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3)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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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
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
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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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 오기(吳起-?부터 기원전 381년)는 중국 전국시대의 군인으로, 정치가였고, 군사사상가(軍事思想家)였다. 그는 또 손무(孫武), 손빈<孫臏-孫武의 자손으로 알려졌으며, 孫武와 함께 孫子로 불려졌던 인물이었다. 저작에 손빈병법(孫臏兵法)이 있으며, 기회가 되면 다음에 소개함>과 함께 병가(兵家)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가 생전에 행했던 병법(兵法)은 별명으로 <손오(孫吳)의 술(術)>이라고도 불렸으며, 그가 죽은 후에 나왔던 <오자(吳子)>의 원작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들은 오기(吳期)가 있었다.

 참고: 1. 별록(別錄)은 중국 한(漢)나라 때 유향(劉向)이 펴낸 장서(藏書-秘書) 목록 집으로, 조정의 장서목록과 해제집(解題集)을 모아 엮은 것이며, 칠략(七略)의 처음 이름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때 없어져서 오늘날은 일부(20권)만 전한다고 하며, 그리고 또 칠략(七略)은 역시 유향의 별록(別錄)에 입각해서 그의 아들이었던 흠(歆)이 지었던 서적 분류목록이었으며, 집략과 육예략 그리고 제자략, 시부략, 병서략, 술수략, 방기략으로 분류하였던 것이었다. 3만 2000권.

 2. 그리고 그 별록(別錄)에 의하면 <노(魯)의 좌구명(左丘明)이 춘추좌씨전을 작성해서, 그것을 제자였던 증신(曾申-曾子)에게 전했고, 그러자 또 그 증신은 자신의 제자 오기(吳起)에게 그것을 전했으며, 오기(吳起)는 다시 그것을 자신의 아들 오기(吳期)에게 전했고, 오기(吳期)는 제자였던 초(楚)의 탁초(鐸椒)에게 전했으며, 탁초(鐸椒)는 다시 제자였던 조(趙)의 우경(虞卿)에게 전했고, 그 우경(虞卿)은 다시 제자였던 순경(荀卿-荀子/荀況)에게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그는 위(衛)의 좌씨(左氏-현재의 山東省 菏沢市 定陶県) 출신의 사람이었고, 증자(曾子-曾申 또는 曾參. 공자의 제자)에게 배웠다고 했지만,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효자라는 낙인이 찍혀서 파문(破門)당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가 그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일찍이 벼슬을 하기 위해서 각지를 떠돌았는데, 그런데 그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가산(家産)만 탕진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라고 비웃은데 격분해서 고향사람들을 죽인 일로 해서(일설에 의하면, 그때 고향사람 약 30여 명을 죽이고는 曾子에게로 갔다고 함)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두말없이 증자(曾子)의 문하를 떠났던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는 노(魯)의 원공(元公)이었던 가(嘉)를 찾아가서 장군이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는 자신의 아내가 제(齊)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노(魯)의 입장에서 적국(敵國)의 사람이었던 자신의 아내를 미리 죽였던 것으로 해서 가(嘉) 등의 의심을 풀고 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 일은 또 그의 인격에 대한 불신감을 낳게 했고, 그러자 또 노(魯)의 대부(大夫)들은 그를 두고 <오기(吳起)란 자는 장군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노(魯)와 형제의 나라인 위(衛)를 독단으로 침략한 이상한 사람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자 또 그 말을 들었던 원공(元公)은 그를 징계면직(懲戒免職)했고, 그로써 그는 실각(失脚)했다. 그러자 또 그는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다시 위(魏)의 문후(文侯)에게로 도망쳤다.(그러나 그는 그 사이에 齊를 쳐서 魯를 강국으로 만들어놓았다고 함)

 그러자 또 문후(文侯)는 당시 위(魏)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1,2를 다투던 명군(名君)으로, 적극적으로 인재를 등용해서 위(魏)의 국력을 상승시키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오기(吳起)가 위(魏)로 들어왔다고 하자 가신(家臣)이었던 이극(李克)이란 사람에게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이극(李克)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탐욕적이고,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흠이지만, 그러나 군사(軍事)적으로는 명장(名將) 사마양저(司馬穰苴-중국 춘추시대 齊의 장군. 기회가 되면 다음에 소개함)도 그를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문후(文侯)는 그를 등용하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그 후, 오기(吳起)는 군중(軍中)에 있을 때, 병사들과 같은 것을 먹고, 그 병사들과 같은 곳에서 잠을 잤으며, 그 병사들 중에서 상처가 나서 고름이 생긴 병사가 생기자, 그는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빨아냈다. 그런데 또 어느 때, 그가 다른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빨고 있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옆에 있다가 탄식했다. 그러자 그가 물어보자 그 여자가 이렇게 답을 했다. <장군께서는 저 아이 아버지의 고름도 빨아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그 사람은 장군의 행동에 감격해서 목숨을 바쳐서 적과 싸웠고, 그리고는 전장에서 장열하게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장군께서 저 아이의 고름도 빨아내어주고 있으니, 장차 저 아이도 그 사람과 같이 그렇게 장열하게 죽을 것 같아서 이렇게 미리 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여인의 이야기가 시사(示唆)해주는 바와 같이, 당시 병사들은 모두 그의 행동에 감격해서 그를 신복(信服)처럼 따르면서 목숨도 아끼지 않고 싸웠기 때문에, 그래서 그 군대는 압도적으로 강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오기(吳起)는 그런 군사들을 이끌고 진(秦)을 쳤으며, 그리고는 5개의 성을 빼앗았다. 그러자 또 그 공적이 인정되어서 그는 서하(西河)의 태수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로 진(秦)과 한(韓)을 견제하게 되었
다.

 그리고 또 그 후, 문후(文侯)가 죽고 그 아들이었던 무후(武侯)가 즉위하자 전문(田文-孟嘗君과는 同名異人)이란 자와 재상(宰相)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지만, 그가 졌다. 그러자 또 그는 그에 불복(不服)해서 전문(田文)을 찾아갔고, 그리고는 군략(軍略)과 정치력 그리고 제후(諸侯)들에의 위신 등에 대해서 그와 전문(田文) 중 누가 더 뛰어났는가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전문(田文)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 3가지 중에서 내가 당신보다 더 뛰어난 것은 하나도 없소! 하지만 지금의 주군(主君)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의 신망이 약하오! 그러면 이런 상태에서 당신과 나 중에서 누가 재상(宰相)이 되면 더 좋겠소?!> 그러자 오기(吳起)는 자신이 재상(宰相)의 재목이 아님을 알고 그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 전문(田文)이 죽자 문후(文侯)의 사위였던 공숙모(公叔某)란 자가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자는 오기(吳起)를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처(妻)의 동생이었던 무후(武侯)에게 오기(吳起)를 참언했다. 그러자 또 무후(武侯)는 그때부터 오기(吳起)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또 공숙모(公叔某)는 오기(吳起)를 함정에 빠뜨릴 책략까지 획책했으며, 이윽고는 오기(吳起)에게 반역의 누명까지 씌우려고 했기 때문에 오기(吳起)는 다시 초(楚)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또 마침 초(楚)의 도왕(悼王)은 그를 반겨 맞아주었고, 그리고는 그를 재상의 자리에 올려주었다. 그러자 또 그는 법가(法家)적인 사상을 토대로 해서 국정개혁을 실시했으며, 그리고 또 당시, 그 초(楚)에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종족(宗族)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상대적으로 왕권은 약했는데, 그래서 또 오기(吳起)는 법 준수의 철저와 불필요한 관직의 폐지 등, 제(諸) 개혁을 실시하는 것으로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러자 또 그 결과 국고(國庫)는 전보다 풍족하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그것으로 군을 양성하여 부국강병에 힘썼고, 그것으로 또 왕권강화에도 성공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후세에 그 일을 두고 오기(吳起)가 법가(法家)의 원조(元祖)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지만,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아주 오래된 수법으로, 그 전의 관중(管仲)이라거나 또는 태공망(太公望) 같은 사람들도 이미 비슷하게 썼던 수법이었다.

 아무튼, 그러자 또 그로 인해서 힘을 잃게 되었던 귀족들은 점점 더 불만이 강해졌고, 그 결과로 또 그 모든 한(恨)은 당연히 오기(吳起)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오기(吳起) 자신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또 그때까지 자신의 뒤를 밀어주던 도왕(悼王)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당분간은 무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던 기원전 381년에 고령의 도왕(悼王)이 사망했고, 그러자 또 그와 동시에 오기(吳起)를 죽이겠다던 무리들이 궁중으로 난입했다.

 하지만 또 그때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오기(吳起)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었던 그 도왕(悼王)의 시신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폭도들은 그를 향해서 마구잡이로 활을 쏘았고, 그러자 또 그 화살들은 도왕(悼王)의 사체에도 꽂혔다든지, 오기(吳起)의 몸에도 꽂혔다든지 해서 결국 오기(吳起)는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또 잠시 초(楚)에는 정치의 공백기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 후에 도왕(悼王)의 뒤를 이었던 숙왕(肅王)이 왕위에 등극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때 자신의 아버지였던 도왕(悼王)의 몸에도 화살을 쏘았던 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왕의 유체를 건드린 자는 죽을 죄-楚의 법률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과거 伍子胥가 왕의 사체에 채찍을 가했던 일로부터 생겼던 법률이었다>다. 그런 다음, 그는 그때 화살을 쏘았던 자들을 찾아내서 대역(大逆)의 죄로 일족(一族) 전원을 처형했지만, 그러나 오기(吳起)의 죽음으로 인해서 초(楚)의 개혁은 미완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 굴원(屈原-기원전 343년 1월 21일부터 기원전 278년 5월 5일?)은 초(楚)의 정치가였고, 시인이었다. 성(姓)은 미(羋)였고, 씨(氏)는 굴(屈) 그리고 휘(諱)은 평(平) 또는 정칙(正則), 자(字)는 원(原)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시인(詩人)이었으며, 정치가로서는 진(秦)의 장의(張儀)에 의한 책략을 미리 간파하고 회왕(懷王)에게 필사적인 간언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자 초(楚)의 장래에 절망해서 물에 투신해서 자살했다.

 그는 초(楚) 무왕(武王)의 공자(公子) 하(瑕-屈瑕)를 조상으로 했던 공실(公室)계의 종족(宗族-廣義의 왕족) 중 한사람이었고, 굴(屈)씨(氏)는 경(景)씨(氏)・소(昭)씨(氏)와 함께 초(楚)의 왕족 계에서도 최고 명문(名門)의 하나였다.(그것을 3閭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그 가문에 더해서 그는 박문강기(博聞强記-사물을 널리 들어 알고서 그것을 잘 기억함)에다 시문(時文)에도 특히 뛰어났었기 때문에, 그래서 회왕(懷王)은 그를 깊이 신임했고, 그리하여 그는 좌도(左徒)가 되었다.

 
참고: 左徒는 중국의 내정(內政)에서, 최고였던 영윤(令尹)을 보좌했던 좌윤(左尹)과 우윤(右尹) 아래의 직급으로, 그에는 또 좌도(左徒)와 사패(司敗)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좌도(左徒)는 굴원(屈原)과 춘신군(春申君)이 담당했던 적이 있었으며, 그러나 그보다 앞서서 사도(司徒)라는 관직이 있었고, 그래서 또 그 사도(司徒)를 보좌했던 직책이 좌우(左右)사도(司徒)였는데, 그런데 또 어떤 연유로 인해서 전국시대 경에 좌도(左徒)만 남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당시, 초(楚)는 서쪽의 진(秦)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고, 그래서 그 진(秦)과 동맹을 맺어서 편하게 가자는 친진파와, 동쪽의 제(齊)와 동맹을 맺어서 진(秦)에 대항하자는 친제파로 나뉘어져있었다. 그리고 굴원(屈原)은 친제파의 필두였으며, 정치능력도 아주 뛰어났고, 그리고 또 무엇보다 강직한 성품 때문에 그는 동료들로부터 질투(嫉妬)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참언까지 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때부터는 회왕(懷王)조차도 그는 멀리하게 되었으며, 그로서 초(楚)의 정책은 친진파로 기울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굴원(屈原)은 필사적으로 회왕(懷王)에게 간언해서 진(秦)은 신용할 수 없는 나라이므로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곧 회왕(懷王)은 굴원(屈原)의 염려대로 진(秦)의 모략(謀略)가(家)였던 장의(張儀)의 꾐에 빠졌고, 그리하여 초군(楚軍)은 대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굴원(屈原)은 3여(閭)대부(大夫)의 자격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자 또 진(秦)은 회왕(懷王)에게 혼인을 핑계로 진(秦)으로 올 것을 요청했는데, 그러자 또 굴원(屈原)은 앞의 회왕(懷王)이 장의(張儀)의 꾐에 넘어갔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회왕(懷王)을 말렸지만, 그러나 결국 회왕(懷王)은 친진파였던 공자(公子) 자란(子蘭)에게 설득당해서 진(秦)으로 갔고 그곳에서 감금되었다.

