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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1)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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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
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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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 장왕(莊王-?부터 기원전 591년. 재위 기원전 614년부터 기원전 591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제6대 왕이었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여(侶) 또는 여(旅), 시(諡)는 장(莊)이었다. 그는 또 초(楚)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최고의 명군(名君)으로 알려졌고, 춘추오패의 한명으로 손꼽아졌으며, 초(楚) 성왕(成王-6-18참고) 원(員)의 손자였고, 폭군이었던 상신(商臣-穆王)의 적자(嫡子)였다. 아들은 공왕(共王) 심(審).

 참고:
필(邲)의 싸움

 필의 싸움은 기원전 597년(周는 定王 10년, 魯는 宣王 12년)에,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정(鄭)현의 필(邲)이라는 곳에서 진(晋)과 초(楚)가 격돌했던 전쟁으로 초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 후, 천하의 패권은 진(晋)에서 초(楚)로 넘어갔으며, 그로서 초(楚) 장왕(莊王)의 위광(威光)은 대륙을 덮었다.

 1. 경위(經緯)

 그 전, 초(楚)의 장왕(莊王)은 천하평정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위(上)의 진(晋)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자 장왕(莊王)은 일대(一大)결심을 하고는 스스로 병사들을 이끌고 정(鄭)부터 공격했다. 그러자 정(鄭)은 곧 진(晋)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진(晋)의 정경(正卿)이었던 순림부(荀林父)는 정(鄭)이 몇 번이나 진(晋)에 면종배반(面從背反-겉으로는 복종하고, 뒤에서는 배반을 일삼는 짓)했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그러면서 또 정(鄭)은 곧 초(楚)에 의해서 멸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또 그때, 정(鄭)의 입장에서는 그 번(番)이야말로 초(楚)에 지게 되면 완전하게 멸망하게 될 것이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필사 항전했다. 그러자 또 그 전쟁은 진(晋)의 생각보다 길어지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진(晋)은 그때서야 부랴부랴 군사를 일으켜서 정(鄭)에 원군을 보냈지만, 그러나 또 마침 그때, 그러니까 진군(晋軍)이 그 정(鄭)에 도착했을 때, 정(鄭)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자 정(鄭)의 양공(襄公)은 마치 미자계(微子啓-6-13 참고)가 주(周)에 항복했을 때처럼 예를 갖추어서 장왕(莊王)을 맞이했다.(참고: 그 후, 주왕(紂王)이 무왕(武王)에게 패해서 죽자, 그 두 사람은 스스로 무왕(武王)을 찾아가서 항복을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미자계(微子啓)는 상반신을 벗은 채로 양손을 뒤로 결박했고, 그리고는 왼손으로는 양(羊)을 끌고, 오른손에는 억새를 꺾어 든 채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그러자 무왕(武王)은 흔쾌히 그의 항복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초(楚)의 군신(群臣)들은 모두 정(鄭)을 멸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러나 장왕(莊王)은 그때 <정(鄭)군(君)은 사람에게 머리를 숙일 줄을 아는 자다(겸손한 자). 그러므로 반드시 이 나라 또한 잘 다스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는 그 정(鄭)군(君)에 더 이상의 수치심을 주지 않기 위해서 철군했고, 그 후에 다시 정(鄭)과 다시 동맹을 맺었다.

 2. 싸움

 그렇게 해서 정(鄭)의 패배를 알게 되었던 진(晋)의 사장(師將) 순림부(荀林父)는 군을 철수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때, 상군(上軍)의 장(將)이었던 사회(士會)도 <좋습니다! 전쟁이란 모름지기 적의 허점을 파고들어야 하는 것! 그리고 또 덕(德)과 형(刑) 그리고 정(政)과 사(事), 전(典), 예(禮) 그 여섯 가지를 모두 갖추고(지키고) 싸웠던 초(楚)에 대적한다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순림부(荀林父)에 동의했다. 하지만 또 그때, 중군(中軍)의 좌(佐)였던 선곡(先穀)이란 자가 그 전쟁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단으로 병을 움직였기 때문에, 그래서 싸움은 하는 수 없이 시작되고 말았다. 그래서 또 그때, 양군(兩軍)의 세력을 보면 또 아래와 같았다.(단, 참고이므로, 한글표기는 생략함)

 
晋軍의 編成

 中軍-将:荀林父 佐:先穀 中軍大夫:趙括、趙嬰斉
 上軍-将:士会  佐:郤克 上軍大夫:鞏朔、韓穿
 下軍-将:趙朔  佐:欒書 下軍大夫:荀首、趙同
 司馬:韓厥

 楚軍의 編成

 荘王(楚王) 孫叔敖(令尹)
 中軍-将:沈尹
 左軍-将:子重(이름은 嬰斉・荘王의 兄弟)
 右軍-将:子反(이름은 側・荘王의 兄弟)

 3. 결전(決戰)

 그렇게 해서 초(楚)의 장왕(莊王)과 영윤(令尹-宰相) 손숙오(孫叔敖)는 정(鄭)을 항복시킨 후, 진(晋)과는 싸울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는 후군(後軍)에 해당되는 군세(軍勢)를 조금 남겨두고 수도 영(郢)으로 철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또 오참(伍參)이란 자가 장왕(莊王) 앞으로 나오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현재 진(晋)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자는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군신(群臣)들은 아직 하나로 뭉쳐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싸운다면 필시 우리가 이길 것이며, 그리고 또 현재 적(敵)의 사장(師將)이란 사람은 일국(一國)의 재상입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우리의 사장(師將)은 군주(君主)이신데, 그러므로 또 만약에 여기서 물러나신다면, 앞으로 어떻게 천하에 모범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장왕(莊王)은 고뇌 끝에 마차(馬車)를 북쪽으로 다시 향했으며, 그리고는 정(鄭)으로 다시 들어가서 관(管)이란 곳에다 진(陳)을 구축했다. 그리고는 또 진(晋)에 화목(和睦) 목적의 사자도 보냈는데, 그러자 또 진(晋)에서는 순림부(荀林父)와 사회(士會)가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또 그때, 선곡(先穀)도 비밀리에 장왕(莊王)에게 사자를 보내서, 자신들은 싸우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하지만 또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던 장왕(莊王)이 다시 진(晋)에 화목 목적의 사자를 보냈고, 그때도 진(晋)은 그것을 수락했다. 그리고는 또 그 답으로 화목 목적의 사자였던 위기(魏錡)와 조전(趙旃)이란 자를 장왕(莊王)에게 보냈는데,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처음부터 장왕(莊王)과 화목할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장왕(莊王)을 죽이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장왕(莊王)의 진(陳) 가까이에까지 가게 되자 바로 공격을 가했지만, 그러나 수비가 워낙에 견고했기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또 그들은 곧바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자 또 장왕(莊王)이 본진의 병사들을 이끌고 진군(晋軍) 속으로 곧 쳐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또 그때, 그렇게 되면 장왕(莊王)의 진(陳)이 고립될 것이 염려가 되었던 손숙오(孫叔敖)가 황급히 전군에 공격명령을 내렸고, 그렇게 해서 전쟁은 드디어 시작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 그때까지도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다고 낙관(樂觀)하고 있던 중이었던 순림부(荀林父)는 그런 갑작스런 초군(楚軍)의 공격을 받게 되자 어찌할 줄을 몰라서 다음과 같이 전군에 포고를 내려버렸다. <제일 강을 빨리 건너서 퇴각하는 자에게 포상을 내리겠다> 그러자 진(晋)의 중군(中軍)과 하군(下軍)은 순식간에 괴멸하기 시작했고, 그리고는 또 서로 먼저 도망가려고 배에 올라탔지만, 그러나 또 그때 황하(黃河)에 띄워져 있던 배의 숫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자 또 그때, 배에 먼저 올랐던 병사들은 뒤에 와서 배를 떠날 수 없게 뱃전을 잡고 놓아주지 않던 병사들의 손과 팔 등을 잘랐고, 그것은 또 배가 전복되어서 아무도 그 배를 탈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해서 했던 행동이었지만, 아무튼 그 때문에 그곳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참극이 일어났다. 하지만 또 그때, 진(晋)의 삼군(三軍) 중에서 사회(士會)가 인솔했던 상군(上軍)만은 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들은 단 한명의 손실도 없이 퇴각하는데 성공을 했다. 그리고 또 그 후, 그 때문에 진(晋)은 잠깐 동안 침체기에 들어갔으며, 그러자 또 그 역으로 초(楚) 장왕(莊王)의 위광은 천하를 덮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장왕(莊王)은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대승 후, 장왕(莊王)은 신하(臣下)들로부터 경관(京觀-전사자의 유해를 한곳에 모아 장사 지내고, 戰功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합동무덤=monument)을 만들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러나 장왕(莊王)은 그때 <무(武)란 글자는 창(戈)>을 멈춘다(止)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것은 또 폭(暴)을 금(禁)하고, 싸움을 멈추며, 큰 것을 지키고, 공(功)을 정(定)하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대중(衆)의 화합을 꾀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려는 속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내가 했던 일은 그 무덕(武德)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그럼에도 충성을 다 바쳐서 싸웠던 진군(晋軍) 병사들의 유체들로 경관(京觀)을 만든다는 것은 과연 옳은 짓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참고: 그러나 또 실제로 그 武란 글자는 창(戈)을 (앞으로) 나아간다 라고 하는 것이 그 원의(原義)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진(晋)마저 물리치고 패업을 달성했던 장왕(莊王)은 그 마무리로 그때까지 진(晋)을 따르고 있던 송(宋)을 다시 표적으로 정했다. 그리하여 그 첫 단계로 기원전 595년에, 일찍이 아버지 목왕(穆王)의 명으로 송(宋) 소공(昭公)의 마부(馬夫-여기서의 마부는 왕의 수행원 또는 호위하는 자)에게 채찍을 가했기 때문에, 그래서 송(宋)나라 사람들의 한(恨)의 표적이 되어 있었던 신단(申舟)이란 인물을 제(齊)로 보내는 사자(使者)로 지명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송(宋)을 통과하는데 인사는 필요 없음>이란 명을 내렸는데, 그것은 또 그 신단이 자신의 그런 명령을 따라서 송(宋)에 무례를 저지르게 하고, 또 그로써 그가 송(宋)에서 살해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을 구실로 해서 송(宋)에 출병을 시킬 요량으로 그런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자 장왕(莊王)은 마치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송(宋)으로 달려갔고, 그리고는 곧바로 수도였던 상구(商丘-河南省 商丘市)를 포위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장왕(莊王)은 노(魯)도 초(楚)의 맹하(盟下)로 만드는 등, 착실하게 패업을 완성할 준비를 해두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송(宋)의 우사(右師)였던 화원(華元)이란 자를 필두로 해서 송군(宋軍)은 당연히 저항을 해왔고, 그러자 또 그 싸움은 예상치 않게 길어져서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594년 5월이 되었어도 그 상구(商丘)를 함락시키지를 못했다. 그러자 장왕(莊王)은 하는 수 없이 일단 철수를 명령했다. 하지만 또 그때, 아버지였던 신단(申舟)까지 희생시키고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려는 장왕(莊王)을 원망했던 신단의 아들 신서(申犀) 때문에 장왕(莊王)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자신의 측근이었던 신숙시(申叔時)가 올린 헌책을 장왕(莊王)은 받아들였고, 그 결과 상구(商丘) 교외에 둔전(屯田)을 설영(設營)하고는 지구전(持久戰)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얼마 후에 화원(華元) 등도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어서 자반(子反)이란 자가 중개를 해서 마침내 송(宋)도 초(楚)의 맹하(盟下)로 들어왔고, 그로써 장왕(莊王)의 패업은 완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다음, 그는 기원전 591년에 사거했다.(장왕 끝)

 ⊙ 화원(華元-생몰미상)은 중국 춘추시대 송(宋)의 정치가로, 당시 2대국(大國)이었던 진(晋)과 초(楚)의 화평을 위한 중재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예를 중시했던 이상주의자로 알려졌으며, 송(宋) 굴지의 명재상 중 한사람이었다.(하략)

 아무튼 또, 그렇게 해서 패권을 거머쥐었던 초(楚)였다지만, 하지만 그 장왕(莊王)의 뒤를 이었던 7대 공왕(共王) 때는 <언능(鄢陵)의 싸움>에서 진(晋)에 패했고, 그것으로 초(楚)는 또 패권을 잃고 말았다.

