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그 후, 유방(劉邦)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했을 때, 전장(戰場)의 공(功)이 많았던 조참(曹參)이 제일(第一)이란 목소리가 많았지만, 그러나 유방(劉邦)은 소하(蕭何)를 제일(第一)로 꼽았는데, 그것은 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계속해서 고전(苦戰)하고 있었을 때, 그 뒤에서 모든 병참(兵站)을 책임졌던 소하(蕭何)가 없었다면 현재(現在)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이어서 한신(韓信)을 초왕(楚王)에 봉하고, 팽월(彭越)을 양왕(梁王)에 봉했으며, 장량(張良)에게는 3만호의 영지를 주려고 했지만, 그러나 장량(張良)은 그것을 고사(固辭)했다.

 그 후, 또 유방(劉邦)은 소위 <옹치(雍齒)의 건(件)>을 해결하고는, 가신(家臣)들과 주연(酒宴)을 벌이고 있었을 때, 그곳에 앉았던 가신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천하를 취하고, 項羽는 천하를 잃은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보시오!> 그러자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이렇게 대답했다. <項羽는 오만하고 사람을 경시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仁慈로써 사람을 대했습니다. 하지만 또 폐하는 功績이 있는 자에게는 아낌없이 영지를 내려주는 것으로 천하의 사람들과 이익을 나눕니다. 그러나 項羽는 賢者를 시기했고, 공적이 있어도 恩賞에는 인색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項羽가 천하를 잃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이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公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策略에서는 張良을 따를 수가 없고, 兵站에 관해서는 蕭何를 따르지 못하며, 전쟁에서는 韓信을 따를 수가 없소! 하지만 나는 그 세 사람을 잘 활용했소! 하지만 項羽는 范增 한사람도 제대로 다루지를 못했소. 그것이 바로 내가 천하를 취할 수 있었던 이유요!> 그러자 그곳에 앉았던 사람들은 모두 유방(劉邦)의 말에 감복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 해 7월에 연왕(燕王) 장도(臧筡)가 반란을 일으켜서 유방(劉邦)은 친정(親征)해서 그것을 제압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로 자랐던 노관(蘆管)을 앉혔다. 그런데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그때부터 유방(劉邦)은 자신의 부하들과 제후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특히, 당시 한신(韓信)과 팽월(彭越) 그리고 영포(英布) 그 세 사람은 영지(領地)도 아주 넓었고, 또 백전연마(百戰鍊磨)의 무장들이었으므로, 그래서 자신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느껴졌다.

 그런데 마침 또 그때 <한신(韓信)이 반란을 기도하고 있다!>라는 정보가 자신의 귀에 들어왔다. 그러자 군신(群臣)들은 한신(韓信)에 대한 질투도 있었고 해서였던지 그를 토벌할 것을 진언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잠시 고민에 빠지기도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진평(陳平)이 나서서 이렇게 말을 했다. <군사(軍事)적 천재인 한신(韓信)과 맞붙는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꼭 그를 잡으려고 하신다면, 그를 유인해서 포획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 안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자신이 순행(巡行)을 나갈 것이므로, 한신(韓信)에게도 올 것을 명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걱정 반(半)하며 종리매(鐘離眛)의 머리를 가지고서 유방(劉邦)에게로 갔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를 포획하고는 초왕(楚王)의 지위를 박탈하고,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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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신(韓信) 3

