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 
 
 
 연재의 변

우리, 쉴 만큼 쉬었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천학비재하기 짝이 없는 필자가 이번 호부터 월간 『말』의 연재를 맡게 되었고, 그 주제는 세상에나(!), ‘새로운 진보 이념의 지평을 찾아서’라는 엄청난 것이어서 첫회부터 쥐구멍이 그립다. 그런 주제에 왜 시작하기로 했을까. 물론 『말』지 편집장의 고도의 최면술(?)도 주효했지만, ‘더 쉬었다가는 우리들 팔다리, 머리, 허리 다 굳는다. 누구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세상은 인간이 바꾸며, 인간은 행동으로 바꾼다. 그 행동은 그의 생각에서 나온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하나이며 동일한 과정의 세 국면에 불과하다. 만약 그 세 가지가 떨어지게 되면 생각도 제대로 된 생각이 아니요, 행동도 제 정신 가진 행동이 아니요, 세상의 변혁도 사이비 변혁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회만 썩고 정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들의 삶 또한 권태와 허무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10년 쉬었으면 충분하다. 이제 우리들이 1990년대 상황에서 엉겁결에 내걸었던 ‘진보’라는 말의 내용을 채우고, 그와 동시에 집단적인 실천과 고민을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일어나자고 깨우러 다니는 소리는 꼭 아름답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오히려 신경 거슬리게 꽥꽥거려서 ‘저 놈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만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야말로 효과만점이다. 필자가 앞으로 쓸 글이 ‘무식한 놈이 헛소리를 하는구나. 진보는 그런 것이 아니다’는 경멸 어린 논쟁을 불러일으킨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 나서서 몸으로 때울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러면 이 연재가 앞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방법과 방향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진보’라는 말의 뜻부터 살펴보겠다.

진보. 영어로는 progress.
앞으로(pro) 나아간다(gress)는 말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 ‘앞으로’는 어느 방향인가. 혹시 ‘역사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발전한다’는 ‘유물사관’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말인가. 그렇다면 ‘진보적’이라는 말은 그 내용에 있어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이란 뜻이며 단지 완곡 어법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수구우익의 ‘빨갱이들의 위장 전술’이라는 비방도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진보’라는 용어는 서양의 전통


사실 이 진보라는 관념은 서양 문명의 독특한 ‘직선적 역사관’에서 파생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어째서 신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냐’는 현실의 모순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직선적 역사관을 꺼내든다. 인간의 역사는 창조-타락-구원의 역사적 과정을 밟아 ‘진보’하는 것이 ‘발전법칙’이란 것이다. 그래서 비록 지금 이 세상에 부조리와 악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종국에 가서는 신의 뜻이 땅에도 이루어지게 될 날이 온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서양 사상에 계속 따라붙게 되는, ‘역사는 신의 섭리(Providence)가 실현되는 진보의 역사이다’는 관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기에도 이 ‘직선적 역사관’이라는 사고방식은 계속된다. 단지 신의 섭리라는 구닥다리 용어가 ‘이성의 실현’이라고 옷만 바꾸어 입었을 뿐. 칸트는 ‘이성의 보편적 실현’으로 나아가는 것이 세계사의 발전 법칙이라고 분명히 선포하며, 다른 면에서는 칸트의 적수였던 헤겔도 이 점에 있어서는 한술 더 떠 아예 세계사를 샅샅이 뒤져 어떻게 이성이 발전해 왔는지까지 늘어놓는다. 그 결과 그리스와 게르만의 세계는 페르시아와 중국에 비해서 훨씬 더 ‘진보’된 사회라는 판단기준까지 나오게 된다. 19세기 산업혁명의 시대에 들어서 그 ‘이성의 실현’이라는 것이 다시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물질적 옷으로 바꾸어 입기는 했지만, 이 직선적 역사관 및 진보의 관념이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에 고스란히 내려와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결국 이 ‘진보’라는 말에는 아주 기묘한 전제들과 사고방식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역사는 어떤 초월적인 섭리에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진보’라는 사회정치철학의 정당성도 거기서 나온다. 그 발전 방향에 맞추어 부응하는 것만이 인간과 사회가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러한 서양적 전통의 진보주의는 비상한 힘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엄청난 양의 논리와 자료를 퍼부어 대면서 ‘이렇게 가는 게 신과 역사의 뜻’이라는데 감히 뭐라 할 것인가. 그러한 믿음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는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속에서 행복과 생명을 희생한 수많은 이들의 존재가 증명한다.

그런데 이 논리는 ‘믿지 않은 자들’의 손에 걸리면 숱한 맹점을 노출하게 된다.
첫째, ‘보수주의자’들의 경우이다. 역사가 그렇게 신의 뜻을 향해 일직선으로 간다고 치자. 그렇다면 현존하는 사회질서 또한 그러한 ‘신의 섭리’가 만들어낸 것이니, 거기에도 신성하고 소중한 것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어째서 그 ‘입만 놀리는 진보주의자’들의 논리와 주장에만 신의 뜻이 있다는 것인가. 기성체제의 합리성을 더 살리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러한 보수주의자들이 나타나서 목청을 세우게 되면, 진보주의는 이제 ‘신의 섭리의 선지자’라는 절대적 위치를 상실하고, 보수주의의 상대적 개념으로 왜소하게 되고 만다.

더 골치 아픈 일이 있다. 그 ‘역사발전 법칙’이란 것 자체가 현실에 영 맞아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판명나 버린다면?

비장했던 진보의 외침은 순식간에 우스꽝스런 코미디가 되어버린다. 공산주의의 현실과 몰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린 1990년대 이후 이제 과연 그 ‘법칙으로서의 진보’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보수주의자들은 드디어 파리떼처럼 일제히 날아올라 ‘현존하는 세상은 역사의 완성이다. 더 이상의 진보란 없다’고 왱왱거리기 시작한다.

유물사관도 믿지 않으면서 진보주의를 신봉하고 있다면,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어디로 진보하자는 것인가?”


‘progress’가 아닌 ‘進步’


그런데 우리가 이 직선적인 역사관이라는 서양인들의 독특한 풍습에 기대어 진보를 정의해야 한다는 무슨 법이 있는가? ‘유럽 안의 비유럽’인 사르디니아 섬에서 나온 촌놈 안토니오 그람시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 역사발전 법칙이라는 유령 대신 그는 ‘해방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에 기대어 진보의 길을 찾아나간다.

어려울 것 하나 없다. 인간이 인간다운 모습과 삶을 회복하기 위해 움직이고 생각하려는 의지는 무슨 시간에 따라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 어느 시기에나 동일하게 발견되는 인간의 본질이다. 그래서 그는 1910년대에 쓴 어느 논문에서 마르크스주의자, 자코뱅, 토마스 뮌처, 스파르타쿠스 등을 동일한 시간 지평에 함께 놓고 논하고 있다.

칼 폴라니도 동일한 생각을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많은 것들은 시장 자본주의와 동전의 양면으로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신분사회에서 우리에게 직업이란 거의 세습으로 주어졌으므로, 시장 자본주의의 ‘계약적 고용관계’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직업선택의 자유’라는 것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노동시장의 출현은 동시에 가혹한 착취, 고용의 불안정, 대량 실업 같은 끔찍한 재난을 낳기도 했다. 여기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이에크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재난을 ‘자유를 위한 대가’로 감수하라고 강요한다. 한편 나치 등의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반대로 자유를 포기하고 중세 때나 마찬가지의 국가통제의 노동조직으로 되돌아가자고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직업선택의 자유와 안정된 노동조건이라는 것은 모두 옷과 밥만큼이나 소중한 것들이 아닌가. 옷을 취하면 밥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 왜 둘 다 취할 수 없단 말인가. 직업선택인 자유를 움켜쥐고서 우리 노동조건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폴라니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무슨 ‘역사발전의 마지막 단계’ 따위가 아니다. 그러한 새로운 실험을 위해서 사람들이 끌어안고 같이 용감하게 미래로 ‘발걸음을 떼어 놓는’ 사회를 말한다.

