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의 여행에서 찾은 수상한 유럽 - 가이드북에 없는 유럽의 작은 마을 탐방기
톰 체셔 지음, 유지현 옮김 / 이덴슬리벨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스트리아 빈에 14년동안 살다가 한국으로 들어온지도 이제 1년이 조금 넘었네요. 길고 긴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는 그저 "자국민"이 된다는 생각에 마냥 기뻐하기만 했었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타지생활은 정말 서럽고 힘들 때가 많은 것이니까요.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은 "객관적"이고 "거리를 두며" 다시한번 빈에서의 생활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무조건 한국이 좋고 무조건 한국에 들어오고 싶다는 감정이 조금은 가라앉아 빈에서의 생활이 "이랬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가장 크게 후회되는 것이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평생을 유럽에서 보낼 것이라고 확신했기에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변변한 여행 한번 다니지 않았다는 것인데요. 공연이 있거나 콩쿨, 페스티벌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뭔가 "가고 싶어서 떠난 적"이 단 두 번 밖에 없었답니다. 그것도 한 번은 빈에서 기차로 겨우 한 시간 거리의 작은 도시를 방문했던 것이었고요. 조금만 투자하면 유럽 전역을 마음대로 기차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고, 이제 베네치아나 티롤을 방문하고 싶다면 8000km를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후회가 막심할 뿐이네요. 워낙에 집고양이 체질이었어서 나가기 싫어했던 것도 있지만, 원체 "여행"이라는 것이 부담스럽고 낯설어 선뜻 나서지 못한 탓도 있었답니다.

 

 

 

 

오늘 소개할 책의 저자 톰 체셔 씨는 저와는 정 반대의 인물입니다. 20여년간 더 타임즈 지의 여행기자로 근무하면서 전세계 80개국 이상을 방문한 그는 말 그래도 "여행전문가"라고 할 수 있죠.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이곳 저곳으로 날아가 그곳의 문화를 체험하고 그것을 사진과 기사에 담던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아마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봤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멋진 일이라도 계속 반복해서 하다보면 진력이 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가 고안해낸 조금은 기발하고 조금은 엉뚱한 유럽여행 비법!! 저가 항공을 통한 유럽의 듣도 보도 못한 도시들 방문하기! 전적으로 직감에 따라 움직이면서 새로운 여행을 찾아 떠나기 인데요. 그 1년여간의 여정을 담은 것이 바로 "천 번의 여행에서 찾은 수상한 유럽" 입니다.

 

 

 

저가 항공으로 떠나자~♬

 

저가 항공의 등장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공연이나 일정이 있어 이웃나라인 독일이나 스위스, 프랑스 등으로 가야할 때도 비싼 항공료 때문에 어김없이 기차를 타고 열 시간 이상 이동하곤 했었는데, 이런 고민이 한방에 해결되어 버렸기 때문이죠. 가장 심각했을 때가 독일과 스위스 그리고 오스트리아 국경이 만나는 지역인 Bodensee 에서 투어 공연을 했을 때인데, 이 때는 공연과 공연 사이 계속 빈에서 다른 공연을 해야 하는 바람에 하루 공연하고 왕복 스무 시간 기차로 이동하곤 했답니다. 공연한 것은 정작 힘들지 않았는데 여행하다가 지쳐버렸죠. 몇 번의 공연을 위해 이동하면서 그 두꺼운 톨키엔의 "반지의 제왕"을 모두 읽어버렸으니 알만하죠? ㅎㅎ

 

하지만 저가 항공의 등장으로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갑자기 외국에 있는 친구들과 한층 가깝게 (때로는 마치 같은 나라에 살고 있는 것처럼) 메세지를 주고 받을 수 있게 된 것 정도일까요? 가족을 오스트리아에 두고 독일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들은 주말마다 부담없이 집으로 날아갈(!) 수 있게 되었고, 휴일을 잘만 이용하면 1박으로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운 해변을 즐기고 올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진 않았지만요. 아무래도 항공은 항공인지라 공항의 여러가지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나면 상당히 많은 추가시간이 필요했답니다.

 

 

 

 

톰 체셔는 바로 이 저가 항공을 이용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도시들을 위주로 그만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목적지에 대한 자세한 정보라던가 특별한 계획 없이 그저 "복불복 원칙"을 친구삼아 주말 여행을 떠나는 것이죠.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가끔은 멋진 주말에 놀라고, 때로는 끔찍한 주말에 놀라게 됩니다.

