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무리한 나머지 몸이 가루가 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잠을 잘 잔 것도 아닌 것이, 꿈 속에서 난데없이 전직 메이져리거 최희섭이 나타나 날 괴롭혔기 때문이다. 현실이라고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나만 보면 밥을 먹으라고 열댓번씩 권하는 할머니가 날 세차례나 깨우셨고, 아침부터 걸려온 두통의 전화가 그나마의 잠을 방해했다. 겨우 눈을 뜨긴 했지만 제 컨디션은 분명 아니었다.

“학교를 가긴 가야 할텐데...”

난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하늘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발단은 같이 일하는 연구원에게 털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였다. 병아리 때문에 연방 기침을 해대던 그분은 날이 따뜻해진 걸 계기로 병아리들을 베란다 밖으로 내몰았다. 그게 목요일이었다. 금요일은 날씨가 아주 화창해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토요일 아침부터 비가 오자 슬슬 걱정이 되었다.

‘박스 안으로 비가 들이치면 어쩌지? 애들이 추울 텐데, 얼어죽지나 않을까?’

전날 주긴 했지만, 마실 물이 있는지도 걱정이었다. 가긴 가야겠지만 몸 상태를 보니 도무지 내키지가 않았다. 4주만에 내 방 인터넷을 개통시킨 기념으로 글을 한편 쓴 뒤 난 긴 잠에 빠져들었다.


잠은 보약이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난 나는-이번엔 꿈에서 날 괴롭히는 이가 없었다-할머니와 더불어 설렁탕으로 저녁을 떼운 뒤 천안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버스에서 듣자니 내일 아침 기온이 10도밖에 안된단다. 가려고 마음먹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베란다로 뛰어갔다. 괜한 걱정이었다. 병아리들은 아주 잘 있었다. 전등을 켜놓아서 그런지 추워하는 기색도 없었다. 더러워진 신문지를 갈아줬다. 물을 줬더니 우르르 몰려들어 마신다. 어느덧 2주가 지나 제법 날개짓도 하지만, 물 마실 때 한모금 먹고 하늘을 보는 건 여전했다. 병아리 몇 마리를 쓰다듬었더니 따스한 체온이 그대로 전달된다. 이렇게 예쁜 애들이 나중에 닭이 되는구나. 확실히 대부분의 동물은 어릴 적이 더 예쁘다. 어릴 때도 여전히 못생겼던 나는 예외지만.


다음주, 아니면 다다음 주면 또 어디선가 기생충을 구해와 저 병아리들에게 먹이겠지. 그리고 나서 이틀마다 병아리들을 죽일 것이다.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가 아닌, 내 승진에 필요한 논문점수를 위해서. 이런 거 말고, 좀 생명을 존중하는 우아한 실험은 없는지 머리를 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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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7-05-13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아리 하면 왠지 봄과 너무 잘 어울리지요. 개나리때 쫑쫑쫑! ㅎㅎ

조선인 2007-05-13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생출 실험은 병아리로 하는가 보군요. 에구.

2007-05-13 1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꼬마요정 2007-05-1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명을 존중하는 우아한 실험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물론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제가 아는 사람은 어릴 때 학교 앞에서 파는 병아리 한 마리 사다가 잘 키웠대요. 쥐가 병아리 다리 물고 가는 거 구해주고 빨간약도 발라주고 해서 예쁘게 키웠다가 닭이 된 뒤 잡아먹었다는..흑흑 (근데 이 얘기가 왜 나왔지..^^;;)

다락방 2007-05-13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넥스트의 노래가 생각나서, 혹시 얄리의 이야기일까 싶어서, 부랴부랴 달려와 읽었어요. 그런데 체온이 전달되는 이야기로군요.

그런데요 부리님, 기생충을 병아리들에게 먹이는것도 궁극적으로는 생명을 존중하기 위함, 아닌가요?

어제는 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제법 쨍쨍한 날씨네요. 기운내세요!

무스탕 2007-05-13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에 최희섭이 나타나서 피곤해 죽겠는데 테니스 치자고 하던가요? ^^
그리고요.. 병아리는 못 날아요... 다 커서 닭되도 못 날아요...

부리 2007-05-14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스탕님/그래도 통 갈아주려고 할 땐 열심히 날개짓 하더이다 있잖아요 떨어질 때 좀 늦게 떨어지는 것도 나는 거 아닐까요^^
다락방님/글쎄요 생명을 존중하기 위함이라.... 그게 아닌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ㅠㅠ
꼬마요정님/제가 말만 그렇지 실제로 하는 건 남들하고 비슷하죠...글구 다 큰 병아리, 아니 닭은 정말 잡아먹는 거 말고는 쓸데가 없는 걸까요...
속삭님/어머 제 마음 아시면서.... 더 이뻐지심 제가 쳐다도 못볼까 걱정됩니다
조선인님/꼭 그런건 아니지만 그래야 할 때가 가끔 있답니다 조류를 써야 한다면 청둥오리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전호인님/아 네 맞습니다 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동물은...병아리죠! 겨울에서 봄이 되는 건 개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