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202년 / 유방(劉邦=高祖)이 즉위하여 漢王朝 成立



<유방>

-----------------------------------------------------------------------------------------------

 <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6. 한초전쟁(漢楚戰爭)

 6-4 천하통일(天下統一)

 -----------------------------------------------------------------------------------------------

  ※ 항우(項羽) 4

 <垓下의 싸움>

 2. 사면초가(四面楚歌)

 
아무튼, 그 눈물의 연회(宴會)가 끝나자 항우(項羽)는 밤을 이용해서 약 8백 명 정도의 군사들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는 곧 한군(漢軍)의 포위망을 뚫고 바람처럼 남쪽으로
내달았다. 그러자 다음날 새벽, 한군(漢軍)은 그때서야 항우(項羽)가 탈출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관영(灌嬰)에게 5천기(騎)의 군사를 주어서 항우(項羽)의 뒤를 쫓게 했다. 그런 한편, 항우(項羽)의 8백여 군사들은 도주하던 중 여러 가지의 이유로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고, 그래서 나중에 항우(項羽)가 겨우 동성(東城=現 安微省 定遠縣의 東南)에 다다랐을 때는 불과 28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뒤따라 오던 한군(漢軍)을 의식하면서 남아 있던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가 지금 이런 처지에 놓인 것은 다만 하늘의 뜻일 뿐, 결코 우리가 약(弱)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부터 사력을 다해서 한군(漢軍)을 쳐부수고, 그것으로 우리들이 용맹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자!> 그리고는 남아 있던 병사들을 7기(騎)씩 나누어서 각각 한군(漢軍)을 상대하게 했다. 그러자 항우(項羽)의 부하들은 사력을 다해서 한군(漢軍)과 싸웠다. 그리고 또 그때 항우(項羽)도 한(漢)의 도위(都尉)를 베었던 것과 함께, 한군(漢軍) 약 8, 90명을 죽였지만, 그러나 다시 대오(隊伍)를 정비했을 때 남아 있던 항우(項羽)의 부하들은 단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다시 동쪽으로 달아나서 오강(烏江=中國의 貴州省을 흐르는 강으로, 現 安徽省 和縣에 있음)이라는 장강(長江)의 나루터(烏江鎭)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만 건너게 되면 바로 자신들이 처음 궐기했던 그 강동(江東) 땅이었다. 그런데 그때, 오강(烏江)의 정장<亭長==宿場=驛站=館으로, 과거 관원들이 공무로 다닐 때 숙식을 제공하고 빈객(賓客)을 접대하기 위하여 각 주(州)와 현(縣)에 마련해두었던 객사(客舍)를 의미함>이 항우(項羽)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大王에게 江東은 작은 곳입니다만, 그러나 그곳의 토지는 數 千里요, 인구도 數 十萬에 이릅니다. 그러니 그곳으로 가셔서 왕이 되소서. 그리고 이 근처에서 배를 가진 사람은 저밖에 없으므로, 漢軍이 들이닥친다고 해도 이 강을 건널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항우(項羽)는 그것을 거절하고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옛날, 내가 저 江東의 젊은이들 8천명을 인솔하고 이 강을 건넜지만, 그러나 지금은 단 한 명도 돌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만약 그곳의 사람들이 나를 왕으로 맞아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무슨 면목이 있어 그들을 만날 것인가?!> 그리고는 그 정장(亭長)에게 자신의 애마(愛馬) 추(騅)를 넘겨주고 그대로 한군(漢軍)으로 돌격해서 들어갔다. 그 후, 항우(項羽)는 혼자서 한군(漢軍) 수백(數百)을 죽였지만, 그러나 끝내 자신도 여러 군데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 한군(漢軍)에 과거 자신과 잘 알고 지냈던 여마동(呂馬童)이란 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漢은 나의 목에 千金과 一萬 邑의 領地를 내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왕 죽을 것이라면 과거 나와 잘 알고 지냈던 너에게 그 德을 베풀어주고 싶구나!> 그리고는 스스로 목을 쳐서 죽었다. 그러자 그의 목에 걸렸던 은상(恩賞) 때문에 그 주위에 있던 한군(漢軍)의 병사들은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서로 죽일 지경까지 되었다. 그래서 결국 항우(項羽)의 유체(遺體)는 다섯으로 나누어졌고, 그 결과로 여마동(呂馬童)을 포함했던 5명<양희(楊喜)・왕예(王翳)・여마동(呂馬童)・여승(呂勝)・양무(楊武)>에게 각각 영지를 5등분해서 내린 후에, 유방(劉邦)은 그의 유체를 모아서 극진하게 매장했다.<노공(魯公)의 예(禮)로써 곡성(穀城)에 매장함> 그리고 항우(項羽) 사후(死後), 항백(項伯=射陽侯)을 시작으로 했던 항 씨(項氏) 일족들은 유방(劉邦)에 의해서 전부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또 그로써 약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초한전쟁(楚漢戰爭)도 모두 종결되었고, 드디어 유방(劉邦)은 천하를 통일했음과 동시에, 전후(前後) 약 400년이나 계속되는 한 왕조(漢王朝)의 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

 ※
우미인(虞美人-?부터 기원전 202년)은, 진말(秦末)부터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여성(女性)으로, 항우(項羽)의 애인이라고 알려졌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으며, 우(虞)는 그녀의 성(姓)이라고 한다.(漢書) 그리고 사기(史記)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우(虞)라고 했으며, 미인(美人)이란 것도 후궁(後宮)의 의미이거나, 그 자태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또 소설(小說) 등에서는 그녀가 곧잘 항우(項羽)의 처(妻)로 표현되고 있으며, 또한 이름도 우희(虞姬)로 소개하는 것도 많다. 그러나 그녀가 항우(項羽)와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는지, 또는 그 이야기의 처음에 대해서는 일절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래서 또 그녀는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유방(劉邦)에게 져서 낙담해 있던 항우(項羽)의 옆에는 언제나 우미인(虞美人)이 있었고,
항우(項羽)는 한 시(時)라도 그녀를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라고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항우(項羽)의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의 시(詩)가 소개되고 항우(項羽)는 해하(垓下)를 탈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등에서 일절 기술한 것이 없지만, 하지만 또 창작으로, 소설 등에서는 그녀가 항우(項羽)의 탈출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살한다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그 자살설(自殺說)에 대해서도, 그것은 여성(女性)의 정절(貞節)이 강조되었던 북송(北宋)시대부터 회자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우미인(虞美人)의 전설(傳說)은 개양귀비 꽃<추앵속(雛罌粟)>의 이명(異名)으로 붙여져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 꽃을 <虞美人草>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雛罌粟> 


 ----------------------------------------------------------------------------------------------

 그 후 '유방(劉邦)'은 그때까지도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노(魯)'을 제압했고, 이어서 '항우(項羽)'의 잔당(殘黨)들을 달래고자 '항우(項羽)'의 장례를 후(厚)하게 치러주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기원전 202년 '유방(劉邦)'은 군신(群臣)들의 추대를 받아서 마침내 황제(皇帝)에 등극(登極)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