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3)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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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
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
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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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그 후였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섰을 때쯤부터는 왕족과 종족(宗族)의 수가 지나치게 많게 되었고, 그러자 또 각각의 의견이 달라서 중원(中原)에 대한 적극적인 전략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 거기다가 <오기(吳起)>란 자가 위(魏)로부터 망명을 왔을 때, 그는 도왕(悼王)의 신임을 얻어서 국정개혁을 단행했으며, 그리하여 또 일시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러나 또 그 도왕(悼王)이 죽어버리자 오기(吳起)도 살해되었으며, 그래서 또 국왕의 권력은 처음처럼 각 왕족들에게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 오기(吳起-?부터 기원전 381년)는 중국 전국시대의 군인으로, 정치가였고, 군사사상가(軍事思想家)였다. 그는 또 손무(孫武), 손빈<孫臏-孫武의 자손으로 알려졌으며, 孫武와 함께 孫子로 불려졌던 인물이었다. 저작에 손빈병법(孫臏兵法)이 있으며, 기회가 되면 다음에 소개함>과 함께 병가(兵家)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가 생전에 행했던 병법(兵法)은 별명으로 <손오(孫吳)의 술(術)>이라고도 불렸으며, 그가 죽은 후에 나왔던 <오자(吳子)>의 원작자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들은 오기(吳期)가 있었다.

 참고: 1. 별록(別錄)은 중국 한(漢)나라 때 유향(劉向)이 펴낸 장서(藏書-秘書) 목록 집으로, 조정의 장서목록과 해제집(解題集)을 모아 엮은 것이며, 칠략(七略)의 처음 이름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때 없어져서 오늘날은 일부(20권)만 전한다고 하며, 그리고 또 칠략(七略)은 역시 유향의 별록(別錄)에 입각해서 그의 아들이었던 흠(歆)이 지었던 서적 분류목록이었으며, 집략과 육예략 그리고 제자략, 시부략, 병서략, 술수략, 방기략으로 분류하였던 것이었다. 3만 2000권.

 2. 그리고 그 별록(別錄)에 의하면 <노(魯)의 좌구명(左丘明)이 춘추좌씨전을 작성해서, 그것을 제자였던 증신(曾申-曾子)에게 전했고, 그러자 또 그 증신은 자신의 제자 오기(吳起)에게 그것을 전했으며, 오기(吳起)는 다시 그것을 자신의 아들 오기(吳期)에게 전했고, 오기(吳期)는 제자였던 초(楚)의 탁초(鐸椒)에게 전했으며, 탁초(鐸椒)는 다시 제자였던 조(趙)의 우경(虞卿)에게 전했고, 그 우경(虞卿)은 다시 제자였던 순경(荀卿-荀子/荀況)에게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그는 위(衛)의 좌씨(左氏-현재의 山東省 菏沢市 定陶県) 출신의 사람이었고, 증자(曾子-曾申 또는 曾參. 공자의 제자)에게 배웠다고 했지만,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효자라는 낙인이 찍혀서 파문(破門)당했다. 그리고 또 그때, 그가 그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가 일찍이 벼슬을 하기 위해서 각지를 떠돌았는데, 그런데 그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가산(家産)만 탕진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이 자신을 바보라고 비웃은데 격분해서 고향사람들을 죽인 일로 해서(일설에 의하면, 그때 고향사람 약 30여 명을 죽이고는 曾子에게로 갔다고 함)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두말없이 증자(曾子)의 문하를 떠났던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그 후, 그는 노(魯)의 원공(元公)이었던 가(嘉)를 찾아가서 장군이 되었는데, 그런데 또 그때, 그는 자신의 아내가 제(齊)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노(魯)의 입장에서 적국(敵國)의 사람이었던 자신의 아내를 미리 죽였던 것으로 해서 가(嘉) 등의 의심을 풀고 장군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 일은 또 그의 인격에 대한 불신감을 낳게 했고, 그러자 또 노(魯)의 대부(大夫)들은 그를 두고 <오기(吳起)란 자는 장군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노(魯)와 형제의 나라인 위(衛)를 독단으로 침략한 이상한 사람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그러자 또 그 말을 들었던 원공(元公)은 그를 징계면직(懲戒免職)했고, 그로써 그는 실각(失脚)했다. 그러자 또 그는 신변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다시 위(魏)의 문후(文侯)에게로 도망쳤다.(그러나 그는 그 사이에 齊를 쳐서 魯를 강국으로 만들어놓았다고 함)