 ○ 언능(鄢陵)의 싸움

 언능의 싸움은 중국의 춘추시대였던 기원전 575년(周는 簡王 11年, 魯는 成公 16年)에 언능(鄢陵-河南省鄢陵県)에서 진(晋)과 초(楚)가 격돌했던 싸움이었고, 그 결과는 진군(晋軍)의 승리로 끝났다.

 1. 경위

 기원전 579년, 진(晋)과 초(楚)는 송(宋)의 땅에서 회맹했다. 그리고는 송(宋) 화원(華元)의 중개로 양국은 맹약을 하고 정전(停戰-하지만 史記에서는 그때가 기원전 589년이라고 했고, 左傳에서는 기원전 579년이라고 했는데, 史記의 실수로 봄)했지만, 그러나 기원전 577년에 진(晋)의 맹하(盟下)였던 정(鄭)이 초(楚)의 맹하였던 허(許)를 공격했기 때문에, 초(楚)의 공왕(共王)은 그 허(許)를 구원하기 위해서 정(鄭)을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다음해, 정(鄭)은 초(楚)의 영토를 할양받아서 화목했고, 그것으로 초(楚)의 맹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또 진(晋)의 여왕(厲王)은 원래 자신을 따랐던 그 정(鄭)의 배신을 바로잡기 위해서 위(衛), 제(齊), 노(魯) 등을 이끌고 정(鄭)을 쳤다. 그러자 또 정(鄭)은 초(楚)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그 결과 진(晋)과 초(楚)는 다시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음은 그때의 군대편성에 관한 것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당시, 楚軍은 中軍・左軍・右軍 三軍으로 편성되었고
 晋軍은 中軍・上軍・下軍・新軍 四軍을 보유하고 있었다.

 晋軍의 編成

 君主:厲公 軍師:苗賁皇
 中軍-将:欒書 佐:士燮
 上軍-将:郤錡 佐:中行偃
 下軍-将:韓厥 佐:智罃(출병으로 비게된 晋의 후방을 맡음)
 新軍-将:郤犨 佐:郤至

 楚軍의 編成

 君主:共王 軍師:伯州犂
 中軍-将:子反
 左軍-将:子重
 右軍-将:子幸

 2. 전쟁

 그 전쟁은 공왕(共王)이 진(晋)의 대부(大夫)였던 여기(呂錡)가 쏜 화살에 눈을 부상당했을 정도로 혼전(混戰)이었다. 그러자 공왕(共王)은 화가 나서 가신이었던 양유기(養由基)에게 명을 내렸고, 그러자 양유기(養由基)는 단 한발의 화살로 여기(呂錡)를 쏘아서 죽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공왕(共王)의 부상에 초군(楚軍)들이 동요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점점 더 전의는 상실되고 있었다. 그러자 공왕(共王)은 그날 밤에 자반(子反)을 불러들여서 다음날의 작전에 대해서 의논해보고자 했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자반(子反)은 술에 취해서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공왕(共王)의 부름에 나아가지를 못했다. 그러자 또 공왕(共王)은 그것으로 초군(楚軍)의 패배를 예감하고는 그날 중에 회군하여 수도 영(郢)으로 돌아갔다.

 3. 전후(戰後)

 자반(子反)은 전쟁 중 최대의 실수를 인정하고는 자살했고(그러나 史記에서는 철군 직전에 군영에서 주살되었다고 함), 승리했던 진(晋)의 여왕(厲王)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그리고 그 후에 여왕(厲王)은 그 여세를 타서 호족(豪族)들을 폐하고 공실(公室)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획책했고, 그 결과로 대족(大族)이었던 극(郤)씨(氏)의 경(卿) 3명을 죽였다. 하지만 또 그 후, 여왕(厲王)은 자신들도 그 극(郤)씨(氏) 같은 꼴이 될 것을 두려워했던 난서(欒書)와 중행언(中行偃)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그러자 또 명군이었던 도공(悼公)이 그 뒤를 이어서 패권을 확고히 했다.








 <楚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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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0)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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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
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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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의 위치도-左 赤圓>


 진(晋-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376년)은 현재의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주대(周代)와 춘추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국가였으며, 처음에는 당(唐)으로 불렸지만 나중에 개명해서 진(晋)이 되었다. 그리고 국성(國姓)은 희(姬)였고, 수도는 익(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분가였던 곡옥(曲沃)이 익(翼)의 종가(宗家)를 멸한 후, 개명해서 강(絳)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옛날, 한때 주(周)의 성왕(成王)이 동생이었던 우(虞)와 함께 정원에서 놀았을 때, 그는 나뭇가지를 꺾어서 <이와 같이 너를 봉하노라>라는 봉건(封建)의식을 흉내 내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성왕(成王)이 궁전으로 돌아갔을 때, 당시의 재상(宰相)이었던 윤일(尹佚)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성왕(成王)에게 하자, 성왕(成王)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尹-그러시면, 우(虞)전(殿)을 어느 곳에다 봉하면 좋겠습니까?>

 <成王-무슨 말씀이시오?! 나는 단지 그와 놀이를 한 것뿐이요!>

 그러자 또 윤일(尹佚)이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모름지기 천자(天子)에게 허언(虛言)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왕이 내뱉은 말은 번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 바로 얼마 후에 주공단(周公旦)이 당(唐)을 정벌하고 돌아왔을 때, 우(虞)를 그 당(唐)에 봉했으며, 그리하여 우(虞)는 당숙우(唐叔虞)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 우(虞)의 아들 섭(燮) 때에 분수(汾水=汾河=중국 山西省을 南北으로 흐르는 큰 강으로, 渭河에 버금가는 黄河 第2의 支流)의 지류였던 진수(晋水) 근처에서 국명을 진(晋)으로 하여 개국했다.


 그리고 그 후 제11대 소후(昭侯)의 시대에 그 소후(昭侯)의 숙부였던 성사(成師)가 곡옥(曲沃)을 물려받아서 분가했으며, 성사(成師)는 죽은 후에 환숙(桓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환숙(桓叔)은 생전에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 곡옥(曲沃)이 번영을 누렸고, 그래서 곡옥(曲沃)은 당시의 수도(首都)보다도 더 번창하고 컸다지만, 그러나 그 후에 익(翼)의 본가와 그 곡옥(曲沃) 간에 다툼이 계속되었으며, 그러자 또 무공(武公)의 시대에 익(翼)의 민후(緡侯 또는 湣侯)를 멸하고 주가(主家)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 무공(武公)의 시대에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했으며, 그 내용은 이미 전술(前述)한
바 있었다
. 그러자 또 그 후에 중이(重耳)가 다시 돌아와서 내란을 수습했고, 그 후에 성복(城濮)의 싸움(기원전 632년)에서 초(楚)를 격파한 후 강대한 패자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문공(文公)이 천하를 경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내분(內紛)에서 공족(公族)들의 수가 많이 격감했으며, 그래서 또 타국(他國)들에 비해서 그 공족(公族)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또 경공(景公)과 여공(厲公) 때에는 <측근정치>가 시도되기도 했으며, 적(狄)을 멸했다든가, 언능(鄢陵)의 싸움(기원전 575년)에서 승리했다는 것 등으로 해서 그 권위는 겨우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또 그 여공(厲公)의 강경함이 반발을 불러서 그가 살해됨(기원전 573년)에 따라서, 도공(悼公)이 주(周)로부터 영접을 받았을 때는 신하(臣下)들에 대해서 결정적인 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진(晋)의 공실(公室)은 대부(大夫)들 힘의 균형에 편승해서 존재 유지하는 존재로 전락해갔고, 그리하여 또 경공(頃公) 때에는 공족(公族)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기(祁) 씨(氏)와 양설(羊舌) 씨(氏)가 멸해짐에 따라서, 그때부터 육경(六卿-後述)이 결정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였던 춘추 말기(末期)에 진(晋)은 사실상 범(范) 씨(氏)와 지(智) 씨(氏) 그리고 중행(中行) 씨(氏)와 조(趙) 씨(氏), 한(韓) 씨(氏), 위(魏) 씨(氏)의 5씨(氏) 6가계(家系-中行氏와 智氏는 원래는 같은 荀氏였고, 韓氏만 公族이었다)의 당주(當主)들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6가계는 다른 유력 대부들을 배제하고 육경(六卿)을 세습했으며, 거기에다 또 출공(出公) 때에는 범 씨와 중행 씨의 영지를 지, 조, 한, 위 씨가 분할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때문에 출공(出公)이 분노해서 제(齊)와 노(魯)와 동맹을 맺고는 그 4씨(氏)를 토벌하려다가 실패했고, 그러자 또 출공(出公)은 그길로 제(齊)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그 도중에 사망(기원전 457년)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때문에 진(晋)의 공실(公室)은 완전히 힘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또 그 4씨(氏) 중에서 제일로 강력했던 지(智) 씨(氏)의 당주 지요(智瑤)는 한 씨와 위 씨를 이끌고 조(趙) 씨를 멸하려고 했고, 그러자 또 그 조 씨의 당주였던 조무휼(趙無恤)은 한 씨의 한호(韓虎)와 위 씨의 위구(魏駒)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지 씨와의 이간(離間)을 획책했는데 성공했다. <지(智) 씨는 욕심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내가 그들에게 먹히고 나면 그 다음은 당신들 차례가 될 것이오!>

 그렇게 해서 기원전 453년에 그 3가(家)에 공격당했던 지(智) 씨는 멸망했고, 그리하여 그 진(晋)은 조 씨와 위 씨, 그리고 한 씨가 나눠가졌으며, 그런 다음에는 그대로 독립했다. 하지만 진(晋)은 그런 와중에서도 곡옥(曲沃)과 강(絳) 2도시를 중심으로 했던 아주 조그마한 영토(魏에 포위된 형태로)라도 어떻게든 지켜나가면서 애공(哀公) 이하, 5대에 걸쳐서 존속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403년에 주(周)의 위열왕(威烈王)에 의해서 조(趙)와 한(韓)과 위(魏) 3씨(氏)가 제후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그리하여 진(晋)의 공실과 그 3가(家)는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명목상의 군신관계조차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 다음 기원전 376년에 진(晋)은 결국 한(韓)위(魏)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서 함락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진(晋)은 난공불락이었기 때문에 공격군들은 쉽게 진(晋)을 멸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후에 최후의 군주였던 정공(靜公)은 성에서 쫓겨나서 서민이 되었고, 그로서 진(晋)은 결국 멸망했다. 그리고 그 뒤에 조(趙)와 위(魏) 그리고 한(韓) 그 3국(國)을 3진(晋)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하지만 또 그 각각을 진(晋)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중앙에 위치했던 위(魏)를 진(晋)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또, 그 진(晋)의 군제(軍制)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면, 진(晋)은 삼군(三軍)이었으며, 그 각각의 장군과 부장(副將)은 경(卿)이 취임했다. 그리고 또 그 6명을 6경(卿)이라고 불렀으며, 그 일군(一軍)의 병원(兵員) 수는 12500명이었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 서열의 구성이므로 참고바랍니다.


