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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단지·달·시인’ 각각이 어울려 중중무진 펼쳐

30. 부분의 분석에서 총체성의 미학으로 <하>

화엄의 미학은 그림이든 문학작품이든, 소설처럼 긴 텍스트든 선시처럼 짧은 텍스트든 모두 적용이 가능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 형식으로 5/7/5, 단지 17자에 시상을 압축한 하이쿠에 응용해보자. 이것이 가능하다면 다른 장르나 텍스트에는 좀 더 쉽게 적용할 수 있으리라. 마츠오 바쇼(松尾芭焦)의 하이쿠를 한 수 골라 화엄의 미학으로 해석하여,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곧 부분이 되면서 주와 객이 하나로 원융(圓融)되는 경지를 느껴보자.

문어단지여, 그리 덧없는 꿈을/여름의 달밤
(壺や, はかなき夢を/夏の月)

바쇼가 1688년 5월말 아카시를 여행했을 때 읊은 하이쿠다. 계절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계어(季語)는 ‘여름의 달밤’으로 초여름 수평선 위로 그믐달이 비춘 바닷가가 배경 이미지를 형성한다. 잠시 휴지(休止)를 두어 이미지를 떠오르게 하고 생각할 틈을 주는 키레[切れ]는 “문어단지여!”로, 사유의 여백 속에 문어와 단지 사이에 얽힌 여러 환유와 은유를 떠오르게 한다. 문어단지는 문어가 야행성 동물이므로 대개 저녁에 바다에 내렸다가 새벽녘에 거두니, 이 시를 읊은 시점은 문어단지를 이미 내린 후 그믐 달빛이 깔린 초여름 밤이다.

이 하이쿠에서 핵심어는 ‘문어단지’이다. ‘-여(や)’로 길게 여운을 형성하는 가운데 이는 1차적으로 환유로 읽힌다. 환유로 읽히면서 ‘문어’와 ‘단지’의 의미는 분리된다. 핵심어인 문어는 부분-전체 관계로는 ‘8개의 다리, 둥그런 머리, 빨판, 먹물’ 등을 연상시킨다. ‘8개의 다리, 둥그런 머리, 빨판, 먹물’에서 각각의 단어가 바로 ‘문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부분-전체의 환유관계는 밀접하다. 공간적으로 보면, 문어는 일본에서 문어가 많이 잡히는 항구인 아카시, 문어가 사는 바다, 문어가 좋아하는 구멍과 굴을 환기한다. 시간적으로는 문어와 계절이 관계가 없으나, 산란하는 때인 초여름을 떠오르게 한다. 후반부에서 여름을 한정하고 있고 달이 떴으니 초여름 중에서도 밤이다.
문어는 초여름날 밤 아카시 인근의 바닷가라는 구체적 시공간을 시적 맥락으로 부여하며, 이에 그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바쇼와 자신의 삶 중 문어와 관련된 경험이나 작품을 연상시켜 이와 상호텍스트성 관계에서 이 하이쿠를 읽도록 한다. 여기서 겉으로 드러난 현전텍스트는 위 하이쿠이지만, 뒤로 숨은 부재텍스트는 문어와 관련된 경험과 와까[和歌], 하이쿠[俳句] 등 관련 텍스트들이다. 그리하여 현전텍스트의 의미와 가치는 부재텍스트와 관련에 따라 천차만별로 차이를 가진다. 각각의 텍스트는 동시돈기(同時頓起)한다.
독자가 이 하이쿠에서 더 깊은 의미를 찾고자 할 때, 독자는 문어의 의미를 환유에서 은유로 바꾸어 읽는다. ‘대머리, 괴물’처럼 문어의 생김[相]에서 연상되는 것을 넘어서서 체(體)의 은유를 살피면, 문어가 ‘굴을 좋아하고 들어가 안주하는 속성’은 ‘모태귀환, 귀소본능’의 의미를 갖는다. 선비들은 머리가 좋고 둥근 형상을 한 것을 문어의 본질로 파악하여 ‘둥그런 진리, 도(道), 깨달음’ 등의 의미를, ‘문어가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추며 이동하는 속성’을 지닌 것을 보고 ‘겸양, 안분(安分)’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밖에 인간의 입장에서 문어의 용(用)을 보면, ‘단지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한다’는 문어의 행위는 ‘구속, 함정, 수감’, 먹물을 뿌리는 행위는 ‘자기 보호, 방어’, 보호색을 띄는 것은 ‘위장, 변신’, 문어가 먹을 것이 없을 때 제 다리를 뜯어 먹는 행위는 ‘제살파먹기’ 등의 의미를 형성한다. 은유든 환유든 각각의 의미는 세계를 형성하며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동시돈기한다.

