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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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해, 흉노(匈奴)의 공격을 받고 졌던, 한왕 신(韓王信)이 그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다시 친정(親征)을 나가서 그것을 정벌(征伐)했다. 그 후, 기원전 200년에 유방(劉邦)은 다시 흉노(匈奴)의 목돌선우(冒頓單于)를 토벌하기 위해서 북쪽으로 군(軍)을 이동했다. 그러나 그때 유방(劉邦)은 적의 작전에 말려들어서 포위되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진평(陳平)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을 쳤고, 그 후 흉노(匈奴)와 형제의 나라로 지내면서 매년 공물(貢物)을 보내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그 후, 다시는 흉노(匈奴) 때문에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없게 되었다. 기원전 196년, 한신(韓信)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했지만, 소하(蕭何)의 기책(奇策)에 걸려들어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팽월(彭越)도 처형되었다. 그러자 그에 두려움을 느꼈던 영포(英布)가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또 그 무렵에 유방(劉邦)은 몸이 좋지 못해서 그 일을 태자(惠帝)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그러나 여치(呂雉) 등의 진언을 받고 친정(親征)해서 그 일도 해결했다. 그리고는 그 귀도(歸途) 중에 유방(劉邦)은 그리운 고향 패(沛)에 들러서 연회를 열고는, 그곳 현지(現地) 아이들 120명을 모아서 <대풍가(大風歌)>를 부르게 했다.
※ 아래는 본 필자(筆者) 역(譯)으로, 대풍가(大風歌)에 대한 소개임.
大風起兮 雲飛揚
威加海內兮 歸故鄕
安得猛士兮 守四方
대풍기혜 운비양
<큰 바람이 일어나자, 구름도 하늘 높이 떠올랐다>
위가해내혜 귀고향
<威光이 천하를 덮을 제, 錦衣還鄕 하였구나>
안득맹사혜 수사방
<내 어찌 용맹한 군사를 얻어, 天下를 지키지 않겠는가>
아무튼, 그러자 유방(劉邦)은 아주 기뻐하며 그 패(沛)에 영대면조(永代免租-아주 오랜 세월 동안 조세를 면해주는 것)의 특전을 내렸고, 이어서 패 사람(沛人)들의 청을 받아들여서 고향 풍(豊)에도 같은 특전을 내렸다. 하지만 그 후 유방(劉邦)은 영포(英布)와의 싸움에서 입었던 상처로 인해서 더욱 병이 악화되었고, 그리고는 이윽고 기원전 195년에 사망했다.
※ 참고
그리고 또 그때, 자신의 임종을 미리 예견했던 유방(劉邦)은 <폐하 사후(死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던 여치(呂雉)에게 <나의 뒷일은 蕭何에게 맡기시오. 그 다음은 曹參이 좋을 것이요>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여치(呂雉)가 몇 번이나 다시 물어보자 유방(劉邦)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 <그 다음은 王陵이 좋겠지만, 그러나 그때는 愚直한 陳平을 補佐시키면 좋을 것이요. 하지만 陳平은 머리가 너무 좋기 때문에 전부 다 맡기는 것은 위험하오. 그리고 社稷을 안전하게 지킬 사람은 분명히 周勃이 될 것이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또 여치(呂雉)가 더욱 매달리면서 다시 묻자 유방(劉邦)은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당신은 도대체 언제까지 살고 싶은 것인가? 당신이 죽고 난 다음에야 이 세상이야 어찌되든 상관이 없지 않은가?> 그 후, 그의 유언은 모두 이루어졌고, 그것으로 그의 인물 안(人物眼)이 탁월했음도 증명되었다. 그리고 유방(劉邦) 사후(死後) 태자가 즉위해서 혜제(惠帝)가 되었다. 