 그러자 또 문후(文侯)는 당시 위(魏)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1,2를 다투던 명군(名君)으로, 적극적으로 인재를 등용해서 위(魏)의 국력을 상승시키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오기(吳起)가 위(魏)로 들어왔다고 하자 가신(家臣)이었던 이극(李克)이란 사람에게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이극(李克)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는 성격이 탐욕적이고,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흠이지만, 그러나 군사(軍事)적으로는 명장(名將) 사마양저(司馬穰苴-중국 춘추시대 齊의 장군. 기회가 되면 다음에 소개함)도 그를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자 문후(文侯)는 그를 등용하기로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그 후, 오기(吳起)는 군중(軍中)에 있을 때, 병사들과 같은 것을 먹고, 그 병사들과 같은 곳에서 잠을 잤으며, 그 병사들 중에서 상처가 나서 고름이 생긴 병사가 생기자, 그는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빨아냈다. 그런데 또 어느 때, 그가 다른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빨고 있었을 때, 그의 어머니가 옆에 있다가 탄식했다. 그러자 그가 물어보자 그 여자가 이렇게 답을 했다. <장군께서는 저 아이 아버지의 고름도 빨아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그 사람은 장군의 행동에 감격해서 목숨을 바쳐서 적과 싸웠고, 그리고는 전장에서 장열하게 전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장군께서 저 아이의 고름도 빨아내어주고 있으니, 장차 저 아이도 그 사람과 같이 그렇게 장열하게 죽을 것 같아서 이렇게 미리 탄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여인의 이야기가 시사(示唆)해주는 바와 같이, 당시 병사들은 모두 그의 행동에 감격해서 그를 신복(信服)처럼 따르면서 목숨도 아끼지 않고 싸웠기 때문에, 그래서 그 군대는 압도적으로 강했다고 한다. 그러자 또 오기(吳起)는 그런 군사들을 이끌고 진(秦)을 쳤으며, 그리고는 5개의 성을 빼앗았다. 그러자 또 그 공적이 인정되어서 그는 서하(西河)의 태수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로 진(秦)과 한(韓)을 견제하게 되었
다.

 그리고 또 그 후, 문후(文侯)가 죽고 그 아들이었던 무후(武侯)가 즉위하자 전문(田文-孟嘗君과는 同名異人)이란 자와 재상(宰相)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지만, 그가 졌다. 그러자 또 그는 그에 불복(不服)해서 전문(田文)을 찾아갔고, 그리고는 군략(軍略)과 정치력 그리고 제후(諸侯)들에의 위신 등에 대해서 그와 전문(田文) 중 누가 더 뛰어났는가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전문(田文)이 이렇게 말을 했다. <그 3가지 중에서 내가 당신보다 더 뛰어난 것은 하나도 없소! 하지만 지금의 주군(主君)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백성들로부터의 신망이 약하오! 그러면 이런 상태에서 당신과 나 중에서 누가 재상(宰相)이 되면 더 좋겠소?!> 그러자 오기(吳起)는 자신이 재상(宰相)의 재목이 아님을 알고 그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 전문(田文)이 죽자 문후(文侯)의 사위였던 공숙모(公叔某)란 자가 재상의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자는 오기(吳起)를 아주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처(妻)의 동생이었던 무후(武侯)에게 오기(吳起)를 참언했다. 그러자 또 무후(武侯)는 그때부터 오기(吳起)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또 공숙모(公叔某)는 오기(吳起)를 함정에 빠뜨릴 책략까지 획책했으며, 이윽고는 오기(吳起)에게 반역의 누명까지 씌우려고 했기 때문에 오기(吳起)는 다시 초(楚)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또 마침 초(楚)의 도왕(悼王)은 그를 반겨 맞아주었고, 그리고는 그를 재상의 자리에 올려주었다. 그러자 또 그는 법가(法家)적인 사상을 토대로 해서 국정개혁을 실시했으며, 그리고 또 당시, 그 초(楚)에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종족(宗族)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상대적으로 왕권은 약했는데, 그래서 또 오기(吳起)는 법 준수의 철저와 불필요한 관직의 폐지 등, 제(諸) 개혁을 실시하는 것으로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러자 또 그 결과 국고(國庫)는 전보다 풍족하게 되었으며, 그러자 또 그는 그것으로 군을 양성하여 부국강병에 힘썼고, 그것으로 또 왕권강화에도 성공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후세에 그 일을 두고 오기(吳起)가 법가(法家)의 원조(元祖)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었지만,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아주 오래된 수법으로, 그 전의 관중(管仲)이라거나 또는 태공망(太公望) 같은 사람들도 이미 비슷하게 썼던 수법이었다.

