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기사를 병치시켜 놓고 보니 재미있다.


특집 : 동아시아에서 조선 성리학의 지위
중국이 우러러 본 조선의 理 철학
2004년 04월 17일   이기동 성균관대 

이기동 / 성균관대·동양철학

동아시아 삼국의 문화는 그 특징이 매우 뚜렷하다. 한국의 문화는 형이상학적 성격이 강하고, 일본의 문화는 형이하학적 성격이 강하며, 중국의 문화는 양면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한국, 일본에 동시에 전개된 불교나 성리학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증명이 된다. 중국의 역사가 문관과 무관에 의해, 한국의 역사가 문관에 의해, 일본의 역사가 무관에 의해 주도돼온 것을 보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형이상학은 주로 철학이나 종교의 영역에 속하고 형이하학은 주로 물질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영역에 속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종교가 가장 발달하는 나라는 한국일 것이고, 과학이나 경제가 가장 발달하는 나라는 일본일 것이며, 둘 다 적당히 섞여 있는 나라는 중국일 것이다. 오늘날 상황에서 보더라도 교회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는 한국이고 가장 적은 나라는 일본이며 중국이 그 중간이다.

형이상학 성격 강한 조선의 성리학

이러한 구도에서 볼 때 동아시아 사회에서 차지하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의 위상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고려말에 중국에서 수입된 송학에서 비롯된다. 송학은 중국 당나라 때 韓愈 등에 의해 주창된 신유학 운동이 북송을 거치면서 발전하다가 남송의 주자에 이르러 완성된 사상체계다. 송학은 송나라 때 완성된 학문체계라는 뜻에서 일컬어진 말인데, 주자에 의해 완성된 것이라 해서 주자학이라고도 하고, 程子와 주자가 중심이라 해서 정주학이라고도 하며, 性과 理가 중심개념이라 해 성리학이라고도 하고, 理가 중시된다고 해서 理學이라고도 하며, 道의 실천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서 도학, 聖人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서 聖學, 새로운 유학이라 신유학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성리학은 송나라 때 바로 수입되지 않고 송나라가 망한 뒤 송을 이어 일어난 원나라에서 수입된다. 고려말 안향에 의해 원나라로부터 수입된 성리학은 순조로운 발전을 거듭하다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된다.

중국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과 형이하학적 성격이 조화를 이룬다. 한유에 의해 주창된 형이하학적 특징은 歐陽修와 司馬光을 거치며 발전하고, 이고에 의해 주창된 형이상학적 특징은 주돈이, 張載, 정이 등을 거치며 발전한다. 그리고 이 두 계열은 주자에 의해 하나로 통합된다. 그러므로 주자에 의해 통합된 중국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과 형이하학적 성격이 통합된 종합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한국에 수입된 성리학은 이고 계열의 형이상학적 성격의 성리학이 주로 수용되고 한유 계열의 형이하학적 성격의 성리학은 그다지 수용되지 않았다. 이는 한국인의 정서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귀결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한국의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성격에 치중했기 때문에 그 깊이는 주자의 수준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하버드대 뚜웨이밍 교수는 특히 조선의 퇴계를 주자의 진정한 후계자로 지목한 18세기 일본 지성들의 견해에 동조하면서도 퇴계가 고봉과 벌인 사단칠정론에서 밝혀낸 理 사상은 중국의 유학자들에서 촉발된 것이 아닌 독창적인 것이었음을 밝힌다. 이러한 평가는 퇴계뿐만 아니라 조선 성리학자들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평가는 당시 명나라에서도 많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온 사신이 율곡을 만났을 때 "天道策을 쓴 그 율곡인가?" 하고 물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중국에서 조선 성리학자들의 글들을 읽고 있었으며 조선의 성리학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존중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명나라가 국력을 기울여가면서까지 조선을 돕게 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만약 명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계속 발전했더라면 조선 성리학과 성리학자들의 위상은 중국에서 계속 유지됐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형이상학적 성격이 강한 성리학이 쇠퇴하고 실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자 중국에서는 한국 성리학에 대한 관심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들이 청조를 거부하고 끝까지 명나라의 연호를 고집했던 이유도 이러한 현상들과 맥락이 통한다. 그러나 청나라에서도 조선 성리학자에 대한 존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청나라 말기의 대표적 지성인인 양계초는 퇴계를 극찬하면서 '삼백년 내려온 그 명성을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게 됐다'라고 했다.


한편 조선 성리학의 일본에 대한 영향은 지대했다. 일본에 성리학을 정착시킨 최초의 인물은 후지와라 세이까(藤原惺窩)다. 그는 불교의 승려였으나 조선에서 온 사신 허산전과 만난 후 성리학으로 돌아섰다. 세이까는 조선에서 포로로 잡혀간 姜沆에게 배우면서 영향을 받았지만, 허산전이 퇴계학의 학맥을 잇는 사람이었으므로 세이까가 수용한 성리학은 주로 퇴계학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베요시오(阿部吉雄)의 '일본 주자학과 조선'이라는 저서에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일본에 미친 퇴계학의 강력한 영향

일본 성리학의 완전한 수용기에 이르면 퇴계학의 존숭은 극에 달한다. 일본 성리학의 대가인 야마자끼안사이(山崎闇齋)는 퇴계를 존숭한 나머지 퇴계의 초상을 그려놓고 매일 아침 경배를 드렸다고 한다. 큐우슈의 오오쯔까타이야(大塚退野)는 자신의 호를 퇴계의 退를 따서 타이야(退野)로 정했을 정도였다.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 성리학에서의 퇴계의 위상은 조선 성리학에서의 주자의 존재와도 같은 대단한 것이었다. 퇴계 외에도 율곡이나 양촌이 일본에 소개돼 연구됐으나 퇴계만큼의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다.
퇴계학을 중심으로 한 한국 성리학의 일본 수용은 한국 성리학 그 자체가 수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의 정서에 맞게 형이하학적으로 변용된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성리학의 일본에서의 위상은 대단했다. 이러한 위상으로 말미암아 조선시대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지극한 환대를 받았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사신을 만나 글씨를 하나 받으면 그것이 그대로 가보가 됐다. 그래서 당시의 일본인들은 조선의 사신을 만나기 위해 조선의 사신이 묵는 여관 앞에 장사진을 쳤다. 이것을 국제적인 망신이라 여긴 일본 정부는 사적으로 조선의 사신을 만나는 것을 금하는 국법을 정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본인들이 한국인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고, 나중에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는 경계할 일이다.


필자는 동아시아 전통사상에 대한 비교연구를 많이 해왔다. 논문으로 '일본유학에서 중세적 사유의 형성과 극복', '한국유학과 21세기', '퇴계학과 일본의 주자학' 등이 있고, 저서로 '조선조 성리철학의 구조적 탐구', '도올논어 바로보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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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통유학이 일왕중심 변질”
 
[한겨레 2004-05-03 21:23]
 
 

[한겨레] ‘황도유교’ 비판 학술발표회
유학의 친일 또는 왜색 문제가 학계의 전면적인 비판대에 올랐다. 비판철학회(회장 양재혁·성균관대)는 지난 1일 이 학교 경영관에서 ‘황도유교(皇道儒敎) 비판’이란 주제의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이날 발표회에서는, 조선의 정통 유학이 일제 식민강점기 시절 일왕의 통치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황도유교로 변질됐으며 해방 이후에도 황도유교의 영향을 받은 학풍이 역대 독재정권의 극우반공 정책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도구로 전락해왔다는 비판들이 쏟아졌다. 유림의 본산이라 할만한 성균관도 신랄한 비판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황도유교는 1903년 조선 정부 초청으로 한성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교사로 건너온 다카하시 도오루가 퇴계 성리학을 재구성한 일왕 중심의 유학 체계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다. △조선의 유교는 중국의 아류이며,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건설을 위해 공맹의 정치적 이상인 왕도유교는 일본을 국체로 한 천황 중심의 황도유교로 바뀌어야 한다 △왕도 유교가 ‘충’과 ‘효’를 분리해 ‘효’를 강조한 것이라면, 황도유교는 충효 일치가 기반이다 △중화사상은 주변국을 오랑캐로 간주해 포용력이 없지만 일본은 세계정신으로 황화(皇化)천하를 선포하며, 조선 병합은 포용의 사례다.

다카하시는 1920년대 대구고보(현 경북고) 교사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 설립 간사 및 교수로서 식민지 조선의 교육방향을 주도했다. 1930년 경학원(구 성균관)을 황국신민 양성을 위한 명륜학원으로 바꾼 뒤, 1940년 11월 내선일체정신을 강조한 ‘왕도유도에서 황도유도로’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1944년 명륜학원을 명륜연성소로 바꾸고 자신이 소장을 맡았다.

