 다가온다. 은호가 떠나는 곳으로 정은이 달려간다. 그리고 가지마라고 말을 내뱉는다. 은호는 엄마를 만나고 정은에게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엄마를 만나고 다시 공황으로 가는 도중 교통사고가 난다. 당시 운전하던 엄마는 즉사하고 은호는 의식을 읽는다.

 

한편 기다리던 은호가 오지않고 소식도 없다. 그러던 중 은호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은은 무턱대로 서울로 간다. 가서 은호 간병을 한다. 그러다가 은호의 동생 은섭을 만나게 된다.

은섭은 아버지가 무서워 의사가 됐지만, 어린 시절 엄마가 손목을 긋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것을 목격한 뒤로 피만 보면 자신의 몸을 가눌수 없을 정도로 공황증세가 나타난다. 구석에 숨어 벌벌 떨며 구역질을 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은섭이 누워있는 동안 은정과 은섭이 자주 마주치게 된다. 어쩌면 처음부터 은섭은 은정이 신경쓰였다. 그리고 형의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은정도 은섭을 향한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다는 것을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은호를 향해, “당신은(은호씨는) 나를 울게 하는데, 당신 동생은(은섭씨는) 나를 웃게해요라는 말로 복선을 나타낸다.

 

사람은 모두 특별하다. 자폐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고 내원한 만 5세 남자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에 대해 우리 아이가 좀 특별해요.”라는 말을 여러차례 사용하였다. 다른 아이들과 다른 행동증상을 보이는 것에 대해 특별하다는 말로 표현하는 부모는 처음 만났다. 특별하다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은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모습을 하루 종일 지켜보고 있다거나 중문을 열고 닫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특별하다고 표현하지는 않잖은가. 그런데도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의 증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우리 아이는 특별하다라는 말을 먼저 사용하였다. 아버지가 단어의 뜻을 모르고 사용했을까? 수많은 단어를 고민하다가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특별하다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게다. 부정적인 것에도 좋은 의미로 말하고 싶어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특별하다는 말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도 떠올랐다. 장애가 있다고 그 사람이 특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존재만으로도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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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위에서

 

앞코가 뚫려 있는 5센티 높이의 베이지색 구두를 신은 뒤에, 연한 청바지, 블라우스, 카디건을 입고, 걸어서 출근했다. 평소 구두를 잘 신지 않아서 더 근사해 보인다. 약 이십 여분을 걸어 회사에 도착했을 때쯤, 구두에 닿는 엄지와 새끼발가락 부분에 아픔을 느꼈다. 통증은 점점 심해, 구두를 벗고 보니 진물도 난다. 보건실에 들러 밴드를 받아와 발에 붙였다.

퇴근할 때가 되어 구두를 신어 보니 발을 넣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다. 걸음걸이에 신경 쓰기는 커녕 어서 집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면서 고행 길을 걸었다. 집에 돌아오니 물집은 다 터져서 쓰라렸고, 벌건 속살이드러났다. 보기에는 참 편해 보이는 구두였다. 굽도 두껍고 굽 높이도 적당했다. 처음 발을 넣었을 때도 정말 편했다. 그런데 신은 지 이십 분도 안됐는데, 내 발은 견디지 못하겠다고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이는 것과 실제는 다를 수 있다. 이 길이 꽃길 같아서 신나게 걷는데, 걷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렇지 않음을 알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그 길로 묵묵히 걷는 것을 택한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면 미련스러울 만큼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행한다. 그렇게 버티다가 몸이 무너지며 고통을 알려줄 때에서야, 잠시 쉬어간다. 그때, 도착지에 가는 방법은 더 편한 신발을 신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선택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고통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

나는 살아가는데 고통을 없애고 편리한 방법만을 선택하지 않는다. 미련스러워 보이더라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장인의 길을 걷는 사람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미래의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들, 쉽게 변하지 않으면서 속세에 물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는 응원한다. 그 길 앞에서 위로를 하거나, 받지도 못하지만, 그들의 삶이 있어 세상이 빛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서툴러도 피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내게, 사랑의 눈길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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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번 써봅시다 - 예비작가를 위한 책 쓰기의 모든 것
장강명 지음, 이내 그림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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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번 써봅시다

