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단죄대상인가 기억대상인가
[한겨레 2004-05-24 19:03]

[한겨레] 임지현교수, "'사회적 드러냄'으로 극복" 주장
조희연교수, "독재정당화 오용우려" 지적

2004년 봄, 한국 학계에는 ‘대중독재’라는 묘한 깔때기가 있다. 역사는 단죄가 아니라 ‘드러냄’의 대상이라는 이 깔때기를 거치면, “역사를 심판함으로써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는 생각은 순진한 생각”이 된다.

이런 논쟁적 주장을 본격 제기했던 임지현 교수(한양대 사학과)가 최근 관련 연구성과를 모아 <대중독재>(책세상)라는 책을 냈다. 때맞춰 조희연 교수(성공회대 사회과학부)는 <역사비평> 여름호에서 이른바 ‘대중독재 프로젝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선 임 교수의 <대중독재> 출간은 자신이 주도해 설립한 ‘비교역사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대중독재 개념을 더욱 정교화시키려는 기획의 하나다. 임 교수는 이 책에서 “역사가들이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채택했지만 시민사회의 반응은 차갑기만 했고”, “그러한 현실을 설명해야 하는 역사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때문에 ‘근대 독재’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는 소회를 밝혔다.

결국 문제는 임 교수가 현실을 얼마나 제대로 설명하면서 그 역사의 책무를 수행하고 있는지에 쏠린다. 그는 일단 대중독재론에 대한 ‘차가운 반응’을 단독 돌파하기로 맘먹은 듯 하다. 동료들의 “엉뚱한 힐난과 의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중적 지식인’의 포즈에 연연하는 이들과 비생산적인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현실과 소통하겠다”며 나치즘·파시즘·스탈린주의 등에 대한 공동연구를 전개한 것이다.

이 연구의 지향점은 “강제와 폭력이라는 피상적 이미지의 물밑에서 작동하는 대중의 자발적 동원 메커니즘”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게 임 교수의 주장이다. 그 메커니즘은 “모든 사람이 체제의 희생자이자 지지자”라는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의 말로 집약된다. (독재의 역사 앞에서) 어느 누구도 순전히 희생자는 아니며 모두가 어느 정도는 책임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임 교수는 한걸음 나아가 “하벨의 논리는 사실상 아무도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답변을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부터 대중독재의 깔때기는 ‘역사청산’의 문제의식을 걸러내기 시작한다. “소수의 나쁜 그들에 대한 인적 청산이 곧 역사적 청산은 아니”므로 “법정의 심판을 통해 과거를 단죄하고 청산하는 방식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임 교수의 생각은 분명치 않다. “과거를 드러내 살아있는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때 비로소 과거는 극복될 수 있다”는데, 그것이 임 교수가 중시하는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인지는 일러주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보면, 사실상 휴지조각이 된 친일청산법을 17대 국회 개원 직후 개정하겠다는 시민사회와 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 등의 노력에 대해 임 교수가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역사청산의 ‘현실’은 그 법안을 둘러싼 논란에 집중돼 있는데도 말이다.

<역사비평> 여름호에 ‘박정희 시대의 강압과 동의’라는 글을 실은 조희연 교수도 그런 우려를 전한다. “파시즘의 헤게모니를 당연시하는 오류와 ‘우익화’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임 교수의 학문적 논의는 유석춘·복거일 등에 의해 “파시즘 비판 논리의 확장이 아니라 파시즘 정당화 논리의 징검다리로 활용”된다.

그렇다면 ‘대중독재론’은 일부 우파 인사들에 의해 단지 ‘오독’되는 것에 불과한 걸까. 조 교수는 임 교수의 논리 안에 들어선 오독의 씨앗을 찾는다.

조 교수가 보기에 (파시즘에 대한) 민중의 동의는 항상 지배전략 차원에서 강압과 긴밀한 연관 아래 ‘창출’되는 것이다. 강압없는 동의는 없다. 동의 또한 지배의 한 ‘기획’이다. 여기서 동의의 확장은 △강압에 의해 민중의 인식지평 자체가 제한되는 경우 △권력의 폭력과 강압에 대한 공포가 곧 지배에 대한 동의로 해석되는 경우 △대안부재로 인해 현존하는 강압 지배가 유일한 대안인 경우 등에 의해 이뤄진다. 파시즘의 다양한 지배전략 앞에서 대중(민중)은 과연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얻어 동의의 기반을 자발적으로 창출해낼 수 있을까.