 그러자 왕을 잃게 된 초(楚)에서는 경양왕(頃襄王)을 옹립했고, 그 경양왕(頃襄王)은 또 굴원(屈原)을 싫어했던 자란(子蘭)을 영윤(令尹-丞相)에 앉혔기 때문에 굴원(屈原)은 다시 정계로부터 추방되었고, 이어서 강남(江南)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진(秦)이 초(楚)의 수도 영(郢)을 함락했고,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굴원(屈原)은 절망했던 나머지 돌을 안고 멱라강(汨羅江-汨羅水는 中國 湖南省 湘陰縣의 북쪽에 있는 江으로, 서쪽으로 흘러서 湘江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戰國時代에 楚나라 三閭大夫였던 屈原이 周圍의 讒訴로 분함을 못 이겨 그곳에 빠져 죽은 곳으로도 有名하다. 지금은 汨水라고 부른다)에 투신해서 자살했다.

 그 후, 굴원(屈原)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또는 망해(亡骸)를 물고기들이 잘 먹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물고기 밥으로 조릿대 잎(笹葉)에다 쌀밥을 넣어서 강에 던졌다고 전해지며, 그것이 또 종(粽-단옷날 등에 먹는 띠·조릿대 잎에 싸서 찐 찹쌀떡)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전설적인 경정(競艇)경기(競技)인 드라곤보트(dragon boat-龍船)는 <물에 빠진 굴원(屈原)을 구출해내려는 민중들이 앞을 다투어서 배를 냈다>라고 하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굴원(屈原)의 강렬했던 애국의 정(情)으로부터 나왔던 시(詩)들은 초(楚)의 노래집 초사(楚辭)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더욱 대표되었던 것은 <이소(離騷)>라고 알려져서 후세의 애국지사들로부터 애창(愛唱)되었다. 그리고 또 그의 작품 <어부사(漁父辭)>의 모두(冒頭) 굴원기방(屈原旣放-굴원은 이미 쫓겨났다)으로부터 철부지 같은 짓을 굴원(屈原)이라고 말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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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2)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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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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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 영왕(靈王-?부터 기원전 529년. 재위는 기원전 540년부터 기원전 529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제27대 왕으로 이름은 웅위(熊圍), 그러나 후에 웅건(熊虔)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그는 부(父) 제24대 공왕(共王)의 차남이었고, 공왕(共王) 사후 왕위는 장자였던 강왕(康王)이 이어받았으나, 하지만 또 그 강왕(康王)마저 사망하자 강왕(康王)의 아들 겹오(郟敖)가 그 뒤를 이었다. 그래서 웅위(熊圍)는 재상이 되어서 겹오(郟敖)를 보좌하게 되었는데, 하지만 또 기원전 541년에 웅위(熊圍)는 겹오(郟敖)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 후, 그는 주로 세력 확대에 매진했고, 그러면서 제후들과 회맹해서 그들과 함께 오(吳)를 토벌했다. 그 후, 기원전 533년에는 진(陳)을, 그리고 또 기원전 531년에는 채(蔡)를 토벌했으며, 그 후에도 서(徐), 그 다음은 또 오(吳)를 다시 토벌하는 등, 초(楚)의 세력 확대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 연이었던 전쟁들 때문에 백성들의 부담은 가중되었고, 그러자 또 당연한 결론으로 백성들은 서서히 영왕(靈王)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 영왕(靈王)의 동생들이었던 웅비(熊比)와 웅흑굉(熊黑肱-子晳) 그리고 웅기질(熊弃疾)은 반대파를 결성했다. 그리고는 기원전 529년에 영왕(靈王)이 군사를 이끌고 수도 영(郢)을 비웠던 사이에 쿠데타를 결행했다. 그 결과 영왕(靈王)의 아들이었던 태자 웅록(熊祿)이 살해되었고, 그러자 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초군(楚軍)은 한꺼번에 붕괴되었으며, 그러자 또 영왕(靈王)도 혼자서 산속을 헤매다가 사망했다. 그러자 그 후, 그 쿠데타를 주도했던 웅비(熊比)가 왕위를 이었으나, 그러나 또 그에 불만을 가졌던 웅기질(熊弃疾)이 다시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형들을 자살로 내몰고는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평왕(平王)이었다.

 ○ 평왕(平王-?부터 기원전 516년. 재위는 기원전 528년부터 기원전 516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왕이었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기질(弃疾-그러나 즉위 후에는 居로 개명함)이었다. 그리고 공왕(共王)의 5남이었으며, 강왕(康王)과 영왕(靈王) 그리고 왕비(王比)의 아우였다. 그리고 일찍이 공자(公子) 기질(弃疾)은 형이었던 영왕(靈王)의 명을 받아서 진(陳)과 채(蔡)를 멸하고는 그곳에다 진공(陳公)과 채공(蔡公)을 올렸다.

 
참고: 기질(弃疾)은 초왕(楚王)에 즉위한 후, 최후의 진공(陳公)이었던 애공(哀公)의 손자 혜공(惠公)과 최후의 채공(蔡公)이었던 영후(靈侯)의 아들 평후(平侯)를 각각 국군(國君)으로 옹립해서 양국을
부흥(復興)시켰다.

 그리고 또 제(齊)에서 악명(惡名)을 떨쳤고, 나중에 오(吳)로 망명했던 경봉(慶封)을 공격해서 처형했던 등, 영왕(靈王)의 수족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 나중은 전술(前述)대로였으며, 그 결과 태자는 살해되었고, 웅비(熊比)가 왕위에 올랐으며, 그러자 또 기질(弃疾)은 웅비(熊比)에 의해서 사마(司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직후였던 5월 18일에 기질(弃疾)은 <왕(靈王)이 귀국해서 신왕(新王)을 처형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시내에 흘렸고, 그것으로 왕비(王比)와 영윤(令尹)이었던 자석(子晳)을 자살로 내몰았으며, 그 다음날이었던 5월 19일에 스스로 초왕(楚王)에 즉위했다.(한편, 靈王도 같은 날 자살함)
그렇게 해서 왕이 되었던 기질(弃疾) 즉, 평왕(平王)은 기원전 523년에 태자(太子)였던 건(建)의 비(妃)를 진(秦)으로부터 맞이하기 위해서 소부(少傅)였던 비무기(費無忌)를 진(秦)으로 보냈다.

 참고: 소부(少傅)는 태자의 훈도(訓導)를 맡았던 직명이며, 그 위의 직으로 태부(太傅)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소부(少傅)는 태자의 부(富驕)교육을 맡았음.

 그런데 그 비무기(費無忌)는 진(秦)의 공녀(公女-公主)가 아주 미인이란 것을 알게 되자 평왕(平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그녀의 미색이 너무도 아름다우니 그녀는 차라리 왕께서 취하시고, 태자에게는 다른 여자를 주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러자 평왕(平王)은 그 뜻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녀는 결국 태자의 비(妃)가 되지 못하고 평왕(平王)의 측실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또 그 후, 비무기(費無忌)는 평왕(平王)으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비무기(費無忌)는 그 일로 해서 자신이 태자(太子)에게 미움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평왕(平王)에게 오히려 태자를 참언(讒言)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평왕(平王)은 비무기(費無忌)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는 태자를 국경의 경비 명목으로 성부(城父)란 곳으로 멀리 보내버렸다. 하지만 비무기(費無忌)는 그 후에도 태자를 모함(謀陷)했고, 그때의 이유는 또 태자가 자신의 비(妃)가 될 사람을 아버지에 빼앗긴 것에 한을 품고는 모반을 기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또 그때, 평왕(平王)은 태부(太傅)였던 오사(伍奢)도 태자 감독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잡아들였고, 거기에다 오사(伍奢)의 아들이었던 오상(伍尙)과 <오자서(伍子胥)>까지 잡아들여서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또 <오자서(伍子胥)>는 그에 응하지 않고 오(吳)로 도망을 쳐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오사(伍奢)와 오상(伍尙)만이 처형되었다. 그러자 또 그것이 <오자서(伍子胥)>로 하여금 복수심을 품게 만들었고, 그 후에 평왕(平王)도 점점 더 신망(信望)을 잃어갔으며, 오(吳)의 침공도 받게 되자 국력 또한 쇠약해져갔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516년 6월에 평왕(平王)은 결국 병몰(病沒)했으며, 그러자 또 그 후에 오(吳)가 초(楚)의 수도 영(郢)을 점령했을 때, 오자서(伍子胥)는 그 평왕(平王)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의 유체를 꺼낸 후에 300번도 더 넘게 채찍으로 때렸다고 한다.

 ⊙ 비무기(費無忌-?부터 기원전 515년)는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신하로 평왕(平王)을 모셨으며, 간신(奸臣)으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최초에 평왕(平王)의 태자 건(建)의 소부(少傅)를 맡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평왕(平王)의 내용과 같으며, 그러자 또 태자 건(建)은 사전에 평왕(平王)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송(宋)으로 망명했다. 그러자 또 비무기(費無忌)는 오(伍) 씨(氏) 일가(一家)들이 자신에게 보복할 것을 두려워해서 참언(讒言)으로 그 오(伍) 씨(氏)들마저 모함했으며, 그 결과로 오사(伍奢)와 오상(伍尙)이 처형되었다. 그 후, 비무기(費無忌)는 평왕(平王)의 최측근으로 위세를 떨쳤으며, 그런 권력으로 자신의 정적(政敵)들을 차례로 자살로 몰아갔다거나, 극완(郤宛) 등을 살해했다. 그러자 그 후, 초(楚)는 점점 더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 들어갔고, 그러자 또 주변국에서 그 초(楚)를 노리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오자서(伍子胥)가 도망을 갔던 오(吳)가 침략을 해왔기 때문에, 초(楚)의 백성들은 모두 그 비무기(費無忌)를 원망했다. 그 후, 기원전 516년에 평왕(平王)이 죽자 아직 어렸던 소왕(昭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백성들은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비무기(費無忌)를 원망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그러자 또 그 다음해 영윤(令尹)이었던 자상(子常)이 백성들을 달랜다는 의미로 그 비무기(費無忌)를 처형하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했다.

 ⊙ 오사(伍奢-?부터 기원전 522년)는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신하였고, 오자서(伍子胥)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장왕(莊王)을 모셨던 오거(伍擧)의 아들이었고, 초(楚)의 건계(乾溪-현재의 安徽省 亳州市 利辛県) 출신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초(楚) 평왕(平王)의 태자를 가르치는 태부(太傅)를 맡았으며, 그 오(伍) 씨(氏) 일족(一族)은 장왕(莊王)의 시대부터 초(楚)의 녹을 먹었던 명족(名族)으로 영향력도 아주 강했다. 그런데 그는 평소 비무기(費無忌)와 사이가 아주 나빴으며, 그래서 비무기(費無忌)가 참언(讒言)을 해서 그는 평왕(平王)에게 붙들려갔다. 그러자 그는 평왕(平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태자가 모반을 꾀했다는 것은 뿌리도 이빨도 없는 것인데, 어째서 아무것도 아닌 자의 참언(讒言)을 믿고 태자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하지만 평왕(平王)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 그는 투옥되었다. 거기다 또 평왕(平王)과 비무기(費無忌)는 그 오사(伍奢)의 두 아들까지도 처리할 목적으로 그 두 아들에게 <너희들이 오면 너희들의 아버지는 풀려날 것이다>라고 거짓말을 전했는데, 그러자 또 오사(伍奢)가 그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 <상(伍尙)은 효자이기 때문에 나 때문에라도 올 것이지만, 그러나 자서(伍子胥)는 지모(智謀)가 있기 때문에 와봐야 죽을 것을 뻔히 알고 있을 것이므로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오. 그러므로 죄(罪)는 나 혼자만 받게 해주시오.> 하지만 평왕(平王)은 그 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는 이미 전술(前述)했던 대로이다. 그러자 또 오사(伍奢)는 죽기 전에 오자서(伍子胥)가 도망을 갔던 것을 두고 이렇게 단언(斷言)했다고 한다. <그 아이는 필시 이 초(楚)에 화(禍)가 될 것이다>

 
○ 오자서(伍子胥-?부터 기원전 484년)는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었다. 그리고 휘(諱)는 원(員)이었고, 자(字)은 자서(子胥)였다. 그는 또 오(吳)에서 벼슬을 했으며, 그리하여 그 오(吳)의 약진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오왕(吳王)에게 소외당했으며, 최후에는 주살(誅殺)되었다.