필자는 그래서 그러한 의미를 잘 드러내는 ‘진보(進步)’라는 한자어를 훨씬 좋아한다. 이 progress가 아닌 ‘進步’는 보수주의의 상대 개념이 아니라 보수를 그야말로 ‘지양’(Aufhebung : 포함하면서 초월한다는 뜻)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존 체제의 가치 있는 것들이 수구세력의 잇속으로 인해 변질되고 왜곡되는 것을 막고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결합하여 발전시키는 진정한 ‘보수’는 오로지 진보세력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생 고되게 일해온 힘없는 노인들을 굶주리도록 방치하는 이 사회의 지배세력이 무슨 낯짝으로 ‘유교적 전통’을 떠든단 말인가. 분단과 반공으로 배를 불린 자들이 어떻게 ‘민족’과 ‘자유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는가. ‘유교적 전통’ ‘민족’ ‘자유 민주주의’에 소중히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이제 오롯이 진보세력의 몫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보’는 ‘보수’와 동렬에 놓고 고르는 취향과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하는 자라면 마땅히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당위가 된다. 이제 ‘신의 섭리’가 아닌 ‘인간된 가치’라는 새로운 바탕 위에서, 진보는 다시 우리의 지상명령이 된다. 진보에 거스르는 자들은 더 이상 ‘보수주의’라는 그럴 듯한 이름 뒤로 숨지 못할 것이다. 진보의 반대말은 이제 ‘보수’가 아닌 ‘퇴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적 가치’란 휴머니즘인가


이렇게 ‘역사의 발전 법칙’ 대신 ‘인간적 가치의 확보’라는 화두를 내걸었으니 이제 ‘진보’라는 이념의 위기는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도대체 그 인간적 가치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는 질문이 바로 이어지게 되며,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진보란 그저 막연한 휴머니즘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 ‘막연한 휴머니즘’ 정도로는 안 될까? 진보진영을 자처하는 일군의 ‘논객’들의 주장처럼, 그저 진보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 정도로 해두어도 불합리한 현실을 ‘비판’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안 됐지만 충분하지 못하다. 그런 ‘논리적 비판’ 수준으로는 진보진영이 정치세력으로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갈파한 대로, ‘비판’이라는 것은 단지 ‘현실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논리적 모순을 낳게 된 현실의 구조를 해명하고 그 현실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진보 진영이 그런 의미에서의 비판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논객’ 집단이 아닌 현실 정치세력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진보진영의 이념과 내용이 정치세력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면, 어떤 가치와 어떤 이념으로 어떤 현실 변혁의 청사진과 계획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답을 줄 정도의 구체적이고 적극적(positive)인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모호한 ‘상식’ 수준의 내용으로 어떻게 정치 세력화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과연 ‘현실의 근본적 변혁’이 그것으로 가능할까? 여기에는 ‘대안적 인간적 가치에 기반한 대안적 사회의 상’이라는 포괄적이고도 체계적인 내용이 필수적이다. 즉 ‘상식’은커녕 ‘상식을 비판할 수 있는 가치와 세계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 논객들의 ‘상식’은 사실 그들이 속하는 계층의 특이한 사고방식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그 내용도 서양 비판적 지식사회의 최신 유행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가 지적했듯이, 1968년 혁명 이후 서구 지식사회에서 나온 담론들 중 자유주의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 있었던가. 따지고 보면 ‘자유주의 좌파’정도에 불과한, 그야말로 기성 질서 내에서의 ‘상식’적인 이야기들이 아니었던가.


소수 지식인들의 ‘댄디즘’을 넘어서


결국 진보이념이 소수 지식인들의 댄디즘을 넘어 대중 정치운동의 이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간적 가치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 밖에는 길이 없다.

그런데 ‘인간적 가치의 구체적 내용’이라니. 보통 심오하고 커다란 질문이 아니라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예수님, 부처님 같은 성인들이 아니고서는 감히 건드려 볼 엄두도 안 난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지나치게 추상적인 인간학이나 윤리학으로 빠져드는 것을 피하고 사회 변혁의 이념과 방법이라는 현실적 맥락을 놓지 않으면서 이 질문에 접근하는 방법은 없을까. 다음에 이어서 살펴볼 문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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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15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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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기업이 지배하는 과두지배국가
- 촘스키 강연을 듣고 -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장상환

내가 현재 교환교수로 나와 있는 매사추세츠대학에서 지난 2월 24일(화요일)에 MIT 언어학과 노엄 촘스키 교수 초청 강연이 있었다. 촘스키 교수는 현재 75세인데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3시부터 5시까지는 PERI(Political Economy Research Institute)의 고든 홀에서 제한된 청중 약 100명을 대상으로 "워싱턴 컨센서스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촘스키는 미국은 소수의 엘리트가 공적 기구를 지배하고 있는 과두지배국가라고 비판했다. 대학의 역할은 관리인을 양성하는 것으로 전락했고, 기업의 역할은 선전(propaganda)을 통해 국민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대통령 후보를 포함한 주요 공직 후보 또한 기업과 매스 미디어에 의해 용의주도하게 훈련되고 만들어진다(designed)고 말했다.

그는 17세기 영국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지주계급인 기사와 신흥자산가층인 신사들이 노동자의 정치적 요구를 반대하고 농민과 서민을 직접 지배했는데 현재의 미국도 이와 유사하다고 했다. 이들은 사유재산권을 옹호하는데 이것은 헌법 정신과 민주주의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업적 봉건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산업 민주주의에 모두 위배되며, 이러한 회사 대기업에 의한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와 맞지 않는다고 했다.

촘스키는 과거에는 급진적인 언론들이 다수 존재했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이제 거대 언론은 기업을 위한 선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기업과 매스 미디어는 민중들이 민주주의가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믿도록 하면서 실은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신념을 지배하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홍보와 고객관리(public relations)를 통해 사람들을 철저하게 관리하여, 직장에서는 기술을 배우도록 하도록 유도하고, 직장 바깥에서는 소비에만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기업과 매스 미디어가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노동조합과 정부를 증오하도록 유도한다고 비판했다. 정부는 사실은 학교 교육과 보건 서비스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조직인데도 미국 사람들은 이러한 유도에 말려들어 정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부유한 사람들의 이익을 지키는 데에는 강력한 정부,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는 약한 정부가 되도록 조장한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케인즈의 말을 인용해 자유시장은 민주주의를 파괴한다고 비판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은 경제의 침체와 밀접한 연관이 있고, 민주주의와 대립되며 정부를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가장 비합리적인 예로서 촘스키는 미국의 사회보장의 기축 가운데 하나인 보건의료제도를 들었다. 기업들은 보편적 의료보장은 비효율적이라고 선전하고 이에 따라 국민의 18%만 의료보호 개선을 위한 증세를 지지한다고 했다. 그런데 실은 사보험 중심의 의료보건제도를 관리하는 비용으로만 3천억달러나 들어간다는 것이다. 노인의료보장을 위한 비용이 6천 억달러인 것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많은 비용이 쓸데없는데 들어간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약값은 미국이 캐나다 등에 비해서 다섯 배가 비싸니 얼마나 불합리한 제도이냐는 것이다. 이렇게 약값을 높게 하기 위해 제약회사들은 늘씬한 모델을 동 원하여 성분약(generic drug, 특허가 끝난 약을 같은 성분으로 제조한 약, 카피약 이라고도 함)은 오리지널 약에 비해 약효가 떨어진다고 선전해대는데 여기에 들어가는 광고비용이 전체 매출액의 30%로 연구개발비는 5%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여 엄청나다고 한다.

촘스키는 회사들은 국제적으로는 자유무역과 무역관련 지적 재산권(Trade Related Intellectual Properties, TRIPs)을 적극 옹호하여 기업 이익 극대화를 추구한다고 비판 했다. 그런데 이러한 협상을 추진하는 국제기구들의 경비의 40%가 초국적 대기업에서 나오니 결과는 보나마나라는 것이다. 그는 그린스펀이 최근 말한 소수의 부유한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나머지 다수는 불안정해지고 좀 놀라게 되어야 경제가 건강하게 돌아간다고 한 발언을 비난했다.