 中軍의 장(將-제1위), 中軍의 좌(佐-제2위)
 上軍의 장(제3위), 上軍의 佐(제4위)
 下軍의 장(제5위), 下軍의 佐(제6위)

 그리고 위는 당시 주(周) 제도 하에 있어서 대국(大國)이 가질 수 있었던 최대의 군대였으며, 한때 새로운 삼군(三軍)을 구성해서 육군(六軍)으로 했던 적도 있었다지만, 그러나 곧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중군(中軍)의 장(將)에 취임했던 사람은 경(卿) 중에서도 필두(筆頭)였던 정경(正卿-宰相)이었으며, 그래서 또 중군(中軍)의 장하면 정경(正卿)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하지만 단, 그 정경(正卿)과 중군(中軍)의 장이 같은 의미는 아니며, 그리고 또 아래는 진(晋)의 역대 군주들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晋의 역대 군주>

 唐叔虞(생몰미상)
 
晋侯燮(생몰미상)
 
武侯(생몰미상)
 
成侯(생몰미상)
 
厲侯(생몰미상)
 
靖侯(기원전 이하 前. 858년-前841년)釐侯(前840年-前823年)
 
献侯(前822年-前812年)
 
穆侯(前811年-前785年)
 
殤叔(前784年-前781年)
 
文侯(前780年-前746年)
 
桓叔(前745年-前731年)…曲沃으로 分家
 
荘伯(前731年-前716年)
 
武公(前716年-前678年)
 
昭侯(前745年-前739年)
 
孝侯(前739年-前724年)
 
鄂侯(前723年-前718年)
 
哀侯(前717年-前710年)
 
小子侯(前709年-前706年)
 
湣侯(前706年-前679年)…曲沃의 武公에 죽임 당함
 
武公(前678年-前677年)…晋의 재통일 후 本家가 됨(前678年)
 
献公(前676年-前651年)
 
奚斉(前651年)
 
悼子(前651年)
 
恵公(前650年-前637年)
 
懐公(前637年-前636年)
 
文公(前636年-前628年)
 
襄公(前627年-前621年)
 
霊公(前620年-前607年)
 
成公(前606年-前600年)
 
景公(前599年-前581年)
 
厲公(前580年-前573年)
 
悼公(前572年-前558年)
 
平公(前557年-前532年)
 
昭公(前531年-前526年)
 
頃公(前525年-前512年)
 定
公(前511年-前475年)
 
出公(前474年-前457年)
 
哀公(前456年-前438年)
 
幽公(前437年-前420年)
 
烈公(前419年-前393年)
 
孝公(前392年-前378年)
 
静公(前377年-前376年)…晋의 三侯(韓哀侯・魏武侯・趙敬侯)에 의해서 멸해짐.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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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 장왕(莊王-?부터 기원전 591년. 재위 기원전 614년부터 기원전 591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제6대 왕이었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여(侶) 또는 여(旅), 시(諡)는 장(莊)이었다. 그는 또 초(楚)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최고의 명군(名君)으로 알려졌고, 춘추오패의 한명으로 손꼽아졌으며, 초(楚) 성왕(成王-6-18참고) 원(員)의 손자였고, 폭군이었던 상신(商臣-穆王)의 적자(嫡子)였다. 아들은 공왕(共王) 심(審).

 그는 처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사람으로, 목왕(穆王)이 죽자 즉위했다. 그런데 그 직후, 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공자(公子) 중 한사람이었던 섭(燮)이란 자가 모반을 일으켰다. 그러자 일단 수도와 왕실은 완전히 그 섭(燮)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섭(燮)도 자칭 왕 행세를 했지만, 그러나 반대세력이 확대됨에 따라서 신변에 위험을 느꼈던 섭(燮)은 장왕(莊王)을 구속해서 인질로 삼고는 북방으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는 진(晋)과 진(秦) 그리고 초(楚) 국경 근처의 상밀(商密)이라는 곳에서 반공(反攻)을 개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런데 또 그 도중에 노(盧)라는 동네에서 섭(燮)은 살해를 당했고, 그것으로 장왕(莊王)은 자유의 몸이 되어서 수도로 다시 귀환했다.

 그 후, 장왕(莊王)은 정치를 완전히 방기(放棄)했고, 일야(日夜) 연석(宴席)을 벌리는 등하면서 간언(諫言)을 올리는 자가 있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그러자 가신들은 너무 황당해서 간언을 올리는 것도 삼가고 그런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지만, 그런데 또 그 3년째가 되던 해에 오거(伍擧-伍子胥의 祖父)란 자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제가 수수께끼를 하나 내보겠는데 한번 알아맞혀보십시오! 그러니까 어떤 새가 한 마리 있는데, 그 새는 3년 동안이나 전혀 날 생각도 하지 않고 또한 울 생각도 전혀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 새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러자 장왕(莊王)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그 새는 일단 한번 나르기만 하면 하늘 끝까지에 닿을 것이고, 일단 울기만 하면,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큰소리로 울게 될 것이요. 그리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내 잘 알겠으니, 이제 그만하시오!>

 그 후에도 그의 음탕함을 즐기는 짓거리는 계속되었지만, 그러나 또 태부(太夫)였던 소종(蘇從)이 죽을 각오를 하고 간언했기 때문에 장왕(莊王)은 그것을 기회 삼아서 그때까지의 의태(擬態)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그 3년 동안 온갖 어리석은 짓을 다하면서 자기 가신(家臣)들의 인물상을 시험했었다거나 지켜봤던 것이었고, 그 결과로 또 오거(伍擧)와 소종(蘇從)에게 국정을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눈에 들었던 새로운 인재들 수백(數百) 명도 등용시켰으며, 그와 더불어서 나쁜 신하 수백 명도 살해했다. 그리하여 또 그 고사(故事)로부터 진득하게 기회를 기다린다는 의미의 <울지도, 날지도 않는다>라는 말도 생겼다고 하며, 그리고 또 그와 비슷한 일화는 제(齊)의 명군(名君)이었던 위왕(威王)에게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국정(國政)을 재정비했던 장왕(莊王)은 용(庸)을 침략했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주변 제국(諸國)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영토도 넓혔으며, 패자(覇者)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606년에는 군사를 주(周)의 수도 낙읍(洛邑) 교외에까지 주둔시켰고, 그러자 또 주(周)에서 사자가 오자 장왕(莊王)은 그 사자에게 구정(九鼎-중국 하(夏)나라의 우왕(禹王) 때에, 전국의 아홉 주(州)에서 거두어들인 금으로 만들었다는 솥으로, 주(周)나라 때까지 대대로 천자에게 전해진 보물이었다고 함)의 무거움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또 그 구정(九鼎)은 은(殷) 시대 때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왔던 전국(傳國)의 보기(寶器)로, 당시에는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이었는데, 아무튼 그리고 또 그때 장왕(莊王)이 그것에 대해서 물어봤던 것은,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돌아가겠다는 뜻을 시사(示唆)했던 것뿐만이 아니라, 주(周)의 왕위를 찬탈(簒奪)할 수도 있다는 것을 돌려서 말을 했던, 그러니까 일종의 공갈(恐喝)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周)의 사자 왕손만(王孫滿)은 그런 공갈에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을 했다. <문제는 그 솥(鼎)의 경중(輕重)에 있지 않고, 그 덕(德)의 유무(有無)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현재 비록 주(周)의 국력이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그 솥이 아직 주(周)의 왕실에 있다는 것은 그 덕(德)만은 아직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없습니다> 그러자 장왕(莊王)은 더 이상 반박을 하지 못했다는데, 어쨌든 그 고사(故事)로부터 또 <대놓고 황위(皇位)를 논하는 것> 또는 <면전(面前)에서 상대의 가치(價値)를 공공연하게 의심하는 것>을 <솥(鼎)의 경중(輕重)을 묻다 또는 세발솥의 경중을 묻다>라고 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것을 줄여서는 <문정(問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왕(莊王)은 어느 날 밤에 신하들을 연회에 초대했다. 그러자 얼마 후에 많은 사람들이 취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연회가 한창 절정이었을 때, 정전(正殿-本殿)의 납촉(蠟燭-)이 바람에 꺼져버렸다. 그러자 또 그때, 장웅(蔣雄)이란 사람이 황후의 옷을 건드렸는데(그러니까 몸을 더듬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표현한 곳도 있음), 그러자 황후가 깜짝 놀라서 곧바로 그의 갓끈(纓-관 뒤에 꼬리처럼 달린 장식)을 취하고는 그 사실을 장왕(莊王)에게 이렇게 고했다. <초가 꺼진 틈을 타서 누군가가 저에게 무례한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의 갓끈을 취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불을 켜게 되면 그 자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장왕(莊王)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전부 불을 밝히기 전에 갓끈을 떼시오!> 그러자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장왕(莊王)의 명에 따랐고, 그 때문에 장웅(蔣雄)도 죄를 면하게 되어서 그때부터는 마음 깊이 장왕(莊王)에 감사했다고 하며, 그래서 또 그런 연유로 그 연회의 이름은 <절영회(絶纓會)>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초(楚)가 진(秦)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을 때, 그 장웅(蔣雄)은 <지금이 기회다!>라는 듯이 선봉에 섰고, 그 결과로 큰 공을 세웠다. 그러자 또 장왕(莊王)이 그 장웅(蔣雄)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물었다고 한다. <정말 잘 싸워줬다. 나는 네가 그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목숨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싸워주었던가?> 그러자 장웅(蔣雄)이 또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저를 구해주신 분은 바로 왕이시며, 절영회(絶纓會) 때 황후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리고 위의 이야기는 자신의 관용으로 여자에게 빠지지 않고 오히려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군주로서의 장왕(莊王)의 인격을 시사해주는 고사(故事)로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또 그 후, 장왕(莊王)은 진(陳)의 내란에도 관여해서 일시(一時) 병합했으며, 이어서 정(鄭)을 공격해서 진(陳)과 함께 속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또 기원전 597년에는 정(鄭)의 원군으로 왔던 진군(晋軍)을 필(邲)에서 격파했고, 그러자 또 그때, 진군(晋軍)에서는 도망치는 배에 올랐던 병사들이 그 배가 전복될 것을 우려해서 뱃전을 붙잡고 있던 다른 병사들의 손까지 자르고 도망쳤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배 안에는 다른 병사들의 끊어진 손가락 등이 널려있었을 정도로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莊王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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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9)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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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송의 위치도-下中>


 송(宋-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286년)은 중국의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였고, 도(都)는 상구(商丘)였다.

 
양공(襄公-?부터 기원전637년. 재위는 기원전 651년부터 기원전 637년)은 중국의 춘추시대에 송(宋)의 주군이었으며, 성(姓)은 자(子), 휘(諱)는 자부(茲父 또는 茲甫), 시(諡)는 양(襄)이었다. 그리고 그는 환공(桓公)의 아들이었으며, 춘추오패의 한명으로 거론되는 일도 있다. 그는 기원전 651년에 송공(宋公)의 위(位)에 즉위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목이(目夷)라는 서형(庶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위(位)를 그 형에게 양도하려고 했었는데, 하지만 또 그 목이(目夷)가 그것을 한사코 거절해서 그가 즉위하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그 목이(目夷)를 재상(宰相)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직후에 제(齊)의 환공(桓公)이 회맹(會盟)을 주최했고, 그러자 그도 그 회맹에 참가했으며,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그는 회맹에 참가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그가 사적(私的)인 일보다는 예(禮)를 중시했던 이상주의(理想主義)자였기 때문이었는데,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643년에 그 환공(桓公)이 죽자 제(齊)에서는 그 후계를 둘러싸고 내란(內亂)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자 양공(襄公)은 다시 회맹을 열어서 조(曹), 위(衛), 주(邾) 등, 소국(小國)들을 이끌고, 일찍이 송(宋)에 유학(留學)을 했던 적이 있었던 태자 소(昭)를 추천해서 세우고는 제(齊)로 부임시켰으며, 그로서 내란을 수습하고 그 소(昭)를 제공(齊公)으로 올렸다. 그러자 그가 제(齊)의 효공(孝公)이 되었으며, 그러자 또 양공(襄公)은 그 회맹에 참석하지 않았던 등(滕)의 선공(宣公)을 포획했다. 그 후, 기원전 639년에 그는 다시 제(齊)와 초(楚)와 함께 회맹했으며, 그것으로 자신이 제후(諸侯)들의 맹주임을 초(楚)로부터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목이(目夷)가 그에게 <송(宋)이 제후들의 맹주가 되려는 것은, 분에 맞지 않는 위험한 일>이라고 간언했지만, 그러나 양공(襄公)은 목이(目夷)의 말을 듣지 않았다. 거기다 양공(襄公)은 오히려 초(楚)와 진(陳) 그리고 채(蔡)와 허(許) 그리고 조(曹)까지 모아서 회맹을 열었는데, 그런데 그는 그 자리에서 초(楚)의 자옥(子玉)에 의해서 감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맹주로서의 체면을 완전히 구기고 말았는데, 그러자 또 그는 그 다음해 그 굴욕을 갚아줄 생각으로 위(衛)와 허(許) 그리고 등(滕) 등을 이끌고 초(楚)의 맹하(盟下)였던 정(鄭)을 공격했다. 그러자 또 그때도 목이(目夷)가 나서서 그를 말렸지만, 그러나 그는 그때도 그 말을 듣지 않았고, 그러자 또 초(楚)의 성왕(成王)은 그 정(鄭)을 구원하기 위해서 병(兵)을 일으켰으며, 그리하여 양군은 결국 송(宋) 내(內)의 홍수(泓水)에서 격돌했다. 하지만 앞서 소개했던 대로, 그 전쟁은 소위 양공(襄公)의 인(仁)으로 인해서 패했고, 그 후에 진(晋)의 중이(重耳)가 송(宋)을 방문했을 때, 그는 크게 환대했으며, 그 후였던 기원전 637년에 대퇴부의 상처가 원인이 되어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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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의 위치도 左 赤圓>