 오자서(伍子胥)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당시 직언청렴(直言淸廉)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며, 오자서(伍子胥)는 9척(尺-약 2미터 정도)이 넘는 신장에다 성격도 아주 혈기왕성했던 의기(意氣)로운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앞서 기술했던 대로 태자였던 건(建)의 모반사건에 휘말리면서 그 오(伍) 씨(氏)들은 수난을 당했고,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복수를 맹세하고는 태자 건(建)과 함께 정(鄭)으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그 후, 태자 건(建)은 그 정(鄭)에서 진(晋)을 부추겨서 정(鄭)에 반역을 꾀하려다가 오히려 역으로 살해당했고,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그 건(建)의 아들이었던 공손승(公孫勝-白公勝)과 함께 오(吳)로 다시 도망을 쳤다. 그런데 또 그 여정(旅程)이란 것이 참으로 과혹(過酷)했던 것으로, 그 두 사람은 구걸을 해서 목숨을 연명했으며, 그러자 또 병이 들어서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초(楚)와 오(吳) 사이에 있던 양자강(揚子江) 주변에서 추격자들이 따라왔을 때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어부에게 부탁을 해서 몸을 숨겼다고도 하며, 그렇게 해서 무사히 그 강을 건넌 후에는 그가 가지고 있던 백금(百金)정도의 칼을 그 뱃삯으로 지불하려하자 그 어부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가버렸다고 한다. <내가 일부러 만금(萬金-伍子胥의 목에 걸렸던 상금)을 버렸는데, 그깟 백금(百金)을 가지겠소!>

 그렇게 해서 겨우 오(吳)로 들어갔던 두 사람은 일단 송자광(公子光)이란 사람 밑으로 들어갔으며, 그 후에 오자서(伍子胥)는 오왕(吳王) 요(僚)와 공자(公子) 광(光)에게 초(楚)를 칠 것을 진언(進言)했다. 하지만 요(僚)는 그 말을 받아들였지만, 공자(公子) 광(光)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면서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공자(公子)광(光)에게 야심이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전제(專諸)란 자를 추천했다. 그리고 또 그는 조만간 그 오(吳)에 내분이 생길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때부터 때를 기다리면서 근신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얼마 후에 오(吳)의 주력군이 정벌을 나갔던 초(楚)에서 발이 묶인 채로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자, 오자서(伍子胥)는 그때서야 공자(公子)광(光)에게 <때가 왔다>라고 말을 하면서 쿠데타의 시기를 일러주었다. 그러자 또 공자(公子)광(光)은 오왕(吳王)요(僚)를 연석(宴席)에 초대했고, 그러자 또 오왕(吳王)요(僚)는 불안한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그러나 그때는 국내에서 동요(動搖)가 일어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경비병과 호위부대를 데리고 그 연석에 참석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도중에 전제(專諸)가 결사(決死)의 각오로 오왕(吳王)요(僚)를 베었으며, 그 결과 그것이 쿠데타의 단서가 되어서 공자(公子)광(光)은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합려(闔閭)>였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오자서(伍子胥)를 자신의 측근으로 두었는데, 그리하여 오자서(伍子胥)는 마침내 초(楚) 인접국 왕의 측근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오자서(伍子胥)는 <손무(孫武-孫子)>와 함께 합려(闔閭)를 보좌했으며, 오(吳) 국내(國內)의 정비(整備)에 진력(盡力)을 다했다. 그리고 초(楚)에 대한 공격 준비가 충분해질 때까지 합려(闔閭)를 진정시켰으며, 그러다가 이윽고 기원전 506년에 그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해서 출병했고, 그 결과로 초(楚)의 수도 영(郢)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앞에서 밝혔던 대로 평왕(平王)의 무덤을 파헤쳐서는 그 사체에 300여 차례나 채찍을 가했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한(恨)을 풀었다는데, 그런데 그것이 또 <시체에 채찍을 가하다>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또 그때, 그의 오랜 친구였던 <신포서(申包胥)>가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는 너무 심했다고 나무라자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해는 졌는데 아직도 갈 길은 멀고, 그러니 도행해서 역시(倒行逆施-次例를 거꾸로 施行한다는 뜻으로, 곧 道理에 順從하지 않고 일을 行하며, 常道를 벗어나서 일을 억지로 한다는 것을 말함)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또 그 속뜻은 <(그때)자신의 나이가 이미 많아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상적인 절차 등을 밟을 여유가 없었다 또는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 <그동안 가슴에 품어 왔던 한(恨)을 다만, 비상식적으로 풀었던 것뿐이었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또 그때, 그러니까 오(吳)가 초(楚)의 수도를 함락했을 때, 초왕(楚王-廢태자의 異母弟였던 昭王)은 이미 도망을 가고 없었다. 그리고는 어느 지방에서 병사들을 다시 모아서는 재흥(再興)을 기도하려 했기 때문에, 그래서 철저한 수색을 실시했지만 그러나 그를 좀처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그 사이에 월(越)이 오(吳)를 침공해왔기 때문에, 그래서 초(楚)는 병(兵)을 둘로 나눌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다 또 신포서(申包胥)가 진(秦)에 원군을 청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형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초(楚)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지만, 그런데 또 그때, 장군이었고, 합려(闔閭)의 제부(弟夫)였던 개(槪)가 마음대로 오(吳)로 귀국해서는 오왕(吳王)의 자리에 올라버렸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하는 수 없이 초(楚)에서 철수해서 우선 그 개(槪)의 일부터 처리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오(吳)로 다시 돌아갔던 오자서(伍子胥)는 계속해서 합려(闔閭)를 보좌하는 일에 열중했으며, 그리하여 결국 그 오(吳)를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만드는 데까지 성공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재차 초(楚)를 쳤다든지, 중원(中原)을 노렸다든지 했지만, 그러나 그 전에 오자서(伍子胥)는 인접국이던 월(越)부터 공략할 것을 진언했고, 그것은 또 그 월(越)과 오(吳) 양방 간에 중원(中原)을 노리기에는 상대가 서로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또 당시, 그 월(越)은 소국(小國)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吳)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러나 또 그때는 급속하게 국력을 신장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장래의 화근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그런 진언을 올렸던 것이었다. 그러자 합려(闔閭)도 그 뜻을 받아들였고, 그리고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월(越)로 향했다. 하지만 또 당시, 월왕(越王)이었던 <구천(句踐)>의 군사(軍師) <범려(范蠡)>의 계책에 말려서 오(吳)는 월(越)에 대패(大敗)했고, 거기에다 합려(闔閭)는 월(越)의 장군이었던 영고부(靈姑孚)가 쏘았던 화살에 한쪽 다리를 부상당했으며, 그런데 그것이 또 마침 파상풍(破傷風)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합려(闔閭)는 결국 자리에 눕는 신세까지 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 후, 합려(闔閭)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그러자 또 공자(公子)들 중에서 <부차(夫差)>란 자가 오자서(伍子胥)를 방문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그 후계자로 추천해줄 것을 오자서(伍子胥)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합려(闔閭)를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태자는 부차(夫差) 공자(公子)로 함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자 합려(闔閭)가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부차(夫差)은 박정(薄情)해서 군주의 그릇으로는 부족하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가 이렇게 말을 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주위에서 우리들이 보살펴주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급한 것은 하루라도 빨리 후계자를 명확히 해두는 것이며, 그것으로 권력투쟁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는 일입니다> 그러자 또 합려(闔閭)가 이렇게 말을 하면서 오자서(伍子胥)에게 그 일을 일임했다. <당신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뜻대로 하시오!>


 참고: 1. 원래 합려(闔閭)에게는 요절(夭折)했던 장남 태자가 있었다고 하며(史記索隱-竹書紀年에서는 태자 波 그리고 左傳에서는 태자 終纍), 그리고 3남으로 공자(公子) 자산(子山)이 있었다.(左傳)

 2.사기색은(史記索隱)은 당(唐)나라 때 사마정(司馬貞)이 사기(史記)에다 주석(注釋)을 붙인 주석서로, 30권으로 되어 있으며, 사기(史記) 3가(家) 주(注)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선행(先行) 제서(諸書)들을 인용해서 음운(音韻)과 지리(地理) 그리고 인물(人物)들을 아주 우수하게 고증(考證)했던 것이다.

 3. 그리고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위의 사마(司馬)정(貞)이 자주 인용했던 책이었으며, 중국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이다. 그리고 또 그 내용은 중국의 전설시대부터 위(魏)나라의 양왕(襄王)까지 저술했던 것이지만, 그러나 작자는 불명임.

 아무튼, 그런 다음 합려(闔閭)는 부차(夫差)를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너는 구천(句踐)이 나의 원수라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저 오자서(伍子胥)를 잘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자 또 부차(夫差)도 이렇게 말을 했다. <앞으로 3년 이내에 반드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합려(闔閭)가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부차(夫差)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그때부터 부차(夫差)를 모시게 되었으며, 다시 구천(句踐)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준비를 차근차근히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그에 두려움을 느끼고는 기원전 494년에 먼저 오(吳)를 공격했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준비가 끝나 있었던 오(吳)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월(越)은 대패했으며, 그러자 또 오(吳)는 그대로 월(越)로 쳐들어갔으며, 그러자 또 구천(句踐)은 월(越)의 수도 부근에 있던 회계산(會稽山)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또 구천(句踐)은 사자를 보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했다. <월(越)은 이제부터 오(吳)의 속국이 될 것이며, 저 구천(句踐)은 이제부터 오왕(吳王) 님의 노예가 되려 하오니 제발 저의 뜻을 받아주십시오> 그러자 부차(夫差)는 몹시 흡족해서 구천(句踐)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오자서(伍子胥)가 나서서 이렇게 강력하게 주장했다. <구천(句踐)은 명군(名君)이라는 소문이 자자하고, 그 주위에는 또 많은 능신(能臣)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살려두면 분명히 나중에 화(禍)가 될 것이니 지금 죽이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래서 구천(句踐)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 후, 월(越)은 오(吳)에 공순하면서 뇌물을 바치는 등, 오(吳)의 경계를 조금씩 풀어갔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계속해서 월(越)을 경계하라고 진언을 올렸지만, 그러나 부차(夫差)는 오히려 이제는 다 잡은 토끼에 관심 없다는 듯 중원(中原) 쪽으로만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그 두 사람의 사이에도 조금씩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다 또 그때, 월(越)의 <범려(范蠡)>가 밀정(密偵)을 보내서 오자서(伍子胥)의 중상(中傷)을 부차(夫差)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또 부차(夫差)에게는 <서시(西施)>라는 미녀를 보내서 당시, 점점 더 심해졌던 월(越)에 대한 경계를 풀 수 있도록 획책했다.

 그러자 그 후, 부차(夫差)는 북으로, 특히 제(齊) 쪽으로 출진을 계속했으며, 그 때문에 영토는 조금씩 넓어지기는 했어도, 그러나 그 반대로 국력은 급속하게 소모되어 갔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齊)는 피부(皮膚)의 병(病)이요, 월(越)은 내장(內臟)의 병입니다(눈앞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피부의 병인 제(齊)의 내란(內亂)이지만, 그러나 정말로 신경을 써야하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는 내장의 병 즉, 월(越)의 존재라는 의미)>라고 말을 했지만, 그러나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그때, 그 두 사람은 언성까지 높여가면서 아주 격한 언쟁까지도 벌였던 모양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당시, 재상(宰相)이었던 <백비(伯嚭)>란 자가 실직(實直-정직하고 성실함)했던 오자서(伍子胥)를 쫓아내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거기에다 그는 월(越)로부터 뇌물까지 받아 챙긴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의 수단으로 오자서(伍子胥)와 부차(夫差)의 사이를 이간질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이제 멀지 않아서 오(吳)는 월(越)에 정복당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어느 때 제(齊)에 사자로 갔을 때, 자신의 아들을 그 제(齊)에 맡기고 왔을 정도였다.

 
참고: 춘추좌씨전의 노(魯) 소공(昭公-기원전 522년) 20년의 <楚・伍 氏의 계보>에 의하면, 오자서(伍子胥)의 아들 이름은 오풍(伍豊)이라고 했고, 증조부의 이름은 오참(伍參), 조부의 이름은 오거(伍擧)인데 그 별명은 오초(伍椒)라고 했다. 그리고 숙부의 이름은 오초명(伍椒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러나 자신은 오(吳)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오(吳)로 다시 돌아갔는데, 그런데 또 그 일이 문제가 되어서 오자서(伍子胥)는 오(吳)로 귀국한 후 부차(夫差)로부터 검을 받아서 자결을 명받았다. 그러자 또 그때, 오자서(伍子胥)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제가 죽으면 저의 묘 위에 가래나무(梓-一說에는 예덕나무)를 심으십시오. 나중에 그것을 사용해서 (夫差의) 관을 만들 수 있게요. 그리고 저의 눈은 빼내서 동남(東南-越 방향)쪽 성문 위에 두십시오. 나중에 월(越)이 오(吳)를 멸망시키는 것을 잘 볼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런 다음, 오자서(伍子胥)는 부차(夫差) 앞에서 자결했다. 그런데 또 바로 그 말이 부차(夫差)의 심기를 상하게 해서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무덤을 만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 유체를 말가죽으로 만든 부대자루에다 넣어서 강에다 던져버리게 했다. 그러자 또 백성들은 모두 오자서(伍子胥)를 동정했고, 그 물가에 그를 위한 사당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랬던 일이 나중에 <단오(端午)>의 풍습과 중국에서의 <액땜풍습>으로 이어졌다고 하며, 그래서 또 사람들이 강에 공양물을 흘려보내는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단, 현재는 굴원의 고사에서 단오의 유래를 찾기도 함)

 아무튼 또, 오자서(伍子胥)가 죽은 후에 오(吳)에서는 더 이상 월(越)을 경계하는 자가 없어졌고, 그래서 또 당시 오(吳)는 파멸의 길을 자청해서 가고 있는 꼴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오(吳)는 오자서(伍子胥)의 예언대로 그로부터 얼마 후에 월(越)에 정복당했으며, 부차(夫差)는 겨우 생명만 건진 채로 변경(邊境)으로 귀향을 가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자결했다고 한다. <오자서(伍子胥)가 옳았고 나는 어리석었다. 그러므로 나는 저승에서도 그를 볼 면목이 없기 때문에, 내가 죽거든 제발 내 머리를 베어서 보자기에 싸주길 바란다> 그리고 또 그 후에 백비(伯嚭)도 구천(句踐)에게 잡혀서 악신(惡臣)의 표본으로 효수(梟首)되었다.