여름 밤 바다에 선 시인

문어의 다채로운 의미에 울타리를 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텍스트 바깥의 맥락, 곧 초여름 밤의 아카시 인근의 바다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이쿠 내에서 다른 낱말들과 갖는 관계이다. 문어는 문어인데 단지 안에 들어간 문어이다. 여기서 단지와 문어는 이항대립관계를 형성한다. 서로 대립적인 문어와 단지가 합쳐져 하나가 되는 것은 문어가 단지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의 매개를 통하기 때문이다.

문어가 자유로이 헤엄을 치고 먹이를 잡고 바다 속 생활을 즐기는 주체라면, 단지는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된 구속이다. 문어가 짝을 만나 알을 낳고 잘 길러 자손을 번창하게 하는 꿈을 꾸는 존재라면, 단지는 그 꿈이 정지된 가혹한 현실이다. 문어가 노동을 하고 생활하는 것이라면, 단지는 휴식과 종언을 의미한다. 문어가 이곳과 저곳을 자유로이 떠돌고 헤엄치는 존재라면, 단지는 한 곳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문어는 일본의 곳곳을 방랑하는 바쇼 자신이 되고, 단지는 이를 구속하는 세속의 굴레가 된다. 문어가 한 생각으로 꿈을 꾸는 바다의 생활이 상(常)이라면, 단지 안에 들어가 사람의 먹이가 되는 것은 무상(無常)이다. 그처럼 바쇼가 일심으로 선을 행하고 하이쿠를 쓰는 것은 상(常)이고, 세속의 굴레에 갇혀 속세의 환락에 묻혀 살다 생을 마감하는 것은 무상이다. 문어가 이리저리 자유로이 바다의 한 부분이 되어 생활하는 것은 무위의 삶이지만, 인간이 만든 단지에 갇히는 것은 인위의 삶이다. 바쇼가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자유로이 방랑하며 자연의 사물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이를 시로 표현하는 것은 무위의 삶이지만, 단지와 같은 집이나 세속의 굴레에 갇혀 속세의 생활을 하는 것은 인위이다. 이렇게 자연에서 깨달음을 얻는 방랑의 삶이 도를 행하는 것이라면, 단지는 그를 얽어매는 사유의 틀이다. 결국 문어는 삶이고 단지는 죽음이다. 이렇든 각각의 의미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관통하고 서로를 이끌어 들이고 있다. 세계는 동시호입(同時互入)한다.

바쇼는 초여름날 밤 바닷가에서 문어단지를 보면서 거기에 방랑하는 자신을 투영시켜 이런 하이쿠로 형상화한 것이다. 지금 바쇼 자신은 문어처럼 자유로이 방랑을 하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고 이를 시로 표현하고 있지만, 언제인가 몸이 지쳐 한 곳에 머무는 삶은 단지 안에 갇힌 문어처럼 자유를 구속당하고 도를 행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이를 것임을, 그래서 인생이란 자체가 덧없는 꿈이고 무상한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어쩌면 이 하이쿠는 바쇼 스스로 자신의 방랑생활과 그 의미를 한 마디로 함축한 시라 할 수 있다. 이 순간 바쇼가 문어이고 문어가 바쇼이다. 이렇듯, 모든 의미들과 그 의미로 형성된 세계는 서로 의존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고 포섭한다. 세계는 동시호섭(同時互攝)한다.

위와 같은 생각을 하며 밤바다를 바라보았는데 그런 것에 아랑곳없이 바다는 잔잔하고 그믐달빛이 교교히 비추고 있다. 이로 인해 문어가 사는 바다 아래와 달빛이 비추는 바다 위는 내적으로 이항대립구조를 형성한다. 바다 아래에선 단지에 갇힌 문어가 삶과 죽음 사이에서 갈등을 하고 있는데, 바다 위는 이에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는다는 듯 태평하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제사 때 사용하고는 버리는 하찮은) 짚강아지처럼 여긴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라고 한 말처럼, 자연(自然)은 만물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인위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바다 아래엔 욕망이 들끓고 있는데, 바다 위는 그런 욕망이 모두 사라지고 해탈과 적멸을 이룬 세계다. 바다 아래가 삼라만상이 나고 사라지는 생멸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세계라면, 바다 위는 모든 생멸이 끊기고 적멸의 고요만 있는 여여(如如)한 세계다. 바다 아래가 형이하이고 바다 위가 형이상의 세계요, 바다 아래는 일상의 장이요 바다 위는 깨달음의 장이다. 결국 바다 아래가 속제라면, 바다 위는 진제의 세계다. 바쇼는 문어와 단지에서 무상을 읽지만, 그 부분들에 내재하는 전체, 곧 영원한 진리는 “삶은 덧없는 꿈이지만 그를 초탈한 삶은 달빛이 비추는 바다처럼 모든 것이 나고 죽음을 멈춘 적멸의 세계이자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청정하고 고요한 적정의 세계다.”라는 것이다.