촘스키는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해서 세계은행의 일부 전문가의 분석도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임금 인하와 고용 불안정을 초래한다는데 동의한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미국에서는 지난 25년간 하위 40%의 소득은 7%나 줄어들었는데 상위 0.1%의 소득은 6배가 늘어났다는 통계를 인용하면서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결과라고 했 다.

그리고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정직한 경제학자의 분석을 인용하여 자유무역은 경제 성장에 해롭고 보호무역이 오히려 경제성장에 기여한다고 했다. 기술 혁신도 정부의 구매 등에 힘입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질의응답 시간에 나는 촘스키에게 "최근 랄프 네이더가 출마 의향을 밝혔는데 네이더는 자신이 부시를 잘 공격함으로서 부시의 낙선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민주당 지도자들은 네이더의 출마가 부시의 당선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신의 견해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네이더가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중요한 이슈를 제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고 그런 면에서 그는 괜찮은 사람(nice guy)이지만 현재와 같은 정치적 상황과 선거제도 하에서는 출마보다는 민중들의 조직화가 더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촘스키는 기본적으로 네이더가 진지하지 않은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았고, 결국 그의 출마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입장이었다.

또 다른 질문자가 민주주의에 대해 인터넷이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느냐고 질문했는데 이에 대해 촘스키는 컴퓨터가 자세한 진단을 바탕으로 좋은 논의와 좋은 제안을 가능하게 하는 면도 있지만 한계가 분명하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온라인은 중요한 정보의 생산을 하지는 못하고 정보의 유통에만 역할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오프라인에서의 정보 생산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 매스 미디어에 대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미국은 인터넷망이 잘 구축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초고속 인터넷망이 잘 갖춰져 있는 한국과는 다르다고 했다. 그리고 인터넷은 젊은 세대로 하여금 진지한 탐구보다는 흥미에만 빠지도록 해 어리석은 정신상태로 유도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저녁 7시부터는 "이라크를 넘어서"를 주제로 일반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했다. 학부 학생들이 많이 참가하여 700명 넘게 들어가는 대형 강의실이었음에도 상당수 사람들은 입장하지 못했다.

촘스키는 여기에서 "이라크를 넘어서"라는 주제를 넘어서 제3세계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 대외정책의 파괴적 역할을 비판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대답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기준을 제3세계에도 적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아담 스미스의 이론을 근거로 미국 대외정책을 비판했다.

군사적으로 지배되는 나라에 시장 원리를 강요한 것이 제3세계를 창출했다는 것이다. 그는 부시정부가 2002년 9월에 선언한 국가안보전략을 "공개적인 세계 지배 선언"이라고 비판하고 키싱거 식 현실주의를 나찌즘과 같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실은 미국 외교정책에서 오래된 것인데 부시정부가 이를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뿐이라고 했다.

테러리스트를 숨기는 국가를 공격한다는 부시 정부가 내세운 원칙을 두고 그는 과거에 미국은 테러리스트들과 범죄자들의 공연한 피난처 역할을 했다고 비판했다. 그 하나의 실례로서 그는 하이티에서 학살을 자행한 엠마누엘 콘스탄트를 미국정부는 인도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 촘스키는 이집트정부가 인도를 요구한 시크 오마르 압둘 라만를 송환하지 않았던 예를 들었다.

그런데 그 시크 라만은 나중에 세계무역센터 폭파의 주범으로 기소되었다는 것이다. 중동에 민주주의를 가져다준다는 부시 정부가 내세우는 비젼에 대해서 촘스키는 부시 정부의 진정한 동기는 자원 확보와 기업이익 추구일 뿐이라고 냉소했다. 대안이 무엇이냐는 청중의 질문에 대해서 촘스키는 민중의 조직화라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다.

전체적으로 이번 강연에서 촘스키는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미국 정부가 소수 기업의 이익을 옹호하며 외국을 무리하게 침략하고 있다고 비판하고는 있지만 이러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미국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해서는 깊은 고민이 부족하지 않은가 생각되었다. 이것은 역시 미국 노동자, 민중들의 몫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 민중들의 의식은 기업이 주도하는 선전에 침식되어 대부분 개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정부를 미워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는 이런 딜렘마 속에서 미국 시민들의 신화를 깨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미국 민중이든 제3세계 민중이든 "답답한 사람이 샘을 파야" 하는 것이다.

[광장] 2004. 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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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4-06-23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 평소에 정말 존경하는 분인데. 간달프님 서재에서 좋은 글을 봐서 반갑네요. 퍼갈께요.
 

‘여호와의 증인’ 앞에서 부끄럽다

일제 강점기 사회주의 혁명가들보다 더 비타협적으로 군대를 거부했던 그들의 정신 덕분에 결국…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2004년 5월21일 서울남부지방법원 이정렬 판사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이유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신자 4명 중 3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정부 수립 이래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1만여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낸 끝에 나온 새로운 판결이다. 획기적인 판결이란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인가 보다. 이번 판결은 1심 판결로 아직도 항소심과 대법원의 최종 판결을 거쳐야 하지만,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해결이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 1976년 3월19일 39사단 헌병대 입창 중 구타로 인한 비장파열로 사망한 이춘길(위 가운데). 군 당국의 조치는 그의 장례에 부대장 명의 부의로 1만원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오욕’의 사법부 역사를 떠올리다

나는 이번 판결을 보면서 1971년 사법파동 이래 한국의 사법부가 걸어야 했던 ‘오욕’- 전두환 시절 대법원장을 지낸 이영섭씨가 퇴임사에서 한 표현- 의 역사가 떠올랐다. 한국의 사법부는 사법부가 인권의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는 시민들의 여망에 부응하지 못한 채 오욕의 길을 걸어왔고, 안팎에서 사법 개혁을 촉구하는 소리는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는 말만 할 뿐 제대로 응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젊은 법관이 진짜로 판결로 말해버렸다. 시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했던 사법부가 이제 인권의 최후 보루로 거듭나려 한다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 상황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양심의 자유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한국의 정황상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50여년간 진행된 재판에서도 번번이 이런 정황 논리로 헌법적 권리인 양심의 자유가 무시돼왔다. 이번 판결은 정황 논리 이외에 변변한 헌법적 근거 없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았던 대법원의 판례를 깨고, 헌법상 양심의 자유에 기초하여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헌법이 장식품처럼 듣기 좋은 말만 나열해놓은 사문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권리장전임을 일깨워준 명판결이다. 아마도 한국 사법 사상 이번 판결보다 더 적극적으로 인권을 옹호하고 신장하는 데 기여한 판결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남성 판사들은 대개 법조인으로서 첫발을 군법무관으로 내딛게 된다. 군법무관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집총거부자들을 항명죄로 처벌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간단한 사건도 공소장이 한 페이지는 된다지만, 집총거부자들의 공소장은 다섯줄 정도였다고 한다. 한 사람을 3년 정도 감옥에 처넣는 판결을 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3분여. 누구에게나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일이 있게 마련이지만, 아마도 한국의 법관들 대부분에게 군법무관 시절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너무 쉽게 처벌한 것은 쉽게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양심의 자유의 너무도 명백한 헌법적 근거와 아울러, 아마도 이 점이 보수적인 법원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관한 한 사회 일반에 비해 좀더 열려 있는 입장을 보여오게 한 것은 아닐까?


△ 군 당국의 사망진단서.

