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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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劉邦)>
전한(前漢)의 초대황제(初代皇帝).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이었으나 반진(反秦)연합에 참가한 후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그로서 한때는 관중(關中)을 지배하에 넣었다. 그러나 그 후 항우(項羽)에 의해서 서방(西方)의 한중(漢中)에 좌천(左遷)되어 한왕(漢王)이 되었다. 하지만 또 그 후에 동진(東進)했고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를 토벌하고 전한(前漢)을 일으켰다. 정확한 <묘호(廟號)·시호(諡號)>는「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이지만, 그러나 통상은 고조(高祖)라고 불린다.
<생애(生涯)>
6. 한초전쟁(漢楚戰爭)
6-3 다시 지다(再敗)
그런데 그 무렵, 한신(韓信)이 제(齊)를 완전히 제압하고는 그 진무(鎭撫-민심을 수습함)를 위해서 자신이 그곳의 가왕(假王=臨時王)이 되겠다고 유방(劉邦)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왔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격노하고는 한신(韓信)을 쳐 없애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때,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나서서 유방(劉邦)을 달래며 이렇게 말을 했다. <만약에 그랬다가 정말로 한신(韓信)이 배신해 버린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어쩔 수 없이 한신(韓信)을 제왕(齊王)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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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신(韓信) 2
중국 진말(秦末)부터 전한(前漢)초기의 무장. 유방(劉邦)의 휘하에서 수많은 싸움에서 승리했으며, 결국 유방(劉邦)의 패권(覇權)을 결정짓게 했던 인물이었다. 장량(張良)·소하(蕭何)와 함께 유방(劉邦)의 삼걸(三傑) 중 1명이며, 세계의 군사사상(軍事史上)으로도 명장(名將)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으로부터 좌승상(左丞相)의 지위를 얻어서 당시, 원래는 한 측(漢側)이었으나 그러나 그때는 이미 한(漢)을 배신하고 초(楚)에 붙었던 위(魏)의 위표(魏豹)를 토벌하라는 명을 받아서 별동군(別働軍)을 이끌고 그 토벌에 나섰다. 그러자 위군(魏軍)은 도하(渡河)지점을 중점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는데, 그러자 또 한신(韓信)은 그 대안(對岸)에다 배들을 늘어놓고 적군을 유인하는 전술(戰術)을 펼침과 동시에 자신은 또 군사들을 이끌고서 강의 상류로 향했다. 그리고는 나무로 만든 통을 이용해서 병사들을 도하(渡河)시켰고, 이어서 위(魏)의 수도였던 안읍(安邑=現 山西省 夏縣 近郊)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위군(魏軍)들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했고, 그 사이에 한신(韓信)은 위표(魏豹)를 포로로 잡았다. 그리하여 위(魏)는 멸했고, 위표(魏豹)는 목숨은 구걸 받았지만, 그러나 신분은 서민(庶民)으로 강등되었다. 그 후, 한신(韓信)은 다시 북쪽으로 진군을 해서 대(代=山西省 北部)를 점령했고, 거기서 다시 조(趙=河北省 南部)로 진군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곧바로 배수진(背水陣)을 쳤는데, 그러나 그것은 당시의 병법에서는 전혀 쓰이지 않았던 전술로, 자신에게 불리한 그런 전술을 일부러 쓰는 일은 결코 없었다고 했으므로, 그래서 또 그것은 가히, 그만의 아주 독창적인 전술이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북 성>
