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정의를 말하다 - 셰익스피어 희곡에서 배우는 정의
켄지 요시노 지음, 김수림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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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참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만, 사실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 제가 고른 책이라기 보다는 물주(?)이신 엄마의 취향이 백분 반영된 레퍼토리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하면 청소년들이 보통 읽지 않을 법한 책들을 주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동화책을 읽은 기억보다는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고전문학집이 떠오르는데요, 그래서 (도대체 어째서 어린이들에게 "권장하는지" 잘 모르겠는) "테스"라던가 "죄와 벌" 혹은 단테의 "신곡"이나 "분노의 포도" 등을 너무 어린 나이에 읽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대단히 간소화된 에디션이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해하기는 무리더라고요.

아마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가, 어렸을 때 가장 재미있었던 책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역시 청소년을 위한 (셰익스피어의 원작처럼 극 형식이 아닌 소설처럼 풀어쓴) 에디션이었는데, 아직까지도 가장 좋아하는 희곡은 "말괄량이 길들이기"랍니다. 책장이 너덜너덜해질때까지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출생부터 죽음까지 베일에 싸인 신비한 존재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는지는 수 많은 미스테리에 둘러싸여 있지만, 문학 역사에 있어서 그만큼이나 독보적인 존재로서 한 획을 그은 사람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끊임없이 연구되며 회자되는 것이겠지요.

 

오늘 소개할 책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법과 문학"이라는 서로 상극의 관계에 서 있는 두 분야를 연결하고자 하는 대단한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목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셰익스피어, 정의를 말하다"를 함께 만나보시죠.

 

 

 

 

 

셰익스피어 매니아가 소개하는 셰익스피어의 정의

 

이 책의 저자 켄지 요시노 교수는 스스로를 "셰익스피어의 광팬"이라고 선언합니다 (8 페이지). 영문학을 전공한 뒤 로스쿨로 진학한 뒤에도 문학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못하고 고민하던 그는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단지 하나의 "문학"이 아니라 심오한 법적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논문 주제로 채택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스팩터클" 주제는 문제도 많고 탈도 많은지라 그가 가야할 길은 상당히 어렵고 무모해보일 수 밖에 없었지만, 마침내 그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해보일 수 있었고, 그 결과가 바로 "셰익스피어, 정의를 말하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이 그의 논문과 어느정도 관련이 있는지는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지만, 정확한 인용구와 형식, 그리고 색인 등을 참고할 때 아마도 상당수 논문의 내용과 일치할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총 9장동안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현대의 주요 사건 혹은 논제들을 연결시켜 소개합니다. 오제이 심슨 재판이나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지난 몇 십년 동안의 스캔들과 셰익스피어의 작품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하는 것은 처음에는 의아한 일입니다만, 저자가 제시하는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어나가다 보면 정확하게 맞물려가는 두 개의 스토리에 깜짝 놀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셰익스피어는 마치 세상의 이치를 꿰뚫어본 사람처럼 사람들의 심리와 갈등 그리고 그로 인한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데, "세상의 모든 것은 순환한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그의 작품은 실제 사건들과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통찰력과 날카로운 관찰력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또 다른 가치 반열에 올려두는 지도 모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즐거운 것은 역시 셰익스피어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입니다. 스스로를 셰익스피어의 광팬이라고 부를 정도로 셰익스피어 작품세계에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열정을 투자한 그는 (작품이 잘 알려진 것에 비해 대부분) 미궁에 빠져있는 셰익스피어 문학에 대한 다양한 증거와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각 장마다 친절하게 작품의 줄거리와 골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 작품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무리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습니다. 특히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나 "자에는 자로" 등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보다 자세하게 그 줄거리와 등장인물이 설명되어 있어 원작을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충분히 실제 사건과의 연계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In a parallel world

 

"지금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이 세계과 똑같은, 하지만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라는 주장은 이미 수많은 미스테리와 사이언스 픽션 영화 혹은 소설 등에 즐겨 등장하는 테마입니다. 심지어는 나와 같은 사람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며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도플갱어 미신 역시 유럽 등지에서는 널리 퍼져 있을 정도니까요.

 

 

 

 

흔히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그의 과장섞인 문체와 이해할 수 없는 주인공들, 공감하기 힘든 줄거리라던가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이지 못한 전개를 주로 이유로 꼽으시는데요, 이 책을 읽다보면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가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추악한 장면들이 등장하는 것이 결코 과장도, 거짓도 아닌 것임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셰익스피어야 말로 프로이트 이전 이미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보던 대단한 심리학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저자는 효과적으로 셰익스피어 작품의 등장인물들과 현존하는 인물들의 상관관계를 설명합니다. 우리가 연극 속에서만 만나던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우리의 삶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실존하는 인물"들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행세계"를 통해 우리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판단의 오류와 잘못된 전개가 어디 있었느냐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명쾌한 해석과 열린 질문

 

프로이트가 다소 도발적인 이론과 발언으로 인간의 추악한 본질에 대해서 설명하려 했다면, 셰익스피어는 상당히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프로이트는 엄청난 반대와 비판 그리고 질타를 평생 짊어지고 가야 했지만, 셰익스피어는 그와는 상반되게 제대로 신분이 밝혀지지도 않은채로 전 세계 인류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요.

 

그 진위가 어떻던지간에 자신이 결국은 추악한 괴물이며,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을 즐겁게 듣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막장드라마"들은 그 수위가 높을 수록 더욱 더 큰 관심을 받게 됩니다. 결국 사람은 "공감하는 것"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되기 마련인데, 말하기도 거북한 막장 드라마의 내용에 몰입한다는 것은, 그것을 공감하고 있다고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간교한 하인의 술책에 넘어가 무고한 아내를 잔인하게 살해한 오셀로나 마녀들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맥베스 부부가 흥미로운 것은 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이 어느정도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성격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책은 "확실히 이렇다"라고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읽은 뒤 그 내용을 다시한번 되짚어보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증거제시와 연구 발표를 토대로 한 풀 (Pool) 안에서 우리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것이죠.

 

 

 

 

논문 주제라고는 믿겨지지 않을만큼 도발적인 주제 "셰익스피어와 정의의 상관관계"는 이 책을 통해 충분히 검증되고 독자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짐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전될 수 있는 기반을 닦은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근래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제본이나 종이의 품질이 뛰어난 책이랍니다. 중요하지 않지만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임에는 분명하니까요. 권말에는 저자가 제시한 문헌들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어 조금 더 심도있는 분석을 원한다면 참고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러한 문헌 리스트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영문으로 되어있어 우리나라에 해당 문헌이 번역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네요.

 

책을 읽는 내내 어렸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어릴 때라 그런가 셰익스피어의 작품 안에서의 권선징악이 실제 생활에도 통용되는 것이라고 믿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악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살해하면 분명 자신의 죗값을 치루게 된다는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법이 활개를 치고 억울한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가는가 하면 천인공노할 악당이라도 돈이나 연줄로 죽는 날까지 호위호식하며 살기도 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세계에 열광하는 것은, 어쩌면 그의 작품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게 제시할 수 있는 법학적인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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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력
이츠키 히로유키 지음, 채숙향 옮김 / 지식여행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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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 전 고대 그리스의 석판이 하나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수 많은 학자들이 달려들어 그 석판을 해석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그 석판에 쓰였던 말은 다름아닌 다음과 같았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어서 문제다.

