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장오(張敖-?부터 기원전 182년)는, 진(秦)말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인물이었고, 장이(張耳)의 아들, 유방(劉邦)의 사위였다.(張耳와 중복되는 부분은 생략함) 그는 기원전 202년(高祖5年)에 장이(張耳)가 사망하자 조왕(趙王)을 승계했다. 그리고 그해, 장오(張敖)는 초왕(楚王) 한신(韓信)과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 그리고 양왕(梁王) 팽월(彭越)과 원래 형산왕(衡山王)이었던 오예(吳芮)와 함께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황제(皇帝)의 존호(尊號)를 봉(奉)했다. 그리고 이어서 노원공주(魯元公主)와 결혼했으며, 그러자 노원공주(魯元公主)는 왕후(王后)가 되었다. 기원전 200년(高祖7年) 고조(高祖)가 흉노에 져서 돌아왔을 때, 조(趙)에 잠시 들렀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장오(張敖)는 자식과 같은 사위의 태도로 유방(劉邦)을 대하면서 몹시 비굴하게 굴었는데, 그러자 유방(劉邦)이 그런 모습을 보고는 크게 질책하면서 대단히 교만하게 굴었다. 그러자 그때, 조(趙)의 승상(丞相)이었던 관고(貫高)와 조오(趙午)는 원래 장이(張耳)의 식객(食客)이었던 인물들로, 그것을 보고 화를 내면서 장오(張敖)에게 유방(劉邦)을 살해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장오(張敖)는 <현재의 자신은 모두 유방(劉邦)의 덕택이므로 그것은 불가하다>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관고(貫高)와 조오(趙午)는 장오(張敖)에게는 비밀로 하고 유방(劉邦)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유방(劉邦)이 또 조(趙)를 방문했는데, 그러자 장오(張敖)는 자신의 후궁이었던 조미인(趙美人)을 유방(劉邦)에게 헌상했다.(그리고 그 趙美人은 후에 劉邦의 아들 劉長을 낳았다) 그리고 또 그때, 관고(貫高)는 유방(劉邦)을 살해하기 위해서 백인(柏人)이란 곳에다 암살자들을 배치했다. 그런데 유방(劉邦)이 그 백인(柏人)에서 머물려고 했을 때, 그는 갑자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그곳을 그냥 지나가서 화를 면했다. <백인(柏人)이란 "사람에게 핍박()을 당한다(시달리게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머무는 것은 좋지가 않다!> 그리고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198년에, 관고(貫高) 등의 음모가 발각되었다. 그러자 그 관고(貫高)와 함께 장오(張敖)도 체포되었다. 그러자 여치(呂雉)는 장오(張敖)의 편을 들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여치(呂雉)의 말을 듣지를 않았다. 하지만 또 그때, 관고(貫高)는 그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에 감복했다. 그리고 또 그때, 관고(貫高)는 장오(張敖)의 결백을 계속해서 주장했기 때문에, 유방(劉邦)은 그의 증언을 받아들여서 장오(張敖)를 사면했다. 그 후, 장오(張敖)는 왕위(王位)를 잃었고, 동년(同年) 선평후(宣平侯)로 강격(降格)되었다. 그리고 유방(劉邦)은 그 관고(貫高)의 예를 통해서 장이(張耳)의 식객들이 모두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전부를 군수(郡守) 등에 임명했다. 그 다음 혜제(惠帝) 4년(기원전 191년)에 장오(張敖)와 노원공주(魯元公主) 사이에서 태어났던 딸이 혜제(惠帝)의 황후가 되었다.(張皇后). 그리고 여후(呂后-기원전 187년) 원년(元年)에는 노원공주(魯元公主)가 사망했고, 그리고 또 동년(同年), 장오(張敖)와 노원공주(魯元公主) 사이에서 태어났던 장언(張偃)이 노왕(魯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여후(呂后) 6년(기원전 182년)에는 장오(張敖)도 사망했으며, 그러자 시호(諡號)로 무후(武侯)가 내려졌다. 그 다음 여후(呂后) 8년(紀元前180年)에 노왕(魯王) 장언(張偃)을 보필하기 위해서 여후(呂后)는 장오(張敖)의 전처(前妻) 소생이었던 장치(張侈)와 장수(張受)를 열후(列侯)에 봉했다. 하지만 여후(呂后)가 죽자 쿠데타가 일어나서 여(呂)씨(氏)가 멸해졌으며, 나머지는 장이(張耳)에서 소개했던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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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吳芮-?부터 기원전 202년)는, 진(秦) 말부터 전한(前漢)의 군웅(群雄)이었고, 초대 장사왕(長沙王)이었으며, 유방(劉邦)을 황제(皇帝)로 추천했던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그리고 장이(張耳)와 함께 천수(天壽)를 누렸으며, 자손에게 왕위도 계승했고, 그 중에서 장사왕(長沙王)은 제일 오래 지냈던 왕위였다. 그는 원래 진(秦)의 번양현(番陽縣)에서 현령(縣令)을 지냈던 사람이었는데, 장강(長江), 번양호(番陽湖) 일대(一帶)에서 백성들에게 추앙받았고, 그래서 번군(番君)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반란이 일어나자 영포(英布)가 그를 따랐으며, 그러자 또 그는 자신의 딸을 그 영포(英布)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월(越)의 백성들을 이끌고 반란에 가담했다. 그 후, 유방(劉邦)이 남양(南陽)을 공격했을 때, 오예(吳芮)의 장수(將帥)였던 매견(梅鋗-그러나 매현이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바람)을 만나서 함께 남양(南陽)을 공략했다.