 
 진(晋-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376년)은 현재의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주대(周代)와 춘추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국가였으며, 처음에는 당(唐)으로 불렸지만, 나중에 개명해서 진(晋)이 되었다. 그리고 국성(國姓)은 희(姬)였고, 수도는 익(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분가였던 곡옥(曲沃)이 익(翼)의 종가(宗家)를 멸한 후, 개명해서 강(絳)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옛날, 한때 주(周)의 성왕(成王)이 동생이었던 우(虞)와 함께 정원에서 놀았을 때, 그는 나뭇가지를 꺾어서 <이와 같이 너를 봉하노라>라는 봉건(封建)의식을 흉내 내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성왕(成王)이 궁전으로 돌아갔을 때, 당시의 재상(宰相)이었던 윤일(尹佚)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성왕(成王)에게 하자, 성왕(成王)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尹-그러시면, 우(虞)전(殿)을 어느 곳에다 봉하면 좋겠습니까?> <成王-무슨 말씀이시오?! 나는 단지 그와 놀이를 한 것뿐이요!> 그러자 또 윤일(尹佚)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모름지기 천자(天子)에게서 허언(虛言)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왕이 내뱉은 말은 번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 바로 얼마 후에 주공단(周公旦)이 당(唐)을 정벌하고 돌아왔을 때, 우(虞)를 그 당(唐)에 봉했으며, 그리하여 우(虞)는 당숙우(唐叔虞)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 우(虞)의 아들 섭(燮) 때에 분수(汾水=汾河=중국 山西省을 南北으로 흐르는 큰 강으로, 渭河에 버금가는 黄河 第2의 支流)의 지류였던 진수(晋水) 근처에서 국명을 진(晋)으로 하여 개국했다.

 그리고 그 후 제11대 소후(昭侯)의 시대에 그 소후(昭侯)의 숙부였던 성사(成師)가 곡옥(曲沃)을 물려받아서 분가했으며, 성사(成師)는 죽은 후에 환숙(桓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환숙(桓叔)은 생전에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 곡옥(曲沃)이 번영을 누렸고, 그래서 곡옥(曲沃)은 당시의 수도(首都)보다도 더 번창하고 컸다지만, 그러나 그 후에 익(翼)의 본가와 그 곡옥(曲沃) 간에 다툼이 계속되었으며, 그러자 또 무공(武公)의 시대에 익(翼)의 민후(緡侯 또는 湣侯)를 멸하고 주가(主家)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 무공(武公)의 시대에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했으며, 그 내용은 이미 전술(前述)한
바 있었다
.
그러자 또 그 후에 중이(重耳)가 다시 돌아와서 내란을 수습했고, 그 후에 <성복(城濮)의 싸움(기원전 632년)>에서 초(楚)를 격파한 후 강대한 패자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문공(文公)이 천하를 경영하게 되었다.

 중이(重耳=文公-기원전 696년부터 기원전 628년)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였고, 성(姓)은 희(姬), 휘(諱)은 중이(重耳), 시(諡)는 문(文), 진(晋)의 공자(公子)였다. 하지만 공자(公子) 시절에 일어났던 내란으로 인해서 그는 19년이나 제국(諸國)을 방랑했으며, 귀국 후에는 군주가 되어서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후에 제(齊)의 환공(桓公)과 함께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 칭해졌고, 춘추오패의 대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가계(家系)는 원래 진(晋)의 분가(分家)였는데, 그러나 그는 무공(武公)의 대에 본가(本家)를 멸하고 스스로 진공(晋公)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무공(武公)의 아들이었던 헌공(獻公)과 적(狄-白狄)족(族)의 딸이었던 호희(狐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하지만 그 헌공(獻公)에게는 중이(重耳) 외에도 태자(太子)였던 형 신생(申生-重耳와는 異母兄)과 아우였던 이오(夷吾-후의 惠公) 등이 있었다.

 ○ 이오(夷吾=惠公-?부터 기원전 637년 10월)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재위는 기원전 650년부터 기원전 637년)였고, 성(姓)은 희(姬), 휘(諱)는 이오(夷吾)였으며, 헌공(獻公)의 제3자(子)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지(機智)가 풍부했다고 알려졌으며, 태자였던 신생(申生)이 죽은 후에는 중이(重耳)와 함께 차기 군주의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러나 여희(驪姬)가 해제(奚齊)를 낳자 굴읍(屈邑)에 봉해졌다. 그 후, 기원전 652년에 여희(驪姬)가 헌공(獻公)을 암살했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극예(郤芮)의 헌언(獻言)을 따라서 양(梁)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651년에 이극(里克) 등, 진(晋) 국내의 대부(大夫)들에 의해서 해제(奚齊)와 그 후를 이을 도자(悼子)가 차례로 살해당하자, 그는 진(秦) 목공(穆公)의 후원을 받아서 귀국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650년에 진공(晋公)이 되었다. 그 후, 군주가 되었던 혜공(惠公)은 당시 자신보다 이름이 높았던 중이(重耳)가 귀국할 것을 염려해서 자객(刺客)을 보냈다거나,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 그리고 해제(奚齊)와 도자(悼子)를 살해하고 자신을 맞이했던 그 이극(里克) 등의 대부(大夫)들 조차도 아주 엄하게 탄압했다. 그런데다 또 당시, 진(晋)에서는 연년(連年) 흉작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기원전 647년에 혜공(惠公)은 앞에 자신을 도와주었던 진(秦)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내용 역시도 앞에서 기술되었기 때문에 일단 생략하며, 그 결과로 기원전 645년에 혜공(惠公)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러자 또 그 배은망덕했던 혜공(惠公)에 진(秦)의 목공(穆公)은 대노(大怒)해서 응전했는데, 그것이 <한원(韓原-현재 陝西省 韓城市)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또 그 결과 진(晋)은 패했고, 진(秦)은 압승을 거두었으며, 혜공(惠公)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도 앞에서 소개가 되었으므로 일단 생략하며, 그는 기원전 637년 10월에 죽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재(人才)를 좋아했기 때문에, 17세가 되던 때에는 조쇠(趙衰), 호언(狐偃), 가타(賈佗), 선진(先軫) 그리고 위주(魏犨) 등을 자신의 곁에 두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중이(重耳)의 패업(霸業)을 크게 도운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몸집이 아주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또 자신의 아버지가 태자(太子)였을 때부터 그는 이미 어른의 체격을 하고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술된 대로, 그 후로 여희(驪姬)의 음모가 진행됨에 따라서 그도 변방으로 쫓겨 갔고(蒲), 그러자 여희(驪姬)는 신생(申生)을 함정에 빠뜨려서 누명을 씌운 후에 자살시켰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독살미수였다. 그 후, 안심을 할 수 없었던 여희(驪姬)는 중이(重耳)까지 죽이려고 환관이었던 발제(勃鞮)란 자를 파견해서 중이(重耳)를 자살시키려고 획책했다. 그러자 또 중이(重耳)는 그 술책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도망을 기도했고, 그러자 또 그것을 막으려고 발제(勃鞮)가 경계를 더욱 엄중히 폈지만, 그러나 결국 중이(重耳)는 도망에 성공해서 그의 어머니의 출신지였던 백적(白狄)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후, 중이(重耳)는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국외(國外)로 망명했다.

 ○ 조쇠(趙衰-?부터 기원전 622년)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으며,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쇠(衰), 자(字)는 자여(子餘), 시(諡)는 성(成)이었고, 조성자(趙成子)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그는 대부(大夫)였던 조숙(趙夙)의 동생이었으며,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조(趙)나라의 시조였다. 그는 헌공(獻公)의 공자(公子)들 중에서 점(占)을 쳐본 결과 길점(吉占)이 나왔던 중이(重耳)를 선택했고, 기원전 653년에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하자 중이(重耳)와 함께 망명 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 후, 19년에 걸쳤던 제국(諸國)에의 방랑이 이어졌고, 그러던 중 적(狄)에서 숙외(叔隗-重耳의 妾이 되었던 季隗의 언니)를 만나서 취처(娶妻)했다. 그러자 그 후, 숙외(叔隗)는 장차 조(趙)나라의 기초를 세우게 될 조순(趙盾)을 낳았다. 그리고 또 다음, 기원전 645년에 진(晋)에서 중이(重耳)의 동생 이오(夷吾)가 혜공(惠公)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그는 중이(重耳)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나머지 자객을 보냈고, 그러자 또 그는 중이(重耳)와 함께 제(齊)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그 도중에 그들은 위(衛)의 땅을 지나야만 했는데, 그러나 그 위공(衛公)은 그들을 반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그들은 이미 다 떨어진 식량 때문에 근처 농가에서 구걸을 해야 했지만, 그러자 또 그곳의 농민은 그릇에다 흙만 가득 담아서 내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또 중이(重耳)가 그것을 보고 대노(大怒)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조쇠(趙衰)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하자 중이(重耳)가 그대로 따라했다. <흙을 얻었다는 것은 이곳의 땅을 얻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를 다해서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그런 다음 또 기원전 637년에 중이(重耳)가 초(楚) 성왕(成王)의 초대를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성왕(成王)은 중이(重耳)의 인품을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했다. 하지만 그에도 중이(重耳)는 예법에 서툴렀는데, 그러자 또 조쇠(趙衰)가 중이(重耳)를 가르쳐서 중이(重耳)가 예(禮)를 다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진(秦)의 목공(穆公)이 중이(重耳)를 반겨 맞았으며, 기원전 636년에는 드디어 중이(重耳)가 귀국길에 올라서 진군(晋君)에 즉위했고, 그로서 문공(文公)이 되었다. 그 후, 조쇠(趙衰)는 문공(文公)의 딸이었던 조희(趙姬)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그리하여 새롭게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용제(趙嬰齊) 3명의 자식을 생산했다. 그런데 그때, 당연히 조희(趙姬)가 정처(正妻)가 되어야 했지만, 그러나 그 조희(趙姬)가 원해서 숙외(叔隗)가 정처가 되었으며, 그것으로 또 조순(趙盾)이 적자(嫡子)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는 문공(文公)의 패업을 도왔으며, 기원전 635년에 진(晋)이 주(周)의 양공(襄公)으로부터 그 땅을 하사받았을 때는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629년에는 상군(上軍)의 좌(佐-將을 돕는 職으로, 부대장 정도)였던 호모(狐毛)가 죽자 그 후임을 맡았으며, 기원전 625년에는 중군(中軍)의 좌(佐)에도 임명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622년에 그는 사망했으며, 사후 성(成)이란 시(諡)가 내려졌고, 그리하여 조성자(趙成子)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아들 조순(趙盾)은 진(晋)의 재상이 되었으며, 그 후에 독립해서 조(趙)의 기초를 다졌다.

