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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문화관 우리시대의 신학총서 11
루시앙 르그랑 지음, 금빛내렴 옮김 / 살림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예배당 안과 밖의 삶이 다름에 신앙인의 고민이 있다. 아님말고. 그런데 고민의 원인을 보는 시각에 따라 개인적 이슈에 집중하는 우익이 되기도 하고 사회적 이슈에 집중하는 좌익이 되기도 하나보다. 중도 좌파를 선망하는 보수 꼴통들은 좌익도 싫고 우익도 싫기 마련인데 일단 경계선 긋기가 모호하다고 본다.

       

일단 소개는 맘에 들지 않는다. 리처드 니버의그리스도와 문화 이분법적 문화관과 동일시 하는 과감성에 짜증. 이를 뛰어 넘는다에 갸우뚱. 하지만 주변 문화의 영향들을 알기 쉽게 정리해 주고 있으며 그러한 유사성안에서 보이는 성경만의 이질성 또한 설명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주변 문화에 대한 이스라엘 대항 문화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한 배경설명 부족이 아쉽지만 그건 이책의 주제가 아니므로 통과.

 

한국에서 기독교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이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말세라 그런게 아니라 문화 적응력의 부족에 기인 한다고 본다면 문화 적응력은 무시한체 말세를 외치던 기독인들을 1000 후의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게 볼까? 특히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 문화 것이 사회 지배 계급의 기득권과 결합된 참다운 신앙이란 이름이 덧씌워져서 믿음과 성경을 오로지 가진자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편견일 뿐일 수도 있다면 심각한척 하는것 같지?

 

세속적 문화의 복잡성에 비해 기독인의문화화 매우 정의가 모호하며 정의가 내려진들 매우 빈약한 부실한 내용물로 채워져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쨋든 저자는 문화와 믿음 복합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게 뭔지 한마디로 말하기 뭐하면 이렇게 한권의 책을 쓰면 된다. ) “맥락화(contextualization) 육화 (incarnation) 사이에서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독특함을 기독교적 실존의 모든 국면에 마구잡이로 적용하게 된다면 신학적 엄밀성은 불가능하게 된다.” 하면서 이를 복합적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는건 약간 사기성있는 단순화 아닐까? 어쩌면 육화 간단 명료함은 하나님의 현시가 특정화 하고 증거 되어지므로 기독교 실존 모든 국면에 결국 적용 있다고 보면 무리일까?

 

구약의 유대문화에 미치는 가나안 문화의 영향, 그리고 예수와 갈릴리 문화, 바울과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적절한 예와 함께 제시하고 기존의 문화몰입자들의 주장을 정리 비판 하고 있다. 지상명령에만 집중하는 세태가 아쉽고 창조명령의 구체적인 적용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아주 적절한 책일듯 싶다.

 

·        -흥미있는 내용1: 저자는 주석가들이 가나안 정복에서 보이는 진멸법등의 광신적 폭력성의 표준화된 공식에 주목하여 기록이 고고학적 자료와 불일치하다는 주장도 있음을 지적하지만 굳이 동의한다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교황청에서 돈을 받아야 하는 한계일듯 싶다. 어쨋든 가나안 정복에 대한 기록이 작성된 시기는 가나안 정착기가 아니라 훨씬 후대의 기원전 7~8세기의 아시리아의 침공과 사마리아의 몰락 그리고 소왕국 유다의 무력해진 이스라엘 시대의 예언자적 운동의 저항적 분위기 (신명기에서 순환 반복되는 주문 같은 상투어들) 반영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서를 읽는 재미라고나 할까? 성경의 무오성에 길들여진 근본주의 영향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며 자라온 세대에게는 유럽에서는 또는 유럽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성경이 고고학 자료와 불일치함이 이미 상식화 되어있다는 말투는 충격적일법 하다. 하지만 이들 역시 자유주의 신학의 또다른 선입견이라고 있지는 않을까? 성경의 무오성이 아님을 밝히다가 한참 지나면 아니다 무오성이 맞네라는 말이 참신하게 들리는 학문적 분위기가 나올 있다. 학문적 분위기는 시장의 분위기나 차이가 없이 밥먹고 살려는 학자들에 의해 요동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화자너.

