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amo]티아모 더블망스텐거품기0.5
Tiamo
평점 :
절판


적립금으로 평소 탐나서 구경만 하던 거품기를 구입했다.

사실 예전에도 건전지 넣어서 사용하는 스틱형 거품기를 구입한적이 있었는데. 원하는 거품의 질감도 나오지 않거니와 양도 적고. 커피 한잔 즐기려다가 짜증만 난 적이 있었다.

카푸치노의 계피향을 좋아해서 늘 전문점에 가서야 즐기던 것을  이젠 집에서 즐기에 되어 행복해졌다.

0.5L 라서 너무 작은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되었지만 직접 타보니 기우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남편과 둘이서  즐기기에 양이 좀 남는다.

질이 좋은 스텐레스라서 일단 맘에 든다.

환경호르몬 걱정이 없으니까. 그리고 eletric wamer 위에 직접 데우기도 좋다.

손님 접대하는 것도 아니고 해서 집에선 우유를 전자렌지에 데워서 만들었는데. 만족스럽다.

청소하기도 용이하고  단 금액이 좀 비싸서 늘 망설였는데. 이렇게 알라딘 적립금으로 구입하니 괜히 공짜로 얻은듯한 느낌을 감출 수 없어 웃음이 난다.

무엇보다 거품이 끝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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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정치] 서평단 알림
하나님의 정치 (양장) - 기독교와 정치에 관한 새로운 비전
짐 월리스 지음, 정성묵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단에 채택되어 읽게 된 귀한 책이다

하나. 생각 열기

장로 대통령, 장로 경찰청장, 집사 서울교육감 또는 “고소영”라인으로 회자되는 오늘의 정치, 사회 상황과 보수우파를 자처하며 구국을 이야기 하는 시민단체(?) 뉴라이트의 대표적 인물들의 기독교와의 밀접한 관계성을 볼 때, 이땅에서 기독교가 갖고 있는 시대적 가치와 세는 하나의 아이콘을 넘어선 그 무엇이다. 이런 한국의 시대적 상황에서 기독교, 기독교 정치(정치인), 기독교적 영역과 삶이 과연 하나님의 관점에서 성경적인지 대해 기독교 내부에서 조차 많은 말들이 있고 합당치 못한 것에 대한 강한 주장이 있다.

오로지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 매도하고 매도 당하는 비논리적이고, 비성경적인 모습에 대해 고민함이 없이 오히려 약자를 배려함이 없는 독선적인 주장으로 “개독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반쪽의 현실을 보면, 마땅히 윤리적이고 성경적이어야 하는 설득력 있는 전제와 해석들, 나아가 대안적 패러다임 제시가 절실한 시점인 것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집단(한나라당, 민주당, 기타 정당)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그의 일을 맡기기 위해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의 신앙이 개인의 사적 영역에만 머물러 있어 시대가 안은 문제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에겐 공적영역으로 나아가는 ‘온전한’ 제자로서의 삶을 위한 더 깊은 회심이 필요하다.

짐 월리스의 ‘하나님의 정치’는 바로 이런 우리의 상황에서 나와야 할 마땅한 책인데 그러지 못한 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무엇보다도, 단순한 구호나 주장, 사상의 전파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정치’를 구체적 사례와 정책 제시-가난과 질병, 환경, 전쟁이 왜 성경적인 문제인지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냄으로서 성경적 가치를 실현하는 ‘가치 논쟁’으로 이끌어 낸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자 장점이리라.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는 선지자 미가의 예언적 소명을 가장 강대한 미국의 사회와 정치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재해석해내고, 이를 운동으로 풀어가는 그의 소명이 놀랍고 부럽기도 하며, 이 책의 진정성을 돋보이게 하고 있기도 하다.

복음적 좌파 또는 보수 급진주의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책에서 빈곤, 환경, 전쟁, 진실, 인권, 테러, 일관된 생명 윤리를 ‘예수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와 자비 안에서 온전히 주장하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실증적 사례를 보여 줌으로서 경쟁과 우월함이 미덕으로 강조되는 왜곡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기독인들에게 성경적 가치의 삶을 대안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비전과 정치”를 세상의 도덕적 가치 안에 풀어내고자 예언적 삶을 살아가는 저자의 복음 제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편에 서서” 노예해방을 남북전쟁으로 풀어간 에이브라함 링컨과 “한 손에 성경을, 또 다른 한 손에 헌법을” 들고 흑인 공민권운동을 비폭력운동으로 풀어낸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앞서 살아간 예언자적 삶이 저자의 피에 동일 유전자처럼 반복되어 열매 맺는 것을 볼 때 시대의 암흑과 죄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