김원열 한국기술교육대 강사는 ‘황도유교의 사유체계와 방법론적 문제점에 대한 비판’에서 “황도유교는 일왕을 정점으로 한 봉건적 위계 구조를 바탕으로 한 전체주의적 지배 이념”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다카하시는 ‘조선유학대관’(1923)에서 퇴계 이황을 ‘침잠하는 사색력’을 들어 조선 제일의 학자로 평가했다. 다카하시가 조선 유교사를 정리하면서 노린 것은 “현실의 정치적 권력의 문제를 외면한 채 공허한 논의로 일관하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유리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다카하시의 방법론은 자신의 제자이자 서울대 교수와 성균관대 유교대학장을 역임한 박종홍에게로 이어졌다. 김씨는 “박종홍이 대구고보 교사 시절 쓴 ‘퇴계의 교육사상’이란 논문은 일제 식민지 시기 교육현실을 ‘경(敬)의 결여’로 파악하면서 이황의 ‘경 사상’을 추앙했으나 이런 진단은 민족구성원의 독립투쟁을 가로막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양재혁 교수는 ‘황도유교 비판-유교의 종교화에 대하여’에서 “황도유교가 일본 제국주의 확장을 위한 ‘내선일체, 일시동인(一視同仁)’ 이념을 바탕으로 일왕을 우리 민족의 조상으로 체계화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조선의 정통유학은 정치와 하나였으나 일제의 정-교 분리 정책으로 유교를 이념으로 한 조선조의 실체였던 정치가 파괴되고, 정치의 규범을 담당했던 예(禮)만 종교의 형식으로 남게 됐다고 분석했다. 한국 유교가 황도유교의 국시 아래 종교로 포섭돼 사회과학적 현실정치 문제를 배제했다는 것이다. 현 성균관이 교육인적자원부 산하의 교육기관이 아니라, 문화관광부 산하의 종교분과에 속해 있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그는 “사회 구성이 예의 체계였던 조선시대와 달리 법과 민주 체제가 정착된 지금도 유교가 신분계급사회였던 조선조 규범인 예를 이상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공맹의 논리가 그 시대의 제왕독재를 비판한 것처럼 오늘의 유교 연구도 현실정치 비판을 통한 구체적 삶을 주제로 선택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권인호 대진대 교수는 ‘박종홍의 퇴계철학 비판-황도유교와 국가주의 철학의 원류’에서, 퇴계 철학의 현실과 동떨어진 형이상학적 관념성이 후대에 악용되는 논리구조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천지·남녀·군신·부자·부부 등을 상호보완적 관계가 아니라 상하질서 관계로 변질시킨 주자의 성리학의 ‘이존기비(理尊氣卑)’론이 이황의 성리학에서 재현됐으며, 다카하시는 이 점을 적절히 포착했다. “퇴계 성리학이 일제 강점기에 유교적 사회질서와 절대권력의 정치지배를 정당화하면서 그것에 기생하는 학문연구 풍토를 조성”했을 뿐 아니라, 이후 ”친일-친미-반공 독재자들의 충효교육 및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이용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황도유교의 충효교육 논리가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제국헌법·군인칙유·교육칙어 등과, 한국에서는 박종홍과 박정희의 합작품인 10월 유신과 국민교육헌장, 가정의례준칙과 호주제 등과 사상적 맥락이 닿아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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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의 제도적 결함…새로운 헌정구조 모색을
21세기 한국사회를 위한 학술아젠다(2) 정치개혁과 부패척결

2004년 03월 18일   최장집 고려대

최장집 고려대 정치학

국회에서의 대통령탄핵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정치위기를 몰고 왔다. 현재 한국민주주의는 탄핵을 결행한 야당과 이를 지지하는 정치권 밖의 보수적 동맹세력들의 전략적 개입가능성을 한편으로 하고, 탄핵이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에 저항하는 시민적 공분과 운동의 동원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두 힘 간의 불안한 균형위에 위태롭게 서있다. 이 균형이 깨어진다면 국면적 위기로부터 시작된 사태는 사회의 모든 갈등들을 불러내고 극대화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무정부적 상태로 빠져들른지 모른다.


현실로 나타난 탄핵이 당내문제와 리더십위기에 직면한 두 야당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발전시켜온 헌정체제의 취약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사태를 헌정체제의 중단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의회다수파가 민주화의 결과로 성립한 헌정체제의 가장 핵심부분을 공격하고 마비시킴으로써 헌정체제에 중대한 손상을 가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퇴출위기에 몰린 보수적 야당의 지도부와 의회 밖의 극우적 세력의 동맹이 이러한 사태를 빚어냈다는 사실은 한국민주주의의 커다란 비극이다.

정부 對 의회 대립 일상화

탄핵이라는 정치위기가 갑작스럽게 도래했지만 그러나 큰 사건은 언제나 그러하듯 긴 과정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크게 보면 민주화이후 기득이익에 기초한 보수파들은 대통령선거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그 중심적 지지 세력을 한국사회의 기득이익 외부에 뒀던 김대중, 노무현정부에 이르러 더욱 그러했다. 이번 탄핵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자해적인 방법도 불사하는 결사항전식 투쟁은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구세력들의 이런 정서와 무관하지 않다.


이번 탄핵위기로 드러난 보다 중요한 사실은, 한국의 민주주의도 이제 제도의 문제로부터 구체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간 대통령의 정당과 의회의 다수당이 상이한 분할정부적 상황은 민주화이후 한국정치의 패턴이 됐고, 정부 對 의회의 대결구조는 거의 일상화되다시피 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정부의 개혁은 그만두고라도 정부의 작동 그 자체를 매우 어렵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대통령과 의회가 모두 국민주권을 대표하게 되는 이런 이중대표성의 문제는 대통령중심제에 내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정부의 두 부문 이 충돌할 때 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며,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의한 3권분립은 또 어떻게 작동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피해갈 수는 없게 됐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대통령제를 모델로 한 한국의 대통령제가 미국의 제도디자인과 정반대의 내용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세 개의 정부부문 가운데서 의회를 가장 강한 권력의 중심으로 봤던 미국의 헌법제정자들은, 의회의 권력을 어떻게 견제할 것인가에 제도디자인의 초점을 뒀다. 이와는 반대로 한국의 현행 헌법은 대통령을 견제할 초강력한 권한을 의회에 부여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체제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는 대통령의 권력제한 가능성은 경시됐다.


정당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는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한국정치가 직면한 문제의 중심에는 정당이 있다. 민주주의란 사회의 갈등과 균열이 정당으로 조직되고 그것이 정치경쟁의 중심적 단위가 되는 체제를 말한다. 그러나 민주화이후에도 지속돼온 보수독점적 정당체제는 민주화이후의 사회변화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정당들이 사회의 중요한 갈등과 균열, 그리고 기능적이고 계층적인 이익에 뿌리내리지 못함으로써, 사회의 대표기능과 유권자에 대한 책임의 고리는 더더욱 허약하다. 민주주의의 핵심원리인 대중의 참여, 대표, 책임의 원리가 정당을 통해 구현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정당체제는 기본적으로 사회로부터 괴리된 엘리트간 균열과 단기적 손익계산에 의한 이합집산의 결과물 이상이 아니다. 당 지도부가 사회변화에 대응하는 당내개혁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파국적 전략선택을 결행할 수 있었던 것도 사회로부터 괴리된 당의 자율성과 당내민주주의 결여에 의한 당지도부의 폐쇄성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정당체제가 현재와 같이 보수독점적 엘리트카르텔 구조로서의 성격을 지속하는 한 파국적 정치위기의 가능성은 일상적인 위험요인이 아닐 수 없다.

사회로부터 괴리된 정당체제

이번 사태에 새로운 면이 있다면 사법부의 역할과 관련된 것이다. 한국민주주의의 운명은 이제 헌법재판소 판사들의 양식 즉 “법리적 판단”에 의존하게 됐다. 절차의 순서로 볼 때, 탄핵의 첫출발은 대법관을 위원장으로 한 선관위가 대통령의 정치행위를 선거법 위반으로 결정한 것으로부터 왔다. 그들은 “대통령은 공무원”이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한다고 판결했다. 이와 같은 협애한 해석은, 그 자체가 합법적이냐 아니냐를 떠나 현행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대통령직의 역할과도, 그리고 파당성을 그 본질로 하고 있는 정당정치의 원리와도, 그럼으로써 민주주의의 원리와도 상치한다.


탄핵에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은 탄핵을 정당화하는 헌재의 평결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탄핵이 결정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헌재의 결정에 우리는 어느 정도의 권위를 부여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헌재가 의회의 결정을 번복하는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사태가 종결될 수 있을까. 헌재에 의해 ‘구제된’ 대통령직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한국민주주의의 운명이 9인의 판사들의 평결에 맡겨지게 되기 이전까지 많은 국민들은 헌재가 이런 권한을 갖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또한 헌재 위원들은 누구인지, 얼마나 민주주의가치를 준봉하는지도 이제야 중요한 문제로 인식됐다. 하나의 법과 그 평결이 민주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형식적 절차적 정당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와 규범, 원리에 부응하는 내용적이고 실질적인 정당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사법부의 역할이 증대하는 것에 비례해, 사법부의 구조가 민주화되고, 민주적 내용을 갖춰야 할 필요는 절실하게 제기되고 있다.


오늘의 정치위기 상황에서 한국민주주의를 위해 그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총선이 한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제도적인 차원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만약 국회의 탄핵에 의해 국민주권을 대표하는 대통령직의 운명이 사법부의 법률적 결정에만 의존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발전에 결코 긍정적이지 않다. 주지하듯이 우리의 경우 서유럽의 민주주의국가들처럼 의회의 내각불신임에 대해 정부가 의회해산 및 총선거 실시를 통해 주권자로서 국민의 의사를 물을 수 있는 제도를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사법부의 판결만으로 해소될 수 없는 현재와 같은 정치위기에서, 위기가 악화되기 전에 대통령 탄핵에 대하여 직접 국민의 의사가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다는 것은 천혜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탄핵이 만들어낸 위기의 해결은 무엇이 진정한 국민의 의지인가에 대한 판단에 의해 이뤄져야 하고 그것은 한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에서 투표라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을 통해 국민들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 다른 어떤 결정도 이보다 민주적으로 우월할 수 없다.


탄핵을 주도한 의회다수파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게임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 이러저러한 제도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오늘의 위기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는 가장 부정적인 요인이다. 최근 보수적 언론들이 앞장서 생산해내고 있는 담론들이 보여주듯이, ‘대통령없는 체제’를 미화하거나 혹은 아예 제도적으로 대통령제를 부정하는 경향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 현재 이런 가능성을 억제하면서 정치위기의 악화를 막아주고 있는 것은 광범한 시민적 공분에 기초를 둔 운동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탄핵이라는 방법을 통해 민주주의를 공격한 순간 시민적 공분과 운동의 힘은 16대 국회에 대해 해체를 선언해버렸고 이로써 16대 국회의 권능은 도덕적으로 종식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는 입법권의 행사를 통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국회의 권한과 자격이 그 힘의 원천으로부터 부정된 상황으로 이해돼야 한다.

반정치주의 담론 극복해야

민주화이후 그동안 정치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가치와 관점은 보수적인 주류언론이 주도하는 반정치주의 내지는 탈정치화의 담론에 의해 주도돼왔다. ‘정치가 문제다, 정치는 무능하고 썩었다’ 라는 인식의 확장은 모든 정치적 문제에 대한 해결자를 정치의 영역 밖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사회심리를 부추겼다. 그간 시민운동이 이런 지배적 가치를 선봉에서 강조하고 실천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시민운동의 입장에서 말할 때 이번 탄핵위기를 기존 운동의 한계를 벗어나는 전기로 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오늘날의 탄핵위기는 단순히 야당의 무모한 선택에 기인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국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제도의 결함과도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총선이후 새로운 국회에서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하고 시민적 합의에 기초한 대안들을 만들어내는데 진력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일정한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새로운 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수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2004 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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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 총선과 한국민주주의


홍세화의 마주보기
최장집 고려대 교수와의 대담

다시, 민주주의가 문제다. 1987년 6월의 거리에서 대통령 직선제 쟁취의 함성으로 터져 나왔던 민주주의가 2004년 거리에서 되살아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것이다. 4·15 총선을 앞두고 ‘홍세화의 마주보기’는 최장집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한국의 민주주의와 총선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는 2002년 말 나온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책에서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하며 다시 한번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민주주의와 마주서자고 제안했다.

