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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불교 불교입문총서 3
권오민 지음 / 민족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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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책의 머리말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

"불교학은 결코 단일한 체계가 아니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전개된 온갖 상이한 학적체계가 모여 이루어진 매우 복합적이고도 유기적인 체계이다. (5면)

화두 들고 참선에 드는 간화선 중심의 불교만이 전부인 것 마냥 , 아니면 유부 중심의 아비달마 불교는 개인의 해탈만을 중시하는 소승의 '극복해야 해야 하는 것으로만 은연 중에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는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장이 인도에 체재할 무렵(A.D.630-644), 이 시기는 이미 대승이 흥기한 지 700여 년에 지났지만 여저니 인도 땅에는 이른 바 소승이 압도적이었다......대승은 분명 새로운 불교였다. 그것도 기존의 불교와는 타협점을 갖지 않는, 진보도 발전도 아닌 새로운 혁신이었다. 그들은 불타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불타의 말씀(경전)을 결집하였다. 기성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불교라고 할 수도 없는, 그리고 그 결합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이어서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반야바라밀다의 공관은 주석가들의 피나는 허신에 의해 역사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었고, 그것은 동점東漸하면서 마침내 우리나라에 이르러 성문의 아비달마불교는 불교학에서 아예 배제되고 말았다. 나아가 오늘날에서조차 그 전통이 지속되어 내려오고 있는 스리랑카 등 남방의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335-338면)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점은 부파불교 내의 상좌부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종교이며, 설일체유부의 경우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연구는 차치하더라도 인도에서만 거의 천 년의 세월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343면)

다만, '일체개공'으로 대표되는 대승의 공관空觀에서 아직 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아비달마의 법유론法有論을 비롯한 법 자체로서는 어떠한 차별도 없으며 항상 실재한다,는 이른바 '법체항유'등의 여러 이론은 배워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면,얼른 와 닿지 않는다. 한 예로 용수龍樹는 연기를 상호의존적 관계로 해석하여 모든 존재<諸法>는 그 자신만의 고유한 본성이나 작용을 갖지 않으며, 따라서 일체는 공空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유부 아비달마에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다수의 인연에 의해 조작되어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세계를 성립하게끔 하는 각종 조건이나 요소를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그것의 실재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얄퍅한 알음알이를 통해 해결될 문제라기보다는 불교를 보는 시각의 질적 변환을 꾀하는 작업임과 동시에 깊는 사유가 병행되어야 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위 첫머리에서 말했던 것처럼, 대승불교만이 불교의 전부를 말하고 것이 아니라면, 대승불교 역시 불타의 깨달음을 탐구하고 해석한 하나의 갈래이고 그리고 그 갈래 역시 또한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그것에 의해 폄하되었던 소승 역시 그러하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불교가 '대승'이라는 이름하의 보편체계로 해석되는 것은 위험하다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비달마를 비롯한 초기불교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뒷받침돼야, 중관과 유식,여래장 사상을 비롯한 천태, 화엄, 선禪, 정토 등 동아시아 불교철학의 공부가 가능하지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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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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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학자가 쓴 불교이야기이다.  다른 종교를 통해 자신의 종교를 더 깊게 알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교의 배경에 있는 오강남, 길희성, 이현주 목사 등은 이웃종교인 불교에 대해  의미 있는 발언들을 하고 있는 반면, 불교계에서는 기독교, 가톨릭 등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별로 엿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늘날 세계가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차츰 다종교 상황으로 되어가고 있는 추세를 주목한다면 종교간 평화공존을 위한 대화는 필요하다. 대화는 상호이해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불교계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이 전반적인 불교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글 역시 명확하면서도 쉽다.