 ○ 호언(狐偃)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자(字)는 자범(子犯)이었으며, 구범(舅犯) 또는 구범(咎犯)으로도 불렸다. 그의 아버지 호돌(狐突)은 원래는 적(狄) 출신이었지만, 그러나 나름대로의 선견지명을 갖춘 덕으로 진(晋)의 무공(武公)을 섬겼다. 그리고 그 무공(武公)의 아들이었던 헌공(獻公) 대에 이르자, 호돌은 자신의 두 아들(형 狐毛와 동생 狐偃)에게 중이(重耳)를 섬기게 했으며, 그것은 또 그 중이(重耳)의 생모가 적(狄) 출신이었던 데다가, 그 그릇도 당연히 패자(覇者)의 그릇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하자 진(晋)은 곧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러던 중에 중이(重耳)를 주군(主君)으로 세워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중이(重耳)는 어느 정도 마음이 동했던가 보지만, 그러나 또 그때, 호언(狐偃)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중이(重耳)를 말렸다. <군주(君主-奚齊)를 죽인 신하들의 손에 의해서 받들어진 군주(君主)의 자리는 불길(不吉)합니다> 그 후, 중이(重耳)는 망명길에 올랐고, 호언(狐偃)도 그 길을 함께 따라나섰다. 그리고 어느 때 일행이 기아(飢餓)에 허덕이면서 오록(五鹿)이란 곳을 지나가고 있었을 때, 그곳의 농민에게 음식을 구걸했지만, 그러나 그 농민은 그릇에다 흙만 가득 담아서 내왔을 뿐이었다. 그러자 중이(重耳)가 몹시 노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호언(狐偃)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해서 중이(重耳)를 기쁘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곳의 백성이 이 땅을 공자께 헌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후일(後日), 반드시 이 땅을 손에 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제(齊)로 들어갔을 때, 당시의 패자(覇者)였던 환공(桓公)은 그 일행들을 환대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들을 이 제(齊)의 대신(大臣) 자격으로 대할 것이니,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제(齊)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오!> 그러자 중이(重耳)는 몹시 기뻐했지만, 그러나 그때 또 호언(狐偃)이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들은 패자(覇者-重耳)의 가신(家臣)이 되기 위해서 공자(公子)를 따라온 것이지, 제(齊)의 신하가 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그 후에 중이(重耳)의 처(妻)였던 제강(齊姜)과 조쇠(趙衰)와 함께 상의해서, 중이(重耳)를 취하게 한 후에 마차에 태우고는 억지로 제(齊)를 떠났다. 그러자 또 술이 깨고 난 후에 중이(重耳)는 대노(大怒)해서 호언(狐偃)을 죽이려고까지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호언(狐偃)이 이렇게 말을 했다. <제가 죽고 없어도 공자께서 성공할 자신이 있으시다면 원대로 하십시오!> 그러자 또 중이(重耳)가 화를 억누르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좋다! 하지만 당신의 말대로 내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당신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을 것이다!> 그러자 또 호언(狐偃)이 이렇게 말을 했다. <혹시라도 공자께서 성공을 하지 못하신다면, 저는 굶어서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도 그 고기는 별로 먹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중이(重耳)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것으로 중이(重耳)는 자기 가신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 후로는 스스로 진(晋)으로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점점 더 학문과 수양에 매진(邁進)했다. 그리고 그 후, 제(齊)의 환공(桓公)과 송(宋)의 양공(襄公) 그리고 진(秦)의 목공(穆公) 등, 당시 춘추시대를 대표하던 명군(名君)들의 지원을 받았던 중이(重耳)는 드디어 진(晋)으로 돌아가서 문공(文公)이 되었고, 그러자 또 호언(狐偃)은 귀국한 후, 그 문공(文公)의 패업을 크게 도왔다. 그리고 또 그 후, 주(周)의 양왕(襄王)이 <숙대(叔帶)의 난>을 피해서 정(鄭)으로 망명했는데, 그리고는 제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 권위가 저하되었던 주(周)왕실을 구해줄려는 제후들은 없었는데, 그러자 또 호언(狐偃)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군(君-文公)은 왕(王-襄公)을 도와서 배성들에게 그 의(義)로움의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문공(文公)은 군사를 일으켜서 그 난을 평정했다. 그러자 또 문공(文公)은 그 공을 인정받아서 왕실로부터 온(溫)과 원(原) 등, 중앙에서 가까운 땅을 하사받았고, 그것이 또 후에 진(晋)이 대발전을 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또 문공(文公)은 왕실을 구하고 세상에 의(義)를 보였던 것으로 해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 위주(魏犨-생몰불명)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무장이었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필(畢)이었지만, 나중에 위(魏)로 바꾸었으며, 휘(諱)는 주(犨), 시(諡)는 무(武)였다. 그리고 그는 필만(畢萬)의 손자였으며, 그래서 또 필주(畢犨) 또는 위무자(魏武子)라고도 불렸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전힐(顚頡)이란 자와 함께 중이(重耳)를 섬겼으며, 나중에 중이(重耳)가 망명을 떠났을 때도 항상 중이(重耳)를 호위하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기원전 637년에 중이(重耳)가 귀국해서 진공(晋公)의 자리에 오르자, 그도 위(魏) 씨(氏)의 당주(當主)가 되었으며, 그리고 또 기원전 633년에 삼군(三軍)이 창설되자 그는 문공(文公)의 차우(車右-왕의 수레를 모는 사람)가 되어서 문공(文公)을 계속해서 호위했다. 하지만 기원전 632년에 문공(文公)이 조(曹)를 공략했을 때, 중이(重耳) 방랑시절에 신세를 졌던 희부기(釐負羈 또는 이부기)의 집만은 불 지르지 말 것을 명받았지만, 그러나 그는 친구였던 전힐(顚頡)과 함께 그 집을 불태워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그는 부상을 당했으며, 그 일로 해서 또 전힐(顚頡)은 사형에 처해졌지만, 그러나 그는 부상의 중태(重態)였던 점을 감안해서 차우(車右)에서 면직되는 것만으로 그 일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에게는 위기(魏錡)와 위과(魏顆) 그리고 위강(魏絳) 3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위강(魏絳)의 계통이 그 위(魏) 씨(氏)의 계보를 이었으며, 나중에 전국칠웅(戰國七雄) 때의 위(魏)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시(諡)는 무(武)로 내려졌으며, 그것으로 위무자(魏武子)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무튼, 그가 백적(白狄)으로 망명했을 때, 그의 나이 이미 43세였다고 하며, 그리고 또 그때, 그 백적(白狄) 족과 적대관계에 있었고, 그래서 또 그 백적(白狄) 족에 의해서 멸해졌던 적적(赤狄) 족의 자매(姉妹)가 중이(重耳)에게 보내졌는데, 그러자 중이(重耳)는 그 중에서 언니였던 숙외(叔隗)를 취했으며, 동생 계외(季隗)는 조쇠(趙衰)가 취했다. 그 후, 중이(重耳)가 그 백적(白狄)에 망명한지 5년째 되었던 해, 헌공(獻公)이 훙거(薨去)했다. 그러자 이미 전술(前述)했던 대로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했으며, 한동안 진(晋)에서는 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혼란이 진정되자 이극(里克)이 중이(重耳)를 진공(晋公)에 모시기 위해서 사자를 보냈지만, 그러나 중이(重耳)는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그 자리는 이오(夷吾)가 차지했으며, 혜공(惠公)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뒤의 이야기 역시 전술(前述)되었으며, 그러자 또 역시, 중이(重耳)는 살해의 두려움을 느끼고는 제(齊)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출발 시에 중이(重耳)가 숙외(叔隗)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나를 25년만 기다려주시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재혼을 하시오> 그러자 숙외(叔隗)가 웃으면서 또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만약에 25년이나 기다리게 된다면, 저의 묘(墓)에 심어둔 측백(柏)나무도 아주 크게 자라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는 당신을 끝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그 후, 중이(重耳) 일행은 전술(前述)한 대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제(齊)에 도착했고, 그러자 환공(桓公)은 그들을 후대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제(齊)에서 5년이 지났을 즈음, 제(齊)의 환공(桓公)이 훙거(薨去)했고, 그러자 또 그 후계를 둘러싸고 격심한 내란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때는 또 이미 환공(桓公)의 딸(齊姜)을 부인으로 거두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중이(重耳)는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호언(狐偃)과 조쇠(趙衰) 등은 그 중이(重耳)를 제(齊)에서 빼내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때, 제강(齊姜)의 시녀(侍女)가 그들이 말하던 것을 몰래 훔쳐듣고는 제강(齊姜)에게 고해바쳤다. 그러자 또 제강(齊姜)은 누설(漏泄)의 두려움을 느껴
서 그 시녀를 죽이고는 중이(重耳)에게 하루빨리 제(齊)를 떠날 것을 독촉했다. 그러나 중이(重耳)는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또 제강(齊姜)은 호언(狐偃) 등과 밀담해서 중이(重耳)를 취하게 한 후, 차에 태워서 제(齊)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또 그 뒤의 이야기는 전술(前述)한 바와 같으며, 아무튼 그 후에 그 일행들은 조(曹)로 들어갔지만, 환영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례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자 그들은 서둘러서 송(宋)으로 다시 들어갔으며, 그러자 또 당시 초(楚)와의 전쟁(泓水의 싸움)에서 지고 낙담해 있던 양공(襄公)이 그들을 환대했다. 그리고 환공(桓公)과 같이 20승(乘-당시의 戰車 4頭 마차였기 때문에, 80頭)의 말을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당시, 송(宋)으로서는 그 이상의 조력(助力)은 무리였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초(楚)로 향했는데, 그런데 그 도중에 정(鄭)에 들러서 의향을 물었지만, 냉대만 당했다. 하지만 초(楚)의 성왕(成王)은 그들을 환대했고, 그 다음의 이야기는 전술(前述)했던 바와 같았다. 아무튼 또 기원전 637년에는 진(晋)의 혜공(惠公)이 사망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 진(秦)에서 인질로 잡혀있었던 태자 어(圉)가 진(秦)을 탈출해서 진공(晋公-懷公)이 되었다. 그러자 또 진(秦)의 목공(穆公)은 그것을 괴심하게 여기고는 당시 초(楚)에서 망명 중이던 중이(重耳)를 그 진공(晋公)에 앉히려고 불렀다. 그리고 그해 12월, 진(晋)의 중신(重臣)들과도 은밀하게 내통하고 있었던 중이(重耳)는 진군(秦軍)을 거느리고 진(晋)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또 당연히 진군(晋軍)이 중이(重耳)를 맞으러 나왔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평판을 잃었던 혜공(惠公)과 그의 아들 회공(懷公)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울 군사는 적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오히려 중이(重耳) 편이 되어서 회공(懷公)의 측근들을 멸했다. 그리하여 중이(重耳)는 결국 문공(文公)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62세였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오히려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그 후였던 기원전 635년에는 반란으로 도망을 왔던 주(周)의 양왕(襄王)을 도와서 반란을 진압했고, 기원전 632년에는 초(楚)의 공격을 받았던 송(宋)에 원군을 보냈다. 그러자 또 성왕(成王)은 회군을 결정했지만, 그러나 또 전술(前述)했던 대로 자옥(子玉)이 고집을 부려서 싸움은 시작되었는데, 그러자 또 문공(文公)은 과거 성왕(成王)과 약속했던대로, 전군(全軍)을 삼사(三舍) 후퇴시켰다. 하지만 결국 문공(文公)은 그 싸움에서 이겼으며, 그것으로 천하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628년에 사거(死去)했으며, 그 생전의 공적에 따라서 시호(諡號)는 문(文)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또, 그의 재위는 비록 9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 행해졌던 업적들은 그를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려놓게 하기에 충분하게 했고, 그것으로 또 그는 환공(桓公)과 나란히 춘추오패의 필두가 되었다. 