이 땅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는 60년이 넘지만,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불과 3년여에 지나지 않는다. 2001년 2월 <한겨레21> 345호에서 약 1600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투옥돼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기까지, 한국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해 완벽하게 무지했다. 이 기사를 보고 많은 인권운동가들이나 진보적 지식인들이 부끄러워했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집총을 거부해서 감옥에 간다는 거야 누구나 다 아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우리는 이 때문에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몇명이나 되는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90년대의 인권운동에서 가장 상징적인 해결과제는 비전향 장기수였다. 비전향 장기수가 누구인가? 그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배척받는 ‘빨갱이’가 아니었던가?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한국의 인권운동에서 당면 핵심과제로 떠오른 것은 ‘빨갱이’에게도 인권이 있다는 인권의 보편성에 대한 자각이 뒤늦게나마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인권의 보편성이 적용돼간 과정을 보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인해 징역을 살아야 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빨갱이’보다도 더 못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으로 비전향 장기수 문제가 대부분 해결된 다음에야 여호와의 증인을 중심으로 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가 인권 현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가주의·군사주의·권위주의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그야말로 ‘왕따’를 당해왔다. 그들은 묵묵히 자신들의 내면의 명령에 따라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집총을 거부해왔다. 친일파들이 경영자로 등장한 대한민국에서 사상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은 차라리 경멸의 대상이거나 위험물이었다. 비단 친일파들만이 아니었다. 양심과는 거리가 먼 비도덕적인 자들과의 싸움에 익숙해져 있는 탓인지, 학생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너무 일찍 ‘전술’에 눈을 뜨며 약아져갔다. 그 시절 사람들은 경찰에 잡혀가면 대부분 별다른 양심의 가책 없이 반성문이나 각서 쓰고 ‘훈방’되는 데 익숙했다. 그런 우리에게 전향서라는 ‘그까짓 종이 한장’ 쓰지 않고 수십년 감옥에 앉아 있는 비전향 장기수들이나, 눈 딱 감고 4주 군사훈련 받으면 병역특례로 빠지는 길이 널려 있는 한국에서 3년의 징역을 택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존재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호와의 증인, 1930년대부터 시련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군사적으로 강점한 1930년대부터 여호와의 증인들은 탄압받기 시작했다. 1939년 1월 일본에서 두명의 여호와의 증인 청년들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선언하여 투옥됐다. 전쟁을 준비하는 자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광적인 평화론자’로 몰아붙였다. 1939년 6월 일제는 일본, 대만에 이어 조선에서도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를 단행했다. 조선에서 체포된 여호와의 증인은 38명이었는데, 당시 교세가 미약했던 여호와의 증인 거의 전원이 체포됐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중 5명은 옥사했고, 해방이 되어서야 옥문을 나선 사람은 33명이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많은 민족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일제의 탄압 아래 무릎을 꿇었고, 또 신사참배 강요로 인해 좋은 목사님들도 믿음에 상처를 입었다. 해방 당시 전국의 교도소에서 비전향을 견지하고 있다가 옥문을 나선 사회주의 혁명가는 20여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은 33명이 비전향으로 옥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평신도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일제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지 않고 총을 들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른 것이 이른바 등대사(燈臺社) 사건이다. 이 일을 두고 여호와의 증인들은 종교적 믿음을 지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말하지만, 정부가 편찬한 독립운동사 서적에는 등대사 사건이 항일운동의 하나로 기록돼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의 별집은 일제강점기에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신상기록카드를 모아놓았는데, 여기에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된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진이 첨부된 신상기록카드가 여러 장 수록됐다.


△ 일제강점기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일제의 전쟁 수행 협력을 거부해 옥고를 치른 등대사(燈臺社)사건은 독립운동사 서적에 ‘항일운동’으로 기록돼 있다. 사진은 이 사건을 기록한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의 ‘사상휘보’ 자료.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일제강점기나 대한민국정부 수립 뒤나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똑같은 행동을 했을 뿐이다. 똑같은 행동을 했는데, 일제강점기에 한 행동은 독립운동으로 찬양받고, 군사독재 시절에 한 행동은 반국가사범으로 처벌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나치는 여호와의 증인들 수천명을 강제수용소에 감금하고 “국법을 준수하고 손에 무기를 들고 조국을 방어”한다는 내용의 선언문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서명 강요라는 형식은 없었다 뿐이지 박정희도, 전두환도, 김영삼도, 김대중도 그리고 노무현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똑같은 논리를 강요하며 처벌하고 있다. 그래서 똑같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고 할아버지는 일제의 감옥에 갔고, 아버지는 군사독재의 감옥에 갔고, 그리고 민주화가 되었다는 마당에 아들은 ‘민주화된’ 감옥에 여전히 간다. 남부지법의 판결이 있던 2004년 5월21일까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는 여전히 일제강점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헌병대 입창중 맞아죽은 청년

일본의 극우파들이 ‘대일본제국의 마지막 군인’이라 찬양한 박정희가 다스리는 병영국가에서 군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철저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병역기피율 0% 프로젝트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최고의 걸림돌이었다. 1975년 2월18일 병무청장은 대통령 박정희에게 “종교적인 양심을 이유로 병역의무를 거부하는 일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을 계몽 선도하기 위하여 그들 대표자와의 간담회를 개최”했다면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 대표들이 “일부 신도의 병역기피 행위는 그릇된 소행”임을 인정했고, “병역기피 방조 등을 하지 않고 병역의무자의 의무 이행을 권유”하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한마디로 이 보고는 허위였다. 2001년까지 아무런 소리소문 없이 매년 수백명씩 감옥에 끌려가면서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견지해온 여호와의 증인들이 병역거부가 “그릇된 소행”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허위보고를 올린 병무청이나 군당국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병역기피율 0%를 달성하기 위해 징역을 살고 나오는 사람들- 1970년대에는 지금과는 달리 징역을 살고 나와도 영장이 계속 발부됐다- 이 채 교도소 문을 나서기 전에 병무청 직원들은 이들을 입영통지서도 없이 다시 잡아가 총을 주고 다시 거부하면 재판에 회부하는 악랄한 방식을 사용했다. 아무리 흉악범이라 해도 형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을 교도소 문 앞에서 가족이 기다리는데 손 한번 잡아볼 시간도 주지 않고 다시 잡아가야 할 절박한 사연은 어디에 있었을까?

이런 분위기에서 맞아 죽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경남 거제 출신의 이춘길이라는 청년은 1976년 3월19일 39사단 헌병대에 입창 중에 구타로 인한 비장 파열로 사망했다. 군 당국이 취한 조치는 그의 장례에 부대장 명의로 부조금 1만원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살벌했던 유신시대에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홀어머니는 진상조사니 배상청구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김종식이라는 청년도 집총을 거부하다가 논산훈련소에서 맞아 죽었다. 군복무만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병역거부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일부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병역기피 수단으로 악용될 것을 우려한다. 병무청에서는 “양심적 병역기피”라는 희한한 말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또 일부에서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가 급격히 늘 것을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복무 판정 절차를 잘 세운다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병역기피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길은 얼마든지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 늘어날 것에 대한 걱정은 정말 기우이다.