 

·         -흥미 있는 내용2: 아브라함, 모세등에서 보이는 떠남 (박정아의 연애사가 아니라) 믿음의 삶에 대한 은유인데 이러한 탈문화화/ 분리/exodus 회심의 시작으로 개인의 과거 경험 보다는 부르심과 여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전체적 실존의 기본적 특성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순회/유랑은 이스라엘의 근본을 이루는 여정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은 자유를 향한 부름이자 자신들의 종말론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한다 것이다. 히브리서 12장의 믿음의 조상들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믿음으로 죽은게 아니라 우리들도 세상에서는 끈임없는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타자성을 향해 부르심에 반응하며 죽을때 까지 살아가야 한다면 너무 변명스럽나? 그래도 그넘의 냄비근성 때문에 생전에 재림이 이루어질것이라는 망상 보단 멋이자너? (매일매일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하면서 기적을 바라는 자들에게는 요나의 기적밖에는…) 나이가 들면서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또는 어딘가에 도착하고 정착했어야 한다는 조바심이나 불안감이 평강을 방해할때, 문화와 세상가치로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위 영성이나 또는 가지고 있는 초라해 보이는것 같은 생각이 평강을 방해 할때, 우리가 있는 것이라곤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해 나아가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심한 자위?

 

·         -흥미 있는 내용 3: 신학적 기류는 이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있다고 한다. 볼트만 학파는 너트가 없었나봐.

 

·         -흥미 있는 내용 4: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 바리새인, 에세네파, 열심당의 영향 가능성을 정리해 주고 (관련 있다고 주장하는 넘들은 너무 문화 몰입한 넘들이란 ) 사해문서에 대해서도 맘에 들게 접근하는 블링블링한 르그랑.

 

·         -흥미 있는 내용 5: 예수님의 말씀을 볼때 (목수 관련 용어보다는 건축 관련 용어와 농업에 관한 해박한 지식등) 목수가 아니라 건축업에 종사한 소작농일 가능성이 많다는데 나도 contractor 할까나?

 

나름 멋내는 저자의 결론은 문화적 전유 (고유성 appropriation) 없이 믿음을 지각하는 것은 육화한 하나님을 모욕하는 의미가 될것이다. 그러나 예언자적 저항의 의미를 상실하는 문화적 몰입은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11:9, 23:19, 55:9)라고 하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이 것이다.”란다.

 

그러면서 좀더 구체적인 자세를 언급하며 마무리 한다.

기독교가 지나치게 서양화 되어 있다면 그것의 개선책은 셈족의 원천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더욱 충성하는 것이다. 성령은 신생문화, 하위문화, 대항문화등 모든 문화에 기독교 믿음을 더욱 개방하고 있다. 많은 목소리들을 경청해야 하는데 목소리란 유명 문화들의 영광일 수도 있고 가난한 이들의 신음일 수도 있고 지배문화에 대한 압제를 규탄하는 목소리일 있다. 이와 같이 복음의 메시지가 문화들 그리고 문화들과 마주치는 것이야 말로 성령이 성령과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이 세상에 충만하신 성령과- 만나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은 초기 교회에서 처럼 계속해서 성장하도록 부름 받은 상태인데 (6:7, 12:24, 19:20) 실상 말씀이 세상속으로 들어왔던 바로 첫날 부터 부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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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신학적 미학 우리시대의 신학총서 5
리차드 해리스 지음, 김혜련 옮김 / 살림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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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교회는 은근히 미적 요소들을 질식 시키고 있다 
-신이 아름답지 않았다면 결코 신을 믿지 못 했을 것이다. 
-치열한 창조적 고뇌가 없는 미학의 싸구려 베낌은 정형화된 죽은 미를 강요 할뿐이다. 
-미란 진리와 선과 연결되어야 한다. 즉 진리이지 못하고 선하지 못한 미학이란 왜곡된 것이다. 