 ○ 신포서(申包胥)는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왕손(王孫) 또는 봉지(封地) 명으로부터 신(申)이었고, 휘(諱)는 포서(包胥) 그래서 왕손포서(王孫包胥)라고도 불렸던 인물이었다. 그는 또 평왕(平王), 소왕(昭王), 혜왕(惠王) 3대를 섬겼으며, 오(吳)의 첨병(尖兵)이라고 할 수 있었던 오자서(伍子胥)에 버금갔던 인물이었다.

 그는 오자서(伍子胥)가 초(楚)를 침공해서 수도를 함락시켰을 때, 진(秦)으로 원군을 청하러 떠났다. 그리고는 애공(哀公)에게 사정을 했지만, 그러나 애공(哀公)은 소왕(昭王)의 어머니가 진(秦)의 공주(公主)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신포서(申包胥)는 크게 탄식하고는 7일7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물마저 마시지 않은 채로 울고 또 울었다. 그러자 드디어 그것이 애공(哀公)의 마음을 움직였던지 애공(哀公)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초(楚)는 원래 무도(無道)의 나라이거늘, 이런 충신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므로 초(楚)를 그냥 멸하게 두는 것은 옳지가 않다!> 그리고는 전차(戰車) 500을 내주었고, 그리하여 기원전 505년에 진(秦)의 원군은 오(吳)를 파(破)했으며, 그리고 또 그때, 오(吳)에서는 내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초(楚)는 오(吳)를 물리치는데 성공을 했다.

 그 후, 소왕(昭王)은 신포서(申包胥)에게 봉읍(封邑) 5000호(戶)란 대봉(大封)을 내렸지만, 그러나 정작 신포서(申包胥)는 초(楚)에 선조들의 분묘(墳墓)들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또 자신이 그것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그것을 거절했다.

 그 후, 기원전 476년에 신포서(申包胥)는 혜왕(惠王) 어머니의 아버지 즉, 외할아버지였던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사자의 자격으로 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는 월(越)이 오(吳)를 멸하기 바로 직전이었는데(吳의 멸망은 기원전 473년), 그러자 구천(句踐)은 신포서(申包胥)에게 오(吳)를 멸할 계책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신포서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전쟁(戰爭)은 화(和)를 제1로 하고, 그 다음이 인(仁)이며, 맨 나중이 바로 용(勇)입니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그 계책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오(吳)를 멸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또 그것으로 신포서(申包胥)는 자신의 조국을 유린(蹂躪)했고, 또한 친구였던 오자서(伍子胥)를 철저히 이용한 후에 말살(抹殺)했던 구적(仇敵) 오(吳)를 멸하는데 일조(一助)했다.


 







  <楚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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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1)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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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
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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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 장왕(莊王-?부터 기원전 591년. 재위 기원전 614년부터 기원전 591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제6대 왕이었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여(侶) 또는 여(旅), 시(諡)는 장(莊)이었다. 그는 또 초(楚)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최고의 명군(名君)으로 알려졌고, 춘추오패의 한명으로 손꼽아졌으며, 초(楚) 성왕(成王-6-18참고) 원(員)의 손자였고, 폭군이었던 상신(商臣-穆王)의 적자(嫡子)였다. 아들은 공왕(共王) 심(審).

 참고:
필(邲)의 싸움

 필의 싸움은 기원전 597년(周는 定王 10년, 魯는 宣王 12년)에, 중국의 하남성(河南省) 정(鄭)현의 필(邲)이라는 곳에서 진(晋)과 초(楚)가 격돌했던 전쟁으로 초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 후, 천하의 패권은 진(晋)에서 초(楚)로 넘어갔으며, 그로서 초(楚) 장왕(莊王)의 위광(威光)은 대륙을 덮었다.

 1. 경위(經緯)

 그 전, 초(楚)의 장왕(莊王)은 천하평정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위(上)의 진(晋)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러자 장왕(莊王)은 일대(一大)결심을 하고는 스스로 병사들을 이끌고 정(鄭)부터 공격했다. 그러자 정(鄭)은 곧 진(晋)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진(晋)의 정경(正卿)이었던 순림부(荀林父)는 정(鄭)이 몇 번이나 진(晋)에 면종배반(面從背反-겉으로는 복종하고, 뒤에서는 배반을 일삼는 짓)했던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그러면서 또 정(鄭)은 곧 초(楚)에 의해서 멸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또 그때, 정(鄭)의 입장에서는 그 번(番)이야말로 초(楚)에 지게 되면 완전하게 멸망하게 될 것이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필사 항전했다. 그러자 또 그 전쟁은 진(晋)의 생각보다 길어지게 되었는데, 그러자 또 진(晋)은 그때서야 부랴부랴 군사를 일으켜서 정(鄭)에 원군을 보냈지만, 그러나 또 마침 그때, 그러니까 진군(晋軍)이 그 정(鄭)에 도착했을 때, 정(鄭)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자 정(鄭)의 양공(襄公)은 마치 미자계(微子啓-6-13 참고)가 주(周)에 항복했을 때처럼 예를 갖추어서 장왕(莊王)을 맞이했다.(참고: 그 후, 주왕(紂王)이 무왕(武王)에게 패해서 죽자, 그 두 사람은 스스로 무왕(武王)을 찾아가서 항복을 했는데, 그런데 또 그때, 미자계(微子啓)는 상반신을 벗은 채로 양손을 뒤로 결박했고, 그리고는 왼손으로는 양(羊)을 끌고, 오른손에는 억새를 꺾어 든 채로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그러자 무왕(武王)은 흔쾌히 그의 항복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초(楚)의 군신(群臣)들은 모두 정(鄭)을 멸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러나 장왕(莊王)은 그때 <정(鄭)군(君)은 사람에게 머리를 숙일 줄을 아는 자다(겸손한 자). 그러므로 반드시 이 나라 또한 잘 다스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는 그 정(鄭)군(君)에 더 이상의 수치심을 주지 않기 위해서 철군했고, 그 후에 다시 정(鄭)과 다시 동맹을 맺었다.

 2. 싸움

 그렇게 해서 정(鄭)의 패배를 알게 되었던 진(晋)의 사장(師將) 순림부(荀林父)는 군을 철수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또 그때, 상군(上軍)의 장(將)이었던 사회(士會)도 <좋습니다! 전쟁이란 모름지기 적의 허점을 파고들어야 하는 것! 그리고 또 덕(德)과 형(刑) 그리고 정(政)과 사(事), 전(典), 예(禮) 그 여섯 가지를 모두 갖추고(지키고) 싸웠던 초(楚)에 대적한다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순림부(荀林父)에 동의했다. 하지만 또 그때, 중군(中軍)의 좌(佐)였던 선곡(先穀)이란 자가 그 전쟁을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단으로 병을 움직였기 때문에, 그래서 싸움은 하는 수 없이 시작되고 말았다. 그래서 또 그때, 양군(兩軍)의 세력을 보면 또 아래와 같았다.(단, 참고이므로, 한글표기는 생략함)

 
晋軍의 編成

 中軍-将:荀林父 佐:先穀 中軍大夫:趙括、趙嬰斉
 上軍-将:士会  佐:郤克 上軍大夫:鞏朔、韓穿
 下軍-将:趙朔  佐:欒書 下軍大夫:荀首、趙同
 司馬:韓厥

 楚軍의 編成

 荘王(楚王) 孫叔敖(令尹)
 中軍-将:沈尹
 左軍-将:子重(이름은 嬰斉・荘王의 兄弟)
 右軍-将:子反(이름은 側・荘王의 兄弟)

 3. 결전(決戰)

 그렇게 해서 초(楚)의 장왕(莊王)과 영윤(令尹-宰相) 손숙오(孫叔敖)는 정(鄭)을 항복시킨 후, 진(晋)과는 싸울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는 후군(後軍)에 해당되는 군세(軍勢)를 조금 남겨두고 수도 영(郢)으로 철군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또 오참(伍參)이란 자가 장왕(莊王) 앞으로 나오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현재 진(晋)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는 자는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군신(群臣)들은 아직 하나로 뭉쳐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싸운다면 필시 우리가 이길 것이며, 그리고 또 현재 적(敵)의 사장(師將)이란 사람은 일국(一國)의 재상입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우리의 사장(師將)은 군주(君主)이신데, 그러므로 또 만약에 여기서 물러나신다면, 앞으로 어떻게 천하에 모범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장왕(莊王)은 고뇌 끝에 마차(馬車)를 북쪽으로 다시 향했으며, 그리고는 정(鄭)으로 다시 들어가서 관(管)이란 곳에다 진(陳)을 구축했다. 그리고는 또 진(晋)에 화목(和睦) 목적의 사자도 보냈는데, 그러자 또 진(晋)에서는 순림부(荀林父)와 사회(士會)가 그것을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또 그때, 선곡(先穀)도 비밀리에 장왕(莊王)에게 사자를 보내서, 자신들은 싸우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달했다. 하지만 또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던 장왕(莊王)이 다시 진(晋)에 화목 목적의 사자를 보냈고, 그때도 진(晋)은 그것을 수락했다. 그리고는 또 그 답으로 화목 목적의 사자였던 위기(魏錡)와 조전(趙旃)이란 자를 장왕(莊王)에게 보냈는데,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처음부터 장왕(莊王)과 화목할 생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장왕(莊王)을 죽이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장왕(莊王)의 진(陳) 가까이에까지 가게 되자 바로 공격을 가했지만, 그러나 수비가 워낙에 견고했기 탓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또 그들은 곧바로 도망을 갔는데, 그러자 또 장왕(莊王)이 본진의 병사들을 이끌고 진군(晋軍) 속으로 곧 쳐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그러자 또 그때, 그렇게 되면 장왕(莊王)의 진(陳)이 고립될 것이 염려가 되었던 손숙오(孫叔敖)가 황급히 전군에 공격명령을 내렸고, 그렇게 해서 전쟁은 드디어 시작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 그때까지도 일이 순조롭게 되어가고 있다고 낙관(樂觀)하고 있던 중이었던 순림부(荀林父)는 그런 갑작스런 초군(楚軍)의 공격을 받게 되자 어찌할 줄을 몰라서 다음과 같이 전군에 포고를 내려버렸다. <제일 강을 빨리 건너서 퇴각하는 자에게 포상을 내리겠다> 그러자 진(晋)의 중군(中軍)과 하군(下軍)은 순식간에 괴멸하기 시작했고, 그리고는 또 서로 먼저 도망가려고 배에 올라탔지만, 그러나 또 그때 황하(黃河)에 띄워져 있던 배의 숫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러자 또 그때, 배에 먼저 올랐던 병사들은 뒤에 와서 배를 떠날 수 없게 뱃전을 잡고 놓아주지 않던 병사들의 손과 팔 등을 잘랐고, 그것은 또 배가 전복되어서 아무도 그 배를 탈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해서 했던 행동이었지만, 아무튼 그 때문에 그곳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참극이 일어났다. 하지만 또 그때, 진(晋)의 삼군(三軍) 중에서 사회(士會)가 인솔했던 상군(上軍)만은 그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들은 단 한명의 손실도 없이 퇴각하는데 성공을 했다. 그리고 또 그 후, 그 때문에 진(晋)은 잠깐 동안 침체기에 들어갔으며, 그러자 또 그 역으로 초(楚) 장왕(莊王)의 위광은 천하를 덮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것으로 장왕(莊王)은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대승 후, 장왕(莊王)은 신하(臣下)들로부터 경관(京觀-전사자의 유해를 한곳에 모아 장사 지내고, 戰功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합동무덤=monument)을 만들 것을 권유받았지만, 그러나 장왕(莊王)은 그때 <무(武)란 글자는 창(戈)>을 멈춘다(止)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그것은 또 폭(暴)을 금(禁)하고, 싸움을 멈추며, 큰 것을 지키고, 공(功)을 정(定)하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대중(衆)의 화합을 꾀하고, 재물을 풍부하게 하려는 속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 내가 했던 일은 그 무덕(武德)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그럼에도 충성을 다 바쳐서 싸웠던 진군(晋軍) 병사들의 유체들로 경관(京觀)을 만든다는 것은 과연 옳은 짓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참고: 그러나 또 실제로 그 武란 글자는 창(戈)을 (앞으로) 나아간다 라고 하는 것이 그 원의(原義)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진(晋)마저 물리치고 패업을 달성했던 장왕(莊王)은 그 마무리로 그때까지 진(晋)을 따르고 있던 송(宋)을 다시 표적으로 정했다. 그리하여 그 첫 단계로 기원전 595년에, 일찍이 아버지 목왕(穆王)의 명으로 송(宋) 소공(昭公)의 마부(馬夫-여기서의 마부는 왕의 수행원 또는 호위하는 자)에게 채찍을 가했기 때문에, 그래서 송(宋)나라 사람들의 한(恨)의 표적이 되어 있었던 신단(申舟)이란 인물을 제(齊)로 보내는 사자(使者)로 지명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송(宋)을 통과하는데 인사는 필요 없음>이란 명을 내렸는데, 그것은 또 그 신단이 자신의 그런 명령을 따라서 송(宋)에 무례를 저지르게 하고, 또 그로써 그가 송(宋)에서 살해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을 구실로 해서 송(宋)에 출병을 시킬 요량으로 그런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자 장왕(莊王)은 마치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송(宋)으로 달려갔고, 그리고는 곧바로 수도였던 상구(商丘-河南省 商丘市)를 포위했다. 그리고 또 그 사이, 장왕(莊王)은 노(魯)도 초(楚)의 맹하(盟下)로 만드는 등, 착실하게 패업을 완성할 준비를 해두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송(宋)의 우사(右師)였던 화원(華元)이란 자를 필두로 해서 송군(宋軍)은 당연히 저항을 해왔고, 그러자 또 그 싸움은 예상치 않게 길어져서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594년 5월이 되었어도 그 상구(商丘)를 함락시키지를 못했다. 그러자 장왕(莊王)은 하는 수 없이 일단 철수를 명령했다. 하지만 또 그때, 아버지였던 신단(申舟)까지 희생시키고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려는 장왕(莊王)을 원망했던 신단의 아들 신서(申犀) 때문에 장왕(莊王)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자신의 측근이었던 신숙시(申叔時)가 올린 헌책을 장왕(莊王)은 받아들였고, 그 결과 상구(商丘) 교외에 둔전(屯田)을 설영(設營)하고는 지구전(持久戰)에 돌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얼마 후에 화원(華元) 등도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이어서 자반(子反)이란 자가 중개를 해서 마침내 송(宋)도 초(楚)의 맹하(盟下)로 들어왔고, 그로써 장왕(莊王)의 패업은 완성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런 다음, 그는 기원전 591년에 사거했다.(장왕 끝)