병역기피 악용, 걱정 안해도 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운동이 시작되면서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도 2001년 12월 이래 불교신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오태양씨에서부터 아이들에게 평화를 가르치던 사람이 총을 들 수는 없다고 선언한 초등학교 교사인 최진씨에 이르기까지 모두 14명의 병역거부자가 나오게 되었다. 그들 중 한명은 어려서부터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청년이다. 그에게 왜 여호와의 증인을 포기했으며, 그런데도 감옥에 가야 하는 병역거부는 하려고 하는가를 물었다. 그는 수줍어하면서, 20대 청년으로서 좀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데, 여호와의 증인으로 살자니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아 도저히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만은 어릴 때부터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고 평화 신념만은 지키고 살아야 하겠기에 감옥을 가더라도 병역거부는 해야겠다는 것이다. 병역기피를 목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답답할 정도로 규율이 엄격한 여호와의 증인쪽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과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시기상조일까? 대한민국은 이미 50년에 걸쳐서 1만명을 감옥에 보내왔다. 이미 남북간의 국력과 군사력 격차는 벌어질 대로 벌어진 지 오래이다. 3대에 걸쳐 감옥에 가야 했던 50년이 시기상조라면 얼마나 더 긴 세월이 흘러 저들의 증손자, 고손자까지 감옥에 보내야 대체복무제 도입을 고려해볼 수 있단 말인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위한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꺼리는 사람들은 이 제도를 도입하면 안보가 불안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미 지난 30년간 많게는 15만명, 적게는 7만여명을 방위, 공익근무요원, 전문연구요원, 산업체 특례요원 등 각종 명목으로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해왔다. 내가 말석을 차지하고 있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라는 조금 긴 이름을 가진 단체가 대체복무제도의 ‘도입’ 대신 ‘개선’이란 단어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만일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하면 안보가 불안해진다든가, 병력자원이 부족해서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할 수 없다면 지난 30여년간 수만명씩 대체복무제도는 어떻게 운영해왔단 말인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포함하는 대체복무제도의 실시- 기존의 대체복무제도와의 차이는 4주간의 군사훈련 대신 4∼6개월 복무기간을 연장하는 것- 는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의 문제일 뿐이다. 세계 10위 수준의 경제력을 자랑하는 한국이, 이북의 국가예산보다 많은 돈을 국방비에 쏟아붓는 한국이 돈이 없어서 육군사병들에게 똑같은 전투복 팔 접어 입다가 펴서 입게 하면서 사계절을 보내게 하였겠는가? 대체복무제를 도입함으로써 입영 대상자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군 당국은 우수한 인력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여태까지의 말도 안 되는 복무 여건을 신속히 개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서울남부지법의 판결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의 문제를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특정 종교의 신앙의 자유 차원이 아니라, 평화주의자들까지를 포괄하는 일반적인 양심의 자유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로 토론회에 여러 번 나가봤지만, “그럼 저 사람들을 계속 감옥에 보내자는 말이냐”고 물어보면, 어떤 식으로든 대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부인하는 토론자들도 없었다. 이제 많이 처벌했으니 “봐줄 때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이 기분에 따라 봐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핵심적인 요소에 해당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낯선 권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상세히 논하도록 하겠지만, 지금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오늘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들은 지금부터 100여년 전만 해도 다 금지된 것들이었다. 요즘 우리가 많이 살고 있는 아파트만 하더라도 어디 감히 대궐보다 높이 집 지을 궁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낡은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어쩌면 숨쉬는 것만 빼고는 모두 범법 행위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100년전엔 ‘아파트’도 금기였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것은 시기상조가 아니라 너무 늦은 것이다. 세계 200여 국가 중에서 아직 30여 나라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만큼 많은 사람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나라는 찾을 수 없다.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 중에서도 실제로 병역거부자를 처벌하는 나라는 한국을 제외하고는 5개국에 불과하고, 수감자 수도 다 합쳐야 70여명에 불과하다. 우리는 처음 문제제기될 때에 비해 3분의 1로 줄었다 하지만, 아직도 세계의 모든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한 수감자를 합친 것의 7배가 넘는 사람들을 가둬두고 있다.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그렇게 두려운 일인가? 남을 죽이는 일에 동참을 거부하는 행위가 그렇게 위험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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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단죄대상인가 기억대상인가
[한겨레 2004-05-24 19:03]

[한겨레] 임지현교수, "'사회적 드러냄'으로 극복" 주장
조희연교수, "독재정당화 오용우려" 지적

2004년 봄, 한국 학계에는 ‘대중독재’라는 묘한 깔때기가 있다. 역사는 단죄가 아니라 ‘드러냄’의 대상이라는 이 깔때기를 거치면, “역사를 심판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이 된다.

이런 논쟁적 주장을 본격 제기했던 임지현 교수(한양대 사학과)가 최근 관련 연구성과를 모아 <대중독재>(책세상)라는 책을 냈다. 때맞춰 조희연 교수(성공회대 사회과학부)는 <역사비평> 여름호에서 이른바 ‘대중독재 프로젝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선 임 교수의 <대중독재> 출간은 자신이 주도해 설립한 ‘비교역사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대중독재 개념을 더욱 정교화시키려는 기획의 하나다. 임 교수는 이 책에서 “역사가들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채택했지만 시민사회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고”, “그러한 현실을 설명해야 하는 역사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때문에 ‘근대 독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는 소회를 밝혔다.

결국 문제는 임 교수가 현실을 얼마나 제대로 설명하면서 그 역사의 책무를 수행하고 있는지에 쏠린다. 그는 일단 대중독재론에 대한 ‘차가운 반응’을 단독 돌파하기로 맘먹은 듯 하다. 동료들의 “엉뚱한 힐난과 의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중적 지식인’의 포즈에 연연하는 이들과 비생산적인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현실과 소통하겠다”며 나치즘·파시즘·스탈린주의 등에 대한 공동연구를 전개한 것이다.

이 연구의 지향점은 “강제와 폭력이라는 피상적 이미지의 물밑에서 작동하는 대중의 자발적 동원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게 임 교수의 주장이다. 그 메커니즘은 “모든 사람이 체제의 희생자이자 지지자”라는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의 말로 집약된다. (독재의 역사 앞에서) 어느 누구도 순전히 희생자는 아니며 모두가 어느 정도는 책임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한걸음 나아가 “하벨의 논리는 사실상 아무도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답변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부터 대중독재의 깔때기는 ‘역사청산’의 문제의식을 걸러내기 시작한다. “소수의 나쁜 그들에 대한 인적 청산이 곧 역사적 청산은 아니”므로 “법정의 심판을 통해 과거를 단죄하고 청산하는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 교수의 생각은 분명치 않다. “과거를 드러내 살아있는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때 비로소 과거는 극복될 수 있다”는데, 그것이 임 교수가 중시하는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인지는 일러주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보면, 사실상 휴지조각이 된 친일청산법을 17대 국회 개원 직후 개정하겠다는 시민사회와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 등의 노력에 대해 임 교수가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역사청산의 ‘현실’은 그 법안을 둘러싼 논란에 집중돼 있는데도 말이다.

<역사비평> 여름호에 ‘박정희 시대의 강압과 동의’라는 글을 실은 조희연 교수도 그런 우려를 전한다. “파시즘의 헤게모니를 당연시하는 오류와 ‘우익화’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임 교수의 학문적 논의는 유석춘·복거일 등에 의해 “파시즘 비판 논리의 확장이 아니라 파시즘 정당화 논리의 징검다리로 활용”된다.

그렇다면 ‘대중독재론’은 일부 우파 인사들에 의해 단지 ‘오독’되는 것에 불과한 걸까. 조 교수는 임 교수의 논리 안에 들어선 오독의 씨앗을 찾는다.

조 교수가 보기에 (파시즘에 대한) 민중의 동의는 항상 지배전략 차원에서 강압과 긴밀한 연관 아래 ‘창출’되는 것이다. 강압없는 동의는 없다. 동의 또한 지배의 한 ‘기획’이다. 여기서 동의의 확장은 △강압에 의해 민중의 인식지평 자체가 제한되는 경우 △권력의 폭력과 강압에 대한 공포가 곧 지배에 대한 동의로 해석되는 경우 △대안부재로 인해 현존하는 강압 지배가 유일한 대안인 경우 등에 의해 이뤄진다. 파시즘의 다양한 지배전략 앞에서 대중(민중)은 과연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얻어 동의의 기반을 자발적으로 창출해낼 수 있을까.

문제는 박정희 체제에 대한 임 교수의 판단에도 있다. 임 교수의 애초 문제인식과는 달리 “박정희는 적극적 동의를 광범위하게 창출해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한 것이 아니다”라는 게 조 교수의 지적이다. 박정희 체제는 18년 동안 10여 차례 이상 위수령·계엄령·긴급조치 등 “통상적 공권력이 아니라 국가강압력의 최후 보루인 군대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체제”였다.