인상깊은 대목 몇 군데 톺아 보자면, 우리는 흔히 불교가 힌두교에서 말하는 참자아, 즉 아트만처럼 어떤 고정된 실체( 참자아, 진아, 진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기 쉬운데(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초기경의 주석서들은 모두 '실체가 없다'는 뜻에서 무아를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어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我)'가 '실체'를 뜻한다면 '무아'란 존재론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실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것은 자아니 본질이니 하는 상(相.想)에 얽매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아를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에 관한 다음의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모두가 상호 의존, 상호 연관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존재할 뿐 독자적인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있는 한,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나'는 따로 성립할 여지가 없게 된다. 우리의 자아란 이처럼 실체가 없기에 우리가 집착할 가치가 없다는 것, 거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우리의 자아가 이처럼 허구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면 우리는 그만큼 자유로워지고, 세상도 그만큼 아름다워진다. 나아가 개인의 자아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도 그 자체로 독립적 실체가 아니다. '무아'를 영어로 'no-self'라고만 하지 않고 'no-substance'라고 번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77면)

이런 <실체>와 관련된 언급은 무수하다. 또다른 저서에서 적절한 예를 들자면,

모든 것을 유(有)라는 고정적 실체로 간주하여 생각하면 육도(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천)의 미계(迷界:어리석음의 세계)가 생기고, 일체를 공(空) 가(假)  중(中)이라는 비실체적 사유방식으로 생각하면 사성(四聖:성문,연각,보살,불)의 오계(悟界)가 생기는 것이니, 미오(迷悟)의 그 마음가짐을 떠나 열개의 세계들이 따로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일체유심조라는 것도 이처럼 마음가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세계의 출현방식을 지적하는 말이지, 조물주의 의지에 의한 창조나 절대적 정신에 의한 구성처럼 추상적 관념론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닌 것이다. (김종욱 저, 『불교생태철학』, 동국대학교출판부, 182면)

자신의 복을 비는 기복 일변도 신앙에 대한 언급 역시 정확하다. 대학입학시험 때마다 '내 자식 시험 잘 봐서 좋은 대학'들어가게 해달라는 기도행위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절에서 하는 백일기도, 영가천도재, 우란분재 등도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하는 대목들이다. 이는 어찌보면 자기, 자기가족, 자기집단을 위한 이기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이제 믿고 기도만 하면 저 위에 계시는 하느님이나 천사가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는 식의 믿음을 성숙한 믿음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한국 불교에서도 어느 면에서 자기 개인이나 가족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기적 안녕만을 위하여 비는 것이 종교의 주요 목적인 양 오도하는 이런 기복적 신앙형태는 지양되리라고, 그리고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을 비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지닌 한계성을 겸허하게 자각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염원이나 기원을 간직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성을 다해 아뢰고 복을 빌더라도 나만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비워 전 우주 공동체와 더불어 살고, 어울려 사는 원대한 화엄적 세계의 구원을 위해 비는 것으로 승화해야 하리라 봅니다.

둘째, 기복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특히 죽은 이들을 위해 복을 비는 것도 지양되리라 봅니다. 사랑하는 식구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을 위해 종교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런 절박한 상황을 기회로 하여 , 그리고 미지의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을 이용하여, 종교가 필요 이상으로 신도들에게 금전적 부담을 안겨 준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이런 예식들의 표피적,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이런 예식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더욱 깊은 정신적, 심리적, 상징적, 효용적인 가치에 더 큰 관심을 쏟고 더 깊은 종교적 의미를 발굴하고 널리 펴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316-7면)