 ⊙ 화원(華元-생몰미상)은 중국 춘추시대 송(宋)의 정치가로, 당시 2대국(大國)이었던 진(晋)과 초(楚)의 화평을 위한 중재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예를 중시했던 이상주의자로 알려졌으며, 송(宋) 굴지의 명재상 중 한사람이었다.(하략)

 아무튼 또, 그렇게 해서 패권을 거머쥐었던 초(楚)였다지만, 하지만 그 장왕(莊王)의 뒤를 이었던 7대 공왕(共王) 때는 <언능(鄢陵)의 싸움>에서 진(晋)에 패했고, 그것으로 초(楚)는 또 패권을 잃고 말았다.

 ○ 언능(鄢陵)의 싸움

 언능의 싸움은 중국의 춘추시대였던 기원전 575년(周는 簡王 11年, 魯는 成公 16年)에 언능(鄢陵-河南省鄢陵県)에서 진(晋)과 초(楚)가 격돌했던 싸움이었고, 그 결과는 진군(晋軍)의 승리로 끝났다.

 1. 경위

 기원전 579년, 진(晋)과 초(楚)는 송(宋)의 땅에서 회맹했다. 그리고는 송(宋) 화원(華元)의 중개로 양국은 맹약을 하고 정전(停戰-하지만 史記에서는 그때가 기원전 589년이라고 했고, 左傳에서는 기원전 579년이라고 했는데, 史記의 실수로 봄)했지만, 그러나 기원전 577년에 진(晋)의 맹하(盟下)였던 정(鄭)이 초(楚)의 맹하였던 허(許)를 공격했기 때문에, 초(楚)의 공왕(共王)은 그 허(許)를 구원하기 위해서 정(鄭)을 공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그 다음해, 정(鄭)은 초(楚)의 영토를 할양받아서 화목했고, 그것으로 초(楚)의 맹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또 진(晋)의 여왕(厲王)은 원래 자신을 따랐던 그 정(鄭)의 배신을 바로잡기 위해서 위(衛), 제(齊), 노(魯) 등을 이끌고 정(鄭)을 쳤다. 그러자 또 정(鄭)은 초(楚)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그 결과 진(晋)과 초(楚)는 다시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음은 그때의 군대편성에 관한 것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당시, 楚軍은 中軍・左軍・右軍 三軍으로 편성되었고
 晋軍은 中軍・上軍・下軍・新軍 四軍을 보유하고 있었다.

 晋軍의 編成

 君主:厲公 軍師:苗賁皇
 中軍-将:欒書 佐:士燮
 上軍-将:郤錡 佐:中行偃
 下軍-将:韓厥 佐:智罃(출병으로 비게된 晋의 후방을 맡음)
 新軍-将:郤犨 佐:郤至

 楚軍의 編成

 君主:共王 軍師:伯州犂
 中軍-将:子反
 左軍-将:子重
 右軍-将:子幸

 2. 전쟁

 그 전쟁은 공왕(共王)이 진(晋)의 대부(大夫)였던 여기(呂錡)가 쏜 화살에 눈을 부상당했을 정도로 혼전(混戰)이었다. 그러자 공왕(共王)은 화가 나서 가신이었던 양유기(養由基)에게 명을 내렸고, 그러자 양유기(養由基)는 단 한발의 화살로 여기(呂錡)를 쏘아서 죽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공왕(共王)의 부상에 초군(楚軍)들이 동요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점점 더 전의는 상실되고 있었다. 그러자 공왕(共王)은 그날 밤에 자반(子反)을 불러들여서 다음날의 작전에 대해서 의논해보고자 했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자반(子反)은 술에 취해서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공왕(共王)의 부름에 나아가지를 못했다. 그러자 또 공왕(共王)은 그것으로 초군(楚軍)의 패배를 예감하고는 그날 중에 회군하여 수도 영(郢)으로 돌아갔다.

 3. 전후(戰後)

 자반(子反)은 전쟁 중 최대의 실수를 인정하고는 자살했고(그러나 史記에서는 철군 직전에 군영에서 주살되었다고 함), 승리했던 진(晋)의 여왕(厲王)은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그리고 그 후에 여왕(厲王)은 그 여세를 타서 호족(豪族)들을 폐하고 공실(公室)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 획책했고, 그 결과로 대족(大族)이었던 극(郤)씨(氏)의 경(卿) 3명을 죽였다. 하지만 또 그 후, 여왕(厲王)은 자신들도 그 극(郤)씨(氏) 같은 꼴이 될 것을 두려워했던 난서(欒書)와 중행언(中行偃)에 의해서 살해되었고, 그러자 또 명군이었던 도공(悼公)이 그 뒤를 이어서 패권을 확고히 했다.








 <楚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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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0)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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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
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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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의 위치도-左 赤圓>


 진(晋-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376년)은 현재의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주대(周代)와 춘추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국가였으며, 처음에는 당(唐)으로 불렸지만 나중에 개명해서 진(晋)이 되었다. 그리고 국성(國姓)은 희(姬)였고, 수도는 익(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분가였던 곡옥(曲沃)이 익(翼)의 종가(宗家)를 멸한 후, 개명해서 강(絳)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옛날, 한때 주(周)의 성왕(成王)이 동생이었던 우(虞)와 함께 정원에서 놀았을 때, 그는 나뭇가지를 꺾어서 <이와 같이 너를 봉하노라>라는 봉건(封建)의식을 흉내 내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성왕(成王)이 궁전으로 돌아갔을 때, 당시의 재상(宰相)이었던 윤일(尹佚)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성왕(成王)에게 하자, 성왕(成王)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尹-그러시면, 우(虞)전(殿)을 어느 곳에다 봉하면 좋겠습니까?>

 <成王-무슨 말씀이시오?! 나는 단지 그와 놀이를 한 것뿐이요!>

 그러자 또 윤일(尹佚)이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모름지기 천자(天子)에게 허언(虛言)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왕이 내뱉은 말은 번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 바로 얼마 후에 주공단(周公旦)이 당(唐)을 정벌하고 돌아왔을 때, 우(虞)를 그 당(唐)에 봉했으며, 그리하여 우(虞)는 당숙우(唐叔虞)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 우(虞)의 아들 섭(燮) 때에 분수(汾水=汾河=중국 山西省을 南北으로 흐르는 큰 강으로, 渭河에 버금가는 黄河 第2의 支流)의 지류였던 진수(晋水) 근처에서 국명을 진(晋)으로 하여 개국했다.


 그리고 그 후 제11대 소후(昭侯)의 시대에 그 소후(昭侯)의 숙부였던 성사(成師)가 곡옥(曲沃)을 물려받아서 분가했으며, 성사(成師)는 죽은 후에 환숙(桓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환숙(桓叔)은 생전에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 곡옥(曲沃)이 번영을 누렸고, 그래서 곡옥(曲沃)은 당시의 수도(首都)보다도 더 번창하고 컸다지만, 그러나 그 후에 익(翼)의 본가와 그 곡옥(曲沃) 간에 다툼이 계속되었으며, 그러자 또 무공(武公)의 시대에 익(翼)의 민후(緡侯 또는 湣侯)를 멸하고 주가(主家)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 무공(武公)의 시대에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했으며, 그 내용은 이미 전술(前述)한
바 있었다
. 그러자 또 그 후에 중이(重耳)가 다시 돌아와서 내란을 수습했고, 그 후에 성복(城濮)의 싸움(기원전 632년)에서 초(楚)를 격파한 후 강대한 패자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문공(文公)이 천하를 경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내분(內紛)에서 공족(公族)들의 수가 많이 격감했으며, 그래서 또 타국(他國)들에 비해서 그 공족(公族)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또 경공(景公)과 여공(厲公) 때에는 <측근정치>가 시도되기도 했으며, 적(狄)을 멸했다든가, 언능(鄢陵)의 싸움(기원전 575년)에서 승리했다는 것 등으로 해서 그 권위는 겨우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또 그 여공(厲公)의 강경함이 반발을 불러서 그가 살해됨(기원전 573년)에 따라서, 도공(悼公)이 주(周)로부터 영접을 받았을 때는 신하(臣下)들에 대해서 결정적인 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진(晋)의 공실(公室)은 대부(大夫)들 힘의 균형에 편승해서 존재 유지하는 존재로 전락해갔고, 그리하여 또 경공(頃公) 때에는 공족(公族)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기(祁) 씨(氏)와 양설(羊舌) 씨(氏)가 멸해짐에 따라서, 그때부터 육경(六卿-後述)이 결정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였던 춘추 말기(末期)에 진(晋)은 사실상 범(范) 씨(氏)와 지(智) 씨(氏) 그리고 중행(中行) 씨(氏)와 조(趙) 씨(氏), 한(韓) 씨(氏), 위(魏) 씨(氏)의 5씨(氏) 6가계(家系-中行氏와 智氏는 원래는 같은 荀氏였고, 韓氏만 公族이었다)의 당주(當主)들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6가계는 다른 유력 대부들을 배제하고 육경(六卿)을 세습했으며, 거기에다 또 출공(出公) 때에는 범 씨와 중행 씨의 영지를 지, 조, 한, 위 씨가 분할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때문에 출공(出公)이 분노해서 제(齊)와 노(魯)와 동맹을 맺고는 그 4씨(氏)를 토벌하려다가 실패했고, 그러자 또 출공(出公)은 그길로 제(齊)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그 도중에 사망(기원전 457년)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때문에 진(晋)의 공실(公室)은 완전히 힘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또 그 4씨(氏) 중에서 제일로 강력했던 지(智) 씨(氏)의 당주 지요(智瑤)는 한 씨와 위 씨를 이끌고 조(趙) 씨를 멸하려고 했고, 그러자 또 그 조 씨의 당주였던 조무휼(趙無恤)은 한 씨의 한호(韓虎)와 위 씨의 위구(魏駒)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지 씨와의 이간(離間)을 획책했는데 성공했다. <지(智) 씨는 욕심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내가 그들에게 먹히고 나면 그 다음은 당신들 차례가 될 것이오!>

 그렇게 해서 기원전 453년에 그 3가(家)에 공격당했던 지(智) 씨는 멸망했고, 그리하여 그 진(晋)은 조 씨와 위 씨, 그리고 한 씨가 나눠가졌으며, 그런 다음에는 그대로 독립했다. 하지만 진(晋)은 그런 와중에서도 곡옥(曲沃)과 강(絳) 2도시를 중심으로 했던 아주 조그마한 영토(魏에 포위된 형태로)라도 어떻게든 지켜나가면서 애공(哀公) 이하, 5대에 걸쳐서 존속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403년에 주(周)의 위열왕(威烈王)에 의해서 조(趙)와 한(韓)과 위(魏) 3씨(氏)가 제후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그리하여 진(晋)의 공실과 그 3가(家)는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명목상의 군신관계조차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 다음 기원전 376년에 진(晋)은 결국 한(韓)위(魏)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서 함락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진(晋)은 난공불락이었기 때문에 공격군들은 쉽게 진(晋)을 멸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후에 최후의 군주였던 정공(靜公)은 성에서 쫓겨나서 서민이 되었고, 그로서 진(晋)은 결국 멸망했다. 그리고 그 뒤에 조(趙)와 위(魏) 그리고 한(韓) 그 3국(國)을 3진(晋)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하지만 또 그 각각을 진(晋)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중앙에 위치했던 위(魏)를 진(晋)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또, 그 진(晋)의 군제(軍制)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면, 진(晋)은 삼군(三軍)이었으며, 그 각각의 장군과 부장(副將)은 경(卿)이 취임했다. 그리고 또 그 6명을 6경(卿)이라고 불렀으며, 그 일군(一軍)의 병원(兵員) 수는 12500명이었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 서열의 구성이므로 참고바랍니다.