미국의 이런 영적 유산 가운데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작은 것이라도 진실 되게 보도하는 언론의 사명이다. 언론이 정직해져야 한다. 언론이 예언자적 소명을 가지고 시대의 문제를 통찰할 때 비록 작은 운동이라도 하나님의 편에 진실 되게 서 있는 영적 소수가 시대적 암흑을 깨뜨리며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하나님은 공화당원도 민주당원도 아니고,” “개인적이지만, 사적이지는 않기에” 우리에게는 절망이 아닌 희망이 있다. 연약하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 사회의 각 영역에서 일어나기를, 무엇보다도 정치적으로 쟁점이 되는 문제들을 성경적 이슈로 이끌어 나갈 영향력 있는 공동체가 우리 안에 일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둘. 생각의 내용 쌓기

1부 바람의 방향을 바꾸라

“개인적 신앙은 그 누구도 훔쳐갈 수 없다. 문제는 정치적 영역이다. 특히 공적 삶 속에서 성경적인 믿음을 되찾아야 할 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국가를 초월하며 크리스천에게는 국가 정체성보다 신앙 정체성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 말씀처럼 예수님이 서 있던 자리가 어딘지를 보라.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저자는 종교의 예언자적 사명을 중시하면서 사회를 바꾸려면,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흑인 공민권법 통과를 위해 온 미국인의 관심을 한 군데로 모으고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국민의 그러한 관심사에 따르도록 한 것처럼, 정치인이 아니라 ‘바람’을 바꾸고, 담론을 바꾸고,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배경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패러다임 속에서 바람은 신앙적 ‘비전’없이는 바뀔 수 없다. “비전이(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해지나니~.” 비전의 정치는 다름 아닌 가치를 중요시하는 정치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공적 문제들을 두려움이 아닌 예언자적, 민주주의적 비전으로 풀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개인적이지만 사적이지는 않다.”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정치가 아닌 하나님의 뜻(공익)이 이뤄지는 정치가 구약의 선지자들의 외침처럼 일어나야 한다. 개인의 구원을 통해 사회적 공익을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정의, 곧 예언자적 종교의 소명을 정치에서 이루어내는 ‘하나님의 정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2부 불평의 정치를 넘어서

논쟁의 틀을 바꾸기 위해서 저항에서 대안으로 나아가야 한다. 생명의 소중함과 신성함 속에서 전쟁과 평화, 정의와 불의의 문제를 보아야 한다. 편협한 신앙, 불의, 경멸, 냉담, 폭력을 없앨 수 있다는 희망. 심판으로 시작했으나 변화의 희망, 창조적 대안으로 끝맺음을 한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기억하라.

빈곤과 전쟁의 문제에서 “신학과 영성만이 가난한 사람들과 전쟁 희생자들을 구할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과 빈곤의 문제에 제 3의 길은 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해 보자.

공적인 삶에서 정치는 종교를 이용하는 종교근본주의와 종교를 배격하는 세속근본주의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정치로 회복되어야 한다. “권력은 부패하지만 권력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 진실의 힘은 우리사회의 중요한 가치와 방향에 관해 예언자적 양심과 도덕적 신념을 회복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민주주의를 포함하는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가치들로 돌아가자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예언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밝히는 것이다. 모든 가치를 따져 투표하라.” 도덕적(성경적) 가치 속에서 정치, 경제, 문화를 통합할 수 있다. 좌와 우의 낡은 선택적 사고가 아닌 도덕적으로  ‘더 높은 기반’으로 올라가서 공적 삶 속에서 하나님의 가치를, 지혜를 보여주는 새로운 길을 가야 할 때이다.


3부 영적가치와 국제관계

“예수가 언제부터 전쟁 옹호론자였는가?”라는 명제아래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정치적 이해하기보다는 영적, 신학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의 해결을 위해 교회가, 크리스천이 이 문제의 본질을 놓치지 말고 통찰할 것을 요구한다. 전쟁의 기본적 틀로 “평화주의, 정당전쟁, 그리고 십자군”을 놓고, 가능한 전쟁으로 정당전쟁을 이야기 한다. 이해관계가 실질적 권력이 되고 있는 현실을 놓고 볼 때, 평화주의와 정당전쟁을 넘어서는 제 4의 길이 있다고 제안한다. 성경적이며, 평화주의와 정당전쟁의 이해를 넘어서는 “정당한 평화정착”을 주장하는 것이다. 마치 십자가를 통해 이 땅의 왕이 오셨듯이.

이의 연장선상에서 테러문제를 - 9.11 테러의 원인을 아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빈곤’과 ‘절망’이 테러의 직접적 사유는 아니더라도 테러를 잉태하는 ‘습지’이므로 빈곤과 절망을 바르게 대처하는 것이 테러에 대한 바른 영적 태도이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대량살상무기라는 거짓된 이유로 이라크 전쟁을 벌인 부시 정권에 대해 사상자수에 주목하며 치명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부당한 전쟁으로 인해 거대 기업에 감면혜택을 주고 정작 지원이 필요한 소외 계층에 필요한 예산은 삭감하고 있는 잘못을 통렬히 공박하고 있다.