홍세화
“30년 강고한 지역주의
호락호락하지 않다”

최장집 교수는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가 계층간 불평등이 심화되는 등 질적으로 나빠졌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민주주의를 하려고 했는가’라는 심각한 물음을 던진다. 지난 6일 만난 그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탄핵과 촛불시위, 총선으로 이어지는 2004년 봄, 그는 희망을 보고 있었다.

홍세화=탄핵 정국에 나타난 갈등이 첨예하게 보이지만 어떤 모순이 발견됩니다. 첨예한 대립과는 달리 탄핵 주도세력과 그것을 방어하는 정치세력 사이의 이념적 차이가 별개 없다는 거죠. 후대나 해외에서 보면, 참 이상한 국면이라고 얘기하지 않을까 합니다.

최장집=87년 6월항쟁과 그 결과로서 민주화는 군부 권위주의와 국가 주도형 산업화로 만들어진 기성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갈등이 정당간 경쟁의 과정에서 표출되고 해결되는 것이 민주주의일텐데 실제로는 지역당 구조라는 정당체제적 틀이 이러한 갈등과 대립의 선을 상당히 흐리고 애매하게 했지요. 탄핵정국에 이르기까지 그 틀이 유지되지 않았나 해요. 여·야당 모두 사회의 구체적인 갈등이나 균열을 조직하고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대변하면서 아무도 대변하지 않는 정당체제, 그러면서 실제로는 정치계급화된 스스로의 이익 만을 대변하는 체제가 됐던 거죠. 그러다보니 정당체제는 사회적 요구나 변화로부터 내용적으로 상당히 동떨어져 있게 됐습니다. 보수적인 요구가 있고, 자유주의적인 요구들이 있고, 소외계층이나 노동자 계층의 요구들이 있지만 그 동안의 정당체제가 이러한 차이에 기반을 두고 경쟁했다고 보긴 어렵죠. 이렇게 사회와 유리되어 있다보니 탄핵을 주도했던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결정이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예상할 수 없었던 것 아니겠어요 일반 시민은 탄핵 사태를 의회의 보수적인 정당들이 민주주의 자체를 공격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는데, 그럼으로써 198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대면했어야 할 여러 문제들, 그런데 해결되지 않은 채 누적된 문제들이 이번 탄핵 사태를 통해 갑작스럽게 드러나게 됐다고 봅니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가 다시 선명하게 드러나고, 이것이 총선으로 가는 구도죠. 이것을 보면서 87년 민주항쟁 이후 지난 17년 동안 정치체제의 수준에서 민주주의는 되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정부의 정책이나 정당경쟁의 구도, 사회를 구성하는 하위단위의 조직이나 기구에서 민주화가 이뤄진 정도는 대단히 적다는 생각이 듭니다.

홍/지역주의 정당의 모습이
더 도드라진다는 생각입니다
최/지역주의는 껍데기…
해방직후 신탁-찬탁과 유사하죠

홍=보수라고 뭉뚱그려진 정당체제가 차별성을 지역에서만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번 탄핵 정국은 보수라고 뭉뚱그려졌던 집단에서 수구적인 세력이 스스로 돌출한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최=정당체제가 사회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보수를 대표한다는 정당이 이념적 지향, 정책 등 여러 차원에서 너무 수구적인 면을 강하게 드러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론 형성의 통로나 수단을 보수언론이 쥐고 있고, 그래서 이념적 지향이나 정치적 가치가 지나치게 보수적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회 여러 부문의 상층 엘리트들도 그렇고, 기업계의 인식도 냉전반공주의 시대와 군부 권위주의 산업화 때 형성됐지요. 이들을 주요 지지세력으로 하면서 그간 야당은 시대의 변화나 사회의 요구에 맞지 않게 우리사회 최상층의 협소한 이해를 대변하고 그들의 이념을 반영해온 것이죠.

대담은 곧 총선으로 옮겨갔다. 홍세화 기획위원은 지역주의가 약해지리라고 예상되는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을 통한 영남의 지역주의가 상대적으로 도드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나타냈고, 최장집 교수는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한나라당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홍=보수언론과 상층이 결합돼 있는 것이 한나라당으로 표상되는 보수 정당의 한계성이라는 생각이 들고, 또 지역과도 맞불려 있다고 봅니다. 총선을 통해 지역주의가 약화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는 한편 한나라당이 지역정당이라는 것을 오히려 드러내는 것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합니다.

최=이번 총선이 민주화 이후 그동안 지속됐던 정치적 대표의 체제가 크게 변하는 전환점이라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지역당 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정당체제로 나가는 전환점이죠. 문제는 이런 해체가 곧바로 보다 민주적인 내용을 갖는 정당체제로 나타날 것이냐 아니면 또 다른 변형된 형태의 지역당 구조로 귀결될 것이냐는 겁니다. 아주 협애한 보수적인 이념과 정책을 가지고는 사회 전체의 다양하고 다원적인 갈등이나 요구들을 폭넓게 대변하는 것은 그만두고, 보수적 이익도 제대로 대변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근본적으로 민주화와 더불어 변화했고, 계속 빨리 변하고 있는데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보수는 민주화 이전의 1950, 60년대의 이념에 집착하고 있죠. 내용적으로 보면 탄핵 사태는 엘리트 카르텔의 구조를 특징으로 하는 보수세력들이, 엘리트출신이 아닌 대통령을 수용하기 어려운 어떤 심리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지요. 과거의 향수나 기득권에의 집착 등 자꾸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있고, 지역주의를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유혹이나 욕구도 있습니다. 합리적이며 이성적으로 보수를 대표하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한나라당에게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장집
“탄핵사태 폭발하면서
민주주의 새삼 인식”

홍/한나라당이 탈바꿈할까
보안법이 리트머스 시험지…
최/한나라당은 중간을 향해
열린우리당은 왼쪽으로 더 이동해야

홍=평면적으로 비교해 보면, 충청도에 바탕을 둔 자민련과 호남에 바탕을 둔 민주당, 영남에 지역적 바탕을 둔 한나라당을 비교하면, 결국 영남의 지역주의가 강고했고, 호남이 저항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면 충청도의 지역주의의 가장 약하지 않았나 합니다. 총선을 통해 약한 고리부터 무너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호남에 기반한 민주당의 지지도가 급격히 떨어진 것은 지역주의의 저항적 성격을 민주당이 탄핵 발의를 통해 스스로 방기하는 데서 비롯했다고 여겨집니다. 이에 반해 30년 이상 지역주의의 수혜를 받아왔던 영남의 지역주의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거죠. 마치 민족주의에서 공격적·팽창적 민족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가 다르듯이 영남의 지역주의는 강고하고 좀 다르지 않느냐는 겁니다. 박정희 향수와 맞불려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다시 올라가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럽니다. 지역주의 정당으로서의 모습이 더욱 도드라지게 나타난다는 생각입니다.

최=지역주의는 껍데기라고 생각합니다. 민주화가 진행될 때는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사회세력과 구질서로부터 혜택을 받거나 구질서를 지지했던 사회세력으로 뚜렷이 구분됐습니다. 민주화가 됐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더 강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지역주의는 이런 보편적인 갈등구조를 국지화하거나 분해, 전치시키기 위해 구질서를 옹호하려는 세력들에 의해 동원된 면이 컸습니다. 권위주의냐 민주주의냐 하는 문제를 지역주의라는 렌즈로 들여다보면 문제가 왜곡되어 나타나고 실제와 다른 내용으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민주화 이후의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큰 갈등과 균열이 있었는데 이것이 지역주의라는 해석의 틀을 거치면서 한 바퀴 돌아 지역간 갈등으로 뒤바뀌면서 균열 구도가 흐려졌다고 볼 수 있죠. 마치 해방 직후에 통일된 독립국가를 만드는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균열에서 신탁-반탁이라는 사이비 갈등구조가 만들어지면서 맹목적 대립으로 문제의 본질을 왜곡했던 것과 유사하죠. 지역구도는 기본적으로 엘리트 구도입니다. 사회의 기능적, 계층적 이해가 특정 정당에 의해 다른 경쟁정당과 명시적이고 분명하게 차이를 가지고 대표되지 못하는 조건에서, 일반인들은 정치를 이해하고 자신의 요구를 표출하는 데 있어 혼란스럽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감정적이고 정서적이며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게 됩니다. 지역주의는 이런 정당체제적 조건을 반영하는 현상이지만 사실 따져보면 지역주의는 진정으로 그 지역민들의 이익과 갈등과 요구를 효과적으로 반영하는 게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씨와 같은 정치인들이 티케이의 박정희 향수를 자극해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런 언어나 발상으로 이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대변하고 따라갈 수 있을지 회의적입니다. 한나라당은 존립을 위해서라도 변해야 할 시점이에요. 변하지 않으면 계속 소수당이 될 수밖에 없죠.

한국 민주주의 가장 큰 문제는 사실상 보수와 극우 만을 대표하는 정치적 대표체제라고 최장집 교수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정당체제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홍/민주화 이후에 한국사회가
더 나빠졌다고 하셨는데…
최/소득분배구조 급격히 악회됐습니다
무엇위해 민주주의 하자 했는지…

홍=한나라당이 탈바꿈할 수 있을까요. 탈냉전 상황에서 변한다는 뜻인데 국가보안법이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생각해요. 그 문제를 대입하면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최=국가보안법은 냉전의 상징이고 실제 그 시대를 지배했던 통치의 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사회가 개방적이고 다원적이 돼야 하는데 국보법은 이를 어렵게 하는 제도적 제약으로 작용합니다. 냉전 시기를 통하여 국보법은 사실상 헌법보다 상위에 있는 법이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우리나라를 실제로 규율하는 법체계는 아직도 민주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있죠. 과거 냉전 시대라면 몰라도 민주화가 됐고 탈냉전이 시대정신이 되고 있는 지금에서조차 국보법에 의해 규율되는 사회가 지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제 국보법이 없이도 이념문제를 스스로 소화하고 남북한 관계를 풀어나가기에 충분히 발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법이 아직 유지돼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우리 국민들을 이념의 차원에서 여전히 계도가 필요한 어린애로 보고 있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닐 거예요.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듯이 국민의 압도적인 다수가 국가보안법 개폐에 찬성하는 데 실제는 왜 안 되느냐 정당 체제와 정치 리더십의 허약함과 직결돼 있다고 봅니다. 정치인들한테 용기가 필요합니다. 국보법 폐지를 말하면 혹시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어 표가 안나올지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두려움 혹은 허위의식에서 벗어나야죠. 최근 국보법의 문제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게 송두율 교수 사건이라고 봅니다. 지식인들이 정치 일반에 대해선 너도나도 비판을 쏟아내는데, 정작 국보법과 송 교수 문제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독일 지식인 사회나 언론, 유럽 전체에서도 송 교수 문제를 보면서 ‘한국이 과연 민주국가냐’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양심의 자유, 내면 세계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민주주의라면 그건 아무런 정신적 기초가 없는 민주주의입니다. 저는 남북한의 경쟁은 끝났다고 봅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북한에 대해 오히려 남한의 정신적, 도덕적 우위를 보다 강하게 지키는 길입니다.

