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戰國時代>
1. 춘추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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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오패는 춘추시대에 중국의 주(周)왕조에 이어서 천하를 거머쥐었던 강력한 힘을 가졌던 5인의 제후(諸侯)들을 의미하며, 그들을 패자(覇者)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5의 숫자는 오행설(五行說)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또 다소 무리(無理)라거나, 억지로 맞춘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다지 실정(實情)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그 5패(覇)로 할 것인가 라는 것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으며, 그것은 또 예를 들어서 맹자(孟子)는 제(齊)의 환공(桓公)과 진(秦) 목공(穆公) 그리고 송(宋)의 양공(襄公)과 진(晋)의 문공(文公) 그리고 초(楚)의 장왕(莊王)을 그 5패(覇)로 들었던 바 있었다.
아무튼, 그 후보로서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을 일단 거론할 수 있다.
斉의 桓公(在位紀元前685年 - 紀元前643年)
秦의 穆公(在位紀元前659年 - 紀元前621年)
宋의 襄公(在位紀元前651年 - 紀元前637年)
晋의 文公(在位紀元前636年 - 紀元前628年)
楚의 荘王(在位紀元前614年 - 紀元前591年)
呉王 闔閭(在位紀元前515年 - 紀元前496年)
呉王 夫差(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73年)
越王 勾践(在位紀元前496年 - 紀元前465年)
그리고 또, 그 패자(覇者)로 인정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1) 타국(他國)을 압도할 수 있는 강력한 국력과
2) 제후들을 소집해서 그 회맹(會盟-國際會議)의 회두(會頭)를 맡을 수 있고, 천하의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격을 가진 자.
3) 소국(小國)을 지키고, 이미 멸망한 나라를 부흥하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는 자.
4) 이적(夷狄)을 토벌하고, 중원(中原) 제국(諸國)의 안녕(安寧)에 공헌할 수 있는 자.
등의 적임자가 그 5패(覇)에 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당시, 그 조건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첫째 제(齊)의 환공(桓公)이 있었고, 그 다음은 진(晋)의 문공(文公)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 두 사람은 어느 문헌에도 반드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5패(覇)의 대표 격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또 그들은 제환진문(齊桓晋文)이라고도 불렸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 회맹의 의식에서는 소가 산채로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러자 또 패자(覇者)들은 그 소의 귀를 잘랐고, 그 다음에는 그곳에 모였던 회맹 자들 전원에게 그 피를 마시게 하고는 서약을 했기 때문에, 그래서 <소의 귀를 들다 또는 잡다> 또는 <좌지우지(左之右之)>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三晋 地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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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楚-?부터 기원전 223년)는 중국 주대(周代),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로, 현재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을 중심으로 했던 넓은 지역을 영토로 했던 나라였다. 그리고 수도는 영(郢)이었고, 그리고 또 그 이름은 같았지만, 그러나 그 장소는 여러 번 바뀌었다.(초의 위치는 위의 그림 참조)
초(楚)는 한민족(漢民族) 형성의 모체(母體)가 되었던 황하(黃河)문명계의 제(諸)민족들과는 이질적이었던, 장강(長江)문명의 흐름을 따랐던 남방(南方)의 이민족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던 나라였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고 또 그러했던 민족들은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서로 혼교(混交)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또 그 초(楚)를 구성했던 민족 또는 지배층이 어떤 민족이었던가, 또는 현대의 어느 민족과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 등에 관한 것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재의 호북(湖北)에서부터 호남(湖南) 그리고 귀주성(貴州省)에 점재(點在)하고 있는 먀오족의 선조들이 그 초(楚)의 건국에 크게 관계했고, 그래서 또 그 지배층을 구성했을 것으로 생각은 되고 있지만, 그러나 역시, 그에 대한 확정적인 증거 같은 것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당시 주(周)를 중심으로 했던 중원(中原)제국(諸國)들로부터 그들은 만족(蠻族-野蠻族)으로 멸시를 받았지만<당시의 존왕양이(尊王攘夷)란 말의 이(夷)는 바로 그 초(楚)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높은 문명을 누리고 있었으며, 주(周)가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쯤에는 주(周)의 사서(史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을 정도였고, 그리하여 또 웅역(熊繹)이란 사람이 성왕(成王)으로부터 자작(子爵)에 봉해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 뒤에 주(周)의 소왕(昭王)으로부터 공격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물리쳤고, 그러자 소왕(昭王)은 그곳에서 전사(戰死)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그 후, 6대째 웅거(熊渠)의 시대에 스스로 왕호(王號)를 칭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또 바로 그때, 주(周)에서는 포악한 여왕(厲王)이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서워서 왕호(王號)를 폐지했다.