 中軍의 장(將-제1위), 中軍의 좌(佐-제2위)
 上軍의 장(제3위), 上軍의 佐(제4위)
 下軍의 장(제5위), 下軍의 佐(제6위)

 그리고 위는 당시 주(周) 제도 하에 있어서 대국(大國)이 가질 수 있었던 최대의 군대였으며, 한때 새로운 삼군(三軍)을 구성해서 육군(六軍)으로 했던 적도 있었다지만, 그러나 곧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중군(中軍)의 장(將)에 취임했던 사람은 경(卿) 중에서도 필두(筆頭)였던 정경(正卿-宰相)이었으며, 그래서 또 중군(中軍)의 장하면 정경(正卿)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하지만 단, 그 정경(正卿)과 중군(中軍)의 장이 같은 의미는 아니며, 그리고 또 아래는 진(晋)의 역대 군주들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晋의 역대 군주>

 唐叔虞(생몰미상)
 
晋侯燮(생몰미상)
 
武侯(생몰미상)
 
成侯(생몰미상)
 
厲侯(생몰미상)
 
靖侯(기원전 이하 前. 858년-前841년)釐侯(前840年-前823年)
 
献侯(前822年-前812年)
 
穆侯(前811年-前785年)
 
殤叔(前784年-前781年)
 
文侯(前780年-前746年)
 
桓叔(前745年-前731年)…曲沃으로 分家
 
荘伯(前731年-前716年)
 
武公(前716年-前678年)
 
昭侯(前745年-前739年)
 
孝侯(前739年-前724年)
 
鄂侯(前723年-前718年)
 
哀侯(前717年-前710年)
 
小子侯(前709年-前706年)
 
湣侯(前706年-前679年)…曲沃의 武公에 죽임 당함
 
武公(前678年-前677年)…晋의 재통일 후 本家가 됨(前678年)
 
献公(前676年-前651年)
 
奚斉(前651年)
 
悼子(前651年)
 
恵公(前650年-前637年)
 
懐公(前637年-前636年)
 
文公(前636年-前628年)
 
襄公(前627年-前621年)
 
霊公(前620年-前607年)
 
成公(前606年-前600年)
 
景公(前599年-前581年)
 
厲公(前580年-前573年)
 
悼公(前572年-前558年)
 
平公(前557年-前532年)
 
昭公(前531年-前526年)
 
頃公(前525年-前512年)
 定
公(前511年-前475年)
 
出公(前474年-前457年)
 
哀公(前456年-前438年)
 
幽公(前437年-前420年)
 
烈公(前419年-前393年)
 
孝公(前392年-前378年)
 
静公(前377年-前376年)…晋의 三侯(韓哀侯・魏武侯・趙敬侯)에 의해서 멸해짐.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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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 장왕(莊王-?부터 기원전 591년. 재위 기원전 614년부터 기원전 591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제6대 왕이었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여(侶) 또는 여(旅), 시(諡)는 장(莊)이었다. 그는 또 초(楚)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최고의 명군(名君)으로 알려졌고, 춘추오패의 한명으로 손꼽아졌으며, 초(楚) 성왕(成王-6-18참고) 원(員)의 손자였고, 폭군이었던 상신(商臣-穆王)의 적자(嫡子)였다. 아들은 공왕(共王) 심(審).

 그는 처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사람으로, 목왕(穆王)이 죽자 즉위했다. 그런데 그 직후, 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공자(公子) 중 한사람이었던 섭(燮)이란 자가 모반을 일으켰다. 그러자 일단 수도와 왕실은 완전히 그 섭(燮)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섭(燮)도 자칭 왕 행세를 했지만, 그러나 반대세력이 확대됨에 따라서 신변에 위험을 느꼈던 섭(燮)은 장왕(莊王)을 구속해서 인질로 삼고는 북방으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는 진(晋)과 진(秦) 그리고 초(楚) 국경 근처의 상밀(商密)이라는 곳에서 반공(反攻)을 개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런데 또 그 도중에 노(盧)라는 동네에서 섭(燮)은 살해를 당했고, 그것으로 장왕(莊王)은 자유의 몸이 되어서 수도로 다시 귀환했다.

 그 후, 장왕(莊王)은 정치를 완전히 방기(放棄)했고, 일야(日夜) 연석(宴席)을 벌리는 등하면서 간언(諫言)을 올리는 자가 있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그러자 가신들은 너무 황당해서 간언을 올리는 것도 삼가고 그런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지만, 그런데 또 그 3년째가 되던 해에 오거(伍擧-伍子胥의 祖父)란 자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제가 수수께끼를 하나 내보겠는데 한번 알아맞혀보십시오! 그러니까 어떤 새가 한 마리 있는데, 그 새는 3년 동안이나 전혀 날 생각도 하지 않고 또한 울 생각도 전혀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 새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러자 장왕(莊王)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그 새는 일단 한번 나르기만 하면 하늘 끝까지에 닿을 것이고, 일단 울기만 하면,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큰소리로 울게 될 것이요. 그리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내 잘 알겠으니, 이제 그만하시오!>

 그 후에도 그의 음탕함을 즐기는 짓거리는 계속되었지만, 그러나 또 태부(太夫)였던 소종(蘇從)이 죽을 각오를 하고 간언했기 때문에 장왕(莊王)은 그것을 기회 삼아서 그때까지의 의태(擬態)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그 3년 동안 온갖 어리석은 짓을 다하면서 자기 가신(家臣)들의 인물상을 시험했었다거나 지켜봤던 것이었고, 그 결과로 또 오거(伍擧)와 소종(蘇從)에게 국정을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눈에 들었던 새로운 인재들 수백(數百) 명도 등용시켰으며, 그와 더불어서 나쁜 신하 수백 명도 살해했다. 그리하여 또 그 고사(故事)로부터 진득하게 기회를 기다린다는 의미의 <울지도, 날지도 않는다>라는 말도 생겼다고 하며, 그리고 또 그와 비슷한 일화는 제(齊)의 명군(名君)이었던 위왕(威王)에게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국정(國政)을 재정비했던 장왕(莊王)은 용(庸)을 침략했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주변 제국(諸國)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영토도 넓혔으며, 패자(覇者)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606년에는 군사를 주(周)의 수도 낙읍(洛邑) 교외에까지 주둔시켰고, 그러자 또 주(周)에서 사자가 오자 장왕(莊王)은 그 사자에게 구정(九鼎-중국 하(夏)나라의 우왕(禹王) 때에, 전국의 아홉 주(州)에서 거두어들인 금으로 만들었다는 솥으로, 주(周)나라 때까지 대대로 천자에게 전해진 보물이었다고 함)의 무거움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또 그 구정(九鼎)은 은(殷) 시대 때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왔던 전국(傳國)의 보기(寶器)로, 당시에는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이었는데, 아무튼 그리고 또 그때 장왕(莊王)이 그것에 대해서 물어봤던 것은,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돌아가겠다는 뜻을 시사(示唆)했던 것뿐만이 아니라, 주(周)의 왕위를 찬탈(簒奪)할 수도 있다는 것을 돌려서 말을 했던, 그러니까 일종의 공갈(恐喝)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周)의 사자 왕손만(王孫滿)은 그런 공갈에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을 했다. <문제는 그 솥(鼎)의 경중(輕重)에 있지 않고, 그 덕(德)의 유무(有無)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현재 비록 주(周)의 국력이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그 솥이 아직 주(周)의 왕실에 있다는 것은 그 덕(德)만은 아직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없습니다> 그러자 장왕(莊王)은 더 이상 반박을 하지 못했다는데, 어쨌든 그 고사(故事)로부터 또 <대놓고 황위(皇位)를 논하는 것> 또는 <면전(面前)에서 상대의 가치(價値)를 공공연하게 의심하는 것>을 <솥(鼎)의 경중(輕重)을 묻다 또는 세발솥의 경중을 묻다>라고 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것을 줄여서는 <문정(問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왕(莊王)은 어느 날 밤에 신하들을 연회에 초대했다. 그러자 얼마 후에 많은 사람들이 취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연회가 한창 절정이었을 때, 정전(正殿-本殿)의 납촉(蠟燭-)이 바람에 꺼져버렸다. 그러자 또 그때, 장웅(蔣雄)이란 사람이 황후의 옷을 건드렸는데(그러니까 몸을 더듬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표현한 곳도 있음), 그러자 황후가 깜짝 놀라서 곧바로 그의 갓끈(纓-관 뒤에 꼬리처럼 달린 장식)을 취하고는 그 사실을 장왕(莊王)에게 이렇게 고했다. <초가 꺼진 틈을 타서 누군가가 저에게 무례한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의 갓끈을 취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불을 켜게 되면 그 자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장왕(莊王)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전부 불을 밝히기 전에 갓끈을 떼시오!> 그러자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장왕(莊王)의 명에 따랐고, 그 때문에 장웅(蔣雄)도 죄를 면하게 되어서 그때부터는 마음 깊이 장왕(莊王)에 감사했다고 하며, 그래서 또 그런 연유로 그 연회의 이름은 <절영회(絶纓會)>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초(楚)가 진(秦)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을 때, 그 장웅(蔣雄)은 <지금이 기회다!>라는 듯이 선봉에 섰고, 그 결과로 큰 공을 세웠다. 그러자 또 장왕(莊王)이 그 장웅(蔣雄)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물었다고 한다. <정말 잘 싸워줬다. 나는 네가 그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목숨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싸워주었던가?> 그러자 장웅(蔣雄)이 또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저를 구해주신 분은 바로 왕이시며, 절영회(絶纓會) 때 황후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리고 위의 이야기는 자신의 관용으로 여자에게 빠지지 않고 오히려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군주로서의 장왕(莊王)의 인격을 시사해주는 고사(故事)로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또 그 후, 장왕(莊王)은 진(陳)의 내란에도 관여해서 일시(一時) 병합했으며, 이어서 정(鄭)을 공격해서 진(陳)과 함께 속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또 기원전 597년에는 정(鄭)의 원군으로 왔던 진군(晋軍)을 필(邲)에서 격파했고, 그러자 또 그때, 진군(晋軍)에서는 도망치는 배에 올랐던 병사들이 그 배가 전복될 것을 우려해서 뱃전을 붙잡고 있던 다른 병사들의 손까지 자르고 도망쳤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배 안에는 다른 병사들의 끊어진 손가락 등이 널려있었을 정도로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莊王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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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19)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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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송의 위치도-下中>


 송(宋-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286년)은 중국의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였고, 도(都)는 상구(商丘)였다.