 아무튼, 그러자 또 그로 인해서 힘을 잃게 되었던 귀족들은 점점 더 불만이 강해졌고, 그 결과로 또 그 모든 한(恨)은 당연히 오기(吳起)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 그때, 오기(吳起) 자신도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하지만 또 그때까지 자신의 뒤를 밀어주던 도왕(悼王)이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당분간은 무사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던 기원전 381년에 고령의 도왕(悼王)이 사망했고, 그러자 또 그와 동시에 오기(吳起)를 죽이겠다던 무리들이 궁중으로 난입했다.

 하지만 또 그때는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던 오기(吳起)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었던 그 도왕(悼王)의 시신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폭도들은 그를 향해서 마구잡이로 활을 쏘았고, 그러자 또 그 화살들은 도왕(悼王)의 사체에도 꽂혔다든지, 오기(吳起)의 몸에도 꽂혔다든지 해서 결국 오기(吳起)는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또 잠시 초(楚)에는 정치의 공백기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 후에 도왕(悼王)의 뒤를 이었던 숙왕(肅王)이 왕위에 등극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그때 자신의 아버지였던 도왕(悼王)의 몸에도 화살을 쏘았던 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왕의 유체를 건드린 자는 죽을 죄-楚의 법률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과거 伍子胥가 왕의 사체에 채찍을 가했던 일로부터 생겼던 법률이었다>다. 그런 다음, 그는 그때 화살을 쏘았던 자들을 찾아내서 대역(大逆)의 죄로 일족(一族) 전원을 처형했지만, 그러나 오기(吳起)의 죽음으로 인해서 초(楚)의 개혁은 미완으로 끝나게 되었다.

 그 후, 기원전 334년에 위왕(威王)은 공격해왔던 월왕(越王) 무강(無疆)의 군세를 파(破)했으며, 역으로 월(越)을 침공해서 그를 멸했다.

 그 다음, 제20대 째의 회왕(懷王)의 시대에는, 그때 이미 압도적으로 강국이 되어있었던 진(秦)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로 가신들이 친진파(親秦派)와 친제파(親齊派)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또 그때, 친제파의 필두였던 <굴원(屈原)>은 회왕(懷王)에게 진(秦)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굴원(屈原)은 친진파의 뒤를 봐주고 있던 진(秦)의 재상 장의(張儀)의 책략에 의해서 실각했고, 이어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어졌던 초(楚)의 조정은 장의(張儀)의 책략에 마음대로 놀아났고, 그러자 또 결국, 회왕(懷王)은 진(秦)에 유폐(幽閉)되어서 사망했다.

 ○ 굴원(屈原-기원전 343년 1월 21일부터 기원전 278년 5월 5일?)은 초(楚)의 정치가였고, 시인이었다. 성(姓)은 미(羋)였고, 씨(氏)는 굴(屈) 그리고 휘(諱)은 평(平) 또는 정칙(正則), 자(字)는 원(原)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시인(詩人)이었으며, 정치가로서는 진(秦)의 장의(張儀)에 의한 책략을 미리 간파하고 회왕(懷王)에게 필사적인 간언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러자 초(楚)의 장래에 절망해서 물에 투신해서 자살했다.

 그는 초(楚) 무왕(武王)의 공자(公子) 하(瑕-屈瑕)를 조상으로 했던 공실(公室)계의 종족(宗族-廣義의 왕족) 중 한사람이었고, 굴(屈)씨(氏)는 경(景)씨(氏)・소(昭)씨(氏)와 함께 초(楚)의 왕족 계에서도 최고 명문(名門)의 하나였다.(그것을 3閭라고 불렀다) 그리고 또 그 가문에 더해서 그는 박문강기(博聞强記-사물을 널리 들어 알고서 그것을 잘 기억함)에다 시문(時文)에도 특히 뛰어났었기 때문에, 그래서 회왕(懷王)은 그를 깊이 신임했고, 그리하여 그는 좌도(左徒)가 되었다.

