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고등학생때부터 고대해왔던 마흔 살이 되었다.

어렸을 때는 마흔살이라고 하면 굉장히 나이가 많은건줄 알았다.
어느정도 세상도 좀 알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사회적으로도 초년 딱지를 떼고, 이 사회와 가정의 방향을 이끌어가는... 참 그럴듯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래서 20대 때도, 30대 때도 다시는 오지 않을 시절이라 최대한 살아내자 생각했지만, 그래도 40대에 대한 기대가 더 컸었다.

드디어 마흔이 된 지금, 이런 거창한 기대와 달리 지난 닷새동안 이전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를 허둥지둥 보낸 것 같다.
1일(목) 낮 - 작년에 태어난 조카들 영세식 참석,
            오후와 저녁 - 우리 아이들 연수보낼 짐싸기,
2일(금) 새벽: 우리 아이들 3주간 연수 출발... 저녁에 퇴근해보니 집이 왜이리 썰렁한지..
3일(토) 저녁: 세계사회 포럼 참가자 준비모임이 대전에서 있어서 그 행사 준비 및 일부 진행.
4일(일) 로미 쥴리 목욕시키기, 집안대청소... 어째 좀 여유가 있는 날이었다.
5일(월) 오늘이네.

아침에 출근하니 바리바리 전화가 온다. 어제 보낸 파일들 번역을 했냐고.
파일이라니?
알고보니 어제 음성 메세지가 핸드폰에 왔었는데, 이걸 확인하는 방법을 몰라(이거 원시인 아니냐?) 어제 파일 세개 보내놓고 어제까지 번역해달라고 하는 메세지를 확인 못했었다. 세계사회포럼에서 우리 단체가 발제하는 내용을 홍보하는 파일들이었는데,  으아~~~ 오늘 점심까지가 현지의 홍보 신문 마감이란다.
월요일에다 겨울철이라 환자들도 많은데 점심도 제대로 못먹고 부랴부랴 겨우겨우 시간을 맞추었다.

이뿐이 아니다. 근 보름을 병원을 비우느라 유동성 위기가 대두되는 재정도 신경써야 하고, 대진의도 구해야 하고, 보건소, 보험공단에 병원 비운다고 신고해야 하고(아마 다른 업종은 이런 시시콜콜한 짓 안할거다. 가게 문닫는것도 아니고, 잠간 남에게 맡기는 것도 신고해야 하다니..), 게다가 집을 비우게 되니 남편 심기도 신경 써야 하고... 아예 남편도 함께 가자고 꼬시는 중이다. 여기에서 또 가치관과 강제되는 역할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고...

내일부터는 세계사회포럼 직전에 열리는 세계보건포럼에서 발제할 내용(5분짜리 짧은거지만)과 발제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하는 내용을 포럼 자료집에 넣을 내용으로 준비해야 한다. (그냥 참가만 한다고 문의한 것이 어찌어찌 엮여서 우리 단체에서 사례발표를 두개나 하게 되었다.) 부족한 관련 어휘를 초치기로 익혀야 하고....
멋있게, 분위기 있게 맞이하려 했던 사십대를 이렇게 정신없게, 많은 고민 속에, 유동성 위기 속에서 맞이하게 될줄이야...

하지만 열심히 살아내자는 결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음주 월요일인 12일에 인도 뭄바이로 떠난다. 아마 18일 혹은 20일에나 돌아올 예정이다.
겨우 1주일여에 불과한 기간이지만, 나 자신의 의지로 국내건 국외건 행사에 이정도 오랜 시간 참석하는 것은 첨이다. 그것도 많은 갈등과 고민 속에서 결정한...
(출장 맘대로 다니는 분들은 복 받은 줄 아세요. 그 흔한 배낭여행 한번 못해봤으니... 이와 관련해서는 언젠가 또 푸념글 하나 나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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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 2004-01-06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세계사회포럼! 꼭 가보고 싶었는데... 좋은 경험, 의미있는 경험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을산 2004-01-0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가능한 열심히 중계(?) 해보겠습니다.