 

 

지금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죠. 언제나 나이드신 분들은 "세상이 악해져서", "어쩌려고 이렇게 변하나"라고 탄식하시기 마련인데 지금으로부터 몇 천 년 전서부터 "젊은 세대"에 대한 우려와 비판이 시작되었다니 아이러니 하면서도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튼 기성세대가 새로운 새대를 바라보면서 걱정과 염려의 시선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일본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번 정도는 분명 들어보았을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청춘의 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가 "이츠키 히로유키" 씨 인데요. 1932년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난 그는 올해 칠순을 맞이한 일본문학계의 거장입니다.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청춘의 문"은 2200만부가 팔리면서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는데, 이 뿐만 아니라 그는 다양한 문학활동을 하면서 출판업계의 새로운 기록들을 만들어내었다고 합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나오키 심사위원으로 32년동안 일한 그가 인생의 황혼기에 서서 자신이 경험과 시간을 통해 얻은 삶의 통찰을 들려준 에세이집 "타력"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패전, 난민생활을 거쳐 참 다양하고 극적인 삶을 살아왔던 그가 과연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지혜가 무엇인지 정말로 궁금했습니다. 출시와 함께 일본최대서점인 기노쿠니아 종합 1위를 기록하는가 하면 미국의 "Book of the year" 스피리추얼 부문을 수상한 책, "타력"의 세계로 함께 들어가보실까요.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일을 쓰기 마련입니다만, "타력"에서 이츠키 씨는 자신이 겪은 전쟁의 상흔과 고통의 이야기는 한번도 쓴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쓰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인생의 방향을 바꾸고 평생동안의 영향을 끼칠만한 큰 일을 자신의 작품과 접목싴키지 않겠다는 그의 고백이 조금은 의아했습니다.

 

"그 시기에 보고 체험한 것을 저는 거의 소설에 쓰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평생, 그것을 작품으로 발표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12 페이지)

 

하지만 유독 "타력"에서만큼은 그가 평생 이야기 하지 않았던 "그 때"의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어쩌면 70년의 인생을 살아오면서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의 세계에 대해 많은 생각과 고뇌를 거듭한 그가 마침내 자신의 얻은 지혜 상자를 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타력"은 10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은 서너 페이지를 크게 넘기지 않는 짧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담한 책의 크기를 생각해볼 때 정말 간결하고 컴팩트한 문장들입니다만, 마치 한 편의 시집을 읽는 듯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100개의 장은 어떠한 시스템을 가지고 구성되었다기 보다는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이런 저런 가지를 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 역시 100장을 써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흐르듯이 써내려갔다고 합니다.

 

"이 책에 담긴 100장은 이 책을 위해 새롭게 쓴 문장에, 지금까지 제가 한 잡다한 발언을 모아 수록한 것입니다. 어수선한 구성이나 불충분한 문장이 눈에 띄지만, 살아있는 감각을 살리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해서 일부러 세세하게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읽으면서 아아, 그런가,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느끼면서 살아왔구나, 하고 납득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후기 중, 303 페이지)

 

타력의 전 장에 걸쳐서 느껴지는 것은 그의 "겸손함과 겸허함"입니다. 큰 이름을 가지고 일본문학계의 거장으로 불리우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을만큼 그는 항상 낮은 자세로 인생의 모든 것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기 보다는 이치에 대하여 고민하고 문제를 설정하며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20대인 제가 수많은 인생의 경험과 지혜를 바탕으로 한 그의 문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만, 비록 같은 의견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이러한 겸손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시대의 변화의 흐름에서 바라본 인생 이야기

 

20세기 전반은 일본에게 있어 대단한 흐름의 변화가 넘쳐났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와 맞물려 한국 사람이라면 대부분 제 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침략 그리고 패전을 통한 전쟁의 끝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테지만, 일본 사람의 입장에서 듣는 이야기는 조금은 새로운 느낌입니다.

그는 전쟁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주위 사람은 물론 일본 국민들 대다수가 일본이 전쟁에서 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강하고 상대방이 약하기 때문에 아마 이길 것이다라는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아예 패전 상황을 고려하지도 않은 자신감이라 할 수 있던 상황이었기에, 전쟁의 종결은 일본 국민들 모두에게 더욱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전후에 종종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일본이 질 것을 알고 있었다든가, 포츠담선언 내용이나 패전의 경위는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라는 의기양양한 얼굴의 언설입니다 [...]

그런 종류의 발언을 들을 때마다 저는 머리로 피가 확 치솟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 당신들은 그 일을 우리 같은 어리석은 일반인에게 왜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인가. 멱살을 잡고 추궁하고 싶은 분노를 종종 느끼곤 했습니다." (202-203 페이지)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인생도 180도 바뀌었습니다. 소중한 가족들이 하나 하나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고, 결국은 홀로 남아 긴 세월을 보내며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가족을 잃은 슬픔들을 가슴에 묻어두며 "세상의 이치가 무엇인가" 라고 묻던 그는 여러 방면에서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습니다. 그가 가장 큰 영향을 받으며 그 해답을 발견한 곳은 바로 일본의 불교입니다.

 

"불교는 마이너스에서 시작되는 발상입니다. 태어나는 것, 늙어가는 것, 병을 얻는 것, 그리고 죽어가는 것. 이것만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고 해도 인간에게 있어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죽음'에서 '삶'을 생각한다. '병'은 인간의 동반자임을 인식한다. '노화'를 자연의 리듬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죽음'을 무리해서 멀리하지 않는다. 이는 실로 부정적 사고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75 페이지)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과 자신의 삶의 지혜를 집약시킨 것이 바로 "타력" 인 것 같습니다. 100장 중 상당수가 이러한 상황을 바탕으로 현 세대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는데요, 특히 현대 일본 사회가 점점 극으로 치닫는 것을 보면서 저자는 현재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아끼지 않고 드러냅니다. 특히 1997년에 고배에서 일어난 엽기 연쇄살인범 사카키바라 (그의 본명은 "아즈마 신이치로"로 겨우 14살의 중학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은 사람을 두번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공표했습니다. 그는 초등학생을 유괴하여 살인한 뒤 목을 잘라 인근 방송탑이나 중학교 정문에 올려놓고는 했는데, 영국의 심령학회에서는 이 사건을 아직까지도 어떠한 "초자연적인 존재"가 개입한 사건이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사건이나 옴진리교의 지하철 테러 사건 등을 예로 제시하면서 무엇이 그들이 그런 끔찍하고 잔혹한 행동을 하게 했는지에 대해 고뇌합니다. 그는 죄를 범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보다도 그러한 사건이 일어난 근본적인 이유와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살 수 없다

 

이 책의 중심이자 핵심 키워드인 "타력"의 근원에 대해서는 해설을 쓴 마츠나가 고이치 씨의 설명을 듣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타력'과 '자력'은 각각 '타력정토문'과 '자력성도문'이라는 대립개념으로 일본의 불교를 이분해왔다. 그 후 '자력'은 각고면려를 슬로건으로 하는 유교적 윤리로 편입되어왔기 때문에, 그 반동으로서 '타력'이 남에게 의지하는 소극적인 삶의 방식으로 오해된 지 오래이다." (306 페이지)

 

책 전반에 걸쳐가며 이츠키 씨는 이러한 "타력"의 오해를 풀고 그 진정한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다방면의 시선에서 설명을 시도합니다. 타력이란 "삶을 끊임없이 비상시로 보는 철저한 자세에서 생겨난 사상" (19 페이지) 이며 "자력의 어머니" (303 페이지) 입니다. 또한 "수많은 간교한 생각을 버리고 순수하게 온몸을 맡기는 것" (28 페이지) 으로 타력 작용의 본질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것" (37 페이지) 이라고 주장합니다.