 


4부 영적가치와 경제정의

“이데올로기 전쟁 중에 저소득층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모두의 희생 제물이 된다. 언론의 관심은 실질적인 해결이 아니라 그 문제를 둘러싼 다툼에 있다.”

“가난은 ‘좌파’의 이슈가 아니라 영적이면 종교적인 이슈다. 인식의 문제가 아닌 내용의 문제로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모두의 지혜와 열정이 필요하다.”

저자의 관심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주제가 ‘빈곤’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마태복음 25장의 예와 미국의 빈곤의 구체적 통계수치를 들어가며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가 예수님에 대한 배려이며 이러한 관점으로 ‘빈곤’을 전면적인 이슈로 이끌어 내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 미국의 아동들 6명당 한 명 꼴로 빈곤(1천 3백만 명), 빈곤 한계에 처한 미국인들의 수가 3천 6백만 명, 의료보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4천 5백만(이 중에 어린이가 8백 4십만 명)...” 참으로 미국인들에게는 부끄럽고 이방인들에겐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빈곤문제에 관한 이런 사실적, 성경적 접근으로 현재의 미국 정치를 비판하며 보다 근원적이고 신학적인(영적이고 성경적인) 대책을 세울 것을 강조하고 있다. 덧붙여 세금 논쟁에 관한 균형 잡히고 성경적인 대책을 수립하여 가난한 자들에 대해 제도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접근할 것을 주장한다.

 


5부 영적가치와 사회적 이슈

낙태, 안락사, 사형제도, 핵무기, 빈곤, 인종 차별 같은 ‘생명쟁점들’은 하나의 일관된 생명 윤리로 “이음새 없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통째로 짠 옷”과 같다는 시카고의 조지프 버나딘 추기경의 말을 인용하며, 오늘날 미국이 있기까지의 ‘미국의 원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미국의 원죄는 우리나라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미국에서 노예제도와 그 이후에 발생한 흑인에 대한 차별은 대단히 심각한 불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국가적 회개와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 엄청난 죄에 대해 ‘사과하는 것’도 대단히 심각한 논쟁을 불러 왔을 뿐이다.”

저자는 공화당과 민주당 양 정당이 미국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인종차별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보다는 흑백차별을 당연시 하거나 이용해 왔다고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 히스패닉계와 아시아계가 섞여 일어나는 혼합되고 복잡해진 인종갈등의 양상을 구체적이고도 철저하게 영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 “인종차별은 복음과 그리스도의 화해사역의 핵심을 부정한다.” 서로 분리된 사람을 화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목적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일로 보면서, 문제해결의 열쇠는 백인들에게 있고, 흑인들에게는 용서와 화해의 책임과 역할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양자가 만나서 정직하게 현실을 대면하고,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 놓는 것, 그것이 진정한 화해를 위한 중요한 첫 걸음이다.”


6부. 영적가치와 사회변화

“신앙인들에게는 어떤 상황에서도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다. 우리의 관계, 일, 공동체, 심지어 미국의 역사에서도 변화는 언제나 진짜 가능하다. 이것이 믿음의 약속이다. 하지만 나쁜 종교, 위험한 종교의 해법은 세속주의가 아니라 좋은 종교다. 그리고 종교 우파에 맞서기 위한 최상의 종교는 예언자적 신앙이다. 바로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종교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시각으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것의 무지막지한 오류를 적시하며 하나님의 공의로 사회적 변혁을 이루어 가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정치 현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보수와 기독교가 동일시되어 미국적 신앙뿐만 아니라 미국의 오도된 정치지형까지 받아들인 우리 기독교보수계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세상을 현실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냉소주의자와 성자뿐일 것이다. 냉소주의자와 성자의 유일한 차이는 희망이다. 희망은 현존이며, 힘이며, 가능성이다. 그리고 참으로 영적 종교적 이슈다. 우리는 순진한 바람이 아니라 세상의 현실을 정확히 읽는 눈으로 희망을 선택해야 한다. 신앙이 문제가 될 때는 지적 논쟁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실제 삶이다.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표현하라. 신학 세미나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는 바로 구치소다!”

치열한 삶의 한 가운데 ‘희망’이라는 이름의 믿음이 표현되어야 하고, 신앙과 정치에 대한 예언자적 삶이 진보의 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운동가들이 쉽게 놓칠 수 있는 삶의 여유, 즉 치열함을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을 다음과 같이 부드럽게 가르쳐 주고 있다. “내가 오랫동안 사회 운동을 벌이면서 배운 교훈 중 하나는 세상을 바꾸려고 분주히 애쓰는 가운데서도 그 세상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균형 잡힌 삶, 그리고 희망찬 삶을 살려면 꾸준히 즐기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셋. 삶 속으로 영역 확장하기