別 떠난 總은 없다

이 하이쿠에서 반영상은 “문어단지여, 그리 덧없는 꿈을”이며, 굴절상은 “여름의 달밤”이다. 현상계는 초여름날 밤에 문어단지를 던져 문어를 잡는 어부의 삶과 단지에 갇혀 죽게 된 문어의 상황, 바쇼가 이 모든 것을 바라보며 그에 자신을 투영하는 현실이다. 원리계는 그 현상계에서 단지에 갇힌 문어를 통해 삶의 무상을 느끼는 그 순간이며, 진자계는 문어가 단지에 갇힌 것과 상관이 없이 잔잔한 바다를 고요하게 비추는 달빛을 보며 바다 아래와 바다 위, 갈등과 조화, 욕망과 적멸, 무상과 상, 형이하와 형이상, 일상과 깨달음, 속제와 진제 사이를 오고 가는 경계이자 문어가 바쇼이고 바쇼가 문어인 세계다. 승화계는 ‘달’를 매개로 이 온갖 경계를 초탈하여 모든 것이 나고 죽음을 멈춘 적멸의 세계이자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청정하고 고요한 적정의 세계다.

자연 전체가 총상(總相)이라면, 문어, 단지, 달과 시적 화자와 독자는 별상(別相)이다. 문어, 단지, 달과 인간이 어우러져 자연을 이루고 자연이 있어서 문어와 단지와 달과 인간은 서로 깊은 연관을 형성하며 의미를 갖는다. 별(別)을 떠나서 총(總)이 없고 총(總)을 떠나서 별(別)이 없다.(總卽別 別卽總 總中別 別中總)
문어가 자유, 단지가 구속, 달이 적멸의 의미를 드러내기에, 자연은 어질지 않으면서 무위(無爲)한 본성을 드러낸다. 자연은 부분들에 관여와 간섭을 하지 않고, 각각은 그 속에서 서로 어울리고 조건이 되면서, 문어는 바다를 자유로이 주유하며 꿈을 꾸고 단지는 냉혹한 현실을 알리고 달은 모든 것을 교교히 비추며 하나로 아우른다. 이처럼 각각이 모여 자연의 본성(同相)을 이루고, 각각이 자유, 구체성, 원융 등의 성질을 드러내며 이상(異相)을 유지한다.(同卽異 異卽同 同中異 異中同).

단지는 문어를 가두는 기능을 수행하고, 사람은 단지를 놓아 문어를 잡으며, 문어는 사람의 먹이가 되며, 달은 환하게 비춰 이 모든 것의 경계를 없앤다. 이렇게 하여 자연은 서로 연기되면서 성상(成相)을 만들고, 이 성상을 유지할 때 문어와 단지와 인간, 달 각각은 괴상을 발휘한다.(成卽壞 壞卽成 成中壞 壞中成) 이렇게 육상(六相)은 하나로 원융(圓融)한다. 이것이 바로 이 하이쿠가 펼쳐주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화엄세계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08년 10월 7일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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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제약-허무한 상상 모두 넘어 선 화엄의 미학

29. 부분의 분석에서 총체성의 미학으로<중>

화엄의 총체성의 사유를 미학으로 전환해보자. 내가 암울한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컴컴한 밤으로 비유할 수도 있지만, 그 어둠 속에서 광복의 희망을 꿈꾸면서 ‘별’을 노래할 수도 있다. 전자가 식민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면, 후자는 그를 굴절시키고 있다. 이처럼 예술 텍스트는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하기도 하지만, 프리즘을 지난 빛이 무지개로 빛나듯 굴절하기도 한다. 현실의 모방과 반영이 예술이기도 하지만, 작가는 그 현실을 의식을 통하여 반영시키는 동시에 지향의식(지향의식이란 주체가 세계와 마주쳤을 때, 그 세계를 인식하고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서 무엇인가로 현상학적으로 지향하려고 하는 의식의 단계를 말한다. 예를 들어 무서리가 내린 뒤에 다른 꽃들은 모두 시들어버렸는데 더욱 새뜻하게 피어 있는 국화를 보았을 때, 성리학적 세계관을 지향하는 선비일 경우 이를 지절(志節)의 표상으로 노래하지만, 실존주의를 지향하는 유럽의 지성인은 ‘실존’으로 형상화한다), 전의식(pre-consciousness)이나 무의식(unconsciousness)을 통하여 굴절시킨다.