홍=한나라당이 탈바꿈하는 순간 탄핵의 대상으로 삼았던 참여정부, 열린우리당과 과연 어떤 차별성이 있겠는가 하는 측면도 있죠. 정책적 내용적으로 차별성을 보일 것이 없다는 것이 탈바꿈할 수 없게 하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최=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우리의 정당체제가 보수적 스펙트럼에서만 경쟁하고 대표되고 있죠. 절반 이상은 대표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당체제가 재구조화돼야 한다는 겁니다. 보수 일변도의 정당체제에서 사회의 넓은 영역이 대표되고 그 위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거죠. 그럴려면 전체적으로 중간과 왼쪽으로 많이 이동해야죠. 한나라당은 극우를 대표할 게 아니라 보수를 대표하면서 중간을 향해 이동해야 하고, 열린우리당 같이 개혁주의를 자임하는 정당 역시 우리사회 중간층을 두텁게 대변하기 위해 왼쪽으로 더 이동해야 합니다. 한나라당이 변할 때 열린우리당도 변화의 압박을 받게 되겠지요.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싶어하는 정당이 왼쪽으로 이동해서 중산층과 서민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가고, 민주노동당과 같이 노동자와 사회의 소외계층을 대변하려는 정당도 역할을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하는 게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홍=한나라당이 오른쪽의 한계를 규정지으며 되도록 왼쪽으로 가면서 열린우리당을 더 왼쪽으로 가게 하고, 그것이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구조라는 측면에서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말씀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정당이 사회계층의 갈등을 대표하고 표출한다고 할 때 사회계층 간의 갈등을 첨예화하는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거든요. 이것을 수용하느냐 반대하느냐는 문제에서 정치적 지향이 규정될 수밖에 없고, 정당의 성격도 규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합니다. 신자유주의가 칼로 무를 자르듯 전체 구도를 가른다고 할 때 중간층이 두터워지는 정치 이념적 구도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은 아닌가 하는 거죠.

최=신자유주의에 대한 찬반 문제 만으로는 정당의 경쟁축이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는 결의 만으로는 너무 공허하니까요. 신자유주의가 이미 현실이자 제도적 실체로서 기능하고 있는 조건에서 신자유주의를 추상화시켜 말로 부정해버리고는 더 이상 현실을 생각하거나 보지 않게 하죠. 신자유주의에 대한 찬성은 보수고, 재벌은 모두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느냐 하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 가운데 하나인 국제적 규범에 따른 기업 지배구조 개선은 재벌이 가장 반대하는 것이기도 하죠. 우리가 대면해야 할 신자유주의는 여러 층위와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구체화해서 대응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한국적 현실에 맞는 대안적 경제정책의 모색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지식인사회까지 국가보안법 폐지에 미온적이라고 최장집 교수는 목소리를 높였다. 몇해 전 <월간조선>이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그를 사상검증했던 때가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대담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조차 보장되지 않는 한국 민주주의의 정신적 허약성에 대한 얘기로 옮아갔다.

홍=한국은 워낙 국가의 통제 아래서 부작용을 많이 겪어왔는데 이제는 신자유주의 아래서 오히려 국가의 역할을 강조해야 하는 모순적인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한국은 국가의 역할이 크면 권위주의적이라고 생각하게 돼있죠. 민주화라는 것이 시장의 역할을 증대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처럼 이해되기도 했고요. 엄밀하게 말해 그건 민주화가 아니라 자유화죠. 민주화라고 하면 국가를 가급적 약하게 해야 하는 식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데 잘못된 생각이죠. 민주주의도 강력하고 유능한 국가를 필요로 합니다.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오히려 국가의 역할이 더 중요하죠. 왜냐면 민주주의를 통해서 시장에 의미있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국가밖에 없거든요. 시장에서는 돈이 힘이고 경쟁이 그대로 승자와 패자를 결정하고 말지만, 민주주의는 국가를 통하여 시장이 만들어내는 부정적 효과를 완충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 사회의 소외계층이나 중간층, 힘없는 사람들한테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국가의 좋은 정책이 절실한 겁니다. 대통령을 포함해 집권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분권형 국가다 하면서 국가를 가급적 최소 분할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 그건 아니죠.

홍/한국 민주주의 발전에서
이번 총선이 어떤 의미 갖나요?
최/정책선거는 중요한 문제 아니라 봅니다
정당투표가 중요합니다

홍=자유주의가 한국에서 반공을 위한 이념적 슬로건으로 너무 왜곡됐죠. 그것이 지금까지도 우리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열린우리당도 국가보안법 폐지가 아니라 개정이고, 공무원노조와 전교조의 정치적 의사표시에 참여정부가 억압정책을 쓰고 있는 모습이 한국의 자유주의가 얼마나 허약한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최=동감입니다. 서구에서는 자유민주주의라고 할 정도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두 원리가, 서로 갈등하기도 했지만 크게 보면 서로 보완적으로 작용해 현재까지 왔습니다. 아마 ‘자유주의’라는 말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제일 많이 쓰고 강조했을 겁니다, 하하하. 역설이죠. 해방 후 양극화된 이념 대립, 분단, 전쟁을 겪으면서 실제 자유주의의 가치가 발 붙일 틈이 없었고, 한국의 부르주아지들이 서구처럼 절대 군주와 투쟁하면서 상업적 가치, 개인의 인권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권위주의와 결합했고 그래서 자유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없었죠. 거꾸로 민주화 이후에 들어와 자유주의적 규범과 원리의 결핍이 낳은 문제가 더 크게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냉전반공주의나 집단주의적인 정서가 엄청나게 강한 반면 개인의 기본권, 사상과 양심의 자유 등은 턱없이 허약한 현실 때문이기도 하죠. 자유주의를 얘기할 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자유주의는 사적 영역과 시장의 가치를 절대화하는 국가에 반하는 이념이어서 자유주의가 극대화되면 민주주의의 힘을 통해 한 사회 전체의 공익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제약이 클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자유주의의 과도한 강조는 경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민주냐 반민주냐. 최장집 교수는 총선의 성격을 분명히 규정했다. 그러면서 진보정당이 국회에 진출해 보수 독점의 정치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정당체제가 출현할 것이라는데 큰 기대를 걸었다.

홍=민주화 이후에 한국 사회가 더 나빠졌다고 하셨는데, 17대 총선을 보면서 긍정적인 전망을 하고 있습니까

최=정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 뿐 아니라 사회상태로서의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게 중요하죠. 이런 문제의식에서 보니까 민주화 이후 사회지표가 너무 나빠졌다는 데 주목하게 됩니다. 위기라고 할 정도죠. 신자유주의 효과와 결합되면서 실업률 증가, 고용구조의 악화, 중산층 해체, 370만에 이르는 신용불량자 등 소득분배 구조가 급격하게 악화됐습니다. 언론은 중상층의 생활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지식사회는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사회현실로부터 떨어진 추상적이고 안일한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듭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사회의 저변층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주목을 하지 않는가 싶어요. 민주주의, 민주주의, 말은 하는데 무엇을 위해 민주주의를 하자고 했는지, 도대체 민주화 이후 정치적, 사회경제적 수혜자는 누구인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정당체제가 민주화돼야 하고, 사회의 소외계층의 이해를 폭넓게 대변하는 정당이 있어야 하고, 시장이나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민주정부가 기여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측면에서 향후 민주노동당의 역할에 기대를 많이 합니다. 한마디로 민주노동당은 기존 정당들에 비해 종류가 다른 정당이죠. 한나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 다 보수라는 스펙트럼 안에서 경쟁하고, 신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민주노동당은 보수 일변도인 정당 구도에서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는 정당이고 또 그렇게 돼야죠. 의석수가 적더라도 이런 정당의 출현과 역할이 한국민주주의를 위해 중요합니다. 종류가 다른 정당으로부터의 충격이 있어야 정당체제가 바뀌기 때문이죠. 똑같은 정당들끼리 하면 지역당 구조로의 돌아갈 가능성은 언제든 존재합니다. 정당체제의 이념적, 계층적 기반이 넓어져야 그렇게 안 갑니다.

홍=오랫동안 노동과 서민이 배제돼온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의 국회 진출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서 이번 총선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보세요.

최=87년 12월 민주화 이후 최초의 선거에서 지금과 같이 보수적 기반위에서 지역적 차이가 두드러진 정당구도가 형성되었지요. 이런 정치경쟁의 조건이 민주주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계기를 제공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 모릅니다. 정당체제가 우리사회의 민주적 욕구를 억압했다고 할 수 있죠. 탄핵 사태가 폭발하면서 우리사회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됐습니다. 이번 선거는 탄핵에 대한 국민투표라는 성격이 그 핵심이라고 봅니다. 여러 신문과 언론들이 앞다퉈 정책선거, 인물선거를 강조하는 데 그건 적어도 현재의 정당체제 하에선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정책 그 자체만을 보고 정당이나 후보간 비교우위를 판별하라면, 그건 가능하지도 않고 의미도 크지 않습니다. 한나라당이든 민주당, 열린우리당 모두 스스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게 있어야 하고 그 위에서 정책과 인물이 의미를 갖는 것이죠. 정당투표가 중요합니다. 이번 선거결과로 나타나게 될 국민의 의사를 정확히 파악해서 문자 그대로 정당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이념적 스펙트럼을 다원화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정당체제가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의 발전은 없습니다.

