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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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6. 한초전쟁(漢楚戰爭)
6-4 천하통일(天下統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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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우(項羽) 4
<垓下의 싸움>
2. 사면초가(四面楚歌)
아무튼, 그 눈물의 연회(宴會)가 끝나자 항우(項羽)는 밤을 이용해서 약 8백 명 정도의 군사들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했다. 그리고는 곧 한군(漢軍)의 포위망을 뚫고 바람처럼 남쪽으로 내달았다. 그러자 다음날 새벽, 한군(漢軍)은 그때서야 항우(項羽)가 탈출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급히 관영(灌嬰)에게 5천기(騎)의 군사를 주어서 항우(項羽)의 뒤를 쫓게 했다. 그런 한편, 항우(項羽)의 8백여 군사들은 도주하던 중 여러 가지의 이유로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고, 그래서 나중에 항우(項羽)가 겨우 동성(東城=現 安微省 定遠縣의 東南)에 다다랐을 때는 불과 28명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뒤따라 오던 한군(漢軍)을 의식하면서 남아 있던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우리가 지금 이런 처지에 놓인 것은 다만 하늘의 뜻일 뿐, 결코 우리가 약(弱)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부터 사력을 다해서 한군(漢軍)을 쳐부수고, 그것으로 우리들이 용맹했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자!> 그리고는 남아 있던 병사들을 7기(騎)씩 나누어서 각각 한군(漢軍)을 상대하게 했다. 그러자 항우(項羽)의 부하들은 사력을 다해서 한군(漢軍)과 싸웠다. 그리고 또 그때 항우(項羽)도 한(漢)의 도위(都尉)를 베었던 것과 함께, 한군(漢軍) 약 8, 90명을 죽였지만, 그러나 다시 대오(隊伍)를 정비했을 때 남아 있던 항우(項羽)의 부하들은 단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다시 동쪽으로 달아나서 오강(烏江=中國의 貴州省을 흐르는 강으로, 現 安徽省 和縣에 있음)이라는 장강(長江)의 나루터(烏江鎭)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만 건너게 되면 바로 자신들이 처음 궐기했던 그 강동(江東) 땅이었다. 그런데 그때, 오강(烏江)의 정장<亭長==宿場=驛站=館으로, 과거 관원들이 공무로 다닐 때 숙식을 제공하고 빈객(賓客)을 접대하기 위하여 각 주(州)와 현(縣)에 마련해두었던 객사(客舍)를 의미함>이 항우(項羽)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大王에게 江東은 작은 곳입니다만, 그러나 그곳의 토지는 數 千里요, 인구도 數 十萬에 이릅니다. 그러니 그곳으로 가셔서 왕이 되소서. 그리고 이 근처에서 배를 가진 사람은 저밖에 없으므로, 漢軍이 들이닥친다고 해도 이 강을 건널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항우(項羽)는 그것을 거절하고 또 이렇게 말을 했다. <옛날, 내가 저 江東의 젊은이들 8천명을 인솔하고 이 강을 건넜지만, 그러나 지금은 단 한 명도 돌아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만약 그곳의 사람들이 나를 왕으로 맞아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무슨 면목이 있어 그들을 만날 것인가?!> 그리고는 그 정장(亭長)에게 자신의 애마(愛馬) 추(騅)를 넘겨주고 그대로 한군(漢軍)으로 돌격해서 들어갔다. 그 후, 항우(項羽)는 혼자서 한군(漢軍) 수백(數百)을 죽였지만, 그러나 끝내 자신도 여러 군데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자 항우(項羽)는 그 한군(漢軍)에 과거 자신과 잘 알고 지냈던 여마동(呂馬童)이란 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漢은 나의 목에 千金과 一萬 邑의 領地를 내건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왕 죽을 것이라면 과거 나와 잘 알고 지냈던 너에게 그 德을 베풀어주고 싶구나!> 그리고는 스스로 목을 쳐서 죽었다. 그러자 그의 목에 걸렸던 은상(恩賞) 때문에 그 주위에 있던 한군(漢軍)의 병사들은 한꺼번에 몰려들어서 서로 죽일 지경까지 되었다. 그래서 결국 항우(項羽)의 유체(遺體)는 다섯으로 나누어졌고, 그 결과로 여마동(呂馬童)을 포함했던 5명<양희(楊喜)・왕예(王翳)・여마동(呂馬童)・여승(呂勝)・양무(楊武)>에게 각각 영지를 5등분해서 내린 후에, 유방(劉邦)은 그의 유체를 모아서 극진하게 매장했다.<노공(魯公)의 예(禮)로써 곡성(穀城)에 매장함> 그리고 항우(項羽) 사후(死後), 항백(項伯=射陽侯)을 시작으로 했던 항 씨(項氏) 일족들은 유방(劉邦)에 의해서 전부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또 그로써 약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초한전쟁(楚漢戰爭)도 모두 종결되었고, 드디어 유방(劉邦)은 천하를 통일했음과 동시에, 전후(前後) 약 400년이나 계속되는 한 왕조(漢王朝)의 문을 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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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미인(虞美人-?부터 기원전 202년)은, 진말(秦末)부터 초한전쟁(楚漢戰爭)기의 여성(女性)으로, 항우(項羽)의 애인이라고 알려졌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으며, 우(虞)는 그녀의 성(姓)이라고 한다.(漢書) 그리고 사기(史記)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우(虞)라고 했으며, 미인(美人)이란 것도 후궁(後宮)의 의미이거나, 그 자태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또 소설(小說) 등에서는 그녀가 곧잘 항우(項羽)의 처(妻)로 표현되고 있으며, 또한 이름도 우희(虞姬)로 소개하는 것도 많다. 그러나 그녀가 항우(項羽)와 어떻게 해서 만나게 되었는지, 또는 그 이야기의 처음에 대해서는 일절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래서 또 그녀는 해하(垓下)의 싸움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유방(劉邦)에게 져서 낙담해 있던 항우(項羽)의 옆에는 언제나 우미인(虞美人)이 있었고, 항우(項羽)는 한 시(時)라도 그녀를 손에서 놓는 법이 없었다...>라고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또 이어서 항우(項羽)의 <역발산(力拔山) 기개세(氣蓋世)>의 시(詩)가 소개되고 항우(項羽)는 해하(垓下)를 탈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사기(史記)나 한서(漢書) 등에서 일절 기술한 것이 없지만, 하지만 또 창작으로, 소설 등에서는 그녀가 항우(項羽)의 탈출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 자살한다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그 자살설(自殺說)에 대해서도, 그것은 여성(女性)의 정절(貞節)이 강조되었던 북송(北宋)시대부터 회자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우미인(虞美人)의 전설(傳說)은 개양귀비 꽃<추앵속(雛罌粟)>의 이명(異名)으로 붙여져서, 후세의 사람들은 그 꽃을 <虞美人草>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雛罌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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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유방(劉邦)'은 그때까지도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노(魯)'을 제압했고, 이어서 '항우(項羽)'의 잔당(殘黨)들을 달래고자 '항우(項羽)'의 장례를 후(厚)하게 치러주었다. 그리고는 드디어 기원전 202년 '유방(劉邦)'은 군신(群臣)들의 추대를 받아서 마침내 황제(皇帝)에 등극(登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