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국사’의 굴레를 벗어던져라

[학술- 다시, 동아시아!]

‘역사전쟁’을 재생산하는 동아시아 역사인식의 문제점…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생관계

▣ 임지현/ 한양대 교수 · 사학과

1992년 부다페스트의 한 강연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홉스봄(Eric J. Hobsbawm)은 역사학이 핵물리학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다는 뒤늦은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 있다. 모든 역사가는 예기치 않게 정치가가 되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변이었다. 비단 동아시아의 역사학계뿐만 아니라 권력판과 시민사회를 뜨겁게 달군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이 북한의 핵무장이나 일본의 재무장 못지않게 동아시아의 평화 체제를 위협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 아시안컵 결승전에서 일본에 진 뒤 베이징 거리에 모인 중국 시민들. 과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밑바닥에는 현재의 국가간 대립과 갈등이 숨어 있다.
(사진/ AP연합)

갈등의 촉매제로 작용하는 역사

과거에 대한 이해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의 밑바닥에는 사실상 현재의 국가간 대립과 갈등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이오유·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일본·중국·대만의 갈등, 쿠릴·치시마 열도를 놓고 벌이는 러시아와 일본의 신경전, 독도·죽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오랜 영토분쟁 등이 역사전쟁의 정치적 배경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 파동에서 시작되어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한층 가열된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은 과거의 역사적 실체를 사실적으로 구명한다고 해서 해소될 성격의 것은 아니다. 각국은 모두 문제가 되는 영토에 대한 자신들의 영유권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쟁에서 역사는 해결책이 아니라 갈등을 유발하고 증폭하는 촉매의 역할을 한다. 다이오유·센카쿠 열도나 독도·죽도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이 가끔씩 국기를 들고 상륙하는 해프닝을 벌일 뿐, 자연적인 거주민이 없는 무인도이다. 어느 나라도 그 영토에 거주하는 주민들과의 문화적 유대를 주장할 현실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곳이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라는 각국의 주장은 과거 역사와의 관련 속에서만 정당화될 뿐이다. 이때 역사학은 영토 분쟁의 학문적 첨병으로 복무한다. 유럽의 역사전쟁에서도 잘 드러났듯이, 때때로 고고학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많은 경우, ‘역사적 진실’은 역사전쟁의 정치학을 학문의 이름으로 혹은 진실의 이름으로 은폐할 뿐이다.

역사전쟁의 가장 큰 인식론적 특징은 근대 국민국가의 주권 개념이 먼 과거에 개념적으로 개입한다는 점이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를 중국사의 공간적 범주로 규정하는 중국의 공식적 역사인식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반도 북부에도 일부 걸쳐 있었지만, 만주의 큰 부분을 차지했던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의 시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에 대해 한국의 주류 역사학계는 문화적·형질적 연속성을 근거로 고구려사를 한국사의 일부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한국 역사학계와 시민사회의 주류는 역사적 정통의 계승을 강조하는 ‘역사 주권’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중국의 ‘국가 주권’적 관점에 비하면 한국의 ‘역사 주권’적 관점은 근대 국민국가의 시각을 먼 과거에 그대로 투영하는 시대착오주의에서 다소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독도와 센카쿠열도 등의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에서 보듯이, ‘역사 주권’은 이 섬들에 대한 ‘국가 주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곧 비약된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고토수복’을 외치며 한국의 주권을 만주 지역까지 넓히자는 일부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의 주장도 따지고 보면 ‘역사 주권’을 근거로 하고 있다. 과거에 대해 ‘국가 주권’을 고집하는 중국이나 이에 맞서 ‘역사 주권’을 주장하는 한국은 모두 근대 국민국가의 ‘국경’ 개념을 역사의 ‘변경’에 뒤집어씌우기는 마찬가지이다.

지도 위에 컴퍼스와 연필로 확실한 선을 그어 결정되는 근대 국민국가의 ‘국경’과는 달리 역사의 ‘변경’은 단일한 선을 가로질러 넘나드는 복수의 점들로 산포되어 있다. 변경은 이질적인 언어와 문화, 풍습 등을 지닌 다양한 종족들이 만나 서로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의 가교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다양한 문화가 혼합된 다이내믹한 독자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공간이다. 고구려의 역사가 가지는 의미도 한반도와 만주, 대륙의 서로 다른 문화와 종족 등이 혼합되어 만들어간 다양성과 역동성 그리고 그것이 대륙과 한반도에 미친 영향력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 중국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는 집회.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은 과거의 역사적 실체를 사실적으로 규명한다고 해서 해소될 성격의 것은 아니다. (사진/ 류우종 기자)