 

 

여행 가이드가 필요없는 유럽 여행 이야기

 

비엔나에 산 지 한 5년 되었을 때였던 것 같아요. 갑자기 한국에서 손님들이 오신다는 말에 깜짝 놀라 그제서야 "빈 여행 가이드"를 구입했습니다. 정작 빈에 5년이나 살았지만 그간 학교-집-교회를 반복했던 터라 마땅히 가이드를 할 만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죠. 새롭게 빈 여행 가이드를 탐독하면서 느낀 것은 "여행 가이드와 주관적인 판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죠. 가이드는 그것을 집필한 사람과 대다수의 의견을 반영하고 있을 뿐 점쟁이처럼 제 마음을 맞출 수는 없을테니까요. 하지만 정작 산책하기도 별로고 맛있는 레스토랑도 없는 거리가 추천코스로 지정되어있는가 하면, 정말 예쁘고 특이해서 꼭 가야할 곳이 빠져있는 것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고 이 가이드대로 여행했다가는 참 많은 것을 놓쳤겠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원하는 것이 다르고, 그것이 얼마나 충족되었느냐에 따라 여행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지게 되니까요.

 

 

 

 

그런 면에서 체셔가 선택한 여행은 그야말로 "복불복"입니다. 기대한 것이 없으니 틀에 박힌 관광도 없겠고, 그야말로 도시의 첫 인상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여행이 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을테니까요. 어쩌면 세계 주요도시와 명소, 관광지에 지친 그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특별하지 않은 것"이야말로 그에게는 "특별한 것"일 수 있을테니까요.

 

 

 

 

그리고 그의 여행 일지는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가 무작위로 골라낸 여행지들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어서 비슷한 점을 가진 도시가 거의 없으니까요. 체셔가 방문한 도시 중에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하다고 할 수 있는 도시에서부터 삶을 가장 여유롭게 영위할 수 있는 도시까지 다양한 경제적 상황과 문화적 환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행기에 올라탈 때마다 순식간에 이러한 격차를 경험하게 되는 것 역시 대단히 이색적인 일일 것 같아요. 제 2의 호화별장을 어떻게 꾸밀까 고민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가 금새 생계를 위해 가리지 않고 궂은 일을 해야 하는 집시들과 마주하게 되니까요.

 

 

 

 

상업적인 가이드북이라면 정말 "소개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도시들을 찾아 떠나는 체셔. 그렇지만 가이드북과 체셔, 그리고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관은 서로 너무도 다르기에 그는 오히려 이런 작은 도시들에게서 원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색적인 사진없는 여행기

 

 

 

 

솔직히 고백하자면 "천 번의 여행에서 찾은 수상한 유럽"을 받아들고 정말 의아했답니다. 뭔가 이색적인, 소개되지 않은 도시들을 소개하는 책이니만큼 어마어마한 사진들을 기대했기 때문이에요. 보통 여행기나 여행 가이드 등을 구입할 때면 아직 가보지 못한 그 도시의 사진과 여행의 발자취들을 감상하느라 한참을 구경하고는 하는데, 이 여행기에는 사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단 한장도!

 

혹시 저자 (혹은 출판사?) 가 출판비를 조금이라도 절약하기 위해서 사진을 싣지 않은 것이 아닌가 라는 상당히 저렴한 생각을 머리속에서 지우게 된 것은 책을 읽기 시작한 얼마 후였습니다. 이름도 못 들어본 유럽의 작은 도시들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끝까지 아쉬웠지만, 사진이 없었기 때문에 체셔의 설명을 가이드삼아 상상력을 동원하여 도시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상당히 이색적인 경험이었답니다. (물론 책을 다 읽은 후에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인터넷에서 여러 검색을 했습니다만)

 

 

 

 

체셔는 유능하고 노련한 기자일 뿐만 아니라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쾌하고도 즐겁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고난(?)에 힘이 빠지고 화가 나야할 상황인데도 특유의 여유와 유머로 상황을 풀어나가는 것을 읽다보면 어느새 그와 함께 그곳을 여행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그가 표현하고 묘사하는 도시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상투적이지도, 진부하지도 않기 때문에 다소 굵직한 분량에도 빨려 들어가듯이 순식간에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단코 (포프라트의 시장 안톤 단코) 는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으로 선수 생활 이후에는 심판으로 주요 경기에 참여하며 세계를 여행했다. 그래서 그는 포프라트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이 강하다고 했다. [...]