나아가 박정희 체제는 권위주의적 반공·개발동원체제에 기반한 일종의 ‘준전시 또는 의사전시체제’였다. 폭력적·강압적 반공주의라는 ‘공포의 시대’를 거쳐 근대적 개발의 기획을 통해 ‘남북 경쟁’이라는 또다른 반공주의 효과를 강화한 지배체제라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동의창출을 위한 지배전략도 불구하고 박정희 체제는 ‘광범위한 동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것은 정치위기의 연속이었으며, 폭력적 강압력의 연속과 이에 대한 저항의 연속이었다. 결국 임 교수가 상정한 그런 ‘동의’는 박정희 시대와는 거리가 멀다. 히틀러 체제의 대중동의를 박정희 체제는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박정희를 설명하기 위해 히틀러를 ‘차용’했던 임 교수는 ‘박정희와 히틀러는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공격에 처했다. 당초의 기획이 박정희 체제에 대한 ‘변호’인지 ‘비판’인지도 의심받고 있다. 과연 대중독재의 ‘깔때기’는 친일·독재에 대한 한국사회의 청산·극복 노력에 의미있는 자양분이 될 수 있을까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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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대중적 기반 분석...'근대권력'과 '독재' 혼동
본격서평 : 『대중독재』(임지현 외 편, 책세상 刊, 2004, 588쪽)
2004년 06월 16일   장문석 서울대 

 
장문석 / 서울대 서양사

‘대중독재: 강제와 동의 사이에서’는 파시즘, 스탈린주의, 박정희 체제 등 각국의 20세기 독재의 경험들을 아우르는, 19편의 논문들로 구성된 풍성하고 흥미로운 연구서다. 저자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그 제목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여기서는 ‘대중독재’라는 자못 도전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쟁점들을 간추려 이 책을 읽은 감상과 소견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근대 독재는 “폭력과 억압이라는 악마적 이미지로 단조롭게 채색돼”왔으나, 실제로 그것은 “위로부터의 강제적 동원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동원의 체제를 구축”했다. 이로부터 이 책은 20세기의 독재가 “강제와 폭력이라는 피상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체제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광범위하게 향유했다는 점에서 “대중독재”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이런 시각은 파격적이기도 하고 평범하기도 하다. 파격적이라 함은 지금까지 독재라고 하면 으레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지배를 떠올리는 사고 습성을 깨뜨릴 것을 이 책이 주문하기 때문이다. 평범하다 함은 잘 생각해 보면 ‘순수한’ 민주주의에서도 경찰과 군대가 상징하는 강제력들이 엄존하듯이 모든 지배에는 동의와 강제의 계기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강제’와 ‘동원’ 사이의 무인지대 탐색

그런데 독재라는 정치 환경에서 ‘동의’를 말하는 데에는 약간의 난점이 따른다. 과연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동의’를 말할 수 있을까. 독재를 거부할 때 뒤따를 박해와 유배, 그리고 독재를 수용할 때 누릴 경력과 안정 사이에서 선택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런 환경에서라면 사람들은 어느 이탈리아 역사가가 말했듯이 “소수의 공공연한 반란자”이거나, 아니면 “겉으로는 어떤 것을 말하고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다수의 니고데모”이기 십상이다. 설령 ‘동의’를 말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존재하는 층위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체제의 가치와 이상에 의식적이고도 자발적으로 점착하는 태도가 있는가하면, 자생적이고 조건부로 독재에 점착하거나 독재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도 이런 ‘동의’의 모호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가령 저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아코모다시옹(적응)”이라든지 “수동적 동의”, 혹은 “체념적 순응”과 같은 표현들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또한 동의가 강제의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강제가 동의를 배제하지 않는, 다시 말해 강제와 동의가 상호침투돼 있는 “역사 현실의 복합성”을 강조한다는 점도 저자들의 고민과 생각의 깊이를 보여준다. 여하튼 이 점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강제와 동의라는 이분법적 틀을 현실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이 아니라 이 책의 부제가 보여주는 대로 “강제와 동의 사이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무인지대를 탐색하고 드러내는 작업일 것이다.


‘동의’의 문제처럼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이 제시하는 또 다른 논점은 독재가 퇴행이나 정체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인 변화의 도구였다는 것이다. 가령 독재가 모순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대중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파시즘이 기성의 사회적 가치와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려고 한, 反 부르주아적이고 평등주의적인 ‘혁명적’ 잠재성을 갖고 있다는 견해도 낯익은 주장이다. 특히 이 책에서 인용된 이탈리아 역사가 에밀리오 젠틸레는 파시즘이 신화, 상징, 의식들을 활용하면서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내려는, 이른바 “인류학적 혁명”을 추구했다고 본다. 확실히 파시즘이 갖는 그런 ‘혁명적’ 차원들을 단순히 선전이나 수사로만 치부해서는 파시즘이 갖는 대중적 호소력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파시즘과 독재, 근대권력의 지형도 위에서 파악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예컨대 이탈리아 파시즘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극히 이질적인 경향들의 ‘반죽’과도 같았다. 게다가 파시즘의 역사는 늘 까다로운 일련의 협상들과 타협들로 점철돼 있었다. 파시즘의 ‘혁명적’ 잠재성은 기성 제도들의 저항에 부딪쳐야 했고, 그럴 때마다 ‘포퓰리즘’과 ‘사회적 데마고기’의 요소들이 파시즘에 착종돼 있음이 드러나곤 했다. 그렇기에 파시즘을 두고 “전구 하나밖에 못 켜는 발전소”라거나 “무거운 진흙 주전자에 달린 약한 손잡이”라는 식의 평가를 내리는 것도 실없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


한편, 이 책이 독재의 동의적· 대중동원적 차원을 “문명화된 파놉티콘의 전방위적 감시 체제”와 근대적 국민주권론으로 설명하는 대목도 유익하고 계몽적이기는 하지만 논란을 불러일으킴 직하다. 왜냐하면 대중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들을 동원하며 주체화하는 과정은 이미 그람시나 푸코와 같은 이론가들이 탁월하게 밝혔듯이 독재의 전유물이 아니라 근대 권력 일반의 속성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대중을 근대 주체로 구성하면서 국민주권을 관철시키는 ‘방식’이 전체주의적/독재적/권위주의적이냐, 아니면 다원주의적/민주주의적/자유주의적이냐 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분명 사소한 것이 아니다. 물론 파시즘과 독재를 근대 권력의 속성과 근거로 설명하는 것은 그것들을 반근대적 현상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비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파시즘과 독재를 근대 권력의 지형도 위에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갖는 진정한 장점과 가치다. 그럼에도 근대 권력이 구현되는 ‘방식’의 차이를 논하지 않는 한 근대 국가와 근대 독재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받기 쉽다.


인식의 모호함은 실천의 모호함을 낳는다. 즉 제도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는 독재의 억압 기제와 심리적-신체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는 근대적 규율 권력의 억압 기제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는 공존하면서 서로를 제한하고 구속하며 변형시킨다. 따라서 진정 문제가 독재와 관련된 것이라면, 강압적 지배 기구에 대한 비판 없는 내면적 반성은 공허하며, 내면적 반성 없는 강압 기구에 대한 비판은 맹목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대중독재’가 대중에 ‘의한’ 독재이면서 동시에 대중에 ‘대한’ 독재임을 새삼 확인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물론 이 책의 실천적인 문제의식, 그러니까 근대 독재의 광범위한 대중적 동의 기반을 밝혀냄으로써 “소수의 사악한 가해자 대 다수의 선량한 희생자”라는 허구적인 이분법을 극복하고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은 완전히 타당하다. 반독재 저항이라는 소수의 경험을 다수의 경험으로 둔갑시키려는 정치적 편의가 우선시되면서 일반 대중이 독재와 공모하고 그것에 연루된 역사가 망각됐고, 그런 정치와 역사의 괴리 속에서 독재자에 대한 향수가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성숙한 시민 의식의 발전이 저해된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철저한 내면적 ? 역사적 반성은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적 현실과의 대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역사 교육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거꾸로 정치적 비판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이어야 한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서양사를 전공해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논문으로 ‘19세기 이탈리아 농촌공업화와 ‘유연한 이행’: 비첸티노 지방의 직물공업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만들기, 이탈리아인 만들기: 리소르지멘토와 미완의 국민 형성’,  ‘무솔리니: 두체신화, 파시즘, 이탈리아의 정체성’ 등이 있고, 역서로는 ‘종말의 역사’(공역), ‘만들어진 전통’(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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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는 열우-민노의 긴밀한 협력”