 

 

 

 

"타력"의 존재를 깨닫고 그것의 비밀을 알아가려 노력한다면 삶을 겸허한 자세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그것은 흔히 많은 자기계발서와 조언서에서 언급하는 긍정적인 사고나 진취적인 방식과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위기의 시대를 지나가는 현대인으로서는 오히려 그 위기를 받아들이고 현실로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타력"이라는 개념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묘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력은 어떠한 삶의 방식이기도 하지만, 생각의 원리이기도 하며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나를 움직이는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위기에 처한 우리들에게 필요한 힘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정신적으로 확신을 갖고 기댈 곳을 잃고, 마음을 의지할 곳도 없이 거품처럼 떠다니고 있는 상태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진짜 마음의 버블은 지금 찾아오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187 페이지)

 

세계화가 되면서 겪게되는 진통을 바라보며 이츠키 씨는 걱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기 위해서 고유의 것을 버리고 무리한 변화를 시도하는 일본의 모습에서 그는 "아이덴티티의 붕괴" (167 페이지) 가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기간에 효과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해결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마음의 변화라고 주장하면서 "타력"이야말로 시대의 변화를 겪고 있는 현대인들이 주목해야 할 하나의 "사상"임을 강조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진짜 감정이나 생각을 밖으로 들어내지 않고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을 가장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 녀석은 촌스럽다든가 성격이 어둡다는 등의 이유로 공격을 받는 게 가장 무서운 일이기라도 한 것처럼, 본심을 끝까지 숨긴 채 틀어박혀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 사회의 모든 악의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99 페이지)

 

상당히 보수적인 것 같으면서도 진보적인 그의 사상은 현존하는 고질적인 문제들을 조금 다른 시선에서 바라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고방식은 "생명의 고귀함과 삶의 소중함"이라는 주제로 축약할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남을 품고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요즘 가장 큰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자살" 역시 "타살"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타인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생명에 있어 어떠한 가치도 두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그는 충고합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나 자신이 존엄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나에게 가치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얻기 힘든 생명을 얻었다는, 누구와도 다른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생명이 있기에 존엄하다는 생각입니다." (151 페이지)

 

 

 

죽음에 관한 조금은 특별한 생각

 

앞서 언급하였지만, 이츠키 씨의 생각과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극적인 경험과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걸어온 그의 입장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닙니다만,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습니다. 책의 마지막에 해설을 쓴 마츠나가 고이치 씨의 글을 읽어보니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저 혼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타력'을 일독한 뒤 '이건 경세의 책인가'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태는 이상하다',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해석되는 요소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타자에게 각성을 촉구한다는 의식보다는 자기의 내면을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의해 쓴 것처럼 느껴져서[...]" (308 페이지)

 

마츠나가 고이치 씨가 표현한 것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를 설득해서 자신처럼 생각하게 만드려는 의도가 아니라,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표출해내었다는 느낌이기에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설령 어떤 사람들에게는 반발감을 일으킬 수 있는 발언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조금은 특별한 "죽음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 육체가 노쇠하고 병이 찾아온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대해서 어떠한 "반격"도 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죽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의 이치고, 그것은 죽음이 말도 안되게 일찍 찾아온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구상의 열대우림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어뜨리고 구이용 영계를 대량으로 사육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양을 소의 사료로 삼는 짓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생물의 목숨을 엄청나게 축소기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만이 평균수명보다 훨씬 웃돌게 목숨을 연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허용될 수 있는 일일까, 심각하게 생각해봅니다.

연명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옳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끊이질 않습니다." (56페이지)

 

그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죽음 뿐만 아니라 병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죽음의 질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암은 엄청나게 운이 좋은 병이라고 합니다. 애냐하면 암은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전혀 치료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삽니다. 스스로 화장실도 못 가게 되는 상태는 죽기 2주 정도 전으로, 그때까지는 건강했을 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고, 책을 읽거나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자기가 죽은 후의 일을 생각할 시간이 있습니다." (64 페이지)

 

이런 발언은 자칫하면 상당히 많은 비판과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지만, 그의 고백은 암 환자들이나 말기 병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의 고통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죽음"이라는 논제 앞에 모든 것을 인정하고 초월하려는 의도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것 따위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죽음이 안식이 될 수 있으니 자신의 생명을 내던지라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 때는 최선을 다해서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것을 놓아야 할 때는 미련없이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상당히 불교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는 몇 차례에 걸쳐 강조합니다.

 

"일단은 사는 것, 존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괴로움 많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94 페이지)

 

 

인생의 황혼에서 전하는 지혜의 조언

 

서평을 쓰면서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지만 "타력"의 내용을 종합하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이츠키 씨의 글이 "타력"이라는 핵심 키워드 안에 묶일 수 있다 하더라도 상당히 방대하고 다양한 논제를 어우르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이것 저것을 언급했다가는 그 깊이를 오히려 반감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시기가 있다"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대의 노장 이츠키 씨의 조언이 20대인 저의 마음에도 여운을 남기는 것은, 그가 겸허하게 많은 것을 용납하고 인정하며, 낮은 자세로 이해하려 애쓰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의 조언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거나는 개인의 결정에 따른 것이겠지만, "타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꺼번에 다 읽어버리는 것보다는 한 장 한 장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어내려가는 것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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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생의 모든 일은 오늘 일어난다
윌리엄 하블리첼 지음, 신승미 옮김 / 토네이도 / 2012년 6월
평점 :
판매중지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해져버린 미드가 있죠. 괴팍한 성격의 천재 의사 "하우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메디컬 드라마 "닥터 하우스". 원래 병원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는 보지 않는 편이었는데, 하우스 첫 편을 보는 순간 그 매력에 흠뻑 빠져버려서 시즌 3이 나올때까지는 아주 열렬한 시청자였답니다. 그 후 공백기간이 길어지면서 더이상 보지 않게 되었지만요.

물론 메디컬 드라마와 실제 의사들의 삶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병원 스토리가 참 인상깊었어요. 쉴 새 없는 긴장과 예상하지 못한 사건의 연속, 그리고 미지의 수수께끼를 풀었을 때의 그 짜릿함이란! 닥터 하우스가 괴팍하면 괴팍할 수록 시리즈는 인기를 더해갔고,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의학적 지식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긴박함을 더하는 스토리라인을 생각하면, 이 드라마가 대성공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라는 생각마저 드네요.





하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장 가까이 그것들을 목격하는 의사들의 삶은 실제로 어떨까요?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경험하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의학과는 거리가 먼 직업을 가진지라 (그리고 상당히 병원을 무서워하는 한 사람으로써) 저에게는 "의사"라는 직업이 정말 대단하고 고귀한 것이라고 느껴진답니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엄청난 스트레스와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의사 선생님들은 정말 존경의 대상이니까요. 

