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BC187년 / 呂后의 臨朝(~180)


 장이(張耳-?부터 기원전 202년)는, 진(秦) 말에서 전한(前漢) 초기까지 활약했던 무장이었고, 조왕(趙王)이었다. 그리고 출신은 위(魏)의 대량(大梁)이었으며, 청년시대에는 위(魏)의 공자(公子)였던 신능군(信陵君)의 식객(食客)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 신능군(信陵君)이 정치에서 떠나는 등, 여러 가지 사정이 생겼기 때문에, 외항(外黃)이란 곳으로 이주(移住)했다. 그리고 그 후, 현지(現地)의 부호(富豪)였던 사람의 딸과 결혼을 했으며, 그 후에는 또 그 처가(妻家)의 도움을 받아서 그곳의 현령(縣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 장남(이름은 不詳)과 차남이었던 장오(張敖)가 태어났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그 후, 동향(同鄕)의 진여(陳余)가 장이(張耳) 밑에서 벼슬했을 때, 그 두 사람의 사이가 마치 부자(父子)와도 같았다고 하고, 그래서 또 그들은 일찍이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가 그랬던 것처럼 그 두 사람도 <서로의 목을 잘라도 좋다>라고 하는 <문경(刎頸)의 교(交際)>를 맺었다. 그리고 또 참고로, 바로 그 시기에 서민(庶民)이었던 유방(劉邦)이 장이(張耳)의 식객을 지원했었고, 그러자 장이(張耳)가 그것을 수락했었기 때문에 유방(劉邦)은 잠시나마 장이(張耳)의 그늘에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25년에 위(魏)가 진(秦)에 멸망했고, 그러자 장이(張耳)와 진여(陳余)는 이름을 바꾸고 진(陳)에 있던 어느 동네로 가서 그곳의 수위(守衛-문지기)가 되었다. 그것은 또 그때, 이미 그 두 사람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또 진(秦)에서 그들 두 사람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 그때, 진여(陳余)가 그곳의 어느 말단관리와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에 몰매를 맞는 일이 생겼는데, 그러자 장이(張耳)가 진여(陳余)에게 이렇게 말을 하면서 위로했다. <장래를 위해서라도 쓸데없는 일로 목숨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 후, 진승(陳勝)이 봉기(蜂起-기원전 209년)하자 두 사람은 그 즉시 그곳으로 달려가서 봉기에 참가했다. 그러자 진승(陳勝)은 그 두 사람을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또 그 무렵, 진승(陳勝)이 왕이 되어야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장이(張耳) 등은 <진(秦)에 의해서 멸망했던 각국의 왕족을 옹립하지 않고 진승(陳勝) 스스로 왕이 된다면 사람들은 진승(陳勝)에게 사심(私心)이 있어서 봉기를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반대했지만, 그러나 진승(陳勝)은 그 말들을 묵살하고 장초(張楚-진승이 세웠던 나라 이름)의 왕이 되었다. 그러자 진여(陳余)는 당시 진(秦)의 지배하에 있었던 조(趙)를 공략하자고 진승(陳勝)에게 상신(上申)했고, 그러자 진승(陳勝)도 그 의견을 받아들여서 무신(武臣)이란 자를 총대장으로 삼고 그 아래에 소소(邵騷)란 자를 부장(部將)으로 그리고 장이(張耳)와 진여(陳余)는 그들의 보좌에 임명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趙)를 토벌하기 위해서 출정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도중에 범양(范陽-현재의 北京)을 공략하려고 했을 때, 그곳의 변사(辯士)였던 괴통(蒯通)이란 자가 진영(陣營)으로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이곳의 군수(郡守)는 나와 오랜 지기(知己)입니다. 그러니 내가 그를 설득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자 무신(武臣) 등은 그의 말을 믿고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겼다. 그러자 그 설득은 성공했고, 그 후에 조(趙)를 완전히 제압했다.