아무튼 그런 다음, 한신(韓信)은 20만이란 조(趙)의 대군(大軍)을 맞아서 협애(狹隘)한 지형과 목숨을 건 병사들의 사투(死鬪)에 힘입어서 방어했다. 그리고 또 그 틈을 타서 별동대(別動隊)로 하여금 성채(城砦)를 점령하게 했고, 그러자 또 낙성(落城)에 조군(趙軍)들이 동요하던 사이 본대(本隊)와 협공해서 진여(陳余)와 조왕(趙王) 조헐(趙歇)을 잡아서 죽였다.<정형(井陘=河北省 井陘縣)의 싸움> 그런 다음, 한신(韓信)은 조(趙)의 장군이었던 이좌차(李左車)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연(燕=河北省部)의 장도(臧筡)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서 항복시켰다. 그리고 기원전 204년, 진무(鎭撫)를 위해서 장이(張耳)를 조왕(趙王)에 봉하도록 유방(劉邦)에게 상신(上申)해서 인정받았다. 그런데 또 그 사이,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의 싸움에서 불리해져서, 그에 한신(韓信)은 몇 번이나 군사를 지원했다. 그러자 마침내 유방(劉邦)은 초(楚)의 포위망을 뚫고 한신(韓信)이 주둔하고 있던 수무현(修武縣=現 河南省 西北)으로 도망쳐 왔다. 그리고는 한신(韓信)의 군 지휘권을 빼앗았으며, 이어서 한신(韓信)에게 제(齊)를 평정할 것을 명했다. 그런데 또 그때, 유방(劉邦)은 한신(韓信)을 제(齊)에 파견한 뒤 갑자기 마음이 변해서 유생(儒生)이었던 력식기(酈食其)에게 시켜서 제(齊)와 화의(和議)할 것을 명했다. 그러자 또 기원전 203년, 한신(韓信)은 제(齊)에 쳐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이미 제(齊)가 항복했다는 말을 듣고 진군을 멈추려고 했다. 그런데 또 그때, 한신(韓信)의 부하였던 변사(辯士) 괴통(蒯通)이란 자가 한신(韓信)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아직 유방(劉邦)에게서 진군의 정지명령도 내려오지 않았으니, 우리는 이대로 제(齊)를 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력식기(酈食其)는 세치 혀만으로 제(齊)를 항복시키려 하는데,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장군의 공적은 없어지게 되고(그때, 韓信은 齊의 城 70여 곳 중 이미 50 곳 이상을 떨어뜨렸던 상태였다), 또한 장군은 일개 유생(儒生)보다도 못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한신(韓信)은 그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제(齊)를 공격했고, 그러자 그 후, 무방비나 다름없었던 제(齊)의 성(城)들은 차례로 한신(韓信)의 손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에 화가 났던 제왕(齊王) 전광(田廣)은 력식기(酈食其)를 삶아서 죽이고는 도주했다. 그 후, 제(齊)는 초(楚)에 구원을 요청했고, 그러자 항우(項羽)는 용차(龍且)에게 20만의 군사를 주어서 파견했다. 그러자 또 용차(龍且)는 지구전(持久戰)을 펼치는 것이 좋겠다는 진언도 받았지만, 그러나 묵살하고는 과거 한신(韓信)이 고부(股夫故事)였다는 것만 생각하고 곧바로 한신(韓信)에게 도전했다.
참고: 고부고사(股夫故事)는 필자(筆者)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임의로 만든 말이며, 그 뜻은 韓信이 과거 다른 남자의 가랑이 아래를 기었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그래서 龍且는 그때 韓信이 股夫, 즉 <가랑이 아래를 기었던 남자>라는 것만 생각하고는 한신(韓信)을 얕잡아봤다는 뜻임
아무튼, 그러자 한신(韓信)도 용차(龍且)가 용맹하기 때문에 바로 결전에 돌입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일부러 제법 넓으면서도 그러나 수심은 얕은 곳을 선택해서 결전에 임했다. 그리고 또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그 결전 전야에 미리 유수(濰水) 상류에다 흙 부대를 쌓아서 둑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수심을 더욱 얕게 한 다음 결전에 나섰다. 그리고 당일, 한신(韓信)은 용차(龍且)와 싸우다가 힘이 달려서 도주하는 척하면서 용차(龍且) 군을 유인했다. 그러자 용차(龍且) 군은 그 기세를 몰아서 한신(韓信) 군을 추격했다. 그러자 또 한신(韓信)은 적당한 때에 둑을 무너뜨려서 용차(龍且)가 이끌던 20만의 대군을 대부분 수몰시켰다. 그리고 그 후, 용차(龍且)는 포로가 되어서 참형에 처해졌다. 그렇게 해서 제(齊)를 평정했던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에게 진무(鎭撫)를 위해서 제(齊)의 가왕(假王)이 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또 이미 기술한대로, 그 때문에 유방(劉邦)은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러나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의 진언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것을 허락했다. <가왕(假王)이 아니라, 진왕(眞王)이 되라고 하라!