오늘 소개할 책을 쓴 윌리엄 하블리첼 (William Hablitzel) 박사는 "의사 가운을 입은 천사"라는 애칭이 정말로 어울리는 분입니다. 수 많은 의사들 가운데 많은 의사들이 사람들을 도와주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론과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생명을 경히 여길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생명이 아닌 "물질(object)" 취급하며 자신의 우위를 만끽하곤 하죠. (어떻게 생각하면 닥터 하우스도 이쪽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지만 윌리엄 하블리첼 박사는 다릅니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른 차원에 있다고 생각해도 좋겠네요. 제가 왜 이렇게 초반부터 박사를 "찬양"하고 있는지 궁금하시다면... 지금부터 그의 저서 "생의 모든 일은 오늘 일어난다"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시죠^^ 





치료가 아닌 치유의 이야기


"의사가 되는" 것은 "의사인" 것에 비하면 상당히 쉬운 일 같습니다. 물론 어마어마한 의대 과정을 거쳐 대단한 노력을 거쳐야지만 의사 자격을 얻을 수 있지만, 그 자격을 얻은 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는 전혀 다른 고난과 역경의 연속일테니까요. 물론 어떤 분야를 맡고 있는지에 따라서 그 차이가 크겠지만 하블리첼 박사처럼 응급실 혹은 뇌종양학과에서 일하게 된다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참 많은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의사는 천직이다"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도록 의사의 임무는 막중하고, 하루 하루가 참으로 고달플 수 있겠죠. 하블리첼 박사는 현재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의과대학에서 교수이자 내과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구급대원, 뇌종양학과 의사, 보훈병원 의사 등 다양한 곳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고 합니다. 





"생의 모든 일은 오늘 일어난다"는 그가 이렇듯 다양한 자리에서 경험한 다양한 이야기, 그리고 다양하게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급대원 시절 자신을 참 힘들게 했던 대장부터 함께 일하게 된 인턴 동료들, 그리고 다양한 삶의 환경에 처한 환자들... 그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자신의 선생님이었고, 자신의 인생 선생님이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가 다른 의사들과 달랐던 결정적 한 가지는 바로 환자 한 사람 한 사람들에게 가진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관심"이었습니다. 통상적으로 절차에 따라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하고 알고 싶어서 묻는가 하면 남들은 개의치 않을 작은 단서들도 놓치지 않으려 애씁니다. 표면에 보이는,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수치로 기록할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들의 내면에 있는 작은 감정들이 의학적 사실만큼이나 결정적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애비와 샌디, 라지브, 토머스. 이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나은 의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환자의 삶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했고 그것을 기꺼이 지혜로 받아들였으며, 자신뿐 아니라 주위 사람에게 치유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줬다." (80 페이지)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려 하지만 오히려 환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치유되었다고 주장하는 하블리첼 박사. 그리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하나 하나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으며 감동을 주는 것은, 그가 "의사"라는 절대적 우위의 입장이 아닌 순수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배움을 얻기 위해 겸손한 자세로 다가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그의 이런 모습이 비논리적이고 의사로서 프로답지 못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수 많은 놀라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기적의 가능성에 마음을 열 때 기적이 일어나는 법이라네." (209 페이지)


그리고 그가 말하는 기적은 완치될 수 없는 불치병이 낫는 단순한 "의학적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통한 내적인 치유를 의미합니다.




짜증나고 무의미해보이는 상황에서 놀라움을 만나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일분 일초를 다투는 응급 상황과 항상 대면해야 하는 의사들의 생활은 말 그대로 "비상사태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사고가 난다거나 환자에게 일이 생겨 한밤중에 다시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며칠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대기해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하지만 편안한 휴식을 방해하는 것은 비단 응급상황 뿐만이 아닌데요, 때로는 소위 "건강염려증" 환자들이 그야말로 골치아파질 수도 있습니다.


전화벨이 울렸다. [...] 새벽 2시 2분이었다. [...]

약간 쉬긴 했어도 윌버 모턴의 목소리를 바로 알아챘다. 정말 좋은 사람이지만 걱정이 상당히 많은 환자였다. 충고차 영업사원은 그저 직업일 뿐, 실제 전문분야는 '만약의 세계'였다. 그는 일주일 전에 혈액 검사 결과를 확인하러 병원에 왔었다. 아직 정기 검사를 받을 때가 아니었지만 나는 온갖 병을 지나치게 걱정하는 그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미리 혈액 검사를 지시했었다. 

예상대로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이었다. 나는 조바심을 내며 끊임없이 질문하는 그에게 10분에 걸쳐서 결과 보고서에 나온 모든 항목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햇다. 그런 다음 왜 그토록 걱정하는지 이유를 물었다.

"만약, 검사실에서 실수를 했고 사실은 검사 결과가 정상이 아니면 어떻게 하죠? 내가 병이 있는지 어떻게 알죠?" 

(259-260 페이지)





수많은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수면과 식사마저 제대로 채우지 못하는 의사들에게 이러한 환자들은 상상 이상으로 괴로운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하블리첼 박사는 오히려 이들과의 대화에서 무언가를 얻는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라고 주장합니다. 


"누구나 나의 스승이 될 수 있고, 나는 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하블리첼 박사의 글을 읽다 보면 이런 그의 결심이 군데 군데 배어나옵니다. 어쩌면 그가 다른 사람들이 쉽게 접하지 못하는 상황을 만나고 그 상황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그의 겸손한 자세 때문이 아닐까요. 그의 환자들은 대학 교수서부터 불법체류자까지 참 다양한 생활환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는 그들을 대하는데에 있어서 어떠한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공평하게 관심을 받는" 상황에서, 그는 비로소 놀라운 삶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슬픈 표정 짓지 말게나. 나를 위해 기뻐해줘. 선생은 내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짐나 사실 평생이란 시간이 있어.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네. 대신 그런 불확실함을 잘만 활용하면 소중한 선물이 될 수 있어. 이승의 삶이 잠깐이고 하루하루를 최대한 즐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지. 내일이 오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오늘을 알차게 살아갈 때, 오직 오늘에만 찾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그 힘을 경험할 수 있네. 선생은 내가 오늘을 감사하게 여길 시간을 줬고 그렇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 이제 우리 집 정원에서 오늘의 아름다움을 더욱 만끽하고 싶어." (50-51 페이지)



마법은 존재하는걸까?


과학과 마술은 상극의 관계이지만 하블리첼 박사는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성적이지 않은 무엇"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믿음은 단지 감성적이거나 로맨틱한 발상이 아닌 상당히 구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요, 그가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연스레 이해가 갈 것입니다.

동생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힘껏 소리쳤던 누나, 자신의 죽음으로 자살하려던 어머니를 끝까지 방해(?)한 아들의 이야기, 그리고 전쟁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두 노인의 신비한 만남... 하블리첼 박사는 이성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사건들을 하나 하나 만나게 되면서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삶에 대한 애착" 혹은 "생명을 사랑하는 마음". 마치 그들의 이런 소원을 반영하기라도 하는 듯, 기적같은 일들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마법같은 이야기들이 어떤 "기적"을 일으키거나 엄청난 반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잔잔하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는 것 외에는 어떤 드라마틱한 전개도 일어나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이러한 마법같은 일들은 하블리첼 박사와 그의 환자들에게 하나의 작은 진실만을 상기시킵니다. 바로 "행복은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는 것이죠. 지금 처한 환경과 요인에는 상관 없이, 어떠한 순간에도 행복은 우리가 사는 이 순간에 곁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기적일지 모른다고 그는 말합니다. 