 참고: 매견(梅鋗)의 조상은 원래 춘추시대 구천(句踐)의 후예였다고 하며, 월(越)이 망한 후에 단양(丹陽-현재의 江蘇省)으로 도주해서 성을 매(梅)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진(秦)이 초(楚)를 멸망시킨 후에는 다시 남해군(南海郡-현재의 廣東省)으로 도망을 갔으며, 진(秦) 말에 반란이 일어나자 매견(梅鋗)도 군사를 일으켜서 오예(吳芮)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원전 207년에 매견(梅鋗)은 오예(吳芮)의 명령을 받고 북상(北上)해서 진(秦) 토벌에 나섰는데, 그러던 중에 유방(劉邦)의 군대와 만나서 협공을 했다. 그리고 기원전 206년, 항우(項羽)에게 그 공적을 인정받아서 10만 호(戶)에 봉해져서 제후(諸侯)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고조(高祖) 원년(기원전 206년), 진(秦)이 멸망하자 오예(吳芮)는 항우(項羽)에 의해서 형산왕(衡山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후, 항우(項羽)는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와 오예(吳芮)에게 의제(義帝)를 죽일 것을 명령했다.(史記의 項羽本紀) 그 후, 시기는 불명하지만, 어쨌든 오예(吳芮)는 항우(項羽)에 의해서 형산왕(衡山王)의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러자 그는 다시 번군(番君)으로 강격(降格)되었다. 그러자 그는 유방(劉邦)에게로 갔는데, 하지만 또 그 시기에 영포(英布)도 유방(劉邦)에게로 갔던지, 아니면 오예(吳芮)가 영포(英布)를 꾀여서 유방(劉邦)에게로 함께 귀순(歸順)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하지만, 어쨌든 그러자 유방(劉邦)은 오예(吳芮)를 높이 평가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후, 고조(高祖)5년(기원전 202년)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멸했고, 그러자 오예(吳芮)는 다른 왕들(異姓七王-楚王 韓信, 韓王 韓信, 淮南王 英布, 梁王 彭越, 趙王 張耳, 燕王 臧荼)과 함께 유방(劉邦)에게 황제(皇帝)의 존호(尊號)를 봉(奉)했다. 그리고 그해, 오예(吳芮)는 유방(劉邦)에 의해서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해에 사망했다. 그러자 그에게 문왕(文王)이란 시(諡)가 내려졌으며, 그리고 또 유방(劉邦)은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율령(律令)에 기록하도록 했다. 그 후, 장사왕(長沙王)은 그의 아들 오신(吳臣)이 계속해서 이었지만, 그러나 그 오신(吳臣)은 재위 중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고는 도주하다가 영포(英布)에게 살해되었다. 하지만 유방(劉邦)의 <유(劉)씨(氏)가 아니면 왕으로 세우지 않겠다!>라고 했던 맹세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오예(吳芮)의 자손들이 그 장사국(長沙國)을 승계했으며, 그것은 또 기원전 157년, 오차(吳差)가 자손없이 죽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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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도(臧荼-?부터 기원전 202년)는, 진(秦)말에서 전한(前漢) 기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연(燕)의 장군이었는데, 후에 항우(項羽)를 따라서 진(秦)의 장한(章邯)에 의해서 포위되었던 조(趙)를 구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항우(項羽)를 따라서 관중(關中)으로 들어갔으며, 기원전 206년에 논공행상에 의해서 연왕(燕王)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원래 연왕(燕王)이었던 한광(韓廣)이란 자를 요동왕(遼東王)으로 보내버렸는데, 하지만 또 그해 안에 한광(韓廣)을 쳐서 멸하고는 요동(遼東)을 병합했고, 그 후에 연(燕) 전체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04년, 조(趙)의 진여(陳余)를 파(破)했던 한신(韓信)이 광무군(廣武君) 이좌차(李左車)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병(兵)을 휴식시켰던 것과 동시에 연(燕)으로 사자를 보냈다. 그러자 장도(臧荼)는 한신(韓信)에게 귀순했다. 그리고 기원전 202년에 그 역시도 유방(劉邦)에게 황제(皇帝)의 존호(尊號)를 봉했지만, 그러나 바로 그해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친정(親征)해서 반란을 제압했고, 그러자 또 장도(臧荼)는 포로로 잡혀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 후, 유방(劉邦)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노관(盧綰)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또 그때, 그의 아들 장연(臧衍)은 흉노로 도망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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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劉長-기원전 199년부터 기원전 174년)은, 전한(前漢) 때의 인물로, 유방(劉邦)의 아들이었고, 회남자(淮南子)로 유명했던 유안(劉安)의 아버지였다. 그는 고조(高祖) 8년(기원전 199년)에 유방(劉邦)이 조(趙)를 방문했을 때, 조왕(趙王) 장오(張敖)가 자신의 측실이었던 조미인(趙美人)을 유방(劉邦)에게 헌상했는데, 그래서 태어났던 아이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 전, 조왕(趙王) 장오(張敖)의 신하였던 관고(貫高) 등의 유방(劉邦) 암살 계획이 발각되었고, 그러자 장오(張敖)도 그 조(趙)씨(氏)도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자 또 그 조(趙)씨(氏)는 자기가 유방(劉邦)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고 호소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 조(趙)씨(氏)의 동생이었던 조겸(趙兼)이 심식기(審食其)란 사람을 통해서 여후(呂后)에게 구명(求命)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여후(呂后)는 오히려 질투를 해서 그 말을 유방(劉邦)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 후로 심식기(審食其)도 더 이상 여후(呂后)에게 그에 대한 말은 제대로 하지를 못했다. 그러자 그 후, 그 조(趙)씨(氏)는 화가 나서 유장(劉長)을 출산하고는 자살을 해버렸다. 그러자 그때서야 유방(劉邦)은 후회를 하고는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인정했고, 그런 다음에 여후(呂后)에게 데려가서 키우게 했다. 그 후, 고조(高祖) 11년(기원전 196년)에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러자 그 후임으로 유장(劉長)이 선택되어서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다. 하지만 또 그 후, 유장(劉長)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잃고 여후(呂后)와 혜제(惠帝)의 그늘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래서 유방(劉邦)의 자식들이 모두 죽어나갔던 여후(呂后)의 시대에도 화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러던 중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구명(救命)하지 않았던 심식기(審食其)를 늘 원망했다. 그 후, 유장(劉長)은 성장하자 정(鼎-다리가 셋 달린 아주 큰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세졌다. 그리고 문제(文帝)가 즉위하자 가장 친한 친족이라는 이유로 법을 어기는 등, 방종하게 굴기도 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기원전 177년, 그가 장안(長安)에 입조(入朝)했을 때, 그는 평소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심식기(審食其)를 찾아가서 둔기로 때려서 죽이고는 종자에게 그 목을 베게 했다. 그리고는 웃통을 벗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나의 어머니가 체포되었을 때 심식기(審食其)는 여후(呂后)에게 간청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그 첫 번째의 죄! 그리고 또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와 그 자식에게도 죄가 없었는데, 그러나 여후(呂后)는 그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그때도 심식기(審食其)는 여후(呂后)를 말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 두 번째의 죄! 그리고 또한 여후(呂后)가 여 씨(呂氏)를 왕으로 세웠을 때도 그는 말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이 또 그 세 번째의 죄가 되느니라! 하여, 나는 단지 천하의 도적을 처형한 것일 뿐이며, 또한 내 어머니의 원수를 갚았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의 심정을 이해하고, 또 같은 형제란 이유로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때부터는 문제(文帝)의 어머니였던 박(薄)태후와 황태자, 그리고 또 대신(大臣)들 모두 다 유장(劉長)과 가까이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귀국(歸國)하여 더욱 교만해졌고, 한(漢)의 법률도 무시하고 스스로 법령을 제정했으며, 또한 천자(天子)의 제도(制度)를 이용하는 등, 불손한 일을 상서(上書)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것을 강하게 꾸짖고는 외척이었던 장군 박소(薄昭)에게 시켜서 그에게 충고하는 글을 내렸다. 그러자 유장(劉長)은 몹시 불쾌해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174년, 유장(劉長)이 시무(柴武-劉邦 때의 장군)의 상속자였던 시기(柴奇) 등과 함께 반란을 계획했다는 정보가 있어서 조사가 있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그들을 처형할 것을 상주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차마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승낙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하들의 재촉이 있자 하는 수 없이 그를 왕위에서 폐하고 촉(蜀)으로 유배 보내기로 결정을 했다. 그러자 또 그때, 원앙(袁盎)이 나서서 문제(文帝)에게 이렇게 상주(上奏)했다. <유장(劉長)은 아주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그렇게 유배를 보내시게 되면 스스로를 참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폐하께서는 동생을 죽였다는 오명(汚名)을 안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또 문제(文帝)가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그에게 고통을 주어서 반성하게 하고, 그런 다음에 다시 원래대로 보내줄 생각이오!> 하지만 유장(劉長)은 유배를 떠나던 길에 이렇게 말을 했다. <나를 용사(勇士)라고 추켜세웠던 사람이 도대체 누구였던가? 나는 너무도 교만해서 남의 충고도 듣지 않았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 꼴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호송 중에 일절(一切) 곡기(穀氣)를 끊더니, 결국에는 굶어서 죽어버렸다. 하지만 옹현(雍縣)이란 곳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고, 그러자 또 그가 타고 갔던 수레를 확인하지 않았던 관리들에게 책임이 추궁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옹현(雍縣)이란 곳에는 유장(劉長)의 묘와 함께 30가(家)의 묘수(墓守)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 문제(文帝)는 자신의 일을 후회하고는 유장(劉長)에게 여왕(厲王)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기원전 172년), 그의 자식 3명에게는 회남(淮南)을 3분(分)해서 각각 왕에 봉했다.(기원전 1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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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안(劉安-기원전179부터 기원전122)은,
중국 전한(前漢)의 학자였고, 한나라 고조의 손자로, 회남왕에 봉하여졌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많은 문사(文士)를 식객으로 맞아서 <회남자>를 편찬했지만, 그러나 현재는 그 일부인 만이 전한다.(나머지는 후술 또는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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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장이(張耳-?부터 기원전 202년)는, 진(秦) 말에서 전한(前漢) 초기까지 활약했던 무장이었고, 조왕(趙王)이었다. 그리고 출신은 위(魏)의 대량(大梁)이었으며, 청년시대에는 위(魏)의 공자(公子)였던 신능군(信陵君)의 식객(食客)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신능군(信陵君)이 정치에서 떠나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이 생겼기 때문에, 외항(外黃)이란 곳으로 이주(移住)했다. 그리고 그 후, 현지(現地)의 부호(富豪)였던 사람의 딸과 결혼을 했으며, 그 후에는 또 그 처가(妻家)의 도움을 받아서 그곳의 현령(縣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 장남(이름은 不詳)과 차남이었던 장오(張敖)가 태어났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그 후, 동향(同鄕)의 진여(陳余)가 장이(張耳) 밑에서 벼슬했을 때, 그 두 사람의 사이가 마치 부자(父子)와도 같았다고 하고, 그래서 또 그들은 일찍이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가 그랬던 것처럼 그 두 사람도 <서로의 목을 잘라도 좋다>라고 하는 <문경(刎頸)의 교(交際)>를 맺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바로 그 시기에 서민(庶民)이었던 유방(劉邦)이 장이(張耳)의 식객을 지원했었고, 그러자 장이(張耳)가 그것을 수락했었기 때문에 유방(劉邦)은 잠시나마 장이(張耳)의 그늘에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25년에 위(魏)가 진(秦)에 멸망했고, 그러자 장이(張耳)와 진여(陳余)는 이름을 바꾸고 진(陳)에 있던 어느 동네로 가서 그곳의 수위(守衛-문지기)가 되었다. 그것은 또 그때, 이미 그 두 사람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또 진(秦)에서 그들 두 사람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그때, 진여(陳余)가 그곳의 어느 말단관리와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에 몰매를 맞는 일이 생겼는데, 그러자 장이(張耳)가 진여(陳余)에게 이렇게 말을 하면서 위로했다. <장래를 위해서라도 쓸데없는 일로 목숨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 후, 진승(陳勝)이 봉기(蜂起-기원전 209년)하자 두 사람은 그 즉시 그곳으로 달려가서 봉기에 참가했다. 그러자 진승(陳勝)은 그 두 사람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또 그 무렵, 진승(陳勝)이 왕이 되어야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장이(張耳) 등은 <진(秦)에 의해서 멸망했던 각국의 왕족을 옹립하지 않고 진승(陳勝) 스스로 왕이 된다면 사람들은 진승(陳勝)에게 사심(私心)이 있어서 봉기를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반대했지만, 그러나 진승(陳勝)은 그 말들을 묵살하고 장초(張楚-진승이 세웠던 나라 이름)의 왕이 되었다. 그러자 진여(陳余)는 당시 진(秦)의 지배하에 있었던 조(趙)를 공략하자고 진승(陳勝)에게 상신(上申)했고, 그러자 진승(陳勝)도 그 의견을 받아들여서 무신(武臣)이란 자를 총대장으로 삼고 그 아래에 소소(邵騷)란 자를 부장(部將)으로 그리고 장이(張耳)와 진여(陳余)는 그들의 보좌에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趙)를 토벌하기 위해서 출정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도중에 범양(范陽-현재의 北京)을 공략하려고 했을 때, 그곳의 변사(辯士)였던 괴통(蒯通)이란 자가 진영(陣營)으로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이곳의 군수(郡守)는 나와 오랜 지기(知己)입니다. 그러니 내가 그를 설득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무신(武臣) 등은 그의 말을 믿고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겼다. 그러자 그 설득은 성공했고, 그 후에 조(趙)를 완전히 제압했다.