 <晋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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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8)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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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吳
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송의 위치도-下中>


 송(宋-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286년)은 중국의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였고, 도(都)는 상구(商丘)였다. 그리고 송(宋)은 주(周)에 의해서 멸해졌던 은(殷) 주왕(紂王)의 이모형(異母兄)이었던 미자계(微子啓-참고 6-13참조)가 봉해졌던 나라였고, 그 후에도 국력은 그렇게 크게 신장되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또, 전(前) 왕조와 연결된 나라라는 것으로 해서, 최고위의 공작(公爵)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 나중 후, 양공(襄公)의 시대에 힘이 조금 생겨서 제(齊)의 환공(桓公-참고 6-15, 16참조)이 사망한 후에 제후들의 회맹을 주도했다. 그러자 초(楚)의 성왕(成王)이 그것을 몹시 못마땅해 했고, 그 결과로 회맹을 끝내고 왔던 양공(襄公)을 감금시켜 버렸다. 그러자 또 양공(襄公)은 일단 성왕(成王)에게 그 일에 대해서 사죄를 하고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양공(襄公)은 그 일을 설욕(雪辱)하기 위해서 홍수(泓水-현재의 河南省 柘城)에서 초(楚)와의 결전에 임했다. 그러자 그 초군(楚軍)의 도하(渡河) 시에, 그것이 호기라고 보았던 송군(宋軍)의 재상(宰相)이 그에 대한 공격허가를 양공(襄公)에게 구했지만, 그러나 양공(襄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곧 이어서 초군(楚軍)은 무사히 도하해서 대열을 정비했고, 그러자 또 그것을 보고 재상이 다시 공격허가를 요청했지만, 그러나 그때도 양공(襄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사이에 초군(楚軍)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송군(宋軍)을 쳤으며, 그 결과로 송(宋)은 참패했다. <홍수(泓水)의 싸움>

 그 후 <그때 왜 공격허가를 내리지 않았는가?> 하고 묻자 양공(襄公)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모름지기 군자(君子)란, 상대의 약한 틈을 이용해서 이기는 짓은 삼가는 법이다!> 그러자 후세의 사람들은 그 양공(襄公)의 말에 빗대어서, 자신의 분수도 모르는 쓸데도 없는 인(仁)이라고 했고, 그것을 또한 <양공(襄公)의 인(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홍수(泓水)의 싸움 후에, 진(晋)의 공자(公子)였던 중이(重耳)가 송(宋)으로 망명해왔다. 그러자 그가 당대의 일재(逸才)라는 것을 간파했던 양공(襄公)은, 그때가 바로 패전 후였던 것에도 관계없이 그 중이(重耳)를 후히 대접하면서 맞이했다. 그러자 또 중이(重耳)는 그때의 은혜를 잊지 않고 나중에 자신이 진(晋)의 군주가 되었을 때, 그리고 또 그 후에 초(楚)가 그 송(宋)을 공격했을 때, 그는 대군(大軍)을 일으켜서 송(宋)을 구원했다. 하지만 그 중이(重耳) 사후에도 그런 관계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래서 또 그 후에도 초(楚)가 아무리 송(宋)을 괴롭혔어도, 송(宋)은 진(晋)을 배신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초(楚)는 서서히 북상(北上)을 시도했는데, 하지만 또 진(晋)이 그것을 물리치는 형태로 춘추시대 중기의 모습은 형성되어 갔다.


 그러나 그 후, 그 나마의 양공(襄公)도 죽어버리자, 그 후에 송(宋)은 제(齊)와 초(楚) 그리고 진(晋)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겨우 명맥(命脈)만 유지해가는 꼴로 전락해갔으며, 그런데다 또 송(宋) 최후의 왕이었던 강왕(康王)이 폭군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그 송은 기원전 286년에 제(齊)에 의해서 멸해졌다.

 
⊙ 성왕(成王-?부터 기원전 626년 10월 20일)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군주였고, 재위는 기원전 671년부터 기원전 626년까지였다. 그리고 성(姓)은 미(羋)였으며, 씨(氏)는 웅(熊) 그리고 휘(諱)는 운(惲)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선선(先先) 대(代)의 문왕(文王)이었고, 그 다음은 형 장오(荘敖)가 왕위를 이었지만, 그러나 성왕(成王)은 그 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덕(德)을 깨달아서 은혜를 베풀 줄 알았으며, 제후들과도 깊게 사귀었던 한편, 주왕(周王)에게 조공(朝貢)도 했다. 그러자 그는 그 주왕(周王)으로부터 <남방(南方)을 진정(鎭定)시키시오!>라는 말을 내려받았고, 그러자 그 후로 그는 적극적으로 주변의 제국(諸國)들을 병탄(倂呑)해서 천리(千里)를 개척했다. 그러자 그 후로 초(楚)의 국력은 급속도로 신장되었고, 그러자 또 그에 위기를 느꼈던 제(齊)의 재상(宰相) 관중(管仲)은 환공(桓公)에게 그 초(楚)를 토벌할 것을 진언(進言)했다. 그러자 또 당시, 아무리 기세등등했던 성왕(成王)이었어도 그러나 당시의 패자(覇者)였던 환공(桓公)에게는 적수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성왕(成王)은 화목의 의미로 환공(桓公)이 주재(主宰)했던 회맹(會盟)에 참가했다. 하지만 그 환공(桓公)이 죽자 이번에는 송(宋)의 양공(襄公)이 그 회맹을 주재해서 성왕(成王)을 초대했는데, 그러자 성왕(成王)은 <소국(小國)인 송(宋)이 나를 초대했다니, 그것은 무례(無禮)다!>라고 말을 하고는 자신의 부하 장군 자옥(子玉)을 그 회맹의 자리에 보내서 양공(襄公)을 아주 크게 모욕했다. 그러자 그 후, 성왕(成王)은 그 공으로 자옥(子玉)에게 영윤(令尹-宰相에 상당)의 벼슬을 내렸다.

 ○ 자옥(子玉)은 성득신(成得臣-?부터 기원전 632년)이며,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장군이었고, 정치가였다. 그리고 벼슬은 영윤(令尹)을 지냈으며, 자(字)가 자옥(子玉)이었고, 성왕(成王)을 모셨다. 그리고 또한 맹장(猛將)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기원전 640년에 진(晋)의 공자(公子)였던 중이(重耳)가 초(楚)로 망명을 갔는데,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와 그 측근들의 재능을 알아차리고는 제후(諸侯)의 예에 버금가게 극진히 대접했다. 그리고 또한 중이(重耳)의 귀국을 지원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던 성왕(成王)은 농담 삼아서 <만약에 당신이 귀국하게 된다면, 나에게 그 보답을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중이(重耳)는 <진(晋)초(楚) 양군이 중원(中原)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3사(舍)를 양보해드리겠습니다>라고 답을 했는데, 여기서 <1사(舍)>는 그 당시, 군대의 하루 행군거리를 가리켰던 것이므로, 그래서 중이(重耳)는 3일간의 행군거리를 양보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 지금의 거리로 따지면 약 60킬로미터에 해당되는 거리였다. 그러자 그 말을 전해 들었던 자옥(子玉)은 대노(大怒)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말은 너무 불손(不遜)하므로, 그 무례(無禮)를 물어서 당장 죽여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성왕(成王)은 자옥(子玉)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또 기원전 637년에 진(陳)이 송(宋)의 길을 빌려서 초(楚)의 배후를 위협했다. 그러자 자옥(子玉)은 군을 이끌고 가서 그것을 토벌했으며,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이 회맹을 주재(主宰)했을 때, 그곳으로 가서 그 수좌(首座)에 앉아 있던 양공(襄公)을 납치해서 초(楚)로 데려갔고, 그로써 양공(襄公)의 체면은 완전하게 모욕당했다.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 공으로 자옥(子玉)에게 영윤(令尹)의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또 다시 기원전 633년에, 초(楚)의 성왕(成王)이 송(宋)을 토벌하기 위해서 군사를 모았다. 그리고는 자옥(子玉)과 자문(子文)에게 그 군사의 훈련을 맡겼다. 그러자 또 자문(子文)은 자옥(子玉)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서 아침식사 전에 연습을 끝냈으며, 단 한 사람의 병사도 벌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옥(子玉)은 하루 종일 훈련을 시켰으며, 7명의 병사에게 편타(鞭打-채찍으로 때리는 笞刑)를 가했고, 그 중에 3명을 죽였다. 그러자 귀족(貴族)들은 그러했던 자옥(子玉)의 유능함을 칭찬했으며, 자문(子文)에게도 축하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그때, 단 한사람 위가(蔿賈)만은 축하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자문(子文)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또 위가(蔿賈)가 다음과 같이 답을 했다. <도대체 뭘 축하하라는 말이요?! 그리고 만약에 자옥(子玉)이 군사(軍事)로서 실패하게 된다면, 그것은 모두 그를 추천한 당신들의 책임이요! 그리고 또 그 자옥(子玉)은 기(氣質)가 강한 사람이고, 예의를 모르는 사람을 다스리는데도 부적격인 사람이요! 그렇기 때문에 또 300승(乘=臺) 이상의 군을 통솔하게 된다면, 그는 분명히 그 군을 무사히 귀환시킬 수 없을 것이요!> 그리하여 기원전 632년에 성왕(成王)이 다시 중원(中原)을 노리고는 그곳으로 군을 진군시켰다. 그리고는 제국(諸國)을 토벌하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는 이미 문공(文公)이 되어있었던 중이(重耳)가 원군을 보냈기 때문에 그래서 성왕(成王)은 하는 수 없이 본국으로 군을 철수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또 위가(蔿賈)의 예언을 알고 있었던 자옥(子玉)이 그런 성왕(成王)을 말리면서 문공(文公)과 싸울 것을 권했지만, 그러나 성왕(成王)은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 자옥(子玉)이 성왕(成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제가 문공(文公)과 싸우자고 하는 것은 단지 공을 세우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저를 비방하는 자(蔿賈)의 입을 막으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는 자옥(子玉)이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그 문공(文公)과 싸우려고 하자, 성왕(成王)은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고는 자옥(子玉)만 그곳에 남겨두고 초(楚)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자 결국 자옥(子玉)은 성복(城濮)이란 곳에서 진군(晋軍)과 격돌했고(城濮의 싸움), 그 결과 문공(文公)에게 패했다. 그러자 자옥(子玉)은 패군지장(敗軍之將)이 되어서 다시 초(楚)로 도망을 갔는데, 하지만 그 후에 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살했다. 그리고 또 그때, 문공(文公)도 싸움에는 이겼지만, 그러나 그 자옥(子玉)을 놓친 것을 두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궁서(窮鼠)는 고양이에게도 덤벼드는 법인데, 하물며 일국(一國)의 재상(宰相)을 말해서 무엇 하랴! 그러므로 그는 반드시 다시 복수를 하러 올 것이다!> 그리고는 승리의 기쁨도 누리지 않고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하지만 그 후에 자옥(子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그때서야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아, 이제야 두 발 뻗고 잘 수 있게 되었구나!>(窮鼠는 고양이도 문다의 故事)

 ○ 자문(子文)은 투곡어도(鬬穀於菟)이며, 생몰은 불명하다. 그리고 그는 춘추시대에 초(楚)의 재상을 지냈으며(令尹), 성(姓)은 미(羋), 씨(氏)는 투(鬬), 휘(諱)는 곡어도<穀於菟-穀은 젖(乳)이고, 於菟는 호랑이(虎)란 뜻임>, 자(字)는 자문(子文)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투백비(鬬伯比)의 아들이었으며, 청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초(楚)나라 굴지(屈指)의 현상(賢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하는 자문(子文)으로 명기(名記)함. 그는 아버지 투백비란 자가 당시, 운공(鄖公)이란 사람의 딸과 밀통(密通)을 해서 생겼던 자식이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운몽(雲夢)이란 못(또는 늪-澤) 한중간에다 그를 버렸다. 그런데 그 후에 사냥을 나갔던 운공(鄖公)이 마침 또 그때 호랑이가 키우고 있던 그를 발견했고, 그러자 또 운공(鄖公)은 그를 데려가서 자신의 딸이 키울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후, 기원전 664년에 그는 영윤(令尹)에 발탁되었고, 그러자 또 그는 사재(私財)를 풀어서 초(楚)의 재정을 튼튼하게 했다.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 때문에 가난해져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었던 그에게 몇 번이고 봉록(俸祿)을 올려주려고 했지만, 그러자 또 그는 관직마저 버리고 하야(下野)했다. 그러자 또 성왕(成王)은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취소하자 그가 다시 돌아왔으며, 그러자 또 성왕(成王)은 그 대신으로 그에게 말린 육포(肉脯) 1속(束-다발 또는 묶음)과 조반(朝飯) 1롱(籠-한바구니 또는 한 그릇)을 내렸는데, 그러자 그 후로 그것이 관습(慣習)이 되어서 초(楚)의 영윤(令尹)이 되었던 사람에게는 그것이 계속해서 내려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 그의 동생이었던 자양(子良)이 아들을 낳아서 그 이름을 자월(子越)이라고 지었는데, 그러자 그는 자양(子良)을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너는 이 아이를 키울 수 없으므로, 반드시 너의 손으로 죽여야 할 것이다> 그러자 자양(子良)이 그 이유를 물었는데, 그러자 또 그가 이렇게 말을 했다. <이 아이의 모습은 마치 곰이나 호랑이와 같고, 그 목소리는 또 들개나 이리 같다. 그러므로 이 아이는 훗날 분명히 우리 약오 씨(若敖氏)에게 해를 끼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양(子良)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또 그는 임종(臨終) 시에 일가족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초(椒=子越)가 만약에 정권을 잡게 된다면, 너희들은 모두 이 楚를 떠나서 그 難을 피하도록 하라> 그런 다음에 그는 다시 <약오 씨(若敖氏)의 영혼들은 모두 허덕이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하면서 울었으며, 그것으로 그 약오 씨(若敖氏)의 멸망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문(子文) 사후, 자월(子越)은 자문(子文)의 예언대로 당시 명군(名君)이었던 장왕(莊王)을 배신했기 때문에 약오 씨(若敖氏)는 멸문(滅門)했다. 그러자 또 장왕(莊王)은 <그 때문에 저 자문(子文)의 가계(家系)가 멸문하게 된다면 후에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善行)을 행하라고 말을 할 자격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말을 하고는, 또 당시 그 배신에 가담하지 않고 초(楚)를 떠나 있었던 일족 중에서 투극황(鬬克黃)이란 사람에게 그 가계를 계속해서 잇게 했다.

