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 
 
 
 연재의 변

우리, 쉴 만큼 쉬었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천학비재하기 짝이 없는 필자가 이번 호부터 월간 『말』의 연재를 맡게 되었고, 그 주제는 세상에나(!), ‘새로운 진보 이념의 지평을 찾아서’라는 엄청난 것이어서 첫회부터 쥐구멍이 그립다. 그런 주제에 왜 시작하기로 했을까. 물론 『말』지 편집장의 고도의 최면술(?)도 주효했지만, ‘더 쉬었다가는 우리들 팔다리, 머리, 허리 다 굳는다. 누구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위기의식 때문이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세상은 인간이 바꾸며, 인간은 행동으로 바꾼다. 그 행동은 그의 생각에서 나온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서로 뗄 수 없는 하나이며 동일한 과정의 세 국면에 불과하다. 만약 그 세 가지가 떨어지게 되면 생각도 제대로 된 생각이 아니요, 행동도 제 정신 가진 행동이 아니요, 세상의 변혁도 사이비 변혁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회만 썩고 정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들의 삶 또한 권태와 허무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10년 쉬었으면 충분하다. 이제 우리들이 1990년대 상황에서 엉겁결에 내걸었던 ‘진보’라는 말의 내용을 채우고, 그와 동시에 집단적인 실천과 고민을 시작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일어나자고 깨우러 다니는 소리는 꼭 아름답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오히려 신경 거슬리게 꽥꽥거려서 ‘저 놈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만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야말로 효과만점이다. 필자가 앞으로 쓸 글이 ‘무식한 놈이 헛소리를 하는구나. 진보는 그런 것이 아니다’는 경멸 어린 논쟁을 불러일으킨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 나서서 몸으로 때울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러면 이 연재가 앞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방법과 방향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진보’라는 말의 뜻부터 살펴보겠다.

진보. 영어로는 progress.
앞으로(pro) 나아간다(gress)는 말이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그 ‘앞으로’는 어느 방향인가. 혹시 ‘역사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발전한다’는 ‘유물사관’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말인가. 그렇다면 ‘진보적’이라는 말은 그 내용에 있어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이란 뜻이며 단지 완곡 어법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수구우익의 ‘빨갱이들의 위장 전술’이라는 비방도 일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진보’라는 용어는 서양의 전통


사실 이 진보라는 관념은 서양 문명의 독특한 ‘직선적 역사관’에서 파생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어째서 신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냐’는 현실의 모순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직선적 역사관을 꺼내든다. 인간의 역사는 창조-타락-구원의 역사적 과정을 밟아 ‘진보’하는 것이 ‘발전법칙’이란 것이다. 그래서 비록 지금 이 세상에 부조리와 악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종국에 가서는 신의 뜻이 땅에도 이루어지게 될 날이 온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서양 사상에 계속 따라붙게 되는, ‘역사는 신의 섭리(Providence)가 실현되는 진보의 역사이다’는 관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기에도 이 ‘직선적 역사관’이라는 사고방식은 계속된다. 단지 신의 섭리라는 구닥다리 용어가 ‘이성의 실현’이라고 옷만 바꾸어 입었을 뿐. 칸트는 ‘이성의 보편적 실현’으로 나아가는 것이 세계사의 발전 법칙이라고 분명히 선포하며, 다른 면에서는 칸트의 적수였던 헤겔도 이 점에 있어서는 한술 더 떠 아예 세계사를 샅샅이 뒤져 어떻게 이성이 발전해 왔는지까지 늘어놓는다. 그 결과 그리스와 게르만의 세계는 페르시아와 중국에 비해서 훨씬 더 ‘진보’된 사회라는 판단기준까지 나오게 된다. 19세기 산업혁명의 시대에 들어서 그 ‘이성의 실현’이라는 것이 다시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물질적 옷으로 바꾸어 입기는 했지만, 이 직선적 역사관 및 진보의 관념이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에 고스란히 내려와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결국 이 ‘진보’라는 말에는 아주 기묘한 전제들과 사고방식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역사는 어떤 초월적인 섭리에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진보’라는 사회정치철학의 정당성도 거기서 나온다. 그 발전 방향에 맞추어 부응하는 것만이 인간과 사회가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러한 서양적 전통의 진보주의는 비상한 힘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엄청난 양의 논리와 자료를 퍼부어 대면서 ‘이렇게 가는 게 신과 역사의 뜻’이라는데 감히 뭐라 할 것인가. 그러한 믿음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는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 속에서 행복과 생명을 희생한 수많은 이들의 존재가 증명한다.