 그러자 그 후, 장이(張耳)와 진여(陳余) 등이 무신(武臣)에게 다음과 같은 상신(上申)을 내놓았다. <진승(陳勝) 왕은 의심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그 공적은 필시 누군가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장군(武臣)의 신변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이곳(趙)의 왕이 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무신(武臣)도 그 의견을 받아들여서 그러한 뜻을 진승(陳勝)에게 주상(奏上)했다. 그러자 진승(陳勝)은 격노(激怒)했지만, 그러나 주위의 만류가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자 그 후에 장이(張耳)는 우승(右丞)상(相)이 되었으며, 소소(邵騷)는 좌승상 그리고 진여(陳余)는 상장군(上將軍)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후, 무신(武臣)은 조왕(趙王)이 되었지만, 그러나 진승(陳勝)은 그에게 진(秦)을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무신(武臣)은 진승(陳勝)이 마지못해서 자신을 왕위에 올렸다고 생각하고는, 그래서 자신의 지반(地盤)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부하 장군들을 대(代)와 연(燕) 등, 각지로 출병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지를 더욱 넓히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또 그러던 중에 원래 진(秦)의 장군이었던 이량(李良)이 진군(秦軍)에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증병(增兵)을 무신(武臣)에게 요청하기 위해서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또 그 도중에 그들은 무신(武臣)의 누나가 지나가던 행렬(行列)을 만났고, 그러자 그들은 예를 갖추기 위해서 부복(俯伏)했다. 하지만 또 그때, 잔뜩 취해있었던 그녀는 그가 이량(李良)인 줄을 모르고 그에게 실례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에 격노했던 이량(李良)과 그의 부하들은 그 무신(武臣) 누나와 행렬을 그 즉시 도륙한 후, 그대로 군(軍)을 몰아서 한단(邯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무신(武臣)과 좌승상 소소(邵騷)를 토벌해 버렸다.

 하지만 그때, 장이(張耳)와 진여(陳余)는 간일발의 차이로 그곳을 탈출해서 과거, 조(趙)의 공자(公子)였던 조헐(趙歇)을 왕에 옹립하고는 현인(賢人)들의 권유를 받아서 신도(信都)란 곳을 도읍으로 정했다. 그러자 그 사실을 전해들었던 이량(李良)이 곧 신도(信都)를 공격했지만, 그러나 진여(陳余)에게 패해서 진(秦)의 장한(章邯)에게로 도주했다. 그러자 또 장한(章邯)은 그 즉시 왕이(王離)를 신도(信都)로 보냈으며, 그 자신은 한단(邯鄲)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이주시켰고, 그 성곽을 파괴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전해들었던 장이(張耳)는 조왕(趙王)과 함게 거록(鉅鹿)에서 농성에 들어갔으며, 진여(陳余)에게는 상산(常山)으로 가서 병사들을 모집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장한(章邯)에 의해서 양도(糧道)를 빼앗겼던 조군(趙軍)은 그때부터 굶주리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장이(張耳)는 진여(陳余)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자 결국 진여(陳余)가 원군을 데리고 왔지만, 그러나 그 원군들은 또 진(秦)의 대군을 보고는 기가 죽어서 추이를 관망만 하고있었고, 그것은 또 함께 원군으로 왔던 장이(張耳)의 차남 장오(張敖)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또 그런 모습에 격노했던 장이(張耳)는 진여(陳余)의 진영에 자신의 친족이었던 장염(張黶)과 진여(陳余)의 친족이었던 진택(陳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들려서 사자로 보냈다. <우리는 일찍이 문경(刎頸)의 교(交)를 나누었던 사이인데, 어째서 수만(數萬)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가?! 싸우는 것도 함께 싸우고, 죽는 것도 함께 죽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진여(陳余)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도무지 움직이려 들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함께 죽는다면 진(秦)만 이롭게 할뿐입니다! 그러니 조(趙)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또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이 진여(陳余)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매달렸다. <그렇다면 우리들을 여기서 함께 죽여서 조왕(趙王)과 장이(張耳)에게 신용(信用)을 세울 수 있도록 해주시오! 그 뒤의 일이야 우리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그러자 하는 수가 없었던 진여(陳余)가 그 두 사람에게 5천의 군사를 내주었다. 그러자 또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은 그 군사들을 이끌고 나갔지만, 그러나 진(秦)의 대군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병력이었고, 그래서 또 그들은 결국 전멸했다. 그러자 또 그런 상황을 지켜봤던 원군들은 더욱 움직이려들지 않았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즉 바로 낙성(落城) 직전에 항우(項羽)가 원군으로 달려왔고, 이어서 진군(秦軍)은 패퇴했다.