 중국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이었고,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했으며, 결국에는 유방(劉邦)의 패권(覇權)을 결정짓게 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장량(張良)·소하(蕭何)와 함께 유방(劉邦)의 삼걸(三傑) 중 1명이었으며, 세계의 군사사상(軍事史上)으로도 명장(名將)중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그리하여 제왕(齊王)이 되었던 한신(韓信)에게 항우(項羽)도 우려를 느끼기 시작해서 무섭(武涉)이란 者를 사자(使者)로 보냈다. 그러자 무섭(武涉)은 한신(韓信)에게 초(楚)로 넘어올 것을 권유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유방(劉邦)은 항우(項羽)가 홍문(鴻門)에서 일부러 살려서 보내주었는데도, 오히려 항우(項羽)를 공격한 의리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유방(劉邦)은 장군 같은 분이 따를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옛날 자신이 항우(項羽)에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가 유방(劉邦)의 도움으로 제왕(齊王)에까지 오른 것을 생각하고는 그것을 즉석에서 거절했다. 그 후, 한신(韓信)은 또 괴통(蒯通)에게 다음과 같은 진언을 받았다. <천하의 요충지인 제(齊)의 왕이 된 지금, 한(漢), 초(楚)와 천하를 3분(分)하시고, 나중에 양자(兩者=漢, 楚)가 서로 싸우다 지쳤을 때, 홀로 분연(奮然)히 일어서신다면, 이 천하는 곧 왕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많은 고민을 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그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그에 따른 후환(後患)이 두려웠던 괴통(蒯通)은 스스로 광인(狂人) 행세를 하다가 그곳에서 도망쳤다. 그 후, 초한(楚漢)의 싸움은 광무산(廣武山)에서 지구전으로 이어졌고, 그리하여 완전히 지쳐버렸던 양군은, 일단 화의하고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또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유방(劉邦)은 곧 그 약속을 깼고, 이어서 한신(韓信)도 그 전쟁에 참가했으며, 항우(項羽)도 최후를 맞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202년, 항우(項羽)가 죽자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을 제왕(齊王)에서 초왕(楚王)으로 봉했다. 그러자 그 초(楚)는 한신(韓信)의 고향이었으므로, 그래서 그에게서는 대단한 명예(名譽)였으며, 또한 영전(榮轉)이 되었지만, 그러나 전체 성(城)의 수(數)에서는 오히려 70여 성에서 50여 성으로 줄어들었다. 그 후, 한신(韓信)은 고향 회음(淮陰)으로 돌아가서 개선(凱旋)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과거 자신에게 먹을 것을 베풀어주었던 그 노녀(老女)를 찾아가서 후하게 은혜를 갚았다. 그리고는 또 과거 자신에게 '고부(股夫)'란 오명(汚名)을 안겨주었던 그 남자를 찾아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때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그것이 쓸데없는 짓이란 것을 알고는 그만두었다. 그리고 또한 내가 그때 그 모욕을 참고 너의 가랑이 사이를 기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의 지위에까지 오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를 중위(中尉=치안유지의 직책)에 임명했다. 그리고 또 한때 자신이 식객(食客)으로 있었던 그 정장(亭長)에게는 <사람을 도와주기로 한번 마음을 먹었다면 제대로 끝까지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라고 훈계를 하고는 백전(百錢)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01년, 과거 잘 알고 지냈던 초(楚)의 장군 종리매(鐘離眛)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에게서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다 또 마침 그때 한신(韓信)의 이례적인 대 출세에 질투를 느꼈던 어떤 者가 <한신(韓信)에게 모반의 혐의가 있다!>라고 중상모략을 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것에 대한 변명을 할 목적으로 종리매(鐘離眛)에게 자살을 재촉했다. (이하, 인물소개 鐘離眛 참조) 그렇게 해서 종리매(鐘離眛)도 죽었고, 그러자 또 한신(韓信)은 그의 머리를 가지고 유방(劉邦)에게 변명할 목적으로 찾아갔지만, 그러나 오히려 그곳에서 유방(劉邦)에게 바로 포획되었다. 그러자 또 한신(韓信)은 그 자리에서 과거 범여(范蠡)가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교토(狡兎-교활하거나, 재빠른 토끼)가 죽으면 양구(良狗-좋은 사냥개)는 삶겨지고, 하늘 높이 날던 새(鳥)가 떨어지면 좋은 활(弓)은 창고(倉庫)신세요, 적국(敵國)이 망하면 모신(謀臣-책략을 쓰는 신하)도 망(亡)하는 법(法)! 이미 천하(天下)가 정해졌으니, 나 또한 삶기고(煮) 말 것인가?!>

  ☆ 범여(范蠡-生沒不明)는,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월(越)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었으며, 재상이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씨(氏)는 범(范), 휘(諱)는 여(蠡), 자(字)는 소백(少伯)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회계(會稽)에서 패했던 구천(句踐)을 도왔으며,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멸망시킨 후에 산둥(山東)의 도(陶)로 가서 도주공(陶朱公)이라고 자칭하면서 큰 부(富)를 쌓았다. 그리고 越王 구천(勾踐)을 春秋五覇에 올려놓았던 최고의 공헌자로 알려져 있다.(더욱 상세한 것은 참고 6-31 참조)

 아무튼,
그러자 유방(劉邦)은 모반(謀反)의 혐의에 대해서는 일단 보류했고, 대신 그를 병권을 가지지 않는 회음후(淮陰侯)로 격하시켰다. 그 후, 한신(韓信)은 病을 칭하며 장안(長安)의 저택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그러던 중 어느 때, 그는 무양후(舞陽侯) 번쾌(樊噲)의 집에 들렀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번쾌(樊噲)는 평소 존경하고 있었던 한신(韓信)을 예(禮)를 다해서 맞이하고는 그에게 <大王>이라고 칭했고, 또 스스로는 <臣>이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살아가다 보니 이제는 같은 처지(同格)가 되었소!>라고 말을 하고는 자조(自嘲-스스로를 비웃음)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에도 유방(劉邦)은 자주 한신(韓信)과 제장(諸將)들을 품평(品評=比較)했다. 그리고 또 어떤 때에 유방(劉邦)이 한신(韓信)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가 생각하기에 나는 어느 정도 수준의 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한신(韓信)이 이렇게 답을 했다. <폐하께서는 겨우 10만 兵을 이끌 수 있을 將帥십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그렇다면 그대는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또 한신(韓信)이 대답했다. <저는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 그러자 또 유방(劉邦)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째서 지금 나의 포로가 되어 있는가?> 그러자 또 한신(韓信)이 답을 했다. <폐하께서는 군사를 인솔하는 데는 부족하지만, 그러나 將에 대해서는 將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將의 將이란 의미). 그리고 그것은 하늘로부터 附與받은 것이며, 결코 사람의 人力으로 되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 후에 또 세월은 흘러서 진희(陳豨)가 거록태수(鉅鹿太守)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평소 한신(韓信)을 존경하고 있었던 거록(鉅鹿)은 그 임지(任地)로 떠나기 전에 장안(長安)에 있던 한신(韓信)에게 인사를 갔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 진희(陳豨)에게 <자신에게 천하의 야심이 있음>을 시사(示唆)했다. 그러자 또 진희(陳豨)가 깜짝 놀라면서 물으니 한신(韓信)이 다음과 같은 계책을 알려주었다.