 
양공(襄公-?부터 기원전637년. 재위는 기원전 651년부터 기원전 637년)은 중국의 춘추시대에 송(宋)의 주군이었으며, 성(姓)은 자(子), 휘(諱)는 자부(茲父 또는 茲甫), 시(諡)는 양(襄)이었다. 그리고 그는 환공(桓公)의 아들이었으며, 춘추오패의 한명으로 거론되는 일도 있다. 그는 기원전 651년에 송공(宋公)의 위(位)에 즉위했지만, 그러나 그에게는 목이(目夷)라는 서형(庶兄)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위(位)를 그 형에게 양도하려고 했었는데, 하지만 또 그 목이(目夷)가 그것을 한사코 거절해서 그가 즉위하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그 목이(目夷)를 재상(宰相)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직후에 제(齊)의 환공(桓公)이 회맹(會盟)을 주최했고, 그러자 그도 그 회맹에 참가했으며,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그는 회맹에 참가했다. 그리고 또 그것은 그가 사적(私的)인 일보다는 예(禮)를 중시했던 이상주의(理想主義)자였기 때문이었는데, 아무튼 그 후였던 기원전 643년에 그 환공(桓公)이 죽자 제(齊)에서는 그 후계를 둘러싸고 내란(內亂)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자 양공(襄公)은 다시 회맹을 열어서 조(曹), 위(衛), 주(邾) 등, 소국(小國)들을 이끌고, 일찍이 송(宋)에 유학(留學)을 했던 적이 있었던 태자 소(昭)를 추천해서 세우고는 제(齊)로 부임시켰으며, 그로서 내란을 수습하고 그 소(昭)를 제공(齊公)으로 올렸다. 그러자 그가 제(齊)의 효공(孝公)이 되었으며, 그러자 또 양공(襄公)은 그 회맹에 참석하지 않았던 등(滕)의 선공(宣公)을 포획했다. 그 후, 기원전 639년에 그는 다시 제(齊)와 초(楚)와 함께 회맹했으며, 그것으로 자신이 제후(諸侯)들의 맹주임을 초(楚)로부터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목이(目夷)가 그에게 <송(宋)이 제후들의 맹주가 되려는 것은, 분에 맞지 않는 위험한 일>이라고 간언했지만, 그러나 양공(襄公)은 목이(目夷)의 말을 듣지 않았다. 거기다 양공(襄公)은 오히려 초(楚)와 진(陳) 그리고 채(蔡)와 허(許) 그리고 조(曹)까지 모아서 회맹을 열었는데, 그런데 그는 그 자리에서 초(楚)의 자옥(子玉)에 의해서 감금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는 맹주로서의 체면을 완전히 구기고 말았는데, 그러자 또 그는 그 다음해 그 굴욕을 갚아줄 생각으로 위(衛)와 허(許) 그리고 등(滕) 등을 이끌고 초(楚)의 맹하(盟下)였던 정(鄭)을 공격했다. 그러자 또 그때도 목이(目夷)가 나서서 그를 말렸지만, 그러나 그는 그때도 그 말을 듣지 않았고, 그러자 또 초(楚)의 성왕(成王)은 그 정(鄭)을 구원하기 위해서 병(兵)을 일으켰으며, 그리하여 양군은 결국 송(宋) 내(內)의 홍수(泓水)에서 격돌했다. 하지만 앞서 소개했던 대로, 그 전쟁은 소위 양공(襄公)의 인(仁)으로 인해서 패했고, 그 후에 진(晋)의 중이(重耳)가 송(宋)을 방문했을 때, 그는 크게 환대했으며, 그 후였던 기원전 637년에 대퇴부의 상처가 원인이 되어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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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의 위치도 左 赤圓>

 
 진(晋-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376년)은 현재의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주대(周代)와 춘추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국가였으며, 처음에는 당(唐)으로 불렸지만, 나중에 개명해서 진(晋)이 되었다. 그리고 국성(國姓)은 희(姬)였고, 수도는 익(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분가였던 곡옥(曲沃)이 익(翼)의 종가(宗家)를 멸한 후, 개명해서 강(絳)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옛날, 한때 주(周)의 성왕(成王)이 동생이었던 우(虞)와 함께 정원에서 놀았을 때, 그는 나뭇가지를 꺾어서 <이와 같이 너를 봉하노라>라는 봉건(封建)의식을 흉내 내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성왕(成王)이 궁전으로 돌아갔을 때, 당시의 재상(宰相)이었던 윤일(尹佚)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성왕(成王)에게 하자, 성왕(成王)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尹-그러시면, 우(虞)전(殿)을 어느 곳에다 봉하면 좋겠습니까?> <成王-무슨 말씀이시오?! 나는 단지 그와 놀이를 한 것뿐이요!> 그러자 또 윤일(尹佚)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모름지기 천자(天子)에게서 허언(虛言)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왕이 내뱉은 말은 번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 바로 얼마 후에 주공단(周公旦)이 당(唐)을 정벌하고 돌아왔을 때, 우(虞)를 그 당(唐)에 봉했으며, 그리하여 우(虞)는 당숙우(唐叔虞)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 우(虞)의 아들 섭(燮) 때에 분수(汾水=汾河=중국 山西省을 南北으로 흐르는 큰 강으로, 渭河에 버금가는 黄河 第2의 支流)의 지류였던 진수(晋水) 근처에서 국명을 진(晋)으로 하여 개국했다.

 그리고 그 후 제11대 소후(昭侯)의 시대에 그 소후(昭侯)의 숙부였던 성사(成師)가 곡옥(曲沃)을 물려받아서 분가했으며, 성사(成師)는 죽은 후에 환숙(桓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환숙(桓叔)은 생전에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 곡옥(曲沃)이 번영을 누렸고, 그래서 곡옥(曲沃)은 당시의 수도(首都)보다도 더 번창하고 컸다지만, 그러나 그 후에 익(翼)의 본가와 그 곡옥(曲沃) 간에 다툼이 계속되었으며, 그러자 또 무공(武公)의 시대에 익(翼)의 민후(緡侯 또는 湣侯)를 멸하고 주가(主家)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 무공(武公)의 시대에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했으며, 그 내용은 이미 전술(前述)한
바 있었다
.
그러자 또 그 후에 중이(重耳)가 다시 돌아와서 내란을 수습했고, 그 후에 <성복(城濮)의 싸움(기원전 632년)>에서 초(楚)를 격파한 후 강대한 패자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문공(文公)이 천하를 경영하게 되었다.

 중이(重耳=文公-기원전 696년부터 기원전 628년)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였고, 성(姓)은 희(姬), 휘(諱)은 중이(重耳), 시(諡)는 문(文), 진(晋)의 공자(公子)였다. 하지만 공자(公子) 시절에 일어났던 내란으로 인해서 그는 19년이나 제국(諸國)을 방랑했으며, 귀국 후에는 군주가 되어서 천하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후에 제(齊)의 환공(桓公)과 함께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 칭해졌고, 춘추오패의 대표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가계(家系)는 원래 진(晋)의 분가(分家)였는데, 그러나 그는 무공(武公)의 대에 본가(本家)를 멸하고 스스로 진공(晋公)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는 무공(武公)의 아들이었던 헌공(獻公)과 적(狄-白狄)족(族)의 딸이었던 호희(狐姬)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하지만 그 헌공(獻公)에게는 중이(重耳) 외에도 태자(太子)였던 형 신생(申生-重耳와는 異母兄)과 아우였던 이오(夷吾-후의 惠公) 등이 있었다.

 ○ 이오(夷吾=惠公-?부터 기원전 637년 10월)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군주(재위는 기원전 650년부터 기원전 637년)였고, 성(姓)은 희(姬), 휘(諱)는 이오(夷吾)였으며, 헌공(獻公)의 제3자(子)였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지(機智)가 풍부했다고 알려졌으며, 태자였던 신생(申生)이 죽은 후에는 중이(重耳)와 함께 차기 군주의 후보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러나 여희(驪姬)가 해제(奚齊)를 낳자 굴읍(屈邑)에 봉해졌다. 그 후, 기원전 652년에 여희(驪姬)가 헌공(獻公)을 암살했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극예(郤芮)의 헌언(獻言)을 따라서 양(梁)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651년에 이극(里克) 등, 진(晋) 국내의 대부(大夫)들에 의해서 해제(奚齊)와 그 후를 이을 도자(悼子)가 차례로 살해당하자, 그는 진(秦) 목공(穆公)의 후원을 받아서 귀국했다. 그리고는 그 다음해였던 기원전 650년에 진공(晋公)이 되었다. 그 후, 군주가 되었던 혜공(惠公)은 당시 자신보다 이름이 높았던 중이(重耳)가 귀국할 것을 염려해서 자객(刺客)을 보냈다거나,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 그리고 해제(奚齊)와 도자(悼子)를 살해하고 자신을 맞이했던 그 이극(里克) 등의 대부(大夫)들 조차도 아주 엄하게 탄압했다. 그런데다 또 당시, 진(晋)에서는 연년(連年) 흉작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기원전 647년에 혜공(惠公)은 앞에 자신을 도와주었던 진(秦)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그 내용 역시도 앞에서 기술되었기 때문에 일단 생략하며, 그 결과로 기원전 645년에 혜공(惠公)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러자 또 그 배은망덕했던 혜공(惠公)에 진(秦)의 목공(穆公)은 대노(大怒)해서 응전했는데, 그것이 <한원(韓原-현재 陝西省 韓城市)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또 그 결과 진(晋)은 패했고, 진(秦)은 압승을 거두었으며, 혜공(惠公)은 포로의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이야기도 앞에서 소개가 되었으므로 일단 생략하며, 그는 기원전 637년 10월에 죽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인재(人才)를 좋아했기 때문에, 17세가 되던 때에는 조쇠(趙衰), 호언(狐偃), 가타(賈佗), 선진(先軫) 그리고 위주(魏犨) 등을 자신의 곁에 두었는데, 그들은 나중에 중이(重耳)의 패업(霸業)을 크게 도운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몸집이 아주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것은 또 자신의 아버지가 태자(太子)였을 때부터 그는 이미 어른의 체격을 하고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술된 대로, 그 후로 여희(驪姬)의 음모가 진행됨에 따라서 그도 변방으로 쫓겨 갔고(蒲), 그러자 여희(驪姬)는 신생(申生)을 함정에 빠뜨려서 누명을 씌운 후에 자살시켰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독살미수였다. 그 후, 안심을 할 수 없었던 여희(驪姬)는 중이(重耳)까지 죽이려고 환관이었던 발제(勃鞮)란 자를 파견해서 중이(重耳)를 자살시키려고 획책했다. 그러자 또 중이(重耳)는 그 술책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도망을 기도했고, 그러자 또 그것을 막으려고 발제(勃鞮)가 경계를 더욱 엄중히 폈지만, 그러나 결국 중이(重耳)는 도망에 성공해서 그의 어머니의 출신지였던 백적(白狄)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후, 중이(重耳)는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국외(國外)로 망명했다.

 ○ 조쇠(趙衰-?부터 기원전 622년)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으며, 성(姓)은 영(贏), 씨(氏)는 조(趙), 휘(諱)는 쇠(衰), 자(字)는 자여(子餘), 시(諡)는 성(成)이었고, 조성자(趙成子)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그는 대부(大夫)였던 조숙(趙夙)의 동생이었으며,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조(趙)나라의 시조였다. 그는 헌공(獻公)의 공자(公子)들 중에서 점(占)을 쳐본 결과 길점(吉占)이 나왔던 중이(重耳)를 선택했고, 기원전 653년에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하자 중이(重耳)와 함께 망명 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 후, 19년에 걸쳤던 제국(諸國)에의 방랑이 이어졌고, 그러던 중 적(狄)에서 숙외(叔隗-重耳의 妾이 되었던 季隗의 언니)를 만나서 취처(娶妻)했다. 그러자 그 후, 숙외(叔隗)는 장차 조(趙)나라의 기초를 세우게 될 조순(趙盾)을 낳았다. 그리고 또 다음, 기원전 645년에 진(晋)에서 중이(重耳)의 동생 이오(夷吾)가 혜공(惠公)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그는 중이(重耳)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나머지 자객을 보냈고, 그러자 또 그는 중이(重耳)와 함께 제(齊)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그 도중에 그들은 위(衛)의 땅을 지나야만 했는데, 그러나 그 위공(衛公)은 그들을 반겨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그들은 이미 다 떨어진 식량 때문에 근처 농가에서 구걸을 해야 했지만, 그러자 또 그곳의 농민은 그릇에다 흙만 가득 담아서 내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또 중이(重耳)가 그것을 보고 대노(大怒)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조쇠(趙衰)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하자 중이(重耳)가 그대로 따라했다. <흙을 얻었다는 것은 이곳의 땅을 얻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를 다해서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그런 다음 또 기원전 637년에 중이(重耳)가 초(楚) 성왕(成王)의 초대를 받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성왕(成王)은 중이(重耳)의 인품을 알아보고 극진히 대접했다. 하지만 그에도 중이(重耳)는 예법에 서툴렀는데, 그러자 또 조쇠(趙衰)가 중이(重耳)를 가르쳐서 중이(重耳)가 예(禮)를 다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또 동년(同年), 진(秦)의 목공(穆公)이 중이(重耳)를 반겨 맞았으며, 기원전 636년에는 드디어 중이(重耳)가 귀국길에 올라서 진군(晋君)에 즉위했고, 그로서 문공(文公)이 되었다. 그 후, 조쇠(趙衰)는 문공(文公)의 딸이었던 조희(趙姬)를 아내로 맞이했으며, 그리하여 새롭게 조동(趙同), 조괄(趙括), 조용제(趙嬰齊) 3명의 자식을 생산했다. 그런데 그때, 당연히 조희(趙姬)가 정처(正妻)가 되어야 했지만, 그러나 그 조희(趙姬)가 원해서 숙외(叔隗)가 정처가 되었으며, 그것으로 또 조순(趙盾)이 적자(嫡子)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는 문공(文公)의 패업을 도왔으며, 기원전 635년에 진(晋)이 주(周)의 양공(襄公)으로부터 그 땅을 하사받았을 때는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또 기원전 629년에는 상군(上軍)의 좌(佐-將을 돕는 職으로, 부대장 정도)였던 호모(狐毛)가 죽자 그 후임을 맡았으며, 기원전 625년에는 중군(中軍)의 좌(佐)에도 임명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622년에 그는 사망했으며, 사후 성(成)이란 시(諡)가 내려졌고, 그리하여 조성자(趙成子)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아들 조순(趙盾)은 진(晋)의 재상이 되었으며, 그 후에 독립해서 조(趙)의 기초를 다졌다.