 그 후, 진여(陳余)가 거록(鉅鹿)에 입성(入城)했을 때, 장이(張耳)가 진여(陳余)에게 조왕(趙王)을 도우지 않았던 일을 책(責)하면서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의 행방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진여(陳余)는 앞에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고했다. 하지만 장이(張耳)는 진여(陳余)의 말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진여(陳余)가 그들을 죽였다고 생각하고는 진여(陳余)를 추궁했다. 그러자 또 진여(陳余)가 격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렇게까지 저를 믿지 못하신다면 사직(辭職)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군의 인수(印綬)를 내놓고 바로 화장실로 가버렸다. 그러자 또 장이(張耳)는 처음에는 그것을 거둬들일 마음이 없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식객(食客) 중 한명이 그에게 조언을 했고, 그러자 장이(張耳)는 그 조언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장군을 겸하려고 했다. 그런데 또 그때, 마침 화장실에 갔던 진여(陳余)가 돌아왔는데, 그런 사정을 알고는 장이(張耳)를 원망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수백(數百)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황하(黃河) 근처로 가서 어부(漁夫)가 되었다.

 그 후, 진여(陳余)의 군세(軍勢)를 자신의 지배하에 넣었던 장이(張耳)는 조왕(趙王) 헐(歇)을 신도(信都)에 남겨두고 제후들과 함께 함양(咸陽)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그 후였던 진(秦) 멸망 후, 항우(項羽)는 제후들을 대상으로 대규모적인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했는데, 그러자 장이(張耳)의 명성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던 항우(項羽)는 그를 높이 평가해서 조(趙)를 이분(二分)하고는 그 한곳에 헐(歇)을 대왕(代王)으로, 장이(張耳)를 상산왕(常山王)에 봉했다.

 그러나 그때, 진여(陳余)는 진(秦)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남피(南皮) 부근의 3현(縣)만 그에게 맡겨졌다. 그러자 진여(陳余)는 격노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 처우에 불복했다. <나와 장이(張耳)는 공적이 같은데, 어째서 나만 왕보다 아래인 후(侯)의 직을 주는가?!> 그리고는 당시, 항우(項羽)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제왕(齊王) 전영(田榮)을 찾아가서 군사를 빌렸다. 그리고는 거병해서 장이(張耳)를 공격했고, 그러자 장이(張耳)는 패주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때 대왕(代王)이 되어 있었던 헐(歇)을 영입해서 다시 조왕(趙王)에 옹립했다.

 그런 한편, 당시 도주를 계속하고 있었던 장이(張耳)는 자신을 왕의 자리에까지 올려주었던 항우(項羽)를 믿고 있었지만,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부하였던 점성술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조언을 들었다. <이제 머지 않아서 한왕(漢王) 유방(劉邦)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우(項羽)보다는 유방(劉邦)에게 의지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자 장이(張耳)는 옛날부터 잘 알고있었던 유방(劉邦)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조언을 받아들여서 유방(劉邦)이 있던 한중(漢中)으로 달려갔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장이(張耳)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자 그 후, 장이(張耳)는 한(漢)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드디어 초한전쟁(楚漢戰爭)이 시작되었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항우(項羽)를 견제하기 위해서 각국과 동맹을 맺어갔는데, 그런데 조(趙)와 동맹을 맺기 위해서는 그곳의 실력자였던 진여(陳余)의 승낙이 필수가 되었다. 그러자 또 아니나 다를까, 진여(陳余)는 그 동맹의 조건으로 장이(張耳)의 수급(首級)을 요구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기책을 써서 장이(張耳)와 닮은 죄수 한명의 목을 쳐서 그 머리를 진여(陳余)에게로 보냈다. 그러자 진여(陳余)는 그것을 받아보고 그 동맹을 승낙했는데, 그러나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05년 <팽성(彭城)의 싸움> 때 진여(陳余)는 장이(張耳)가 그때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러자 격노했던 진여(陳余)는 그 동맹을 다시 파기시켜 버렸다.

 그 후,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 대치하면서 한신(韓信)에게 별동대(別動隊)를 주어서 제국(諸國)을 평정한다는 작전을 채용했고, 장이(張耳)를 그 부장(部將)으로 따르게 했으며, 그 결과 위(魏)와 대(代)가 멸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조(趙) 공략에 나섰던 한군(漢軍)들은 이윽고 20만의 군세를 이끌고 나왔던 진여(陳余)의 부대와 대치하게 되었다.(井陘의 싸움) 그 결과, 한신(韓信)의 배수진(背水陣)에 의해서 한군(漢軍)이 승리했고, 그러자 진여(陳余)는 그곳에서 전사했으며, 이어서 조왕(趙王) 헐(歇)은 포로로 잡혀서 처형되었다.

 그 후였던 기원전 204년, 한신(韓信)은 진무(鎭撫)를 위해서 장이(張耳)를 조왕(趙王)에 봉하자는 건의를 유방(劉邦)에게 냈고, 그러자 그것은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2년 후였던 기원전 202년에 장이(張耳)는 사망했으며, 그러자 경왕(景王)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그 후, 차남 장오(張敖)가 그의 뒤를 이었는데, 그런데 그때, 장오(張敖)에게는 이미 처(妻)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서 태어났던 자식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유방(劉邦)의 딸이었던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다시 정실(正室)로 맞아들여야 했으며, 그 사이에 또 장언(張偃)이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그 장언(張偃)을 적자(嫡子)로 했다.

 하지만 기원전 198년, 조(趙)의 정위(廷尉-고대중국의 관명 중 하나로, 九卿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시대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함)였던 관고(貫高)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러자 장오(張敖)는 그 벌로 왕위를 박탈당했으며, 선평후(宣平侯)로 강격(降格)되었다.

 그 후였던 기원전 189년, 장오(張敖)도 사망했고, 그러자 적자였던 장언(張偃)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또 기원전 180년에 여치(呂雉)가 죽자 진평(陳平), 주발(周勃) 등의 원훈(元勳)들과 유방(劉邦)의 손자들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 결과 여치(呂雉)의 혈족들은 모두 처형당했고, 그러자 또 장언(張偃) 등도 숙청대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장언(張偃)은 노원공주(魯元公主)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작위(爵位)만 박탈하는 것으로 구명(求命)되었다. 하지만 또 그 대신으로, 장언(張偃)의 이모형(異母兄)이었던 장수(張壽)는 학창후<學昌侯-하지만 後漢書의 장포전(張酺傳)에 의하면, 지양후(池陽侯-汝南郡 蔡陽県)에 봉해졌다고 한다>에, 그리고 또 한사람이었던 이모형 장치(張侈)는 신도후(信都侯)에 봉해졌는데, 그들은 모두 장오(張敖)의 선처(先妻)가 생산했던 아들들이었다.

 아무튼, 그 후에 문제(文帝)가 즉위하자 장언(張偃)은 다시 작위를 받았는데, 그것은 남궁후(南宮侯)였다. 그리고 또 그 후, 번영을 누렸던 전한(前漢) 중기에 그 장(張)씨(氏)는 명가<名家-汝南郡 蔡陽県(細陽県)>가 되었으며, 그 후로도 그 장(張)씨(氏)의 번영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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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다음 해, 흉노(匈奴)의 공격을 받고 졌던, 한왕 신(韓王信)이 그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다시 친정(親征)을 나가서 그것을 정벌(征伐)했다. 그 후, 기원전 200년에 유방(劉邦)은 다시 흉노(匈奴)의 목돌선우(冒頓單于)를 토벌하기 위해서 북쪽으로 군(軍)을 이동했다. 그러나 그때 유방(劉邦)은 적의 작전에 말려들어서 포위되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진평(陳平)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을 쳤고, 그 후 흉노(匈奴)와 형제의 나라로 지내면서 매년 공물(貢物)을 보내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그 후, 다시는 흉노(匈奴) 때문에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없게 되었다. 기원전 196년, 한신(韓信)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했지만, 소하(蕭何)의 기책(奇策)에 걸려들어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팽월(彭越)도 처형되었다. 그러자 그에 두려움을 느꼈던 영포(英布)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또 그 무렵에 유방(劉邦)은 몸이 좋지 못해서 그 일을 태자(惠帝)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그러나 여치(呂雉) 등의 진언을 받고 친정(親征)해서 그 일도 해결했다. 그리고는 그 귀도(歸途) 중에 유방(劉邦)은 그리운 고향 패(沛)에 들러서 연회를 열고는, 그곳 현지(現地) 아이들 120명을 모아서 <대풍가(大風歌)>를 부르게 했다.