등등의 꽤 도전적인 내용들로 가득찬 이 책은 그동안 한국교회를 다니면서 답답하고 지루한 이유를 영성부족에서만 찾고 이원화된 수도원 신앙과 다른것은 거의 무뇌아적으로 세속적인것으로 간주하는 싸구려 신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복음의 전파가 입으로하는 선포에만 있고
삶으로 증인이 되는것은 등한시 한다면, 
세상끝의 의미가 수치적으로 정확하게 어느 특정 종족의 몇%의 인구가 입으로 말하는 신앙고백에만 있고
일상을 살면서 작은 아이에게 냉수 한 그릇 주는것, 벽돌 하나 쌓는것, 아침 햇살 한자락에 감사 하는것등을 등한시 하거나 비웃는다면,  
냄비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지난 2000년 동안 뭐했냐며 이제 곧 종말이며 끝장을 보고 싶다면서 편협하고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신앙이 전부인줄 착각하고는
그 2000년 동안 치열하게 일상에서 녹색과 백색의 순교의 삶을 이름없이 조용히 살다간 신앙의 선조들을 무시한다면,  
그리고 대략 120년이면 누구에게나 개인적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면,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그외의 나머지 과정은 얼마든지 무모할수 있고 실수도 다 용납된다는 자기 정당화에 집착하고
아전인수격이고 유아독존적인 태도로 자기 들보는 보지 못하고 비판하는 자를 믿음부족, 기도부족으로 매도 한다면, 
그리고 지상명령이라는 구절의 "가서", "침례를 주고", "제자를 삼아", "가르쳐" 만 강조 하면서
"주님이 분부한 모든것"- 이땅에 충만하고 번성하라는 창조명령을 포함한 모든것-을 "지키게 하라"는 무시한다면, 

나중에 "주여 주여" 하는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혹시 주님을 왜곡한 부분때문에 부끄러워 하지는 않을까?
그전에 이런 책도 있다는걸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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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정치를 말하다 - 보수와 진보의 뿌리는 무엇인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손대오 옮김 / 김영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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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말 많다. 제목이 왜 "말하다"인지 알 수 있다.

한 30분의 1정도로 줄일 분량인데 한말 또 하고 한말 또하고... 입으로 먹고 사는 전형적 미국넘.

사림들의 행동양식을 자애로운 아버지의 가정 모델과 엄격한 아버지의 가정 모델 이렇게 두가지로 달랑 구분하고선 왜 사람들이 낙태, 게이, 선거, 종교, 경제, 정치에 관한 입장을 갖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황당한건 그렇다고 꼭 이 두 모델에 의해 입장이 명확히 구분 되는게 아니고 세부사항 별로 개인에 따라 각 모델을 취사 선택하는 방사형 영향을 가진다고 한다.  

나타난 현상을 두 모델중 하나에 관련시켜 장황하고 반복적으로 설명하는데 짜증난다. 프로이드의 심리학이 과학이 아니라고 비판받는 이유중 하나는 뭘 하든 "성"으로 관련시켜 풀 수 있음에 있다. 종교가 뭘 하든 "하나님의 섭리"에 갖다 붙일수 있는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걸 무슨 인지심리학인지 뭔지로 밥먹고 사는 모양. 

추천마법사란 기능으로 사봤는데 별 하나면 환불해 줘야 되는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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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복음서 - Q 복음과 기독교의 기원
버튼 맥 / 한국기독교연구소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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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Q 관련 서적을 읽었다. 금서를 본다는 스릴외에는 리처드 도킨스나 도올 같은 넘들 볼때의 무한한 인내심이 요구된다. 저자가 돈이 필요했는지 대중을 상대로 제법 알기 쉽게 Q자료에 대해 설명한다. 하지만 “틀림없다”, “치밀한 연구”, “비로서 해결”, “절대로”, “사실이다” 등등의 용어남용이 학자로서의 양심을 심히 의심케 한다. 혹시 Q자료 전문가들의 업적(?)을 낼름 대중화 시켜 돈을 벌려는 넘은 아닌지. 게다가 구체적인 각주없는 짜증나는 (실제로 읽어나 봤는지 의심가는) 참고문헌의 나열. Q 내용보다는 Q 추출과정에 관심이 있던 내가 책의 거의 끝 무렵에 읽은 “기본적 지식이 없는 일반 대중 들에게는 잘 설명할 수 없다”는 부분에선 돈 생각에 부들부들.