장강명 글 이내 그림

 

매일 수많은 책들이 책이라는 틀을 가지고 세상에 선을 보인다. 나는 인간이고, 책을 읽는데에 한계가 있다. 내가 조금 더 진득한 사람이었다면,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매일 책 한 권씩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하루 30쪽을 읽기에도 엉덩이가 들썩인다. 그렇다. 과장해서 말해야 하루에 책 한 권 읽을 수 있을까 말까하다. 이 말은 책이 나오는 속도와 내가 책을 읽는 속도 사이의 급격한 거리를 알려준다.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 욕심을 부려 사놓는 책들은 갈수록 늘어만 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책 읽기 속도는 노화와 맞물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어, 읽고는 싶은데 다 읽지도 못하는 책들이 책장을 한 가득 메워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고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어떤 책을 읽다 보면, 에이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 아니 솔직히 이것보다는 내가 더 잘 쓰겠다 싶은 책도 만나게 됩니다. 책은 글을 잘 쓰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겨졌었는데, 독립출판, 1인출판이라는 유행과 더불어 내가 책을 내고 싶다면 낼 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그래서 나도 책 좀 내보겠다고, 인터넷으로 검색한 어느 출판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몇 자 읽어보다가, 현타가 왔다.

내가 해놓은 것이 없다.

내가 해놓은 것은 책으로 쓸만한 내용이 아니다.

이런 글은 책으로 내기가 창피스럽다.

그렇다. 나는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에서 별것도 아닌 것 같아 보였던 책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창피하고 민망스러움과 함께 알게 되면, 내 존재가 더 작게 느껴진다.

 

이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쓸 수 있겠다는 행동력을 안겨준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직업을 소재로 하여 에세이를 써나가고 있다. 한 동안 불 붙은 것처럼 써내려가다가 한 열흘 뜸하기는 하다(지금은 한달...). 그래도 책을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한 느낌적인 느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초적인 내 책의 분량을 확인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글을 기획하면서 자신이 잘 아는 것에 대해서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쓴 글을 누가 읽어주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책을 쓰는 과정은 사람의 사고를 성장시킨다]는 꼭 내가 글을 쓰는 것이 필수 자양분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말도 해준다. 그런데도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말이 안되는 것이지 않는가. 그럼. 그럼. 써야지 말고.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고 객관적인 조건이 나쁘지 않은데도 공허함을 토로하는 젊은이도 있다. 그런 정체성 위기는 자기 인생의 의미, 자신을 만들어내는 일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할 때 온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지금 내가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다라는 감각이 필요하다]. 그 감각, 절실하지. 물론, 내가 느끼는 공허함이 의미있는 생산을 하지 못해 발생하였는지, 어린 시절의 부모의 지속적인 싸움, 오빠의 폭행에, (ventral 미주 신경계가 발달하지 못해 교감신경이나 dorsal 미주 신경만이 싸우고 공포스러워하는) 고립된 좁은 방안에 머물러 있어서 그런지, 읽는 이마다 다른 생각이 들겠지(나 좀 이상한가?). 나는 그저 저자가 목소리 높여 글을 쓰게 해주고 싶다는 그 마음을 높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느 부분에서는 글쓰기를 찬양하기 위한 이야기가 과하다 못해 비참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실제로 글을 조금이라도 쓰지 않았는가. 정말, 내가 저자에게 기획서를 보내고, 글에 대한 조언을 해달라고 하면, 이 책처럼 따뜻하게 응해줄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일단 책에서는 응원하고 있다. 기꺼이 온 몸으로 받아들여주마.

 

글을 쓰고 싶은데 쓰지 않는다면 [작가의 꿈을 버렸다. 그러나 그 꿈은 버려지지 않았다. 그도, 나도 안다. 앞으로도 그에게 작가의 꿈은 버린 것과 버려지지 않은 것 사이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그 상태로 살 것이다]라며 마치 내가 글을 쓰지 않는다면, 그렇게 살게 될 거라는 이야기로 들리게 한다. [중요한 건 뛰어난 사업가가 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 사업으로 내가 무엇을 얻을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이 지난주에 생긴 것이 아니라면, 몇 년 된 것이라면,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써야 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그렇지. 내가 안 쓰면 누가 쓰겠어. 내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삶도 정리가 되고, 앞으로의 삶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그럼, 그럼.