 ※ 아래는 본 필자(筆者) 역(譯)으로, 대풍가(大風歌)에 대한 소개임.

 
大風起兮 雲飛揚
 威加海內兮 歸故鄕
 安得猛士兮 守四方

 
대풍기혜 운비양
 <큰 바람이 일어나자, 구름도 하늘 높이 떠올랐다>

 위가해내혜 귀고향
 <威光이 천하를 덮을 제, 錦衣還鄕 하였구나>

 안득맹사혜 수사방
 <내 어찌 용맹한 군사를 얻어, 天下를 지키지 않겠는가>

 아무튼, 그러자 유방(劉邦)은 아주 기뻐하며 그 패(沛)에 영대면조(永代免租-아주 오랜 세월 동안 조세를 면해주는 것)의 특전을 내렸고, 이어서 패 사람(沛人)들의 청을 받아들여서 고향 풍(豊)에도 같은 특전을 내렸다. 하지만 그 후 유방(劉邦)은 영포(英布)와의 싸움에서 입었던 상처로 인해서 더욱 병이 악화되었고, 그리고는 이윽고 기원전 195년에 사망했다.

 ※ 참고

 그리고 또 그때, 자신의 임종을 미리 예견했던 유방(劉邦)은 <폐하 사후(死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던 여치(呂雉)에게 <나의 뒷일은 蕭何에게 맡기시오. 그 다음은 曹參이 좋을 것이요>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여치(呂雉)가 몇 번이나 다시 물어보자 유방(劉邦)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 <그 다음은 王陵이 좋겠지만, 그러나 그때는 愚直한 陳平을 補佐시키면 좋을 것이요. 하지만 陳平은 머리가 너무 좋기 때문에 전부 다 맡기는 것은 위험하오. 그리고 社稷을 안전하게 지킬 사람은 분명히 周勃이 될 것이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여치(呂雉)가 더욱 매달리면서 다시 묻자 유방(劉邦)은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은 도대체 언제까지 살고 싶은 것인가? 당신이 죽고 난 다음에야 이 세상이야 어찌되든 상관이 없지 않은가?> 그 후, 그의 유언은 모두 이루어졌고, 그것으로 그의 인물 안(人物眼)이 탁월했음도 증명되었다. 그리고 유방(劉邦) 사후(死後) 태자가 즉위해서 혜제(惠帝)가 되었다. 그러자 여치(呂雉)는 모든 실권을 거머쥐었고, 그때부터 여 씨(呂氏)의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 여치(呂雉)가 죽자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주발(周勃)과 진평(陳平)에 의해서 그 여 씨(呂氏)들은 모두 숙청되었고, 이어서 문제(文帝)가 즉위해서 <文景의 治>라고 하는 번영의 시대가 시작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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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치(呂雉) 2

 아무튼, 그렇게 해서 유방(劉邦)도 죽었고, 그 뒤를 이어서 혜제(惠帝)가 즉위하자 여치(呂雉)는 황태후의 자격으로 후견을 자청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자신의 지위를 보다 강고(强固)히 하고자 장이(張耳)의 아들이었던 장오(張敖)와 노원공주(魯元公主)의 딸을 혜제(惠帝)의 황후(張皇后=惠帝의 姪女에 해당됨)로 세웠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후계를 둘러싼 분쟁은 뿌리 깊게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치(呂雉)는 혜제(惠帝)가 즉위하자 곧바로 혜제(惠帝)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유방(劉邦)의 서자(庶子) 제왕(齊王) 유비(劉肥) 그리고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를 살해하려고 기도(企圖)했다. 그러나 유비(劉肥)의 암살은 혜제(惠帝)에 의해서 실패로 돌아갔고, 유여의(劉如意)와 그의 생모(生母) 척 씨(戚氏)는 결국 살해했다. 그런데 그때, 여치(呂雉)는 척 씨(戚氏)를 노예로 만들어서, 유여의(劉如意)를 살해한 후, 그 척 씨(戚氏)의 양손과 양다리를 잘랐고, 그것도 모자라서 눈을 도려냈으며, 그리고 또 약(藥)을 써서 귀를 멀게 했음과 동시에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런 다음에는 또 변소(便所=化粧室)에다 넣어서 인체(人彘=人豚=옛날, 제주도에서 길렀던 黑豚을 想起 바람)라고 부르게 했다고 사서(史書)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고대 중국의 변소에서도 제주도보다 훨씬 크고 넓은 구덩이를 파서 그 안에다 돼지를 넣어서 길렀다고 하는데, 그러자 그것을 알게 되었던 혜제(惠帝)는 큰 충격을 받아서 그때부터 정무(政務)를 방기(放棄)하더니 결국에는 그 충격으로 죽어버렸다. 그러자 여치(呂雉)는 또 그 혜제(惠帝)의 장례식에서 격렬하게 통곡했다지만, 그러나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던 것을 그때 장량(張良)의 아들 장벽강(張辟彊)이 보고 진평(陳平)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또 진평(陳平)은 여치(呂雉)에게 여 씨(呂氏) 일족(一族)들을 중역(重役)에 앉힐 것을 진언했다. 그 후, 여치(呂雉)는 혜제(惠帝)의 유아(遺兒)였던 소제 공(少帝恭)을 세웠고, 여 씨(呂氏) 일족과 진평(陳平) 그리고 주발(周勃) 등 국가의 원훈(元勳)들로 하여금 소제 공(少帝恭)을 보필케 했다. 그리하여 일단 정치는 안정되는 듯 했지만, 하지만 또 그때부터 여치(呂雉)는 각지의 제후왕(諸侯王)에 봉해져있던 유방(劉邦)의 서자(庶子)들을 차례로 암살했다. 그리고 또 그 후임으로 자신의 조카 등 여 씨(呂氏) 일족들을 배치해서 외척(外戚)정치를 펴나갔고, 그리고는 또 이어서 자신에게 반항적이던 소제 공(少帝恭)을 살해하고, 홍(少帝弘)을 세웠는데, 그러자 여치(呂雉)는 원훈(元勳)들로부터 많은 반발을 샀다. 그 결과, 원훈(元勳)들은 자신들도 암살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그때부터는 정무(政務)를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치(呂雉)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일식(日食)이 일어났을 때, 그들에게 시켜서 <제 탓입니다>라고 말을 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죽기 수개월(數個月) 전에는 푸른 개(靑狗)에게 겨드랑이를 물려서 끌려가는 환상을 보고는 점쟁이에게 점을 치게 했는데, 그러자 그 점쟁이가 소제공수(少帝恭祟=少帝恭의 厄)라고 말을 했다. 그런데 실제로 여치(呂雉)는 그 후에 겨드랑이에 병이 생겼고, 그러자 또 자신의 임종을 미리 예감했던 듯, 자신의 조카였던 여산(呂産) 등에게 원훈(元勳)들의 동향(動向)을 면밀히 관찰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그리고는 그 일족들이 중앙의 병권(兵權)을 완전히 장악하고, 또 그로써 모두 중직에 앉은 것을 보고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치(呂雉)가 죽자 곧 진평(陳平)과 주발(周勃) 등이 제왕(齊王)의 유아(遺兒) 등 황족과 그리고 또 그때까지 제국(諸國)에 남아있었던 유 씨(劉氏)들과 협력을 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여 씨(呂氏) 일족은 모두 몰살되었고, 이어서 혜제(惠帝)의 이모제(異母弟)였던 대왕(代王) 유항(劉恒)을 옹립했는데, 그가 바로 문제(文帝)였다. 그리고 그 문제(文帝) 옹립 전후(前後)에 소제 홍(少帝弘)도 혜제(惠帝)의 친자식이 아니고 여치(呂雉)가 어디에선가 데려왔던, 그래서 태생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당시 혜제(惠帝)의 자식으로 되어있던 상산왕(常山王) 유조(劉朝=軹侯), 회양왕(淮陽王) 유무(劉武=壺關侯) 등과 함께 암살되었다. 그리고 또 여치(呂雉)의 여동생이었던 여수(呂須)도 편형(鞭刑-채찍으로 때려서 죽이는 벌)으로 살해되었고, 그녀의 아들 번항(樊伉)도 역시 살해되었다. 그래서 당시, 그 여 씨(呂氏)의 혈통을 가졌던 사람들 중에서 숙청되지 않았던 사람은 노원공주(魯元公主)와 장오(張敖)의 아들(張皇后의 형제)이었던 장언(張偃) 뿐이었다. 어쨌든, 그 여치(呂雉)의 시대에는 황족이나 원훈들이 계속해서 살해되는 등, 그 궁정에서는 무엇인가 혈성(血腥-피비린내)이 끊일 날이 없었던 그런 시대였다. 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 치세(治世)에는 거의 태평성대(太平聖代)였다고 해서,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는 절찬(絶讚)했다. <천하는 평안무사하고, 형벌을 이용하는 일도 드물며, 더불어서 죄인도 적은데다, 백성들은 농사에만 힘쓰니, 의식(衣食)은 더욱 더 풍부해졌다> 그래서 또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과거 한 때를 풍미했던 지배자들을 열거하면서, 시황제(始皇帝)와 항우(項羽) 그리고 유방(劉邦) 등과 함께,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도 같이 취급했으며, 그것은 한서(漢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덧붙여서, 신말(新나라의 末) 후한(後漢) 초의 동란(動亂) 때, 적미(赤眉)의 군사(赤眉의 亂)들이 전한(前漢) 제제(諸帝)들의 능묘(陵墓)를 도굴했는데, 그런데 그때 여치(呂雉)의 유체가 그들의 손에 모욕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후에 광무제(光武帝)는 여치(呂雉)의 지위와 고황후(高皇后)의 휘호(諱號)를 박탈하고는, 대신 문제(文帝)의 생모였던 박 씨(薄氏)를 유방(劉邦)의 정실로 하고, 또 시호도 고황후(高皇后)라고 칭했다. 그리고 또한 곽말약(郭沫若) 등은 여치(呂雉)가 여불위(呂不韋)의 일족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역시,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에서는 그에 관한 기술(記述)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현재 불명(不明)인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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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그 후, 유방(劉邦)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했을 때, 전장(戰場)의 공(功)이 많았던 조참(曹參)이 제일(第一)이란 목소리가 많았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소하(蕭何)를 제일(第一)로 꼽았는데, 그것은 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계속해서 고전(苦戰)하고 있었을 때, 그 뒤에서 모든 병참(兵站)을 책임졌던 소하(蕭何)가 없었다면 현재(現在)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이어서 한신(韓信)을 초왕(楚王)에 봉하고, 팽월(彭越)을 양왕(梁王)에 봉했으며, 장량(張良)에게는 3만호의 영지를 주려고 했지만, 그러나 장량(張良)은 그것을 고사(固辭)했다.