> 以下 省略 또는 後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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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해서 '한초(漢楚)' 양군(兩軍)은 오랫동안 대치상태를 계속했고, 그러자 또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던 항우(項羽)는 당시 '팽성(彭城) 싸움'에서 포로로 잡아두었던 유태공(劉太公)을 이용해서 유방(劉邦)에게 항복할 것을 강요했지만, 그러나 전술(前述)한대로 오히려 유방(劉邦)은 너스레를 떨면서 항우(項羽)의 협박을 무시했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유방(劉邦)에게 일대일(一對一) 대결을 원했지만, 그러나 그때도 유방(劉邦)은 웃기만 하고 응하지를 않았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자신의 군사 중에서 노(弩=쇠뇌=쇠로 만든 발사장치가 달린 활. 여러 개의 화살을 연달아 쏘게 되어 있는 것으로, 주로 낙랑의 무덤에서 나오고 있다고 한다. 같은 말은 石弓 등)를 잘 쓰는 군사를 골라서 유방(劉邦)을 저격하게 했다. 그래서 그때 유방(劉邦)은 그 중 한 개를 가슴에 맞고 큰 부상을 당했는데, 그러자 또 유방(劉邦)은 그 사실을 자군(自軍)이 알게 되면 큰 동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얼른 순간적으로 자신의 다리를 손으로 문지르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바보 같은 놈! 그래봤자 나의 손가락만 맞췄을 뿐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유방(劉邦)은 병상(病床)에 누워야만 했는데, 하지만 또 그때, 장량(張良)의 진언을 받고 유방(劉邦)은 무리(無理)하게 사열(査閱)을 해서 병사들의 동요를 막았다.(以上, 廣武山의 싸움) 그런 한편, 초군(楚軍)은 팽월(彭越)의 후방교란으로 인해서 식량이 거의 바닥나 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는 양군(兩軍)도 지칠 대로 지쳐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은 나라를 반으로 나누자는 강화(講和)에 합의했고, 그 결과로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雉)도 '유방(劉邦)'에게로 돌아갔다.
6-4 천하통일(天下統一)
그렇게 해서 항우(項羽)는 동쪽으로 물러났고, 그러자 또 유방(劉邦)도 서쪽으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그런데 또 그때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나서서 유방(劉邦)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퇴각하고 있던 항우(項羽)를 공격하라고 진언했다. <만약, 여기서 양군(兩軍)이 물러나버린다면, 분명 초(楚)는 다시 힘을 키워서 조만간에 한(漢)을 치러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한(漢)으로서는 초군(楚軍)을 도저히 상대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그것을 받아들였고, 이어서 항우(項羽) 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그리고는 또 그와 동시에 이미 전술(前述)한대로 유방(劉邦)은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러나 그 두 사람 모두 그 요청에 불응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유방(劉邦)은 장량(張良)의 진언을 받아들였고(前述), 그러자 또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 급히 달려와서 항우(項羽)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또 해하(垓下)까지 몰리게 되었던 항우(項羽)는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그 때문에 한군(漢軍)은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 희생은 너무도 컸던 것이어서, 그에 장량(張良)과 한신(韓信)은 더 이상의 무리한 공격은 삼가고 그때부터는 그들을 포위하면서 병량(兵糧)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러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했던 초군(楚軍)은 드디어 붕괴되었다. 그러자 또 항우(項羽)는 그때까지 남아 있던 소수(小數)의 병사들만 데리고서 포위망을 돌파해보려 했지만, 하지만 한(漢)의 대군(大軍)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자결했다.(以上, 垓下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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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우(項羽) 3