그리고 또 17대째 웅통(熊通)의 시대에는 후작국(侯爵國)이었던 수(隋)를 멸했으며, 그것을 이유로 해서 또 주(周)에 승작(陞爵)을 요구했지만, 그러나 주(周)가 그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다시 왕(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그로써 웅통(熊通)은 초(楚)의 초대(初代) 왕이 되었고, 그 이름을 무왕(武王)이라고 자칭했다.
그런데 그 후, 제6대째의 장왕(莊王)의 시대에는 특히 강세(强勢)를 보였고, 그리하여 진(陣)과 정(鄭) 등은 초(楚)의 속국이 되었으며, 이어서 진(晋)의 대군마저 필(邲)에서 물리쳤던 것 등으로 해서 춘추오패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또, 그 시대에 초(楚)는 오(吳)와 동맹도 맺었다.
그러나 또, 제11대째 평왕(平王)의 시대에 오자서(伍子胥)가 국외로 도망갔던 일로 해서, 그 오자서(伍子胥)의 보좌(補佐)을 받았던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군대에 의해서 수도가 함락되었고, 그로써 또 일시 초(楚)는 멸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지만, 하지만 또 그때, 신포서(申包胥)의 필사적인 간청으로 진(秦)에서 원군을 보내왔기 때문에, 그래서 소왕(昭王)은 겨우 복귀할 수가 있었다.
⊙ 영왕(靈王-?부터 기원전 529년. 재위는 기원전 540년부터 기원전 529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제27대 왕으로 이름은 웅위(熊圍), 그러나 후에 웅건(熊虔)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그는 부(父) 제24대 공왕(共王)의 차남이었고, 공왕(共王) 사후 왕위는 장자였던 강왕(康王)이 이어받았으나, 하지만 또 그 강왕(康王)마저 사망하자 강왕(康王)의 아들 겹오(郟敖)가 그 뒤를 이었다. 그래서 웅위(熊圍)는 재상이 되어서 겹오(郟敖)를 보좌하게 되었는데, 하지만 또 기원전 541년에 웅위(熊圍)는 겹오(郟敖)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 후, 그는 주로 세력 확대에 매진했고, 그러면서 제후들과 회맹해서 그들과 함께 오(吳)를 토벌했다. 그 후, 기원전 533년에는 진(陳)을, 그리고 또 기원전 531년에는 채(蔡)를 토벌했으며, 그 후에도 서(徐), 그 다음은 또 오(吳)를 다시 토벌하는 등, 초(楚)의 세력 확대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 연이었던 전쟁들 때문에 백성들의 부담은 가중되었고, 그러자 또 당연한 결론으로 백성들은 서서히 영왕(靈王)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그때, 영왕(靈王)의 동생들이었던 웅비(熊比)와 웅흑굉(熊黑肱-子晳) 그리고 웅기질(熊弃疾)은 반대파를 결성했다. 그리고는 기원전 529년에 영왕(靈王)이 군사를 이끌고 수도 영(郢)을 비웠던 사이에 쿠데타를 결행했다. 그 결과 영왕(靈王)의 아들이었던 태자 웅록(熊祿)이 살해되었고, 그러자 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초군(楚軍)은 한꺼번에 붕괴되었으며, 그러자 또 영왕(靈王)도 혼자서 산속을 헤매다가 사망했다. 그러자 그 후, 그 쿠데타를 주도했던 웅비(熊比)가 왕위를 이었으나, 그러나 또 그에 불만을 가졌던 웅기질(熊弃疾)이 다시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형들을 자살로 내몰고는 스스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평왕(平王)이었다.
○ 평왕(平王-?부터 기원전 516년. 재위는 기원전 528년부터 기원전 516년)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왕이었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웅(熊), 휘(諱)는 기질(弃疾-그러나 즉위 후에는 居로 개명함)이었다. 그리고 공왕(共王)의 5남이었으며, 강왕(康王)과 영왕(靈王) 그리고 왕비(王比)의 아우였다. 그리고 일찍이 공자(公子) 기질(弃疾)은 형이었던 영왕(靈王)의 명을 받아서 진(陳)과 채(蔡)를 멸하고는 그곳에다 진공(陳公)과 채공(蔡公)을 올렸다.
