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모든 정신적이고 신비로운 상태는 그것이 아무리 청정하고 지고한 것일지라도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조건지어진 것(samkhata)임을 명심하라. 그것들은 실제도 아니며 진리(sacca)도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천행으로 하늘은 내게 밝은 눈을 주시어 고희의 나이에도 여전히 행간이 촘촘한 책을 읽게 하셨다. 천행으로 내게 손을 내리시어 비록 고희에 이르렀지만 아직까지 잔글씨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점을 두고 천행이라 하기에는 아직 미흡하겠지. 하늘은 다행스럽게도 내게 평생토록 속인을 만나기 싫어하는 성격을 주셨다. 덕분에 나는 한창 나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친척이나 손님의 왕래에 시달리지 않고 오직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천행으로 나는 한평생 가족들을 사랑하거나 가까이 하지 않는 무딘 감정을 타고났다. 그 덕분에 용호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가족을 부양하거나 그들에게 핍박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 또 일념으로 독서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따위 역시 천행 운운하기에는 아직 미흡해보인다. 천행으로 내게는 마음의 눈이 있어 책을 펴면 곧 인간이 보이곤 하였다. <이탁오, ‘분서’>



책을 안 읽는 이들은 ‘책을 읽을 수 없는’ 천만 가지 이유를 댄다. 돈도 벌어야 하고, 만날 사람도 많고, 몸도 피곤하고, 걱정거리도 많고, 여하튼 이래저래 시간이 없다는 것. 그러다 나이가 들면, 곧 죽을 텐데 책은 읽어 뭐하나, 라며 서둘러 포기한다. 하지만 실은 이 모든 게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돈이 있든 없든 돈에서 자유롭기 위해, 능동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구성하기 위해, 일신의 안락을 구하지 않기 위해, 매순간 자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죽음 앞에서 편안하고 의연해지기 위해. 우리에겐 책을 읽어야 하는 천만 가지의 이유가 있다! 또한 이탁오의 천행에는 못 미칠지언정(!) 하늘은 우리에게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갖가지 천행을 주시지 않았는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로또에 당첨이 되고서도 절도와 사기를 일삼다 붙들린 청년의 기사를 보았다. 사유할 수 있는 능력과 비전이 없다면 10억원이 아니라 100억원도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인생이 쉽게 역전될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혹시 ‘인생역전’을 꿈꾸신다면 로또보다는 책을 사시라. 게다가 책읽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 되었으니.

<채운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 2008.10.1 경향신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제거된다면, 단순한 음식도 사치스러운 음식과 같은 쾌락을 준다. 또한 빵과 물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배고픈 사람에게 가장 큰 쾌락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사치스럽지 않고 단순한 음식에 길들여지는 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건강을 주며, 우리가 생활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에 주저하지 않게 해준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사치스러운 것들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강하게 만들며, 우리가 행운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준다. 따라서 우리가 '쾌락이 목적이다'라고 할 때, 이 말은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다.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것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모든 선택과 기피의 동기를 발견하고 공허나 추측들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쾌락>

우리는 흔히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행복해질 거라고, 지금 행복하지 않은 건 그 조건의 결핍이나 불완전함 떄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미래의 행복을 꿈꾸는 자들에게 현실은 늘 초라하다. 에피쿠로스는 결여감이나 박탈감 없는 행복, 금욕적 쾌락을 말한다. 이것은 '지금 그 자리에서 만족하라'는 진부한 정신승리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쾌락주의자'에피쿠로스는 어떻게 기존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체를 구성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욕망을 생산하는 신체로 스스로를 변형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사람들이 지상과제로 떠받드는 부나 명예, 정욕 등은 그것을 얻기 위한 수고로움에 비하면 너무나 덧없고 불확실하다. 진정한 쾌락이란 그런 욕망이 충족되었을 때가 아니가 더 이상 그런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었을 때, 즉 많은 것을 소유하지 않고도 충분히 히 유쾌하고 즐거울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느껴지는 자유로움이다. 달리 말하면, 쾌락이란 세상의 척도에서 벗안 새로운 욕망을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 신체의 특권이다. 채운 연구공간 '수유+너머'연구원

(경향신문, 2008.9.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나간 신문을 펼치니(경향, 2008.9.3 고전에서 길찾기)짧은 문장이 눈에 들어 온다.

....근대 지식과 달리 '앎'이란 신체적인 것이다. 깨달음은 존재 자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앎이란 저 너머 파랑새를 쫓는 무엇이 아니라 지금 이곳의 나를 변화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문성환(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신체와 앎의 분리가 근대 지식의 유입과 무관할 수는 없을 터, 그 폐해는 지금까지도 계속 지속되고 있다. 앎 따로, 행위 따로...어려서부터 자연 들어왔던 말들, '너는 딴 생각하지 말고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라는 등등. 이런 말들의 통해 습득된 사고와 행동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유부단한 자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단편적인 사실과 흔적들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우리는 실제 사례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임상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한 작가가 침묵했던 것, 말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던 것, 그 말하지 않은 것의 깊이이다. 작가가 어떤 작품을 남겼다면,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면, 우리는 분명 그를 잊을 것이다.

자신의 환멸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줄 모르고 그대로 사라지게 내버려둔 실패자, 그 실패한 예술가의 운명...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 7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