글을 못 쓴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포기하지 말라고 한다. [세상에는 자기 글을 깔본 교수에게 주먹을 먹이고 대학을 뛰쳐나와 소설가로 성공한 할란 엘리슨 같은 이도 있다]라면서 말이다. 나는 할란 엘리슨이 아닌데......라는 소심한 생각이 들고, [나는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정식으로 데뷔했다]는 장강명 작가도 아닌데...... 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아무렴 어때. 나는 나대로 나의 이야기를 쓰면 그만인 것을. 이렇게 말은 하지만, 내가 내 글을 마무리지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그 끝을 향해 달려나가 문을 열고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염원으로 글 읽은 소회를 말한다.

 

[좋은 에세이에는 그렇게 삶에 대한 남다른 관찰과 애정이 담긴다]. 남다른 관찰은 있다. 그런데 내 글에는 나에 대한 애정이 없다. 애정을 키우는 일부터 하자.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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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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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장영희

 

대학 교수로 살아가면서 겪은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신체적 불편함을 비롯한 이야기를 따뜻하게 풀어낸 수필이다. 책을 읽고 자신의 이야기를 녹여 내었으니, 칼럼같기도 하다. 수필, 에세이, 칼럼 이런 틀에 국한되어 열띤 토론을 벌이기보다는, 내가 언제 이런 따뜻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볼 수 있을까? 라는 마음으로 읽었다.

 

글의 짜임도 교과서적이다. 책과 자신의 이야기를 잘 짜서 틀에 맞춰 구워낸 글이다. 리포트나 기본적인 글을 어떻게 써야하는지에 대한 공부를 하기에 아주 좋다.

 

그런데 인생도 그렇고, 하물며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들 하나하나, 어찌 짜여진 각본처럼 플롯, 플롯, 플롯 그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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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밤
존 디디온 지음, 김재성 옮김 / 뮤진트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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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9일 금요일

The April Bookclub

 

푸른밤

존 디디온

 

얼마 전부터 수필 강의를 듣고 있다. 강의에서 말하는 좋은 수필이란 허구가 아닌 상상력을 동원해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치밀한 사유를 통해 고유하고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주며, 문장은 정확하고 일관성이 있어 미적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했다(~ 길다). 푸른밤은 이러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흔히 트라우마라고 불리는 외상에는 성폭력, 가정폭력 같은 직접적인 외상이 있고, 상실로 인한 외상도 있다. 남편, 아버지, 어머니, 자식 등의 주요한 주변인들의 죽음으로 인한 정서적 고통. 이 책의 저자는 아이의 죽음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연결하여 이야기한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메몰되지 않고,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치밀한 사유를 통해 세밀하게 묘사하고 비유를 통해 나타낸 글. 문장력도 일관성 있고, 보기에도 지니치지 않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정확하게 구성된 플롯보다는 푸른밤과 연결되어 있는 먹먹함, 가라앉음이 스며들어 있는 표현, 그리고 죽음, 상실의 심연에 대한 조용하지만 깊은 이야기가 있다.

 

뚱딴지같이 들리기도 하겠다만, 푸른밤은 자식을 읽은 슬픔에 대해 쓴 글이지만, 죽은 자식에 초점을 맞추어서 쓴 글은 아니다. 작가 본인의 생활에 맞추어서 쓴 글이다. 자신이 하는 일, 생활, 가족의 이야기가 주요하다. 그 와중에 필요하다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넣는 정도이다. 글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들도 아이를 잃은 슬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보다는 가족이 없는 자신에 맞추어져 있다. 이제 굽 있는 구두조차 신지 못하게 된 죽음의 길로 접어든 여성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읽고 나서 느껴지는 이 상실감은 마흔의 초입에 있는 나를 더 어둡게 한다.