그러자 여치(呂雉)는 모든 실권을 거머쥐었고, 그때부터 여 씨(呂氏)의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 여치(呂雉)가 죽자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주발(周勃)과 진평(陳平)에 의해서 그 여 씨(呂氏)들은 모두 숙청되었고, 이어서 문제(文帝)가 즉위해서 <文景의 治>라고 하는 번영의 시대가 시작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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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치(呂雉) 2
아무튼, 그렇게 해서 유방(劉邦)도 죽었고, 그 뒤를 이어서 혜제(惠帝)가 즉위하자 여치(呂雉)는 황태후의 자격으로 후견을 자청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자신의 지위를 보다 강고(强固)히 하고자 장이(張耳)의 아들이었던 장오(張敖)와 노원공주(魯元公主)의 딸을 혜제(惠帝)의 황후(張皇后=惠帝의 姪女에 해당됨)로 세웠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후계를 둘러싼 분쟁은 뿌리 깊게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여치(呂雉)는 혜제(惠帝)가 즉위하자 곧바로 혜제(惠帝)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유방(劉邦)의 서자(庶子) 제왕(齊王) 유비(劉肥) 그리고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를 살해하려고 기도(企圖)했다. 그러나 유비(劉肥)의 암살은 혜제(惠帝)에 의해서 실패로 돌아갔고, 유여의(劉如意)와 그의 생모(生母) 척 씨(戚氏)는 결국 살해했다. 그런데 그때, 여치(呂雉)는 척 씨(戚氏)를 노예로 만들어서, 유여의(劉如意)를 살해한 후, 그 척 씨(戚氏)의 양손과 양다리를 잘랐고, 그것도 모자라서 눈을 도려냈으며, 그리고 또 약(藥)을 써서 귀를 멀게 했음과 동시에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런 다음에는 또 변소(便所=化粧室)에다 넣어서 인체(人彘=人豚=옛날, 제주도에서 길렀던 黑豚을 想起 바람)라고 부르게 했다고 사서(史書)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고대 중국의 변소에서도 제주도보다 훨씬 크고 넓은 구덩이를 파서 그 안에다 돼지를 넣어서 길렀다고 하는데, 그러자 그것을 알게 되었던 혜제(惠帝)는 큰 충격을 받아서 그때부터 정무(政務)를 방기(放棄)하더니 결국에는 그 충격으로 죽어버렸다. 그러자 여치(呂雉)는 또 그 혜제(惠帝)의 장례식에서 격렬하게 통곡했다지만, 그러나 눈물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던 것을 그때 장량(張良)의 아들 장벽강(張辟彊)이 보고 진평(陳平)에게 알려주었다. 그러자 또 진평(陳平)은 여치(呂雉)에게 여 씨(呂氏) 일족(一族)들을 중역(重役)에 앉힐 것을 진언했다. 그 후, 여치(呂雉)는 혜제(惠帝)의 유아(遺兒)였던 소제 공(少帝恭)을 세웠고, 여 씨(呂氏) 일족과 진평(陳平) 그리고 주발(周勃) 등 국가의 원훈(元勳)들로 하여금 소제 공(少帝恭)을 보필케 했다. 그리하여 일단 정치는 안정되는 듯 했지만, 하지만 또 그때부터 여치(呂雉)는 각지의 제후왕(諸侯王)에 봉해져있던 유방(劉邦)의 서자(庶子)들을 차례로 암살했다. 그리고 또 그 후임으로 자신의 조카 등 여 씨(呂氏) 일족들을 배치해서 외척(外戚)정치를 펴나갔고, 그리고는 또 이어서 자신에게 반항적이던 소제 공(少帝恭)을 살해하고, 홍(少帝弘)을 세웠는데, 그러자 여치(呂雉)는 원훈(元勳)들로부터 많은 반발을 샀다. 그 결과, 원훈(元勳)들은 자신들도 암살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그때부터는 정무(政務)를 등한시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치(呂雉)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일식(日食)이 일어났을 때, 그들에게 시켜서 <제 탓입니다>라고 말을 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죽기 수개월(數個月) 전에는 푸른 개(靑狗)에게 겨드랑이를 물려서 끌려가는 환상을 보고는 점쟁이에게 점을 치게 했는데, 그러자 그 점쟁이가 소제공수(少帝恭祟=少帝恭의 厄)라고 말을 했다. 