참고: 기질(弃疾)은 초왕(楚王)에 즉위한 후, 최후의 진공(陳公)이었던 애공(哀公)의 손자 혜공(惠公)과 최후의 채공(蔡公)이었던 영후(靈侯)의 아들 평후(平侯)를 각각 국군(國君)으로 옹립해서 양국을 부흥(復興)시켰다.
그리고 또 제(齊)에서 악명(惡名)을 떨쳤고, 나중에 오(吳)로 망명했던 경봉(慶封)을 공격해서 처형했던 등, 영왕(靈王)의 수족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 나중은 전술(前述)대로였으며, 그 결과 태자는 살해되었고, 웅비(熊比)가 왕위에 올랐으며, 그러자 또 기질(弃疾)은 웅비(熊比)에 의해서 사마(司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바로 그 직후였던 5월 18일에 기질(弃疾)은 <왕(靈王)이 귀국해서 신왕(新王)을 처형할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시내에 흘렸고, 그것으로 왕비(王比)와 영윤(令尹)이었던 자석(子晳)을 자살로 내몰았으며, 그 다음날이었던 5월 19일에 스스로 초왕(楚王)에 즉위했다.(한편, 靈王도 같은 날 자살함) 그렇게 해서 왕이 되었던 기질(弃疾) 즉, 평왕(平王)은 기원전 523년에 태자(太子)였던 건(建)의 비(妃)를 진(秦)으로부터 맞이하기 위해서 소부(少傅)였던 비무기(費無忌)를 진(秦)으로 보냈다.
참고: 소부(少傅)는 태자의 훈도(訓導)를 맡았던 직명이며, 그 위의 직으로 태부(太傅)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소부(少傅)는 태자의 부(富驕)교육을 맡았음.
그런데 그 비무기(費無忌)는 진(秦)의 공녀(公女-公主)가 아주 미인이란 것을 알게 되자 평왕(平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그녀의 미색이 너무도 아름다우니 그녀는 차라리 왕께서 취하시고, 태자에게는 다른 여자를 주심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러자 평왕(平王)은 그 뜻을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녀는 결국 태자의 비(妃)가 되지 못하고 평왕(平王)의 측실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또 그 후, 비무기(費無忌)는 평왕(平王)으로부터 깊은 신뢰를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비무기(費無忌)는 그 일로 해서 자신이 태자(太子)에게 미움을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 평왕(平王)에게 오히려 태자를 참언(讒言)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자 또 평왕(平王)은 비무기(費無忌)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는 태자를 국경의 경비 명목으로 성부(城父)란 곳으로 멀리 보내버렸다. 하지만 비무기(費無忌)는 그 후에도 태자를 모함(謀陷)했고, 그때의 이유는 또 태자가 자신의 비(妃)가 될 사람을 아버지에 빼앗긴 것에 한을 품고는 모반을 기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또 그때, 평왕(平王)은 태부(太傅)였던 오사(伍奢)도 태자 감독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을 해서 잡아들였고, 거기에다 오사(伍奢)의 아들이었던 오상(伍尙)과 <오자서(伍子胥)>까지 잡아들여서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또 <오자서(伍子胥)>는 그에 응하지 않고 오(吳)로 도망을 쳐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 오사(伍奢)와 오상(伍尙)만이 처형되었다. 그러자 또 그것이 <오자서(伍子胥)>로 하여금 복수심을 품게 만들었고, 그 후에 평왕(平王)도 점점 더 신망(信望)을 잃어갔으며, 오(吳)의 침공도 받게 되자 국력 또한 쇠약해져갔다. 그리하여 또 기원전 516년 6월에 평왕(平王)은 결국 병몰(病沒)했으며, 그러자 또 그 후에 오(吳)가 초(楚)의 수도 영(郢)을 점령했을 때, 오자서(伍子胥)는 그 평왕(平王)의 무덤을 파헤쳐서 그의 유체를 꺼낸 후에 300번도 더 넘게 채찍으로 때렸다고 한다.