 

처음 이 책을 집어들기까지는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존 디디온의 상실을 읽고 싶었는데, 이리저리 뒤져보아도 구할 수가 없었다.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저자의 다른 책인 푸른밤은 아이를 잃은 엄마의 이야기여서 선뜻 집어들 수가 없었다. 나는 평소 자식이 아프다는 둥, 자식이 어떻게 됐다는 식의 글을 멀리한다. 이런 글을 접하면 나는 바람소리를 낸다. 마치 내 자식을 해하는 것은 모두 바람으로 밀어버리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어떤 것을 동원해서라도(그것이 미신일지라도) 내 자식의 털끝에도 나쁜 기운이 오지 못하게 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다. 실제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야 말로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뱀을 보고 무서워하여 느끼는 공포는 뱀을 없애거나 피하는 방식으로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하지 않은 채 둥둥 떠다니며 만연해 있는 fear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그리고 일어나지 않은 것에 의미부여를 크게 하고 상상의 연결고리는 만든다는 것. 그것이 사람을 정녕 힘들게 한다. [기억은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런 것들이다]가 되는 것은 이러한 면도 한 몫 한다.

[이제 나는 그 아이에 대해 생각할 수는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 아이의 이름을 듣고서 울지 않는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우리가 중환자실을 나온 뒤 그 아이를 영안실로 이송하기 위해 운반 담당을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그 아이가 곁에 필요하다]

특히 이런 일들은 상상이 아니라 아예 없는 것이라고 치부해야 내가 살 수 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내가 느끼는 불안은 지나치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치지 않게 오롯이 있다.

[보호할 수 없는 것을 보호하겠노라 맹세하는 수수께끼를 말하는 것일까? 부모가 된다는 것의 그 모든 불가해한 비밀을 말하는 것일까?

시간은 흘러간다.

그렇다. 동의한다. 진부한 이야기 아닌가. 물론 시간은 흘러간다.

그런데 왜 나는 이 말을, 그것도 반복하여, 하는 것일까?]

아이가 죽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아이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다. 마음이 아프다. 라는 식의 사실적인 글을 벗어나, 글을 읽고 느끼는 감정은 배가 되게 호흡하게 하는 형식의 글쓰기. 물론, [그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나는 한 번도 두렵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는 직설적인 표현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어떤 것을 표현하는데 있어, 시와 수필의 중간 정도에서 기술하고 있는 듯한 기법에 마음이 더 먹먹해졌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이 아이를 시간의 연속선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나를 만들기도 한다.

[깊음과 얕음, 급격한 변화.

그 아이는 이미 한 개인이었다. 나는 그것을 결코 볼 수 없었다.]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내가 다 알아야 그 아이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아이가 한 개인으로,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밀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나도 늙겠지. 5cm 굽이 있는 구두를 신었다가 삐끗하는 날에는 내 인생도 나갈 그런 날이 오겠지. 나의 죽음에 당신이 W.H. 오든의 <슬픈 장례식>의 열여섯줄을 낭송한다면, 좋겠다.

[시계를 멈추고 전화도 끊어라

군침 도는 뼈로 개들의 울부짖음도 막아라

피오노도 치지 말고 북소리도 죽여라

관을 꺼내고 조문객을 오게 하라.

 

신음소리를 내는 비행기들을 머리 위에서 빙빙 돌게 하라

메시지를 하늘에 휘갈겨 쓰며 그는 죽었다고

공용 비둘기들의 흰 목 둘레에 크레이프 나비넥타이를 달아라

교통순경은 검은 무명 장갑을 끼게 하라

 

그는 나의 북쪽이며, 나의 남쪽, 나의 동쪽과 서쪽이었고

나의 일하는 주중이었으며 내 휴식의 일요일이었고

나의 정오, 나의 한밤중, 나의 이야기, 나의 노래였다

나는 사랑이 영원할 줄 알았다. 나는 틀렸다

 

이제 별들은 필요 없다. 다 꺼버려라

달을 싸서 치우고 해를 철거하라

바다의 물을 쏟아 버리고 나무를 썰어버려라

이제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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