그런데 실제로 여치(呂雉)는 그 후에 겨드랑이에 병이 생겼고, 그러자 또 자신의 임종을 미리 예감했던 듯, 자신의 조카였던 여산(呂産) 등에게 원훈(元勳)들의 동향(動向)을 면밀히 관찰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그리고는 그 일족들이 중앙의 병권(兵權)을 완전히 장악하고, 또 그로써 모두 중직에 앉은 것을 보고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치(呂雉)가 죽자 곧 진평(陳平)과 주발(周勃) 등이 제왕(齊王)의 유아(遺兒) 등 황족과 그리고 또 그때까지 제국(諸國)에 남아있었던 유 씨(劉氏)들과 협력을 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여 씨(呂氏) 일족은 모두 몰살되었고, 이어서 혜제(惠帝)의 이모제(異母弟)였던 대왕(代王) 유항(劉恒)을 옹립했는데, 그가 바로 문제(文帝)였다. 그리고 그 문제(文帝) 옹립 전후(前後)에 소제 홍(少帝弘)도 혜제(惠帝)의 친자식이 아니고 여치(呂雉)가 어디에선가 데려왔던, 그래서 태생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당시 혜제(惠帝)의 자식으로 되어있던 상산왕(常山王) 유조(劉朝=軹侯), 회양왕(淮陽王) 유무(劉武=壺關侯) 등과 함께 암살되었다. 그리고 또 여치(呂雉)의 여동생이었던 여수(呂須)도 편형(鞭刑-채찍으로 때려서 죽이는 벌)으로 살해되었고, 그녀의 아들 번항(樊伉)도 역시 살해되었다. 그래서 당시, 그 여 씨(呂氏)의 혈통을 가졌던 사람들 중에서 숙청되지 않았던 사람은 노원공주(魯元公主)와 장오(張敖)의 아들(張皇后의 형제)이었던 장언(張偃) 뿐이었다. 어쨌든, 그 여치(呂雉)의 시대에는 황족이나 원훈들이 계속해서 살해되는 등, 그 궁정에서는 무엇인가 혈성(血腥-피비린내)이 끊일 날이 없었던 그런 시대였다. 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 치세(治世)에는 거의 태평성대(太平聖代)였다고 해서,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는 절찬(絶讚)했다. <천하는 평안무사하고, 형벌을 이용하는 일도 드물며, 더불어서 죄인도 적은데다, 백성들은 농사에만 힘쓰니, 의식(衣食)은 더욱 더 풍부해졌다> 그래서 또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과거 한 때를 풍미했던 지배자들을 열거하면서, 시황제(始皇帝)와 항우(項羽) 그리고 유방(劉邦) 등과 함께,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도 같이 취급했으며, 그것은 한서(漢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덧붙여서, 신말(新나라의 末) 후한(後漢) 초의 동란(動亂) 때, 적미(赤眉)의 군사(赤眉의 亂)들이 전한(前漢) 제제(諸帝)들의 능묘(陵墓)를 도굴했는데, 그런데 그때 여치(呂雉)의 유체가 그들의 손에 모욕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후에 광무제(光武帝)는 여치(呂雉)의 지위와 고황후(高皇后)의 휘호(諱號)를 박탈하고는, 대신 문제(文帝)의 생모였던 박 씨(薄氏)를 유방(劉邦)의 정실로 하고, 또 시호도 고황후(高皇后)라고 칭했다. 그리고 또한 곽말약(郭沫若) 등은 여치(呂雉)가 여불위(呂不韋)의 일족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역시,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에서는 그에 관한 기술(記述)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현재 불명(不明)인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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