"우리는 비즈니스센터와 5성 호텔을 지을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대상 이용객은 어떻게 됩니까?"

그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물론 비즈니스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되겠지요. 지금 이건 시작 단계에 불과합니다. 아직 갈 길이 멀지요." 그는 잠시 중단했다.

"하지만 맥도널드가 들어올 겁니다. 매장을 열기로 했거든요!"

나는 그제서야 포프라트가 제3세계를 제외하고 내가 방문한 곳 중 맥도널드가 없는 유일한 도시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63 페이지)

 

 

 

 

 

도시가 아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쯤해서 눈치 채셨을 수도 있겠지만, 체셔의 여행기는 굳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도시들을 소개하는 여행 안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여행목적은 도시가 아니라는 생각을 읽어내려갈 수록 하게 되었으니까요. 그의 주요 관심사는 "도시"가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만큼 그의 여행기에는 그가 각각의 도시를 방문하면서 만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유럽에 살았던 저로서는 각 나라 사람들의 특징적인 성격을 묘사한 것을 보면서 혼자 배시시 웃곤 했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라도나 경상도 등 지역에 따른 특징적인 성격이 있듯이, 유럽에서도 특히 동유럽과 북유럽 그리고 중유럽에 따라 상당한 멘탈의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죠. 체셔는 이런 세밀한 부분을 놓치지 않고 그의 여행일지에 유쾌하게 담아냅니다.

 

 

 

 

가끔은 너무도 적나라한 표현과 묘사에 "체셔는 이 사람들이 자신의 책을 읽은 뒤 어떤 파장이 올지 생각해본걸까?" 생각하기도 했답니다. 특히 실명이 밝혀진 사람들의 경우, 기분나빠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마조마하더군요. 자신이 만난 사람들 - 특히 정치인들을 - 을 신랄하게 묘사하면서 가식을 벗어버린 솔직함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답니다. 어쩌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확연한 문화 차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이름을 밝히지 않은 (그의 말에 따르자면 "그녀가 항상 그렇게 불쾌하지 않은 사람일 때를 대비해서") 브르노의 가이드를 표현한 부분은 정말 유쾌하기 그지 없습니다. 물론, 그에게는 끔찍한 경험이었겠지만.

 

성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지하 통로를 지나갔는데 그곳에 베트남인들이 가판대를 펴놓고 물건을 팔고 있었다. 상당수가 무릎 길이의 부츠를 나란히 세워놓고 팔았다.

"세상에, 여긴 정말 무섭네요." X (가이드) 가 떨면서 말했다.

나는 부츠를 파는 한 가판대의 사진을 찍었다.

"당신 카메라를 훔쳐갈 거에요. 빨리 가요! 저 사람들은 베트남하고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라고요!"

나는 두 나라를 다 가봤지만 카메라를 무사히 다시 가져올 수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나를 째려보았다.

"이곳에선 집시들이 물건을 훔쳐간다고요."

그녀는 이제 공격 대상을 바꿔 말했다.

"이 지역에서는 아주 조심해야 하요. 기차역 근처나 버스 정류장 같은데선 특히 더요. 또 그들은 에스컬레이터 맨 위에서 기다렸다가 날치기를 하기도 해요."

나는 그녀에게 물건을 털린 적이 있냐고 물었다.

"아뇨, 난 없어요. 하지만 아주 조심하죠."

물론 그러실 테지.

(154-155 페이지)

 

 

 

 

 

푹신한 침대에서 떠나는 유럽 여행

 

제가 책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책 겉표지를 열 때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가장 멀리 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저의 소망을 너무도 즐겁고 훌륭하게 이루어준 책이었고요.

모든 이야기가 그렇지만,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재량에 따라 즐거움의 강도가 결정되고는 합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톰 체셔는 유쾌하고도 날카로운 이야기꾼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서 유럽의 이름없는 작은 도시들을 여행하는 것이 정말 즐거웠으니까요. 때때로 춥고 고달픈 환경에 노출되었던 그와는 달리 편안하게 침대에 누워서 떠난 것인 만큼 더욱 더 안락한 여행이 되었고요.

 

 

 

 

올 여름 간절히 원하던 유럽 여행을 아쉽게도 조금 더 미룰 수 밖에 없다면 이 책과 함께 이색여행을 떠나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 종착지가 어디이던지간에, 정통적인 "유럽여행"이 되지 않을 것만큼은 분명하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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