“바람에 흔들려 눕지만 곧 일어서는 풀”은 ‘누움, 하강, 억압’과 이항대립구조를 형성하는 시어일 수 있고, 가진 자에게 억압당하지만 곧 일어서서 저항하는 민중의 은유일 수도 있다. 이처럼 문학과 예술을 현실의 반영으로만 보려 한 관점이나 이를 현실과 유리된 꿈의 양식으로 보려 한 관점, 문학과 예술을 사회문화적 맥락에 종속시켜 해석하는 방식이나 작품 외적 요인을 배제하고 작품 그 자체만을 분석과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방식 모두 총체성을 상실한 비평이다. 전자는 예술작품을 현실이나 사회적 맥락에 종속시키고 작품의 예술적 특성이나 미학을 놓치거나 무시할 수 있다. 반면에 후자는 예술을 현실과 유리시키고 해석의 지평을 축소하며 예술에 작용하는 외부 사회적 요인이 예술 자체의 고유요인임을 허용하지 않는다.

때문에 화엄의 미학은 텍스트를 반영상(反映相)과 굴절상(屈折相)으로 분절하고, 각 텍스트에 담긴 세계를 화엄철학의 사법계(四法界)로 나누어 분절한 후 분석을 한 후 종합하여 그 작품이 담고 있는 총체적인 세계를 재구성한다.

박노해 시가 한국 노동자의 현실과 자본주의의 모순을 잘 드러내듯, 반영상은 현실을 반영한 텍스트이다. 반영상에서 실제 현실과 텍스트에 재현된 현실은, 칠판 하면 지우개가 떠오르듯, 인접성의 유추, 곧 환유의 관계를 형성한다. 반영상은 “작가가 주체로서 세계와 마주쳤을 때 자신의 의식과 경험, 그때까지 접하였던 텍스트를 종합하여 자기 앞의 개별적인 현실을 해석하고 세계를 재질서화하는 원리를 따라 현실을 나름대로 압축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부분은 확대시키는 과정을 통해 환유로 표명하여 구체적이고 생동적인 삶의 보편적 진실과 가능성을 드러내려는 텍스트”이다.

반영상에는 화엄의 사법계(事法界)와 이법계(理法界)가 포개진다. 사법계를 미학으로 전환하면 현상계이다. 현상계는 주체가 마주친 사물이나 현실이다. 알을 까고 죽는 하루살이나 들에 핀 국화를 다들 아무 관심 없이 스치듯, 현상계는 드러내는 사상(事象)대로 세계를 바라보는 경지를 뜻한다. 그러나 그 전부터 그 사물을 접하였던 이든, 처음으로 마주치는 이든, 이들 가운데 몇몇은 그 사물에 관심을 보여 ‘새로운 만남’을 이룬다. 만남을 통하여 주체는 이를 무엇인가로 해석하면서 세계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어떤 주체는 알을 까는 하루살이를 보며 ‘그렇듯 하루에, 해가 뜨는 온 우주의 운행을 보고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랑하고 알을 낳는 성자의 모습’을 읽는다. 또 어떤 쓰는 주체는 무서리를 맞아 모든 꽃들이 사라진 뒤 더욱 새뜻하게 피어있는 국화꽃과 새로이 만나 “저 국화꽃처럼 인간 또한 좋은 조건보다 절망의 상황에서 참다운 실존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유추한다. 이렇듯 쓰는 주체는 사물이나 현실을 텍스트로 재창조하고자 하면서 현실 속에 내재하는 보편 원리나 본질을 발견한다. 이렇게 주체가 현상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사물과 새로운 만남을 이루어 사물에 내재하는 보편원리라고 직관으로 깨달아 세계를 창조하는 경지는 이법계이다. 이를 미학으로 전화하면 ‘원리계’이다.

이 원리계는 진제(眞諦)의 입장에서 하나이지만 속제(俗諦)에서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가장 좁은 범주의 원리계는 국화꽃에서 실존적 삶을 유추하듯 인간이 마주친 사물과 현실 속에 내재한 본질을 인식하는 경지이다. 그 다음 범주의 원리계는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듯, 한 사상(事象)을 통하여 여러 사상이 담고 있는 보편 원리를 인식하는 경지이다. 가장 너른 범주의 원리계는 만물이 수억 가지의 모습으로 존재하지만 모두 연기되어 있어 공(空)하다고 하듯 세계의 실체에 어느 정도 다다른 경지이다.