정리=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사진=황석주 기자 stonepo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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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人의 시선으로 儒家를 보다 / 경외로운 연구...실제분석 아쉬워
본격서평 :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마르티나 도이힐러 지음, 이훈상 옮김, 아카넷 刊)

2004년 02월 23일   권연웅, 함한희 

▲ © 예스24
이상과 실제 사이의 갈등 설명못해

함한희 / 전북대·문화인류학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나를 사로잡은 것은 두 가지 생각이었다. 20년 가량을 한 연구에 몰두해온 저자의 학문적 열정과 성실함에 대한 감동과, 두 왕조를 넘나들며 해박한 지식과 정교한 논리로 2백50년이란 기간을 연구하는 그의 스케일에 대한 경외감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의 유교화 과정이 우리가 통상 믿어왔던 것과는 달리 17세기 중반이 돼서야 정착됐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한국인들이 전통적 친족집단이라고 알고 있는 적장자 중심의 부계종족사회가 뿌리를 내린 것이 조선 중기 이후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자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당시는 양변적 친족제였음을 보여줬다. 저자는 신유학의 정착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점과 조선의 엘리트들이 고려적인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 장기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비교문화적 관점으로 읽어낸 친족 변화 과정

한국의 친족의 변화과정을 분석하면서 저자가 남다르게 취한 연구방법은 사회인류학 이론의 적용과 비교문화적 관점이었다. 저자는 타자의 눈으로 본 한국 친족의 특징이 중국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적인 토양에서 나온 것임을 힘주어 말했다. 국내연구자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이방인의 눈에는 흥미롭게 비춰졌던 것이다.

익숙해 보여서 우리들의 눈이 그냥 지나쳐 온 중요한 것들을 저자는 놓치지 않았다. 한편, 감동과 경외감으로 읽은 이 역사서 위에 인류학자인 나의 낯선 시선이 몇 군데에서 멈추었다. 그 대목을 짚어보면서 앞으로 한국의 친족연구에 남겨진 과제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저자는 조선사회에 새로운 친족체계가 성립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요인이 신유학의 이데올로기였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친족연구의 분석차원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사회인류학자들은 세 가지 차원에서 친족을 연구해왔다. 첫째는 친족용어를 분석해 친족분류의 특성을 살피는 일이었다. 둘째는 법이나 규칙을 통해서 친족의 제도적인 측면을 연구했다. 셋째는 사회 구성원들의 실제행위를 통해서 친족의 실천적인 면을 다뤘다.


이 책에서 저자는 주로 두 번째 차원에서 친족의 특성을 바라봤다. 고려시대의 친족용어를 잠시 언급한 부분이 있지만, 조선시대의 친족용어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신에 저자는 법전, 상소문, 역사서, 문집, 묘비명 등에 나타나는 관련 사료를 중심으로 친족구조, 조상숭배, 상속과 계승, 혼인과 상장례, 여성의 지위 등의 문제를 다뤘다. 따라서 친족의 제도적 측면과 규칙, 명분과 도덕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친족연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세 번째 차원인 실천적 측면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이 법이나 규율의 구속을 받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국가가 제시한 친족의 모델과 이상에 맞춰서 생활하는 것만은 아니다. 제한된 사료로 고려나 조선 사람들의 행동의 실천적인 측면을 분석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문제는 사료의 부족에서 온다기보다는 연구의 관점과 방법에서 온다. 저자가 중시한 이데올로기는 지배층의 명분은 드러내지만, 그들의 정치적 의도와 경제적인 이해관계는 가리운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했는가를 설명하는 근거라기보다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상의 표현일 뿐이다.

구성원들의 실천적 행위를 중시하는 입장에 서면, 친족의 이상과 실제가 어떻게 갈등하며, 그들이 어디에서 타협점을 찾아내는지를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친족에 대한 사회적 지식이 드러나게 된다. 이 지식이야말로 구성원들의  물질적·상징적 세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진 것이어서 친족연구에 있어서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부안김씨 가문의 한 조상이 1779년에 남긴 상속에 대한 기록을 보면 제사와 종족유지에 필요한 재산을 제외하고는 아들과 딸들에게 재산을 균분상속한다고 적혀있다. 적장자 중심의 부계종족집단이 정착된 지도 1백년이 지난 시점에 향촌사회의 양반들은 차자와 딸에 대한 관습적 상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 처가살이의 관습도 여전해 사위들이 처족과 함께 살면서 자신들의 종족집단을 형성해 나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이상과 실제가 달라진 경우들이다. 이러한 차이가 지방과 계층에 따른 문화적 지체현상인지, 아니면 친족의식의 실제적 구현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왜 조선의 엘리트들은 고려의 양변적 친족조직 대신에 적장자를 우대하는 단계적 부계출계로 변화를 유도했을까하는 질문을 새삼스럽게 던져 보고자 한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신유학적 세계관의 완성을 들고 있다. 신유학에 심취한 조선의 지배계층이 주자가례에 바탕을 둔 종법을 완성시켜 이상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그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가경농지가 축소되고 인구가 증가하는 등 양반층의 경제적 여건이 변화하면서 적장자 중심의 단계부계종족집단의 성립이 촉진됐다.

저자는 이처럼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사회경제적 요인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조선의 친족제도가 이뤄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고려의 양변제의 성립과 운영체계가 설명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됐다면 혼인을 통한 연계(alliance)를 중시하는 친족사회에서 출계(descent)를 중시하는 부계사회로의 전환을 좀더 쉽게 그리고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 터이다.

양반 이외의 계층에 대한 연구 시급

이 책은 역사학자나 사회인류학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저자의 훌륭한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의 친족연구도 한 단계 올라서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이 책에서 보이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봤다. 나아가서 앞으로 우리가 수행해야할 과제도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인류학자의 입장에서는 친족연구의 대상을 확대하고 분석의 차원을 다변화·다각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 책에서는 주로 양반층을 대상으로 친족제도를 연구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부계종족집단의 출현이 비단 양반층에 국한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양반 외 다른 계층을 대상으로 한 친족연구가 시급하다. 또한 법적 차원의 분석도 중요하지만, 구성원들의 행위를 직접 들여다보는 일도 친족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앞으로 역사학과 사회인류학 안에서 이 책이 남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가 전개되기를 바란다.


"숲으로 조망한 조선의 친족사회"

권연웅 / 경북대·한국사

지금부터 약 6백년 전, 조선왕조를 창건한 유학자-관료들은 엄청난 사회개혁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고려시대의 친족구조를 유교의 모델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그 후 2백여 년이 지난 17세기 조선의 친족제도는 고려의 친족제도와 전혀 달라졌으며, 중국과 일본의 친족제도보다도 유교적 이상에 훨씬 더 가까워졌다.


유교의 모델은 물론 가부장제였다. 따라서 동성동본 혼인의 금지, 여자의 재혼 억제, 서얼 차별, 제사와 상복, 양자와 상속에 대한 규제 등 유교적 가족제도의 여러 부분이 시차를 두고 확립됐다. 그 결과 고려시대의 부계+모계의 양계적 친족조직이 부계로 단일화됐고, 모계적 요소는 적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요인으로만 남았다.


이리하여 조선사회는 철저하게 서열화됐다. 친족집단의 구성원들은 남녀, 적서, 장유 등의 기준에 따라서 지위가 결정됐다. 이렇게 구성원들을 한 줄로 세운 결과, 친족 집단은 내부 결속을 강화할 수 있었으며, 그 사회는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여기서 여성과 서얼이 가장 손해를 봤다.


마르티나 도이힐러는 이번에 번역된 저서에서 바로 이 주제를 다뤘다. 책의 원제는 '한국의 유교적 변환'이며, 부제는 '사회와 이데올로기의 연구'다. 한국이 유교화되는 과정에서, 그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 하는 문제를 다뤘다는 뜻이다. 1994년 백승종 서강대 교수는 이 책(원서)에 대한 정치한 서평을 쓴 바 있다.('역사학보' 141집)

한국 친족체계를 보는 새로운 시선

이 책은 여러 가지 미덕을 갖췄다. 첫째는 사료와 기왕의 연구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다. 저자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은 물론이고, 수많은 개인 문집과 예학에 관련된 유교 경전 등 약 150종의 사료를 아주 치밀하게 조사했다. 또 약 3백종의 연구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는데, 여기에 국내의 연구성과는 물론, 일본과 미국 연구자들의 연구도 포함됐다.


저자는 거의 수도자 같이 엄격한 학문적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그는 약 20년 동안 한결같이 이 연구에 정진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문헌들을 천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조선왕조실록'을 독파한 공력도 대단하다. 미국의 한국사 연구자들이 모두 철저하지만, 유럽(스위스) 출신으로 미국(하버드)에서 공부한 저자는 더욱 철저한 것 같다.


이 책의 둘째 미덕은 체계적인 연구방법이다. 저자는 조선시대 2백년 이상의 사회변화를 '유교화'라는 틀 속에 담았으며, 그 변화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사회인류학의 이론을 갈고 닦아서 이용했다. 또 조선의 사회변화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이를 같은 시대의 중국 및 일본의 사회와 비교했다. 그리하여 이 주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전혀 새로운 지평에 올려놓았다.


이 점은 국내의 연구방식과 매우 대조적이다. 해방 이후 국내 학계는 민족과 계급, 근대화와 자본주의 같은 거대 담론 내지 거대 구조에 집착해, 가족제도 같은 주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소수의 연구자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지만, 대개 단편적인 연구에 그치고,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못했다. 사회과학의 분석 틀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고, 비교사적 고찰은 거의 없었다.


가령 1980년대부터 많은 연구자들이 분재기, 족보, 호구단자, 일기 같은 고문서를 이용해 혼인, 제사, 상속, 양자 등 가족제도의 여러 단면들을 밝혀 왔다. 그러나 단편적인 사례 연구에 치중하고, 이들을 구조화하려는 노력은 부족했다. 최재석이나 이광규의 연구도 이러한 점이 빈약해, 해방직후에 김두헌이 간행한 '조선가족제도연구'의 수준을 크게 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 책의 셋째 미덕은 한국사를 보는 저자의 시각, 곧 우리와 다른 시각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한국사라는 숲을 숲 속에서 본다. 물론 숲 속에서도 선 자리(입장)와 보는 각도(시각)에 따라서 대상의 모습이 달라지지만. 저자는 태평양 건너, 대서양 건너 쪽에서 한국사라는 숲을 봤다. 그리고 저자가 본 한국사의 모습은 우리가 본 것과 매우 달랐다.


