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紫禁城을 지키는 수호신 獅子>

中 國

<第 二 部 歷史>

3. 中国의 歷史的인 事件 年表


 * 참고 (20)


 <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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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
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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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晋의 위치도-左 赤圓>


 진(晋-기원전 1100년경부터 기원전 376년)은 현재의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주대(周代)와 춘추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국가였으며, 처음에는 당(唐)으로 불렸지만 나중에 개명해서 진(晋)이 되었다. 그리고 국성(國姓)은 희(姬)였고, 수도는 익(翼)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분가였던 곡옥(曲沃)이 익(翼)의 종가(宗家)를 멸한 후, 개명해서 강(絳)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옛날, 한때 주(周)의 성왕(成王)이 동생이었던 우(虞)와 함께 정원에서 놀았을 때, 그는 나뭇가지를 꺾어서 <이와 같이 너를 봉하노라>라는 봉건(封建)의식을 흉내 내는 놀이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성왕(成王)이 궁전으로 돌아갔을 때, 당시의 재상(宰相)이었던 윤일(尹佚)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성왕(成王)에게 하자, 성왕(成王)이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尹-그러시면, 우(虞)전(殿)을 어느 곳에다 봉하면 좋겠습니까?>

 <成王-무슨 말씀이시오?! 나는 단지 그와 놀이를 한 것뿐이요!>

 그러자 또 윤일(尹佚)이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모름지기 천자(天子)에게 허언(虛言)이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번 왕이 내뱉은 말은 번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성왕(成王)은 그 바로 얼마 후에 주공단(周公旦)이 당(唐)을 정벌하고 돌아왔을 때, 우(虞)를 그 당(唐)에 봉했으며, 그리하여 우(虞)는 당숙우(唐叔虞)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그 우(虞)의 아들 섭(燮) 때에 분수(汾水=汾河=중국 山西省을 南北으로 흐르는 큰 강으로, 渭河에 버금가는 黄河 第2의 支流)의 지류였던 진수(晋水) 근처에서 국명을 진(晋)으로 하여 개국했다.


 그리고 그 후 제11대 소후(昭侯)의 시대에 그 소후(昭侯)의 숙부였던 성사(成師)가 곡옥(曲沃)을 물려받아서 분가했으며, 성사(成師)는 죽은 후에 환숙(桓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환숙(桓叔)은 생전에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 곡옥(曲沃)이 번영을 누렸고, 그래서 곡옥(曲沃)은 당시의 수도(首都)보다도 더 번창하고 컸다지만, 그러나 그 후에 익(翼)의 본가와 그 곡옥(曲沃) 간에 다툼이 계속되었으며, 그러자 또 무공(武公)의 시대에 익(翼)의 민후(緡侯 또는 湣侯)를 멸하고 주가(主家)가 되었다.

 하지만 또 그 무공(武公)의 시대에 <여희(驪姬)의 난>이 발생했으며, 그 내용은 이미 전술(前述)한
바 있었다
. 그러자 또 그 후에 중이(重耳)가 다시 돌아와서 내란을 수습했고, 그 후에 성복(城濮)의 싸움(기원전 632년)에서 초(楚)를 격파한 후 강대한 패자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문공(文公)이 천하를 경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내분(內紛)에서 공족(公族)들의 수가 많이 격감했으며, 그래서 또 타국(他國)들에 비해서 그 공족(公族)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또 경공(景公)과 여공(厲公) 때에는 <측근정치>가 시도되기도 했으며, 적(狄)을 멸했다든가, 언능(鄢陵)의 싸움(기원전 575년)에서 승리했다는 것 등으로 해서 그 권위는 겨우 유지할 수는 있었지만, 그러나 또 그 여공(厲公)의 강경함이 반발을 불러서 그가 살해됨(기원전 573년)에 따라서, 도공(悼公)이 주(周)로부터 영접을 받았을 때는 신하(臣下)들에 대해서 결정적인 힘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진(晋)의 공실(公室)은 대부(大夫)들 힘의 균형에 편승해서 존재 유지하는 존재로 전락해갔고, 그리하여 또 경공(頃公) 때에는 공족(公族)으로부터 분리되었던 기(祁) 씨(氏)와 양설(羊舌) 씨(氏)가 멸해짐에 따라서, 그때부터 육경(六卿-後述)이 결정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였던 춘추 말기(末期)에 진(晋)은 사실상 범(范) 씨(氏)와 지(智) 씨(氏) 그리고 중행(中行) 씨(氏)와 조(趙) 씨(氏), 한(韓) 씨(氏), 위(魏) 씨(氏)의 5씨(氏) 6가계(家系-中行氏와 智氏는 원래는 같은 荀氏였고, 韓氏만 公族이었다)의 당주(當主)들에 의해서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6가계는 다른 유력 대부들을 배제하고 육경(六卿)을 세습했으며, 거기에다 또 출공(出公) 때에는 범 씨와 중행 씨의 영지를 지, 조, 한, 위 씨가 분할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때문에 출공(出公)이 분노해서 제(齊)와 노(魯)와 동맹을 맺고는 그 4씨(氏)를 토벌하려다가 실패했고, 그러자 또 출공(出公)은 그길로 제(齊)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그 도중에 사망(기원전 457년)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때문에 진(晋)의 공실(公室)은 완전히 힘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또 그 4씨(氏) 중에서 제일로 강력했던 지(智) 씨(氏)의 당주 지요(智瑤)는 한 씨와 위 씨를 이끌고 조(趙) 씨를 멸하려고 했고, 그러자 또 그 조 씨의 당주였던 조무휼(趙無恤)은 한 씨의 한호(韓虎)와 위 씨의 위구(魏駒)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하면서 지 씨와의 이간(離間)을 획책했는데 성공했다. <지(智) 씨는 욕심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내가 그들에게 먹히고 나면 그 다음은 당신들 차례가 될 것이오!>