하이디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눈에 눈물이 맺쳤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한 훌륭한 지혜를 알려준 스승이었다. 삶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거치는 동안에도 아름다움이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주 흥미진진했고 이상하리만큼 위안이 되었다. (235 페이지)


"맞는 말씀일 수도 있어요, 박사님.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정반대도 사실이라는 생각은 안 드세요? 보기 싫은 것은 절대 보지 않는다는 거요. 능력 밖에 성과를 내거나 불가사의하게 환자가 치료되는 경우, 혹은 자신도 모르게 경이감에 빠지는 일이 있잖아요? 그런 일들이 기적인지도 모르죠. 우리가 확실히 알거나 편하게 여기는 것 이상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런 경이감을 결코 경험하지 못할 거에요." (222 페이지)





결국 이런 마법같은 이야기가 진짜 마법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겠죠. 고정관념에 갇혀 바로 앞만 내다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시선으로 삶의 의미와 행복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죠.


"우리는 삶이라는 여행을 할 때 길 앞에 놓인 오르막 뒤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오르막 뒤에 뭐가 있을지 걱정할수록 그 순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못 본다는 걸요. 주변에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더라도 결코 보지 못합니다." (105 페이지) 



생의 끝에 서서 되돌아보는 인생. 그 아름다운 이야기 


"조금은 일찍 인생의 종착역에 도착한 사람들"

하블리첼 박사는 불치병에 걸려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거나 곧 마감하게될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죽음이라는 문턱에 가까이 가게 된 그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그들의 치료와 악화 과정을 함께 하며, 그는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죽음"과 "불치의 병"이라는 존재는 그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제 삶을 구했습니다." (144페이지)


첫사랑과 결혼하여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다가 불시에 식도암에 걸려 온몸에 퍼져버린 악성 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제리의 말입니다. 하블리첼 박사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지 1년만에 사망하게 됩니다. 그가 죽기 바로 전 하블리첼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남긴 마지막 말이 바로 이 문장이었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모순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 문장에는 좀 더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평생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보낸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을 통해 "사랑한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 깊게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자신이 좋아하는 버터스카치 푸딩을 만들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편히 잠든 그의 고백은 그의 아내 레이철에게로 이어집니다.


"그이와 저는 암 진단을 받고 충격을 받았지만 그걸 넘기고 나서는 현실을 그냥 받아들였어요. 항복했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를 썼죠.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요. 덕분에 남은 시간 동안 상상도 못할 만큼 행복하게 보냈답니다. 저는 이미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남자와 다시 사랑에 빠졌어요." (145 페이지)





결국 "생의 모든 일은 오늘 일어난다"를 통해 하블리첼 박사가 전달하고 싶었던 메세지는 명료합니다. 인생의 모든 일은 지금, 바로 이 때 일어나는 것이기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혹은 앞으로 일어나지조차 않을 미래를 걱정하고 바라보면서 현재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죠. 간단하지만 진정으로 깨닫기 어려운 이 사실을 망각하기에 사람들은 인생의 끝에 서서야 비로소 "현재"와 "지금"의 중요성과 사랑스러움을 알게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지금의 행복함을 밀어놓은 채 닿을 수 없는 미래의 행복만을 찾는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머지않아 만사가 좋아진다....."

나는 맥스웰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렇지만 오늘은요?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맥스웰, 삶은 지금 펼쳐지고 있어요."

크레이그와 맥스웰은 같은 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둘 다 지금이 아니라 행복을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다른 시간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231 페이지)




하블리첼 박사는 자신의 환자들과 이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각별했던 친구와, 부모님같았던 존재와 혹은 오랜시간 함께해온 동료의 죽음 역시 지켜보게 됩니다. 정말 선하고 좋은 사람들에게 끔찍한 일이 닥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는 "삶이 무엇인가?"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죠. 무언가 공평하다던가 정의롭다던가의 개념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이 논제에 그가 내리는 결론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우리가 지금 살아갈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어줍니다.


"내일 죽게 되더라도, 바라던 꿈을 이뤘음을 알고 죽을테니 여한이 없을 것 같습니다." [...]

우리의 삶이 풍요롭지 않거나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지금 벌어지는 일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 순간을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나쁜 일로만 치부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69페이지)



책의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읽어내려가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며 가슴이 저며오는 것은 아마도, 지금은 만나기 힘들어진 "생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진 하블리첼 박사의 놀라운 겸허함이 메마른 심정에 단비처럼 내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남들 따위에게 휘둘리거나 참견당하지 않겠어!"라고 자신있게 외치면서도 어느새 세상에서 만들어놓은 잣대와 기준에 얽매여 흔들리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그 위태로운 기준과 가치관만큼이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신과 자신의 삶의 가치가 스스로가 아닌 누군가가 정해놓은 기준에 매이게 될 때 "스스로"에 대한 자각 역시 위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진정한 치유를 향해 인내와 사랑 그리고 관심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하블리첼 박사의 여정을 지켜보면서, 이제는 그 여행에 동참하며 "지금"의 소중함을 만끽하고 싶어지는 마음이었습니다.



"나는 살아오면서 아주 특별한 스승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들이 힘든 시기 속에 숨어있는 놀라운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도움을 줬다네. 그들 덕분에 소중한 지혜와 진정으로 봉사할 기회를 얻었지. 힘든 시기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교훈을 얻을 용기가 있다면, 우리를 도와줄 특별한 스승을 만나게 될거야. [...] 그러면 수련 내용이나 다른 사람의 기대치보다 자신이 훨씬 커다란 의미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될거야." (173-17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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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번의 여행에서 찾은 수상한 유럽 - 가이드북에 없는 유럽의 작은 마을 탐방기
톰 체셔 지음, 유지현 옮김 / 이덴슬리벨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스트리아 빈에 14년동안 살다가 한국으로 들어온지도 이제 1년이 조금 넘었네요. 길고 긴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는 그저 "자국민"이 된다는 생각에 마냥 기뻐하기만 했었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타지생활은 정말 서럽고 힘들 때가 많은 것이니까요.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은 "객관적"이고 "거리를 두며" 다시한번 빈에서의 생활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무조건 한국이 좋고 무조건 한국에 들어오고 싶다는 감정이 조금은 가라앉아 빈에서의 생활이 "이랬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가장 크게 후회되는 것이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평생을 유럽에서 보낼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변변한 여행 한번 다니지 않았다는 것인데요. 공연이 있거나 콩쿨, 페스티벌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뭔가 "가고 싶어서 떠난 적"이 단 두 번 밖에 없었답니다. 그것도 한 번은 빈에서 기차로 겨우 한 시간 거리의 작은 도시를 방문했던 것이었고요. 조금만 투자하면 유럽 전역을 마음대로 기차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고, 이제 베네치아나 티롤을 방문하고 싶다면 8000km를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후회가 막심할 뿐이네요. 워낙에 집고양이 체질이었어서 나가기 싫어했던 것도 있지만, 원체 "여행"이라는 것이 부담스럽고 낯설어 선뜻 나서지 못한 탓도 있었답니다.

 

 

 

 

오늘 소개할 책의 저자 톰 체셔 씨는 저와는 정 반대의 인물입니다. 20여년간 더 타임즈 지의 여행기자로 근무하면서 전세계 80개국 이상을 방문한 그는 말 그래도 "여행전문가"라고 할 수 있죠.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이곳 저곳으로 날아가 그곳의 문화를 체험하고 그것을 사진과 기사에 담던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아마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봤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멋진 일이라도 계속 반복해서 하다보면 진력이 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가 고안해낸 조금은 기발하고 조금은 엉뚱한 유럽여행 비법!! 저가 항공을 통한 유럽의 듣도 보도 못한 도시들 방문하기! 전적으로 직감에 따라 움직이면서 새로운 여행을 찾아 떠나기 인데요. 그 1년여간의 여정을 담은 것이 바로 "천 번의 여행에서 찾은 수상한 유럽" 입니다.