 ○ 호언(狐偃)은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정치가였고, 자(字)는 자범(子犯)이었으며, 구범(舅犯) 또는 구범(咎犯)으로도 불렸다. 그의 아버지 호돌(狐突)은 원래는 적(狄) 출신이었지만, 그러나 나름대로의 선견지명을 갖춘 덕으로 진(晋)의 무공(武公)을 섬겼다. 그리고 그 무공(武公)의 아들이었던 헌공(獻公) 대에 이르자, 호돌은 자신의 두 아들(형 狐毛와 동생 狐偃)에게 중이(重耳)를 섬기게 했으며, 그것은 또 그 중이(重耳)의 생모가 적(狄) 출신이었던 데다가, 그 그릇도 당연히 패자(覇者)의 그릇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하자 진(晋)은 곧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러던 중에 중이(重耳)를 주군(主君)으로 세워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자 중이(重耳)는 어느 정도 마음이 동했던가 보지만, 그러나 또 그때, 호언(狐偃)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중이(重耳)를 말렸다. <군주(君主-奚齊)를 죽인 신하들의 손에 의해서 받들어진 군주(君主)의 자리는 불길(不吉)합니다> 그 후, 중이(重耳)는 망명길에 올랐고, 호언(狐偃)도 그 길을 함께 따라나섰다. 그리고 어느 때 일행이 기아(飢餓)에 허덕이면서 오록(五鹿)이란 곳을 지나가고 있었을 때, 그곳의 농민에게 음식을 구걸했지만, 그러나 그 농민은 그릇에다 흙만 가득 담아서 내왔을 뿐이었다. 그러자 중이(重耳)가 몹시 노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호언(狐偃)이 다음과 같이 말을 해서 중이(重耳)를 기쁘게 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곳의 백성이 이 땅을 공자께 헌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는 후일(後日), 반드시 이 땅을 손에 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들이 제(齊)로 들어갔을 때, 당시의 패자(覇者)였던 환공(桓公)은 그 일행들을 환대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들을 이 제(齊)의 대신(大臣) 자격으로 대할 것이니,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제(齊)를 도와줄 것을 부탁하오!> 그러자 중이(重耳)는 몹시 기뻐했지만, 그러나 그때 또 호언(狐偃)이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우리들은 패자(覇者-重耳)의 가신(家臣)이 되기 위해서 공자(公子)를 따라온 것이지, 제(齊)의 신하가 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그 후에 중이(重耳)의 처(妻)였던 제강(齊姜)과 조쇠(趙衰)와 함께 상의해서, 중이(重耳)를 취하게 한 후에 마차에 태우고는 억지로 제(齊)를 떠났다. 그러자 또 술이 깨고 난 후에 중이(重耳)는 대노(大怒)해서 호언(狐偃)을 죽이려고까지 했지만, 그러나 또 그때 호언(狐偃)이 이렇게 말을 했다. <제가 죽고 없어도 공자께서 성공할 자신이 있으시다면 원대로 하십시오!> 그러자 또 중이(重耳)가 화를 억누르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좋다! 하지만 당신의 말대로 내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당신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을 것이다!> 그러자 또 호언(狐偃)이 이렇게 말을 했다. <혹시라도 공자께서 성공을 하지 못하신다면, 저는 굶어서 죽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마도 그 고기는 별로 먹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중이(重耳)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것으로 중이(重耳)는 자기 가신들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그러자 또 그 후로는 스스로 진(晋)으로 다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점점 더 학문과 수양에 매진(邁進)했다. 그리고 그 후, 제(齊)의 환공(桓公)과 송(宋)의 양공(襄公) 그리고 진(秦)의 목공(穆公) 등, 당시 춘추시대를 대표하던 명군(名君)들의 지원을 받았던 중이(重耳)는 드디어 진(晋)으로 돌아가서 문공(文公)이 되었고, 그러자 또 호언(狐偃)은 귀국한 후, 그 문공(文公)의 패업을 크게 도왔다. 그리고 또 그 후, 주(周)의 양왕(襄王)이 <숙대(叔帶)의 난>을 피해서 정(鄭)으로 망명했는데, 그리고는 제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 권위가 저하되었던 주(周)왕실을 구해줄려는 제후들은 없었는데, 그러자 또 호언(狐偃)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군(君-文公)은 왕(王-襄公)을 도와서 배성들에게 그 의(義)로움의 본보기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문공(文公)은 군사를 일으켜서 그 난을 평정했다. 그러자 또 문공(文公)은 그 공을 인정받아서 왕실로부터 온(溫)과 원(原) 등, 중앙에서 가까운 땅을 하사받았고, 그것이 또 후에 진(晋)이 대발전을 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또 문공(文公)은 왕실을 구하고 세상에 의(義)를 보였던 것으로 해서 그 이름을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 위주(魏犨-생몰불명)는 중국 춘추시대 진(晋)의 무장이었고, 성(姓)은 희(姬), 씨(氏)는 필(畢)이었지만, 나중에 위(魏)로 바꾸었으며, 휘(諱)는 주(犨), 시(諡)는 무(武)였다. 그리고 그는 필만(畢萬)의 손자였으며, 그래서 또 필주(畢犨) 또는 위무자(魏武子)라고도 불렸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던 전힐(顚頡)이란 자와 함께 중이(重耳)를 섬겼으며, 나중에 중이(重耳)가 망명을 떠났을 때도 항상 중이(重耳)를 호위하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리고 기원전 637년에 중이(重耳)가 귀국해서 진공(晋公)의 자리에 오르자, 그도 위(魏) 씨(氏)의 당주(當主)가 되었으며, 그리고 또 기원전 633년에 삼군(三軍)이 창설되자 그는 문공(文公)의 차우(車右-왕의 수레를 모는 사람)가 되어서 문공(文公)을 계속해서 호위했다. 하지만 기원전 632년에 문공(文公)이 조(曹)를 공략했을 때, 중이(重耳) 방랑시절에 신세를 졌던 희부기(釐負羈 또는 이부기)의 집만은 불 지르지 말 것을 명받았지만, 그러나 그는 친구였던 전힐(顚頡)과 함께 그 집을 불태워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그는 부상을 당했으며, 그 일로 해서 또 전힐(顚頡)은 사형에 처해졌지만, 그러나 그는 부상의 중태(重態)였던 점을 감안해서 차우(車右)에서 면직되는 것만으로 그 일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또 그에게는 위기(魏錡)와 위과(魏顆) 그리고 위강(魏絳) 3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위강(魏絳)의 계통이 그 위(魏) 씨(氏)의 계보를 이었으며, 나중에 전국칠웅(戰國七雄) 때의 위(魏)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시(諡)는 무(武)로 내려졌으며, 그것으로 위무자(魏武子)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무튼, 그가 백적(白狄)으로 망명했을 때, 그의 나이 이미 43세였다고 하며, 그리고 또 그때, 그 백적(白狄) 족과 적대관계에 있었고, 그래서 또 그 백적(白狄) 족에 의해서 멸해졌던 적적(赤狄) 족의 자매(姉妹)가 중이(重耳)에게 보내졌는데, 그러자 중이(重耳)는 그 중에서 언니였던 숙외(叔隗)를 취했으며, 동생 계외(季隗)는 조쇠(趙衰)가 취했다. 그 후, 중이(重耳)가 그 백적(白狄)에 망명한지 5년째 되었던 해, 헌공(獻公)이 훙거(薨去)했다. 그러자 이미 전술(前述)했던 대로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했으며, 한동안 진(晋)에서는 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혼란이 진정되자 이극(里克)이 중이(重耳)를 진공(晋公)에 모시기 위해서 사자를 보냈지만, 그러나 중이(重耳)는 살해의 위협을 느끼고는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그 자리는 이오(夷吾)가 차지했으며, 혜공(惠公)이 되었다. 그리고 또 그 뒤의 이야기 역시 전술(前述)되었으며, 그러자 또 역시, 중이(重耳)는 살해의 두려움을 느끼고는 제(齊)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출발 시에 중이(重耳)가 숙외(叔隗)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나를 25년만 기다려주시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재혼을 하시오> 그러자 숙외(叔隗)가 웃으면서 또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만약에 25년이나 기다리게 된다면, 저의 묘(墓)에 심어둔 측백(柏)나무도 아주 크게 자라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는 당신을 끝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그 후, 중이(重耳) 일행은 전술(前述)한 대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제(齊)에 도착했고, 그러자 환공(桓公)은 그들을 후대했다. 그리고 그들이 그 제(齊)에서 5년이 지났을 즈음, 제(齊)의 환공(桓公)이 훙거(薨去)했고, 그러자 또 그 후계를 둘러싸고 격심한 내란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때는 또 이미 환공(桓公)의 딸(齊姜)을 부인으로 거두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중이(重耳)는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호언(狐偃)과 조쇠(趙衰) 등은 그 중이(重耳)를 제(齊)에서 빼내려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그때, 제강(齊姜)의 시녀(侍女)가 그들이 말하던 것을 몰래 훔쳐듣고는 제강(齊姜)에게 고해바쳤다. 그러자 또 제강(齊姜)은 누설(漏泄)의 두려움을 느껴
서 그 시녀를 죽이고는 중이(重耳)에게 하루빨리 제(齊)를 떠날 것을 독촉했다. 그러나 중이(重耳)는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러자 또 제강(齊姜)은 호언(狐偃) 등과 밀담해서 중이(重耳)를 취하게 한 후, 차에 태워서 제(齊)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또 그 뒤의 이야기는 전술(前述)한 바와 같으며, 아무튼 그 후에 그 일행들은 조(曹)로 들어갔지만, 환영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례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자 그들은 서둘러서 송(宋)으로 다시 들어갔으며, 그러자 또 당시 초(楚)와의 전쟁(泓水의 싸움)에서 지고 낙담해 있던 양공(襄公)이 그들을 환대했다. 그리고 환공(桓公)과 같이 20승(乘-당시의 戰車 4頭 마차였기 때문에, 80頭)의 말을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당시, 송(宋)으로서는 그 이상의 조력(助力)은 무리였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초(楚)로 향했는데, 그런데 그 도중에 정(鄭)에 들러서 의향을 물었지만, 냉대만 당했다. 하지만 초(楚)의 성왕(成王)은 그들을 환대했고, 그 다음의 이야기는 전술(前述)했던 바와 같았다. 아무튼 또 기원전 637년에는 진(晋)의 혜공(惠公)이 사망했으며, 그러자 또 그때 진(秦)에서 인질로 잡혀있었던 태자 어(圉)가 진(秦)을 탈출해서 진공(晋公-懷公)이 되었다. 그러자 또 진(秦)의 목공(穆公)은 그것을 괴심하게 여기고는 당시 초(楚)에서 망명 중이던 중이(重耳)를 그 진공(晋公)에 앉히려고 불렀다. 그리고 그해 12월, 진(晋)의 중신(重臣)들과도 은밀하게 내통하고 있었던 중이(重耳)는 진군(秦軍)을 거느리고 진(晋)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또 당연히 진군(晋軍)이 중이(重耳)를 맞으러 나왔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평판을 잃었던 혜공(惠公)과 그의 아들 회공(懷公)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울 군사는 적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오히려 중이(重耳) 편이 되어서 회공(懷公)의 측근들을 멸했다. 그리하여 중이(重耳)는 결국 문공(文公)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62세였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오히려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그 후였던 기원전 635년에는 반란으로 도망을 왔던 주(周)의 양왕(襄王)을 도와서 반란을 진압했고, 기원전 632년에는 초(楚)의 공격을 받았던 송(宋)에 원군을 보냈다. 그러자 또 성왕(成王)은 회군을 결정했지만, 그러나 또 전술(前述)했던 대로 자옥(子玉)이 고집을 부려서 싸움은 시작되었는데, 그러자 또 문공(文公)은 과거 성왕(成王)과 약속했던대로, 전군(全軍)을 삼사(三舍) 후퇴시켰다. 하지만 결국 문공(文公)은 그 싸움에서 이겼으며, 그것으로 천하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628년에 사거(死去)했으며, 그 생전의 공적에 따라서 시호(諡號)는 문(文)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또, 그의 재위는 비록 9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 행해졌던 업적들은 그를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려놓게 하기에 충분하게 했고, 그것으로 또 그는 환공(桓公)과 나란히 춘추오패의 필두가 되었다. 


 <晋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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