도올 김용옥의 ‘민중이 헌법이다’는 옳다

 

월간말 editor@digitalmal.com

 

안병진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작년에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필자에게 최근 드라마틱하게 진행되었던 탄핵정국은 역사적으로는 유감스러운 사건이었지만 정치학자로서는 ‘고마운’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일상적 시기엔 10년이 걸려야 경험할 수 있는 한국 정치 지형을 며칠만에 압축적으로, 그것도 심층적 단면을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탄핵정국은 여야 정치세력간 적대적 대립의 성격과 원인에서부터,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민주적 대통령제로 이행해 가는데서 나타나는 한국의 삼권(입법, 행정, 사법) 분리 제도의 취약성, 사회구성 원리로서 헌법의 한계 등에 이르기까지 잠재되어 있던 모순들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게 했다. 마치 파우스트의 구절처럼, 이처럼 ‘푸르른 소나무’ 같은 현실은 지금까지의 회색빛 이론들을 다시 생명력 있는 것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말』지로부터 집필을 요청 받고 이 글을 쓰는 총선 투표 다음날 저녁 현재, 온갖 신문지상은 정국 시나리오에 대한 경마식 보도로만 넘쳐흐른다. 마치 대장금 드라마의 스펙터클같은 선거의 마력에 취한 듯 대부분의 기사가 지금까지의 갖가지 제도적, 정치적 취약성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심화된 고민을 잊은 채, 주연배우들의 다음 행보만을 초조하게 기다리거나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탄핵정국에서 나타난 제도적, 정치적 특성들과 무관하게 자유로운 주체들의 선택이 가능하리라고 필자는 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연결하여 현실의 복합성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비록 필자의 이 글은 아직 충실한 선거결과 자료가 주어지지 않아 짧은 에세이에 불과하지만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작성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선거에 대한 전반적 평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4․15 총선의 세 가지 의미에 대한 단상을 기술하는 것을 통해 선거가 위치한 복잡한 현실의 일단을 조금이나마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 탄핵정국
선거의 의미 I : 미국식 '다른 수단의 정칼의 패배와 탄핵후폭풍의 승리

탄핵심판론이 줄곧 주요 쟁점이었던 이번 총선을 그 직전의 탄핵정국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고일 것이다. 탄핵정국은 미국의 긴즈버그와 세프터가 부른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politics by other means)로 표현될 수 있다.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란 민주정치의 꽃인 선거에서 상대 경쟁 후보를 심판하기보다는, 권력이 분산된 정치체제의 일상적 국정운영 과정을 활용하여 선거를 치르지도 않고 상대를 패배시키려는 것을 말한다. 흔히 인사청문회, 특별검사의 기소를 비롯, 사법제도의 정치화와 탄핵 등이 이를 위한 효과적 수단으로 활용된다. 미국의 1998년 탄핵정국이나 한국의 2004년 탄핵정국은 둘 다 거대 야당이 현직 대통령을 ‘반문명세력’(깅그리치 하원의장이 클린튼 대통령을 가리킨 표현)으로 적대적으로 인식하고 주도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로 규정할 수 있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의회의 회기 막바지에 이루어진 ‘다른 수단의 정치는 오히려 곧이어 치러진 선거에서 거대야당이 역풍을 맞게 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특히 놀랄만한 것은 두 나라 모두 현직 대통령의 집권당이 중간선거에서 예외적으로 승리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에는 예상을 깨고 집권당이 하원에서 5석이나 더 얻었고 한국의 경우에는 아예 제 3당에서 과반수의 당으로까지 뛰어올라 민주화 이후 최초의 ‘단점 정부’(대통령과 의회의 다수당의 당적이 일치함을 말함)가 성립되었다.

더구나 한국의 경우 투표율의 측면에서 세계사적 하강의 추세와 달리 16대보다 2.8% 가량 높아지는 이변까지 연출하였다. MBC-엠비존 조사에 따르면 20대 49%, 30대 56%의 투표율은 지난 2000년 16대 총선의 20대(37%), 30대(51%) 젊은 층의 투표율 보다 더 의미 있게 상승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반면에 40대(65%), 50대(67%)는 2000년의 40대(67%), 50대(76%)에 비해 투표율이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e윈컴 4월 16일자). 이는 평소 주로 탄핵에 비판적인 젊은층이 높은 위기의식을 가지고 투표에 참여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이번 선거의 핵심적 의미는 탄핵가결과 같은 ‘다른 수단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위협했던 것에 분노한 민심의 표출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민심은 앞으로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규정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법학자 브루스 애커만이 지적했듯이 고양된 시기에 나타난, 다수 민심이 결집된 의사의 표현은 헌법적 해석으로 투영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럴 때만 민주사회에서 사법제도가 귀족주의적인 기구가 아니라 민주정치의 핵심기제로 작동할 수가 있다. 애커만은 민주사회는 일상적 법제정 과정과 특별히 고양된 시기에서 다중의 직접적 의사결집이라는 이원적(dualistic) 바퀴가 균형을 이룰 때 가장 바람직하다고 충고하고 있는데, 이는 지나치게 다중의 의사결집에 부정적이기만 한 우리가 귀담아 들을 만하다.

또한 탄핵정국과 선거운동 기간 동안 나타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에 대한 비판적 민의를 어떻게 제도적인 결과물로 만들어낼 것인가가 앞으로 고민되어야 한다. 많은 논자들이 이러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캄를 단지 기존 거대야당이 수구적 세력이기 때문에만 생기는 현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비록 이번 탄핵정국의 경우에는 맞는 지적이지만 미국적 스타일의 ‘다른 수단에 의한 정캄는 민주적 삼권분립이라는 토양 속에서 자라는 바이러스로서 매우 ‘선진적’ 현상이다.

예를 들어 다른 수단의 정치가 빈번히 의존하는 특별검사제가 원래 정치개혁 아젠다로 미국과 한국에 도입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캄는 미국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앞으로도 한국 정치가 민주화될수록 빈번하게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철저히 추구함이 없이 단지 기존 거대야당의 체질 개선만을 기대한다면 이는 민의의 생산적 반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이후 어떤 정당도 ‘다른 수단에 의한 정캄의 남발로 민주정치에 치명적 생채기를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설계하고 공론화해 나가야 한다. 여기서는 의회를 단지 행정부나 사법부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견제하는 방안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본인의 졸고, 「노무현과 클린튼의 탄핵 정치학」(푸른길) 참조).

선거의 의미 II: 거리의 정치의 패배와 ‘거여견제론’ 미디어 정치의 선전

비록 집권여당이 ‘단점 정부’를 구성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한나라당의 개헌저지선 확보는 기존 거대야당이 완전히 패배한 것은 아님을 또한 의미한다. 이들의 부분적 부활의 과정은 한국 정치지형의 현 단계 특성을 잘 드러내 준다. 우선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는 것은 별로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이슈이지만, 탄핵 가결이후 ‘거리의 정캄가 어떻게 소멸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필자가 보기엔 ‘거리의 정캄가 소멸된 것은 담론적, 법적 차원에서 패배의 결과이다. 우선 담론적 차원에서 한국 사회의 자유주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헌법재판소의 법리적 판단을 기다리자는 지배적 담론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항적 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예를 들어 도올 김용옥의 “민중의 함성, 그것이 헌법이다”는 선언은 비록 생경하게 들리지만 위에서 지적한 애커만의 이원적 민주주의론과 같이 고려해볼 문제의식을 가진다. 그러나 보수적 언론은 물론이고 자유주의, 진보 진영에서도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법적인 측면에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무현 대통령 구하기’의 의미를 내포하는 ‘거리의 정치가 바로 노무현 정부 스스로 강한 자유주의 정부를 지향하며 만들어 놓은 집회시위법에 의해 계속 방해를 받았다. 또한 선거가 다가오면서 열린우리당 같은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이 흔쾌히 합의하고, 진보진영이 미적지근하게 대응한 풀뿌리 민주주의 배제 및 미디어 정치 위주의 선거법에 의해 두 세력(자유주의, 진보)은 무장해제 당하고 말았다(앞으로 선거법의 창조적 혁신은 주요한 아젠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거리의 정치가 진행 중인 와중에 총선 일정이 눈앞에 와 있다는 사실은 심각한 정치위기로의 발전을 근심하는 많은 정치학자들에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다. 많은 비판적 지식인들은 그 연장선상에서 총선에서의 심판이 다가옴에 낙관적 희망을 표명하였다. 하지만 탄핵심판의 민의와 총선에서의 민의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총선은 탄핵의 여부를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국민투표가 아니라 정당, 인물의 경쟁이라는 독자적인 문법을 가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맥락에서 한나라당의 효과적인 담론 투쟁과 열린 우리당의 한계가 시작된다. 사실 정책, 인물 선거, 거여견제론이라는 담론들은 그간 수구적 정당 주도의 지역차별주의, 흑색선전 선거, 일당독재를 비판하는 개혁적 담론이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이 개혁적 담론을 ‘공중납치하여 열린우리당의 탄핵심판론을 비이성적 바람의 정치로 규정하고 권력 견제의 필요성을 심는데 일정 정도 성공했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 대선과 달리 한나라당이 미디어 정치에 썩 성공적으로 적응했다는 것이다.