nemuko 2004-01-06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앗, 서른이군"이네요. 저도 십년후엔 가을산님처럼 부지런한 삶을 살고 있을거라 자위해보며...ㅎㅎㅎ. 몸은 늘 게으른데 마음만 급해서 절 언제나 괴롭히고 있습니다. 가을산님 건강하게 잘 다녀오세요. 전 지금 독감에 걸려서, 게다가 약 기운에 취해서 완전히 맛이 갔답니다.

ceylontea 2004-01-06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잘 다녀오세요... 큰 기대를 하고 맞이하는 해인데... 바쁜 일상에... 그 의미를 느껴보실 틈도 없으신 것 같네요.. ^^
저도 어제 출근해서부터.. 정신을 차릴 수도 없고.. 스트레스 팍팍 받아서... 꿈에서까지 업무 연장이고....... ㅠ.ㅜ
빨리 일이 정리가 되서 정상궤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비로그인 2004-01-06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인도에 잘 다녀 오세요...아마 음식때문에 고생좀 하시겠는데요...하지만, 꾹 참고 드세요...다 몸에 좋은 향신료니까요... 저는 그 기간에 중국에 잠시 다녀오렵니다....그리고 사십이라는 나이...남으로 부터의 유혹에서는 물론이고 자신으로부터의 유혹에서 벗어난다는 <불혹>인데....아마도 가을산님은 무늬만 사십이실것 같은데요? 건강하게 잘 다녀오세요...루피 많이 쓰지마시고요...늦었지만...생신 축하드립니다...

sooninara 2004-01-06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다녀오세요..전 서른만 넘으면 인생에는 도통하게되고 뭐든지 다알줄 알았는데..
스물이나..서른이나..마흔에 가까워져도 아직도 어릴때처럼 철없는 저를 보고 실망스러워한답니다..^^
그래도 약간의 마음의 여유가 생긴것이 어릴때보다는 나아지는것이라 자위합니다

마립간 2004-01-06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산님 덕분에 세계 사회 포럼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NGO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구가 비대해지거나 영향력이 생기면서 권력화하는 경향을 보이거든요. 이런 이야기 아세요. '천사가 악마를 이기기 위해 한참을 싸우고, 다 이긴 후에 자신을 돌아 보았더니 자신이 악마가 되어 있다.' 그리고 아마추어를 지향하던 올림픽도 과연 아마추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초심을 잃기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행 잘 다녀오십시오.
그나저나 WSF가 참가인원 75000명에 10개의 주제가 있는 forum인데, 2001년도 어떻하다가 만들어진 forum이죠. (바쁘신데 쓸데 없는 질문드려 죄송합니다. 다녀오신 다음에 여행기와 함께 답변주셔도 됩니다.)

가을산 2004-01-06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하하... 아직 생일은 안되었어요. 어쨌든 수수께끼님 고맙구요, 중국서 싸~~스 조심하세요.
* 마립간님 의견에 공감합니다. 초심을 잃지 않기가 쉽지 않죠. 하지만 우리나라ngo들은 대부분 아직도 걸음마 수준입니다 - 재정적으로도, 회원 수로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내세울만한 것은 '무대뽀 정신'일 것 같습니다. 하하...
작년에 이라크에 구호활동을 다녀온 분들을 통해 이야기를 들었는데 - 일부 단체는 저도 통화를 했는데 - 세계의 내노라 하는 구호단체들이 정작 구호활동은 시작 못하면서 책상머리에 앉아 '안전! 안전!' 을 요구하고 현지에 가지도 않으면서 현지 상황을 리포트 하고 있었답니다.
구호 사이트에 가서 '무엇이 필요한지 (volunteer, donation)' 찾아보면 '돈'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좋게 말하면 그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테고, 나쁘게 말하면 '돈이나 내고 우리가 하는 걸 지켜봐라' 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name value는 있어 기부금은 엄청 들어오지요. 회원 하나가 '국경없는 의사회' 요르단 지회 사무실에 가서 (정작 의료진은 한명도 없는데...) 사무실 바닥에 대리석이 쫘악 깔린 것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후일담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