반영상과 굴절상의 조화

굴절상은 프리즘이 한 줄기 빛을 무지개로 바꾸듯 현실을 굴절시킨 텍스트이다. 쓰는 주체로서의 예술가는 현실을 반영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데서, 현상계와 원리계간의 괴리나 세계의 부조리를 표상하는 데서 결핍을 느끼며 욕망을 지향한다. 이때 쓰는 주체와 현실 사이에 현전하던 의식의 자리를 지향의식, 전의식과 무의식이 대체한다. 지향의식, 전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결합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면서 현실을 다른 무엇으로 전화시키거나 부정한다.

굴절상은 사리무애법계(事理無碍法界)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가 담겨 있다. 사리무애법계를 미학으로 전화하면 진자계이다. 진자계는 쓰는 주체가 지향의식에 따라 현실과 사물, 그리고 이들에 내재하는 원리를 발견한 후 이 원리를 통하여 현실을 바라보며 현실과 욕망, 당위와 존재, 이데올로기와 삶, 개별적 삶과 보편적 삶, 절대와 상대, 현상과 본질, 역사적 존재와 실존적 존재 사이를 시계의 진자처럼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경계이다. 예를 들어 이주노동자가 부당하게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현실에서 당위는 당연히 이들이 다른 사람과 똑같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당위나 보편이 그대로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과학이다. 삶은 예술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생동하며 복잡하다. 결국 예술은 부분으로 전체를 말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유비추리의 오류를 덜 범하고 삶의 총체성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면 양자 중 한쪽에 머물 것이 아니라 양자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하며 종합을 꾀해야 한다. 극단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보여준 것처럼 예술이 진동을 멈추고 어느 한 편에 서고자 할 때 예술은 정치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전락하며 예술이 갖는 부정적인 힘조차 잃는다.

사사무애법계는 현상과 현상이 완전 자재하고 융섭하는 경계로 사(事)가 리(理)의 도움 없이 다른 모든 사(事) 속으로 자유롭게 들어가고 융섭하는, 사(事)와 사(事)가 무애할 뿐만 아니라 만유(萬有) 그 자체가 서로를 비추어주고 서로를 침투하여 하나가 곧 세계이고 세계가 곧 하나인 경지이다. 즉 세계는 서로 방해를 하지 않고 서로를 비춰주고 포섭하여 하나로 융합하여 총체성(總體性)을 지향하는 것이다.

사사무애법계를 미학으로 전화하면, 승화계이다. 승화계는 모든 대립과 갈등을 승화하여 이룩한 총체성의 세계이다. 승화계는 주체와 대상, 이상과 현실, 현상계와 원리계, 세계의 부조리와 자아 등 여러 관계에 있을 수 있는 대립과 갈등을 총융시킨 경계이다. 쓰는 주체로서의 예술가가 현실의식의 작동을 완전히 멈추고 지향의식, 전의식과 무의식 속에서 모든 대립과 갈등을 총융시킨 상상력을 펼칠 경우 그 경지는 승화계로 나타난다. 승화계는 쓰는 주체가 텍스트 상에 직접 제시할 수도 있고 숨겨두어 읽는 주체가 독서하는 과정에서 읽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읽는 주체는 주체와 대상, 존재와 당위, 개별과 보편, 절대와 상대, 현실과 욕망 등의 대립이 하나로 원융된 세계의 황홀감 속에서 노닐게 된다.
우리는 박경리의 ‘토지’를 통해 일제 식민지 시대의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중첩된 부조리 속에서 여러 군상의 삶과 이 속에서 가장 인간답고 정의로운 삶은 무엇인지 되새기게 된다. 이처럼 반영상은 현실을 반영하여 생동하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 그에 담긴 세계의 부조리를 보여주고 이에 담긴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대신, ‘쓰는 주체’를 현실을 반영하는 “모방적 예술가”로 머물게 하며, ‘읽는 주체’를 텍스트에 담긴 반영상과 현실을 관련시키며 텍스트의 의미를 역사주의 비평식으로 해석하게 하는 “역사적 독자”에 머물게 한다.