공적 영역에서의 공의와 정의를 약자를 배려함은 전혀 없이 자신의 입맛으로만 해석하고 주장하여 수많은 사회적 정치적 국민적 갈등과 대립의 축이 되는, 자신을 보수로 치장한 근본주의 신앙과 삶의 양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할 수 없고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다. 이 책에서 이 부분을 짐 월리스는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부시와 네오콘들 그리고 그들의 9.11 이후의 정책을 예로 잘못된 테러와의 전쟁을 축을 삼아 날카롭게 설파하고 있다. 오히려 그보다는 기아와 질병 등 빈곤의 문제와 생명경시의 정책을 비판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정의와 평화의 밑바탕이 되도록 신학과 영성을 강조한다. 부시의 예처럼 신앙의 진정성은 있으나 나쁜 신학에 물들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대선 이후 지금의 우리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모든 것을 좌파와 우파의 논리로 보고 해석하며 대책을 세우는 이원론적 흑백 정치 시스템을 보면 저자가 새로운 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하는 “하나님의 정치,” 곧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실존적이고 가장 실용적인 문제 분석틀이 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혹 우리도 내가 하는 것만 ’선‘이고 성서적이며, 상대편이 하면 ’악‘이고 비성경적이라는 나쁜 신학에 물들어 있는 건 아닐까.

우리 내부에도 메워야 할 깊은 웅덩이들이 산적해 있다. 양극화로 대변되는 빈곤과 부의 축적 문제, 질병에 대한 국민건강보험 시스템, 토지(아파트)로 상징되는 정당한 소유를 넘어선 탐욕의 자본주의, 인종적 차별에 준하는 지역감정의 구조화 등 이런 문제는 예수님이 보는 기준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며, 이 책의 저자, 월리스가 주장하는 좌와 우를 넘어선 "하나님의 정치"를 대안적으로 성찰해 볼 수 있는 지점이다. 내가 하면 옳고 상대방이 하면 틀리는 이분법적 사고와 오도된 법과 원칙의 준수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문제이다.


무엇보다, 진정으로 이 책이 도움이 되는 지점은 ‘통일’의 문제가 아닐까. 우리에게 통일은 좌의 통일도 우의 통일도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눈먼 자, 병든 자, 억업 받는 자가 고침을 받고 자유케 되어야 하는 영적이고도 실존적인 문제이다. 그런 통일이 필요할 뿐이다.  

통일의 문제는 이념과 빈곤이 결합되어 최악의 차별을 낳는 악의 문제일 수 있다. 어느 한 쪽을 낙인찍어 차별을 고착화 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어 가는 정치가 아니다. 월리스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치"가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에 대한 깊은 성찰 때문이 아닐까. 좌와 우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의 지평으로는 실존적 문제인 빈곤과 차별의 고착화를 담아낼 수 없다. 성경에서 말하는 심장이 박동하는 실천적 기독교인이 나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언자적 삶으로 정치를, 사회문제를, 그리고 통일 정책을 다룰 때 하나님 편에서 일하는 우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육의 문제가 있다. 교원평가로 대표되는 교육개혁과 자율학교 확대로 상징되는  공교육체제의 교육개방, 이 속에 숨어 있는 하나의 고리는 '경쟁'이다. 무한 경쟁으로 대변되는 이 시대, 교육을 약자에 대한 배려보다 수월성과 경쟁위주의 논리로 풀어가는 것에 대해 기독인들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지금 거세게 부는 교육의 회오리 속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자리할 수 있는 위치는 어디인가? 하나님의 정치가 이 땅의 공기를 부드럽게 하여 들이쉬기에 편안하게 한다면, 우리 공교육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가치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 인권과 자유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교육'이어야 할 것이다. 교육에 있어 무엇이 성경적인지 치열하게 돌아볼 때다.

 


넷. 생각 마치기

“성경으로 돌아가자.” 그것도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본질로 들어가자.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와 미가 선지자, 그리고 예수님처럼!

빈곤과 전쟁, 독선적 무력정책, 배려 없는 정치, 인간이 상품화 되어 가치가 무의미한 이 시대, 성경적 본질을 놓치지 않고 정책과 글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며, 새로운 논리적 지평을 열어가는 저자의 삶과 능력에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을 몸으로 읽어내며, 예언자적 통찰력과 삶으로 시대의 문제를 끌어 안은 기독실천운동가 짐 월리스와 그의 책을 우리가 지속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좌파와 우파의 이분법적 사고에 젖어 있는 한국정치와 그 안에 몸담고 있는 기독한국인들에게 성경을 삶으로 읽고 사회, 역사적 맥락에서 풀어갈 것을 도전하는 참으로 시원 통쾌하고 유의미한 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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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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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첫 표지에는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 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라고 나와있다.                                                                                   처음 책을 펴봤을 때 부터 재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되 책장을 넘겨 보았다.