 그러자 그 후, 장이(張耳)와 진여(陳余) 등이 무신(武臣)에게 다음과 같은 상신(上申)을 내놓았다. <진승(陳勝) 왕은 의심이 많기 때문에 우리가 이대로 돌아간다면 그 공적은 필시 누군가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고, 그러면 장군(武臣)의 신변도 보장받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이곳(趙)의 왕이 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무신(武臣)도 그 의견을 받아들여서 그러한 뜻을 진승(陳勝)에게 주상(奏上)했다. 그러자 진승(陳勝)은 격노(激怒)했지만, 그러나 주위의 만류가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자 그 후에 장이(張耳)는 우승(右丞)상(相)이 되었으며, 소소(邵騷)는 좌승상 그리고 진여(陳余)는 상장군(上將軍)에 봉해졌다.

 그리고 그 후, 무신(武臣)은 조왕(趙王)이 되었지만, 그러나 진승(陳勝)은 그에게 진(秦)을 공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무신(武臣)은 진승(陳勝)이 마지못해서 자신을 왕위에 올렸다고 생각하고는, 그래서 자신의 지반(地盤)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부하 장군들을 대(代)와 연(燕) 등, 각지로 출병시켰을 뿐만 아니라, 영지를 더욱 넓히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또 그러던 중에 원래 진(秦)의 장군이었던 이량(李良)이 진군(秦軍)에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증병(增兵)을 무신(武臣)에게 요청하기 위해서 조(趙)의 수도 한단(邯鄲)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또 그 도중에 그들은 무신(武臣)의 누나가 지나가던 행렬(行列)을 만났고, 그러자 그들은 예를 갖추기 위해서 부복(俯伏)했다. 하지만 또 그때, 잔뜩 취해있었던 그녀는 그가 이량(李良)인 줄을 모르고 그에게 실례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에 격노했던 이량(李良)과 그의 부하들은 그 무신(武臣) 누나와 행렬을 그 즉시 도륙한 후, 그대로 군(軍)을 몰아서 한단(邯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무신(武臣)과 좌승상 소소(邵騷)를 토벌해 버렸다.

 하지만 그때, 장이(張耳)와 진여(陳余)는 간일발의 차이로 그곳을 탈출해서 과거, 조(趙)의 공자(公子)였던 조헐(趙歇)을 왕에 옹립하고는 현인(賢人)들의 권유를 받아서 신도(信都)란 곳을 도읍으로 정했다. 그러자 그 사실을 전해들었던 이량(李良)이 곧 신도(信都)를 공격했지만, 그러나 진여(陳余)에게 패해서 진(秦)의 장한(章邯)에게로 도주했다. 그러자 또 장한(章邯)은 그 즉시 왕이(王離)를 신도(信都)로 보냈으며, 그 자신은 한단(邯鄲)의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이주시켰고, 그 성곽을 파괴했다. 그러자 또 그 소식을 전해들었던 장이(張耳)는 조왕(趙王)과 함게 거록(鉅鹿)에서 농성에 들어갔으며, 진여(陳余)에게는 상산(常山)으로 가서 병사들을 모집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장한(章邯)에 의해서 양도(糧道)를 빼앗겼던 조군(趙軍)은 그때부터 굶주리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장이(張耳)는 진여(陳余)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자 결국 진여(陳余)가 원군을 데리고 왔지만, 그러나 그 원군들은 또 진(秦)의 대군을 보고는 기가 죽어서 추이를 관망만 하고있었고, 그것은 또 함께 원군으로 왔던 장이(張耳)의 차남 장오(張敖)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또 그런 모습에 격노했던 장이(張耳)는 진여(陳余)의 진영에 자신의 친족이었던 장염(張黶)과 진여(陳余)의 친족이었던 진택(陳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들려서 사자로 보냈다. <우리는 일찍이 문경(刎頸)의 교(交)를 나누었던 사이인데, 어째서 수만(數萬)의 군사를 거느리고서도 원군을 보내주지 않는가?! 싸우는 것도 함께 싸우고, 죽는 것도 함께 죽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진여(陳余)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도무지 움직이려 들려 하지 않았다. <여기서 함께 죽는다면 진(秦)만 이롭게 할뿐입니다! 그러니 조(趙)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또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이 진여(陳余)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매달렸다. <그렇다면 우리들을 여기서 함께 죽여서 조왕(趙王)과 장이(張耳)에게 신용(信用)을 세울 수 있도록 해주시오! 그 뒤의 일이야 우리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그러자 하는 수가 없었던 진여(陳余)가 그 두 사람에게 5천의 군사를 내주었다. 그러자 또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은 그 군사들을 이끌고 나갔지만, 그러나 진(秦)의 대군을 상대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병력이었고, 그래서 또 그들은 결국 전멸했다. 그러자 또 그런 상황을 지켜봤던 원군들은 더욱 움직이려들지 않았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즉 바로 낙성(落城) 직전에 항우(項羽)가 원군으로 달려왔고, 이어서 진군(秦軍)은 패퇴했다.