‘박하사탕’이 좋은 영화인 이유

우리는 영화 ‘박하사탕’에서 1980년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자행된 광주학살이 순수한 사랑을 하려는 평범한 청년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해 곱씹는 한편, 기차가 거꾸로 가면서 서사의 시간이 과거로 역전되는 독특한 구성을 보면서 “필름을 되돌리듯 역사를 성찰할 수 있지만, 그 역사의 무게에 짓눌린 맑은 영혼을 되살릴 수 없다.”는 메시지를 읽는다. 이 영화에서 전자가 반영상이라면, 후자는 굴절상이다. 대중의 인기를 얻는 데 성공한 이 영화가 예술성도 있는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후자 때문이다. 이처럼 굴절상은 미학적으로 조밀하고 아름다운 구성을 하여 현상의 보이는 세계를 떠나 세계의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려 하며, 정보의 양은 많아 해석의 지평을 연다. 그만큼 ‘읽는 주체’를 현실에서 자유롭게 하나 해독이 쉽지는 않다. 굴절상은, ‘쓰는 주체’를 “내포적 예술가”로 거듭나게 하여 그가 텍스트를 다양하게 의미화하게 하며, ‘읽는 주체’를 텍스트에 담긴 현실을 다양하게 해독하도록 안내하는 내포적 독자로 거듭나게 한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한 유형은 신라 향가나 이상의 ‘날개’, 피카소의 ‘게르니카’처럼, 반영상과 굴절상이 조화를 이룬 텍스트이다. 이 경우 독자는 반영상을 통하여 현실을 읽어내면서도 굴절상 때문에 역사주의적 해독을 넘어서서 텍스트의 숨겨진 의미를 해독하려 한다. 그러기에 작품을 통하여 현실의 구체적인 모습과 모순을 읽을 수도 있지만, 현실의 굴레를 넘어 다양하게 읽기를 하며 상상을 펼칠 수 있다. 반영상은 굴절상이 현실이 없이 비상하는 것을 붙잡아매고, 굴절상은 반영상이 쳐버린 울타리를 풀어버린다. 좋은 텍스트일수록 반영상과 굴절상의 이런 상호작용이 1차로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된다. 이렇게 하여 텍스트의 의미는 끊임없이 드러나고, 반영상이 야기할 수 있는 닫힌 읽기도, 굴절상이 수반할 수 있는 비정치성과 비역사성도 지양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08년 10월 01일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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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적 사유는 원자를, 화엄은 우주를 발견했다

28. 부분의 분석에서 총체성의 미학으로<상>

서양 사람들은 나뭇잎을 따서 관찰을 하고 분석을 하여 나뭇잎에서 엽록체를 찾아내고 광합성작용과 탄소동화작용을 설명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뭇잎의 본질과 식물의 생장원리에 다가갈 수 있다. 서양의 과학자들은 지구와 달 사이의 중력을 계산해낸다. 이로 우리는 우주의 본질에 다가가고 천체의 운행원리를 깨닫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분석적 사유와 자연과학을 발달시켰고 이것이 정치의 영역에서 사회문화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현대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런 사고에 익숙하다.

서양철학 무의식 탐색에 한계
하지만, 현미경 앞에 놓인 나뭇잎과 나무에 달려 수많은 다른 나뭇잎과 관계하면서 영양분과 기(氣)를 주고받고 있는 나뭇잎은 같지 않다. 가까이로는 화성이나 소행성에서 수천억 광년 떨어진 은하계 너머의 별들, 존재하지만 규명할 수 없는 암흑물질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온 별과 먼지들이 지구와 달 사이의 인력에 관계한다. 이 때문에 탈현대의 사유는 관계적이고 총체적이며 카오스적인 사유를 지향한다.

예술은 대상을 무의식과 이미지를 통해 총체적으로 포착한 것과 부분을 의식과 언어를 통해 분석한 것이 합쳐져 이루어진다. 분석적 사유를 하는 서양의 사유가 바탕이 되다 보니, 서양의 예술론과 미학은 치밀하게 부분을 분석하여 작품의 의미를 드러내는 데는 탁월하지만 무의식이 이미지를 통해 보이지 않게 숨어있는 것을 드러내는 데는 한계를 지닌다.
불교는 부분의 사유에서 벗어나 총체성의 사유를 행한다. 이는 단순히 부분을 보는 것을 지양하고 전체의 차원에서 인식하는 것이나 분석적 사고에서 종합적 사고로 전환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부분 속에서 전체를 보고, 부분을 보는 동시에 전체를 아우르며, 전체를 조망하면서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이것이 잘 나타난 것이 화엄철학이다.
“한 털 끝에 한량없는 세계가 있고/부처님과 겁과 중생 말할 수 없어/이런 것을 분명하게 두루 보나니/걸림 없는 눈 가진 이 머무시는 곳//한 생각에 그지없는 겁을 거두어/국토와 부처님과 모든 중생을/걸림 없는 지혜로 바로 아나니/이런 공덕 갖춘 이의 머무시는 곳//시방 세계 부수어 티끌 만들고/큰 바닷물 털끝으로 찍어낸 수효/보살의 세운 원이 이와 같나니/걸림 없는 이들의 머무시는 것//(『화엄경』, 「입법계품」)
이 게송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의상의 십전유(十錢喩)를 들어보자. 지면관계상 인용을 생략하고 이를 풀면, 일(一)이라 하는 것은 일정한 상(相)으로서 스스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열과의 관계 속에서 열의 1/10의 가치를 갖는, 10보다 아홉째 아래에 있는 수인 일(一)은 비로소 십(十)이 아닌 일(一)이 된다. 십이 없다면 일 또한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도 못한다. 십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나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에 대해 열 배의 가치를 갖는, 하나보다 아홉 째 위에 있는 수인 십은 비로소 일이 아닌 십이 된다. 일이 없다면, 십은 1의 열 배의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다른 숫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로 드러나 자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가 열과의 관련 하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무엇인가를 드러낸 것일 뿐이다. 무엇이 새로이 생성되었기에 자성이 있는 것으로 가정하지만, 자성이 있다고 가정하게 된 것은 십과 관계 속에서 그렇게 드러난 것이지 하나 자체에 자성이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니다.

