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학생은 내 지도학생이 되었다.
그 말은 곧, 내 다른 지도학생들이 그 여학생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란 얘기다.
가뜩이나 남자들만 있어서 “여학생도 받아요!”를 외치던 우리 애들 아닌가.
오늘 그 학생과 점심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친구 데려와도 되요.”란 내 문자에 그녀는 좋아했고
우리 셋은 비바람을 뚫고 학교 앞 중국집에 갔고
늘 그렇듯이 배가 터지게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내가 했던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걔네만 듣기 아까운지라
여기 올린다.
여학생의 친구가 쟁반짜장을 한 젓갈 집더니 입을 열었다.
“본과 오니까 갑자기 하고 싶은 게 많아져요. 이것도 하고 싶고...”
“그건 말이죠,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시험 때면 유난히 하늘이 아름답잖아요. 우린 시험 끝나면 뭘 하겠다 이러면서 그때의 고통을 이겨내죠. 희망이라는 거, 이거만 끝나면 아름다운 세상이 올거라는 거, 그건 어떤 힘든 일도 이겨내게 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난 이때쯤 이미 내 말에 도취되었다.
“아버님이 한 삼년간 병원에 누워만 계신 적이 있어요. 병원에 가면 정말 신음소리밖에 안내시는 아버님을 봐야 했죠. 그때 우리에겐 아무런 즐거움이 없었어요. 명절이고 일요일이고, 우린 병원에 가야 했으니깐요. 초반엔 금방 퇴원하시겠지 이랬는데 점점 희망이 없어지고, 나중엔 짜증스럽더라고요. 왠지 아세요? 그 고통이 언제 끝나는지를 모르니까.”
“만약 하느님이 ‘너희 아버님은 2001년 12월 21일에 돌아가신다’고 미리 말씀해주셨다면, 전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정말 지성으로 아버님을 모실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3년이 아니라 5년이라도요. 끝을 모르는 힘듦, 그건 정말 견디기 어려웠어요. 아버님을 많이 미워했지요. 그래서 그럴 거예요. 아버님 돌아가시고 나서 사흘동안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미안해서요...”
“본과 생활이 아무리 힘들다지만, 그건 끝이 있는 고통이어요. 겨우 4년밖에 안되는데다, 그 중간중간에 방학도 있고, 즐거운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졸업하고 인턴 되면 힘들다고 하지만, 걔네들 알고보면 놀 거 다 놀아요. 본과 생활과는 비교도 안 되고요. 레지던트도 마찬가지예요...”
얘기가 끝났을 때 난 배가 너무 불러 버렸고, 내 얘길 듣던 학생들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우린 그 맛있는 쟁반짜장을 3분의 1 가량 남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