 

 

 

저가 항공으로 떠나자~♬

 

저가 항공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공연이나 일정이 있어 이웃나라인 독일이나 스위스, 프랑스 등으로 가야할 때도 비싼 항공료 때문에 어김없이 기차를 타고 열 시간 이상 이동하곤 했었는데, 이런 고민이 한방에 해결되어 버렸기 때문이죠. 가장 심각했을 때가 독일과 스위스 그리고 오스트리아 국경이 만나는 지역인 Bodensee 에서 투어 공연을 했을 때인데, 이 때는 공연과 공연 사이 계속 빈에서 다른 공연을 해야 하는 바람에 하루 공연하고 왕복 스무 시간 기차로 이동하곤 했답니다. 공연한 것은 정작 힘들지 않았는데 여행하다가 지쳐버렸죠. 몇 번의 공연을 위해 이동하면서 그 두꺼운 톨키엔의 "반지의 제왕"을 모두 읽어버렸으니 알만하죠? ㅎㅎ

 

하지만 저가 항공의 등장으로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갑자기 외국에 있는 친구들과 한층 가깝게 (때로는 마치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것처럼) 메세지를 주고 받을 수 있게 된 것 정도일까요? 가족을 오스트리아에 두고 독일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들은 주말마다 부담없이 집으로 날아갈(!) 수 있게 되었고, 휴일을 잘만 이용하면 1박으로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해변을 즐기고 올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진 않았지만요. 아무래도 항공은 항공인지라 공항의 여러가지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나면 상당히 많은 추가시간이 필요했답니다.

 

 

 

 

톰 체셔는 바로 이 저가 항공을 이용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도시들을 위주로 그만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목적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라던가 특별한 계획 없이 그저 "복불복 원칙"을 친구삼아 주말 여행을 떠나는 것이죠.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가끔은 멋진 주말에 놀라고, 때로는 끔찍한 주말에 놀라게 됩니다.

 

 

여행 가이드가 필요없는 유럽 여행 이야기

 

비엔나에 산 지 한 5년 되었을 때였던 것 같아요. 갑자기 한국에서 손님들이 오신다는 말에 깜짝 놀라 그제서야 "빈 여행 가이드"를 구입했습니다. 정작 빈에 5년이나 살았지만 그간 학교-집-교회를 반복했던 터라 마땅히 가이드를 할 만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죠. 새롭게 빈 여행 가이드를 탐독하면서 느낀 것은 "여행 가이드와 주관적인 판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죠. 가이드는 그것을 집필한 사람과 대다수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을 뿐 점쟁이처럼 제 마음을 맞출 수는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정작 산책하기도 별로고 맛있는 레스토랑도 없는 거리가 추천코스로 지정되어있는가 하면, 정말 예쁘고 특이해서 꼭 가야할 곳이 빠져있는 것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이 가이드대로 여행했다가는 참 많은 것을 놓쳤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원하는 것이 다르고, 그것이 얼마나 충족되었느냐에 따라 여행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지게 되니까요.

 

 

 

 

그런 면에서 체셔가 선택한 여행은 그야말로 "복불복"입니다. 기대한 것이 없으니 틀에 박힌 관광도 없겠고, 그야말로 도시의 첫 인상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여행이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을테니까요. 어쩌면 세계 주요도시와 명소, 관광지에 지친 그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특별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특별한 것"일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그의 여행 일지는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가 무작위로 골라낸 여행지들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어서 비슷한 점을 가진 도시가 거의 없으니까요. 체셔가 방문한 도시 중에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 도시에서부터 삶을 가장 여유롭게 영위할 수 있는 도시까지 다양한 경제적 상황과 문화적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행기에 올라탈 때마다 순식간에 이러한 격차를 경험하게 되는 것 역시 대단히 이색적인 일일 것 같아요. 제 2의 호화별장을 어떻게 꾸밀까 고민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금새 생계를 위해 가리지 않고 궂은 일을 해야 하는 집시들과 마주하게 되니까요.

 

 

 

 

상업적인 가이드북이라면 정말 "소개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도시들을 찾아 떠나는 체셔. 그렇지만 가이드북과 체셔, 그리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관은 서로 너무도 다르기에 그는 오히려 이런 작은 도시들에게서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색적인 사진없는 여행기

 

 

 

 

솔직히 고백하자면 "천 번의 여행에서 찾은 수상한 유럽"을 받아들고 정말 의아했답니다. 뭔가 이색적인, 소개되지 않은 도시들을 소개하는 책이니만큼 어마어마한 사진들을 기대했기 때문이에요. 보통 여행기나 여행 가이드 등을 구입할 때면 아직 가보지 못한 그 도시의 사진과 여행의 발자취들을 감상하느라 한참을 구경하고는 하는데, 이 여행기에는 사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단 한장도!

 

혹시 저자 (혹은 출판사?) 가 출판비를 조금이라도 절약하기 위해서 사진을 싣지 않은 것이 아닌가 라는 상당히 저렴한 생각을 머리속에서 지우게 된 것은 책을 읽기 시작한 얼마 후였습니다. 이름도 못 들어본 유럽의 작은 도시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끝까지 아쉬웠지만, 사진이 없었기 때문에 체셔의 설명을 가이드삼아 상상력을 동원하여 도시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상당히 이색적인 경험이었답니다. (물론 책을 다 읽은 후에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인터넷에서 여러 검색을 했습니다만)

 

 

 

 

체셔는 유능하고 노련한 기자일 뿐만 아니라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쾌하고도 즐겁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고난(?)에 힘이 빠지고 화가 나야할 상황인데도 특유의 여유와 유머로 상황을 풀어나가는 것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와 함께 그곳을 여행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그가 표현하고 묘사하는 도시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상투적이지도, 진부하지도 않기 때문에 다소 굵직한 분량에도 빨려 들어가듯이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단코 (포프라트의 시장 안톤 단코) 는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으로 선수 생활 이후에는 심판으로 주요 경기에 참여하며 세계를 여행했다. 그래서 그는 포프라트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고 했다. [...]

"우리는 비즈니스센터와 5성 호텔을 지을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대상 이용객은 어떻게 됩니까?"

그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물론 비즈니스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되겠지요. 지금 이건 시작 단계에 불과합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요." 그는 잠시 중단했다.

"하지만 맥도널드가 들어올 겁니다. 매장을 열기로 했거든요!"

나는 그제서야 포프라트가 제3세계를 제외하고 내가 방문한 곳 중 맥도널드가 없는 유일한 도시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63 페이지)

 

 

 

 

 

도시가 아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쯤해서 눈치 채셨을 수도 있겠지만, 체셔의 여행기는 굳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도시들을 소개하는 여행 안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여행목적은 도시가 아니라는 생각을 읽어내려갈 수록 하게 되었으니까요. 그의 주요 관심사는 "도시"가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만큼 그의 여행기에는 그가 각각의 도시를 방문하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유럽에 살았던 저로서는 각 나라 사람들의 특징적인 성격을 묘사한 것을 보면서 혼자 배시시 웃곤 했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라도나 경상도 등 지역에 따른 특징적인 성격이 있듯이, 유럽에서도 특히 동유럽과 북유럽 그리고 중유럽에 따라 상당한 멘탈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죠. 체셔는 이런 세밀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그의 여행일지에 유쾌하게 담아냅니다.