또 일 속에 이미 십의 가치가 담겨 있기에 일은 십과 견주어 그 1/10의 가치를 형성하며, 십 속에 일의 가치가 담겨 있기에 십은 일의 열 배의 가치를 지닌다. 십이 없다면, 일은 그 가치를 지니니 못한다. 마찬가지로, 일이 없다면 십 또한 가치를 못 갖는다. 십으로 예를 든 것일 뿐, 억이나 조, 경, 무한대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관련을 맺고 조건을 이루고 있으며,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는 데 온 우주 삼라만상이 관계를 하고 조건이 된다는 말은 얼핏 과장으로 들린다. 하지만, 저 꽃은 이 땅에 씨가 떨어지는 인연이 있어서 그런 것이며 바람은 흙을 밀어 적당히 씨를 덮어 추위를 나게 하였고, 햇볕은 알맞게 따뜻하여 싹을 틔우게 하였으며 구름은 비를 내려 수분을 주고, 수천억 마리의 미생물이 양분이 되어 싹을 키우고 꽃을 피우게 하였기에 지금 꽃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느 짐승이 싹을 밟았거나 따먹었다면 꽃은 없다. 바람이 덜 불었다면 씨는 한겨울에 얼어 죽었을 것이며, 더 불었다면 흙에 파묻혀 빛을 보지 못하여 싹을 틔우지 못하였을 것이다. 비도, 구름도, 햇빛도, 양분도 마찬가지다. 더 넘쳤다면, 더 모자랐다면 지금 꽃은 없다. 태양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생장, 바람의 흐름과 구름의 운행에 관계를 하고 조건이 되며, 가까운 별부터 먼 별까지 온 우주의 별들이 태양의 운행과 핵융합작용에 관계를 하고 조건이 된다. 온 우주의 삼라만상은 각각 개별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깊이 관계를 맺고 서로가 조건을 형성하는 하나이다.

“진성은 참으로 깊고 지극히 미묘해(眞性甚深極微妙)/자성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루더라(不守自性隨緣成)/하나 안에 일체 있고 일체 안에 하나 있으니(一中一切多中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일세(一卽一切多卽一)/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머금었고(一微塵中含十方)/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역시 그러해라(一切塵中亦如是)(義湘, 『華嚴一乘法界圖』)

사면이 거울로 된 방에 촛불을 비추면 촛불이 수없이 비춰진다. 그 방안에 수정구슬을 가져다 놓으면 그 수정공 안에 무수한 촛불이 다 들어가 비춰진다. 옆에 수정구슬을 또 가져다 놓으면, 한 수정구슬 속에 있는 무한대의 촛불이 다른 수정구슬에 담기고 이것이 다시 다른 수정구슬에 담긴다. 이 순간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촛불이 수정구슬 안에서 반짝이며, 반사되는 것과 반사하는 것의 구분이 사라진다.

하나는 일체와의 관계 속에 형성

이렇듯, 내 몸 안에 있는 체세포는 100조개의 세포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를 복제하면 온전한 나, 곧 나와 생김새는 물론이거니와 목소리와 성격, 지능까지 닮은 또 하나의 사람이 만들어진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가 한 티끌이 대폭발을 하여 만들어졌다. 우주가 한 원자에 압축되어 있고 우주의 구조와 원자의 구조가 상동성을 갖기에, 천체물리학자들은 원자의 구조를 연구하여 우주의 비밀을 해명하려 한다. 전자가속기를 이용하여 원자 안의 작은 미립자에 대해 새로운 사실이 추가되면 우주의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지고, 허블 망원경을 통해 우주의 비밀이 밝혀지면 원자의 실체를 밝히는 연구도 한 걸음 진전된다. 망망한 우주가 곧 하나의 원자이고 하나의 원자가 곧 망망한 우주이다. 의상의 말대로 하나 중에 일체 있고 일체 중에 하나 있다(一中一切多中一).