⊙ 비무기(費無忌-?부터 기원전 515년)는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신하로 평왕(平王)을 모셨으며, 간신(奸臣)으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최초에 평왕(平王)의 태자 건(建)의 소부(少傅)를 맡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는 평왕(平王)의 내용과 같으며, 그러자 또 태자 건(建)은 사전에 평왕(平王)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송(宋)으로 망명했다. 그러자 또 비무기(費無忌)는 오(伍) 씨(氏) 일가(一家)들이 자신에게 보복할 것을 두려워해서 참언(讒言)으로 그 오(伍) 씨(氏)들마저 모함했으며, 그 결과로 오사(伍奢)와 오상(伍尙)이 처형되었다. 그 후, 비무기(費無忌)는 평왕(平王)의 최측근으로 위세를 떨쳤으며, 그런 권력으로 자신의 정적(政敵)들을 차례로 자살로 몰아갔다거나, 극완(郤宛) 등을 살해했다. 그러자 그 후, 초(楚)는 점점 더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 들어갔고, 그러자 또 주변국에서 그 초(楚)를 노리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오자서(伍子胥)가 도망을 갔던 오(吳)가 침략을 해왔기 때문에, 초(楚)의 백성들은 모두 그 비무기(費無忌)를 원망했다. 그 후, 기원전 516년에 평왕(平王)이 죽자 아직 어렸던 소왕(昭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백성들은 마치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비무기(費無忌)를 원망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그러자 또 그 다음해 영윤(令尹)이었던 자상(子常)이 백성들을 달랜다는 의미로 그 비무기(費無忌)를 처형하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했다.
⊙ 오사(伍奢-?부터 기원전 522년)는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신하였고, 오자서(伍子胥)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장왕(莊王)을 모셨던 오거(伍擧)의 아들이었고, 초(楚)의 건계(乾溪-현재의 安徽省 亳州市 利辛県) 출신이었다. 그리고 또 그는 초(楚) 평왕(平王)의 태자를 가르치는 태부(太傅)를 맡았으며, 그 오(伍) 씨(氏) 일족(一族)은 장왕(莊王)의 시대부터 초(楚)의 녹을 먹었던 명족(名族)으로 영향력도 아주 강했다. 그런데 그는 평소 비무기(費無忌)와 사이가 아주 나빴으며, 그래서 비무기(費無忌)가 참언(讒言)을 해서 그는 평왕(平王)에게 붙들려갔다. 그러자 그는 평왕(平王)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태자가 모반을 꾀했다는 것은 뿌리도 이빨도 없는 것인데, 어째서 아무것도 아닌 자의 참언(讒言)을 믿고 태자를 의심하시는 것입니까?> 하지만 평왕(平王)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 그는 투옥되었다. 거기다 또 평왕(平王)과 비무기(費無忌)는 그 오사(伍奢)의 두 아들까지도 처리할 목적으로 그 두 아들에게 <너희들이 오면 너희들의 아버지는 풀려날 것이다>라고 거짓말을 전했는데, 그러자 또 오사(伍奢)가 그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간청했다. <상(伍尙)은 효자이기 때문에 나 때문에라도 올 것이지만, 그러나 자서(伍子胥)는 지모(智謀)가 있기 때문에 와봐야 죽을 것을 뻔히 알고 있을 것이므로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오. 그러므로 죄(罪)는 나 혼자만 받게 해주시오.> 하지만 평왕(平王)은 그 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는 이미 전술(前述)했던 대로이다. 그러자 또 오사(伍奢)는 죽기 전에 오자서(伍子胥)가 도망을 갔던 것을 두고 이렇게 단언(斷言)했다고 한다. <그 아이는 필시 이 초(楚)에 화(禍)가 될 것이다>
○ 오자서(伍子胥-?부터 기원전 484년)는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였고, 군인이었다. 그리고 휘(諱)는 원(員)이었고, 자(字)은 자서(子胥)였다. 그는 또 오(吳)에서 벼슬을 했으며, 그리하여 그 오(吳)의 약진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후에 오왕(吳王)에게 소외당했으며, 최후에는 주살(誅殺)되었다.