그 후, 한신(韓信)의 공격을 받았던 제(齊)를 구원하기 위해서 용차(龍且)에게 20만이란 대군을 주어서 보냈지만, 그러나 그 용차(龍且)도 한신(韓信)의 수계(水計)에 넘어가서 무참하게 괴멸되었다. 그러자 또 그때부터는 한(漢)에서 제(齊)에 이르는 초(楚)의 포위망이 점점 더 완성되어갔고, 나중에는 유방(劉邦)과 한신(韓信)의 힘이 초(楚)를 웃돌게 되었다. 그러자 또 기원전 203년, 급기야 항우(項羽)는 유태공(劉太公)과 여치(呂雉)를 반환하는 것으로 유방(劉邦)과 일단 화의를 하고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화의는 금방 깨어졌고, 항우(項羽)는 유방(劉邦) 군에게 배후를 급습 당했다. 그러자 긴 전투로 지쳐있던 초군(楚軍)은 패주했다. 그러자 또 한군(漢軍)은 한신(韓信)의 병력 30만을 시작으로 해서, 제후 연합군들의 병력까지 합세해서 초군(楚軍)의 뒤를 쫓았고, 그러자 당시 10만 남짓했던 초군(楚軍)은 해하(垓下)까지 도주했다.(以下, 垓下의 싸움 참조)
<垓下의 싸움>
1. 경과(經過)
기원전 203년, 광무산(廣武山)에서 장기간 대치 중이었던 초한 양군(楚漢兩軍)은 당시, 초군(楚軍)은 식량부족으로 그리고 한군(漢軍)은 유방(劉邦)의 부상과 유방(劉邦)의 부친 유태공(劉太公)과 아내 여치(呂雉)가 포로로 잡혀 있었다는 것 등으로 해서 서로가 휴전을 바라게 되었다. 그러자 유방(劉邦)은 변사(辯士) 후공(侯公)을 초군(楚軍)에 사자(使者)로 보내서 천하(天下)를 양분(兩分)하자는 맹약을 맺게 했다. 그러자 초군(楚軍)은 곧 본거지였던 팽성(彭城)에로의 귀환을 시작했지만, 그러나 그때 유방(劉邦)은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맹약을 먼저 깨고 항우(項羽)의 뒤를 추격했다. 그리고는 고능(固陵=現 河南省 淮陽縣의 西北)이란 곳까지 가서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에게 군사를 인솔해서 초군(楚軍) 토벌에 합류하라고 지시했고, 이어서 자신은 양무(陽武=現 河南省 太康縣)로 향했는데, 그러나 그 두 사람은 유방(劉邦)이 은상(恩賞)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를 않았으므로 아예 나타나지를 않았다. 그런 한편, 유방(劉邦)의 배신을 알아차렸던 항우(項羽)는 한군(漢軍)에 반격을 가했고, 그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던 한군(漢軍)은 성(城) 안으로 들어가서 참호(塹壕)를 깊게 파고는 방비에 들어갔다. 그러자 그때서야 유방(劉邦)은 장량(張良)의 진언을 받아들여서 한신(韓信)에게는 진(陣)에서부터 동쪽 바다에 이르는 전 영토를 하사하고, 그리고 팽월(彭越)에게는 수양(睢陽)에서 북(北)의 곡성(穀城)에 이르는 토지를 주며, 그에 더해서 양왕(梁王=魏王)에 봉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자 그 두 사람은 지체 없이 달려와서 유방(劉邦) 군에 합류했고, 그리고는 또 그 뒤를 이어서 유가(劉賈)의 군대도 팽월(彭越) 군에 합류했으며, 그리고 또 초군(楚軍)을 배신했던 주은(周殷)까지도 합류를 해서 드디어 한군(漢軍)은 대군이 되었다. 그 후, 한신(韓信)은 유방(劉邦)을 호위하기 위한 병사 30만을 후방에 남겨두고 자신은 다시 30만의 병사들을 인솔해서 당시, 약 10만 정도였던 초군(楚軍)과 대치했다.(하지만 이 부분의 병사의 數에 대해서는 과장된 것이란 견해가 있다) 그리고 또 이어서 한신(韓信)은 전위(前衛)부대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 전위(前衛)는 순수한 의미로 전방의 호위(護衛)를 뜻하는 말이며, 그러나 계급투쟁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선두에 서서 지도하는 집단이나 부대를 의미함. 그리고 이 말은 <레닌>에 의해서 마르크스주의 정당의 조직 원천이 되었다고 함. 같은 말은 전위대.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전위(前衛)부대는 후퇴했고, 그러자 초군(楚軍)은 그 전위(前衛)부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신(韓信)의 계략이었고, 그렇게 해서 추격해왔던 초군(楚軍)은 곧 한군(漢軍)의 엄청났던 병력에 완전히 포위당하고 말았다.