하나는 일체와 관련지을 때 하나이다. 하나에 열이 있고 인다라망의 구슬처럼 하나에 일체가 담겨 있으니 하나가 전체이다. 국화 꽃 한 송이에서 무상(無常)을 읽고 연기의 법을 깨닫듯, 하나에서 전체를 보니 하나가 곧 전체이다. 우주 삼라만상의 무한한 조화가 연기 아닌 것이 없으니 전체가 곧 하나이다. 우주 삼라만상 일체가 인다라망의 구슬처럼 서로 비추고 조건이 되고 관계를 하고 있으니 일체가 하나이다.

내 앞에서 깜박이고 있는 촛불은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인 동시에 공기의 흐름에 따라 춤을 추는 아름다운 무희(舞姬)이자, 색(色)과 공(空)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상이다. 촛불이 등불인 것과 무희인 것과 깨달음인 것이 전후가 없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처럼 서로 다른 계(界)에서 서로 다른 실재들이 모두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난다. 세계는 동시돈기(同時頓起)한다.

촛불을 하나 더 켜놓자. 방안은 훨씬 더 환해진다. 한 살의 빛이라도 서로 부딪히지 않기 때문이다. 촛불에서 나온 수많은 빛들이 서로 부딪히지만 이쪽의 촛불과 저쪽의 촛불에서 나온 빛이 서로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고 서로를 넘나들고 비춰주면서 방안을 환하게 밝힌다. 서로의 빛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서로를 관통하고 서로를 이끌어 들이고 있다. 세계는 동시호입(同時互入)한다.

두 개의 수정구슬 속의 촛불처럼, 우주에 있는 일체는 서로 의존하고 서로 포섭하고 있기에 서로 반사경인 동시에 영상이다. 나는 온 우주와 관계하면서 존재하는 동시에 지금 우주를 바라보며 글을 쓰는 체험을 하고 그 체험이 우주를 이룬다. 이렇듯,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할 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존재하게 하고 포섭한다. 세계는 동시호섭(同時互攝)한다.

거울 속 촛불처럼 서로를 비춘다

여기 호랑이 한 마리가 있다. 호랑이 전체가 총상(總相)이라면, 팔다리, 눈, 털은 별상(別相)이다. 팔과 다리가 있고 눈과 호랑이 무늬의 털이 있어야 호랑이를 이루고, 호랑이가 있어야 호랑이의 팔다리와 눈과 털들은 의미를 갖듯, 별(別)을 떠나서 총(總)이 없고 총(總)을 떠나서 별(別)이 없다.(總卽別 別卽總 總中別 別中總)

비호(飛虎)라는 표현처럼 산천을 빨리 내달리고 멧돼지도 한 방에 죽일 수 있는 강한 팔다리, 눈빛 하나로 뭇 생명을 벌벌 떨게 하는 눈, 검정 줄 무늬와 하양, 노랑 털이 조화를 이룬 호랑이 문양의 털 등이 모여 호랑이를 이루고, 이들이 있어서 호랑이는 사냥을 하고 생존을 유지하며 맹수의 왕으로 군림한다. 반대로, 호랑이가 맹수의 왕으로 군림할 때 팔다리와 눈과 털은 각각의 성질을 드러낸다. 이처럼 각각이 모여 연기의 원리인 동상(同相)을 이루고, 각각이 달리고 짐승을 잡고 호랑이 문양을 드러내는 성질인 이상(異相)을 유지한다.(同卽異 異卽同 同中異 異中同).

호랑이 감각기관은 각각의 기능인 괴상(壞相)을 유지한다. 눈은 짐승을 인식하고 두렵게 하고, 팔다리는 짐승을 잡고 달리는 기능을 수행하고, 털은 호랑이를 추위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또 이들 감각기관의 기능이 모여 호랑이는 짐승을 한 눈에 발견하고 비호처럼 달려 한 방에 숨지게 하는 호랑의 기능을 수행한다. 각각의 호랑이의 괴상이 모여 호랑이란 성상(成相)을 만들고, 이 성상을 유지할 때 호랑이의 각각의 감각기관은 괴상을 발휘한다.(成卽壞 壞卽成 成中壞 壞中成) 이렇게 육상(六相)은 하나로 원융(圓融)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08년 09월 22일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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