 그 후, 진여(陳余)가 거록(鉅鹿)에 입성(入城)했을 때, 장이(張耳)가 진여(陳余)에게 조왕(趙王)을 도우지 않았던 일을 책(責)하면서 장염(張黶)과 진택(陳澤)의 행방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진여(陳余)는 앞에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고했다. 하지만 장이(張耳)는 진여(陳余)의 말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진여(陳余)가 그들을 죽였다고 생각하고는 진여(陳余)를 추궁했다. 그러자 또 진여(陳余)가 격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그렇게까지 저를 믿지 못하신다면 사직(辭職)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군의 인수(印綬)를 내놓고 바로 화장실로 가버렸다. 그러자 또 장이(張耳)는 처음에는 그것을 거둬들일 마음이 없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식객(食客) 중 한명이 그에게 조언을 했고, 그러자 장이(張耳)는 그 조언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장군을 겸하려고 했다. 그런데 또 그때, 마침 화장실에 갔던 진여(陳余)가 돌아왔는데, 그런 사정을 알고는 장이(張耳)를 원망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수백(數百)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황하(黃河) 근처로 가서 어부(漁夫)가 되었다.

 그 후, 진여(陳余)의 군세(軍勢)를 자신의 지배하에 넣었던 장이(張耳)는 조왕(趙王) 헐(歇)을 신도(信都)에 남겨두고 제후들과 함께 함양(咸陽)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그 후였던 진(秦) 멸망 후, 항우(項羽)는 제후들을 대상으로 대규모적인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행했는데, 그러자 장이(張耳)의 명성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던 항우(項羽)는 그를 높이 평가해서 조(趙)를 이분(二分)하고는 그 한곳에 헐(歇)을 대왕(代王)으로, 장이(張耳)를 상산왕(常山王)에 봉했다.

 그러나 그때, 진여(陳余)는 진(秦)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남피(南皮) 부근의 3현(縣)만 그에게 맡겨졌다. 그러자 진여(陳余)는 격노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 처우에 불복했다. <나와 장이(張耳)는 공적이 같은데, 어째서 나만 왕보다 아래인 후(侯)의 직을 주는가?!> 그리고는 당시, 항우(項羽)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제왕(齊王) 전영(田榮)을 찾아가서 군사를 빌렸다. 그리고는 거병해서 장이(張耳)를 공격했고, 그러자 장이(張耳)는 패주했다. 그러자 또 그는 그때 대왕(代王)이 되어 있었던 헐(歇)을 영입해서 다시 조왕(趙王)에 옹립했다.

 그런 한편, 당시 도주를 계속하고 있었던 장이(張耳)는 자신을 왕의 자리에까지 올려주었던 항우(項羽)를 믿고 있었지만,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부하였던 점성술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조언을 들었다. <이제 머지 않아서 한왕(漢王) 유방(劉邦)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우(項羽)보다는 유방(劉邦)에게 의지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러자 장이(張耳)는 옛날부터 잘 알고있었던 유방(劉邦)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조언을 받아들여서 유방(劉邦)이 있던 한중(漢中)으로 달려갔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장이(張耳)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자 그 후, 장이(張耳)는 한(漢)에서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드디어 초한전쟁(楚漢戰爭)이 시작되었고, 그러자 유방(劉邦)은 항우(項羽)를 견제하기 위해서 각국과 동맹을 맺어갔는데, 그런데 조(趙)와 동맹을 맺기 위해서는 그곳의 실력자였던 진여(陳余)의 승낙이 필수가 되었다. 그러자 또 아니나 다를까, 진여(陳余)는 그 동맹의 조건으로 장이(張耳)의 수급(首級)을 요구했다.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기책을 써서 장이(張耳)와 닮은 죄수 한명의 목을 쳐서 그 머리를 진여(陳余)에게로 보냈다. 그러자 진여(陳余)는 그것을 받아보고 그 동맹을 승낙했는데, 그러나 또 그 후였던 기원전 205년 <팽성(彭城)의 싸움> 때 진여(陳余)는 장이(張耳)가 그때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그러자 격노했던 진여(陳余)는 그 동맹을 다시 파기시켜 버렸다.