 그렇게 해서 기원전 453년에 그 3가(家)에 공격당했던 지(智) 씨는 멸망했고, 그리하여 그 진(晋)은 조 씨와 위 씨, 그리고 한 씨가 나눠가졌으며, 그런 다음에는 그대로 독립했다. 하지만 진(晋)은 그런 와중에서도 곡옥(曲沃)과 강(絳) 2도시를 중심으로 했던 아주 조그마한 영토(魏에 포위된 형태로)라도 어떻게든 지켜나가면서 애공(哀公) 이하, 5대에 걸쳐서 존속했다. 그리고 또 기원전 403년에 주(周)의 위열왕(威烈王)에 의해서 조(趙)와 한(韓)과 위(魏) 3씨(氏)가 제후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그리하여 진(晋)의 공실과 그 3가(家)는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명목상의 군신관계조차도 없어지게 되었다.

 그 다음 기원전 376년에 진(晋)은 결국 한(韓)위(魏)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서 함락되었는데, 그런데 그때 진(晋)은 난공불락이었기 때문에 공격군들은 쉽게 진(晋)을 멸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 후에 최후의 군주였던 정공(靜公)은 성에서 쫓겨나서 서민이 되었고, 그로서 진(晋)은 결국 멸망했다. 그리고 그 뒤에 조(趙)와 위(魏) 그리고 한(韓) 그 3국(國)을 3진(晋)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하지만 또 그 각각을 진(晋)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 중에서도 특히 중앙에 위치했던 위(魏)를 진(晋)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또, 그 진(晋)의 군제(軍制)에 대해서도 잠시 언급하고 넘어가면, 진(晋)은 삼군(三軍)이었으며, 그 각각의 장군과 부장(副將)은 경(卿)이 취임했다. 그리고 또 그 6명을 6경(卿)이라고 불렀으며, 그 일군(一軍)의 병원(兵員) 수는 12500명이었다. 그리고 또 아래는 그 서열의 구성이므로 참고바랍니다.


 中軍의 장(將-제1위), 中軍의 좌(佐-제2위)
 上軍의 장(제3위), 上軍의 佐(제4위)
 下軍의 장(제5위), 下軍의 佐(제6위)

 그리고 위는 당시 주(周) 제도 하에 있어서 대국(大國)이 가질 수 있었던 최대의 군대였으며, 한때 새로운 삼군(三軍)을 구성해서 육군(六軍)으로 했던 적도 있었다지만, 그러나 곧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중군(中軍)의 장(將)에 취임했던 사람은 경(卿) 중에서도 필두(筆頭)였던 정경(正卿-宰相)이었으며, 그래서 또 중군(中軍)의 장하면 정경(正卿)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하지만 단, 그 정경(正卿)과 중군(中軍)의 장이 같은 의미는 아니며, 그리고 또 아래는 진(晋)의 역대 군주들에 대한 소개이므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참고바랍니다.