다만 "상좌불교(소승불교)에서는 궁극 목표를 위한 수행이 기본적으로 승려를 위한 것이지만, 대승불교 보살의 길은 승려 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해당한다. (108-9면)"는 부분은 선뜻 동감할 수 없다. 대승불교가 더 종교적으로 완성된 형태의 불교라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는 보는 사람이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다. 대승불교에 관한 부분을 체계적으로 서술이 잘 되어 있는 반면에, 상좌불교에 관련해서는 논의가 너무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찌보면 이 책은 불교의 발생에서부터 인도불교, 동아시아불교, 서양불교 등 불교의 전반적 이해를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초기불교에 관한 부분에 관한 언급이 없다 해서 흠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상좌불교에서 유래한 불교 명상법으로서의 비파사나 등등에 대한 보다 깊고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리라 본다. 궁극목표가 승려를 위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그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지와 편견, 집착과 고집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깨달음이 일상의 생활이 될 수 있지도 않을까. 그러면 우리 사회는 그만큼 더 아름답고 살 만한 곳으로 바뀌게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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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와 상상력의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최재목 지음 / 知&智(지앤지)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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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온갖 더러운 것들을 받아들여 맑고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어내는 늪, 늪은 끊임없이 생성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파괴되고 있다.", "나의 시적, 생태적, 생명적 상상력의 근원이 되고 있는 늪. 그것은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었던 어떤 매력적인 개념 즉 내 사색과 글쓰기의 시야에 '장르 통섭적, 문화 통합적 글쓰기, '새로운 인문학적 상상'의 모형으로서 포착된 착상이다."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늪의 깊은 가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자 한다.     

이러한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통합적, 네트워크적 글쓰기는 저자의 약력에 나와 있는 것처럼 시와 철학의 두 영역의 융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문학과 철학 이 분야는 고유의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서 또는 상대 학문영역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자칫 대립각을 세우기가 쉬운데, 뜻밖이면서도 신선하다. 다만,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발상은 매우 새로운 데 반해 그 발상들을 엮어내는 사유의 전개는 너무 소략한 감이 있다. 비근한 예로 <華엄的, 緣起的 성찰>에서 "늪은 불교의 삶과 세계의 연기적 현실을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에, 늪의 글쓰기는 연기적 글쓰기라 정의해도 좋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단편적.선언적 기술만 따르지 설득력 있는 깊은 이해로 이끌지는 못한다. 이와 관련해서 책머리에 저자 역시 자신의 글 어떤 부분에 논거가 부족한 점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아마 저자가 구상하고 사색한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욕이 앞선 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이 사유들을 보다 치밀하게 가다듬은 역작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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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과 선 - 마음을 다스리는 책 5
우희종 지음 / 미토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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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종교 담론은 소이연(所以然)보다는 가치지향적 도덕률로서의 당위연(當爲然)을 앞세우기 쉽다. 사실, 기술(記術)적 측면들을 존중하기보다는 당위,요청 등에 집착하려는 의도가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禪 을 이렇게 과학적 입장에서 볼 수도 있다는 데 아주 인상깊었다. 이 책을 읽을 때가 마침 황우석 사태가 일기 얼마 전이었는데, 이후 불교계에서는 황우석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얽히고설킨 내막이야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생명에 대한 근본 질문들이 침묵, 봉쇄되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적 담론들이 보다 더 분석적이고 치밀해질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정치(精緻)한 과학적 인식틀을 포용해내지 않는 추상론은 자칫 공허해질 수 있을 뿐더러 나아가 현실을 오도할 수도 있다. 우리 근현대 종교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불교의  禪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있어 과학자인 저자가 쓴 이 책의  의미는 사뭇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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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소프트 - 시험답안에서 논문까지 지혜가 드는 창 3
김해식 지음 / 새길아카데미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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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쓰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있어 실제적으로 글쓰기에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찾게 된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많은 책들을 통해 글쓰기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을 떨쳐 내기는 커녕 오히려 부담을 더 느끼게 되는 게 저간의 사정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장점은 우선 잡다한 부분들은 걷어 내고 알갱이에 해당하는 대목들을 풍분한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는 데 있다.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게 편집 역시 깔끔하게 되어 있다. 적어도 글쓰기에 대해 자신 없어 하는 사람이 읽더라도 사람을 위축시키지는 않을 것 같다. 상업적 색깔도 없다.  글쓰기 지도용 책으로도 괜찮지 싶다.

대학의 신입생들이 읽으면 좋은 책인 것 같은데, 절판되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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