보통이야기와는 달리 처음 시작할 때에는 사람들이 아주 다른 말을 쓰던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이라고 나와 있다. 그리고 이책의 매력은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이야기와 마을, 집, 거리 의 이름이 아주 괴상하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옛날  도시들이 세워져 있을 때에는 크고 화려한 도시들이 세워져 있었다. 거기에는  왕이 사는 궁전이 우뚝 서 있고, 넓은 도로와 좁은 길과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있었다. 황금과 대리석으로 조각된 신의 상이 서있는 웅장한 사원도 있고, 세계 곳곳의 왕국에서 들여온 온갖 다채로운 물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시장도 있었으며, 사람들이 새로운 일을 이야기하고, 연설을 하거나 듣기 위해 모였던 넓고 아름다운 광장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기에는 극장이 있었다. 그 극장들은 오늘날의 서커스 장(?)과 비슷하지만, 커다란 돌로만 지어져 있다는 점은 달랐다. 관객이 앉는 좌석은 거대한 깔때기 처럼 겹겹이 계단식으로 꾸며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 극장들은 둥그런 원 모양도 있고..

여기 까지만 읽어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 상상이 간다. 그 후로 수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옛날의 커다란 도시들은 몰락했고, 사원과 궁전들은 무너져 버렸다. 비바람과 추위와 뜨거운 햇볕으로, 돌덩이들은 깍이고 구멍이 뚫렸다. 커다란극장들도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폐허만이 남았다.

하지만 오늘날(?) 까지 큰 도시로 남아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물론 그 안의 삶은 아주 딴판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동차와 전철을 타고 다니고, 전화와 전등을 쓴다. 하지만 새 건물들 사이에는 아직도 군데군데 둥근 기둥들, 성문, 무너지 담모퉁이 한 자락, 저 옛날의 원형극장 터가 남아 있다. 바로 그런 도시에서 모모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그 즈음에 이폐허는 거의 잊혀져 잇었다. 원형극장 터를 알고 있는 사람은 가까운 이수 마을 사람들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 사이에 요즘 들어 누군가가 극장 터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린아이, 아마도 어린 소녀인 것 같다는 얘기였다. 모모의 모습은 약간 이상했다. 깔끔함과 단정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조금 놀랄 정도였다. 키는 작았고, 대단한 말라깽이였다. 그래서 아무리 자세히 봐도 겨우 여덟 살짜린지, 아니면 벌써 열두 살이 된 소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은 호기심이 생겨 그 원형극장으로 가보게 된다. 어느 날 점심 무렵에 근처에 사는 몇몇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모모를 찾아와 이것저것 캐물었다. 모모는 내쫓길까봐 걱정이 되어 마주 서서 불안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모모는 곧 그들이 친절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역시 가난하고,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 이었던 것이다. 모모는 여러 질문을 받고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는 그들은 모모가 살고 있는 반쯤 허물어진 집을 깨끗이 치우고 수리했다. 모모를 찾아온 마을 사람 중에는  미장이도 있었다. 미장이는 돌로 조그만 난로를 지어 주고, 그 위에 녹슨 연통까지 달아 주었다. 나이 든 목수 할아버지는 널빤지 몇 장을 모아 와서 조그만 책상 하나와 의자 두개를 만들어 주었다. 부인들은 낡았지만 멋진 소용돌이 장식이 달린 쇠 침대와 조금 찢어진 매트리스 한 개, 담요 두 장을 갖고 왔다. 또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미장이는 벽에다 예쁜 꽃그림을 그린 다음, 액자와 그림을 거는 못까지 그려주었다. 그런데 못을 그려 봤자 무슨 소용인가?  그린건데.. 그리고 마을 아이들은 모모를 위해 일부러 남긴 음식을 들고 찾아왔다. 어떤 아이는 치즈 한 조각을, 어떤 아이는 작은 빵 조각을, 또 다른 아이는 과일을.. 그 때부터 모모의 형편은 좋아졌다.

그렇게 친절한 사람들을 만난 것은 모모에게는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긴 모모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마을 사람 역시 얼마 안 가서 모모를 만난 것이 커다란 행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모모는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 나중에는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 버리지 않을까 걱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모모의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게 되엇다. 모모 곁에는 언제나 누군가가 앉아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모모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모모에게 가보게!" 아무튼 이 말은 인근 마을 사람들이 으레 하는 일상어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럴까? 이유는 모모의 다른 사람의 말을 아주 잘 들어 주는 재주였다. 모모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주 사려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끔 귀기울여 들을 줄 알았다. 상대방이 그런 생각을 하게끔 무슨 말이나 질문을 해서가 아니었다. 모모는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관심을 갖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을 분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도 깜짝 놀랄 만큼 지혜로운 생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모모의 친구들 중 가깝게 느껴지는 친구는 말없는 노인과, 말을 잘 하는 청년 이다. 노인이름은 배포였고, 청년 이름은 기롤라모 였다. 그런데 마을사람에게는 기기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 세사람 중 자신들의 우정에 곧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지리라는 것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우정 뿐만이 아니라 마을 전체에 어둠이 드리워진다.  