 그 후, 또 유방(劉邦)은 소위 <옹치(雍齒)의 건(件)>을 해결하고는, 가신(家臣)들과 주연(酒宴)을 벌이고 있었을 때, 그곳에 앉았던 가신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천하를 취하고, 項羽는 천하를 잃은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보시오!> 그러자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이렇게 대답했다. <項羽는 오만하고 사람을 경시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仁慈로써 사람을 대했습니다. 하지만 또 폐하는 功績이 있는 자에게는 아낌없이 영지를 내려주는 것으로 천하의 사람들과 이익을 나눕니다. 그러나 項羽는 賢者를 시기했고, 공적이 있어도 恩賞에는 인색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項羽가 천하를 잃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이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公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策略에서는 張良을 따를 수가 없고, 兵站에 관해서는 蕭何를 따르지 못하며, 전쟁에서는 韓信을 따를 수가 없소! 하지만 나는 그 세 사람을 잘 활용했소! 하지만 項羽는 范增 한사람도 제대로 다루지를 못했소. 그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요!> 그러자 그곳에 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유방(劉邦)의 말에 감복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해 7월에 연왕(燕王) 장도(臧筡)가 반란을 일으켜서 유방(劉邦)은 친정(親征)해서 그것을 제압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로 자랐던 노관(蘆管)을 앉혔다. 그런데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그때부터 유방(劉邦)은 자신의 부하들과 제후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특히, 당시 한신(韓信)과 팽월(彭越) 그리고 영포(英布) 그 세 사람은 영지(領地)도 아주 넓었고, 또 백전연마(百戰鍊磨)의 무장들이었으므로, 그래서 자신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그런데 마침 또 그때 <한신(韓信)이 반란을 기도하고 있다!>라는 정보가 자신의 귀에 들어왔다. 그러자 군신(群臣)들은 한신(韓信)에 대한 질투도 있었고 해서였던지 그를 토벌할 것을 진언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진평(陳平)이 나서서 이렇게 말을 했다. <군사(軍事)적 천재인 한신(韓信)과 맞붙는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꼭 그를 잡으려고 하신다면, 그를 유인해서 포획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 안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자신이 순행(巡行)을 나갈 것이므로, 한신(韓信)에게도 올 것을 명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걱정 반(半)하며 종리매(鐘離眛)의 머리를 가지고서 유방(劉邦)에게로 갔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를 포획하고는 초왕(楚王)의 지위를 박탈하고,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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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신(韓信) 3

