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장오(張敖-?부터 기원전 182년)는, 진(秦)말부터 전한(前漢) 초기의 인물이었고, 장이(張耳)의 아들, 유방(劉邦)의 사위였다.(張耳와 중복되는 부분은 생략함) 그는 기원전 202년(高祖5年)에 장이(張耳)가 사망하자 조왕(趙王)을 승계했다. 그리고 그해, 장오(張敖)는 초왕(楚王) 한신(韓信)과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 그리고 양왕(梁王) 팽월(彭越)과 원래 형산왕(衡山王)이었던 오예(吳芮)와 함께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황제(皇帝)의 존호(尊號)를 봉(奉)했다. 그리고 이어서 노원공주(魯元公主)와 결혼했으며, 그러자 노원공주(魯元公主)는 왕후(王后)가 되었다. 기원전 200년(高祖7年) 고조(高祖)가 흉노에 져서 돌아왔을 때, 조(趙)에 잠시 들렀던 적이 있었다. 그러자 장오(張敖)는 자식과 같은 사위의 태도로 유방(劉邦)을 대하면서 몹시 비굴하게 굴었는데, 그러자 유방(劉邦)이 그런 모습을 보고는 크게 질책하면서 대단히 교만하게 굴었다. 그러자 그때, 조(趙)의 승상(丞相)이었던 관고(貫高)와 조오(趙午)는 원래 장이(張耳)의 식객(食客)이었던 인물들로, 그것을 보고 화를 내면서 장오(張敖)에게 유방(劉邦)을 살해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장오(張敖)는 <현재의 자신은 모두 유방(劉邦)의 덕택이므로 그것은 불가하다>라고 하면서 거절했다. 그러자 관고(貫高)와 조오(趙午)는 장오(張敖)에게는 비밀로 하고 유방(劉邦)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 다음해에 유방(劉邦)이 또 조(趙)를 방문했는데, 그러자 장오(張敖)는 자신의 후궁이었던 조미인(趙美人)을 유방(劉邦)에게 헌상했다.(그리고 그 趙美人은 후에 劉邦의 아들 劉長을 낳았다) 그리고 또 그때, 관고(貫高)는 유방(劉邦)을 살해하기 위해서 백인(柏人)이란 곳에다 암살자들을 배치했다. 그런데 유방(劉邦)이 그 백인(柏人)에서 머물려고 했을 때, 그는 갑자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그곳을 그냥 지나가서 화를 면했다. <백인(柏人)이란 "사람에게 핍박()을 당한다(시달리게 된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머무는 것은 좋지가 않다!> 그리고 그 다음 해였던 기원전 198년에, 관고(貫高) 등의 음모가 발각되었다. 그러자 그 관고(貫高)와 함께 장오(張敖)도 체포되었다. 그러자 여치(呂雉)는 장오(張敖)의 편을 들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여치(呂雉)의 말을 듣지를 않았다. 하지만 또 그때, 관고(貫高)는 그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에 감복했다. 그리고 또 그때, 관고(貫高)는 장오(張敖)의 결백을 계속해서 주장했기 때문에, 유방(劉邦)은 그의 증언을 받아들여서 장오(張敖)를 사면했다. 그 후, 장오(張敖)는 왕위(王位)를 잃었고, 동년(同年) 선평후(宣平侯)로 강격(降格)되었다. 그리고 유방(劉邦)은 그 관고(貫高)의 예를 통해서 장이(張耳)의 식객들이 모두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전부를 군수(郡守) 등에 임명했다. 그 다음 혜제(惠帝) 4년(기원전 191년)에 장오(張敖)와 노원공주(魯元公主) 사이에서 태어났던 딸이 혜제(惠帝)의 황후가 되었다.(張皇后). 그리고 여후(呂后-기원전 187년) 원년(元年)에는 노원공주(魯元公主)가 사망했고, 그리고 또 동년(同年), 장오(張敖)와 노원공주(魯元公主) 사이에서 태어났던 장언(張偃)이 노왕(魯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여후(呂后) 6년(기원전 182년)에는 장오(張敖)도 사망했으며, 그러자 시호(諡號)로 무후(武侯)가 내려졌다. 그 다음 여후(呂后) 8년(紀元前180年)에 노왕(魯王) 장언(張偃)을 보필하기 위해서 여후(呂后)는 장오(張敖)의 전처(前妻) 소생이었던 장치(張侈)와 장수(張受)를 열후(列侯)에 봉했다. 하지만 여후(呂后)가 죽자 쿠데타가 일어나서 여(呂)씨(氏)가 멸해졌으며, 나머지는 장이(張耳)에서 소개했던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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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吳芮-?부터 기원전 202년)는, 진(秦) 말부터 전한(前漢)의 군웅(群雄)이었고, 초대 장사왕(長沙王)이었으며, 유방(劉邦)을 황제(皇帝)로 추천했던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그리고 장이(張耳)와 함께 천수(天壽)를 누렸으며, 자손에게 왕위도 계승했고, 그 중에서 장사왕(長沙王)은 제일 오래 지냈던 왕위였다. 그는 원래 진(秦)의 번양현(番陽縣)에서 현령(縣令)을 지냈던 사람이었는데, 장강(長江), 번양호(番陽湖) 일대(一帶)에서 백성들에게 추앙받았고, 그래서 번군(番君)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시황제(始皇帝)가 죽고 반란이 일어나자 영포(英布)가 그를 따랐으며, 그러자 또 그는 자신의 딸을 그 영포(英布)에게 시집보냈다. 그리고 그 후에, 그는 월(越)의 백성들을 이끌고 반란에 가담했다. 그 후, 유방(劉邦)이 남양(南陽)을 공격했을 때, 오예(吳芮)의 장수(將帥)였던 매견(梅鋗-그러나 매현이라고 쓴 곳도 있으므로, 참고바람)을 만나서 함께 남양(南陽)을 공략했다.