오자서(伍子胥)의 아버지 오사(伍奢)는 당시 직언청렴(直言淸廉)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며, 오자서(伍子胥)는 9척(尺-약 2미터 정도)이 넘는 신장에다 성격도 아주 혈기왕성했던 의기(意氣)로운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앞서 기술했던 대로 태자였던 건(建)의 모반사건에 휘말리면서 그 오(伍) 씨(氏)들은 수난을 당했고,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복수를 맹세하고는 태자 건(建)과 함께 정(鄭)으로 도망을 쳤다. 하지만 그 후, 태자 건(建)은 그 정(鄭)에서 진(晋)을 부추겨서 정(鄭)에 반역을 꾀하려다가 오히려 역으로 살해당했고,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그 건(建)의 아들이었던 공손승(公孫勝-白公勝)과 함께 오(吳)로 다시 도망을 쳤다. 그런데 또 그 여정(旅程)이란 것이 참으로 과혹(過酷)했던 것으로, 그 두 사람은 구걸을 해서 목숨을 연명했으며, 그러자 또 병이 들어서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초(楚)와 오(吳) 사이에 있던 양자강(揚子江) 주변에서 추격자들이 따라왔을 때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어부에게 부탁을 해서 몸을 숨겼다고도 하며, 그렇게 해서 무사히 그 강을 건넌 후에는 그가 가지고 있던 백금(百金)정도의 칼을 그 뱃삯으로 지불하려하자 그 어부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가버렸다고 한다. <내가 일부러 만금(萬金-伍子胥의 목에 걸렸던 상금)을 버렸는데, 그깟 백금(百金)을 가지겠소!>
그렇게 해서 겨우 오(吳)로 들어갔던 두 사람은 일단 송자광(公子光)이란 사람 밑으로 들어갔으며, 그 후에 오자서(伍子胥)는 오왕(吳王) 요(僚)와 공자(公子) 광(光)에게 초(楚)를 칠 것을 진언(進言)했다. 하지만 요(僚)는 그 말을 받아들였지만, 공자(公子) 광(光)은 아직은 시기상조라면서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공자(公子)광(光)에게 야심이 있음을 알아차리고는 전제(專諸)란 자를 추천했다. 그리고 또 그는 조만간 그 오(吳)에 내분이 생길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때부터 때를 기다리면서 근신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얼마 후에 오(吳)의 주력군이 정벌을 나갔던 초(楚)에서 발이 묶인 채로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되자, 오자서(伍子胥)는 그때서야 공자(公子)광(光)에게 <때가 왔다>라고 말을 하면서 쿠데타의 시기를 일러주었다. 그러자 또 공자(公子)광(光)은 오왕(吳王)요(僚)를 연석(宴席)에 초대했고, 그러자 또 오왕(吳王)요(僚)는 불안한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그러나 그때는 국내에서 동요(動搖)가 일어날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경비병과 호위부대를 데리고 그 연석에 참석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도중에 전제(專諸)가 결사(決死)의 각오로 오왕(吳王)요(僚)를 베었으며, 그 결과 그것이 쿠데타의 단서가 되어서 공자(公子)광(光)은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합려(闔閭)>였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오자서(伍子胥)를 자신의 측근으로 두었는데, 그리하여 오자서(伍子胥)는 마침내 초(楚) 인접국 왕의 측근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오자서(伍子胥)는 <손무(孫武-孫子)>와 함께 합려(闔閭)를 보좌했으며, 오(吳) 국내(國內)의 정비(整備)에 진력(盡力)을 다했다. 그리고 초(楚)에 대한 공격 준비가 충분해질 때까지 합려(闔閭)를 진정시켰으며, 그러다가 이윽고 기원전 506년에 그는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해서 출병했고, 그 결과로 초(楚)의 수도 영(郢)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앞에서 밝혔던 대로 평왕(平王)의 무덤을 파헤쳐서는 그 사체에 300여 차례나 채찍을 가했으며 그것으로 자신의 한(恨)을 풀었다는데, 그런데 그것이 또 <시체에 채찍을 가하다>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또 그때, 그의 오랜 친구였던 <신포서(申包胥)>가 그런 그의 행동을 보고는 너무 심했다고 나무라자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해는 졌는데 아직도 갈 길은 멀고, 그러니 도행해서 역시(倒行逆施-次例를 거꾸로 施行한다는 뜻으로, 곧 道理에 順從하지 않고 일을 行하며, 常道를 벗어나서 일을 억지로 한다는 것을 말함)했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또 그 속뜻은 <(그때)자신의 나이가 이미 많아져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정상적인 절차 등을 밟을 여유가 없었다 또는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라는 것이었고, 그것은 또 <그동안 가슴에 품어 왔던 한(恨)을 다만, 비상식적으로 풀었던 것뿐이었다>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또 그때, 그러니까 오(吳)가 초(楚)의 수도를 함락했을 때, 초왕(楚王-廢태자의 異母弟였던 昭王)은 이미 도망을 가고 없었다. 