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앞에서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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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앞에서

최은영

 

작가가 휘두르는 힘을 우습고,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라. 혹은 절대권력으로 무기처럼, 자신이 가진 정보만이 진실이라고 하지 말아라. 당신이 가진 생각을 내뱉는 일련의 반복이 가해가 되는 것을 정당화하지 말아라. 이단도 종교도 아닌 글만으로 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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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대 어느 시점의 나는 울어야 하는 일을 겪고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날 것의 감정을 인정한다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감정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은 행동이나 사고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내 감정을 억누르고 덮어버리면 나는 변화를 추구하지 않아도 됐다.

만인에게 자신의 패를 보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작가들은 자기 패를 모두 보인 채 승부를 놓아버린 사람, 영원히 패배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글쓰기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숨기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자기 약점과 취약성을 세상에 노출하는 어리석은 사람들. 작가에게 어리석음이라는 기질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걸 갖고 있다.

 

거대한 폭력의 출발점에는 언제나 일부가 있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불안정한 노동 환경, 과도한 경쟁, 긴 노동 시간, 쉽게 판단하고 서로 비교하는 문화, 사람을 급으로 나누는 사회적인 분위기, 실패를 만회하기 힘든 구조, 우리는 이 사회에 생존하고 적응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지치고 외롭고 두렵게 되었지만.

내가 존엄한 인간이라고 믿는 것보다는 함부로 다루어져도 관계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편이 더 쉬운 일이었다: 체념보다 나는 저런 인간이 아니라는 것,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거라는 것, 되물림하지 않을 거라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은 인생이니 삶이니 같은 말에 관심이 없다. 누군가를 진짜로 사랑하며 사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관념을 습관적으로 입에 올리지 않고 용기 있는 사람은 그게 용기인 줄도 모른다.

 

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 내 잘못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노력했는데도 잘해보려고 했는데도 겪어야 하는 상처들이 있다. 기억이라는 행위가 투쟁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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