 참고: 매견(梅鋗)의 조상은 원래 춘추시대 구천(句踐)의 후예였다고 하며, 월(越)이 망한 후에 단양(丹陽-현재의 江蘇省)으로 도주해서 성을 매(梅)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진(秦)이 초(楚)를 멸망시킨 후에는 다시 남해군(南海郡-현재의 廣東省)으로 도망을 갔으며, 진(秦) 말에 반란이 일어나자 매견(梅鋗)도 군사를 일으켜서 오예(吳芮)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원전 207년에 매견(梅鋗)은 오예(吳芮)의 명령을 받고 북상(北上)해서 진(秦) 토벌에 나섰는데, 그러던 중에 유방(劉邦)의 군대와 만나서 협공을 했다. 그리고 기원전 206년, 항우(項羽)에게 그 공적을 인정받아서 10만 호(戶)에 봉해져서 제후(諸侯)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아무튼, 고조(高祖) 원년(기원전 206년), 진(秦)이 멸망하자 오예(吳芮)는 항우(項羽)에 의해서 형산왕(衡山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후, 항우(項羽)는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와 오예(吳芮)에게 의제(義帝)를 죽일 것을 명령했다.(史記의 項羽本紀) 그 후, 시기는 불명하지만, 어쨌든 오예(吳芮)는 항우(項羽)에 의해서 형산왕(衡山王)의 지위를 박탈당했고, 그러자 그는 다시 번군(番君)으로 강격(降格)되었다. 그러자 그는 유방(劉邦)에게로 갔는데, 하지만 또 그 시기에 영포(英布)도 유방(劉邦)에게로 갔던지, 아니면 오예(吳芮)가 영포(英布)를 꾀여서 유방(劉邦)에게로 함께 귀순(歸順)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하지만, 어쨌든 그러자 유방(劉邦)은 오예(吳芮)를 높이 평가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 후, 고조(高祖)5년(기원전 202년)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멸했고, 그러자 오예(吳芮)는 다른 왕들(異姓七王-楚王 韓信, 韓王 韓信, 淮南王 英布, 梁王 彭越, 趙王 張耳, 燕王 臧荼)과 함께 유방(劉邦)에게 황제(皇帝)의 존호(尊號)를 봉(奉)했다. 그리고 그해, 오예(吳芮)는 유방(劉邦)에 의해서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해에 사망했다. 그러자 그에게 문왕(文王)이란 시(諡)가 내려졌으며, 그리고 또 유방(劉邦)은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율령(律令)에 기록하도록 했다. 그 후, 장사왕(長沙王)은 그의 아들 오신(吳臣)이 계속해서 이었지만, 그러나 그 오신(吳臣)은 재위 중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고는 도주하다가 영포(英布)에게 살해되었다. 하지만 유방(劉邦)의 <유(劉)씨(氏)가 아니면 왕으로 세우지 않겠다!>라고 했던 맹세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오예(吳芮)의 자손들이 그 장사국(長沙國)을 승계했으며, 그것은 또 기원전 157년, 오차(吳差)가 자손없이 죽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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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도(臧荼-?부터 기원전 202년)는, 진(秦)말에서 전한(前漢) 기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연(燕)의 장군이었는데, 후에 항우(項羽)를 따라서 진(秦)의 장한(章邯)에 의해서 포위되었던 조(趙)를 구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항우(項羽)를 따라서 관중(關中)으로 들어갔으며, 기원전 206년에 논공행상에 의해서 연왕(燕王)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원래 연왕(燕王)이었던 한광(韓廣)이란 자를 요동왕(遼東王)으로 보내버렸는데, 하지만 또 그해 안에 한광(韓廣)을 쳐서 멸하고는 요동(遼東)을 병합했고, 그 후에 연(燕) 전체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204년, 조(趙)의 진여(陳余)를 파(破)했던 한신(韓信)이 광무군(廣武君) 이좌차(李左車)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병(兵)을 휴식시켰던 것과 동시에 연(燕)으로 사자를 보냈다. 