 아무튼 그 후, 송(宋)은 그 설욕(雪辱)을 위해서 초(楚)에 도전했고, 그 결과로 홍수(泓水)에서 격돌했지만(泓水의 싸움), 전술(前述)대로 초(楚)에 졌다. 그리고 또 그 후, 방랑 중이던 진(晋)의 공자(公子) 중이(重耳)가 초(楚)로 들어오자 그는 그 그릇을 알아보고 중이(重耳)를 환대했으며, 그 후에 또 진(晋)에서 혜공(惠公)이 몰(沒)하고 회공(懷公)이 즉위하자 그는 중이(重耳)에게 후한 선물을 안긴 후, 진(晋)으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진(秦)으로 보냈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제(齊) 환공(桓公)의 공자(公子)들 7명이 초(楚)로 망명을 왔을 때도 그는 그들 전원을 상대부(上大夫)에 봉했다. 그 후, 성왕(成王)이 송(宋)을 공격하자 진(晋)의 중이(重耳) 문공(文公)이 원군을 보냈으므로, 성왕(成王)은 그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 초(楚)로 다시 회군하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때 영윤(令尹)이었던 자옥(子玉)이 싸우기를 원했다.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때 자옥(子玉)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중이(重耳)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타국에서 망명생활을 했지만, 그러나 결국 천의(天意)에 의해서 진(晋)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옥(子玉)이 계속해서 고집을 하자 성왕(成王)은 화가 나서 자옥(子玉)에게 소수(小數)의 병력만 주고는 철수해버렸다. 그러자 결국 초군(楚軍)은 패했으며, 자옥(子玉)도 그 책임을 지고 자결했다. 그 후, 성왕(成王)은 포학(暴虐)했던 공자(公子) 상신(商臣)을 폐하고, 서자였던 공자(公子) 직(職)을 후계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자 공자(公子) 상신(商臣)이 병(兵)을 이끌고 들어가서 성왕(成王)을 포위했으며, 그 결과로 성왕(成王)은 오히려 그 상신(商臣) 앞에서 자살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죽기 전에 곰발바닥요리를 먹고 싶다는 말을 했지만, 그러나 상신(商臣)은 그것을 거절했다. 그 후, 상신(商臣)은 목왕(穆王)이 되었고, 그래서 성왕(成王)에게 영(靈)이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는데, 그러나 성왕(成王)의 눈이 감겨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상신(商臣)은 다시 성(成)이라는 시호를 올렸고, 그러자 또 그때서야 성왕(成王)의 눈이 감겼다고 한다.(成王 끝)

 <송(宋)에 관한 일화(逸話)>

 옛날, 송(宋)에 어떤 남자가 들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 근처 숲에서 토끼 한 마리가 튀어나와서는 나무의 그루터기에 머리를 부딪쳐서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사내는 손 하나 까딱 안하고 그 토끼를 얻게 되어서 몹시 기뻐했다. 그런데 또 그 다음날, 그 남자는 다시 또 그런 일이 생길까 해서 하루 종일 그 그루터기만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생기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그 사이에 그의 밭은 잡초만 무성해졌다고 하며, 그리고 또 이 이야기는 한비(韓非)가 구습(舊習=舊來)의 제도(制度)에만 매달리는 자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일화(逸話)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래는 송(宋)의 역대(歷代) 군주(君主)들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1. 微子啓(啓)
 2. 微仲衍(衍)
 3. 宋公稽(稽)
 4. 丁公(申)
 5. 湣公(共)
 6. 煬公(熙)
 7. 厲公(鮒祀):? — 紀元前859年
 8. 釐公(舉):紀元前859年 — 紀元前831年
 9. 恵公(覵):紀元前831年 — 紀元前801年
 10. 哀公:紀元前801年 — 紀元前800年
 11. 戴公:紀元前800年 — 紀元前766年
 12. 武公(司空):紀元前766年 — 紀元前748年
 13. 宣公(力):紀元前748年 — 紀元前729年
 14. 穆公(和):紀元前729年 — 紀元前720年
 15. 殤公(與夷):紀元前720年 — 紀元前711年
 16. 荘公(馮):紀元前711年 — 紀元前692年
 17. 湣公(捷):紀元前692年 — 紀元前682年
 18. 宋子游(游):紀元前682年
 19. 桓公(禦説):紀元前682年 — 紀元前651年
 20. 襄公(兹甫):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21. 成公(王臣):紀元前637年 — 紀元前620年
 22. 宋君禦(禦):紀元前620年
 23. 昭公(杵臼):紀元前620年 — 紀元前611年
 24. 文公(鮑革):紀元前611年 — 紀元前589年
 25. 共公(瑕):紀元前589年 — 紀元前576年
 26. 平公(成):紀元前576年 — 紀元前532年
 27. 元公(佐):紀元前532年 — 紀元前517年
 28. 景公(頭曼):紀元前517年 — 紀元前469年
 29. 宋公啓(啓):紀元前469年
 30. 昭公(特):紀元前469年 — 紀元前404年
 31. 悼公(購由):紀元前404年 — 紀元前385年
 32. 休公(田):紀元前385年 — 紀元前363年
 33. 桓公(辟兵):紀元前363年 — 紀元前350年?
 34. 剔成君(剔成):紀元前350年? — 紀元前329年
 35. 康王(偃):紀元前329年 — 紀元前286年





 <宋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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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7)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
진(秦-기원전 778년부터 기원전 206년)

<진 제국의 판도>


 중국 왕조 중 하나였으며,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걸쳐서 존재했으며,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했지만, 기원전 206년에 멸망했다. 그리하여 통일부터 멸망까지의 기간(기원전 221년부터 기원전 206년)을 진대(秦代)라고 부른다. 국성(國姓)은 영(嬴), 통일 때의 수도는 함양(咸陽)이었다.

 아무튼, 진(秦)은 춘추시대에 들어서자마자 제후(諸侯)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지만, 그러나 원래부터 이민족이었기 때문에 풍속적으로 중원(中原) 제국(諸國)들과 크게 차이를 보였다. 그리하여 당초에는 그 야만성으로 인해서 멸시를 받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대를 이어가면서 진(秦侯)은 주로 서융(西戎)과 항쟁해 나가면서 영토를 넓혀갔고, 그 사이에 또 법률을 정비하는 등, 점차로 국가의 모습으로 변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677년에는 수도를 옹(雍-현재의
陝西省 鳳翔県=宝鷄市)에 두게 되었다. 그 후, 9대째의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 등의 타국(他國) 출신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해서 적절하게 배치했고, 신의(信義)를 지키는 자세로 임해서 서융(西戎)을 크게 무찔러서 그 서융의 패자가 되었다든지, 그런 후에는 또 주변의 소국(小國)들을 병합해서 영토를 확장했으며, 그리하여 결국에는 이웃의 대국(大國)이었던 진(晋)에도 필적(匹敵)할만한 국력을 가지게 되었다.

 ⊙ 목공(穆公)은 중국 춘추시대 진(秦)의 제9대 군주였고, 목공(繆公)으로도 표현했다. 그는 제6대 덕공(德公)의 아들로 제8대 성공(成公)의 아우였지만, 형제상속에 의해서 진공(秦公)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진(晋) 헌공(獻公)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그런데 그때, 백리해(百里奚)가 시신(侍臣)으로 따라왔다. 그러자 목공(穆公)은 그를 가신으로 삼았으며, 그 후에는 백리해(百里奚)에게 국정을 맡기게 되었다.

 ○ 백리해(百里奚)는 중국 춘추시대 진(秦)의 재상(宰相)으로,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맹명시(孟明視)의 아버지로도 알려졌고, 백리혜(百里傒)라고도 불렸다. 그는 초(楚)나라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그의 1세대 전에 허(許)나라에 백리(百里)라는 이름을 가진 대부(大夫)가 있었다는 것이 춘추좌씨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의 출신지는 아마도 그 허(許)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는 장성해서 제(齊)로 갔는데, 그때 기아(飢餓)로 길거리에서 쓰러져버렸다. 그러자 그 제(齊)의 사람이었던 건숙(蹇叔)이란 사람이 그를 도와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당시의 제공(齊公-襄公 또는 公孫無知)을 모시려고 했지만, 그러나 건숙이 그를 말렸다. 그러자 그 후, 제공(齊公)은 곧 살해당했고, 그것으로 또 그는 그 건숙에게 두 번의 큰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또 주(周)로 가서 공자(公子) 퇴(頹)를 모시려고 했지만, 그러자 또 건숙이 말렸다. 그러자 또 그 퇴(頹)는 기원전 675년에 혜왕(惠王)을 쫓아내고 잠시 왕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러나 또 그 2년 후였던 673년에 패사(敗死)했다. 그러자 또 그것으로 백리해(百里奚)는 건숙에게 세 번째의 큰 은혜를 입었다. 그 다음에 그는 또 주(周) 왕실에 연(連)이 있었던 우<虞-성(姓)은 희(姬), 문왕(文王)의 백부(伯父)였던 우중(虞仲-雍)의 계통>에게 가려했으나, 그러자 또 건숙이 그를 말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리해(百里奚)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虞)에게로 가서 대부(大夫)가 되었다. 그러자 그 후로 건숙(蹇叔)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655년 겨울에 진(晋)의 헌공(獻公)이 우후(虞侯)에게 벽<璧-얇게 고리 모양으로 만든 옥(玉). 중국(中國) 주(周)나라 때부터 한(漢)나라 때에 걸쳐서 제기(祭器)ㆍ보물(寶物)ㆍ장식품(裝飾品)으로서 애호(愛好)되었음. 여러 가지 무늬가 있다고 함>과 명마(名馬)를 선물로 가져와서, 당시 그 우(虞)의 친척이었던 곽<霍-개조(開祖)는 무왕(武王)의 이모제(異母弟)였던 곽숙처(霍叔處)>과 괵<虢-개조(開祖)는 문왕의 아우였던 괵중(虢仲)>을 토벌하러 갈 때, 자신들이 그 길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우후(虞侯)에게 요구했다. 그러자 백리해(百里奚)는 현신(賢臣)이자 고명(高名)했던 궁지기(宮之奇)와 함께 그것을 거절하라고 우후(虞侯)에게 간언했지만, 그러나 우후(虞侯)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헌공(獻公)의 요구에 흔쾌히 응했다. 그러자 결국 헌공(獻公)은 그 곽(霍)과 괵(虢)을 쳐서 괴멸시켰고, 돌아오던 길에는 우(虞)마저 습격해서 멸했으며, 그러자 또 우후(虞侯)와 백리해(百里奚) 등은 포로가 된 후, 종의 신분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또 백리해(百里奚)는 그때서야 건숙(蹇叔)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그로부터 또 얼마 후, 헌공(獻公)의 딸이 진(秦)의 목공(穆公)에게 시집가게 되었는데, 그러자 백리해(百里奚)는 그 딸의 종 신분으로 진(秦)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의 어느 날 백리해(百里奚)는 목공(穆公)의 신하 중 한사람과 정치에 관해서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신하가 그를 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목공(穆公)에게 그를 추천했다고 한다. <당신을 재상의 자리에 앉히면 진(秦)의 세력은 천리(千里)를 헤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정작 백리해(百里奚) 본인은 그것이 싫어서 외국으로 도망을 가버렸는데, 그런데 그 도망을 갔던 초(楚)의 땅에서 그는 노예의 신분이 되었고, 그런데 또 그때, 우연히 목공(穆公)의 신하 중 한명이 그를 알아보고는 양피(羊皮)5장(五羖)를 주고 그를 사서 다시 진(秦)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또, 그런 연유로 해서 그는 그 후로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후, 목공(穆公)은 그와 3일 밤을 마주앉아 국사에 대해서 논했고, 그 결과 그의 의견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또 그때, 백리해(百里奚)의 나이는 70여세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백리해(百里奚)는 철저한 덕정(德政)을 펼쳤고, 그것은 또, 주변의 제국(諸國)들을 배려하는 정책이 되었다. 그러자 주변의 10개국(個國)이 그 진(秦)에 복속하기를 신청해 왔고, 그러자 또 진(秦)은 문자 그대로 천리(千里-1國=百里, 10국=千里)에 그 세력을 뻗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바로 그것은, 후의 시황제(始皇帝) 때 그 진(秦)이 전국통일을 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또 백리해(百里奚)는 말 그대로 청렴결백했기 때문에, 겨울에도 외투를 입지 않았고, 국내를 순찰했을 때도 그 위병(衛兵)들에게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게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또 그는 과거 큰 은혜를 입었던 건숙(蹇叔)을 목공(穆公)에게 천거했고, 그러자 또 목공(穆公)은 그 뜻을 받아들여서 건숙(蹇叔)을 진(秦)으로 초빙했으며, 이어서 상대부(上大夫)란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백리해(百里奚)가 재상이 되었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90을 넘겼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래서 또 그가 사망했던 나이는 아마도 100세 근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의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그러나 또 사기(史記)의 몽념(蒙恬)전(傳)에는 <몽곡(蒙穀-蒙恬의 아우)이 말하기를, 옛날 우리 진(秦)의 목공(穆公)은 삼량(三良-세 명의 훌륭한 신하)을 죽였고(殉死로, 주군을 따라서 같이 죽는 것. 그러나 구체적으로 누구의 순사인지는 알 수 없음), 백리해(百里奚)를 처벌했습니다만, 그러나 그는 죄를 지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호(號-諡號)를 목(繆=穆. 誤字로 봄.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 뜻으로 말을 하자면, 얽을 무와 목멜 규 자로도 쓰이기 때문에, 그 繆 字의 진위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음)으로 올린 것입니다>라고 그가 처형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다. 그래서 또, 목공(穆公)은 그 일에 대해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백리해(百里奚)의 아들이었던 맹명시(孟明視)를 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진(秦)의 남녀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전부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애도했다고 하며, 아이들조차도 평소 동네에서 놀면서 부르던 노래조차도 부르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 맹명시와 건숙(蹇叔)은 재상이 되어서 목공(穆公)을 잘 보좌했다.