사실 국내 연구자들과 미국 연구자들이 조선시대를 인식하는 방식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가령 지배층에 관해서, 국내에서는 고려말에 신흥사대부라는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출현해 기득권층을 밀어내고 새로운 왕조를 수립했다고 본다. 또 백년이 지나서 사림파라는 새로운 집단이 출현해 훈구파를 밀어냈다고 하며, 조선후기의 사회변동도 매우 강조한다.


국내 연구자들이 조선사회의 변화와 역동성을 강조하는 반면에, 미국의 연구자들은 사회의 안정과 연속성을 강조한다. 가령 덩컨은 고려-조선 왕조 교체기의 지배층을 같은 집단으로 보고, 와그너는 사화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질적인 집단으로 본다. 또 팔레는 조선후기의 근본적인 사회변동을 인정하지 않으며, 노비제도가 19세기까지 존속한다고 해서 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본다.


조선사회의 참모습은 변화와 지속의 양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기에 따라서 어느 한 쪽이 더 두드러졌을 것이다. 우리가 변화만 강조하고 지속을 외면했다면, 미국 연구자들은 반대 입장에 서서 우리의 역사 인식이 균형과 절제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양반이라는 양지에만 초점을 맞출 때, 팔레는 노비라는 음지에 초점을 맞췄던 것 같다.


요컨대 도이힐러는 우리의 일상인 가족제도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매우 다른 방법으로, 훨씬 더 입체적으로 선명하게 그렸다. 세부 묘사가 모두 정확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으나, 이 책이 한국 가족제도 인식의 지평을 바꾼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은 12년 전에 나왔으나, 어려운 원문을 제대로 이해할 국내 연구자들이 적었다. 이제 번역이 나왔으니, 이 책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현재 한국의 유교적 가족제도는 해체의 과정에 있다. 우리는 21세기 한국의 가족제도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 6백년 전 조선의 지식인들처럼, 새로운 모델을 찾고 이를 구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도이힐러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이것을 묻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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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이상국가 꿈꿨던 조선

강유원(회사원, 철학박사)

저자에 따르면 “조선왕조가 창건되고 100년 동안 사회 문제와 관련해서 보기 드물게 방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저자의 의문 은 여기서 시작된다. 조선 초기의 입법자들은 “어떠한 사회제도 를 바꾸려 했는가?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노력한 것일까?” 저자는 그러한 노력이 “전반적으로 사회 구조와 조직을 부계 이데올로기를 기초로 합리화하는 경향”으로 귀결되었다고 한다. 그러 면 우리는 세부적으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변환은 어떠한 수단을 통해서 행해졌는가? 그러한 변환은 어떤 사회적 영향을 끼쳤는가? 부계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사회 구조와 조직을 변환시키는 일은 직접적으로는 여성의 지위와 관련된다.

조선 건국에 가담한 입법자들은 종법제도를 철저하게 실시하고 친족의 범위를 좁히며 신유학에 근거하여 그것의 실천방안들을 새롭게 해석했다. 제사 는 남계 이데올로기를 살아있는 현실적인 사실로 바꾸었다. “제 사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자신의 출계집단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 한 사회적 의례적 기준을 규정하였다. 의례상의 지위 및 역할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상속권과 상복의 의무이다.” 제사는 상속과 직접 관련되었다. 재산을 상속받는 자가 제사의 의무를 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속은 어떤 방식으로 행해졌는가 ? 저자에 따르면 “새 왕조가 열리고 처음 100년 동안, 상속제는 유교 입법자들이 추진한 사회 개혁 정강 가운데 중요한 부분으 로 대두하였다… 종법을 강조한 새로운 법률은 상속 통로를 수평적인 것에서 수직적인 것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다시 말해서 “제사의 원칙은 장자를 우위에 놓고 동생들은 하위 에 두는 것이며, 이러한 위계 구조가 향후 재산의 분배를 결정하 였다.” 장자가 제사를 책임지게 되므로 이를테면 장자에게 재산 을 몰아주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장자 우위의 원칙이 강조 되었지만 여성들에 대한 재산 분배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

그러다가 “17세기의 경제적 요구들과 의례에 대한 관심이 합쳐 져서 세습 재산의 상속에 큰 변화가 생겼다. 다시 말해서 세습 재산은… 조상들에 대한 부계 자손들의 적절한 제례행위를 지원 하는 수단이 되었다.” 여성들은 제사와 무관한 존재가 되었고 그에 따라 당연히 재산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경제적 독립성을 상실하였다. “결국 재산과 상속의 기제는 남성의 지배영역으로 굳건히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 건국 입법자들의 목표는 표면적으로는 유교적인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교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정치 적 또는 공공의 영역은 가(家)가 직접 확장된 것으로 보았으므로 집안에서의 구속 기준은 공적 세계의 기회에도 적용되었다.

출계집단에서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인정받는 이들만이 정치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유교적인 이상국가는 이런 방식을 통해서 실현시키려 했 던 것이며, 그들이 구상한 국가에서 부계 이데올로기는 가(家)와 국(國)을 일관적으로 이어주는 원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세웠던 원리가 현실 세계에서 구현될 때에는 철저한 배타 성을 띠었다. 조선 초기의 사대부들은 학자일 뿐만 아니라 자신 들의 권력을 지속적으로 장악하여 사회 정치적 질서를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정치 적 사회적 우위를 획득하기 위하여 앞서 본바와 같은 다양한 수 단을 동원했다.

그 결과 “세습 지위와 학문적 성취를 동시에 강조하는 이중성” 이 등장하였으며, “한마디로 사대부는 출계와 세습을 조선시대 정치 생활과 경제 자원을 독점하는 데 잘 활용했다.” 결국 여말 선초의 사대부들이 기획했던 것은 성인의 도의 실현이 아닌 사 회 엘리트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확립과 그것의 현 실적인 관철이었을 뿐이며, 그 여파는 21세기 한국에까지 미치고 있다. 조선 건국 공신 중의 한명인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이 논의되는 요즈음 한번쯤 돌이켜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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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착오’ ‘세대갈등’ 두 불사신을 만나다


작가 김영하씨 ‘실미도’‘태극기 휘날리며’관람기

인기를 넘어 사회현상이 돼버린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의 흥행이유는 이제 영화 자체의 재미나 완성도 이상의 것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영화의 안과 밖을 흥미롭게 읽어왔던 젊은 작가 김영하씨가 두 영화의 폭발요인을 분석했다. 편집자

관객수 1000만과 650만을 넘기고도 여전히 상영중인 두 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보는 일은 과연 진기한 경험이었다. 뒤늦게 극장을 찾은 게으른 관객은 어쩔 수 없이 영화의 안과 밖을 함께 고민하게 된다. 도대체 실미도와 한국전쟁이 지금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길래 이토록 많은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쯤 되면 영화는 완성도나 미학적 성취 같은 사소한() 가치를 홀연 뛰어넘어 연쇄방화나 집단폭동 같은 사회심리학적 분석의 대상으로 바뀐다. 간단히 말해, 무언가가 있(거나 아니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선 <실미도>. 한 번 정리해보자. 영화의 얼개는 이렇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자들이 어딘가 낯선 곳으로 보내진다. 죽도록 고생하지만 곧 새로운 희망과 목표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을 향해 일로매진하는데 돌연 그 목표가 사라지거나 바뀐다. 너무도 억울하여 항의나 해보려다가 결국 엉뚱한 곳에서 죽는다.’ 어딘지 익숙한 이 이야기는 2004년의 한국에선 조급한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변덕에 대한 서사로 읽힌다. 지금의 5, 60대들. 그들은 전쟁통에 태어나, ‘잘 살아보세’를 부르며 ‘조국근대화’에 청춘을 바쳤다. 힘들고 괴로웠지만 세월이 흐르자 희망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아이엠에프라는 것에 뒤통수를 맞았다. 어디 가서 하소연도 제대로 못한 채 직장에서 쫓겨났고 잉여인간이 되었다.

젊은 세대라고 다를 게 없다. 이제 수능은 자격시험에 불과하리라고, 사교육이 필요없는 교육제도를 만들겠다고, 저마다의 특기만 닦고 가꾸면 대학 진학은 문제없으리라는, 그런 호언들을 믿었던 684부대의 수험생들. 웬걸 수능의 난이도는 갈팡질팡, 공교육은 붕괴직전, 학력차별은 그대로다. 아파트는 이제 투기의 수단이 아니고 사용의 대상일 뿐이라는 정부 말에 혹해 90년대 말 집 팔고 태평하게 전세 살던 사람들, 지난해의 부동산 랠리에 망연자실이다. 왜냐고 묻지 마라. 그냥 세상이 바뀐 것이다. 문득 돌아보면 전국이 실미도다. 바이코리아니 뭐니 하며 주식투자를 부추기던 정부와 자본은 개미들이 달려들자 가지고 있던 물량을 대거 풀어 이익을 실현했다. ‘개인투자자야말로 국가 경제의 주인’이라고 부추기던 이들이다. 그러나 주가가 폭락하자 “주식투자는 어디까지나 개인책임”이란다. 마늘 심으래서 심었더니 가격 폭락, 소 키우래서 키웠더니 과잉생산. 치킨집 차렸더니 조류독감이다.

실미도는 바로 이 ‘시대착오’라는 저승사자 이야기다. 조용히 다가와 속삭이는 것이다. ‘넌 끝났어! 왜냐구 시대가 바뀌었거든. 684부대 좋아하시네, 넌 무장공비야!’

총질을 해댄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사실 <태극기 휘날리며>(이하 <태극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태극기’는 신구 양 세대를 아우르는 이야기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유사 아버지(형)인 이진태. 그는 유사 아들(동생) 진석을 ‘사랑’한다. 문제는 그 사랑의 방식을 진석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진석이 볼 때 형 진태의 사랑은 자기만족과 기만에 불과하다. 구두닦이이던 진태는 전쟁을 통해 인정도 받고 태극무공훈장도 타내며 신나게 싸운다. 그러면서도 자꾸 그건 ‘너를 사랑해’서란다. 미칠 노릇이다. 형은 윤리도 이데올로기도 없다. 악행이란 악행은 다 저지른다. 동생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또, ‘다 너를 사랑해서’라고 한다. 동생(신세대)은 형(구세대)의 비윤리, 몰염치, 부도덕이 싫다. 게다가 그걸 사랑의 이름으로 행하는 게 더 싫다. 반면 어느새 괴물이 되어버린 형은, 자기 덕분에 깨끗할 수 있었던 동생이 제 은공을 몰라주는 게 못내 서운하다.