     어쨋든 세상학문에 눈먼넘들이 케리그마의 예수와 달리 실존하는 예수에 대한 자료를 마가와 누가를 중심으로 조사하다보니 예수의 격언집 Q를 추측하게 된다. 당연 여기엔 이적과 기사에 대한 내용, 후대에 첨부되었을 케리그마적인 요소등이 빠지고 매우 인간적인 예수의 모습이 남게 된다. 우리가 지금 일고 있는 복음서는 모두 “설화”복음서라고 주장한다. 세상 참 좋아졌다. 꾸란이 설화라든지 환자의 환상 이야기라고 주장해도 당당히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려면 중세암흑기 만큼의 시간이 또 흘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면에선 왜 도킨스 같은 또라이가 종교에 대해 흥분하는지 이해도 간다.

     예수운동을 당시 유행했던 견유학파의 한 젊은 청년의 격언집에서 시작 되었다고 보는 이 책은 Q자료의 발전 과정을 다음 4단계로 설명한다.

1단계: Q1의 견유학파의 경구집/ 재치있고 공적인 담화 형태/ 견유학파의 매력에 이끌려 개개인들이 친목단체를 결성하는 단계
2단계: Q1의 본격적인 한 그룹의 장으로서의 예수/ 단순 경구가 법적인 격언집으로 변하다
3단계: Q1과Q2의 중간단계. 본격적 예수운동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에서 오는 보다 강경하고 경고적인 선생에서 예언자로 변하는 단계
4단계: Q2 예수운동을 위한 본격적인 기원신화 만들기 단계
5단계: Q3 전쟁후에 예수운동의 초점이 다시 개인적 도덕성과 성실성으로 회귀

(참고로 Q1: 지혜의 아들 프로필--> Q2: 묵시종말론적 프로필-->Q3: 프로필자체가 전쟁 후유증으로 희미해지다)

이어서 각자의 상황과 신앙관으로 “성격이 풍기는 연설”이 유행하던 당시 시대상에 따라 복음서 저자들이 설화로 썰을 풀어 오늘날의 “설화복음서” 완성.

수긍하기 싫어서 막무가내로 동의할 수 없는 마당에 딴지나 걸고 싶은 항목들.

1. 복음서 연대는 마가를 예루살렘 함락 직후인70년이라고 하지만 그 이전의 네로 박해때인 64-67년으로도 본다는 소수의견은 언급하지도 않는다. 왜냐면 Q자료 형성 시기와 맞추어야 함으로. 학자에 따라 요한복음의 저작시기를 50-70으로 보기도 하는데 그럼 이보다 이른 마가복음은 거의 부활승천 시기에 가깝다고 주장가능. Q자료의 또다른 증거로 삼은 외경인 도마복음서의 연대기가 정확한 것인지. 발견된 종이들은 130-250년으로 저작시기를 60-140년으로 추정. 이에 비해 요한복음은 발견된 종이가 125년에 저작시기는 90-100. 이상하지??  

이건 AD 125년쯤 된거라면서 원본 저작시기는 90-100으로 본다 

 이건 AD 130-250 년쯤이라면서 원본 저작시기는 60-140으로 본다. 왜 요한복음을 60-140으로 보지 못하냐믄 그럼 마가복음은 훨씬 이전에 씌여진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 Q자료 형성시기와 잘 아다리가 않맞는 모양이다.