2. 사면초가(四面楚歌)
그렇게 해서 패배했던 초군(楚軍)은 스스로 방루(防壘=要塞=小城)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가버렸다. 그러자 또 한군(漢軍)은 그것을 겹겹이 포위했고, 이어서 빗장을 걸어두고 도무지 나오려고 하지 않던 초군(楚軍)을 와해(瓦解), 유인해내기 위해서 초(楚)의 음악을 밤마다 울렸다. 그러자 지칠 대로 지쳐있던 초군(楚軍)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리고 또 그 노래를 들었던 항우(項羽)도 깜짝 놀라면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아! 한군(漢軍)은 이미 초(楚)를 점령한 것인가? 밖의 적들에게 붙들린 초인(楚人)들이 어찌 저리도 많다는 말인가?> 그리고 위 고사(故事)로부터 주위를 적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때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던 항우(項羽)는 그날 밤 이별의 연석을 마련했다. 그리고 또 그때, 항우(項羽)에게는 우미인(虞美人)이란 애첩이 있었다고 하고, 또한 그가 아끼던 추(騅=烏騅馬)라는 애마(愛馬)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래서 또 항우(項羽)는 그 둘과의 이별을 애통해하면서 다음과 같은 비분(悲憤)의 시(詩)를 읊었다고 한다.(또는 垓下의 노래라고도 함)
☆ 오추마(烏騅馬)는 검은 털에 흰 털이 섞인 말이며, 항우(項羽)가 탔다는 준마.
力拔山兮 氣蓋世
時不利兮 騅不逝
騅不逝兮 可奈何
虞兮虞兮 奈若何
역발산혜 기개세
<힘은 산을 뽑을만하고, 기(氣)는 세상을 다 덮겠는데>
시불리혜 추불서
<때가 도와주지 않으니, 오추마도 더 이상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는구나!>
추불서혜 가내하
<오추마도 움직이지 않으니,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우혜우혜 나약하
<우미인(虞美人)아, 우미인아, 내 너를 어찌할꼬!>
<筆者 譯>
<그리고 3, 4연의 同字 '奈(내)'와 '奈(나)'는 本 筆者가 발음하기 쉽도록 임의로 구성한 것임 >
아무튼, 그러자 또 우미인(虞美人)도 그 답으로 창화(唱和=한사람이 선창을 하면 여러 사람이 따라서 부르는 것)를 했는데, 그러자 항우(項羽)뿐만 아니라 그 옆에 있던 모든 신하들도 다 같이 울어서 그 연석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때 우미인(虞美人)이 창화(唱和)를 했던 노래라고 생각되는 것인데, 원래 본문에는 없는 것이나, 그러나 다른 곳에서 찾아서 독자들에게 소개할 생각으로 올려드리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정확한 원문은 찾지를 못했으므로, 대충 그 내용만 소개함도 아울러 밝힙니다.
그에, 한군(漢軍)이 이미 세상을 다 차지하였는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楚)의 노래뿐이로구나!
아, 장군(項羽)의 기개(氣槪) 이제 다하였으니
이 몸 또한 살아서 무엇하리요!
<인물소개 項羽 4,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