형이 가족주의에 맹목적으로 함몰되어 자기를 파괴하는 동안 동생은 끊임없이 동료에 대한 배려, 타자에 대한 관용 같은 근대적 윤리를 환기시킨다. 전쟁터와 같은 절박한 현실에서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해대고 있는 동생에게 형은 분노를 느끼지만 어쩔 수가 없다.

정리하자면 <태극기>는 현재, 21세기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세대적 갈등에 대한 영화적 표현이다. 구세대는 손에 피도 묻혔고 자식 교육과 생존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 때로는 나쁜 짓도 했다. 그들은 항변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왜 ‘사랑’하니까. 그런데 자식들은 그걸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다. ‘누가 그렇게 해 달래’ 영화 속 진석은 이 땅의 자식들을 대신해 묻는다. ‘날 위해 그랬다고는 제발 말하지 마.’ 서로 환장할 노릇이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세대와 세대 사이의 이 유구한 오해, 이것이야말로 전쟁물이라는 외피에 가려진 신파적 동력이었다.

영화는 후반부에 동생의 돌연한 참회를 끼워넣으며 세대간의 화해를 중재한다. 영리한 전략이다. 갑자기 위로받아 눈물이 핑 도는 구세대와 말이라도 퍼부어 잠깐 후련해진 신세대는 해골과 노인이 되어 만난다.

‘시대 착오’와 ‘세대 갈등’, 이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두 편의 영화가 왜 그토록 많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였는지가 더욱 분명해진다. 핵심은 독재경험이나 분단구조가 아니라 조변석개 자본주의와 가족주의였다. 2004년 봄,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마주친 두 불사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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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한국.중국과는 별개의 국가였다”


요동사

 

중국의 고구려사 귀속 움직임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해를 넘기며 거세지고 있다. 지난 1월 16~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세계유산검토위원회가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유산으로 함께 지정하도록 유네스코에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논란이 그칠 기세가 아니다.

‘고구려를 빼앗길 수 없다’는 감정이 전국민적 규탄 분위기를 북돋우는 배경이다. 대다수 국민은 고구려사가 한국사이지 중국사가 아니며,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인정하는 순간 한국사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현재가 아닌 고대에도 ‘고구려=한민족 국가=한국’이라는 등식이 성립할 수 있을까. 고구려사는 과연 한국사일까, 혹은 고구려는 과연 한국인가? 동아시아 역사를 전공한 김한규 교수(서강대·동양사)는 이렇게 도발적이고, 지금껏 한국인 대부분이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보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김교수는 곧 출간될 <요동사(遼東史)>(문학과지성사)에서, 현재의 고구려사 논쟁을 원점에서부터 뒤엎는 충격적인 역사 해석을 선보이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고대 동아시아에는 현재의 근대 국민국가적 시각으로 바라본 고대사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를 만나, <요동사>의 내용 중 고구려사 대목을 정리했다.

요동사란 말 그대로 요동 지역의 역사를 일컫는다. 김한규 교수는, 지금은 독립된 국가로서 존재하지 않는 요동의 역사를 구명하기 위해 ‘국가’와는 다른 ‘역사공동체’ 개념을 사용했다.

현재 요동(랴오둥 遼東)이라고 하면 대체로 랴오허(遼河)를 중심으로 한 랴오닝성(遼寧省) 일대를 말하지만, 김교수가 말하는 요동은 범위가 훨씬 넓다. 완리장청(萬里長城)이 끝나는 산하이관(山海關) 이북에서 시작해서 지금 중국의 랴오닝성과 지린성(吉林省) 일대, 그리고 한반도 북부 일대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만주라 부르고, 중국에서 동북이라 부르는 지역이다(김교수는 중국에서 쓰는 ‘동북’이나 일본이 정치적으로 확산한 ‘만주’라는 말보다 주나라 때부터 문헌에서 써왔던 요동이라는 용어가 이 지역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적합한 명칭이라고 주장한다).

청(淸)이 3백 년간 중국을 지배하면서 중국과 융합되기 전까지, 전통 시대 중국인들은 산하이관 장성 북쪽 지역을 중국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한국도 마찬가지.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대동강 이북이나 함경도 등 한반도 북쪽 지역에 대해서는 ‘우리 땅’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요동은 한국의 일부도 아니고 중국의 일부도 아닌, 제3의 영역이었다. 이처럼 고대 이래 동아시아에는 황허(黃河) 유역의 중국 역사공동체나 한반도 중부 이남의 한국 역사공동체와는 다른 제3의 역사공동체가 있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뿐 아니라, 요·금·원(몽골)·청이 이 지역에서 발원한 국가들이다.

이들 나라 중에는 순수한 요동 국가도 있었지만, 요동을 기반으로 성장해서 한반도나 중국 대륙으로 세력을 확산해 통합 국가가 된 나라가 많았다. 이들 국가들은 한국사나 중국사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편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한국이나 중국과 다른 역사공동체로서 정체성을 유지했다. 김교수는, 이처럼 중국과 한국의 중간 개념으로서 요동을 설정해야만 고대사가 제대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제 고구려사에 대해 살펴보자. 고구려는 요동 지역에서 출현한 다종족 국가였다. 고대 요동 종족인 예맥족의 한 갈래인 맥족(貊族)이 주축이었다. 예족(濊族) 계열의 여러 종족과 말갈족도 고구려인을 구성한 주요 종족이었다. 평양 천도 이후에는 한족(韓族)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고구려는 한국이나 중국과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가졌다. 초기 고구려의 문화는 중국이나 한국과 명료하게 구별된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고구려의 자연 지리 환경과 산업, 관제와 국가 조직, 신앙과 법속, 풍습과 의복 등이 중국이나 한국과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백제와 신라는 같이 삼한에 뿌리를 두었기 때문에 동일한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고구려의 언어는 두 나라와 달랐다는 연구 성과도 있다.

 

김교수는, 고구려인들은 중국인과 동류 의식을 가질 수 없었으며, 한국인과도 한반도로 천도하기 이전까지는 동류 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구려는 평양 천도 후 요동과 한국을 아우르는 통합 국가로서 한국에 편입되었다. 하지만 신라가 3국을 통일한 이후 고구려는 다시 요동사의 일부로 돌아갔다. 고구려 유민 중 일부가 신라와 당으로 분산되었을 뿐, 대부분은 요동에 그냥 남았다. 고구려의 역사 전통 또한 신라나 당(唐)보다는 발해 등 요동 지역에서 등장한 새로운 국가로 이어졌다. 이처럼 고구려는 한국사나 중국사에서는 주변적 위치만을 차지하는 데 반해 요동 역사에서는 핵심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

신라가 당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의 대동강(당시 ‘패수’)을 양국의 경계로 삼은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당이 요동을, 신라가 한국을 각각 지배하는 것을 상호 승인하는 일이었다. 김춘추는 삼국 통일 이후 ‘삼한 통일을 완수했다’고 말한다. 흔히 신라의 통일을 불완전한 통일이라고 말하는데, 당시의 시각으로는 그것이 아니었다. 신라 사람들의 생각으로 보면, 대동강 이북은 한족(韓族) 국가가 아니라 별개 세계인 요동이니까 고구려 전체를 통일할 필요가 없었다.

김교수에 따르면, 한국을 형성하는 데 고구려라는 요소가 일정한 역할을 했고, 따라서 고구려사는 한국사의 일부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고구려사는 중국사의 일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구려는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요동 국가였다. 다음은 김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고구려사 논란을 어떻게 보나?

나는 언론 보도나 정부의 대응, 민중 정서에 대해서는 논할 생각이 없다. 다만 역사학계의 비학문적인 대응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한국 사학계는 고구려사에 대해 거의 아무런 학문적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성과를 쌓지도 못했다. 따라서 현재 중국학계의 역사 ‘왜곡’을 반박하는 국내 학자들의 주장은 정밀한 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최근 정부가 주도해 고구려사 연구센터를 세운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연구비를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같은 내용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연구만 양산할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학자들은 애국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사고 방식과 비논리적 정서에서 벗어나 학문 본연의 객관적 자세를 가져야 한다. 중국학계는 노골적으로 학문이 정치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국학계는 이러한 태도를 비난하면서도 대중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영합하거나 선동하는 등 학문을 현실에 굴절시키는 경향이 농후하게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역사를 보면, 학문을 굴절시키고 역사를 왜곡하면 반드시 그 주체들이 먼저 불행한 결과를 맞이했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민족주의 사관이 극복되어야 할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받았을 때, 한국의 일부 역사학자들은 복국(復國)을 위한 방법으로 민족주의 관점에서 한국사를 재해석했다. 이러한 노력은 나라를 잃은 특수 상황에서 일정한 효과를 얻었으며, 광복 후에도 식민사관을 바로잡는 데 이바지했다. 하지만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민족사관이 식민사관을 극복한다는 명목으로 여전히 기세를 잃지 않는 것은 문제다.


이번 중국의 고구려사 귀속 논란을 일본의 역사 왜곡과 비교하면?

임나일본부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료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물론 이 문제에서도 임나일본부가 아예 없었다고 하는 식의 주장은 문제가 있지만, 고구려사 문제와는 별개니까 논외로 치자. 고구려사 논란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역사 해석의 문제이고, 역사 체계의 문제이다. 고구려사는 한국사이기도 하고 중국사이기도 하지만, 고구려는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요동 국가였다.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하면 본질이 명료해지며, 아전인수 격으로 싸우는 일도 없어진다.

ⓒ 연합뉴스

 

학계 일부에서는 중국이 고조선사도 빼앗으려 한다고 보는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고조선도 요동사의 개념에 포함해서 보아야 한다고 본다. 객관적으로 고조선사를 연구해보면 여러 면에서 한국의 역사 전통과 연결하기가 어렵다. 우리의 역사 서술을 보면 고조선 다음에 삼한을 놓는데, 삼한은 100여 개나 되는 성읍 국가들의 공동체였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초기 국가 형태로 성읍 국가가 출현한다. 반면 고조선은 한나라와 맞서 1년이나 버틴 강대한 고대국가였다. 강대한 고대국가 뒤에 성읍 국가가 따라붙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가. 통탄할 분들이 많겠지만, 한민족의 역사는 삼한에서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하고, 고조선사는 별개 역사 체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서술한다고 해서 고조선이나 고구려·발해가 한국사와 무관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이들 국가가 한국을 형성하는 데 한몫 했기 때문에 한국사로 서술될 수는 있지만, 이들은 요동 국가이지 한국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하기 훨씬 전부터 고조선사나 단군 설화가 우리 역사 서술에 나타나는데.