마을에 회색신사들이 돌아 다니기 시작 한다. 그들을 설명하자면 그들의 무리는 많고 다 대머리이고, 시가를 물고 다닌다. 그들의 비밀은 시가가 없으면 죽는 다는 것이다. 시가가 하는 역할은 그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먹고 산다. 아 참! 그리고 모두 검은 서류 가방을 들고 다닌다. 그 가방에는 수첩 담배를 가득 들고 다닌다. 왜냐하면 시가를 다쓰기 전에 바꿔야 되기때문이다. 그들은 시가를 입에서 때기만 해도 바로 사라지기 때문에 시가를 아주 꽉 물고 있다. 그 회색 신사들은 점점 불어나고 마을 전체를 돌아다니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도 몰랐다. 그들은 본 사람의 그 시간을 먹는다. 그래서 보고도 금세 잊어 버렸다.

이제 이사람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기기의 변화를 보도록 하자. 모모는 날이가면 갈수록 기기에게는 중요한 존재가 된다. 모모의 곁에 있으면 누구나 그렇듯이 이야기를 잘 하게 되지만, 기기는 원래 잘하는 편이였다. 하지만 모모가 있기 전에는 신문에 나온 말을 빌리거나 그럴듯한 생각이 않나왔다. 하지만 모모 곁에 있으면 이야기를 잘하게 된달까..

이 책에서는 기기의 이야기가 날개를 얻었다고 표현한다. 어쨌든 기기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이제 몇날 며칠 동안 이어지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기발한 착상이 샘물처럼 솟아나왔다. 그 이야기를 한번 들어 보기로 하자.

존경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듯이 슈트라파치아 아우구스티나 여왕은 비겁한 부들부들 족의 끊임없는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또 한번 부들부들 족의 공격을 물리친 여왕은 끊임없이 귀찮게 구는 이들의 공격에 몹시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부들부들 족의 왕에게 황금으로 변하는 금붕어를 내놓지 않으면 몰살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왕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황금으로 변하는 금붕어는 숨기고 고래를 보낸다. 여왕은  고래 보느라고 나랏일을 게을리하자 부들부들 족은 그때 나라를 차지한다.

이야기가 끝나고 한 사람이 미심 쩍어 하며 그 모든 일은 언제 일어 난거냐고 묻는다. 기기는 고대의 유명한 철학자 노이오지우스가 살았던 시대에 일어났다고한다.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은 자기가 고대의 유명한 철학자 노이오지우스가 어느 때 사람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사람은 이렇게만 말했다.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ㅋㅋ 정말 웃긴다. 

이제 회색신사들이 한 일을 보자. 

일단 회색 신사들은 이발사 푸지씨의 모습을 변화 시켰다. 푸지 씨는 원래 자기 일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비가 오는데 푸지씨는 이런 생각을 가졌다. 내인생은 실패작이야..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회색 신사 한 명이 나회색 차를 타고 이발소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발소에 들어와 거울이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회색 신사는 모두 대머리니.. ㅋㅋ 이발사 푸지씨는 자신을 호되게 나무라고 갑자기 추워진 것 같아서 이발소 문을 닫는다. 회색신사는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앉겠어요. 나는 시간 저축 은행에서  나왔습니다. "영업사원 XYQ 384 b 호입니다. 우리 은행에 구좌를 개설하고 싶어하신다고 알고 있는데요." 푸지씨는 점점 당황하며 말했다. 금시초문인데요. 솔직히 말해서 그런 기관이 있는지도 몰랐는 걸요."  회색신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군요. 이제 아시게 될겁니다."

허걱 회색신사 성격을 생각해보면 자기 말만 하는 엉터리 같다. 그리고 이 회색신사는 자기 은행에 저축 하라며 말을 끊는 등 맞긴 맞지만 결과는 틀린 계산으로 상대방을 지치게 한다. 결국 푸지씨는 그 속임수 에 걸려 그 엉터리 은행에게 시간을 수락한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그날 첫 손님이 찾아왔다. 푸지 씨는 무뚝뚝하게 손님의 시중을 들며 불필요한 모든 것을 생략했다.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때부터 모든 손님께 그렇게 대했다. 하지만 그는 일을 하면서 조금도 기쁨을 못느꼇다.

제 7장 제목은 이렇다. 모모는 친구들을 찾아가고, 한 명의 적이 모모를 찾아오다. 정말 모모는 친구가 줄어든 이유를 알기 위해 친구들을 모두 찾아간다. 모두 오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못오거나 않오거나 온다. 친구들 말을 들어보니 다 시간이 없다고 한다. 세상이 변해서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친구들을 만나주고 나서는 예전대로 산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 시간을 다른데 쓸 수 있었다.

