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바다에 와서야
바다가 나를 보고 있음을 알았다.

하늘을 향해 열린 그
거대한 눈에 내 눈을 맞췄다.

눈을 보면 그
속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바다는 읽을 수 없는
푸른 책이었다.

쉼 없이 일렁이는
바다의 가슴에 엎드려
숨을 맞췄다.

바다를 떠나고 나서야
눈이 
바다를 향해 열린 창임을 알았다.

                  <<수련>>  문학과 지성사 2002

 일상에서 바다를 생각할 일은 없다. "바다에 와서야/ 바다가 나를 보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될지라도... 내가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를 바라보는 일. 바다와 나와의 경계가 無化되는 일.

그리고 "바다는 읽을 수 없는 푸른 책". 어찌 바다만 그렇겠는가. 우리의 삶 또한  읽을 수 없는 미지의 질문으로 가득찬 책이다. 

위안이 있다면 "바다를 떠나고 나서야/눈이/바다를 행해 열린 창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 지리멸렬한 일상에 찌든 마음들이 바다의 가슴에 숨을 맞춤으로써 얼마간은 치유될 수 있다는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詩와 밤새 그짓을 하고

지쳐서 허적허적 걸어나가는

새벽이 마냥 없는 나라로 가서

생각해보자 생각해보자

무슨 힘이 잉잉거리는 벌떼처럼

아침 꽃들을 찬란하게 하고

무엇이 꽃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지

어째서 얼굴 붉은 길을 걸어

말도 아니고 풍경도 아니고

말도 지나고 풍경도 지나서

어떤 나무 아래 서 있는지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 문학과 지성사. 1991.


새벽에  읽을 때의 그 생생한 느낌은 소멸하고 지금은 손에서 슬며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그렇게 사라진 느낌, 감각들.  그저 빔(空), 아스라한 흔적, 그림자뿐......

 안에 있으면서 안을 관찰할 수는 없는 법. 새벽이 없는 나라로 가서 볼 때, 즉 아주 낯선 시선으로 새벽을 응시할 수 있을 때,"무슨 힘이 잉잉거리는 벌떼처럼/아침 꽃들을 피어나게 하고/무엇이 꽃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지/어째서 얼굴 붉은 길을 걸어/말도 아니고 풍경도 아니고/말도 지나고 풍경도 지나서/어떤 나무 아래 서 있는지" 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詩의 그림자......

 말이면서 말이 아니고 풍경이면서 풍경이 아닌, 말도 지나고 풍경도 지나서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서 있는 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게를 낸다면
죽집은 냈으면 한다.

죽 한 그릇
한 그릇의 죽

죽 한 그릇도 못 얻어 먹었다는 말은 너무 사나워
죽이 밥보다 부족타는 생각도 습관이야

무슨 일의 바탕이든 연하고 조용해야만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거다
또 그리고 싶어질 거다

거리거리마다
온갖 생고기 집 주물럭 짐 수산횟집이 난장을 치는 사이로
가만히 가만히 끼어서라도
죽집을 냈으면 한다

찬으로는 나박 물김치
단 하나지만 제일 어울리는 걸로 준비해 놓고
고소하고 삼삼하게 죽 냄새 종일 풍겨
내 죽집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하리

혹사와 공복, 년놈의 세상
죽사발을 만들고 말겠다 이빨 가는 사람
옳아, 죽사발을 만들어 주세요
죽사발이 많아야겠어요
이빨 상하지 않는 연한 음식 새알죽 가득 떠 올릴게
소매를 잡아 끌리라

속이 연하고 조용해지면
생각이 높아지는 법

생각이 높아지면
모든 지상의 것들에게로 겹으로 스미리
내 죽집 앞을 사뭇 기웃거리며 부딪는 떠돌이 개야
내 죽집 유리창엔 맨날 늘어진 입을 대는 늙은 가로수야
초대하리라 이 주그렁이들아, 나의 미식 녹두죽을 특별히 낼게

이 저녁도 길에 지친 행인들의 쓰린 속이 보인다
세상 폭력이 보인다
환중의 헐은 내벽이 보여

흰죽, 검은깨죽, 야채죽
비집고라도 죽집을 내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꼭대기에 있지만

옛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버린 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너의 이파리는 푸르다

피가  푸르기 때문이다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앞 뒤에 숨어 꽃은 오월에 피고

가지들은 올해도 바람에 흔들린다

 

같은 별의 물을 마시며

같은 햇빛 아래 사는데

네 몸은 푸르고

상처를 내고 바라보면

나는 온몸이 붉은 꽃이다

 

오월이 오고 또 오면

언젠가 우리가 서로

몸을 바꿀 날이 있겠지

그게 즐거워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가 서로 몸을 바꿀 날이 있겠지,하면서 그게 즐거워서 물푸레나무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시인을 생각하면 나도 그게 즐겁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