 

 

 

 

가끔은 너무도 적나라한 표현과 묘사에 "체셔는 이 사람들이 자신의 책을 읽은 뒤 어떤 파장이 올지 생각해본걸까?" 생각하기도 했답니다. 특히 실명이 밝혀진 사람들의 경우, 기분나빠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하더군요. 자신이 만난 사람들 - 특히 정치인들을 - 을 신랄하게 묘사하면서 가식을 벗어버린 솔직함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답니다. 어쩌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확연한 문화 차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의 말에 따르자면 "그녀가 항상 그렇게 불쾌하지 않은 사람일 때를 대비해서") 브르노의 가이드를 표현한 부분은 정말 유쾌하기 그지 없습니다. 물론, 그에게는 끔찍한 경험이었겠지만.

 

성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지하 통로를 지나갔는데 그곳에 베트남인들이 가판대를 펴놓고 물건을 팔고 있었다. 상당수가 무릎 길이의 부츠를 나란히 세워놓고 팔았다.

"세상에, 여긴 정말 무섭네요." X (가이드) 가 떨면서 말했다.

나는 부츠를 파는 한 가판대의 사진을 찍었다.

"당신 카메라를 훔쳐갈 거에요. 빨리 가요! 저 사람들은 베트남하고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요!"

나는 두 나라를 다 가봤지만 카메라를 무사히 다시 가져올 수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나를 째려보았다.

"이곳에선 집시들이 물건을 훔쳐간다고요."

그녀는 이제 공격 대상을 바꿔 말했다.

"이 지역에서는 아주 조심해야 하요. 기차역 근처나 버스 정류장 같은데선 특히 더요. 또 그들은 에스컬레이터 맨 위에서 기다렸다가 날치기를 하기도 해요."

나는 그녀에게 물건을 털린 적이 있냐고 물었다.

"아뇨, 난 없어요. 하지만 아주 조심하죠."

물론 그러실 테지.

(154-155 페이지)

 

 

 

 

 

푹신한 침대에서 떠나는 유럽 여행

 

제가 책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책 겉표지를 열 때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가장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저의 소망을 너무도 즐겁고 훌륭하게 이루어준 책이었고요.

모든 이야기가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재량에 따라 즐거움의 강도가 결정되고는 합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톰 체셔는 유쾌하고도 날카로운 이야기꾼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서 유럽의 이름없는 작은 도시들을 여행하는 것이 정말 즐거웠으니까요. 때때로 춥고 고달픈 환경에 노출되었던 그와는 달리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서 떠난 것인 만큼 더욱 더 안락한 여행이 되었고요.

 

 

 

 

올 여름 간절히 원하던 유럽 여행을 아쉽게도 조금 더 미룰 수 밖에 없다면 이 책과 함께 이색여행을 떠나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 종착지가 어디이던지간에, 정통적인 "유럽여행"이 되지 않을 것만큼은 분명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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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Story - 행동의 방향을 바꾸는 강력한 심리 처방
티모시 윌슨 지음, 강유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문명이 발달한 이래 의술은 꾸준히 발전해왔습니다. 삶 그리고 죽음과 직결되는 문제인만큼 모든 사람들의 공통 관심사였을 뿐만아니라 가장 가치있는 학문 중 하나로 존중받았기 때문인데요, 첨단을 걷는 과학으로 상상도 못했던 것들이 가능하게 된 지금 역시 의학은 멈추지 않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획기적인 기술로 점점 더 많은 것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고,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만큼 놀라운 발견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도 볼 수 없는 "마음"은 어떨까요? 일찌기 아무도 확실히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자아와 무의식"에 관한 연구는 시작되었고, 이미 많은 시도와 (부분적인) 성공으로 우리는 수많은 책들과 연구 결과를 통하여 마음의 세계에 조금은 더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의례 그렇듯이 확실한 실체를 확인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명한 심리학자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기도 하고, 너무나도 평범하고 광범위한 주제에 수많은 답변들이 쏟아져나오곤 합니다. "결국 알지 못하는 것은 모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러한 도전과 관심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마음"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얼마나 큰지 느낄 수 있습니다.

 

 

 

 

매일 수 없이 쏟아져나오는 것이 바로 "심리 서적"입니다. 자기계발 서적만큼이나 그 종류도 다양할 뿐더러, 아우르고 있는 장르 역시 다채롭습니다. 심리학 전문서적부터 종교서적, 때로는 사이비 이단 서적까지 제목만 보고서는 언뜻 그 내용과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것이 바로 심리 서적인데요. 그만큼 고르고 구입하는 것에 망설여지기도 합니다. 한 예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오프라 윈프리의 추천도서 "시크릿(secret)"은 엄청나게 간단명료하면서도 직선적이고 독단적이기까지 한 메세지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의심했는가 하면 더욱 더 많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열광하며 무조건적인 지지와 믿음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조금만 비판적인 시선으로 읽기 시작하면 "사이비 이단 서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단호한 메세지를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맹신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과연 적절한 것이었을까요?

오늘 소개할 책 역시 "시크릿"이 약속하는 것과 비슷한 주제를 내놓습니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편집하기". 하지만 그 접근 방식은 조금 다릅니다. 아니, 완전히 반대편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책은 드러내놓고 "안티 시크릿(Anti-Secret)"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비슷한 주제를 말하고 있으면서도 반대자의 입장을 가진 책 - 티모시 윌슨 저 "스토리 - 행동의 방향을 바꾸는 강력한 심리 처방" 을 소개합니다.

 

 

 

 

해가 되는 치료법들

 

"수세기 동안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세계를 표현하고 해적하는 방식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이러한 주관적인 해석이 빠르고 무의식적으로 형성된다는 중요한 조건을 추가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때 뇌는 신속히 기어를 전환해 최대한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 속도는 우리가 세계를 '관찰' 하고 있는 건지, '해석'하고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19페이지)

 

저자 티모시 윌슨은 사회심리학자로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의 심리학 교수입니다. 사회심리학자로 그는 수 많은 임상실험과 다양한 연구에 참여하였고, 심층적인 분석과 통계를 연구한 결과 우리가 시중에서 구입할 수 있는 대부분의 자기계발서와 심리 서적, 그리고 우리가 쉽게 접하게 되는 여러 자아분석법 및 심리치료법이 제대로된 과학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남용되고 있음을 깨닫고 이를 경고하기에 나섭니다. 시중에는 그야말로 홍수처럼 심리 서적이 범람하고 있고, 이 중에는 도움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해가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인터넷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두근 두근 심리 퀴즈"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실시되는 심리 치료 및 재활 프로그램까지도요. 확실한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곧장 실전에 도입되는 이론들은 어마어마한 금전적 그리고 시간적 손해일 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심적 건강에 돌이킬 수 없는 해악이 될 수 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습니다.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오히려 해가 되는 사례들은 책 전반에 걸쳐 소개되며, 이 때마다 저자는 하나 하나 조리있게 그 문제점을 짚어내려갑니다.