그런데 이 논리는 ‘믿지 않은 자들’의 손에 걸리면 숱한 맹점을 노출하게 된다.
첫째, ‘보수주의자’들의 경우이다. 역사가 그렇게 신의 뜻을 향해 일직선으로 간다고 치자. 그렇다면 현존하는 사회질서 또한 그러한 ‘신의 섭리’가 만들어낸 것이니, 거기에도 신성하고 소중한 것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어째서 그 ‘입만 놀리는 진보주의자’들의 논리와 주장에만 신의 뜻이 있다는 것인가. 기성체제의 합리성을 더 살리고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러한 보수주의자들이 나타나서 목청을 세우게 되면, 진보주의는 이제 ‘신의 섭리의 선지자’라는 절대적 위치를 상실하고, 보수주의의 상대적 개념으로 왜소하게 되고 만다.

더 골치 아픈 일이 있다. 그 ‘역사발전 법칙’이란 것 자체가 현실에 영 맞아떨어지지 않은 것으로 판명나 버린다면?

비장했던 진보의 외침은 순식간에 우스꽝스런 코미디가 되어버린다. 공산주의의 현실과 몰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린 1990년대 이후 이제 과연 그 ‘법칙으로서의 진보’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보수주의자들은 드디어 파리떼처럼 일제히 날아올라 ‘현존하는 세상은 역사의 완성이다. 더 이상의 진보란 없다’고 왱왱거리기 시작한다.

유물사관도 믿지 않으면서 진보주의를 신봉하고 있다면,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어디로 진보하자는 것인가?”


‘progress’가 아닌 ‘進步’


그런데 우리가 이 직선적인 역사관이라는 서양인들의 독특한 풍습에 기대어 진보를 정의해야 한다는 무슨 법이 있는가? ‘유럽 안의 비유럽’인 사르디니아 섬에서 나온 촌놈 안토니오 그람시는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그 역사발전 법칙이라는 유령 대신 그는 ‘해방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에 기대어 진보의 길을 찾아나간다.

어려울 것 하나 없다. 인간이 인간다운 모습과 삶을 회복하기 위해 움직이고 생각하려는 의지는 무슨 시간에 따라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 어느 시기에나 동일하게 발견되는 인간의 본질이다. 그래서 그는 1910년대에 쓴 어느 논문에서 마르크스주의자, 자코뱅, 토마스 뮌처, 스파르타쿠스 등을 동일한 시간 지평에 함께 놓고 논하고 있다.

칼 폴라니도 동일한 생각을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많은 것들은 시장 자본주의와 동전의 양면으로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신분사회에서 우리에게 직업이란 거의 세습으로 주어졌으므로, 시장 자본주의의 ‘계약적 고용관계’가 출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직업선택의 자유’라는 것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노동시장의 출현은 동시에 가혹한 착취, 고용의 불안정, 대량 실업 같은 끔찍한 재난을 낳기도 했다. 여기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이에크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그러한 재난을 ‘자유를 위한 대가’로 감수하라고 강요한다. 한편 나치 등의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반대로 자유를 포기하고 중세 때나 마찬가지의 국가통제의 노동조직으로 되돌아가자고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직업선택의 자유와 안정된 노동조건이라는 것은 모두 옷과 밥만큼이나 소중한 것들이 아닌가. 옷을 취하면 밥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 왜 둘 다 취할 수 없단 말인가. 직업선택인 자유를 움켜쥐고서 우리 노동조건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은 왜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폴라니가 생각한 사회주의는 무슨 ‘역사발전의 마지막 단계’ 따위가 아니다. 그러한 새로운 실험을 위해서 사람들이 끌어안고 같이 용감하게 미래로 ‘발걸음을 떼어 놓는’ 사회를 말한다.