실제 확인해 보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고조선을 우리 역사에 포함한 것이 몇백 년이 안 된다. 고려 말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부터 나오며, 본격적으로 고조선을 우리 역사로 본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부터다. 삼국 시대에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었다.

김한규 교수는 1999년 <한중관계사1, 2>(아르케)를 펴내고 우여곡절을 겪었다. 대우학술재단 지원으로 완성된 <한중관계사>는 심사위원들의 완강한 출판 반대 의견에 부딪혀 2년이나 지연되다가 간신히 출판되었다. 고구려가 한국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에는 이 책이 중국어로 번역되었지만, ‘제국주의 침략에 복무하고 민족분열주의의 주장을 위해 목적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출판 금지 당하기도 했다.

김교수의 논쟁적인 저작 <요동사>는 2월 중 출판될 예정이다. 한·중 양국의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 학계로부터 동시에 배척받았던 전작처럼, <요동사> 또한 만만치 않은 논란을 부를 것이 예상된다.

안철흥 기자   epigon@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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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은 한국, 중국과 독립된 역사공동체일 수 있는가
본격서평 : 『요동사』(김한규 지음, 문학과지성사 刊, 2004, 742쪽)

2004년 03월 31일   송호정 한국교원대 

 

 

 

 

 

 

 

 

송호정 / 한국교원대·한국사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 등과 이에 맞서는 한국 국민의 내셔널리즘의 부활은 동아시아 사회의 평화 관계에 일정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만주의 고조선·부여사와 고구려사를 두고 한국 역사임을 내세우지 말고 ‘요동사’라는 제3의 역사로 규정해야 한다는 연구서가 발간돼 관심을 끌고 있다. 저자는 이미 '한중관계사'(아르케 刊)라는 책에서 요동지역의 종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한국과 중국간에 펼쳐진 역사를 정리한 바 있다.


저자는 ‘요동사’라는 범주를 말하기 위해 先秦 문헌, 중국 25사, 한중 양측의 '실록' 등 현존하는 일차 사료, 한중 양측의 역사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러 민족(종족)의 民族誌(또는 종족지), 한중일 및 러시아의 방대한 논문들을 낱낱이 살피고 해석한 끝에 ‘요동’을 역사상의 ‘한국’과 ‘중국’ 사이에 존재한 제3의 역사공동체로 보고 있다. 책에서는 오늘날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만주’라고 부르는 곳, 중국인이 ‘동북지방’이라고 부르는 곳, 전통적으로는 ‘요동’이라고 일컬었던 요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예맥계의 조선·부여·고구려 등과 숙신계의 말갈·여진·만주, 동호계의 선비·거란·몽골 등 여러 세력이 번갈아 이 지역사의 중심이 돼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및 요·금·원·청(후금) 등의 여러 나라를 세우고, 명멸한 것으로 파악한다. 특히 ‘요동’을 한반도의 韓人이 주체가 된 신라·백제·고려·조선·대한민국 등 ‘역사상 한국’의 여러 국가들이나 중원에서 출현해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漢人이 세운 秦·漢·魏·晉·수·당·송·명·중화인민공화국 등 ‘역사상 중국’의 여러 국가들과는 구별되는 역사공동체로 파악하고, 요동의 독자적인 역사 체계의 위상과 의의를 인정해 그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요동’을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설정함으로써, 그 동안 요동 지역의 역사를 아전인수격으로 다뤄 온 한국과 중국의 민족주의 혹은 애국주의적 아집이 ‘논리적’으로 극복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우리 역사와 관련해 고조선·부여사나 고구려사, 발해사의 경우도 지리적으로 요동에 위치해, 중국이나 한국의 국가들과는 독립된 별개의 국가라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 학계에 만연돼 있는 민족주의적 시각을 극복하고 동북아시아사라는 큰 시각에서 우리 역사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진전된 역사 이해라 할 수 있다. 최근 학계 일각에서는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을 위해 ‘국사’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데, 모두 저자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주장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방대한 자료를 섭렵해 중국 동북지방에서 펼쳐진 기원전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장시간의 역사를 정리해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저자 자신도 서문에서 문제 제기했듯이 과연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요동사’라는 개념이 역사공동체로서 설정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책을 덮는 순간에도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남아 있다.


저자의 주장을 살펴보려면 먼저 ‘요동’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정리해 봐야 한다. 저자는 ‘요동’의 개념을 현재의 遼河 동쪽지역만을 말하는 좁은 의미의 요동과 만주 평원 전체를 말하는 넓은 의미의 요동으로 구분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 속에서 넓은 의미의 요동 개념이 중국 역사에서 내내 통용돼 왔다고 보고, 바로 그 지역에서 펼쳐진 종족과 국가의 역사를 ‘요동사’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과문인지 몰라도 책 내용처럼 폭넓은 해석과 달리 요동은 漢代 이래 주로 요하 동쪽의 지역만을 뜻하는 개념으로 사용돼 왔다. 책에서 ‘요동’이란 말을 중국 동북지방 전체의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제시한 몇몇 사례를 제외하면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내용 서술에서는 요동이 요하의 동쪽 지역을 의미하고 있다. 때문에 ‘요동’ 개념이 중국 동북지방 전체를 의미하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몇 가지 사례만 가지고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설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인다.


저자는 요동을 별개의 역사공동체라고 보면서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그 지역에서 명멸했던 국가들이 동류의식과 역사의식을 공유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서로 간에 같은 민족이라고 느끼는 자의식은 전근대시기에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전근대 시기 요동 지역(중국 동북지방)에 존재했던 각 종족 국가 간에 공동의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역사공동체 의식을 가졌을 지는 의문이다. 간단하게 고구려와 새외 유목민족간의 대립과 전쟁 기록만을 보아도 두 집단을 같은 역사공동체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책 속의 요동 개념에는 한반도 서북지방도 포함하고 있고, 자연스레 고조선과 고구려의 역사도 넣고 있다. 그러나 역사상 서북한 지역에 흐르는 청천강이 중국 및 새외 민족과 한민족의 경계로서 역할을 해왔던 점을 고려한다면, 평양에 중심을 뒀던 후기 고조선과 평양 천도(427년) 후의 고구려 역사는 ‘요동사’ 속에서 설명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작은 문제이지만 책에서는 ‘요동’이 중국 동북지방을 부르는 역사적 용어라고 보면서 ‘만주’라는 용어에 대해서는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 동북3성(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지역을 우리 입장에서 부른다면 오히려 청나라 때 중국에서 정한 ‘만주’라는 명칭이 개념이 모호한 ‘요동’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말하는 ‘요동사’는 漢代 이후 중국의 華夷觀 속에서 보면 東夷의 역사다. 만일 동이 지역의 여러 종족과 국가사를 중국사나 우리 역사와 분리시켜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설정하려 한다면 중국사나 한국사와 다른 요동지역만의 독자적 공동체를 설정하기 위한 보다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책에서는 ‘중국사’ 속에서 ‘중국’이라는 개념이 중원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위치한 특정한 역사공동체를 가리키는 개념이었다고 보고, 그런 면에서 요동사의 개념 설정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시각의 잣대를 들이대면 어떠한 하나의 넓은 지역에서 존재했던 종족과 국가도 서로 간의 역사 계승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저자의 정리대로라면 예맥계의 국가와 동호계의 국가, 그리고 숙신계의 국가가 명멸한 중국 동북지방에서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어떻게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분명 ‘요동’은 ‘중국’이나 ‘한국’과 같은 특정한 역사공동체, 즉 나라의 명칭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지역 개념을 내포한 말이다. 그곳에는 중국이나 한국과 구별되는 맥·예·거란·여진 등 별개의 역사공동체들이 다수 존재했다. 이 여러 개별 역사공동체들을 요동사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을지는 앞으로 역사공동체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포함해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한국고대사와 역사고고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계절의 '한국생활사박물관' 시리즈 중 '고조선생활관'과 '백제생활관'에서 고대 한국인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저서로는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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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우 2004-02-07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시님의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 혹은 "만들어진 고대"를 보면 이와 유사한 관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특히 만들어진 고대는 당시현재의 관점에서 고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정치적 의도가 예리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열린 시각으로 검토하고 우리 것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해보는 자세가 정말 필요할 때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빠기 2004-02-1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긍이 가는 이야기지만, ' 고구려사는 한국사이기도 하고 중국사이기도 하지만, 고구려는 한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닌 요동 국가였다.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하면 본질이 명료해지며, 아전인수 격으로 싸우는 일도 없어진다.' 이 부분은 약간 이상하군요. 뻔히 그들도 알면서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는 건데...그래야 지금 써먹을 게 많잖아요?

간달프 2004-02-27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뻔히 알면서 (혹은 자기도 모르게)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고구려를 한민족만의 영광의 순간으로 '배타적으로' 기억하려드는 한국이나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배타적으로' 편입하려는 중국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고구려는 그냥 고구려로 보는 것이 옳겠죠. 국가와 역사공동체 개념을 엄밀하게 구분하자는 말은 그 뜻일 겁니다. 그럼 여기서 문제는 '그들이 아전인수격으로 가니까 우리도 아전인수의 방식을 고수해야 하는가' 혹은 '정치적으로 도전해 오는 것을 학문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적절한가' 등과 같은 문제가 남네요. 이에 대해서 본인의 생각은 '특정한 방향의 정치적 도전에 대해서는 더욱 설득력이 있는 또 다른 방향의 정치적 대응으로 가야 한다'입니다. 현재의 고구려를 둘러싼 중국과 한국의 대립은 일란성 쌍둥이 관계라고 봅니다. '배타성의 정치'란 한 알에서 나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답은 배타성을 타파하는 정치적 비젼에 있겠지요.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재 한국은 그런 대안적인 정치적 비젼을 제공할 만한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 같군요.
(사족)저자의 요동국가론은 요동이란 불리우는 지역에 다른 문화와는 차별적인 문화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필요한데 이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고 여겨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