2. 나사렛이란 시골 외딴 마을이 무슨 당시 철학과 사상의 경연장쯤으로 만들기 위한 무리한 역사해석. 예수운동=그리스의 견유학파+유대교의 묵시종말론+헬레니즘의 밀의 종교 란 말인데 그 근거로 “가다라”란 대도시와 걸어서 하루거리란다.  

 대구서 한 20km 쯤 떨어진 청도군의 1978년 새마을 운동 당시 모습은 다음과 같다. 

 걸어서 하룻거리면 전부 대도시와 맞먹는단 주장의 근거다.

3.나사렛과 갈릴리 지방에 대한 과대해석이 계속되는데 마치 중세의 길드같은 상인연합이라든지 그리스의 문화적 공간과 로마의 세계질서의 집합장이라든지 전쟁전부터 있었던 강력한 바리새인들의 생활공간이었다는둥이다. 무슨 88년도 올림픽 광고도 아니고.  

4. 견유학파에 대한 자료는 BC 50년정도에 제한되어 있었고 사실 본격적인 유행은 로마의 흥왕과 함께한 AD100년정도인데 그렇다면 예수는 견유학파의 영향을 받은것이 아니라 견유학파의 선구자쯤이 된다. 갈릴리에서.  

 그니까 넘들이 생각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대충 이렇다???

5. 전쟁이 빈번하던 시기에 갈릴리가 전략적 요충지, 교두보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누구도 주인이라고 주장함이 없었단다. 이상하지?

6. 견유학파는 지극히 개인적 성향이 있었음에도 예수운동의 Q 공동체는 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이상해.

7. 지혜의 아들에서 예언자적 묵시종말론으로 넘어가게 되는 시기의 구분과 순서의 당위성을 장황하게 설명하지만 설일뿐 증거나 데이타는 없다. 나름 의미는 있겠지만 데이타는 없다, 이넘의 직업병.

8. 설명을 붙인 Q 구절들,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절들의 구분들은 지극히 개인적 시각과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는 구절과 반문화적인 구절들을 인위적으로 구분한다. 그리고는 스스로 낸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는 듯이 그 연결의 타당성을 이러쿵 저러쿵 (운동의 한계로 부터 오는 사회와의 격리성, 유대의 묵시 종말론적 영향등)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소설을 써라.

9. 초창기 사람들의 관심을 끌수 있었던것은 예수의 이적이 아니라 견유학파의 재치와 해학, 날카로운 시대적 격언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가정에서 기적에 관한 문구삭제에 기인한다. 즉 가정에서 기적을 제외하고는 그렇다면 인기의 원인은 격언의 스타일 이라는 거다. 그러므로 Q자료에서 기적을 제외 시킬수 있다면 이는 동의어 반복일 뿐이다.  

 이넘들이 주장하는 초창기 예수의 이미지

10. 어떻게 그럼 복음서 저자들은 대부분 베껴놓고 지가 쓴것처럼 했냐하믄 당시엔 저자의 “성격을 품은 연설”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세네가가 지적했다는 “잘 알아서 현명하게 선택하라”는 말은 저자의 의도를 잘 알고 용어등을 선택하라는 말이지 표절을 정당화하거나 권면하는 분위기라는 증거로는 불충분한듯하다.  

 2000년 전에만 태어났어도..."성격을 품은 노래"로 시비거리가 없었을 텐데?

 

     그나마 예수님의 말씀들을 모아서 한눈에 정리에 놓은 페이지나 당시 상황에 대한 보다 구체적일 수 있는 묘사등이 도움이 될 수 도 있다고 위안삼기를 강요하는 책이다. 하지만 견유학파 얘네들은 왠지 끌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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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go 2011-05-14 0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정말 오늘은 그림이 다 깨져있군!

