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의 포옹
틱낫한 지음, 김형민 옮김 / 현문미디어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틱낫한의 포옹

틱낫한 지음

 

1년 동안 천천히 보고, 다시 1년을 천천히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책. 그리고 굳이 순서대로 보지 않아도, 어느 페이지를 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책. 300년 후 당신이 어디에 있을지 상상해 보라던가,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든가 하는 질문과 생각이 순서랄 것이 있겠는가.

무엇을 목적에 두고 그리 바쁘게 살아가는지 모르지만, 놓아버렸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의 근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 때 조차도 말이다. 아니 그러한 때가 가장 우리의 근본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때다.

내 안에 불안, 우울, 공포의 우물을 만들지 말고 내가 오롯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섬을 만 들어가는 것. 혹은 그것을 찾는 것. 그리고 천천히 나아가는 것. 맨발로 숲길을 걸어가는 것. 그때의 감촉을 느끼는 것.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내 삶의 포옹이 아닐까.

 

얼마 전 과장의 신임을 받고 있는 후임이 예고없이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 공격했다. 무엇을 같이 해결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 자리를 뺏기로 했다고 공표하는 자리였다. 그렇게 하라는 과장이나 좋다고 자신이 신이라며 나서는 후임이나.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다가 결정 내린 사안 이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을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탐욕이라는 것이 타인의 생계를 무너뜨리고 가해자의 죄의식은 거둬들인다. 지금은 이 작은 세계가 전부인 것 같고, 줄을 잘 타서 세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뿐이겠지. 그러는 사이 병든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가 되어버린 자신은 어디에서 찾을 텐가.

정신없이 공격을 당하고 그 주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밥도 못 먹고 그래도 이 상황을 버터야 한다고 지옥 불에 내 발로 걸어가는 형국의 나도 참 볼만하다.

 

[맑고 기쁜 마음으로 평화롭게 앉을 수 있는 당신의 자리를 선택하세요.

우리는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종종 봅니다.

맑고 기쁜 마음으로 평화롭게 앉아 있는 사람 역시

부처님처럼 연꽃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디에 앉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연꽃에 앉든, 시뻘겋게 타는 석탄에 앉든

매 순간 당신의 선택입니다.]

 

왜 시뻘겋게 타는 석탄에 앉아서 이렇게 버티고 있을까. 연꽃에 앉아 맑고 기쁜 마음으로 평화롭게 앉아 있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며칠 휴가를 내고 회사에 나가지 않으면서 장염, 설사, 복통, 가슴두근거림 등이 잠잠해져간다. 회사 밖의 풍경이 전경이 되고 회사를 배경으로 밀어내면서 평안이 오는 것을 보면, 거기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그런데 십년이라는 시간을 거기에 에너지를 주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간 내 인생이 아까워서 그리고 미래가 불안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렇게 내몰리듯 휴직을 하게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언자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32
칼릴 지브란 지음, 황유원 옮김 / 민음사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년 7월 8일 목요일

The April Bookclub

 

예언자

칼릴 지브란 지음/황유원 옮김

 

이 글에 대한 소회는 번역한 황유원의 [작별 전에 하는 말] 중 일부로 대신한다.

 

예언자는 오르팔리스 성이 있는 한 가상의 섬에서 열두 해 동안아니 자신을 고향으로 데려다줄 배를 기다리던 예언자 알쿠스타파가 자신의 배가 오는 것을 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곧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히지만, 도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찾아와 떠나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한다. 아무 말없이 눈물만 흘리는 그에게 또 다른 예언자인 알미트라는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당신의 진리를 말로써 전해 주세요.“ 그러고는 우선 사랑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하여 총 스물여섯 개에 달하는 인생의 여러 국면들에 대한 시민들의 질문이 차례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칼릴 지브란이 이 책에서 펼치는 논리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하며 크게 새로운 것도 없다. 진정한 삶이란 각종 흑백논리 너머에 존재하며, 우리가 곧 신은 아니지만, 신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몸과 행동을 빌려 이 세상에 도래한다는 것. 그럴 때 우리는 신과 하나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 어찌 보면 매우 교조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이러한 주장은, 그러나 칼릴 지브란이 오래도록 갈고 닦은 문장들, 쉽게 공감을 이끌어낼 법한 지혜를 품은 문장들로 인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다만 번역 내내 나를 좀 괴롭히던 것은 초반의 망설임과는 상반되게 거침없이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 예언자 알무스타파의 자아도취적인 어조, 그리고 이 글이 질문과 답변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도 거기서 어떤 토론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번역의 끝에 이르러 나는 그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 그가 한 답변에 대한 반론과 토론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 나는 그것이 예언자에서 아무런 토론도 벌어지지 않았던 진짜 이유라고 혼자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리고 곁에 있는 당신에게 묻는다. 과연 당신이라면 이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겠느냐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래기야, 춤춰라! 동화는 내 친구 61
채인선 지음, 김은정 그림 / 논장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래기야, 춤춰라!