그러자 장도(臧荼)는 한신(韓信)에게 귀순했다. 그리고 기원전 202년에 그 역시도 유방(劉邦)에게 황제(皇帝)의 존호(尊號)를 봉했지만, 그러나 바로 그해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유방(劉邦)이 친정(親征)해서 반란을 제압했고, 그러자 또 장도(臧荼)는 포로로 잡혀서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 후, 유방(劉邦)은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노관(盧綰)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또 그때, 그의 아들 장연(臧衍)은 흉노로 도망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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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장(劉長-기원전 199년부터 기원전 174년)은, 전한(前漢) 때의 인물로, 유방(劉邦)의 아들이었고, 회남자(淮南子)로 유명했던 유안(劉安)의 아버지였다. 그는 고조(高祖) 8년(기원전 199년)에 유방(劉邦)이 조(趙)를 방문했을 때, 조왕(趙王) 장오(張敖)가 자신의 측실이었던 조미인(趙美人)을 유방(劉邦)에게 헌상했는데, 그래서 태어났던 아이가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 전, 조왕(趙王) 장오(張敖)의 신하였던 관고(貫高) 등의 유방(劉邦) 암살 계획이 발각되었고, 그러자 장오(張敖)도 그 조(趙)씨(氏)도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자 또 그 조(趙)씨(氏)는 자기가 유방(劉邦)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고 호소했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 조(趙)씨(氏)의 동생이었던 조겸(趙兼)이 심식기(審食其)란 사람을 통해서 여후(呂后)에게 구명(求命)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여후(呂后)는 오히려 질투를 해서 그 말을 유방(劉邦)에게 전해주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 후로 심식기(審食其)도 더 이상 여후(呂后)에게 그에 대한 말은 제대로 하지를 못했다. 그러자 그 후, 그 조(趙)씨(氏)는 화가 나서 유장(劉長)을 출산하고는 자살을 해버렸다. 그러자 그때서야 유방(劉邦)은 후회를 하고는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인정했고, 그런 다음에 여후(呂后)에게 데려가서 키우게 했다. 그 후, 고조(高祖) 11년(기원전 196년)에 회남왕(淮南王) 영포(英布)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러자 그 후임으로 유장(劉長)이 선택되어서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졌다. 하지만 또 그 후, 유장(劉長)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잃고 여후(呂后)와 혜제(惠帝)의 그늘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래서 유방(劉邦)의 자식들이 모두 죽어나갔던 여후(呂后)의 시대에도 화를 입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러던 중에도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구명(救命)하지 않았던 심식기(審食其)를 늘 원망했다. 그 후, 유장(劉長)은 성장하자 정(鼎-다리가 셋 달린 아주 큰 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세졌다. 그리고 문제(文帝)가 즉위하자 가장 친한 친족이라는 이유로 법을 어기는 등, 방종하게 굴기도 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그런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기원전 177년, 그가 장안(長安)에 입조(入朝)했을 때, 그는 평소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심식기(審食其)를 찾아가서 둔기로 때려서 죽이고는 종자에게 그 목을 베게 했다. 그리고는 웃통을 벗고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나의 어머니가 체포되었을 때 심식기(審食其)는 여후(呂后)에게 간청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그 첫 번째의 죄! 