 <晋의 역대 군주>

 唐叔虞(생몰미상)
 
晋侯燮(생몰미상)
 
武侯(생몰미상)
 
成侯(생몰미상)
 
厲侯(생몰미상)
 
靖侯(기원전 이하 前. 858년-前841년)釐侯(前840年-前823年)
 
献侯(前822年-前812年)
 
穆侯(前811年-前785年)
 
殤叔(前784年-前781年)
 
文侯(前780年-前746年)
 
桓叔(前745年-前731年)…曲沃으로 分家
 
荘伯(前731年-前716年)
 
武公(前716年-前678年)
 
昭侯(前745年-前739年)
 
孝侯(前739年-前724年)
 
鄂侯(前723年-前718年)
 
哀侯(前717年-前710年)
 
小子侯(前709年-前706年)
 
湣侯(前706年-前679年)…曲沃의 武公에 죽임 당함
 
武公(前678年-前677年)…晋의 재통일 후 本家가 됨(前678年)
 
献公(前676年-前651年)
 
奚斉(前651年)
 
悼子(前651年)
 
恵公(前650年-前637年)
 
懐公(前637年-前636年)
 
文公(前636年-前628年)
 
襄公(前627年-前621年)
 
霊公(前620年-前607年)
 
成公(前606年-前600年)
 
景公(前599年-前581年)
 
厲公(前580年-前573年)
 
悼公(前572年-前558年)
 
平公(前557年-前532年)
 
昭公(前531年-前526年)
 
頃公(前525年-前512年)
 定
公(前511年-前475年)
 
出公(前474年-前457年)
 
哀公(前456年-前438年)
 
幽公(前437年-前420年)
 
烈公(前419年-前393年)
 
孝公(前392年-前378年)
 
静公(前377年-前376年)…晋의 三侯(韓哀侯・魏武侯・趙敬侯)에 의해서 멸해짐.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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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 장왕(莊王-?부터 기원전 591년. 재위 기원전 614년부터 기원전 591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제6대 왕이었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여(侶) 또는 여(旅), 시(諡)는 장(莊)이었다. 그는 또 초(楚)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최고의 명군(名君)으로 알려졌고, 춘추오패의 한명으로 손꼽아졌으며, 초(楚) 성왕(成王-6-18참고) 원(員)의 손자였고, 폭군이었던 상신(商臣-穆王)의 적자(嫡子)였다. 아들은 공왕(共王) 심(審).

 그는 처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던 사람으로, 목왕(穆王)이 죽자 즉위했다. 그런데 그 직후, 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공자(公子) 중 한사람이었던 섭(燮)이란 자가 모반을 일으켰다. 그러자 일단 수도와 왕실은 완전히 그 섭(燮)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섭(燮)도 자칭 왕 행세를 했지만, 그러나 반대세력이 확대됨에 따라서 신변에 위험을 느꼈던 섭(燮)은 장왕(莊王)을 구속해서 인질로 삼고는 북방으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는 진(晋)과 진(秦) 그리고 초(楚) 국경 근처의 상밀(商密)이라는 곳에서 반공(反攻)을 개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그런데 또 그 도중에 노(盧)라는 동네에서 섭(燮)은 살해를 당했고, 그것으로 장왕(莊王)은 자유의 몸이 되어서 수도로 다시 귀환했다.

 그 후, 장왕(莊王)은 정치를 완전히 방기(放棄)했고, 일야(日夜) 연석(宴席)을 벌리는 등하면서 간언(諫言)을 올리는 자가 있으면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그러자 가신들은 너무 황당해서 간언을 올리는 것도 삼가고 그런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지만, 그런데 또 그 3년째가 되던 해에 오거(伍擧-伍子胥의 祖父)란 자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제가 수수께끼를 하나 내보겠는데 한번 알아맞혀보십시오! 그러니까 어떤 새가 한 마리 있는데, 그 새는 3년 동안이나 전혀 날 생각도 하지 않고 또한 울 생각도 전혀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 새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그러자 장왕(莊王)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 <하지만 그 새는 일단 한번 나르기만 하면 하늘 끝까지에 닿을 것이고, 일단 울기만 하면,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큰소리로 울게 될 것이요. 그리고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내 잘 알겠으니, 이제 그만하시오!>