 
참고: 左徒는 중국의 내정(內政)에서, 최고였던 영윤(令尹)을 보좌했던 좌윤(左尹)과 우윤(右尹) 아래의 직급으로, 그에는 또 좌도(左徒)와 사패(司敗)가 있었다. 그리고 또 그 좌도(左徒)는 굴원(屈原)과 춘신군(春申君)이 담당했던 적이 있었으며, 그러나 그보다 앞서서 사도(司徒)라는 관직이 있었고, 그래서 또 그 사도(司徒)를 보좌했던 직책이 좌우(左右)사도(司徒)였는데, 그런데 또 어떤 연유로 인해서 전국시대 경에 좌도(左徒)만 남았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무튼 당시, 초(楚)는 서쪽의 진(秦)과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고, 그래서 그 진(秦)과 동맹을 맺어서 편하게 가자는 친진파와, 동쪽의 제(齊)와 동맹을 맺어서 진(秦)에 대항하자는 친제파로 나뉘어져있었다. 그리고 굴원(屈原)은 친제파의 필두였으며, 정치능력도 아주 뛰어났고, 그리고 또 무엇보다 강직한 성품 때문에 그는 동료들로부터 질투(嫉妬)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참언까지 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때부터는 회왕(懷王)조차도 그는 멀리하게 되었으며, 그로서 초(楚)의 정책은 친진파로 기울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또 굴원(屈原)은 필사적으로 회왕(懷王)에게 간언해서 진(秦)은 신용할 수 없는 나라이므로 동맹을 맺어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곧 회왕(懷王)은 굴원(屈原)의 염려대로 진(秦)의 모략(謀略)가(家)였던 장의(張儀)의 꾐에 빠졌고, 그리하여 초군(楚軍)은 대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굴원(屈原)은 3여(閭)대부(大夫)의 자격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자 또 진(秦)은 회왕(懷王)에게 혼인을 핑계로 진(秦)으로 올 것을 요청했는데, 그러자 또 굴원(屈原)은 앞의 회왕(懷王)이 장의(張儀)의 꾐에 넘어갔던 일을 상기시키면서 회왕(懷王)을 말렸지만, 그러나 결국 회왕(懷王)은 친진파였던 공자(公子) 자란(子蘭)에게 설득당해서 진(秦)으로 갔고 그곳에서 감금되었다.

 그러자 왕을 잃게 된 초(楚)에서는 경양왕(頃襄王)을 옹립했고, 그 경양왕(頃襄王)은 또 굴원(屈原)을 싫어했던 자란(子蘭)을 영윤(令尹-丞相)에 앉혔기 때문에 굴원(屈原)은 다시 정계로부터 추방되었고, 이어서 강남(江南)으로 좌천되었다. 그러자 또 그 후, 진(秦)이 초(楚)의 수도 영(郢)을 함락했고, 그러자 또 그 소식을 들었던 굴원(屈原)은 절망했던 나머지 돌을 안고 멱라강(汨羅江-汨羅水는 中國 湖南省 湘陰縣의 북쪽에 있는 江으로, 서쪽으로 흘러서 湘江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戰國時代에 楚나라 三閭大夫였던 屈原이 周圍의 讒訴로 분함을 못 이겨 그곳에 빠져 죽은 곳으로도 有名하다. 지금은 汨水라고 부른다)에 투신해서 자살했다.

 그 후, 굴원(屈原)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 또는 망해(亡骸)를 물고기들이 잘 먹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물고기 밥으로 조릿대 잎(笹葉)에다 쌀밥을 넣어서 강에 던졌다고 전해지며, 그것이 또 종(粽-단옷날 등에 먹는 띠·조릿대 잎에 싸서 찐 찹쌀떡)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전설적인 경정(競艇)경기(競技)인 드라곤보트(dragon boat-龍船)는 <물에 빠진 굴원(屈原)을 구출해내려는 민중들이 앞을 다투어서 배를 냈다>라고 하는 고사에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또, 굴원(屈原)의 강렬했던 애국의 정(情)으로부터 나왔던 시(詩)들은 초(楚)의 노래집 초사(楚辭)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더욱 대표되었던 것은 <이소(離騷)>라고 알려져서 후세의 애국지사들로부터 애창(愛唱)되었다. 그리고 또 그의 작품 <어부사(漁父辭)>의 모두(冒頭) 굴원기방(屈原旣放-굴원은 이미 쫓겨났다)으로부터 철부지 같은 짓을 굴원(屈原)이라고 말했던 일도 있었다고 한다.




<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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