 ☆ 혜공(惠公)은 주조(周朝) 제17대왕으로, 희공(釐公)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희공(釐公)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으며(기원전 676년), 그 원년(元年)에 논에다 야수(野獸)를 사육했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 불만을 샀다.

 참고: 그러나 일설에는, 왕자 퇴(頹)와 아래 5대부(大夫)의 횡포가 너무 심해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곳에다 일종의 동물원을 건립했기 때문에, 그 불만으로 퇴(頹)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함.

 그러자 또 그 결과로, 그 다음해 가을에, 변백(邊伯)이란 자와 석속(石速) 그리고 첨보(詹父)와 자금(子禽), 축궤(祝跪) 그 5인의 대부(大夫)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어서 연(燕)과 위(衛)의 군사를 끌어들여서 혜왕(惠王)을 공격했다. 그러자 또 혜왕(惠王)은 온(溫-현재의 河南省 温県 南部)으로 도망을 갔고, 그러자 또 정(鄭)의 여공(厲公)이 역지(櫟地-현재의 禹州市)에서 그를 맞이해 주었다. 그러자 그해 겨울, 혜왕(惠王)의 조부(祖父)였던 장왕(莊王)의 첩(妾-姚氏)이 낳았던 아들이었으며, 혜왕(惠王)의 숙부(叔父)에 해당되었던 미숙퇴(弭叔頹)가 왕위에 올랐다.


<당시의 참고도>

 
 그 후, 혜왕(惠王) 4년이었던 기원전 673년에 정(鄭)은 괵(虢)의 원조를 받아서 퇴(頹)를 공격해서 죽였고, 그 결과로 다시 혜왕(惠王)이 복위했다. 그러자 또 그 후, 정(鄭)은 은상(恩賞)로서 호뢰(虎牢-현재의 河南省 滎陽 汜水鎮) 이동(以東)의 땅을 받았으며, 괵(虢) 또한 같은 뜻으로 영지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혜왕(惠王) 10년(기원전 667년)에, 혜왕(惠王)은 제(齊)의 환공(桓公)에게 백(伯)의 위(位)를 하사했으며, 25년(기원전 652년)에 죽었다.

 ☆ 헌공(獻公-?부터 기원전 651년)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재위는 기원전 676년부터 기원전 651년)로, 성(姓)은 희(姬), 휘(諱)는 궤제(詭諸)였고, 무공(武公)의 아들이었다. 그는 태자(太子)로서 아버지 무공(武公)의 진(晋) 재통일에서 활약했고, 무공(武公)의 뒤를 잇게 되었던 것은 괵(虢)과 위(魏) 등의 주변 제국(諸國)들을 병탄(倂呑-남의 재물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듦)했던 것과, 사위(士蔿)를 헌책(獻策)했던 일, 그리고 또 환(桓)과 장(莊)의 족속들을 멸해서 종가(宗家)의 권위를 확립시켰고, 그리하여 진(晋)을 융성시켰던 점 등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만년에는 그 역시 총기가 흐려져서 애첩이었던 <여희(驪姬)>의 참언(讒言)을 믿고 태자(太子) 신생(申生-共太子)을 죽였으며, 이어서 공자(公子) 중이(重耳-나중의 文公이며, 후술함)와 공자(公子) 이오(夷吾-나중의 惠公이며, 후술함) 등을 먼 곳으로 쫓아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진(晋)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것을 <여희(驪姬)의 난>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후로 진(晋)은 태자(太子) 이외의 공자(公子)들은 모두 국외로 내보내는 전통을 지키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또 공족(公族)의 힘이 그때부터 현저하게 약해지게 되었다.

 ☆ 사위(士蔿)는 생몰년불명이며,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다. 성(姓)은 기(祁)였으며, 씨는 사(士), 그리고 휘(諱)는 위(蔿), 자(字)는 자여(子與)였다. 그는 또 무공(武公)과 헌공(獻公)을 모셨으며, 그리하여 진(晋) 발전의 기초를 구축했다. 그는 또 진(晋)의 공실(公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으며, 그리고 또 당시 진(晋) 공실(公室)의 위세를 위협하기 시작했던 환(桓)과 장(莊) 족(族-桓叔과 莊伯에서 떨어져 나온 分家)을 모략(謀略)으로 제거한 공적으로, 헌공(獻公)으로부터 대사공(大司空)에 임해져서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또 그 대사공(大司空)이란 벼슬은 전무후무하게 오직 그만 누렸던 직책으로, 사실상의 재상(宰相) 직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법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국법(國法)을 정했으며, 그것은 또 나중에 그의 손자였던 사회(士會)가 정했던 <범무자(范武子)의 법>과 함께 오래 존중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소위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하자 그는 <하나의 나라에 왕이 3명이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도대체 누구를 모셔야 좋단 말인가?>라고 말을 하고는 사직(辭職-隱退)했다고 한다.

 ☆ 여희(驪姬-?부터 기원전 651년)는 진(晋) 헌공(獻公)의 총희(寵姬)였고, 이민족 여융(驪戎)의 딸이었다고 한다. 그러자 헌공(獻公)이 첫눈에 반해서 그녀와 그녀의 여동생을 함께 후궁으로 들인 후, 총애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에 진(晋)으로 갔을 때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자주 탄식도 했다지만, 그러나 그 후에 헌공(獻公)의 총애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궁중 사치에 길들여지자 이윽고 그랬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헌공(獻公)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던 아들 해제(奚齊)를 태자에 세우려고 헌공(獻公)을 조종했으며, 그 결과로 그녀 외의 여성과의 사이에서 났던 헌공(獻公)의 자식들, 신생(申生) 등을 책략을 써서 차례로 모두 말살시켜 버렸다. 그러자 또 그때, 나중에 진(晋)을 잇게 되는 중이(重耳)와 이오(夷吾) 형제도 그 때문에 도망을 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여희(驪姬)의 난>이었고, 그러자 또 진(晋)에서는 정치적인 혼란과 함께 국력이 한때 현저히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헌공(獻公)이 죽고 1개월 후, 헌공(獻公)의 부하였던 이극(里克)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러자 그때 여희(驪姬)와 해제(奚齊) 그리고 여희의 여동생 등, 일족이 모두 참살되었다.

 아무튼, 기원전 651년에 인접국이었던 진(晋)의 헌공(獻公)이 사망하자, 그 후계를 놓고 진(晋) 내에서는 일대(一大) 혼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또 진(晋)의 공자(公子)였던 이오(夷吾)는 진공(晋公)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목공(穆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또 목공(穆公)은 그때 실제로는 중이(重耳)를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그러나 계산상으로 봤을 때 당시 총명함으로 이름이 높았던 이오(夷吾)의 형 중이(重耳)보다는, 그 이오(夷吾)를 진공(晋公)에 세우는 것이 자신에게는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오(夷吾)를 지원했고, 그러자 이오(夷吾)는 보답으로 목공(穆公)에게 영토의 할양(割讓) 약속했고, 이어서 진(晋)으로 들어가서 혜공(惠公)이 되었다. 하지만 이오(夷吾)는 왕좌에 앉게 되자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폭정(暴政)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647년, 진(晋)에 흉년이 들었고, 그러자 또 모든 식료(食料)가 부족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이오(夷吾)는 목공(穆公)에게 구원을 요청했는데, 그러자 진(秦)의 신하들은 이오(夷吾)의 배은망덕을 이유로 해서 그것을 거절하라고 목공(穆公)에게 간언했다. 하지만 목공(穆公)은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아주 엄청난 양의 식료품을 진(晋)에 수출(輸出)했다고 한다. <혜공(惠公)의 짓거리는 밉지만, 그러나 그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런데 또 그 다음 해에, 이번에는 진(秦)이 흉년을 맞았다. 그러자 목공(穆公)은 진(晋)에 요청을 해서 물품의 지원을 부탁했다. 하지만 또 혜공(惠公)은 그때 진(秦)에 아무 것도 보내지 않았다. 거기다 오히려 그 때문에 진(秦)이 약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진(秦)을 공격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목공(穆公)도 대노(大怒)했다. 그리하여 그 다음해, 두 나라의 군대는 결국 한원(韓原)에서 격돌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결국 진(秦)이 대승했으며, 그러자 혜공(惠公)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또 목공(穆公)은 그 혜공(惠公)을 제단(祭壇)의 산 제물로 바치려고 했는데, 그러나 또 그 혜공(惠公)의 누나였던 그의 부인이 반대를 해서 그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목공(穆公)은 혜공(惠公)의 아들이었던 태자(太子) 어(圉)를 인질로 삼고는 혜공(惠公)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또 기원전 638년에 그 혜공(惠公)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어(圉)는 진(秦)에서 도망쳐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또 그 혜공(惠公)에게 몇 번이나 배신을 당했던 목공(穆公)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당시 초(楚)에 머물러 있던 중이(重耳)를 불러들이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자 그 중이(重耳)는 그 후에 문공(文公)이 되었다. 기원전 624년, 문공(文公)이 죽자 진(晋)을 쳐서 대파(大破)했으며, 이어서 서융(西戎)도 쳐서 진(秦)이 서융의 패자임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621년에 그는 사망했으며, 그때에 신하 177명이 함께 순사(殉死)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진(秦)의 국력은 현저히 약해졌으며, 그리하여 또 일순간 진(秦)은 국제정치의 표면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목공 끝)

 아무튼, 상기(上記)대로, 목공(穆公)은 문공(文公) 사후, 다시 진(晋)을 쳐서 대파(大破)했고, 그 영토를 빼앗았으며, 그 업적으로 목공(穆公)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서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가 죽었을 때 순사(殉死)했던 신하들로 인해서 국력은 급격하게 약해졌고, 이어서 영토도 축소되었다. 그리하여 그 춘추 중기 이후부터는 북쪽으로는 진(晋)과 초(楚)가 자리를 잡았고, 서쪽으로는 진(秦) 그리고 동쪽으로는 제(齊)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변칙적인 4강(强)시대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秦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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