그리고 또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와 그 자식에게도 죄가 없었는데, 그러나 여후(呂后)는 그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그때도 심식기(審食其)는 여후(呂后)를 말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 두 번째의 죄! 그리고 또한 여후(呂后)가 여 씨(呂氏)를 왕으로 세웠을 때도 그는 말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이 또 그 세 번째의 죄가 되느니라! 하여, 나는 단지 천하의 도적을 처형한 것일 뿐이며, 또한 내 어머니의 원수를 갚았을 뿐인 것이다! 하지만 이후의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의 심정을 이해하고, 또 같은 형제란 이유로 그를 처벌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때부터는 문제(文帝)의 어머니였던 박(薄)태후와 황태자, 그리고 또 대신(大臣)들 모두 다 유장(劉長)과 가까이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그 후, 그는 귀국(歸國)하여 더욱 교만해졌고, 한(漢)의 법률도 무시하고 스스로 법령을 제정했으며, 또한 천자(天子)의 제도(制度)를 이용하는 등, 불손한 일을 상서(上書)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문제(文帝)는 그것을 강하게 꾸짖고는 외척이었던 장군 박소(薄昭)에게 시켜서 그에게 충고하는 글을 내렸다. 그러자 유장(劉長)은 몹시 불쾌해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174년, 유장(劉長)이 시무(柴武-劉邦 때의 장군)의 상속자였던 시기(柴奇) 등과 함께 반란을 계획했다는 정보가 있어서 조사가 있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그들을 처형할 것을 상주했지만, 그러나 문제(文帝)는 차마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승낙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하들의 재촉이 있자 하는 수 없이 그를 왕위에서 폐하고 촉(蜀)으로 유배 보내기로 결정을 했다. 그러자 또 그때, 원앙(袁盎)이 나서서 문제(文帝)에게 이렇게 상주(上奏)했다. <유장(劉長)은 아주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그렇게 유배를 보내시게 되면 스스로를 참지 못하고 죽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폐하께서는 동생을 죽였다는 오명(汚名)을 안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또 문제(文帝)가 이렇게 말을 했다. <나는 그에게 고통을 주어서 반성하게 하고, 그런 다음에 다시 원래대로 보내줄 생각이오!> 하지만 유장(劉長)은 유배를 떠나던 길에 이렇게 말을 했다. <나를 용사(勇士)라고 추켜세웠던 사람이 도대체 누구였던가? 나는 너무도 교만해서 남의 충고도 듣지 않았고,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 꼴이 되어버렸다!> 그리고는 호송 중에 일절(一切) 곡기(穀氣)를 끊더니, 결국에는 굶어서 죽어버렸다. 하지만 옹현(雍縣)이란 곳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고, 그러자 또 그가 타고 갔던 수레를 확인하지 않았던 관리들에게 책임이 추궁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그 옹현(雍縣)이란 곳에는 유장(劉長)의 묘와 함께 30가(家)의 묘수(墓守)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 후, 문제(文帝)는 자신의 일을 후회하고는 유장(劉長)에게 여왕(厲王)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기원전 172년), 그의 자식 3명에게는 회남(淮南)을 3분(分)해서 각각 왕에 봉했다.(기원전 1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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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안(劉安-기원전179부터 기원전122)은,
중국 전한(前漢)의 학자였고, 한나라 고조의 손자로, 회남왕에 봉하여졌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많은 문사(文士)를 식객으로 맞아서 <회남자>를 편찬했지만, 그러나 현재는 그 일부인 만이 전한다.(나머지는 후술 또는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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