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만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삭 마른 자리를 견디고 있다.


 이 바싹 마른 자리를 견디게 하는 것은 근육질의 단단한 힘이 아니라  개펄처럼 말랑말랑한 것들이다. 한때 축축했던 기억들이다.

함민복은 말한다. "말랑말랑한 힘이지요. 뻘이 사람의 다리를 잡는 부드러운 힘이요. 문명화란 땅 속의 시멘트를 꺼내서 수직을 만드는 딱딱한 쪽으로 편향돼 있습니다. 뻘은 아무것도 안 만들고, 반죽만 개고 있고요. 집이 필요하면 뻘에 사는 것들은 구멍을 파고 들어갈 뿐 표면은 부드러운 수평을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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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무엇에 대한 욕구 또는 결핍을 내면화한 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예쁜 옷을 보면 사고 싶고, 남이 나보다 좋은 차를 가지고 다니면 그보다 더 나은 차를 사고 싶고, 내가 사는 집은 늘 좁은 것처럼 느껴져 더 큰 집으로 이사가고 싶고, 남의 아이가 우리 아이보다 공부를 잘 하면 괜히 샘나고..

이러다 보면 우리 생활은 늘 불만족스럽기 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불만은 상당 부분 남과의 비교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물질적 욕망에서 내 마음이 자유롭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생활명상은 만족하라고 말합니다. (기사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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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미서리공동체 영적지도자 유진박· 마샤 보글린 부부는 행복의 비결에 대해서 이렇게 단언한다. "자기가 자기를 챙겨서 행복해진 사람은 인류 역사에서 한 명도 없었다"고. 자기가 이기적으로 자기만 챙긴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곧 행복은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만들어진 본성을 발현할 때 저절로 얻어지는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꽃들이 예뻐지려고 피느냐. (자신의 본성대로)피는 꽃처럼 자기 생명이 드러날 때 행복은 저절로 온다!" (기사원문)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관찰하여 본래의 성품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에 다름 아닐진대, 직장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인간관계에서 비롯한 여러 일상생활이 그리 녹록치는 않다.  성성적적(惺惺寂寂·)하기를 바라는데, 이게 어디 말이 쉽지. 그렇다 해서 세속의 삶에 매몰되어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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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외떨어져 살아도 좋을 일

마루에 앉아 신록에 막 비 듣는 것 보네

신록에 빗방울이 비치네

내 눈에 녹두 같은 비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나는 오글오글 떼 지어 놀다 돌아온

아이의 손톱을 깍네

모시조개가 모래를 뱉어놓은 것 같은 손톱을 깍네

감물 들듯 번져온 것을 보아도 좋을 일

햇솜 같았던 아이가 예처럼 손이 굵어지는 동안

마치 큰 징이 한 번 그러나 오래 울렸다고나 할까

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

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는 것들

살구꽃은 어느새 푸른 살구 열매를 맺고

이 사이

이 사이를 오로지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의 혀끝에서

몽긋이 느껴지는 슬프도록 이상한 이 맛을


이 사이(間)...내가 만질 수 없었던 것들, 앞으로도 내가 만질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아련하게 슬픈 것들,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 무어라 이름붙일 수 없는 것들, 그러나 혀끝에서 몽긋이 느껴지는 것들, 식별불가능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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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독재

1

우리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은, 여름 내내 땡볕에 익은 서방님 몸보신시키려고 싱싱한 낙지 안주에 소주 한잔

도 마련했다가, 감나무 그늘도 싱싱한 평상 위에서 온몸을 비틀며 죽어간 서방님을 보아야 했다. 꿈틀거리는

낙지발이 기도에 붙는 바람에, 숨이 턱 막혀 죽어간 임 때문에, 온 마당을 떼굴떼굴 굴러야 했던 아주머니, 감

나무 잎새는 마냥 살랑거렸다고 한다.

2

아랫말 아흔일곱 살 드신 할머니의 일흔두 살 자신 딸이 암으로 죽자, 역시 진갑을 바라보는 며느리가 시어

머니를 위로하였다. "아이구 자리보전하시는 우리 어머님이나 돌아가실 일이제 고모가 어찌 먼저 가신당가

요?"그러자 귀만은 초롱초롱한 할머니가 듣고는 "아 지년 지 명대로 살고 내사 내 명대로 사는 것인디 너 거

뮌 소리다냐, 너는 내가 죽었으면 그렇게 좋겄냐?"고 빽 질렀다 한다, 뒷문을 기웃거리던 참새가 후드득 날아

갔겠지.

3

불행의 족적을 모두 춤으로 바꿀 수 있는 시인이여

삶이란 근본적인 오류를 논하기 이전에 죽음으로도,

그리고 시의 세계로도 교정할 수 없는 저질 취미에 속한다지.*

 

* 에밀 시오랑의 『독설의 팡세』.

실천문학 2004 겨울호

이 교정할 수 없는 지독한 고통의 삶 속에서도, 감나무 잎새는 마냥 살랑거리기만 하고, 뒷문을 기웃거리던 참새는 후두둑 날아가버리고 만다.


독학자

깬 소주병을 긋고 싶은 밤들었다 겁도 없이

돋는 별들의 벌판을 그는 혼자 걸었다 밤이 지나면

더 이상 살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날들이었다

풀잎 끝마다 맺히는 새벽 이슬은 불면이 짜낸 진액

같았다 해도 해도 또다시 안달하는 성기능항진증

환자처럼 대책 없는 생의 과잉은 끝이 없었다

견딜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일 수 없었다 어쩌다 만난

수수모감처럼  그에겐 고개 숙이고 싶은 푸른 하늘이

없었다 아무도 몰래 끌려가서 아무도 몰래

들짐승들이 유리한 꽃의 비명을 들을 수도 없었다

죄의 눈물이 굳어서 벌판의 돌이 되고 그 돌들이

그를 처음보고 놀라서 산맥이 될지라도

오직 해석만이 있고 원문은 알 수 없는 생을 읽고자

운명을 유기해도 좋았다 운명에겐 모욕이었겠지만

미물 짐승에게라도 밥그릇을 주었다가 빼앗지는 말아야

했다 빼앗은 그늘에 모래를 채우는 세상이거나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때마침 도둑을 맞은

애인 집에서 되레 도둑으로 몰린 사랑의 경우처럼

도대체 아니 되는 그 고통의 독재를 안고 넘으며

그에겐 인간만 남았다 자신의 불행을 춤으로 추었던

조르바처럼 한 번이라도 춤을 추지 않는 날은

잃어버린 날이라도 되는 것 같아 춤을 멈추지 않는

사람처럼, 벌판의 황량경이 삭풍에 쓸리는 나날을 불러

그는 홀로움의 신전에 향촉을 피웠다 그처럼

무장무장 단순한 인간만 남아 보리수 아래서 울었다

문학사상 2004가을호

고개 숙이고 싶은 푸른 하늘이 없었다는 독학자의 삶!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는, 깬 소주병을 긋고 싶은 밤들었다는 삶. 그러나 그 독학자는 자신의 불행을 춤으로 추고 홀로움의 신전에 향촉을 피웠다. 

결국 "무장무장 단순한 인간만 남아 보리수 아래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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