‘국경’에서 ‘변경’을 구출하라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나 한국사 어느 한쪽에 귀속시킬 것이 아니라, 중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고구려인들을 역사적으로 복권시켜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쿠카와막부의 가신이자 조선 왕의 신하였던 쓰시마 영주와 그 섬의 과거를 일본사에서 구출하여, 동아시아의 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변경’의 역사로 복원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한국사로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오해하지는 마시기를!). 자신에게 익숙한 지역의 과거가 자기 민족만의 독점적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태도야말로 동아시아의 역사인식이 갖는 큰 문제인 것이다. ‘과거는 외국’인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가 함축하는 그들의 민족주의에 대한 한국의 주류 학계나 시민사회의 대응은 우리의 민족주의였다. 19세기 독일의 문헌학적 전통이나 랑케류의 실증사학이 이미 독일의 역사를 발명하고 모든 나라의 국사를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임에도, 한국의 역사학계가 반론으로 제시한 역사적 실체나 진실은 아무리 객관성이나 과학성으로 포장해도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해석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를 지지하는 <산케이신문>이 일본의 우익 수정주의 역사가들에게 한국의 국정 역사교과서를 본받으라는 사설을 게재했을 때, 이미 한국 역사학계의 민족주의적 대응방식은 사실상 전략적 파산을 선고받은 것이었다. 일본의 ‘새 역사교과서’보다 더 강한 민족주의적 색채를 띤 한국 국정교과서의 해석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은 국내에서는 통용될지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의 민족주의는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고 타자화한다는 점에서 현상적으로는 첨예하게 충돌하지만, 사유의 기본적인 틀과 이데올로기적인 전략을 공유하는 것이다. 한반도의 민족주의 혹은 그 역사적 해석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신민족주의 역사학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 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동아시아의 민족주의가 맺고 있는 적대적 공범 관계의 은폐된 현실을 직시한다면,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 그들의 민족주의 앞에서 우리의 민족주의를 무장해제시킨다는 단순논리는 더 이상 현실의 비판을 견뎌낼 수 없다. 한국의 ‘국사’를 정사로 놓고, 중국이나 일본의 ‘국사’가 틀렸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고구려사에 국한해보자면, ‘국경’에서 ‘변경’을 구출하는 것이야말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가장 신랄하고 날카로운 비판의 무기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일말의 여지 없이 당연시되는 ‘국사’는 일제의 용어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민족과 국가를 역사의 주체이자 발전의 정점으로 간주함으로써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을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하는 효과적인 권력의 기제이다. ‘국사’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한, 동아시아의 역사학은 권력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획일적 ‘국민’ 주체를 만드는 규율 권력의 기제로 작동할 것이다.

국사의 해체와 역사학의 민주화

한국, 북한, 중국,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 5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국사’를 해체하고 국가의 멍에로부터 역사학을 민주화할 때, 동아시아 민중연대와 평화체제가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시민사회의 역사의식이 민족주의적으로 규율화되어 있는 한, 역사전쟁은 소재와 형식을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그것은 다시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 관계를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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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달프 2004-08-20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우기만 하는 동아시아(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지난 몇 해 사이 한국의 지식사회에서는 동아시아 공동체 담론이 관심을 끌었다. 분쟁과 갈등의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공존의 미래로 나아가자는 발상에서 모범 케이스가 된 것은 유럽연합(EU)이다. 그런데 유럽연합과 동아시아 공동체론은 논의의 형성 시기와 성장배경, 관련 국가들의 태도에서 차이가 있다.
유럽연합은 냉전 시기에 태동하여 반소 서방사회에 편입된 나라들을 주축으로 발전했다. 상호갈등과 전쟁의 역사를 극복하겠다는 의지도 의지였거니와, 정치적으로는 ‘공동의 적’에 대응하고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일본에 맞서 보겠다는 의지가 유럽인들의 결속을 촉진했다. 미국은 반소 진영에 유럽을 묶어두는 데 관심이 있었으므로 이를 가로막지 않았다. 석탄철강공동체라는 맹아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유럽연합이 형성되었을 때에는 이미 냉전이 끝났고, 과거 사회주의 진영에 속했던 나라들까지 차츰 포함되고 있지만 이제는 강력해진 유럽을 막을 세력이 없다.

최근 이라크전을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이 대립한 것은 미국으로서는 역사의 아이러니라 여길 법한 일이다.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개별국가들이 대외관계에서 너무나 다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다. 남한은 당분간은 한-미 동맹을 우선할 것이고, 아시아의 일원으로 머무르는 데 만족지 못하는 일본 또한 미국과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삼을 테지만, 중국은 미국과의 패권경쟁도 마다하지 않을 태세이다. 북한과 대만도 고려되어야 할 터인데, 그림이 어떠한가.

그리고 유럽 연합의 구성원들은 국력이 엇비슷하여 유럽연합 가입으로 특정한 패권세력에게 주권을 상실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독일이 패권 추구적 야심을 드러냈지만 혹독한 징벌을 받은 후에는 유럽 내에서의 평화공존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바꾼 적이 없다. 주변국들도 독일을 신뢰하게 되었고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한 유럽통합 운동에 동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적어도 자신들 사이에서는 공통의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합의가 형성되었다. 이에는 유럽에서 줄기차게 전개된 평화운동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는 어떤가? 중국과 대만 사이의 긴장은 남북한 긴장보다도 더 심하다. 일본은 재무장 논의 때문에 주변국들의 불신을 사고 있는데, 재무장 논의에 빌미를 준 것은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핵무기 보유 논쟁이었다. 그런 일본은 중국이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사들여 군비를 증강하고 있다고(그것은 사실이다) 비난하고 있다. 그 가운데 끼인 남한은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대외정책에서 힘이 없다. 상호군축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역사 왜곡 문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튀어나와 소모적인 국수주의적 논란의 빌미를 제공하곤 하는데, 이번에는 중국이 고구려사와 관련하여 어지러운 행보를 하고 나섰다. 소수민족 통제 차원일 수도 있겠고, 패권주의의 발로일 수도 있겠으나, 역사 해석을 국가기관이 주도하는 관제사학의 풍토 아래서는 시민적 역사연구가 지극히 어렵고, 역사논쟁이 그대로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다. 덧붙인다면, 남한에서 전개되었던 간도 되찾기 운동을 비롯한 민족주의적 대응도 중국으로서는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아직까지 상호불신의 요인들이 너무나 많다. 합리적인 규칙보다 떼쓰기와 호전성 과시가 앞서기도 한다. 동아시아국가들은 한자 문화권에 오랫동안 속해 있었다는 공통성과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인적·문화적 교류를 강화해 왔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진정한 상호존중과 평화공영을 지향한다는 공동선언은 나오지 않았다. 공동체론은 고사하고 최소한 상호불신을 제거하기 위한 논의의 틀부터 마련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이를 관철해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