 그 후,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 대치하면서 한신(韓信)에게 별동대(別動隊)를 주어서 제국(諸國)을 평정한다는 작전을 채용했고, 장이(張耳)를 그 부장(部將)으로 따르게 했으며, 그 결과 위(魏)와 대(代)가 멸해졌다. 그리고 이어서 조(趙) 공략에 나섰던 한군(漢軍)들은 이윽고 20만의 군세를 이끌고 나왔던 진여(陳余)의 부대와 대치하게 되었다.(井陘의 싸움) 그 결과, 한신(韓信)의 배수진(背水陣)에 의해서 한군(漢軍)이 승리했고, 그러자 진여(陳余)는 그곳에서 전사했으며, 이어서 조왕(趙王) 헐(歇)은 포로로 잡혀서 처형되었다.

 그 후였던 기원전 204년, 한신(韓信)은 진무(鎭撫)를 위해서 장이(張耳)를 조왕(趙王)에 봉하자는 건의를 유방(劉邦)에게 냈고, 그러자 그것은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 2년 후였던 기원전 202년에 장이(張耳)는 사망했으며, 그러자 경왕(景王)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그 후, 차남 장오(張敖)가 그의 뒤를 이었는데, 그런데 그때, 장오(張敖)에게는 이미 처(妻)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사이에서 태어났던 자식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유방(劉邦)의 딸이었던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다시 정실(正室)로 맞아들여야 했으며, 그 사이에 또 장언(張偃)이 태어났기 때문에, 그래서 그 장언(張偃)을 적자(嫡子)로 했다.

 하지만 기원전 198년, 조(趙)의 정위(廷尉-고대중국의 관명 중 하나로, 九卿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시대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함)였던 관고(貫高) 등이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러자 장오(張敖)는 그 벌로 왕위를 박탈당했으며, 선평후(宣平侯)로 강격(降格)되었다.

 그 후였던 기원전 189년, 장오(張敖)도 사망했고, 그러자 적자였던 장언(張偃)이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또 기원전 180년에 여치(呂雉)가 죽자 진평(陳平), 주발(周勃) 등의 원훈(元勳)들과 유방(劉邦)의 손자들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그 결과 여치(呂雉)의 혈족들은 모두 처형당했고, 그러자 또 장언(張偃) 등도 숙청대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장언(張偃)은 노원공주(魯元公主)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작위(爵位)만 박탈하는 것으로 구명(求命)되었다. 하지만 또 그 대신으로, 장언(張偃)의 이모형(異母兄)이었던 장수(張壽)는 학창후<學昌侯-하지만 後漢書의 장포전(張酺傳)에 의하면, 지양후(池陽侯-汝南郡 蔡陽県)에 봉해졌다고 한다>에, 그리고 또 한사람이었던 이모형 장치(張侈)는 신도후(信都侯)에 봉해졌는데, 그들은 모두 장오(張敖)의 선처(先妻)가 생산했던 아들들이었다.

 아무튼, 그 후에 문제(文帝)가 즉위하자 장언(張偃)은 다시 작위를 받았는데, 그것은 남궁후(南宮侯)였다. 그리고 또 그 후, 번영을 누렸던 전한(前漢) 중기에 그 장(張)씨(氏)는 명가<名家-汝南郡 蔡陽県(細陽県)>가 되었으며, 그 후로도 그 장(張)씨(氏)의 번영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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