 미디어 정치의 효과적인 전술은 감성의 정치, 사운드 바이트(몇 초 짜리 구호), 의사(擬似)이벤트(텔레비전을 위해 연출되는 이벤트)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박근혜 대표의 눈물광고, 거여견제론 구호, 전당대회 효과가 바로 이런 것들이다. 특히 박근혜 대표는 이 세 가지 전술 구사의 중심에 서서 마치 미국의 엘리자베스 돌(밥 돌 상원의원의 부인) 200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쟁자를 연상시키는 온정적이며 기품 있는 보수주의자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선보였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효과적 전술에 힘입은 한나라당의 생존이 장기적으로 한나라당에 이익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영남지역에서 탄핵을 주도하였던 의원들이 모두 생존한 것에서 보이듯이 당의 근본적 체질 혁신에는 여러 장애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실언에서 비롯된 소위 노풍(老風)은 2000년 대선 이후 지속되어온 세대적 분열구도에 불을 끼얹으면서 급속도로 한나라당 지지층을 결집시켰다. 그의 실언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집권 이후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줄곧 취해온 세대적 갈등의 관점이 필연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정치적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기에 이는 단순한 실언이상의 지속적인 파괴력을 가졌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선거 이후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노풍의 교훈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세대간의 갈등을 강조하는 관점이 곧 진보는 아니다. 오히려 민주적인 가치(시민적 덕성)를 중심으로 모든 세대들을 훈련하고 통합하는 문화를 창출하고 이를 위한 창조적인 제도적 방안들을 고민해야 한다. 선거 이후 각 정치세력들은 자신 나름의 이념적 스펙트럼에 기반을 두어 통합의 정치를 추구할 것이다. 과연 어느 정치세력이 선도적으로 자신의 가치와 제도를 다수의 동의로 만들어낼 것인가가 주목된다.

선거의 의미 III: 진보정당의 원내진입과 보수정당 혁신의 시작

최장집 교수가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냉전반공주의의 영향으로 이념적 범위가 지극히 협애한 보수독점적 정당구조가 지속되어온 한국정치는 사회적 요구로부터 괴리된 현상안주적인 무기력한 정당들을 양산해 왔다. 이는 정당 간 차별성이 부재한 속에서, 정책경쟁 대신 증오나 지역감정 동원의 정치가 만연하고 탈정치화를 부추기는 등 수만 가지의 부작용을 낳는 중심 고리로 작용해왔다. 이번 진보정당의 원내진입은 의석수의 단순한 산술적 효과를 넘어, 보수독점 양당 체제의 부분적 붕괴라는 점에서 획기적 의의를 지닌다.

자세한 심층면접 조사가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어떤 점에서는 보수적 지역까지 포함하여 10~21%를 상회하는 고른 전국적 지지표는 민주노동당의 정책에 대한 계급적 승인이라기보다는 전반적 정치체제 개혁의 중심고리로 민주노동당의 역할에 대한 전술적 기대에 더 기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로부터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두 가지 이원적 역할을 부여받은 셈이다.

하나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기반을 둔 프로그램의 독자적 추구이다. 다시 말해 열린리당과 민주노동당은 각각 자유주의 정당, 진보 정당으로 이에 걸맞는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고 상호 치열한 경쟁과 시민들과의 소통을 통해 우위를 증명해야한다. 아마 이들은 정책입안 단계에서부터 풀뿌리 차원의 대중적 조직들과 결합하여 정책을 형성해가는 심의적 민주주의이자 운동적 정당의 모델을 전면적으로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흔히 한국의 지식인들은 의회 내에서의 협력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할 뿐 제도권 바깥의 세력들간의 결합에 매우 부정적이다. 하지만 21세기 현대 대통령제는 제도권 바깥의 사회적 힘을 부단히 제도 네트워크 내로 투입할 때만이 건강한 혁신이 이루어진다고 지적할 수 있다. 애커만이 지적하듯이 미국의 민주당의 경우 이에 성공하였던 1930년대가 혁신의 시대라면 제도외적 연결이 느슨해지는 오늘날은 퇴조의 시대이다.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전국적 지지의 민의가 의미하는 것은 이들 두 정당이 현 정치체제의 건강한 혁신이라는 과제에서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앞으로 이들의 건강한 경쟁과 협조 관계를 가로막을 가장 결정적인 암초는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 포퓰리즘과 민주노동당의 자유주의 진영에 대한 경직된 거부감일 것이다. 지난 일년간 노무현 정부의 활동엔 규제완화, 정치 영역 축소, 노동 등의 집단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와, 기득권 세력에 대항하는 서민의 절대적 대변자라는 포퓰리즘이 기묘하게 결합되어 왔다.

이는 1980년대 이후 남미, 동구 등에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 포퓰리즘과 기본적으로는 유사한 유형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노무현 정부의 사회적 기반을 지속적으로 침식시켜왔고 그는 이를 노사모 등을 동원한 포퓰리즘으로 보완해왔다. 앞으로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의 정치양식을 대체하는 모델을 개발하지 못한다면 신자유주의에 전투적 저항의 관점을 가지는 민주노동당 간의 균열은 매우 증폭되리라 예상된다.

특히 한국의 자유주의 정당은 미국과 달리 비판적 지지세력으로 노동진영을 안정적으로 포괄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사회적 기초가 더욱 취약하다. 이는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에게 ‘다른 수단의 정치'를 구사할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반면에 민주노동당은 재신임 정국, 선거 기간에서 보이듯이 그간 자유주의 진영과의 제휴에 때로는 다소 유연하지 못한 태도를 취해왔다. 앞으로 그 제휴가 실패, 자유주의 정부가 흔들린다고 해도, 이 흔들림이 반드시 진보진영의 이익으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막연한 정치환멸주의의 확산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의 자유주의적 포퓰리즘과 달리 조지 부시 현 대통령처럼 온정적 보수주의의 얼굴을 한 반동적 포퓰리즘의 길이 다음 한국 대선에서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암초는 노정권의 신자유주의 포퓰리즘과 민노당의 경직성

결국 이번 총선에 나타난 민의에 대한 파악은 단순히 탄핵심판이냐, 거여 견제냐의 표피적 이분법을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민의에 대한 해석은 ‘역사의 결’(grains of history)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이러한 역사의 결에 대한 올바른 파악은 각 정치세력들이 무엇이 현재의 지형 하에서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가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공해 준다. 또한 단순히 정파적인 이익을 넘어서서 탄핵정국에서부터 드러난 제도적, 정치적 결함들을 장기적으로 수정해나갈 시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함의 수정은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각 사회적 세력들의 ‘구성하는 행위’(constituting act)의 결과이며 궁극적으로는 헌법(constitution)의 혁신으로 일차적으로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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