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달팽이 지나간 자리에 긴 분비물의 길이 나 있다

얇아서 아슬아슬한 갑각 아래 느리고 미끌미끌하고 부드러운 길

슬픔이 흘러나온 자국처럼 격렬한 욕정이 지나간 자국처럼

길은 곧 지워지고 희미한 흔적만 남는다

물렁물렁한 힘이 조금씩 제 몸을 녹이며 건조한 곳들을 적셔 길을 냈던 자리, 얼룩

한때 축축했던 기억으로 바삭 마른 자리를 견디고 있다.


 이 바싹 마른 자리를 견디게 하는 것은 근육질의 단단한 힘이 아니라  개펄처럼 말랑말랑한 것들이다. 한때 축축했던 기억들이다.

함민복은 말한다. "말랑말랑한 힘이지요. 뻘이 사람의 다리를 잡는 부드러운 힘이요. 문명화란 땅 속의 시멘트를 꺼내서 수직을 만드는 딱딱한 쪽으로 편향돼 있습니다. 뻘은 아무것도 안 만들고, 반죽만 개고 있고요. 집이 필요하면 뻘에 사는 것들은 구멍을 파고 들어갈 뿐 표면은 부드러운 수평을 유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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