 
1. 현재 유방(劉邦)은 진희(陳豨)를 독실(篤實)하게 신뢰하고 있으므로, 만약 그런 진희(陳豨)가 모반(謀反)을 하게 된다면, 분명히 유방(劉邦)은 격노해서 친정(親征)을 하게 될 것이고, 만약에 또 그렇게 된다면, 그때 장안(長安)은 비게 된다.

 2. 하지만 또 거록(鉅鹿)은 정병(精兵-우수하고 강한 군사)이 있는 요충(要衝)이기 때문에, 그래서 유방(劉邦)은 쉽게 공략할 수가 없을 것이다.

 3. 그러면 또 그 틈을 타서 한신(韓信) 자신이 장안(長安)을 장악한다.

 4. 그리고 또 현재, 전국에서는 반란이 빈발하고 있고, 유방(劉邦)에 대한 불만이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바로
이러한 때에 한신(韓信) 자신이 거병하게 된다면, 제국(諸國)도 흔쾌히 자신을 따르게 될 것이다...

 라는 것 등이 그것이었는데, 그런데 실제로 기원전 196년의 봄, 진희(陳豨)가 거록(鉅鹿)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또 신뢰하던 진희(陳豨)의 반역에 격노했던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의 계책대로 그 진압을 위해서 무모한 친정(親征)에 나섰고, 그러자 또 한신(韓信)의 예상대로 장안(長安)은 곧 무주공산(無主空山)이나 진배 없게 되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 기회를 잡아서 장안(長安)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리고는 죄수들을 해방시켜서 그들을 부하로 삼고는 당시, 거의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이 있었던 여후(呂后)와 황태자(皇太子) 영(盈)을 감금하고는 정권을 빼앗으려고 꾀했다. 하지만 일이 잘 되지 않으려면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생기는 법! 바로 그때, 평소 한신(韓信)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던 하인(下人) 한명이 그런 사실을 여후(呂后)에게 밀고했고, 그래서 그 때문에 그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러자 여후(呂后)는 상국(相國) 소하(蕭何)를 불러서 그 일에 관해서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소하(蕭何)는 여후(呂后)에게 한신(韓信)과 정면 대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을 하고는 한 가지 책(策)을 강구했다. 그 후, 소하(蕭何)는 우선 <진희(陳豨)가 토벌되었다!>라고 세상에 헛소문을 흘렸다. 그런 다음에는 한신(韓信)에게 사람을 보내서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했다. <지금 병중(病中)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러나 현재 자신(韓信)에게 걸려있는 혐의(謀反)도 풀고, 또 친정(親征) 성공도 축하하는 의미에서라도 잠시 궁(宮)에 다녀가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별 의심도 없이 그 말에 따랐고, 그러자 또 그때만 기다리고 있던 소하(蕭何) 등에게 한신(韓信)은 체포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매사에 그렇게도 용의주도했던 한신(韓信)이었지만, 그러나 상대가 자신을 대장군에까지 추대해주었던 소하(蕭何)였기 때문에, 그래서 별 의심 없이 나섰다가 그렇게 허무하게 잡히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 후,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의 귀환을 기다릴 여가도 없이 장안(長安)의 성중(城中) 미앙궁(未央宮) 내에서 처형되었고, 이어서 그의 삼족(三族)도 멸해졌다. 그리고 한신(韓信)은 그 처형 직전에 <내가 괴통(蒯通)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참으로 유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신(韓信) 사후(死後), 진희(陳豨)를 토벌하고 돌아왔던 유방(劉邦)은, 처음에는 한신(韓信)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그러나 곧 한신(韓信)이 최후에 했다는 말을 듣고는 격노해서 그 괴통(蒯通)을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또 그 괴통(蒯通)은 유방(劉邦)에게 붙잡힌 후, 유방(劉邦)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당당하게 항변했기 때문에 생명은 건질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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