필자는 그래서 그러한 의미를 잘 드러내는 ‘진보(進步)’라는 한자어를 훨씬 좋아한다. 이 progress가 아닌 ‘進步’는 보수주의의 상대 개념이 아니라 보수를 그야말로 ‘지양’(Aufhebung : 포함하면서 초월한다는 뜻)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존 체제의 가치 있는 것들이 수구세력의 잇속으로 인해 변질되고 왜곡되는 것을 막고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결합하여 발전시키는 진정한 ‘보수’는 오로지 진보세력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생 고되게 일해온 힘없는 노인들을 굶주리도록 방치하는 이 사회의 지배세력이 무슨 낯짝으로 ‘유교적 전통’을 떠든단 말인가. 분단과 반공으로 배를 불린 자들이 어떻게 ‘민족’과 ‘자유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는가. ‘유교적 전통’ ‘민족’ ‘자유 민주주의’에 소중히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이제 오롯이 진보세력의 몫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보’는 ‘보수’와 동렬에 놓고 고르는 취향과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하는 자라면 마땅히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는 당위가 된다. 이제 ‘신의 섭리’가 아닌 ‘인간된 가치’라는 새로운 바탕 위에서, 진보는 다시 우리의 지상명령이 된다. 진보에 거스르는 자들은 더 이상 ‘보수주의’라는 그럴 듯한 이름 뒤로 숨지 못할 것이다. 진보의 반대말은 이제 ‘보수’가 아닌 ‘퇴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적 가치’란 휴머니즘인가


이렇게 ‘역사의 발전 법칙’ 대신 ‘인간적 가치의 확보’라는 화두를 내걸었으니 이제 ‘진보’라는 이념의 위기는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도대체 그 인간적 가치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는 질문이 바로 이어지게 되며,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한 진보란 그저 막연한 휴머니즘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 ‘막연한 휴머니즘’ 정도로는 안 될까? 진보진영을 자처하는 일군의 ‘논객’들의 주장처럼, 그저 진보를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 정도로 해두어도 불합리한 현실을 ‘비판’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안 됐지만 충분하지 못하다. 그런 ‘논리적 비판’ 수준으로는 진보진영이 정치세력으로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갈파한 대로, ‘비판’이라는 것은 단지 ‘현실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논리적 모순을 낳게 된 현실의 구조를 해명하고 그 현실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진보 진영이 그런 의미에서의 비판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논객’ 집단이 아닌 현실 정치세력의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진보진영의 이념과 내용이 정치세력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면, 어떤 가치와 어떤 이념으로 어떤 현실 변혁의 청사진과 계획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답을 줄 정도의 구체적이고 적극적(positive)인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모호한 ‘상식’ 수준의 내용으로 어떻게 정치 세력화를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과연 ‘현실의 근본적 변혁’이 그것으로 가능할까? 여기에는 ‘대안적 인간적 가치에 기반한 대안적 사회의 상’이라는 포괄적이고도 체계적인 내용이 필수적이다. 즉 ‘상식’은커녕 ‘상식을 비판할 수 있는 가치와 세계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그 논객들의 ‘상식’은 사실 그들이 속하는 계층의 특이한 사고방식에 불과하기 십상이다. 그 내용도 서양 비판적 지식사회의 최신 유행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카스토리아디스(Cornelius Castoriadis)가 지적했듯이, 1968년 혁명 이후 서구 지식사회에서 나온 담론들 중 자유주의 정치·경제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 있었던가. 따지고 보면 ‘자유주의 좌파’정도에 불과한, 그야말로 기성 질서 내에서의 ‘상식’적인 이야기들이 아니었던가.


소수 지식인들의 ‘댄디즘’을 넘어서


결국 진보이념이 소수 지식인들의 댄디즘을 넘어 대중 정치운동의 이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간적 가치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 밖에는 길이 없다.

그런데 ‘인간적 가치의 구체적 내용’이라니. 보통 심오하고 커다란 질문이 아니라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예수님, 부처님 같은 성인들이 아니고서는 감히 건드려 볼 엄두도 안 난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지나치게 추상적인 인간학이나 윤리학으로 빠져드는 것을 피하고 사회 변혁의 이념과 방법이라는 현실적 맥락을 놓지 않으면서 이 질문에 접근하는 방법은 없을까. 다음에 이어서 살펴볼 문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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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7-15 1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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