그리고는 어느 지방에서 병사들을 다시 모아서는 재흥(再興)을 기도하려 했기 때문에, 그래서 철저한 수색을 실시했지만 그러나 그를 좀처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또 그 사이에 월(越)이 오(吳)를 침공해왔기 때문에, 그래서 초(楚)는 병(兵)을 둘로 나눌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다 또 신포서(申包胥)가 진(秦)에 원군을 청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 형세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초(楚)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었지만, 그런데 또 그때, 장군이었고, 합려(闔閭)의 제부(弟夫)였던 개(槪)가 마음대로 오(吳)로 귀국해서는 오왕(吳王)의 자리에 올라버렸다. 그러자 합려(闔閭)는 하는 수 없이 초(楚)에서 철수해서 우선 그 개(槪)의 일부터 처리했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해서 오(吳)로 다시 돌아갔던 오자서(伍子胥)는 계속해서 합려(闔閭)를 보좌하는 일에 열중했으며, 그리하여 결국 그 오(吳)를 천하제일의 강국으로 만드는 데까지 성공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재차 초(楚)를 쳤다든지, 중원(中原)을 노렸다든지 했지만, 그러나 그 전에 오자서(伍子胥)는 인접국이던 월(越)부터 공략할 것을 진언했고, 그것은 또 그 월(越)과 오(吳) 양방 간에 중원(中原)을 노리기에는 상대가 서로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또 당시, 그 월(越)은 소국(小國)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오(吳)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러나 또 그때는 급속하게 국력을 신장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장래의 화근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그런 진언을 올렸던 것이었다. 그러자 합려(闔閭)도 그 뜻을 받아들였고, 그리고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월(越)로 향했다. 하지만 또 당시, 월왕(越王)이었던 <구천(句踐)>의 군사(軍師) <범려(范蠡)>의 계책에 말려서 오(吳)는 월(越)에 대패(大敗)했고, 거기에다 합려(闔閭)는 월(越)의 장군이었던 영고부(靈姑孚)가 쏘았던 화살에 한쪽 다리를 부상당했으며, 그런데 그것이 또 마침 파상풍(破傷風)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래서 합려(闔閭)는 결국 자리에 눕는 신세까지 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그 후, 합려(闔閭)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고, 그러자 또 공자(公子)들 중에서 <부차(夫差)>란 자가 오자서(伍子胥)를 방문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그 후계자로 추천해줄 것을 오자서(伍子胥)에게 부탁했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합려(闔閭)를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태자는 부차(夫差) 공자(公子)로 함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자 합려(闔閭)가 또 이렇게 말을 했다. <부차(夫差)은 박정(薄情)해서 군주의 그릇으로는 부족하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가 이렇게 말을 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주위에서 우리들이 보살펴주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급한 것은 하루라도 빨리 후계자를 명확히 해두는 것이며, 그것으로 권력투쟁이 일어나는 것을 사전에 막는 일입니다> 그러자 또 합려(闔閭)가 이렇게 말을 하면서 오자서(伍子胥)에게 그 일을 일임했다. <당신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뜻대로 하시오!>
참고: 1. 원래 합려(闔閭)에게는 요절(夭折)했던 장남 태자가 있었다고 하며(史記索隱-竹書紀年에서는 태자 波 그리고 左傳에서는 태자 終纍), 그리고 3남으로 공자(公子) 자산(子山)이 있었다.(左傳)
2.사기색은(史記索隱)은 당(唐)나라 때 사마정(司馬貞)이 사기(史記)에다 주석(注釋)을 붙인 주석서로, 30권으로 되어 있으며, 사기(史記) 3가(家) 주(注)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선행(先行) 제서(諸書)들을 인용해서 음운(音韻)과 지리(地理) 그리고 인물(人物)들을 아주 우수하게 고증(考證)했던 것이다.
3. 그리고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위의 사마(司馬)정(貞)이 자주 인용했던 책이었으며, 중국의 편년체(編年體) 역사서이다. 그리고 또 그 내용은 중국의 전설시대부터 위(魏)나라의 양왕(襄王)까지 저술했던 것이지만, 그러나 작자는 불명임.