 중국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이었고,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했으며, 결국에는 유방(劉邦)의 패권(覇權)을 결정짓게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장량(張良)·소하(蕭何)와 함께 유방(劉邦)의 삼걸(三傑) 중 1명이었으며, 세계의 군사사상(軍事史上)으로도 명장(名將)중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그리하여 제왕(齊王)이 되었던 한신(韓信)에게 항우(項羽)도 우려를 느끼기 시작해서 무섭(武涉)이란 者를 사자(使者)로 보냈다. 그러자 무섭(武涉)은 한신(韓信)에게 초(楚)로 넘어올 것을 권유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유방(劉邦)은 항우(項羽)가 홍문(鴻門)에서 일부러 살려서 보내주었는데도, 오히려 항우(項羽)를 공격한 의리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유방(劉邦)은 장군 같은 분이 따를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옛날 자신이 항우(項羽)에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가 유방(劉邦)의 도움으로 제왕(齊王)에까지 오른 것을 생각하고는 그것을 즉석에서 거절했다. 그 후, 한신(韓信)은 또 괴통(蒯通)에게 다음과 같은 진언을 받았다. <천하의 요충지인 제(齊)의 왕이 된 지금, 한(漢), 초(楚)와 천하를 3분(分)하시고, 나중에 양자(兩者=漢, 楚)가 서로 싸우다 지쳤을 때, 홀로 분연(奮然)히 일어서신다면, 이 천하는 곧 왕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많은 고민을 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그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그에 따른 후환(後患)이 두려웠던 괴통(蒯通)은 스스로 광인(狂人) 행세를 하다가 그곳에서 도망쳤다. 그 후, 초한(楚漢)의 싸움은 광무산(廣武山)에서 지구전으로 이어졌고, 그리하여 완전히 지쳐버렸던 양군은, 일단 화의하고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또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유방(劉邦)은 곧 그 약속을 깼고, 이어서 한신(韓信)도 그 전쟁에 참가했으며, 항우(項羽)도 최후를 맞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202년, 항우(項羽)가 죽자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을 제왕(齊王)에서 초왕(楚王)으로 봉했다. 그러자 그 초(楚)는 한신(韓信)의 고향이었으므로, 그래서 그에게서는 대단한 명예(名譽)였으며, 또한 영전(榮轉)이 되었지만, 그러나 전체 성(城)의 수(數)에서는 오히려 70여 성에서 50여 성으로 줄어들었다. 그 후, 한신(韓信)은 고향 회음(淮陰)으로 돌아가서 개선(凱旋)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과거 자신에게 먹을 것을 베풀어주었던 그 노녀(老女)를 찾아가서 후하게 은혜를 갚았다. 그리고는 또 과거 자신에게 '고부(股夫)'란 오명(汚名)을 안겨주었던 그 남자를 찾아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때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그것이 쓸데없는 짓이란 것을 알고는 그만두었다. 그리고 또한 내가 그때 그 모욕을 참고 너의 가랑이 사이를 기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를 중위(中尉=치안유지의 직책)에 임명했다. 그리고 또 한때 자신이 식객(食客)으로 있었던 그 정장(亭長)에게는 <사람을 도와주기로 한번 마음을 먹었다면 제대로 끝까지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라고 훈계를 하고는 백전(百錢)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01년, 과거 잘 알고 지냈던 초(楚)의 장군 종리매(鐘離眛)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에게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다 또 마침 그때 한신(韓信)의 이례적인 대 출세에 질투를 느꼈던 어떤 者가 <한신(韓信)에게 모반의 혐의가 있다!>라고 중상모략을 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것에 대한 변명을 할 목적으로 종리매(鐘離眛)에게 자살을 재촉했다. (이하, 인물소개 鐘離眛 참조) 그렇게 해서 종리매(鐘離眛)도 죽었고, 그러자 또 한신(韓信)은 그의 머리를 가지고 유방(劉邦)에게 변명할 목적으로 찾아갔지만, 그러나 오히려 그곳에서 유방(劉邦)에게 바로 포획되었다. 그러자 또 한신(韓信)은 그 자리에서 과거 범여(范蠡)가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교토(狡兎-교활하거나,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양구(良狗-좋은 사냥개)는 삶겨지고, 하늘 높이 날던 새(鳥)가 떨어지면 좋은 활(弓)은 창고(倉庫)신세요, 적국(敵國)이 망하면 모신(謀臣-책략을 쓰는 신하)도 망(亡)하는 법(法)! 이미 천하(天下)가 정해졌으니, 나 또한 삶기고(煮) 말 것인가?!>

  ☆ 범여(范蠡-生沒不明)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월(越)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었으며, 재상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씨(氏)는 범(范), 휘(諱)는 여(蠡), 자(字)는 소백(少伯)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회계(會稽)에서 패했던 구천(句踐)을 도왔으며,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멸망시킨 후에 산둥(山東)의 도(陶)로 가서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자칭하면서 큰 부(富)를 쌓았다. 그리고 越王 구천(勾踐)을 春秋五覇에 올려놓았던 최고의 공헌자로 알려져 있다.(더욱 상세한 것은 참고 6-31 참조)

 아무튼,
그러자 유방(劉邦)은 모반(謀反)의 혐의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했고, 대신 그를 병권을 가지지 않는 회음후(淮陰侯)로 격하시켰다. 그 후, 한신(韓信)은 病을 칭하며 장안(長安)의 저택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그러던 중 어느 때, 그는 무양후(舞陽侯) 번쾌(樊噲)의 집에 들렀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번쾌(樊噲)는 평소 존경하고 있었던 한신(韓信)을 예(禮)를 다해서 맞이하고는 그에게 <大王>이라고 칭했고, 또 스스로는 <臣>이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살아가다 보니 이제는 같은 처지(同格)가 되었소!>라고 말을 하고는 자조(自嘲-스스로를 비웃음)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에도 유방(劉邦)은 자주 한신(韓信)과 제장(諸將)들을 품평(品評=比較)했다. 그리고 또 어떤 때에 유방(劉邦)이 한신(韓信)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생각하기에 나는 어느 정도 수준의 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한신(韓信)이 이렇게 답을 했다. <폐하께서는 겨우 10만 兵을 이끌 수 있을 將帥십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그렇다면 그대는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또 한신(韓信)이 대답했다. <저는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째서 지금 나의 포로가 되어 있는가?> 그러자 또 한신(韓信)이 답을 했다. <폐하께서는 군사를 인솔하는 데는 부족하지만, 그러나 將에 대해서는 將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將의 將이란 의미). 그리고 그것은 하늘로부터 附與받은 것이며, 결코 사람의 人力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 후에 또 세월은 흘러서 진희(陳豨)가 거록태수(鉅鹿太守)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평소 한신(韓信)을 존경하고 있었던 거록(鉅鹿)은 그 임지(任地)로 떠나기 전에 장안(長安)에 있던 한신(韓信)에게 인사를 갔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 진희(陳豨)에게 <자신에게 천하의 야심이 있음>을 시사(示唆)했다. 그러자 또 진희(陳豨)가 깜짝 놀라면서 물으니 한신(韓信)이 다음과 같은 계책을 알려주었다.

 
1. 현재 유방(劉邦)은 진희(陳豨)를 독실(篤實)하게 신뢰하고 있으므로, 만약 그런 진희(陳豨)가 모반(謀反)을 하게 된다면, 분명히 유방(劉邦)은 격노해서 친정(親征)을 하게 될 것이고, 만약에 또 그렇게 된다면, 그때 장안(長安)은 비게 된다.

 2. 하지만 또 거록(鉅鹿)은 정병(精兵-우수하고 강한 군사)이 있는 요충(要衝)이기 때문에, 그래서 유방(劉邦)은 쉽게 공략할 수가 없을 것이다.

 3. 그러면 또 그 틈을 타서 한신(韓信) 자신이 장안(長安)을 장악한다.

 4. 그리고 또 현재, 전국에서는 반란이 빈발하고 있고, 유방(劉邦)에 대한 불만이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바로
이러한 때에 한신(韓信) 자신이 거병하게 된다면, 제국(諸國)도 흔쾌히 자신을 따르게 될 것이다...

 라는 것 등이 그것이었는데, 그런데 실제로 기원전 196년의 봄, 진희(陳豨)가 거록(鉅鹿)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또 신뢰하던 진희(陳豨)의 반역에 격노했던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의 계책대로 그 진압을 위해서 무모한 친정(親征)에 나섰고, 그러자 또 한신(韓信)의 예상대로 장안(長安)은 곧 무주공산(無主空山)이나 진배 없게 되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 기회를 잡아서 장안(長安)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리고는 죄수들을 해방시켜서 그들을 부하로 삼고는 당시, 거의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이 있었던 여후(呂后)와 황태자(皇太子) 영(盈)을 감금하고는 정권을 빼앗으려고 꾀했다. 하지만 일이 잘 되지 않으려면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는 법! 바로 그때, 평소 한신(韓信)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하인(下人) 한명이 그런 사실을 여후(呂后)에게 밀고했고, 그래서 그 때문에 그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러자 여후(呂后)는 상국(相國) 소하(蕭何)를 불러서 그 일에 관해서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소하(蕭何)는 여후(呂后)에게 한신(韓信)과 정면 대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을 하고는 한 가지 책(策)을 강구했다. 그 후, 소하(蕭何)는 우선 <진희(陳豨)가 토벌되었다!>라고 세상에 헛소문을 흘렸다. 그런 다음에는 한신(韓信)에게 사람을 보내서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했다. <지금 병중(病中)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러나 현재 자신(韓信)에게 걸려있는 혐의(謀反)도 풀고, 또 친정(親征) 성공도 축하하는 의미에서라도 잠시 궁(宮)에 다녀가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별 의심도 없이 그 말에 따랐고, 그러자 또 그때만 기다리고 있던 소하(蕭何) 등에게 한신(韓信)은 체포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매사에 그렇게도 용의주도했던 한신(韓信)이었지만, 그러나 상대가 자신을 대장군에까지 추대해주었던 소하(蕭何)였기 때문에, 그래서 별 의심 없이 나섰다가 그렇게 허무하게 잡히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 후,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의 귀환을 기다릴 여가도 없이 장안(長安)의 성중(城中) 미앙궁(未央宮) 내에서 처형되었고, 이어서 그의 삼족(三族)도 멸해졌다. 그리고 한신(韓信)은 그 처형 직전에 <내가 괴통(蒯通)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참으로 유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신(韓信) 사후(死後), 진희(陳豨)를 토벌하고 돌아왔던 유방(劉邦)은, 처음에는 한신(韓信)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그러나 곧 한신(韓信)이 최후에 했다는 말을 듣고는 격노해서 그 괴통(蒯通)을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또 그 괴통(蒯通)은 유방(劉邦)에게 붙잡힌 후, 유방(劉邦)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당당하게 항변했기 때문에 생명은 건질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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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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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6. 한초전쟁(漢楚戰爭)