G.Ego 2011-08-2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시기 그러니까... 제가 그 뭐냐하면...그냥 엔지니어라서 신학적으로 도움을 드리지 못합니다. 저 역시 신앙생활의 적용과 직장에서의 생활을 고민만 하는 편이라. 폴 스티븐스의 "없어져야 할 평신도-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을 추천해 드립니다. 기독교를 가장한 빨갱이 사상에도 혹시 관심이 있으시면 "뉴스앤조이"를 강추. 감사합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 우리시대의 신학총서 12
제임스 M. 로빈슨 지음, 소기천 옮김 / 살림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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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교랑 교회가 왜 분리되어 지멋대로 떠도는지 이 책을 보면 안다. 어려운 말로 떠드는 넘들을 신학교에 모아둔 것일까 아니면 신학교란 이름 아래 있게되면 괜히 어려운 말로 허세 떨게 되는걸까? 전문가란 넘들이 책을 어렵게 쓰는 이유는 대충 이렇다. 1. 자신도 뭘 떠드는지 잘 모르지만 일단 있어보일려고 2. 자기가 겨우 이해한걸 남들에게 친절히 가르쳐 주기 싫어서 3. 아무나 쉽게 이해하도록 하면 싸게 보일까봐 4. 이해한 넘들은 꼭 어려운 질문하니까 

     그니까 이 총서 씨리즈는 좀 어렵다. 2~3번 읽어서야 겨우 어렴풋이 감이 온다. 이건 순전히 내 이해력의 한계지만 이따위 책을 쓴넘들이나 팔아먹은 넘들 책임도 있는거니까 완전 잘못 이해한거면 너만 불쌍한거지 뭐.

     신학을 한다는 넘들이 고작 결론을 내린건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과 실존주의의 물결에 휩쓸렸던 무리들- 영어권은 유럽의 난해한 이야기를 잘 이해를 못한건지 무시한건지 외면한건지 어쨋든 복음주의란걸 들고 나온다. 2차 대전후 히틀러를 피해서 미국으로 온 유식한 유럽넘들을 잘 사는 미국넘들이 약간 우습게 본건 아닐까?)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는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랑 신학적 예수랑은 일치점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게 다 그 양식비평이니 하면서 복음서를 이리 쪼개보고 저리 쪼개보고 하다가 결국 복음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책 같은 객관적 증거나 신빙성이 떨어진단다. 복음서 저자는 나름대로의 신학관과 철학관으로 그냥 쭈우욱 예수에 대해 써내려 갔다는 거다. 우리들에게 주는 예수의 의미란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관점으로 써내려 갔다는 거다. 이걸 소위 "케리그마"의 예수라고 하는것 같다. 

그니까 여기 쿵 하늘에서 떨어진 우리가 믿어야할 성경책이 있다. -->고전주의  

음 그건 아닌것 같아. 좀더 우리의 머리로 파 혜쳐서 성경책이 진짜 하나님 말씀인지 알아보자 -->계몽주의 

파혜쳐 보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흔히 있으리라 생각하던 역사적 예수란 없고 신학적 서술만 (이게 케리그마란 단어와 가까운듯) 있다. 그걸 이해하는 내가 중요한거다 - 이게 한 19세기쯤? 자유주의

그래도 기존 개념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접근은 복음서의 재해석을 통해서, 새로운 고증학적 자료들을 통해서 가능하다 - 순진한 자유주의건 복음주의건 이게 다 순진한 생각이란게 저자의 생각이다.

   케리그마를 통해 나타난 예수의 역사성에의 접근은 케리그마의 관점에서 접근해야지 기존의 역사-고증학적 접근으론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이것이 새로운 역사적 예수로서 이해 가능하다고 저자는 보는듯 하다.  이제보니 실존주의에 영향받은 신전통주의 일뿐이자너? 

