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화보러 가요!”

예나 지금이나 영화는 가장 만만한 데이트 코스, 어두운 곳에 나란히 앉아 같은 걸 보고 있노라면 보다 친밀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리턴 어때요? 평이 좋던데...”

내가 공포영화를 고른 건 무서운 와중에 손이라도 잡아볼까 하는 사악한 마음이었다. 사실 공포영화를 보는 남녀 중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일본의 심리학자인 마쓰이 히데키에 의하면 여자끼리 공포영화를 봤을 때 여자가 놀라는 횟수보다 남녀가 봤을 때 여자가 놀라는 횟수가 4.7배 더 많다고 한다. 마쓰이 씨는 이 결과를 토대로 “남녀가 껴안을 수 있는 공포영화 100선”이란 책을 저술하기도 했는데, 그가 <리턴>을 봤다면 아마도 ‘101선’으로 제목을 고쳐 달았을 거다.


한국에서 공포영화는 안된다고 생각했었다. 여고괴담 1, 2 등 일부 성공작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공포영화는 대개가 관객들보단 배우들만 놀라는 이상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리턴>은 달랐다.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와서가 아니라 사건이 벌어지기 전의 긴장감이 시종 내 새가슴을 압도했다.


하지만 난 영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언제 어떻게 손을 잡아보나 너구리님의 하얀 손만 훔쳐봤을 뿐이었다. 별로 무섭지도 않은데 덥석 손을 잡아 버리면 내가 치한이 되버릴테고, 내가 먼저 잡는 것도 바람직한 건 아니었기에 난 제발 좀 무서운 장면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영화 시작 후 22분만에 ‘그것’이 왔다.

“꺄악!” 소프라노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너구리님이 내 팔에 매달렸다. 너구리님의 아로마향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나는 살짝 그쪽으로 몸을 기댐으로써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뭐든지 처음 한번이 어렵다. 남녀관계에서는 특히 그렇다. 어영부영이지만 팔짱을 한번 끼고 나자 너구리님과 나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너구리님은 수시로 내 팔짱을 꼈고, 나중에 난 별 장면도 아닌데 “으아!” 소리를 지름으로써 괜한 팔짱을 끼게 만들기도 했다. 숨막히는 공포가 이어지는 마지막 15분, 너구리님은 시종 내 팔에 매달려 있음으로써 날 흐뭇하게 만들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자리를 뜰 즈음에도 난 너구리님과 팔짱을 끼고 있었다.


“어머!”

너구리님이 갑자기 팔을 뺀 건 불이 켜지고 몇 초가량 지났을 때였다. 너구리님은 “다음엔 뭐 볼까요?”라고 딴전을 피웠지만, 적당히 살이 오른 내 팔에 만족하는 듯했다. 지금까진 소극적이었지만 이제부턴 적극성이 필요할 때, 메가박스를 나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난 슬그머니 너구리님의 손을 잡았다. 너구리님은 아무 일 없는 듯 하던 얘기를 계속했다.

“미스터 빈의 홀리데이도 보고 싶고요, 아 참 만남의 광장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전 다섯글자로 된 영화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우아한 세계’ ‘댄서의 순정’ ‘화려한 휴가’ ‘록키 발보아’....

영화를 무섭게 만들어준 <리턴> 관계자분에 감사드린다.


댓글(12) 먼댓글(2)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착각의 시작
    from Love Conquers All 2007-08-12 20:58 
    지난주 어느날 핸드폰이 울렸다. '부리리리~부리리리~'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전화번호.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너구리님이시죠? 저 부립니다!" 이런, 받지말았어야 했는데. "네, 안녕하세요" "아, 제가 영화제작사로부터 영화표를 받아서 같이 갈까 해서 전화를 했습니다" "아니, 뭐. 친구도 많으신데요 뭘 저에게까지 전화를 주시고..." &qu
  2. 위기의 시작
    from 지구온난화방지위원회 2007-08-13 20:08 
    영화관람 이후 부리와 너구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불과 한 달 뒤, 두 사람은 어느덧 하루라도 얼굴을 안 보면 견딜 수 없는 정도까지 진전된 것이다. 전화통화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30통 넘게 이어져 각자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오늘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근데 부리씨, 의대 교수면은 엄청 바쁠텐데 가만 보면 시간이 너무 많은 것 같애. 혹시 땡땡이 치는 거 아니야? 호호호.&qu
 
 
Mephistopheles 2007-08-12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쓰이 심리학자는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뉴욕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연구한다고 하긴 하죠...그나저나 너구리님과 함께 식사라도 해보심이 어떠실지요..분명 모든 음식을 두 팔로 씻어서 드실 것 같은데 말이죠...^^

프레이야 2007-08-12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여인의 향기도 다섯자에요. 너굴님이 아마 좋아하실듯.. ㅋㅋ
사실 어제 이거 또 봤거든요..
리턴! 재미난가봐요. 보고싶어요^^

Kitty 2007-08-1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실사판 로맨틱 코미디같아요. 너무 재미있게 읽고있어요~~~~ㅋㅋㅋ

Mephistopheles 2007-08-12 18:25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지독한 난독증...실사판 로맨틱을 "살사판 로맨틱"으로 잘못 읽고 너구리님과 반짝반짝 댄스복을 입고 화려하게 "살사"를 추는 부리님을 상상했지 뭡니까....(그런데...제법 재미있는 그림이 나와요 우히히히)

nada 2007-08-12 21:51   좋아요 0 | URL
ㅉㅉ 이젠 노안이 오시는구랴.=3=3

근데 "적당히 살이 오른 내 팔에 만족"이라니.
다음 호에선 부리님 팔이 뜯기는 건가요? >.<

2007-08-12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2 2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8-1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험... 이거 이거 뭔가 냄새가 나는데... 소설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니... 근질근질

비로그인 2007-08-13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적당히 살이 오른 내팔"에서
닭다리를 상상했습니다.

2007-08-13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13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7-08-17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감사드려요 제가 더 잘해야 할텐데... 그리 멀리 이사가셨다니 갑자기 서운... 미녀들은 왜 다 제게서 멀어지는 걸까요...^^
민서님/많이 배고프시군요
아프님/130부 중 겨우 10편 정도가 연재되었을 뿐...앞으로 많이 남았습니다^^
속삭님/저얼대 아니죠
꽃양배추님/살이 오른 팔은 경배의 대상이지 뜯어먹기 위함이 아니옵니다^^
메피님/님은 난독증 맞아요! 에로 버젼으로!^^
키티님/더 좋은 글을 위해 더 좋은 연애를 하겠다는 저의 멋진 포부...^^
혜경님/원래 울나라 영화제목은 다섯글자가 많답니다 '의'를 가운데 넣고 뭐뭐의 뭐뭐, 이러면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나요... 리턴 그래도 볼만했어요
메피님/너구리님과 식사를 하면 가슴이 벅차서 고기한점 집어먹을 수가 없답니다^^ 마쓰이 학자를 아시는 걸 보니 님도 철학이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