채인선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노래기는 걷는 것에 대해 살펴보지 않았다. 걷고 싶으면 걷는 것이지, 발걸음을 어떻게 떼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순간에 노래기의 발이 모두 엉켜버렸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노래기는 몇 날 며칠 동안 엉킨 발을 푼다.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온도로 그 일을 지속한다. 그렇게 엉킨 발을 다 풀고 기분이 좋아진 것도 찰나, 어떻게 걸었는지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이 엉키고 엉켜 엉킨 발을 푼지 한 시간도 안되어 이전보다 더 엉켜 버리고 만다. 그래서? 다시 푼다. 그리고? 걷는다. 이러한 이야기를 이렇게 적정한 선에서 써내려가는 채인선이라는 작가에 매료되었다.

 

실상은 한번 엉켜 버린 실을 완전히 푸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엉켜버린 실을 푸는 동시에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한다. 엉켜버린 실만 풀고 있을 시간은 사실 없다. 그것을 안은 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더 엉키기도 하고, 어느 날은 조금 더 풀리기도 하는 그런 날들이 있을 뿐이다.

 

엄마의 마음에 병이 들어, 그 아픔의 찬란함이 나에게 왔을 때, 그 마음의 상처가 나를 짓눌렀을 때, 처음엔 해결하려고 매주 내려가서 엄마를 만나고 병원에도 가자고 하고 그랬다. 그러나 단단히 어긋난 엄마의 사고는 쉬이 돌아오지 못하고 더 망가져 가기만 했다. 가지 말아야 할 강을 이미 건넜고, 엄마는 이쪽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거기서 나도 무너지고 싶었다.

 

처음 경험해보는 시련 앞에서 우리는 모두 좌절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당연한 거다. 그렇지만 좌절을 짧게 할 수는 있다. 그리고 되든 안되든 시련을 겪기 이전으로 돌리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그러다 또 미쳐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시련이 우리 앞에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 좌절을 견디고 일어난 그 경험을 토대로 다시 일어서야 한다.

 

아는데, 요새 그게 잘 안되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1년 7월 8일 목요일

The April Bookclub

 

게으름에 대한 찬양

버트런드 러셀

 

영감이 떠오를 때가 자주 있다. 그럴 때? 그것을 흘려보내기 일쑤다. 옷을 사놓고 그때의 그 감성을 챙기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입는다거나 읽고 싶은 책을 주문한 뒤에 과거에 사놓은 책들을 들춰보느라 그 책이 또다시 뒷방 그림자처럼 남아 있기를 반복한다. 영감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무언가 떠오를 때마다 나는 그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이런 반복된 패턴을 바꾸고 싶다. 그럼? 우선 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은 폰에다가 영감을 넣어두자. 그것이 영감이 아니라 생동감이 될 수 있게. 이러한 면이 내가 생각하는 게으름의 영역이고 이를 적절하게 다루기 위해 취하는 행동의 언저리이다. 시간이 남아돌아도 생산적인 일에는 그 시간이라는 녀석을 주기 아까워 하는 것.

 

그런데 이글의 저자가 바라보는 게으름은 다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사람이 여가를 즐기면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마음이 들어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 노동시간을 줄이면 돈을 못번다고? 그러한 생각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내가 줄인 노동시간으로 다른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노동에서 벗어나 나를 찾는 시간을 만날 수 있다. 그러면 몸과 정신을 망치는 일도 막을 수 있다. 실제적으로 과도한 노동의 댓가를 얻는 것은 보상보다는 고통이 더 크다. 그러니 노동에 매진하기 보다 내 삶을 바라보고 미래를 생각하자. 그것이 저자가 게으름이라고 말하는 보이지 않는 형체였다.

 

이 책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 외에도 교육, 양육과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글들을 통해 너무나 당연한 듯이 흘러가는 암묵적인 고통의 향연을 생각하며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무언가를 위해 외치고 싸우지 않아도 된다.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그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라며 생각없이 흘러가는 사회에 물음표를 가지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 이슬아 서평집
이슬아 지음 / 헤엄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이슬아

 

두꺼운 음색으로 글쓰듯이 말하는 작가가 있다. 스스로를 작가라 칭하고, 출판사를 운영하고,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지만, 등단하여 문학계에 시작을 알린 사람은 아닌 것으로 안다.

월간 정여울이 있듯이 일간 이슬아가 있다. 잡지사 에디터(에디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 나는 모른다)였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고, 사람들에게 월 만원을 주면 매일 글을 써서 보내겠다고 메일을 보낸다. 그렇게 해서 모아진 사람들에게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스스로를 작가라 부른다.

 

물론 문학천재라고 불리우는 정서적인 작가들과는 글의 느낌은 많이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될 수 없다는 겸손함을 내려놓자. 컴퓨터를 켜고, 혹은 공책을 펼치고 하하하 라고 써보자. , 이제 우리는 모두 저자다. 작가까지는 부담이 된다면, 저자는 좀 더 다가가기 쉬운 감이 있다.

 

책 크기가 작고, 글도 많지 않은데, 책 값은 꽤 나간다. 더 이상 쓸 수 없었는지, 그 만큼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내가 저자가 아니므로 알지 못한다. 무슨 책을 읽다가 이런 형식을 빌려온 것 같은데, 가상의 인물을 정해놓고, 그에게(너에게) 책에 대한 이야기, 생각을 이야기한다. 그렇다. 서평집이다. 읽다가 끌리는 책이 있으면 사서 보면 된다.

 

태어난 아이를 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