 6-4 천하통일(天下統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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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항우(項羽) 4

 <垓下의 싸움>

 2. 사면초가(四面楚歌)

 
아무튼, 그 눈물의 연회(宴會)가 끝나자 항우(項羽)는 밤을 이용해서 약 8백 명 정도의 군사들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는 곧 한군(漢軍)의 포위망을 뚫고 바람처럼 남쪽으로
내달았다. 그러자 다음날 새벽, 한군(漢軍)은 그때서야 항우(項羽)가 탈출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관영(灌嬰)에게 5천기(騎)의 군사를 주어서 항우(項羽)의 뒤를 쫓게 했다. 그런 한편, 항우(項羽)의 8백여 군사들은 도주하던 중 여러 가지의 이유로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고, 그래서 나중에 항우(項羽)가 겨우 동성(東城=現 安微省 定遠縣의 東南)에 다다랐을 때는 불과 28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뒤따라 오던 한군(漢軍)을 의식하면서 남아 있던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가 지금 이런 처지에 놓인 것은 다만 하늘의 뜻일 뿐, 결코 우리가 약(弱)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부터 사력을 다해서 한군(漢軍)을 쳐부수고, 그것으로 우리들이 용맹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자!> 그리고는 남아 있던 병사들을 7기(騎)씩 나누어서 각각 한군(漢軍)을 상대하게 했다. 그러자 항우(項羽)의 부하들은 사력을 다해서 한군(漢軍)과 싸웠다. 그리고 또 그때 항우(項羽)도 한(漢)의 도위(都尉)를 베었던 것과 함께, 한군(漢軍) 약 8, 90명을 죽였지만, 그러나 다시 대오(隊伍)를 정비했을 때 남아 있던 항우(項羽)의 부하들은 단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다시 동쪽으로 달아나서 오강(烏江=中國의 貴州省을 흐르는 강으로, 現 安徽省 和縣에 있음)이라는 장강(長江)의 나루터(烏江鎭)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만 건너게 되면 바로 자신들이 처음 궐기했던 그 강동(江東) 땅이었다. 그런데 그때, 오강(烏江)의 정장<亭長==宿場=驛站=館으로, 과거 관원들이 공무로 다닐 때 숙식을 제공하고 빈객(賓客)을 접대하기 위하여 각 주(州)와 현(縣)에 마련해두었던 객사(客舍)를 의미함>이 항우(項羽)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大王에게 江東은 작은 곳입니다만, 그러나 그곳의 토지는 數 千里요, 인구도 數 十萬에 이릅니다. 그러니 그곳으로 가셔서 왕이 되소서. 그리고 이 근처에서 배를 가진 사람은 저밖에 없으므로, 漢軍이 들이닥친다고 해도 이 강을 건널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항우(項羽)는 그것을 거절하고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옛날, 내가 저 江東의 젊은이들 8천명을 인솔하고 이 강을 건넜지만, 그러나 지금은 단 한 명도 돌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만약 그곳의 사람들이 나를 왕으로 맞아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무슨 면목이 있어 그들을 만날 것인가?!> 그리고는 그 정장(亭長)에게 자신의 애마(愛馬) 추(騅)를 넘겨주고 그대로 한군(漢軍)으로 돌격해서 들어갔다. 그 후, 항우(項羽)는 혼자서 한군(漢軍) 수백(數百)을 죽였지만, 그러나 끝내 자신도 여러 군데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 한군(漢軍)에 과거 자신과 잘 알고 지냈던 여마동(呂馬童)이란 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漢은 나의 목에 千金과 一萬 邑의 領地를 내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왕 죽을 것이라면 과거 나와 잘 알고 지냈던 너에게 그 德을 베풀어주고 싶구나!> 그리고는 스스로 목을 쳐서 죽었다. 그러자 그의 목에 걸렸던 은상(恩賞) 때문에 그 주위에 있던 한군(漢軍)의 병사들은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서로 죽일 지경까지 되었다. 그래서 결국 항우(項羽)의 유체(遺體)는 다섯으로 나누어졌고, 그 결과로 여마동(呂馬童)을 포함했던 5명<양희(楊喜)・왕예(王翳)・여마동(呂馬童)・여승(呂勝)・양무(楊武)>에게 각각 영지를 5등분해서 내린 후에, 유방(劉邦)은 그의 유체를 모아서 극진하게 매장했다.<노공(魯公)의 예(禮)로써 곡성(穀城)에 매장함> 그리고 항우(項羽) 사후(死後), 항백(項伯=射陽侯)을 시작으로 했던 항 씨(項氏) 일족들은 유방(劉邦)에 의해서 전부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또 그로써 약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초한전쟁(楚漢戰爭)도 모두 종결되었고, 드디어 유방(劉邦)은 천하를 통일했음과 동시에, 전후(前後) 약 400년이나 계속되는 한 왕조(漢王朝)의 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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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미인(虞美人-?부터 기원전 202년)은, 진말(秦末)부터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여성(女性)으로, 항우(項羽)의 애인이라고 알려졌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으며, 우(虞)는 그녀의 성(姓)이라고 한다.(漢書) 그리고 사기(史記)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우(虞)라고 했으며, 미인(美人)이란 것도 후궁(後宮)의 의미이거나, 그 자태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또 소설(小說) 등에서는 그녀가 곧잘 항우(項羽)의 처(妻)로 표현되고 있으며, 또한 이름도 우희(虞姬)로 소개하는 것도 많다. 그러나 그녀가 항우(項羽)와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는지, 또는 그 이야기의 처음에 대해서는 일절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래서 또 그녀는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유방(劉邦)에게 져서 낙담해 있던 항우(項羽)의 옆에는 언제나 우미인(虞美人)이 있었고,
항우(項羽)는 한 시(時)라도 그녀를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라고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항우(項羽)의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의 시(詩)가 소개되고 항우(項羽)는 해하(垓下)를 탈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등에서 일절 기술한 것이 없지만, 하지만 또 창작으로, 소설 등에서는 그녀가 항우(項羽)의 탈출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살한다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그 자살설(自殺說)에 대해서도, 그것은 여성(女性)의 정절(貞節)이 강조되었던 북송(北宋)시대부터 회자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우미인(虞美人)의 전설(傳說)은 개양귀비 꽃<추앵속(雛罌粟)>의 이명(異名)으로 붙여져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 꽃을 <虞美人草>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雛罌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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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유방(劉邦)'은 그때까지도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노(魯)'을 제압했고, 이어서 '항우(項羽)'의 잔당(殘黨)들을 달래고자 '항우(項羽)'의 장례를 후(厚)하게 치러주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기원전 202년 '유방(劉邦)'은 군신(群臣)들의 추대를 받아서 마침내 황제(皇帝)에 등극(登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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