문제는 박정희 체제에 대한 임 교수의 판단에도 있다. 임 교수의 애초 문제인식과는 달리 “박정희는 적극적 동의를 광범위하게 창출해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한 것이 아니다”라는 게 조 교수의 지적이다. 박정희 체제는 18년 동안 10여 차례 이상 위수령·계엄령·긴급조치 등 “통상적 공권력이 아니라 국가강압력의 최후 보루인 군대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체제”였다.

나아가 박정희 체제는 권위주의적 반공·개발동원체제에 기반한 일종의 ‘준전시 또는 의사전시체제’였다. 폭력적·강압적 반공주의라는 ‘공포의 시대’를 거쳐 근대적 개발의 기획을 통해 ‘남북 경쟁’이라는 또다른 반공주의 효과를 강화한 지배체제라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동의창출을 위한 지배전략도 불구하고 박정희 체제는 ‘광범위한 동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데 있다. 오히려 그것은 정치위기의 연속이었으며, 폭력적 강압력의 연속과 이에 대한 저항의 연속이었다. 결국 임 교수가 상정한 그런 ‘동의’는 박정희 시대와는 거리가 멀다. 히틀러 체제의 대중동의를 박정희 체제는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박정희를 설명하기 위해 히틀러를 ‘차용’했던 임 교수는 ‘박정희와 히틀러는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공격에 처했다. 당초의 기획이 박정희 체제에 대한 ‘변호’인지 ‘비판’인지도 의심받고 있다. 과연 대중독재의 ‘깔때기’는 친일·독재에 대한 한국사회의 청산·극복 노력에 의미있는 자양분이 될 수 있을까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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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대중적 기반 분석...'근대권력'과 '독재' 혼동
본격서평 : 『대중독재』(임지현 외 편, 책세상 刊, 2004, 588쪽)
2004년 06월 16일   장문석 서울대 

 
장문석 / 서울대 서양사

‘대중독재: 강제와 동의 사이에서’는 파시즘, 스탈린주의, 박정희 체제 등 각국의 20세기 독재의 경험들을 아우르는, 19편의 논문들로 구성된 풍성하고 흥미로운 연구서다. 저자들 사이의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그 제목에서 명징하게 드러난다. 여기서는 ‘대중독재’라는 자못 도전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쟁점들을 간추려 이 책을 읽은 감상과 소견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근대 독재는 “폭력과 억압이라는 악마적 이미지로 단조롭게 채색돼”왔으나, 실제로 그것은 “위로부터의 강제적 동원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동원의 체제를 구축”했다. 이로부터 이 책은 20세기의 독재가 “강제와 폭력이라는 피상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체제에 대한 대중의 동의”를 광범위하게 향유했다는 점에서 “대중독재”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안한다. 이런 시각은 파격적이기도 하고 평범하기도 하다. 파격적이라 함은 지금까지 독재라고 하면 으레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지배를 떠올리는 사고 습성을 깨뜨릴 것을 이 책이 주문하기 때문이다. 평범하다 함은 잘 생각해 보면 ‘순수한’ 민주주의에서도 경찰과 군대가 상징하는 강제력들이 엄존하듯이 모든 지배에는 동의와 강제의 계기들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강제’와 ‘동원’ 사이의 무인지대 탐색

그런데 독재라는 정치 환경에서 ‘동의’를 말하는 데에는 약간의 난점이 따른다. 과연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동의’를 말할 수 있을까. 독재를 거부할 때 뒤따를 박해와 유배, 그리고 독재를 수용할 때 누릴 경력과 안정 사이에서 선택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런 환경에서라면 사람들은 어느 이탈리아 역사가가 말했듯이 “소수의 공공연한 반란자”이거나, 아니면 “겉으로는 어떤 것을 말하고 속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는 다수의 니고데모”이기 십상이다. 설령 ‘동의’를 말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거기에 존재하는 층위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체제의 가치와 이상에 의식적이고도 자발적으로 점착하는 태도가 있는가하면, 자생적이고 조건부로 독재에 점착하거나 독재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도 이런 ‘동의’의 모호함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가령 저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아코모다시옹(적응)”이라든지 “수동적 동의”, 혹은 “체념적 순응”과 같은 표현들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또한 동의가 강제의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강제가 동의를 배제하지 않는, 다시 말해 강제와 동의가 상호침투돼 있는 “역사 현실의 복합성”을 강조한다는 점도 저자들의 고민과 생각의 깊이를 보여준다. 여하튼 이 점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강제와 동의라는 이분법적 틀을 현실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이 아니라 이 책의 부제가 보여주는 대로 “강제와 동의 사이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무인지대를 탐색하고 드러내는 작업일 것이다.