회색신사들에게는 사업에 방해되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모모는 특별한 인형을 줍게 된다. 젊은 숙녀나 아니면 진열장의 마네킹 같았다. 모모는 인형을 손으로 살짝 만져 보았다. 그러자 인형은 눈을 깜빡깜빡 하더니 말을 한다.

"안녕, 난 비비 걸이야. 완전한 인형이야."  모모는 처음에 놀라 뒤로 물러서지만 갖고 논다. 하지만 인형은 똑같은 말만 해댄다. 결국 억지로 인형에게서 시선을 떼낸다. 그러자 회색신사가 서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회색신사는 인형 같고 노는 법을 알려준다. 그러면서 트렁크에서 온갖것을 꺼내 인형에게 준다.(거의 던진다)그러면서 말한다. 이걸 천천히 몽땅주마. 그러니 계속 놀기만 하면 되는 거야. 어린아이에게 좀 심각한 말이다. 하지만 모모는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회색신사는 성급하게 덧붙인다. 그럼 넌 더 이상 친구들이 필요 없는 거야.

모모는 싸움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 아니 벌써 싸움의 한가운데에 휘말려 들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회색 방문객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조금 전 인형의 말을 듣고 있을 때와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을 하는 목소리와 단어는 들었지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회색신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도대체 왜 그래, 응? 요즘 애들은 정말 까다롭다니까!

모모는.. 그 인형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정말 멋진 말이다. 회색신사는.. 그건 중요한 게 아냐." 모모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사실 모모는 이 남자가 무서웠다. 특히 그의 시선에서 뿜어나오는 냉기가 무서웠다. 하지만, 이유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웬지 이 남자가 불쌍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지만 전 제 친구들을 사랑하는데요.

와우 회색신사는 얼굴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다시 미소를 지으며  얘기를 나눠 보자고 한다. 그의 말을 들으며 모모는 어떤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는 것보다 훨씬 힘이 들었다. 보통 때 같으면 마음속으로 살며시 들어가, 그 사람 이 어떤 사람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낼 수 있었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시간 저축은행에서 나왔다. 난 영업사원 ~~~~ 다. 나중에 결국 모모는 마음을 읽는다.

신사는 튄다. 나중에 기기와 베포가 온다. 모모의 말을 듣고는 친구를 모아 시위를 한다. 그러나 회색신사 외에는 보지 않는다. 모모는 그 이후로 아이들과 못만난다. 어느 날 거북이가 모모 앞에 나타난다. 그 거북이름은 카시오페이아다 .모모는 카시오페이아에게 말을 걸어본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북의 등에 대답이 나타난다. 따라오라는 것이다. 계속 따라간다. 회색신사들은 모모를 찾지만 미래를 볼줄 아는 거북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아무데도 없는 거리, 아무데도 없는 집에 도착해 호라 박사를 만난다.

그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로 모모는 빠져들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나는 이책을 읽고 내생애 지금 까지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추천하는 바이다.

이 책을 읽은 후에 다시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읽어볼수록 신비해진다. 무한상상이 가능한 이책! 정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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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반양장) 사계절 1318 문고 2
로버트 뉴턴 펙 지음, 김옥수 옮김 / 사계절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로버트네 집은 농부네 집이었다. 산등성이에 있는 집에서 산다.

참 좋은 이웃들과 산다. 4월 어느 날 로버트는 학교에 있어야했다. 로버트는 학교에서 에드워드 새처에게 놀림을 받아 중간에 학교에서 도망친다. 말콤 선생님이 시작종을 울릴 즈음에는 벌써 집까지 절반쯤 온 상태였다.

그때 로버트 펙은 갑자기 날카로운 소리를 듣게 된다.

젖소 한 마리가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이웃에 사는 태너 아저씨의 커다란 홀스타인 젖소였다. 아저씨는 그 소를 ‘행주치마’라고 불렀다.

온몸이 검디검은데, 앞다리까지 이어진 가슴과 목 부분만큼은 하얀 것이 마치 깨끗한 행주치마를 두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때 행주치마는 새끼를 낳으려는 중 이었다. 푹 주저앉은 앞다리에는 피가 흥건했고 입에는 걸쭉한 연녹색 거품이 부글부글 일고 있었다. 로버트 펙은 손을 뻗어 행주치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다. 하지만 행주치마는 핏발 선 무서운 눈으로 거친 숨을 씩씩 내뿜었다. 행주치마가 몸통을 돌리자 잔뜩 부풀어오른 궁둥이가 보였다.

궁둥이를 들썩일 때마다 하늘 높이 휘어져 올라간 꼬리가 허공을 휙휙 갈랐다. 송아지 머리와 발굽 하나가 궁둥이 밖으로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피와 양수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송아지가 음매 하고 울었다.