아무튼, 그런 다음 합려(闔閭)는 부차(夫差)를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너는 구천(句踐)이 나의 원수라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저 오자서(伍子胥)를 잘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자 또 부차(夫差)도 이렇게 말을 했다. <앞으로 3년 이내에 반드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합려(闔閭)가 세상을 떠났고, 그러자 부차(夫差)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자 오자서(伍子胥)는 그때부터 부차(夫差)를 모시게 되었으며, 다시 구천(句踐)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준비를 차근차근히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그에 두려움을 느끼고는 기원전 494년에 먼저 오(吳)를 공격했지만, 그러나 그때 이미 준비가 끝나 있었던 오(吳)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월(越)은 대패했으며, 그러자 또 오(吳)는 그대로 월(越)로 쳐들어갔으며, 그러자 또 구천(句踐)은 월(越)의 수도 부근에 있던 회계산(會稽山)까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또 구천(句踐)은 사자를 보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했다. <월(越)은 이제부터 오(吳)의 속국이 될 것이며, 저 구천(句踐)은 이제부터 오왕(吳王) 님의 노예가 되려 하오니 제발 저의 뜻을 받아주십시오> 그러자 부차(夫差)는 몹시 흡족해서 구천(句踐)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했는데, 그러자 또 그때, 오자서(伍子胥)가 나서서 이렇게 강력하게 주장했다. <구천(句踐)은 명군(名君)이라는 소문이 자자하고, 그 주위에는 또 많은 능신(能臣)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살려두면 분명히 나중에 화(禍)가 될 것이니 지금 죽이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말을 듣지 않았고, 그래서 구천(句踐)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 후, 월(越)은 오(吳)에 공순하면서 뇌물을 바치는 등, 오(吳)의 경계를 조금씩 풀어갔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계속해서 월(越)을 경계하라고 진언을 올렸지만, 그러나 부차(夫差)는 오히려 이제는 다 잡은 토끼에 관심 없다는 듯 중원(中原) 쪽으로만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때부터 그 두 사람의 사이에도 조금씩 틈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다 또 그때, 월(越)의 <범려(范蠡)>가 밀정(密偵)을 보내서 오자서(伍子胥)의 중상(中傷)을 부차(夫差)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또 부차(夫差)에게는 <서시(西施)>라는 미녀를 보내서 당시, 점점 더 심해졌던 월(越)에 대한 경계를 풀 수 있도록 획책했다.
그러자 그 후, 부차(夫差)는 북으로, 특히 제(齊) 쪽으로 출진을 계속했으며, 그 때문에 영토는 조금씩 넓어지기는 했어도, 그러나 그 반대로 국력은 급속하게 소모되어 갔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제(齊)는 피부(皮膚)의 병(病)이요, 월(越)은 내장(內臟)의 병입니다(눈앞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피부의 병인 제(齊)의 내란(內亂)이지만, 그러나 정말로 신경을 써야하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는 내장의 병 즉, 월(越)의 존재라는 의미)>라고 말을 했지만, 그러나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또 그때, 그 두 사람은 언성까지 높여가면서 아주 격한 언쟁까지도 벌였던 모양이었는데, 그런데다 또 당시, 재상(宰相)이었던 <백비(伯嚭)>란 자가 실직(實直-정직하고 성실함)했던 오자서(伍子胥)를 쫓아내려고 생각하고 있었고, 거기에다 그는 월(越)로부터 뇌물까지 받아 챙긴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여러 가지의 수단으로 오자서(伍子胥)와 부차(夫差)의 사이를 이간질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자 또 오자서(伍子胥)는 이제 멀지 않아서 오(吳)는 월(越)에 정복당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래서 또 어느 때 제(齊)에 사자로 갔을 때, 자신의 아들을 그 제(齊)에 맡기고 왔을 정도였다.