 그 후에도 그의 음탕함을 즐기는 짓거리는 계속되었지만, 그러나 또 태부(太夫)였던 소종(蘇從)이 죽을 각오를 하고 간언했기 때문에 장왕(莊王)은 그것을 기회 삼아서 그때까지의 의태(擬態)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그 3년 동안 온갖 어리석은 짓을 다하면서 자기 가신(家臣)들의 인물상을 시험했었다거나 지켜봤던 것이었고, 그 결과로 또 오거(伍擧)와 소종(蘇從)에게 국정을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눈에 들었던 새로운 인재들 수백(數百) 명도 등용시켰으며, 그와 더불어서 나쁜 신하 수백 명도 살해했다. 그리하여 또 그 고사(故事)로부터 진득하게 기회를 기다린다는 의미의 <울지도, 날지도 않는다>라는 말도 생겼다고 하며, 그리고 또 그와 비슷한 일화는 제(齊)의 명군(名君)이었던 위왕(威王)에게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국정(國政)을 재정비했던 장왕(莊王)은 용(庸)을 침략했던 것을 시작으로 해서 주변 제국(諸國)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그것으로 영토도 넓혔으며, 패자(覇者)로서의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원전 606년에는 군사를 주(周)의 수도 낙읍(洛邑) 교외에까지 주둔시켰고, 그러자 또 주(周)에서 사자가 오자 장왕(莊王)은 그 사자에게 구정(九鼎-중국 하(夏)나라의 우왕(禹王) 때에, 전국의 아홉 주(州)에서 거두어들인 금으로 만들었다는 솥으로, 주(周)나라 때까지 대대로 천자에게 전해진 보물이었다고 함)의 무거움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또 그 구정(九鼎)은 은(殷) 시대 때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왔던 전국(傳國)의 보기(寶器)로, 당시에는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것이었는데, 아무튼 그리고 또 그때 장왕(莊王)이 그것에 대해서 물어봤던 것은,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돌아가겠다는 뜻을 시사(示唆)했던 것뿐만이 아니라, 주(周)의 왕위를 찬탈(簒奪)할 수도 있다는 것을 돌려서 말을 했던, 그러니까 일종의 공갈(恐喝)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주(周)의 사자 왕손만(王孫滿)은 그런 공갈에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말을 했다. <문제는 그 솥(鼎)의 경중(輕重)에 있지 않고, 그 덕(德)의 유무(有無)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현재 비록 주(周)의 국력이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그 솥이 아직 주(周)의 왕실에 있다는 것은 그 덕(德)만은 아직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에 다름없습니다> 그러자 장왕(莊王)은 더 이상 반박을 하지 못했다는데, 어쨌든 그 고사(故事)로부터 또 <대놓고 황위(皇位)를 논하는 것> 또는 <면전(面前)에서 상대의 가치(價値)를 공공연하게 의심하는 것>을 <솥(鼎)의 경중(輕重)을 묻다 또는 세발솥의 경중을 묻다>라고 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것을 줄여서는 <문정(問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장왕(莊王)은 어느 날 밤에 신하들을 연회에 초대했다. 그러자 얼마 후에 많은 사람들이 취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연회가 한창 절정이었을 때, 정전(正殿-本殿)의 납촉(蠟燭-)이 바람에 꺼져버렸다. 그러자 또 그때, 장웅(蔣雄)이란 사람이 황후의 옷을 건드렸는데(그러니까 몸을 더듬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다른 곳에서는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표현한 곳도 있음), 그러자 황후가 깜짝 놀라서 곧바로 그의 갓끈(纓-관 뒤에 꼬리처럼 달린 장식)을 취하고는 그 사실을 장왕(莊王)에게 이렇게 고했다. <초가 꺼진 틈을 타서 누군가가 저에게 무례한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의 갓끈을 취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불을 켜게 되면 그 자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장왕(莊王)이 또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전부 불을 밝히기 전에 갓끈을 떼시오!> 그러자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모두 장왕(莊王)의 명에 따랐고, 그 때문에 장웅(蔣雄)도 죄를 면하게 되어서 그때부터는 마음 깊이 장왕(莊王)에 감사했다고 하며, 그래서 또 그런 연유로 그 연회의 이름은 <절영회(絶纓會)>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후에 초(楚)가 진(秦)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을 때, 그 장웅(蔣雄)은 <지금이 기회다!>라는 듯이 선봉에 섰고, 그 결과로 큰 공을 세웠다. 그러자 또 장왕(莊王)이 그 장웅(蔣雄)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물었다고 한다. <정말 잘 싸워줬다. 나는 네가 그 정도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목숨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싸워주었던가?> 그러자 장웅(蔣雄)이 또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저를 구해주신 분은 바로 왕이시며, 절영회(絶纓會) 때 황후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리고 위의 이야기는 자신의 관용으로 여자에게 빠지지 않고 오히려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 군주로서의 장왕(莊王)의 인격을 시사해주는 고사(故事)로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또 그 후, 장왕(莊王)은 진(陳)의 내란에도 관여해서 일시(一時) 병합했으며, 이어서 정(鄭)을 공격해서 진(陳)과 함께 속국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또 기원전 597년에는 정(鄭)의 원군으로 왔던 진군(晋軍)을 필(邲)에서 격파했고, 그러자 또 그때, 진군(晋軍)에서는 도망치는 배에 올랐던 병사들이 그 배가 전복될 것을 우려해서 뱃전을 붙잡고 있던 다른 병사들의 손까지 자르고 도망쳤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배 안에는 다른 병사들의 끊어진 손가락 등이 널려있었을 정도로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莊王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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