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개강 후 4주만에 처음으로

미자가 한주를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소화한 주였다.

난 미자와 미자 친구에게 점심을 사주며 노고를 치하했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일렀다.

밤 9시까지 해부학 실습을 해야 하는 어제,

다섯시쯤 미자로부터 문자가 왔다.

서울집에 가고 싶단다.

내 방으로 불렀다.

미자는 그저 무섭다며, 눈물을 쏟았다.

실습실의 시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다른 애들과 경쟁하면서

뭔가를 찾아서 봐야 한다는 게 무서운 모양이다.

같이 코코아를 마시면서 내가 어떻게 할지를 생각했다.

“이따가 나랑 같이 들어가요.”


인체 도감도를 수시로 확인하고

희미하기 짝이 없는 20년 전 기억을 되살리며

그리고 내가 들어온 걸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학생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가면서

나와 미자는 다리에 있는 근육과 신경, 그리고 혈관을 공부했다.

“제 지도학생입니다. 잘 부탁해요.”라며

그들보다 두 살 많은 미자를 인사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가르쳐 주는 건 자기 공부가 돼서인지

학생들은, 우리 질문에 적극적으로 답변해 주었다.

그 결과 나마저도 다리에 있는 대부분의 근육을 알게 되었고

다다음주 있을 실습 시험을 보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이제 그만 정리해 주세요.”라는 과대표의 말이 들렸을 땐

벌써 9시가 다 되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월요일에 있을 생화학시험에 대비해 도서관에 갔지만

미자에게 그것까지 바라는 건 무리였다.

미자는 이번주 충분히 수고했다.

그러고보니 나도, 미자도 밥을 안먹었다.

미자가 학교 앞 원룸에 가고 나서

편의점에 들어가 라면에 햇반을 사서 연구실에 와 끓여먹었다.

내 일은 하나도 못했지만 그래도 보람 있는 하루긴 했다.


내가 어제 스케줄이 있어서 서울에 가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평소 안하던 연구를 시작해 정신이 없는데

내가 언제까지 미자를 도와 줄 수 있을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 죽겠다”는 미자,

그와 함께 걸어가야 할 4년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봐야지.

라꾸라꾸에 누워 책을 보다가, 몇 줄 못읽고 잠이 들었다.

시체에서 옮긴 포르말린 냄새 탓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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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7-03-17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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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흐... 아침밥 먹는 중인데.. 저런 제가 1착으로 댓글 다는 거네요. 사죄의 의미로다가 앞으로 잘 할께요...^^;;;

개강해서 간만에 강의 들을려니 과목마다 뇌그림에 신경구조에.... 그것만 봐도 머리에 쥐나고 있는데 의대생들 힘들겠단 생각이 들어요.

미자도 미자지만 마태님 몸도 잘 챙기삼.. 즐건 하루~


마노아 2007-03-17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자 학생은 정말 든든한 스승이자 후원자, 벗을 만난 거네요. 넘 대단해요. 화이팅입니다!

무스탕 2007-03-1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완전 내편을 만난다는게 살아가면서 얼마나 큰 힘이 된다는걸 미자 학생이 알았으면 좋겠네요.
부리님. 멋진 스승님이세요!

마법천자문 2007-03-17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알바 자리 구하는데요. 해부학 실습에 실습 재료 역할 해주면 얼마 정도 받을 수 있나요? 그리고 실습 끝나면 확실하게 다시 꼬매 주시는 거죠? 그 부분이 좀 불안한데...

비로그인 2007-03-17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 리뷰 됐다고 잘난 척 하러왔다가...
이건 뭐- 마이 리뷰 당선보다 더한 감동을 받고 돌아갑니다.

먼 훗날 미자-가 미녀 의사샘이 되어서
- 부리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제가 없었겠죠 ^^
라고 어딘가에 자랑스럽게 인터뷰를 할 날이 오길 기대합니다.

비타민이나 박카스 필요하심 보내드릴게요 :)

깐따삐야 2007-03-1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 죽겠다"는 미자의 말을 들으니, "앞으로도 부리님이 계속 저렇게 미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 죽겠다"는 생각만 듭니다. 어쨌든 힘내시기 바래요...

moonnight 2007-03-17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생이 스스로 일어서야 할텐데, 걱정스럽네요. 언제까지나 부리님이 도와줄 수는 없는 일인데. 저라면 그렇게 개인적인 희생까지 감내하며 도와주진 못할 거에요. 미자학생은 정말 행운아로군요.

마늘빵 2007-03-1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미자님이 부럽군요.

수퍼겜보이 2007-03-18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미자님은 의사가 되고 싶은 게 맞을까요? 언제가 되어야 부리님 없이도 학교에 다닐 수 있을지 좀 걱정이네요.

BRINY 2007-03-18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다른 사정이 있다는 건 이해하겠는데...정말 언제까지나 저렇게 지낸다는 것도 참...

부리 2007-03-2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니님/강적입니다... 어제밤에도 서울로 도망쳐서 오늘 안왔다는...
수퍼겜보이님/한두달에 해결되리라 생각한 건 아니어요 이번학기만 넘기면 좀 되지 않을까요...
아프락사스님/미자도...... 마음고생이 많을 거예요..
달밤님/교육자로서 제 자질을 알아볼 수 있는 계기일 수도 있죠...언제 만나주실 건가요?
깐따삐야님/감사합니다 힘 낼께요 오늘도 미자가 도망쳐서 서울서 있어요..ㅠㅠ
고양이님/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한 보람이 있어야 할텐데.....ㅠㅠ
달의눈물님/해부학 재료는 살아있는 사람 쓰면 안되는데요...ㅠㅠ 마음만 받겠어요
무스탕님/미자가 잘 졸업해야 멋진 스승이란 말을 할 수 있을 듯...지금은 아직 멀었3
마노아님/근데 워낙 강적이라서 말입니다... 제가 더 노력해야죠...
해적님/일등 감사드립니다. 저도 님한테 좀 잘해야 할텐데요...그렇게 많이 받고 드리는 게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