 

 

 

 

저자는 구체적인 사례와 그 출처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하며 자신의 반론을 펼칩니다. 이 중에는 저자의 일방적인 주장 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워 반대편의 변론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사례에서는 저자의 의문제기와 비판이 상당히 논리적이며 합당하게 보입니다. 그가 스스로 설명한 것처럼 이러한 "상식의 오류와 관련된 사례" (309 페이지) 의 맹점은 어떠한 반박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당연한 논리의 결과물로써 절대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관찰력과 통찰력이 뛰어난 누군가가 먼저 논리의 오류를 지적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의 치명적인 피해사례가 드러나기까지 하나의 "진실"로써 프로그램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크고 작은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시크릿", 보고 있나?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유독 론다 번의 밀리언셀러 "시크릿"을 주 비판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명료하지만 강력한 메세지로 인해 미국 전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던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은 의심쩍고 황당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물질로써 행복을 얻게된다는 큰 오류로부터 시작된 주장이라고 비판합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당연히 좋은 유전자와 안락한 생활환경 그 이상이 필요하다. 행복의 요건이 그게 전부라면 다른 포유류 동물들과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 기초적인 욕구를 충족할 자원이 충분히 있는 상태에서 렉서스 자동차와 대저택을 추가한다고 해도 장기적으로는 훨씬 더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물질적인 것들이 아니다." (55-56 페이지)

 

이어지는 저자의 주장은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던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저서와도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즉,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의 질과 인생 안에서의 정의의 실현이 행복의 결정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죠.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와 최근에 발간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어보셨다면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스티브 샐러노의 말을 빌려 이러한 인간의 사회적 측면과 행복을 위한 기본적인 충족 조건을 무시한 자기계발서들이 오히려 행복해지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경계합니다.

 

"자기 계발서들이 펼치는 논리를 받아들이면 실패를 자기 탓으로 돌리고 실제 효과 있는 치료법을 외면하게 된다는게 그 (스티브 샐러노) 의 주장이다. 더구나 자기 계발서에 제시된 조언은 과학적 검증이 가능한 경우라도 실제로 검증된 적은 거의 없다." (45 페이지)

 

 

 

 

즉, 모든 것을 "끌어당김의 법칙"으로 설명하는 시크릿의 경우, 그 주장을 맹신하게 될 때의 자신의 실패와 낙오를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어떠한 환경적 요인이나 불가항력적 요소가 아닌 전적으로 자기자신의 무능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실패를 끌어당겼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고, 가난함과 굶주림을 끌어당기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은 기아에 고통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티모시 윌슨 교수가 구체적으로 "시크릿"을 언급하고 그것의 이론을 하나 하나 지목하며 비판한만큼, 론다 번씨가 이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할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물론, 이러한 논쟁이 화두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합니다만). 가장 큰 위험은 이러한 자기계발서 혹은 범국민적으로 실시되는 국가적 프로그램이 가지는 영향력이 막대한 것에 있습니다. 잘못된 인식과 방법을 받아들인 그들의 삶에 끼칠 영향 역시 미지수로 남게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당신의 삶을 주도한다 - 스토리 편집 접근법

 

 

 

얼마 전 읽은 두 권의 책이 생각납니다. 먼저 현대인과는 뗄레와 뗄 수 없는 불안과 공포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던 한스 모르쉬츠키 박사의 "두려움의 열 가지 얼굴" 그리고 행복학의 고전이라 불리우는 베란 울프 박사의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을까". 비슷하면서도 서로 상반된 주제를 가지고 있는 두 책의 핵심적인 메세지를 종합한다면 "자기 스스로가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살라" 라고 압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보자면 티모시 윌슨 교수가 주장하는 "스토리 편집 접근법" 역시 같은 맥락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신적 쇼크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사건을 극복해나가야 한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물론 그것이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검증된 시간과 방법을 따라 실행되어야 하며, "스토리 편집"이라는 다소 생소한 접근법을 통해 우리는 보다 효과적으로 우리의 삶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얄팍한 보상이 아닌, 장기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근본적인 동기를 창출해내는 것입니다.

 

 

 

 

저자는 스토리 편집 방향에 따라 같은 상황을 겪고 난 뒤라도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지는 사례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치료와 동기부여법은 스토리 편집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자의 이론은 사회심리학적 근거들과 수많은 임상실험들을 토대로 하고 있어 읽어 내려가는 내내 흥미진진하게 그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보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론을 포함하여 자기계발서에 등장하는 모든 이론들과 방법에 열광하고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 보다는 근본적인 질문을 잊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무엇보다도 누군가가 당신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갖게 해준다거나, 더 좋은 부모로 만들어 준다거나, 혹은 당신 자녀가 술과 담배를 멀리 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면 정중하게 되묻기 바란다. '그런데 그게 효과 있는 방법인가요?'" (304 페이지)

 

 

 

 

우리 마음에 스토리가 산다!

 

책 전반에 걸쳐 소개되는 다양한 테마를 겨냥한 스토리 편집 접근법의 시작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사회심리학 분야를 정립한 쿠르트 레빈의 이론이라고 합니다.

 

"레빈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이 어떻게 상황을 파악하는지 이해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눈을 통해 문제를 바라보아야 할 뿐만 아니라 비교적 간단한 개입으로 그들의 관점도 바꿀 수 있다고까지 이야기했다." (25 페이지)

 

역자가 이미 서두에 언급하고 있듯이 이 책에는 번역하는 과정에서 스토리(story)와 네러티브(narrative)가 자주 혼용되어 있습니다. 즉 "이야기"를 뜻하는 스토리의 원 뜻보다 "사람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 혹은 "사람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스토리 편집 접근법은 사람들의 이런 고유의 방식을 특정한 방향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으로 시작되며, 그들의 인식에서 효과적으로 긍정적인 방향전환이 이루어졌을 때 그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이 과정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내러티브는 우리가 매일 조금씩 칠해나가는 유화와 같다. 그 내러티브를 수정하려면 겹겹이 쌓인 유화물감을 벗겨내고 새 캔버스 위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과업이라는 뜻이다." (25 페이지)

 

티모시 윌슨 교수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스토리 편집 접근법은 그 기초가 사회심리학에 근거하고 있는만큼 무작정 자신의 방법을 권유하는 일부 자기계발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며, 대부분은 초보라도 쉽게 시도할 수 있을 간단한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해보이는 그런 방법들이 그가 주장한 대로 효과적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핵심을 찌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상황이나 사건에 있어 그것을 돌려서 생각하거나 해석하려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근본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치료를 시작하고 자신의 스토리를 써내려가는 그의 방법은 충분히 실행가능하면서도 효과적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읽다보면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 모두 이렇게 성공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면 어째서 스스로 성공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인데요, 얼토당토 않게 너무 많은 것을 약속하는 책을 읽을 때면 이런 비판을 공개적으로 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한답니다 (물론 굉장히 소심한 성격이라 실행에 옮긴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티모시 윌슨의 "스토리"는 그러한 일부 자기계발서의 맹점을 정확히 찌른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또 번호를 알려주겠다고 유혹하는 사람에게 "스스로 로또를 타서 부자가 되라"라고 역설적으로 공격하는 식이죠. 물론 윌슨의 이러한 주장 역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유명한 사람이 집필했고, 밀리언셀러라고 해서 무조건 맹신하는 경향은 확실히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크릿" 만큼은 아니지만 출간부터 큰 반향을 일으킨 티모시 윌슨의 "스토리". 그의 방대한 스토리 편집 접근법을 이 한권의 책으로 이해하는 것부터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책에서 제시된 크고 작은 방법들을 실천하다가 보면 아직까지는 생소한 스토리 편집 접근법을 보다 가깝게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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