‘동의’의 문제처럼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이 제시하는 또 다른 논점은 독재가 퇴행이나 정체를 대표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인 변화의 도구였다는 것이다. 가령 독재가 모순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대중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파시즘이 기성의 사회적 가치와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바꾸려고 한, 反 부르주아적이고 평등주의적인 ‘혁명적’ 잠재성을 갖고 있다는 견해도 낯익은 주장이다. 특히 이 책에서 인용된 이탈리아 역사가 에밀리오 젠틸레는 파시즘이 신화, 상징, 의식들을 활용하면서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내려는, 이른바 “인류학적 혁명”을 추구했다고 본다. 확실히 파시즘이 갖는 그런 ‘혁명적’ 차원들을 단순히 선전이나 수사로만 치부해서는 파시즘이 갖는 대중적 호소력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파시즘과 독재, 근대권력의 지형도 위에서 파악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예컨대 이탈리아 파시즘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극히 이질적인 경향들의 ‘반죽’과도 같았다. 게다가 파시즘의 역사는 늘 까다로운 일련의 협상들과 타협들로 점철돼 있었다. 파시즘의 ‘혁명적’ 잠재성은 기성 제도들의 저항에 부딪쳐야 했고, 그럴 때마다 ‘포퓰리즘’과 ‘사회적 데마고기’의 요소들이 파시즘에 착종돼 있음이 드러나곤 했다. 그렇기에 파시즘을 두고 “전구 하나밖에 못 켜는 발전소”라거나 “무거운 진흙 주전자에 달린 약한 손잡이”라는 식의 평가를 내리는 것도 실없는 소리가 아닌 것이다.


한편, 이 책이 독재의 동의적· 대중동원적 차원을 “문명화된 파놉티콘의 전방위적 감시 체제”와 근대적 국민주권론으로 설명하는 대목도 유익하고 계몽적이기는 하지만 논란을 불러일으킴 직하다. 왜냐하면 대중에게 동의를 구하고 그들을 동원하며 주체화하는 과정은 이미 그람시나 푸코와 같은 이론가들이 탁월하게 밝혔듯이 독재의 전유물이 아니라 근대 권력 일반의 속성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대중을 근대 주체로 구성하면서 국민주권을 관철시키는 ‘방식’이 전체주의적/독재적/권위주의적이냐, 아니면 다원주의적/민주주의적/자유주의적이냐 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분명 사소한 것이 아니다. 물론 파시즘과 독재를 근대 권력의 속성과 근거로 설명하는 것은 그것들을 반근대적 현상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비판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파시즘과 독재를 근대 권력의 지형도 위에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갖는 진정한 장점과 가치다. 그럼에도 근대 권력이 구현되는 ‘방식’의 차이를 논하지 않는 한 근대 국가와 근대 독재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혐의를 받기 쉽다.


인식의 모호함은 실천의 모호함을 낳는다. 즉 제도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는 독재의 억압 기제와 심리적-신체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는 근대적 규율 권력의 억압 기제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자는 공존하면서 서로를 제한하고 구속하며 변형시킨다. 따라서 진정 문제가 독재와 관련된 것이라면, 강압적 지배 기구에 대한 비판 없는 내면적 반성은 공허하며, 내면적 반성 없는 강압 기구에 대한 비판은 맹목일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대중독재’가 대중에 ‘의한’ 독재이면서 동시에 대중에 ‘대한’ 독재임을 새삼 확인해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물론 이 책의 실천적인 문제의식, 그러니까 근대 독재의 광범위한 대중적 동의 기반을 밝혀냄으로써 “소수의 사악한 가해자 대 다수의 선량한 희생자”라는 허구적인 이분법을 극복하고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은 완전히 타당하다. 반독재 저항이라는 소수의 경험을 다수의 경험으로 둔갑시키려는 정치적 편의가 우선시되면서 일반 대중이 독재와 공모하고 그것에 연루된 역사가 망각됐고, 그런 정치와 역사의 괴리 속에서 독재자에 대한 향수가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성숙한 시민 의식의 발전이 저해된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철저한 내면적 ? 역사적 반성은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적 현실과의 대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올바른 역사 교육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으며, 거꾸로 정치적 비판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이어야 한다.

필자는 서울대에서 서양사를 전공해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논문으로 ‘19세기 이탈리아 농촌공업화와 ‘유연한 이행’: 비첸티노 지방의 직물공업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만들기, 이탈리아인 만들기: 리소르지멘토와 미완의 국민 형성’,  ‘무솔리니: 두체신화, 파시즘, 이탈리아의 정체성’ 등이 있고, 역서로는 ‘종말의 역사’(공역), ‘만들어진 전통’(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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