참고: 춘추좌씨전의 노(魯) 소공(昭公-기원전 522년) 20년의 <楚・伍 氏의 계보>에 의하면, 오자서(伍子胥)의 아들 이름은 오풍(伍豊)이라고 했고, 증조부의 이름은 오참(伍參), 조부의 이름은 오거(伍擧)인데 그 별명은 오초(伍椒)라고 했다. 그리고 숙부의 이름은 오초명(伍椒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튼 또, 그러나 자신은 오(吳)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오(吳)로 다시 돌아갔는데, 그런데 또 그 일이 문제가 되어서 오자서(伍子胥)는 오(吳)로 귀국한 후 부차(夫差)로부터 검을 받아서 자결을 명받았다. 그러자 또 그때, 오자서(伍子胥)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제가 죽으면 저의 묘 위에 가래나무(梓-一說에는 예덕나무)를 심으십시오. 나중에 그것을 사용해서 (夫差의) 관을 만들 수 있게요. 그리고 저의 눈은 빼내서 동남(東南-越 방향)쪽 성문 위에 두십시오. 나중에 월(越)이 오(吳)를 멸망시키는 것을 잘 볼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런 다음, 오자서(伍子胥)는 부차(夫差) 앞에서 자결했다. 그런데 또 바로 그 말이 부차(夫差)의 심기를 상하게 해서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의 무덤을 만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그 유체를 말가죽으로 만든 부대자루에다 넣어서 강에다 던져버리게 했다. 그러자 또 백성들은 모두 오자서(伍子胥)를 동정했고, 그 물가에 그를 위한 사당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덧붙여서, 그랬던 일이 나중에 <단오(端午)>의 풍습과 중국에서의 <액땜풍습>으로 이어졌다고 하며, 그래서 또 사람들이 강에 공양물을 흘려보내는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단, 현재는 굴원의 고사에서 단오의 유래를 찾기도 함)
아무튼 또, 오자서(伍子胥)가 죽은 후에 오(吳)에서는 더 이상 월(越)을 경계하는 자가 없어졌고, 그래서 또 당시 오(吳)는 파멸의 길을 자청해서 가고 있는 꼴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오(吳)는 오자서(伍子胥)의 예언대로 그로부터 얼마 후에 월(越)에 정복당했으며, 부차(夫差)는 겨우 생명만 건진 채로 변경(邊境)으로 귀향을 가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는 자결했다고 한다. <오자서(伍子胥)가 옳았고 나는 어리석었다. 그러므로 나는 저승에서도 그를 볼 면목이 없기 때문에, 내가 죽거든 제발 내 머리를 베어서 보자기에 싸주길 바란다> 그리고 또 그 후에 백비(伯嚭)도 구천(句踐)에게 잡혀서 악신(惡臣)의 표본으로 효수(梟首)되었다.
○ 신포서(申包胥)는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정치가였고, 성(姓)은 미(羋), 씨(氏)는 왕손(王孫) 또는 봉지(封地) 명으로부터 신(申)이었고, 휘(諱)는 포서(包胥) 그래서 왕손포서(王孫包胥)라고도 불렸던 인물이었다. 그는 또 평왕(平王), 소왕(昭王), 혜왕(惠王) 3대를 섬겼으며, 오(吳)의 첨병(尖兵)이라고 할 수 있었던 오자서(伍子胥)에 버금갔던 인물이었다.
그는 오자서(伍子胥)가 초(楚)를 침공해서 수도를 함락시켰을 때, 진(秦)으로 원군을 청하러 떠났다. 그리고는 애공(哀公)에게 사정을 했지만, 그러나 애공(哀公)은 소왕(昭王)의 어머니가 진(秦)의 공주(公主)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절했다. 그러자 신포서(申包胥)는 크게 탄식하고는 7일7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물마저 마시지 않은 채로 울고 또 울었다. 그러자 드디어 그것이 애공(哀公)의 마음을 움직였던지 애공(哀公)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초(楚)는 원래 무도(無道)의 나라이거늘, 이런 충신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므로 초(楚)를 그냥 멸하게 두는 것은 옳지가 않다!> 그리고는 전차(戰車) 500을 내주었고, 그리하여 기원전 505년에 진(秦)의 원군은 오(吳)를 파(破)했으며, 그리고 또 그때, 오(吳)에서는 내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 초(楚)는 오(吳)를 물리치는데 성공을 했다.
그 후, 소왕(昭王)은 신포서(申包胥)에게 봉읍(封邑) 5000호(戶)란 대봉(大封)을 내렸지만, 그러나 정작 신포서(申包胥)는 초(楚)에 선조들의 분묘(墳墓)들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또 자신이 그것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서 그것을 거절했다.
그 후, 기원전 476년에 신포서(申包胥)는 혜왕(惠王) 어머니의 아버지 즉, 외할아버지였던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사자의 자격으로 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또 그때는 월(越)이 오(吳)를 멸하기 바로 직전이었는데(吳의 멸망은 기원전 473년), 그러자 구천(句踐)은 신포서(申包胥)에게 오(吳)를 멸할 계책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신포서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전쟁(戰爭)은 화(和)를 제1로 하고, 그 다음이 인(仁)이며, 맨 나중이 바로 용(勇)입니다> 그러자 구천(句踐)은 그 계책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오(吳)를 멸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또 그것으로 신포서(申包胥)는 자신의 조국을 유린(蹂躪)했고, 또한 친구였던 오자서(伍子胥)를 철저히 이용한 후에 말살(抹殺)했던 구적(仇敵) 오(吳)를 멸하는데 일조(一助)했다.
<楚 계속...>