행주치마가 덤불을 뚫고 내달렸다. 그러다가 행주치마는 다시 멈추더니 온몸에 힘을 주었다. 로버트는 달려가서 송아지 머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하지만 머리에 끈적끈적한 것이 너무 많이 묻어 있는데다가 행주치마가 몸을 심하게 흔들어서 제대로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몸무게가 46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열두 살짜리 꼬마가 족히 460킬로그램이 넘는 행주치마 몸에서 새끼를 잡아 빼낸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로버트가 잡고 있던 송아지 목을 놓치며 고꾸라지자, 행주치마가 발굽으로 로버트의 정강이뼈를 여지없이 걷어찼다. 정말 아팠다. 송아지가 다시 음매 하고 울었다. 로버트는  간신히 일어나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줄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직접 만들어야 했다. 길이가 길지는 않아도 되지만 튼튼해야 했다.

덤불에 앉아 바지를 벗은 다음 행주치마 머리에 바지를 묶었다. 로버트가 뒤에서 무슨 꿍꿍이를 벌인다고 생각했는지 행주치마는 다시 달리기 시작 하였다.

행주치마가 한 발짝씩 움직일때마다 로버트의 발가벗은 궁둥이와 불알에 가시가 박혔다. 나중에는 행주치마를 나무에 묶었다. 결국 바지가 찟어졌다. 그리고 송아지가 나와 로버트를 덮치고 행주치마도 쓰러진다. 그리고 로버트는 행주치마의 입속에 있는 혹을 떼려 손을 입에 넣었다가 물리는 바람에 팔이 찢어져 피를 흘린다.

나는 이책을 읽고 오랜만에 재밌게 볼 만한 책이 생겼다고 생각 했다. 왜냐하면 새끼낳는 장면이  생생하게 표현되고, 또 흥미진진한 내용이 함께 어우러져 나온다. 그래서 2 편'하늘 어딘가에 우리집을 묻던날'도 읽었다.

12살 -규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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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그린비 출판사 견학'과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의 저자 이권우씨와의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는데 감사하게도 응모에 당첨되어 규환이와 예선이를 데리고 다녀왔다.

미리 책을 사서 읽어보고 갔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해서 그린비 출판사 인터넷 싸이트로 들어가서 대략 살펴보고 갔다.

출판사는 새로 이사해서 그런지 아주 깔끔했다.  상상했던 것 보다  크기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일하시는 분들이 처음 보는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래전부터 봤던 분들처럼 친절하고  상냥하셨다. 

그린비 출판사는   Greenbee 의 뜻도 있지만  그리운 선비라는 순 우리말 뜻도 있다고 한다. 후자의 이름이 훨씬 멋있다.  인상적인 것은 사무실에 걸려있는 사진 한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할아버지의 웃음이 너무 순수해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모두 이겨내고 달관한 달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환희

이권우씨도 처음으로 뵙는 경우인데도 불구하고 옆집 아저씨처럼 푸근하신 분 같았다.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두시간가량을 질문마다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셔서 좋은 시간이 되었다.

모두들 하신 질문들도  내가 하고 싶었던 질문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호기심도 충족되었고, 갈급함도 해갈되었다.

가령   책을 집필하게 된 목적, 다독과 정독, 책을 평론하면서 느끼는 어려움과 주의점. 가장 아끼는 책, 고전의 중요성, 독서 토론의 장점, 행복한 책읽기. 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개인적으론 아이들을 둘씩이나 데리고 가서  그곳에 초청되어 오신분들과는 달리 엄마의 본능에 충실하다 보니  질문의 방향이 아이들 중심이라 미안하기도 했지만  책을 많이 읽지 못하는 나로서도  책읽기에 열심을 품을수 있는 도전의식이 충전되는 귀한 시간이었다.

뭔가 살만큼 살아야 이해가 되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난 책이란는 도구를 이용해서 아이들이 뭔가를 좀 더 많이  좀 더 빨리 알기를 바라는 엄마가 아닌지.. 돌아보는 시간도 되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오신 분들중에서 6학년 선생님이 계셨는데, 처음엔 딸아이 둘의 어머닌줄 알았다.  하지만  같은 반 학생 둘을 데리고 오신것을 보고 많이 감동되었다. 분명 가정이 있는 분이실텐데.. 퇴근후 쉬시지도 않고. 학생들을 데리고 참석하신 것을 보니 열성이 대단하신분 같았다.

난 남편이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학교교육에 불신이 많은 편인데. 그런 선생님을 만나면 아이들이 행복하게 생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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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자와 독자가 만나는 공간, 출판사
    from 도서출판 그린비 2008-10-23 10:44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 독자 초대 이벤트 후기10월 16일, 그린비에서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책소개 바로가기)의 저자, 이권우 선생님과 독자분들의 만남이 있었습니다.이권우 선생님의 책들이 꽂혀있는 서가도 정리하고 독자분들게 드릴 선물과 다과를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손님맞이를 했답니다. 7시 30분부터 시작된 행사는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까지 이어졌습니다.그 생생한 현장을 함께 느껴 보실까요? ^^스무 분 정도의 독자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