     저자의 입장은 인간안으로의 신의 내재성과 무지한 인간의 개선을 추구하는 자유주의 입장과 구별된다. (읽을 수록 완전 실존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신전통주의자)  신앙은 역사를 초월하는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종말론적 위기를 "지금" 만나서 실존적인 결단을 할때 의미를 갖는다는 입장인듯. 하지만 계시에 나타난 역사성 (구속사)과 경험되는 일반역사가 그렇게 쉽게 구분 가능한것인지 모르겠다. 케리그마에 나타난 역사성의 해석을 케리그마적 관점으로 이해 하는것과 전통주의 관점에서 이해 하는것의 구분이 그렇게 쉬운지 의문이다. 어쨋든 저자의 입장은 불트만이 주장했던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의 분리를 "현대적 의미의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로 화해를 시도 한듯 하다. 복음주의 입장에선 여전히 비 신앙적 태도라 하겠다. 

   그럼 현대적 의미의 역사는 기존의 역사란 어떻게 다른가? 제목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지만 혹시 보다 정확한 제목은 "새로운 정의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아닐까? 

   그 구체적 방법론이 나오나 했는데 없다. 역시 인문계 애들은 입으로만 먹고 살려는 경향이... 재주도 좋다. 그리고 내 부족한 머리로 더 헷갈린다. 도대체 비케리그마적 요소를 다시 현대적 역사개념으로 해석 하자는 것인지 케리그마안의 예수를 현대적 역사개념으로 해석하자는 것인지 그게 그 소린지... 즉 케리그마란 관점 밖의 예수란 저자에게 거의 무의미 하므로 비케리그마적 요소와 역사적 자료라고 알려진 부분들 (그게 도대체 어떤 부분인지 명백히 않보여준다. 못 보여주나?) 에 대한 케리그마와의 연관성을 다시 현대적 역사개념으로 접근해서 "새로운 역사적 예수"를 이야기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니까 결국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란 새로운 역사적 예수 탐구방법을 말하고 있는듯 하다. 이게 뭔소린지...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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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불트만, 리츨, 하르낙, 바르트, 폴 틸리히, 하이데거의 관계를 그려보고 여기다 헤겔, 슐라이마허, 에밀브루너, 라인홀드 니버까지 넣어 보면 현대신학을 대충.  

칸트의 이원론: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헤겔과 슐라이마허의 변증법적 신학: 이원론의 변증법적 화해 

헤겔: 인간의 정신-사유 (유한 너머 무한으로 운동하는 변증법적 이해)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다로 화해시도 -더 이상 신학이 아니네?

슐라이마허-인간의 직관과 절대의존의 감정이 신존재를 나타낸다로 화해시도.-자유주의 신학 

리츨-칸트의 이원론으로의 회귀? 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이 따로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과학으로 부터 신학을 지키려 했던건 아닐까? 자연신학의 잘못을 다른 차원에서 반복한듯. -완전 자유주의 신학 

하르낙-기독교는 헬라화 되는 과정으로 사도바울에 의해 예수의 가르침이 예수에 대한 종교로, 성자 하나님으로 신격화 하는 성육신 교리로 변형되었다고 주장,  복음은 각 시대마다 역사형식은 달랐지만,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케리그마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의 분리 시작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야스퍼스)- 기독교적 실존주의-주관적 계시 이해와 그리스도를 향한 실존적 믿음에 의한 전적 타자를 향한 초월 주장 

바르트- 전적 타자로 부터 오는 계시 강조: 신앙의 주관성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의 객관성을 강조. 하지만 기존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계시를 통한 실존적 믿음의 결단만을 강조하는것은 역시 자유주의로 부터 신학을 지키려고 너무 나갔다. 

불트만-양식비평, 비신화화, 실존주의, 존재규정.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의 분리-리츨이네?

     여기서 자유주의 신학이 극단적인 인간 중심의 신학(?) 이라고 해도 "내가 없으면 신도 없다"란 개념은 설득력이 있는듯. 물론 내가 없어져도 신이 존재 하겠지만 내가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겠으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란 생각은 결국 다 인본주의. 실존주의. 자유주의등 으로 부터 어떤 경로로 든지 영향받았다 하겠다. 어쨋든 저자의 입장은 불트만이 주장했던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의 분리를 "현대적 의미의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로 화해를 시도 한듯 하다. 복음주의 입장에선 여전히 비 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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